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New Year!
I would like to present a special report at the end of year 2018.
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경로-7: 제 환공의 고조선 친입.
齊桓公伐山戎 孤竹 新考.
유령의 나라 고죽국이 고조선 영역에 있었다. 이를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 본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선왕 중흥이란 20여년 간이 지난 후에는 옛 고조선 땅에 살던 려민 (黎民,九黎,句麗)들이 강성 하여 서주는 동쪽으로 쫓겨 와 춘추 전국 시대로 너머가게 되였다. 이들이 제후국 진(晉) 땅의 영역, 즉 태행산맥이 흐르는 산서성과 하북성을 한조위(韓、趙、魏) 세 가문이 나누어 삼가분진 (三家分晉) 이란 현상이 나타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 되었다[1].
춘추시대 (春秋時代)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옆 까지는 만주 서남쪽에 수도를 두고 있던 고조선 사람들(胡,東胡)이 화북평원을 비롯하여 산동성에서 발해만 연안으로 이어지는 교류 통로를 따라 통상을 하면서 고조선 문명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제 환공(桓公:재위: 기원전 685년 -기원전 643년) 초기까지 만 해도 태행산맥 동쪽 연안에 근거를 두고 활동 하던 고조선 사람들 산융이 황하 이북 중원을 석권하였다. 그는 옛적에 자기를 죽이려고 활을 쏘았던 관중 (夷吾:기원전 725-645년)을 제상으로 맞아 드려 20여년 간 산융과 싸운 끝에 재위 25년(僖公九年,기원전 651년) 에는 하남성 상구 서쪽 규구(葵丘) 에서 춘추오패의 첫 패자로 인정 받았다[2]. 그를 도아 주던 제상 관중(夷吾)이 죽기 10년 전이다[3]. 제 환공 이후에도 중원에 남아 활동하던 고조선 사람들의 세력을 꺾은 지도자를 모두 춘추 오패라 한다. 고조선의 지도자를 천자 또는 천왕이라 하다가 두번쪠 오패가 된 진 문공(晋文公, 재위: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 이후 부터는 보잘것 없는 고조선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비하 하여 선우(鮮虞)라 했다[4].
진 문공이 천자를 오라 했다 (晋文公實召天子) 는 춘추의 기록을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그때 까지도 고조선 지도자를 천자라고 불렀다는 증거다. 그 후 기원전 544년(襄公二十九年)에는 제나라 고자(齊高止)가 북연으로 도망을 갔고, 530년(昭公十二年)는 제나라 군사가 북연 (北燕)에 갔다[5]. 춘추시대에는 <북연, 제, 노, 산융이 모두 가까이>에 있었다. 중원에 풍파가 일었다.
사기등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는 연(燕)이 산융의 친입을 받아 제 환공의 도움으로 산융을 몰아 내고 고죽국을 정벌했다[6]. 당시 제(齊)나라에는 외교 수완에 뛰어난 해우유비(海于/於有蔽)는 사람이 있었다. 제상 관중은 해우유비(海于有蔽)를 사신으로 여러 나라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 환공에게 권유했다. 해우유비(海于有蔽)의 도움인가, 제 환공은 여러 제후의 허락을 받아 고조선 친입을 위한 군수 물자를 확보하여 기원전664년에는 실천에 옮겼다. 춘추좌전을 보면, 옛적에는 연(燕)이라 하던 이름이 노양공 (魯襄公; 기원전575-542년)시대 부터는 북연(北燕)이라고 나온다. 주 왕실과 함께 협곡관을 나온 연(南燕)이 다시 북쪽으로 올라 왔다는 증거다[7].
제(齊)의 북쪽에 있던 연(北燕)이 늘 산융의 친입을 받아 기원전 664년(莊公: 三十年)에 노나라와 모의 했다[8].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과 제(齊)와의 물물 교류를 보면 제 환공이 관자의 계획에 따라 여러 제후들과 공모하여 연나라에 들어온 산융을 치고 더 올라가서 발조선의 본거지 까지 치려는 계획을 세웠다[9]. 관자에 그 상황이 잘 설명되여 있다[10]. 제환공 5년에 산융을 치려고 (五年諸侯附狄人伐, 기원전 680년) 모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자 패자가 되기 이전 20여년간에 나타난 사건을 시대순이 분명치 않게 기록했다.
언제나 중국 역사기록은 언제나 춘추필법에 따라 은미 하게 기록했다.
“북주후(北州侯) 즉 발조선 (發朝鮮)의 지도자는 위로는 천자의 명을 듣지 않고, 아래로는 제후 들에게 무례하다. 북주후를 주살해야 한다고 청하니, 제후들이 허락하여 북쪽 영지를 벌하고,부지산 아래서 고국군을 살해 하고, 산융을 만났다. 관중에게 묻기를 어떻게 할것인가? 관중이 답하기를 군(君)께서는 제후들을 교육 시키시고…..” 라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산융을 치러 갔다면서 부영지와 고죽군은 처벌 하고, 그 원흉인 산융을 만나서는 마땅히 사생 결판을 냈서야 할터인데,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제 환공은 겁이나 활 한번 쏴보지도 못하고 도망 왔다.
환공이 고죽군을 처형하고 계속 전진하여 산융이 사는 산채 “비이지계(卑耳之谿) 십여리 밖에 이르러 갑까기 정지 했다. 활을 달라하여 겨누더니 갑까기 활을 내리고 좌우를 돌아 보며 하는 말이 “너희들 저 앞에 사람을 못 보았느냐” 모두들 예기 하기를 “못 보았습니다”하니, 환공이 말하기를 “사기부제호 事其不濟乎, 어떻게 건너겠나? 내가 대혹(大惑)이라 했다. 장척되는 인물이 저기 있다. 관을 벗어 옆에 끼고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말을 달려 도망치며 왜첬다. 어떻게 건너나? 내가 욕심이 컸서, 정신이 나갔지. 저 건너 그들이 있지 않느냐?”
혼비 백산이 되여 정신을 못차리는 환공을 관중이 달랬다:
“신이 듣기로는 산에 오르면 귀신이 장척이나 되는 작은 아이로 보입니다. 패왕의 군이 흥할 징조 입니다. 산에 올라 귀신을 보고 말을 달려 질주 하셨스니 바른 길을 택하셨습니다.” 팔을 걷어 올리고 계곡 여울을 건너 비이지곡에 이르러 길을 아는 사람을 만나 그의 조언으로 큰 강물을 건넜다. 도망 나온 환공은 말에서 내려 제상 관중이 탄 말 앞에 서서 간곡히 사죄했다. 설원(說苑 辨物)에서도 말 앞에 앉자서 사죄 했다고 한다: “仲父之聖至若此 .公拜管仲於馬前曰”
이 역사적 전대 미문의 희극을 그린 사료가 설원, 예문류취,태평어람등 여러 곳에 글자가 약간 다르게 실려 있고 풀이도 아전인수격으로 다양 하다. 금루자에서는 이를 깨끗하게 풀이 하여 제환공이 그의 제상 관중을 성인(仲父聖人也)이라 했다[11].
도망 올 때의 사정은 한비자와 사기태공세가 에도 실려 있다[12]: “길을 잃어 늙은 말(老馬)의 도움을 받았고, 마실 물이 없어 개미의 습성을 이용했다.” 사마천은 이를 은미 하게 “연후(燕莊公)가 고맙다고 따라와 국경을 넘기에 도랑을 파서 막고 돌려 보냈다”하는 은유법으로 기록 했다.
제 환공이 도망 온 비이지계 (卑耳之谿/溪)은 어디인가?
설원에서는 그들이 고생 했던 큰 강물(其大濟)을 요수(曰遼水)라 했다[13]. 수경주에서는 비이지계가 진시황 때 상곡군(上谷郡)이고 그들이 건넜다는 강은 래이수의 지류 청리수(㶟水:清夷水)즉 하북성(河北省) 에 있는 영정하(永定河) 라고 한다[14]. 일설에는 요서 영지현을 지나던 유수(濡水) 즉 역수 (易水)라 한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연의 장성이 서쪽 상곡에서 부터 시작” 했다. 앞장에서 추리한 한후가 살던 한성(溥彼韓城)은 하북성 보정시 탁주 (河北省保定市涿州)에 있었다 는 설과 일치한다. 제 경공이 공자님을 니계 (尼谿)에 봉하겠다고 했던 곳이다. 공자님은 위나라(衞)의 제상이였던 자공(子貢)이 제정적으로 잠시 연(孔子燕居)에 살았다. 연은 남연 아니면 북연(北燕)으로 위나라의 영역이었다[15]. 당시 사제간의 대화에는 많은 시문을 인용했다. 그러나 많은 시귀가 현존하는 시경에는 없다.
북주 (北州)가 어디 였나를 찾아 보면 우(禹)왕의 후손인 흉노(匈奴, 葷粥, 山戎)가 북쪽으로 도망한 부족이라고 풀이 했다[16]. 옛부터 논란이 되는 사기 삼왕세가 편 (史記 世家 三王世家)에는 한무제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가 제위 6년에 자신의 거주지를 보호해 달라고 세 왕자를 한나라의 변방에 봉했다. 그에 나타난 연왕의 봉지가 옛 하우씨 후손들이 활동하던 북쪽 지역(葷粥徙域, 北州以綏)이고, 제왕은 산동성, 광릉왕은 양자강 하류 였다. 연왕의 봉지가 보정시 일대 였다. 연의 장성은 오늘의 만리장성 남쪽에 있었다. 연태자 진시황의 추격에 쫒겨 산해관 일대 요동에 배후진을 쳤다.
하북성에서 발해만 연안을 따라 산동 반도 북쪽에 고조선 사람들이 살았다.
이 역사적 사건 기록에 나오는 지명이 ‘그 지역 사람들이 하던 말을 이리저리 뒤바꾸어 적은 여러 한자’가 나온다. 천자의 명을 따르지도 않는다고 하는 북주군 모(北州侯莫; mò mù )는 앞에서 예기한 “중국9주 이외의 또 다른 주”란 뜻으로 북쪽에 있다는 제도 (帝都)에 사는 “소우는 소리로 기록 되는 맥 (貊)족” 즉 발조선 (發朝鮮)의 지도자를 의미 했다. 계(谿)자와 같이 어찌해 (奚:xī xí /hei)변이 붙은 글자는 모두 다 앞에서 ‘요동돼지 우화’를 말씀 드릴 때 나온 해/희(hei, 奚)라 발음 하던 부족들이 살던 곳을 의미 한다. 이때에 “진나라 하나라(秦夏)에 살던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중화문명의 핵심이 되는 자들의 직계 후손이 산서성 서쪽에서 태행산맥 동쪽 연안에 와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북주후를 만나서는 도망오고 말았다. 정벌하러 떠날 때의 기고 만장하던 좌세는 어디 가고, 춘추오패의 첫 쩨로 알려진 황제 (皇帝)에 버금가던 제 환공이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그의 제상 관중에게 코가 땅에 닫도록 사과 하는 장면은, 세계 역사상 어디서도 볼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제상 관중 (管仲)은 묘책을 내어 실신한 환공을 부추겨 강물을 건넜다. 환공이 돌아 올 때 건넜던 강이 난하(灤河) 였다고 영문본에 실었지만 이느 사료를 잘못 인용하여 그릇된 풀이를 했다. 그 때 요수(遼水)는 해하 (海河)의 남쪽 지류다[17]. 사마천은 한국 발음으로 “해와 하”를 혼용 했다. 한원 해지 일대에 살던 사람들 (해,奚, 亥, 解)이 동쪽으로 와 살던 지역의 강이라 하여 해하 (海/解河)라고 불렀고, 그 강물이 중국에서는 멀리 떠러진 곳에 있는 강이라 하여 요수 (遼水)라 했다. 그 동쪽이 후한시대 이전의 요동(遼東) 이다. 하북성 서남쪽에서 올라온 연(燕)나라가 설치했다는 장성이 상곡에서 시작하여 해하(海河) 연안에서 끝났다.
북쪽에 있는 발조선이 조공은 바치지 않고 ‘그들의 특산물만 비싼 값으로 사라 한다’ 하여 처 부시려고 북으로 올라 갔던 중원의 강자가 만났던 고조선 수도는 중원 사람들의 상상 이외였다. 싸우기는 고사하고, 고조선 사람들에게 발견 될까 겁이나서 도망 오고 말았다. 도망 올 때의 사정은 한비자와 사기태공세가에도 실려 있다[18]: “길을 잃어 늙은 말(老馬)의 도움을 받았고, 마실 물이 없어 개미의 습성을 이용했다.” 사마천은 이를 은미 하게 “연후(燕莊公)가 고맙다고 따라와 국경을 넘기에 도랑을 파서 막고 돌려 보냈다”하는 은유법으로 기록 했다. 이 곳이 하북성 밣해만 서남쪽 창주현(河北滄州) 일대라 한다. 그후 400년 동안 북경 태원 일대에는 동호의 활동이 활발하여 만리 장성을 쌓았다 했고, 연의 진개가 동호를 처서 조선이 쇄약해 젔다는 기록을 보면, 고조선이 중원과 경계를 이루었던 지역은 북경 남쪽 이였다.
예기 (禮記)에는 황제의 후손을 계(薊)에 봉했다. 그러나 그 곳이 발해만 서쪽이 아니아 북경 서남쪽이 되는 탁군계현 (涿郡薊縣)이라 했다. 상말 주초를 무대로한 봉신연의(封神演義)에는 요의 후손을 찾아 계(薊)에 봉해서 “봉당제지사; 奉唐帝之祀”라, 즉 당제를 모셔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다. 갈석산 가까운 곳에 백이숙제일화가 담긴 수양산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황제와 요 임금에게 빼앗긴 함지(咸池)일대 하동 (河東) 에 살던 사람들이 발해만 서안 일대로 밀려와 살면서 그들의 선조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뜻이다. 하동에 가서야 결국 요동돼지 (遼東豕)와 같은 돼지가 두 곳에 있었다는 우화에서 설명 했다. 하동에 살던 사람들이 요동으로 왔다는 뜻이다.
시경에는 당풍 채령(唐風 采苓))에 수양(首陽)산이 나오니 함곡관 서쪽에서 발해만 연안으로 옮겨와 고조선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살다가 제 환공이 기원전 664년에 토벌 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19]. 후세 사람들은 “상서우공편에 나오는 우협갈석 (夾右碣石)이란 문구를 근거로 협곡관 서쪽에 있던 백이 숙제의 전설이 담긴 수양산이 갈석산 유역에 있었다”고 우격다짐을 하고 있다. 고조선 영역에서 발생 했던 사건과 지명을 점차적으로 멀리 동북쪽으로 밀어 기록 했다.
갈석산 유역에는 옛 고구려의 선조들이 살았다. 그 내력이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나오고,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실려 실려 있는 하백(河伯) 이란 글자, 즉 치수사업에 성공한 우왕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 뒤에 글안(契丹)이 옛 조선 땅에서 나타났다.
끝
[1]. 戰國時代는 구분이 분분하다. 시작 된 시기를 기원전 476 또는453, 403라 하고 끝은 기원전221년이다.
[2].國語 齊語: 葵丘之會,天子使宰孔致胙于桓公,曰:「余一人之命有事于文、武,使孔致胙。」且有後命曰:
「以爾自卑勞,實謂爾伯舅,無下拜。」桓公召管子而謀,管子對曰:「為君不君,為臣不臣,亂之本也。」桓公懼,出見客曰:「天威不違顏咫尺,小白余敢承天子之命曰『爾無下拜』,恐隕越于下,以為天子羞。」遂下拜,升受命。賞服大輅,龍旗九旒,渠門赤斾,諸侯稱順焉 . 《春秋穀梁傳》、《春秋左氏传》、《春秋公羊传》都记载了葵丘之会。
《春秋穀梁傳》所记的五条禁令是现存最早的记载
[3].史記世家:齊桓公率釐公討晉亂,至高梁而還,立晉惠公。十七年,齊桓公卒。二十四年,晉文公即位. 襄公二十六年,晉文公為踐土之會,稱伯。莊侯三年,齊桓公卒。十四年,晉文公敗楚於城濮。二十年,楚太子商臣弒其父成王代立。二十五年,秦穆公卒.
[4]. 春秋左傳 襄公二十三年: 齊侯伐衛,遂伐晉.齊侯伐衛,先驅,穀榮御王孫揮,召揚為右,申驅,成秩御莒恆,
申鮮虞之傅摯為右.崔氏之亂,申鮮虞來奔,僕賃於野,以喪莊公,冬,楚人召之,遂如楚為右尹.
[5]. 春秋左傳 昭公十二年: 齊高偃帥師納北燕伯于陽. 齊高偃納北燕伯款于唐,因其眾也. 齊高止出奔.北燕晉伐鮮虞.
[6]. 史記燕召公世家; 山戎來侵我,齊桓公救燕,遂北伐山戎而還。燕君送齊桓公出境.. 史記 周本紀: 惠后欲立王子帶,
故以黨開翟人,翟人遂入周。襄王出奔鄭,鄭居王于汜。子帶立為王,取襄王所絀翟后與居溫
[7].《左傳·隱五年》衞人以燕師伐鄭。《註》南燕國今東郡燕縣。《疏》燕有二國,一稱北燕,故此註言南燕,以別之.
[8]. 春秋左傳 莊公: 三十年 遇于魯濟,謀山戎也,以其病燕故也. “齊侯,陳侯,蔡侯,北燕伯”
[9].管子 大匡:五年諸侯附,狄人伐,桓公告諸侯曰:「請救伐,諸侯許諾,大侯車二百乘,卒二千人,小侯車百乘,卒千人」,諸侯皆許諾,齊車千乘,卒先致緣陵,戰於後,故敗狄。其車甲與貨,小侯受之。大侯近者,以其縣分之,不踐其國。北州侯莫來,桓公遇南州侯於召陵,曰:「狄為無道,犯天子令,以伐小國,以天子之故,敬天之命令,以救伐。北州侯莫至,上不聽天子令,下無禮諸侯。寡人請,誅於北州之侯。」諸侯許諾,桓公乃北伐令支,下鳧之山,斬孤竹,遇山戎, 「將何行?」管仲對曰:「君教諸侯為民聚食,諸侯之兵不足者,君助之發,如此,則始可以加政矣。」桓公乃告諸侯.
史記: 桓公曰:「寡人北伐山戎,過孤竹;束馬懸車,上卑耳之山.
[10]. 管子 大匡: 北州侯莫至,上不聽天子令,下無禮諸侯。寡人請,誅於北州之侯。」諸侯許諾,
桓公乃北伐令支,下鳧之山,斬孤竹,遇山戎,顧問管仲曰;「將何行?」管仲對曰:「君教諸侯為民聚食,諸侯之兵不足者,君助之發,如此,則始可以加政矣。」 “北至於孤竹、山戎、穢貉、拘秦夏”
[11]. 金樓子 志怪: 齊桓公北征孤竹 未至卑耳之谿,見人長一尺,形具焉,右祛衣而走馬前,左右皆不見。桓公曰:
「吾事之不濟也,豈有人若此乎?」管仲曰:「臣聞山神有俞兒,狀長一尺而人形,見此霸王之君興,則山神見也。走馬,
前導之也;祛衣,前有水也;右祛衣,從右方可涉也。」至卑耳之谿,有贊水者,公乃從右方而涉,既濟水,公拜管仲於馬前曰:「仲父聖人也。」管仲曰:「聖人先知無形,今已有形,臣非聖人也,善承教爾。」
[12].韓非子 說林上: 桓公而伐孤竹,迷惑失道,管仲曰: 乃放老馬而隨之,遂得道。行山中無水, 乃掘地,遂得水。
史記 齊太公世家: 山戎伐燕,燕告急於齊。齊桓公救燕,遂伐山戎 燕莊公遂送桓公入齊境。 諸侯相送不出境
[13]. 說苑 :齊桓公北征孤竹,未至卑耳谿中十里,闟然而止,瞠然而視有頃,奉矢未敢發也。喟然歎曰:「事其不濟乎!
有人長尺,冠冕大人物具焉,左袪衣走馬前者。」管仲曰:「事必濟,此人知道之神也。走馬前者導也,左袪衣者,前有水也。」從左方渡,行十里果有水,曰遼水。表之,從左方渡至踝,從右方渡至膝。已渡,事果濟。桓公拜管仲馬前曰:「仲父之聖至如是,寡人得罪久矣。」管仲曰:「夷吾聞之,聖人先知無形,今已有形乃知之,是夷吾善承教,非聖也。」
[14].水經注 㶟水:清夷水又西南得桓公泉,蓋齊桓公霸世,北伐山戎,過孤竹西征,束馬懸車,上卑耳之西極,
故水受斯名也。水源出沮陽縣東,而西北流入清夷水。清夷水又西逕沮陽縣故城北,秦上谷郡治此,王莽改郡曰朔調,縣曰沮陰。闞駰曰:涿鹿東北至上谷城六十里。史記 匈奴列傳: 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
遼西、遼東郡以拒胡。當是之時,冠帶戰國七,而三國邊於匈奴.
[15].韓詩外傳 卷八: 孔子燕居,子貢攝齊而前曰:「弟子事夫子有年矣,才竭而智罷,振於學問,不能復進,請一休焉。」
子曰:「賜也,欲焉休乎?」曰:「賜欲休於事君。」孔子曰:「《詩》云:『夙夜匪懈,以事一人。』為之若此其不易也,若之何其休也!」曰:「賜休於事父。」孔子曰:「《詩》云:『孝子不匱,永錫爾類。』為之若此其不易也,如之何其休也!」曰:「賜欲休於事兄弟。」孔子曰:「《詩》云:『妻子好合,如鼓瑟琴。兄弟既翕,和樂且耽。』為之若此其不易也,如之何其休也!」曰:「賜欲休於耕田。」孔子曰:「《詩》云:『晝爾于茅,宵爾索綯;亟其乘屋,其始播百穀。』為之若此其不易也,若之何其休也。」子貢曰:「君子亦有休乎?」孔子曰:「闔棺兮乃止播耳,不知其時之易遷兮,此之謂君子所休也。故學而不已,闔棺乃止。」《詩》曰:「日就月將。」言學者也
[16].史記 世家 三王世家: 葷粥氏虐老獸心,侵犯寇盜,加以姦巧邊萌。葷粥徙域,北州以綏。燕王策. 齊王策. 廣陵王策.
漢書 傳 敘傳上: 班氏之先,與楚同姓,家本北邊,志節忼慨,數求使匈奴. 散數百金。北州以為榮,長老紀焉。
道病中風,既至.. 鹽鐵論: 北挫強胡,追匈奴以廣北州,湯、武之舉,蚩尤之兵也
[17]. 說苑 金樓子 수경주揚子法言에 나오는 요수(遼水)는 난하, 여씨 춘추에 나오는 요수는 천진 天津)을 지나는 오늘의 해하(海河)라 본다. 이 강을 사마천은 해(海)라 했다. 呂氏春秋와 淮南子: 何謂六川? 河水,赤水,遼水,黑水,江水,淮水
[18].韓非子 說林上: 桓公而伐孤竹,迷惑失道,管仲曰: 乃放老馬而隨之,遂得道。行山中無水, 乃掘地,遂得水。
史記 齊太公世家: 山戎伐燕,燕告急於齊。齊桓公救燕,遂伐山戎 燕莊公遂送桓公入齊境。 諸侯相送不出境
[19]. “采苓采苓、首陽之巔” “古山戎孤竹,白狄𡵟子二國之地,”. “夾右碣石, 入於河。 碣石,海畔山。禹夾行此山之右, 而入河逆上。此州帝都,不說境界,以餘州所至則可知。先賦後田,亦殊於餘州。不言貢篚,亦差於餘州, , 白帝所治也” 尙書定義.” 管子: 北至於孤竹、山戎、穢貉. @. 唐書·地理志: 平州北平郡。《廣韻》古山戎孤竹,白狄𡵟子二國之地,
December 31st. 2018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