목천자전(穆天子傳)-2.
The Tale of King Mu, Son of Heaven
앞서 “신시 (神市) 환국 (桓國)시대 의 첫 장 서론”에서는 사기 대완열전을 근거로 첫 아사달이 어디였나를 찾아 보았다.
사마천은 서쪽에 다녀온 장건(張騫)의 말을 인용하여 “곤륜, 서왕무”하는 이름이 허황된 낭설이라 일축했다. 뒤에 한서 서역전에는 천산 남북로를 자세히 설명했다. 북로에 있어야 하는 오손국 (烏孫國)의 지명을 모호하게 기술 했다. 사실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두를 돌아 보니,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는 목천자전에는 “적오씨(赤烏氏) 서왕무, 곤륜” 하는 이름이 나와 있다.
허황된 꿈 예기라고 평하는 의문의 목천자전(穆天子傳)을 다시 한번 살펴 본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은 257년(晋武帝太康二年)에 황하 북쪽 옛적 목야 (牧野, 坶野) 전쟁이 있었던 지역에서 가까운 현재의 하남성에서 도굴 꾼에의해 발굴되였다. 무덤의 주인은 위(魏)나라 양왕으로 밝혀 졌다. 기록이 대나무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서기년 또는 급총주서”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은 죽서기년에 속한 편명이라 한다. 위나라는 고구려와 같은 맥족이 새운 나라다 .
목천자전의 근간이 되는 죽서기년이 발굴 되기 전에 목천자가 멀리 여행을 했다는 기록이 여러 사서에 실려있다. 좌전에서는 “목왕욕사기심;穆王欲肆其心”이라 했다. 그가 오만 방자하여 천하를 두루돌아 다니려 했다. 그를 알아 차린 제공모부 (祭公謀父)가 기소(祈招)라는 시를 지어 목왕의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고 했다. 그 “야외에서 드리는 제사의 내용은 그윽히 조용하구나. 덕음을 고하는 듯, 내가 왕으로서 해야 할 임무를 옥같이 금과 같이 생각하게 하누나. 백성을 호되게 다루지 말고 포식하거나 술취함이 없이 하네.” 이러한 옛부터 전해 오던 금언을 인용 했고 목왕은 기궁(祇宮)으로 돌아 왔다. 공자 또한 옛 기록(古志)을 인용 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야망을 억제하고 예 인(禮仁)을 찾을수 있다” 고 설명 했다 . 같은 내용이 공자가어 (孔子家語 正論解)에도 실려 있다. 공자와 자혁은 출처를 밝히지 않은 옛기록을 인용 했다.
목천자전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일주서(逸周書, 汲冢周書)에 목왕 서역 여행에 관한 기록이 있다 . 그가 미지의 세계를 다녀온(遭大荒) 이유는 “모구환분재 (謀救患分災) 즉 재앙과 환란속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위해서 였다. 주공의 예기가 영향력을 잃어 왕제가 쇠약해 저서 제공(祭公)을 임명하고, 직방을 설치 하고, 사기와 대광을 편찬했다.” 즉 국가 안녕을 위한 국책으로 “국왕이 전 각료를 인솔하고 원정을 다녀 온 사상 최대의 행사”였다는 뜻이라 본다.
이러한 주왕조 최대의 국책 사업을 실행 하기에 앞서 왕은 궁정에 모아 놓은 “삼노, 삼사, 대부 전 각료”를 상대로 그의 국가번영 을 위한 필수적 국책을 발표 했다. 미지의 세계를 다녀오는 어려운 일이 꼭 필요 하다고 설득시켜 동의를 얻었다. 국론을 모아 먼 여행을 떠났지만, 오랜 시간을 여행하는 동안 어려움이 많이 생겨, 수석 보좌관인 제공모부(祭公謀父)가 간하여 목왕은 돌아 왔다. 그 사정을 읊은 시문이 소아 기소(圻招)라 했다. 그러나 시경에는 그 이름이 붙은 시문은 없다. 가장 비슷한 시문이 시경 소아 ( 詩經 小雅 祈父之什)에 실린 기부 (祈父)라 본다 .
기부 (祈父)에 실린 마지막 시귀 “有母之尸饔”을 한시 외전에는 증자의 말을 인용하여 효(孝)를 설명 하면서 “有母之尸雍”라 했다. 시인은 우왕(大禹, Wu the Great)와 같은 융족 이라 한다. 그러면 이 시문은 한글 어순으로 풀이해야 한다 . 기부(祈父)는 야외에서 지내는 제사(祭事,郊祭)를 맡아보던 사람이다. 그를 단(亶, 旦)이라 했다. 융족 부락의 지도자로 천신께 제사 드리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다.
이를 풀이 하면 아래와 같은 뜻이다.
詩經 小雅 祈父:
祈父、予王之爪牙。
胡轉予于恤、靡所止居
祈父、予王之爪士。
胡轉予于恤、靡所底止
祈父、亶不聰。
胡轉予于恤、有母之尸饔. 《詩》曰:「有母之尸雍。」
기부, 나는 왕의 친위병 지도자로, (북쪽으로는)호의 영역을 돌며 갖은 고생 다시키고, (서쪽) 모해 (말갈)사람들이 사는 집에 머무렀다.
기부, 나는 왕의 친우병 지도자로, (북쪽으로는)호의 영역을 돌며 갖은 고생 다시키고, (서쪽) 모해 (말갈)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기부 단이 똑똑치 못하여, 호의 땅을 돌며 온갗 고생 다시키고, (돌아오니) 보이는 것은 어머니의 시신을 껴안고 있는 모습 뿐.
모시정의에서는 기부가 한 말을 꾸어와(責)서 선왕을 깨우처준(刺) 사실의 기록이라 했다. 기부가 “저는 왕을 보호해야 할 책임자요 (予王之爪牙), 호인이 사는 곳을 돌아 오며 괴로움을 주고 (胡轉予于恤), 모해인 들이 사는 곳 (靡所)에 까지 갔다”는 시구는 목왕 대황 여행을 읊은 시문이 분명하다. 죽서기년에는 목천자전과 좌전에 실린 인명과 지명이 실려 있다. 기소 (祈招)를 올렸다는 제공 (祭公)이 서역 여행에 참가 했었다. 전적으로 제례만을 맡아 보던 직책(祭公)에 옳은 상소문을 지여 올렸다 하여 그를 제문공(祭文公)이라 했다. 목왕은 제위 11년부터 여행에 나서 염택 (鹽澤, 蒲昌海) 즉 로프 누어(Lop Nur) 를 관람하고, 곤륜구에 이르러 국가 번영을 하느님께 기도했다.
서왕무를 만나 보고 18년에 기궁으로 돌아 왔다. 여행 동반자 제공(祭文公)이 죽고 삼년후에 좌사융부(左史戎夫)에게 명하여 여행기를 쓰라 했다. 주 무왕 때와 같이 사관은 하우씨의 후손인 (상형 글자를 사용 하던) 융(戎)족이 맡아 보았다 . 죽서기년 기록에 곤륜 (昆侖)서왕(西王)이란 칭호가 목왕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좌전에는 아예 곤륜 (昆侖) 서왕(西王)이란 칭호가 없다. 일주서에는 곤륜 (昆侖)이란 말은 있지만 서왕(西王)이란 칭호가 없다. 서왕무(西王毋)가 다스리던 땅을 가차전주 하면 서하 (西夏)가 된다. 서하는 제물 이 풍부하지만 상벌을 뚜렸하게 지키지 않아 외방인이 자주 들어왔고, 병력을 양성하여 수비하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고 했다 . 서왕무(西王毋)가 다스리던 나라는 낙원 이였다는 표현이다.
여기에 실린 지(底)자는 현 시경에 실린 지(氐)자와 같은 뜻이다. 아니면 어느 하 쪽이 동음 이자로 바꾸어 적었다. 삼국지 왜인전에 나오는 저강(氐羌)의 시원지에 목왕 일행이 다녀왔다.
목왕이 제위14년에 염택을 지났고, 17년에 곤륜구에서 떠나 같은 해에 융(戎)을 태원으로 몰아 버렸다. 그 다음해 봄에 수도(祇宮)에 정착 했다 . 이 기록을 근거로 “호경에서 곤륜구(昆侖丘) 까지의 거리”를 계산 할수 있다. 목왕 일행은 융족의 ㅈ신화를 잘 아는 제공 (祭公)의 도움으로 장건(張騫)과는 달리 천산 북로를 택하여 곤륜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갔던 곳이 알타이 산맥에 있는 칸 탱그리(Khan Tengri, 天山)가 될수는 없다. 가장 멀리 갔었다고 할수 있는 곳이 우름치다. 가능성이 높은 곳이 투루판 시 (Turpan, 吐鲁番市)라고 본다. 그 곳에서 제공모부 (祭公謀父)의 조언을 받아 드려 귀국 했다.
열자 주목왕편에는 목왕의 여행기를 더 신비경으로 모사 했다. 금인 (金人)이란 우상으로 나타나는 환웅천왕을 화인 (化人)이라 했다. 목왕이 떠나는 날 서왕무와 둘이 곤륜구에 올라가 요지(瑤池, 天池) 북쪽에서 헌작을 하고 석별 했다.수경주에서는 목천자전에 나오는 황제궁이 아누달궁(阿耨達宮) 풍융(豐隆)이 천둥 번개를 타고 내려온 뇌공(雷公)이라 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곤륜 (昆侖), 서왕무(西王毋)이란”칭호는 가차 전주한 글자가 분명하다. 전설과 신화를 근거를 믿고 있던 그의 제사장을 여행 동반자로 선택 하여 목왕이 살던 곳의 북쪽과 서쪽에 큰 관심을 두고 여행을 하고 돌아 왔다. 사관이 목왕의 여행기를 그가 살 당시에 사용 되던 글자로 남겼다 . 여기에 고문(古文)의 내용이라 한 문구가 여러번 나온다. 사기 대완열전에 언급한 하본기(夏本紀)를 뜻한 듯 하다. 이를 고문상서 또는 고문이라 했다. 좌전에 공자와 제공모부 (祭公謀父)가 인용 했다는 옛 기록이 “하본기(夏本紀)의 내용”이라 본다. 그러한 고문(古文)은 융족이 사용 했고 이를 중국기록에 남겼다. 그들의 지도자는 재(宰, 帝, 壇君, 禮君)의 성이 계/해(系, xì/ jì/ ha /傒, 㠱, 曁, 契, 冀)씨 였다 .
목왕 일행은 처음에 북쪽으로 갔다. 이를 다른 사료에서는 전국을 순회 했다고 했다. 신화를 믿고 있던 제공(祭公)이 수행하여 길을 떠났다. 도중에 하백 하종( 河伯. 河宗氏)의 인도를 받았다. 스키타이 (Scythian)을 뜻하는 호 (胡)자, 무속을 관장 하던 사람을 뜻하는 연씨(閼氏, shaman)가 몇 곳에 보인다. 제위 13년에출발, 15년에 염택에 이르렀고, 곤륜구에는17년에 이르러 서왕무의 영접을 받았다 했다. 사마천이 남긴 의문의 편명 “하본기(夏本紀)와 관계되는 서하씨(西夏氏) 하후개(夏后啟)하는 하자”가 보인다. 하(夏)자는 해 (解, 懈, 奚)자
와 같이 해(sun, sunray, 太陽)의 사음자(假借)다. 그 글자 밑에 글자는 지워(畟) 버렸다 . 이 글자를 때로는 동음 이자, “시 사 하 (豕, 肆,何, 河)자로도 기록” 했다.
사서에는 하본기(夏本紀) 란 이름이 있지만 아무도 그 내용에 관해 설명이 없다. 글자의 뜻을 보면 하(夏, xià jiǎ/ haa/ hǎ) 라 발음 하는 지도자의 가첩(家牒) 즉 족보의 초기 인 보첩이라 본다. 먼 훗날, 같은 지역에 군림한 서주 5대 목왕 (穆王)이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소왕(昭王)이 전사하여50세에 왕위에 올랐다 . 좌전에서 풀이 하듯 방자한 사람이 아니였다. 일주서 서문에 실린 내용이 옳다고 본다.전설이냐 아니면 사실이냐 하는 그 내용의 근거를 확인 하고 구환분재(救患分災)를 위하여 천단에서 하늘에 바치는 제사를 지내려고 먼 여정에 나섰다. 유가에서는 그가 쓸모 없는 설화에 매혹되여 국고를 낭비하고 국정을 잘 돌보지 않았다 하나, 일주서에는 그의 업적을 높히 평가 하였다.
서쪽에 사서는 적조 사람의 극진히 대접을 받고, 길일을 택하여 곤륜이 산다는 계곡에 올라가 황제의 궁을 관람하고,후세의 번영을 위한 풍륭의 장례를 치루고 향불을 올렸다. 적조씨가 사는 곳은 미인이 많고, 보옥이 나는 땅이다 .
이 적조씨 (赤烏氏)가 살던 곳을 한서에서는 적현 (赤縣)이라 했고, 그들을 통전에서 오손 (烏孫) 즉 스키타이 (Scythian)가 살던 현 감숙성 서북 쪽 돈황(敦煌) 일대다 . 옛 지도자가 살던 곳이 패허가 되여 초막에서 쉬고, 중벽의 대를 만들었다.
목천자전, 사기 대완열전, 한서 서역전등 중국제일 서쪽을 기록한 사료에 나오는 여러 부족 국가 이름 들은 모두 밝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암흙 시대에 희미한 빛 즉 불빗 “가믐 현”을 찾던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원조와 같은 혈통이라 본다. 이 개념에서 “검다 (黑, hēi/희다) 누루 황(黃; huáng) 하늘이 훤(桓)히 튼다, 아침 햇살(旦)이 밝게 (白,bái)비친 하다”하는 글자가 나타 났고, 멀리 지평선(一) 위에 높이 하늘에 떠 있는 이러한 세 물체를 일월성(日月星) 신 (辰)이라 했다. 신(辰)을 가차전주 하여 신(神,申, 愼, 信, 伸, 辛, 娠, 晉, 秦)으로 사용 했다. 토속 신앙에 나타나는 삼신(三神) 개념이 여기서 시작 되였다고 본다. 이를 희다 (白)는 글자로 기록 했고 사음하여 백 백(百)자로 바꾸어 쓰기도 했다. 이 개념이 서양에서 예복을 흑색(黑), 중앙 아시아 에서는 황색 (黃), 한민족을 아무런 색을 드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힌색을 써 왔기에 맥의(白衣)민족이라 한다 .
서역 (西域)은 총령(蔥嶺, Pamir Mountains, or the Pamirs) 즉 파미르 고원 동쪽에 국한 되였다.염택 (鹽澤Lop Nur)을 포창해 (蒲昌海)라고도 한다. 그 곳에서 옥문 양관 (玉門、陽關) 까지 300여리다 . 옥문관을 떠나 서역으로 두 길이 있다. 남쪽에 있는 높은 산 북쪽을 따라 파하(波河)서쪽 사차(莎車, Shache /Yarkant County )에 이르는 길이 남쪽 길이다. 이길을 따라 서쪽으로 총령을 너머가면 대월씨(大月氏) 안식(安息)국에 이른다. 서역의 북쪽산을 따라 서쪽으로 소륵(疏勒, Shule County)에 이르는 길이 북쪽 길이다. 이를 따라 총령을 너머가면 대완 강거 엄체 언지(大宛、康居、奄蔡 焉耆)에 이른다 . 사기에 없던 언지(焉耆) 란 새로운 지명이 나온다. 한 나라 이후의 사서에도 나온다. 총령 동쪽에 있던 서역의 한 나라가 분명하다. 금성(金城)은 사마천 이전에 편찬된 관자,한비자, 한시외전, 신서등에 나온다. 중국의 서쪽 요새 밖에 강(羗, 烏孫, 戎,匈奴)이 지키고 있던 천연적 조건이 수비 하기에 좋은 난공 견고불락 (堅固不落)의 요새를 뜻했다. 옛 성인이 그곳에 살았다 한다 .
서주의 세력이 약해지자 경수 위수 북쪽에 창궐하여 진시황이 이들을 막으려고 장성을 싸았다 . 이를 사기에서 호(胡貉,東胡)를 막으려고 성을 싸았다고 했다.
삼국지에는 위약 서강전을 인용하여 서역의 문물을 소개 했다. 한무제 때에 길이 뚤렸고 점차로 길이 둘이 되였다가 삼국시대에는 씰크로드 길이 셋이 되였다 한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동한 초기에는 흉노가 서쪽으로 도망하여 금성에 숨었다.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이 여러 곳에 흐터저 살았지만 부여 동부선비와 같다”고 했다 . 만리장성 서쪽 끝에서 북쪽 몽고 초원이 그들의 활동 무대였다는 뜻이다.
당대의 통전 오손 (烏孫)편에는 사기 한서 삼국지에 실린 내용을 종합하여 그들의 시말을 잘 설명했다. 오손은 서역 여러 부족국가 중에서 형모가 두드러지게 달드다. 푸른 눈에 노랑머리 채격이 크고 턱수염이 많아 원숭이와 같은 사람들이다. 오늘의 호인(胡人)이 그들과 같다. 한나라 시절에 크게 패하였다 한 때 단석괴가 다시 모아 세력을 떨첬지만 후위시절(386-534년)에 타림분지에서 번창 했던 스키타이 인이 중원 세력에 밀려 결국 파미르 고원 서쪽으로 사라젔다고 했다 .
그들은 돈황에서 크게 번창하고 하느님을 극진히 모셨다. 흉노 보다는 하 왕조를 새운 “우왕, 고조선 사람들”과 더 가까운 호(胡)라 불리우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동으로 옮겨 하(夏) 왕조를 새웠고 그들이 쓰던 예기(禮器)를 호궤(胡簋)라 한다 . 하(夏)왕조의 시조 대우모(大禹謨)가 “맥족의 왕중왕”이란 뜻이고 그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단군왕검 (壇君王儉)이시다. 산서성 해지 서북연안에서 동양 최초로 제정일치의 중책을 맡은 통치자가 나타났다. 그가 단군왕검이다. 그의 혈통은 스키타이 인(Scythians)으로 서양세계에 “독일어로 차라투스트라 (Zarathustra) 영어로는 조로아스터 (Zoroaster)로 알려진” 종교 또는 그 종교의 지도자와 같다.그 사람들이 불을 신성시 하는 개념 또한 진 (辰)이 밝히는 물제라 진이 불(火)이다 하는 개념에서 나왔다고 본다. 삼국지 임아국(臨兒國)편에는노자(老子)가 서역천축국에 가서 호를 가르첬다 .
의문에 싸인 목천자전(穆天子傳)은 “헌장의 서역 여행담을 근거로 작성한 명나라 때의 서유기(西遊記)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역사 소설이다.
주목왕 은 기원전 1000년 경에 해지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믿고 있던 “환웅천왕 신화”를 찾아 보았고 막대한 국력을 드려 국가의 안녕과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실천한 유능한 지도자 였다.
그의 일행은 천산북로를 따라 환운천왕을 신봉하는 부족의 한 지류, 맥족이 동쪽으로 옮겨와 성지(聖地)로 여기던 곤륜구를 찾았다. 그가 찾아가 향불을 올린 곤륜구는 오늘의 중국 서북쪽 오지, 돈황에서 오목사시(Urumqi, 烏魯木齊)에 이르는 곳이라 본다. 좀더 서쪽 천산 (Khan Tengri, 太伯山)과 돈황 사이에 천산삼림공원(天山森林公)이있고, 그 곳에 천지(天池)가 있다. 이를 구글 지도에는
“Tianshan Mountain Heaven Pool Scenic Area 天山天池风景区 天山天池风景区”라 실려 있다. 한 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한만국경에 있는 제일 높은 산을 성역으로 다루듯, 알타이 산령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맥족이 성역으로 다르던 곳이 신강성 우르무치 근교에 있다.
October 5th 2016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