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경로 끝:
결론:
필자는 <한국 고대사는 중국문헌에 찾아야 한다>는 대전제(大前提)를, 여러 단계의 소전제를 증명 하는 경로를 지나, 중국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서 찾았다.
태백산(太伯山)으로 기록된 우랄 알타이 산맥 동남부에서 출발한 유목민이 평원을 지나 내몽고 동남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소금을 찾아 흐터졋다. 한 부류는 동남 쪽으로 나와 발해-요동만 해안에서 찾았고, 다른 한부족은 태행산맥 서남 쪽으로 분수를 내려와 산서성 해지에서 소금을 구했다. 이곳이 동양 문화의 발생지인 홍수로 범람하던 구주 땅이다. 치수사업에 성공한 부족이 해지 연안에 자리를 잡고 처음으로 지역을 다스리는 왕중왕을 뽑았다. 치수사업을 하려면 지리지형을 그린 약도가 필요 했다. 이 약도가 산해경(山海經, 山河經)의 최초본 이다. 동이 수령 (東夷部落的首領) 백익 (伯益)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가 제사권과 통치권을 겸한 단군왕검으로 나타났다. 그가 통치하던 부족 연맹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산해경 해내경에 나오는 천독(有國名曰朝鮮, 天毒)이란 글자는 옛적에 해(解,奚, 亥,흐어) 라고 읽든 글자와 讀音이 같은 “𣫴;圭,母, xié/시애/쉐” 라고 읽는 글자를 모양이 비슷한 독(毒)자로 바꾸었다. 그가 순임금으로 부터 사제권을 위임 받고 융우로 부터 통치권을 물러 받고 조선(朝鮮)을 선포한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다.
글자 속에 역사가 숨어 있다는 소전제로 <예맥(濊貊)이란 글자에 상고사가 숨어 있다. 또다른 소제로 시경에 남아 있다. 춘추 삼저에 남아 있다. 경외서에 보인다는 등등> 여러 사료를 들어 증명 했으나,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언어의 뜻과 음을 이리저리 뒤섞어 오늘의 상형글자(韓字, 漢字)로 기록된 고전 풀이에는 이견이 많아 여러 사람들에게 인식 시키기가 어려웠다. 고조선은 “숙신, 부여(浮游, 蜉蝣), 현도(玄都),구려, 구리”등 여러 부족의 연맹체라 그 하나하나의 이름자를 달리 기록 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 사람들에게 설득 하려면 이론이 많아 이를 극복 하고자 누구나가 인정 할수 있는 “ 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경로를 추적 하였다. 사료는 “https://ctext.org/zh”에서 찾았다. 이번에 찾아 보니까 전에 보이지 않았던 예맥을 옛적에 조선이라 불렀다“古稱朝鮮” 란 문구가 한전(漢典)에 시렸다. 멀리서 “ Internet Digital Library”를 사용한 단점과 약점의 실예가 들어 났다.
지도권 이양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백익을 살해하고 한(夏) 나라를 세웠다. 천자(天子)의 통치권은 세습이라는 신흥 유가의 주장에서, 신원이 불확실한 제계(帝啟)를 우왕의 아들(子啟)이라 하여 찬탈한 통치권을 합리화 했다.
맹자가 제자 만장으로 부터 (萬章問曰) 항간에 사람들이 얘기 하기를 융우의 덕이 쇠퇴하여 (至於禹而德衰) 통치권 이양에 잡읍이 있다는 질문에; <신원이 분명치 않은 개가 우왕의 아들 이란 주장>을 발표한 때부터 논란이 많았다[1].
서진 초기인279년(太康元年)에 급총죽간 (汲冢竹簡)이 발굴 되었다. 백익을 추모한 사람들이 291년에 백충장군 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를 깎아 세우고 조당 (堂廟)을 지었다. 초씨역림에서 해지 연안 맹조의 지도(鳴條之圖)를 갖고 북쪽으로 도망 가서 흉노의 선우(單于)가 되였다. 이러한 사료를 찾기전에는 다재다능한 동이수령 백익(伯益)이 단군왕검이였다고 결론을 지을수 있는 사료가 흡족치 못했다. 단군왕검을 따르던 후손들이 산서성 서남쪽 해지 연안을 떠나 어떻게 옮겨 왔나를 “朝鮮”이란 논쟁의 여지가 적은 글자를 표적물(Marker)로 추적 하여 요하 동쪽 요양에서 고구려에 흡수 되었다고 밝혔다.
모든 중국기록을 살펴 보면, 이성개가 한반도에 수도를 정하고 국호를 조선(朝鲜) 이라 하기전에는 조선이란 이름이 가장 동쪽에 나타난 곳이 오늘의 요양으로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平壤)이다. 이곳을 진수는 공손연이 최후로 싸우다 잡힌 양평성(襄平城)이라 그가 살던 당시 고조선의 주류 였던 숙신씨가 옛적 부터 살던 곳이라 금조선(今朝鲜)이라 하고 수도를 은미하게 골도(骨都)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群長安皆曰”를 삼국지 한전에 “”臣智或加優呼라 했다. 대륙백제 영역에서 쓰던 이름이다. 고구려 편에 실린 문구 “達賈出奇掩擊, 拔檀盧城,殺酋長”에 “拔檀盧城”란 뜻은 <발조선(拔朝鮮)의 단로성 또는 발기 (拔奇)의 후손, 고추가 박위거(古雛加駮位居)가 살던 단로성>으로 풀이 함이 옳다[2]. 이곳을 금조선(今朝鲜)이라 했다. 이는 “今使譯所通三十國” 문구의 금(今)자와 같은 곳이다. 모구검이 고구려를 침략 했던 때에 비류수(沸流水) 연안과 양맥곡 (梁貊谷)에서 크게 싸웠다는 곳이다.
이렇게 중국 문헌에는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이 마지막 까지 만주 땅에 있었다.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또하나의 낭설은 기자 동래설에 유래 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할때 고조선(古朝鮮,東胡)의 왕이 었던 부(否)가 죽어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否死,其子準立)는 문구에서 글자와 지역을 바꾸어 준이 위만의 급습에 피하여 몇몇 측근 보좌관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나와 배를 타고 떠나 도착한 마한 땅이 한반도 평양이라 한다. 옛 북관 말에 독음이 같은 “그, 기” 글자로 바꾸어, 그 사람의 아들(其子)을 기준 (箕準)이라 기록 했다. 아들 준과 같이 도망을 못가고 만주에 남았던 일족은 모성한씨(因冒姓韓氏)를 성으로 했다. 바다로 도망 갔던(準王海中)사람들이 얼마 동안은 남만주 동서 해안 사람들, 즉 부여와 조선(不與朝鮮)과는 서로 왕래가 (相往來)있었다. 그 후에 마한 땅에가서 왕이 되었다는 곳을 대동강 연안으로 비정 하여 낭랑 평양이라 한다. 조선왕 비의 아들 준(準)의 성씨는 유목민의 피를 이어 받은 한씨(韓氏) 로 기록 해야 마땅 하다. 기자가 조선 땅으로 도망 갔다는 기록이 있을 뿐,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라고 하는 나라는 없었다.
청나라 거륭황제 (清乾隆三十八年:1773年) 때에 편술된 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에는 조선사략 (朝鮮史畧)과 조선국기(朝鮮國記)의 내용이 실려있다[3]:
조선사략(朝鮮史畧)은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고도 한다. 저자 이름과 편찬 시기가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은 단군이래 고려 말까지 역사기록이 있었다. 이성개가 뒤를 이었다. 그 나라는 국란으로 기록이 상실 되였으나 단군왕검 (檀君名王儉)이 요임금시절에 세운 조선이 한반도 평양에 수도 (都平壤)를 정했다> 란 문구를 실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왈 “都王儉李曰。地名” 하는 문구의 이씨도 한국 사람인듯 하다. 중국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칙명에 따라 편찬된 전당시(全唐詩)에는 상서대전에서와 같이 조선(朝鮮)의 위치를 갈석산 일대로 읊었다[4]. 같은 시대에 편술된 강희자전에 조선기사(朝鮮紀事)기록에 조선왕자 이름이 나오고, 조선국지(朝鮮國志)에는 경상도에 옥원군이 있다[5]. 전한 지리지에 위만의 도읍지를 강물로 둘러 싸인 요충지라 하여 요양을 뜻했다[6]. 그러면서 화식지를 인용하여 조선을 요하 서쪽으로 기록 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선학들은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덭(trap,꾀임수,꼼수)에 걸려 왕검성 (王儉城)이 평양에 있었다고 자충수를 놓았다. 이씨 왕조 후기에 도참설이 흥행 하여 민간 신앙으로 변모 했다. 그들의 경전으로 취급 되던 정감록(鄭鑑錄) 에는 남쪽에 조선 (南朝鮮) 이라는 낙원경 (樂園境) 있다고 기술 되었다.
끝
January 26, 2019
[1]. 孟子 萬章上:萬章問曰:「人有言:『至於禹而德衰,不傳於賢而傳於子。』有諸?.孟子曰:「否,不然也。 天與賢,則與賢;天與子,則與子。禹崩。三年之喪畢,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朝覲訟獄者不之益而之啟,曰:『吾君之子也。』謳歌者不謳歌益而謳歌啟,曰:『吾君之子也。』丹朱之不肖,舜之子亦不肖。舜之相堯,禹之相舜也,歷年多,施澤於民久。啟賢,能敬承繼禹之道。益之相禹也,歷年少,施澤於民未久。
[2].臣等謹案朝鮮史略十二卷一名東國史略不著撰人名氏乃明時.古紀云禮君與堯並立至 商式丁八年為神 壽四千十八 .檀君名王儉古紀云禮君與堯並立至商式丁八年為神 壽四千十八然 權近應制詩曰; 傳世不知幾,厯年會過千。蓋傳世厯年,非檀君壽也. 箕子:周武王克商,箕子率中國人五千入朝鮮,武王因封之,都平壤,是爲後朝鮮。教民禮儀、田蠶、織作
[3]. 三國志 高句麗傳: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
[4].全唐詩: 妾家臨渭北,春夢著遼西。何苦朝鮮郡,年年事鼓鼙.碣石海北門,餘寇惟朝鮮。離離一寒騎,嫋嫋馳白天. 尚書大傳:箕子不忍周之釋,走之朝鮮。因以朝鮮封之。(註)朝鮮,今樂浪郡。
[5].《朝鮮國志》慶尚道有𣶠原郡。或云音漆. 《朝鮮紀事》朝鮮王子義昌君玒
[6].《前漢·地理志》遼東郡險瀆。《註》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名
《史記·貨殖傳》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註》綰者,統其要津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