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문자(韓穢文字)가 번체자(繁體字).
시경에는 고조선(朝鮮)이나 하(夏)나라의 민요를 뜻한 글자는 없다. 옛 구주땅에 여러 작은 나라가 나타나 그나라 이름의 국풍이 실렸다. 하나라의 통치 영역은 물론 그 실체에 의문이 많다. 그곳에 피란 왔던 고공단부의 후손이 서주를 세웠다. 맹자는 서주의 영역이 70리 (文王之囿方七十里)라 했다. 고조선의 발생지를 옛 하나라의 영역이라 한다. 그 곳을 서주가 점령 했다. 함곡관 동쪽에서 고조선의 발생지에 들어온 주족이 어떻게 문하를 갑짜기 발달 시켰나 하는 의문는 거론한 자가 없다. 이를 간략히 추려 설명한다.
분수(汾水)를 따라 북쪽으로 분양(汾陽)으로 피란 갔던 고조선 사람들이 번성하여 기원전 1147년(武乙元年)에 다시 옛 구주 땅으로 내려 (邠遷于岐周)왔다 . 분양(汾陽)을 간략한 글자가 “邠”자다. 상나라 무을(商武乙)은 3년 뒤에 수도를 하북으로 옮기고 부하로 있던 주공단 (周公亶)을 고조선 사람들이 자리잡은 기산 일대(岐邑)에 봉하여 고조선 세력을 제앞 하려 했다. 고조선 원주민과 치열한 전쟁을 했다 .
강희자전 상(商)자 풀이에 (本作𧶜。俗作啇 , 非. 刻也)라 했다 . 상의 속자(啇:dí, dik1)는 빛을 뜻한 북적 (北狄, 赤狄)을 [뜻과 음을 이리저리 뒤섞어 만든] 다른 글자다. 그 부족의 여자가 낳은 아들을 적(嫡) 자라 한다. 후에는 “邠:周太王國”, 즉 고공담부가 세운 나라 로 풀이 한다. 고조선의 기술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한시외전에 있다 :
(**졸역이라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은 분들의 수정 또는 조언을 바랍니다.) 관저(關雎)의 출처를 모시정의에는 (岐山之陽)이라 했고, 산해경과 수경주에는 황하가 태행산맥을 나오는 입구 일대라고 했다 .
관저사람은 우러러 보기를 하늘 같이 높히 하고 굽힐 때는 땅에 닿도록 (仰則天,俯則地)한다. 유유명명(幽幽冥冥) 함이 덕지소장(德之所藏)하고, 분분불불(紛紛沸沸)함이 도지소행(道之所行) 이라, 마치 신룡의 변화와 같도다(如神龍變化). 배배문장(斐斐文章)하니, 즉 글자를 아름답게 잘새겨 놓으니 참으로 위대 하도다(大哉!) 관저의 도(關雎之道也)여. 만물이 의지 하는 곳(萬物之所繫)이요,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群生之所懸命也) 건 곳이야. 빙빙익익(馮馮翊翊)하니, 즉 사방으로 자유롭게 날아 다니니,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무사부복(無思不服, 俯伏)이야. 두려움이 없어. 하락출도서 (河洛出圖書) 한 곳이고 기린과 봉황이 나도는 곳이다. 부유관저의 도 (不由關雎之道)와 법칙은 관저의 수장 해유(奚由)에 이르러 크게 번창 했다. …. 공자가 극찬하는 예기를 듣고 자하가 감탄하여 이르기를 [위대하구나! 현악기를 벗 삼는 (琴瑟友之) 관저 사람들이 과연 천지의 초석 (關雎乃天地之基也)이구나. (그래서) 시문 마지막 구절에 종고를 다루는 (왕실)의 즐거움(鍾鼓樂之) 라 했구나]
배배문장(斐斐文章)이라한 문구가 시경 대아 역박(詩經 大雅 棫樸)편에 시릴 “追琢其章。金玉其相” 란 문구와 일치 한다. 배배문장(斐斐文章)이라한 문구가 시경 대아 역박(詩經 大雅 棫樸)편에 시릴 “追琢其章。金玉其相” 란 문구와 일치 한다. 문왕이 유목민(木,牧, 牟) 의 영역에 들어와 원주민을 이용하여 문화 발전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는 뜻이 시문 편명(棫樸) 이름이다 . 배(斐)자는 빛을 타고 내려온 선손 백익(伯益之後)이 만든 글자란 뜻이 있다 . 서주 문왕(昌:周文王, 기원전 1152년~1056년)이 유목민(木,牧, 牟) 의 영역에 들어와 원주민을 이용하여 문화 발전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는 뜻을 읊은 시문이다. 혈통을 같이한 노나라릐 민궁(閟宮)에도 고공단부가 기산 밑에 들어가 자리잡은 때 부터 실로 상나라의 세력을 꺾었다고 찬미했다 . 시경대아 문왕지습에 유신(維新)이란 문구가 나타난다 . 일본의 명치유신과 한국에서 나타난 유신정책의 시초다.
요조숙녀(窈窕淑女)가、현악기를 벗삼아(琴瑟友之)하는 문구는 그녀가 귀한 집안의 딸임을 뜻한다. 시경 소아 초자(楚茨)에 종고기계(鍾鼓既戒)란 문구가 있다 . 종고(鍾鼓)란 궁정음악(Chamber music)에 쓰던 악기다.
서주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甫)가 고조선 땅에 들어와 미인계 (愛厥妃)를 썼다는 기록이 맹자 양해왕 편에 있다 . 이는 동쪽 (河東)을 정벌하여 그곳 지도자의 여자를 마음대로 했다 (東征, 綏厥士女)는 문구와 일치 한다 . 원주민(厥:夏曰獯鬻殷曰鬼方周曰獫狁)의 아릿다운 여자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주(周)족이 그런 나뿐짓을 했다는 기록을 남긴 맹자는 만장편에 [백익 밑에 있었던 우(益之相禹也)가 치수사업을 하던 융우가 신임을 잃어(禹而德衰) 정권이 바뀐 사건]을 합리화 했다 .
공자가 혼란한 곳을 떠나 평화로운 땅에 가서 살고 싶다한 東夷의 땅이 산서성에 있던 고조선 영역을 의미 했다. 초씨역림에 기자가 갔다는 살기 좋은이다:“朝鮮之地,箕伯所保。宜人宜家,業處子孫,求事大喜”.
사기에: (단군왕검. 동이부락 수령 )백익이 우의 아들 개에게 양위하고 살았다는 기산지양 이다(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
고조선 창립 부터 춘추시대 까지도 조선이 산서성에 있었다.
관저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앞섰다는 증거가 당서에 보인다:
후진(後晉, 936년~946년) 시대 유후(劉昫)가 남긴 구당서 (舊唐書) 에는 공자의 시문 해석을 인용하여 후비자 인륜지본 (后妃者人倫之本)요, 또한 리란지단(理亂之端)이라 했다. 하상주(夏商周)의 흥망성쇠에 여자가 관여 했던 점을 강조 하고, 국풍 대소아가 나타 났던 시기를 문명의 시작(關雎 合 雅, 始號文明. 傳云「號,呼」)이라고 했다 . 같은 내용이 태평광기에도 실렸다 . 원주민을 써서 서주의 문화가 싹트던 성강지치(成康之治) 시대의 마지막 강왕의 부인이 애첩을 시기하여 서주가 쇠약해 졌다. 이러한 내용을 양자법언에는 원주민 해(解, 奚, 亥)를 음이 같은 시(習)로 바꾸어 시치 (習治) 또는 시란 (習亂)이라고 했다 . 하여 관저숙녀(關雎淑女)가 악녀로 변신하고 관저지도(關雎之道)가 관저자란(關雎之亂)으로 둔갑 했다.
산서성 원주민 예맥족을 잡아다 그 지역에 전해 오던 전설을 글자로 남겼다. 노예(隸)가 글자를 만들어 이를 예서(隸書)라 한다. 그를 현제에는 번체자(繁體字)라고도 한다. 한예가 번체자의 창시자다. 그들이 만든 글자라 한예문자(韓穢文字)라 이름함이 타당하다.
끝. 다음에 계속
November 14,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