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朝鮮과 夏 商의 관계-4: 결론.
고조선은 산서성 분수 연안에서 탄생 했다고 밝혔다. 중국기로을 보면 그 지역 일대에서 [夏,商, 西周]가 나타났다. 급총죽간 내용은 모두 개(解해, sun, 假 멀 하) 위나라 역사서(蓋魏國之史書)다. 경전 내용이 다르고 (經傳大異)[夏,商의 기록이 섞였다]고 했다 . 사마천 자서와 자서전서에 밝혔다: (하은주) 삼대는 너무멀어 구체적으로 연대를 론할수 없어 가첩과 옛 문헌을 참고로 3대년표를 만들었다 . 그의 선조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 으로 옛 구주땅에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천문학을 당도(唐都)에서 배웠다.
산서성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은 가첩을 만들어 후세에 전했다. 고조선을 세운 사람들은 분수를 따라 내려와 산서성 해지연안 평양에 도읍을 옮겼다가 융禹의 추종자들이 지도권을 탈취하고 같은 곳 “平陽, 平壤, 安邑”에 수도를 정했다. 지도권을 탈취한 자들이 국호를 하후 (國號曰夏后)라 하고 처음으로 요순 임금 때와는 달리 사씨(姓姒氏)란 성에 천자란 칭호를 썼다. 지도자를 잃은 사람들은 명조의 지도를 들고 북으로 올라가 분수가에 정착 했다.
사기 오제본기에 초기국가의 시조를 밝혔다 .
사기 오제본기에 초기국가의 시조를 밝혔다 .
상나라의 시조 설(契, 卨)은 융녀(有娀氏之女)다. 왕검의 어머니와 같은 부족여자 였다. 옛 적에 치수 사업을 하던 일원으로 상에 봉해(封于商) 젔다. 였지만, 상(商)이란 곳이 어디인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그나라의 발생 장소는 분명치 않다. 계(契)가 도읍지로 정한 곳을 글자로 만들라면 “𨜒: 契,阝”자가 된다. 그 글자를 어느 곳에 썼다는 설명이 구구하다 .
계(契)와 발음이 같은 글자를 인용하여 [연나라의 수도 계현(𨜒;燕都)이다. 진어양군(秦漁陽郡)이다.상곡(上谷有𨜒縣)이다]라고 했다.
예기 (禮記)에는 황제의 후손을 계(薊)에 봉했다. 그러나 그 곳이 발해만 서쪽이 아니아 북경 서남쪽이 되는 탁군계현 (涿郡薊縣)이라 했다. 상말 주초를 무대로한 봉신연의(封神演義)에는 요의 후손을 찾아 계(通作薊)에 봉해서 “봉당제지사; 奉唐帝之祀”라, 모셔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다.
상나라의 주류가 되는 부족이 점차적으로 동쪽으로 장소를 옮겼기에 언제 부터를 국가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발생지가 달라진다.
상나라의 발생지는 분수 상류로 고조선의 발생지 아사달(阿斯達)이 있던 장소와 겹친다. 그로 부터 태행산맥 동쪽으로 나와 하북평원에 번성하여 상(商)나라을 세웠다. 기원전 11046년에 하남성(河南省)안양 현(安陽縣) 북서 일대에 있는 은허에서 멸망 했다. 서주의 시조를 계력(季歷)이라 했다. 죽서기년과 사기에는 그의 아버지로 알려진 단부(亶父)가 실렸다.
상나라 말기에 관리였던 고공단부가 은허(殷墟; 기원전 1600년 ~ 1046년)에서 쫓겨나 함곡관 서쪽 치수사업을 하던 옛 구주땅 서남쪽에 정착하여 서주의 시조가 되었다.
오제 본기에는 서주의 건국에 기위주(棄為周)란 문구를 남겼다 . 남의 영역에 들어와 빼앗은 땅에 서주를 세웠다는 뜻이다 . 시경주남과 위풍에 기(棄)자가 보인다. 함곡관 바로 서쪽 늪이 많이 있던 지역을 배를 타고 돌아 다녔다는 뜻이 서주 창립 역사와 두루 주(周)자에 있다 .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 중시조 계력(季歷, 王季) , 그리고 문왕(文王)이 황하를 따라 함곡관을 너머 옛 구주 땅에 정착 했다는 기록이 문왕지습 (詩經文王之什 緜)에 실렸다. 시문에 나오는 강녀(姜女) 주강(周姜)이 국풍 주남 관저(關雎)에 나오는 요요숙녀(窈窕淑女)다 . 분수로 이어지는 강수 (降水, 絳) 연안에 살던 사람을 강씨(江, 姜氏)라 했다. 원주민의 여인을 맞아 급성장 했다하여 시경 문왕지습에 유신(維新)이란 표현을 썼다 . 그러나 같은 지역을 설명한 상서우서 윤정편[尚書 夏書 胤征]에 유신 (維新)이란 표현이 있다. 성탕이 수도를 호로 옮기기전(湯始居亳)에 쓰던 용어를 인용 했다 .
상나라의 발생지: 사마천은 은(殷)이란 글자를 나라이름으로 정했나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같은 나라를 한국에서는 상(商) 부른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금문에 실린 상자를 (시대와 지역에 따라?)모양이 비슷한 여러 글자(商:〔古文〕𡅟𠾃𡂦𠿧𡃬𡄚𠹧𧶜)로 적었다. 뜻과 용도 또한 다양 하다 . 시경 상송 설명(詩·商頌譜)에는 치수 사업에 관여 했던 설이 봉해진 곳이 상(商者, 契所封之地)이라 했다 .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뜻이 다르나 형태가 비슷한 두 글자를 만들어 혼용 했다. 반고가 편술한 백호통론에는“啇”자가 보이나, 한서에는 상(商)자 뿐이다. 공자가어와 新語에는 “商,啇”두 글자가 달리 씌이었다. 풍속통의(風俗通義)는 시경 문구를 인용 하여 두 글자를 다르게 적었다 . 주역에 있다는 “啇”자가 현존하는 주역에는 “商”자로 실렸다 . 성탕이 수도를 밝에서 상으로 옮겼다는 통설과는 달리 개박위상 (改亳為啇)이라 했다. 인용 했던 시경의 글자 또한 다르다. 수도로 알려진 두 글자(亳,啇) 에는 의문이 많다. 다음(Daum)사전 에는 두(商,啇)글자를 완전히 다르게 풀이 했다. 풍속통의에 유흠(劉歆, ?~23년)의 종율서 내용을 인용하여 [상(商)자는 산서성 북쪽 산골에서 어떤 형상을 그려 놓은 금속판에서 나는 소리]란 암시적 기록이 보인다. 시조 설(契)이 칼로 금을 그어 만든 글자 서계(書契)와 같은 뜻이 있다. 사기 정세가에는 안백이 상구로 옮겨 상 (遷閼伯于商丘)이되고 심침이 대하(遷實沈于大夏,主參,唐人是因)로 옮겨 당인의 시조가 되었다고 했다 . 춘추좌전 에는 안백(閼伯)을 도당씨 (陶唐氏)의 화정이라 했다. 도당씨 시절에 나타난 설(契)의 후손이 동서로 갈라져 서쪽에서 대하문자의 전신인 글자가 당(唐)에서 나타났다. 당숙우 (唐叔虞)가 봉해진 곳이다. 그곳 민요가 당풍(唐風)이다.
옥편에는 상을 오음(五音) 중의 하나로 금음(金音)이라 했다 . 예기 월령 (禮記 月令)에는 금음(金音)을 소호 제곡 (帝少皞)의 후손들이 부르던 월령을 가을철 풀벌래 꼬리에서 나는 소리(其蟲毛。其音商)라 했다. 전욱 고양씨 다음으로 등장하는 동이 수령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 상(殷商)과 주(周)의 선조다 . 전욱(顓頊) 고양씨는 함곡관 서쪽에서 나타난 하와 진(夏,秦)의 선조다 .
한곡관 동쪽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부족이 옛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서쪽으로 쫒겨와 섬서성 서안시 일대 기산 밑에 자리를 잡고 원주민의 기술을 이용하여 짧은 기간에 서주의 문화를 이룩했다. 한시외전 (韓詩外傳)에 자하와 공자가 시경주남 관저(關雎)를 논한 내용이 당시 고조선 부여(不由, 蜉蝣.浮游,胡不與之國)의 문화다.
끝
November 16,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