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초기에 조선의 위치-1:
삼국지 한전에는 위약의 내용을 인용(魏略曰) 하여; <기자의 후손 조선후가 연(燕) 이 제 멋대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 땅을 친입 하려고 하여(欲東略地) 조선 역시 왕이라 칭하고 대부 예가 연에 가서 전쟁이 나지 않았다>는 문구가 있습니다[1]. 제후들이 왕이란 칭호를 쓴 시기가 전국시대의 초기 입니다.
전국책 연책에 < 연의 동쪽에 조선이 있고, 요동이 있다(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 서쪽에는 진나라가 남쪽에는 조나라와 제나라가 버티고 있다>고 했습니다[2]. 진나라와 맞섰던 제, 조, 한과 소진을 다루면서 연(燕)이란 이름을 춘추시대에 하남성에 있던 남연(南燕)이 북쪽으로 옮겨졌던 북연(北燕)입니다.
북연 동북 쪽에 조선(朝鮮)이 북경 서남쪽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추리를 보충할 사료가 한 나라 때에 양웅의 방언(漢·揚雄.方言)에 있습니다.
방언(方言)에 연의 동북 조선 열수지간(燕之東北朝鮮洌水之間) 이란 문구를 비롯 하여 조선의 위치를 추리 할수 있는 문구가 많이 나옵니다.
응소(東漢 應劭撰)의 풍속통의서문에는;<옛적에 공자가 몰이미언궐(沒而微言闕) 하여 70여 제자들이 그 뜻을 이어가지 못했고 호악주심(好惡殊心)하는 경향 마저 나타났다>는 문구로 시작하여 방언 소집의 연유를 설명 했습니다[3]: <동주와 진(秦) 나라에서 유헌사(輶軒使)를 보네서 여러 지역의 풍속과 방언을 모아 깊히 보관 (輶軒使采異俗方言,藏之秘府)했다.>
하여 방언(方言)을 “輶軒使者絕代語釋別國方言”이라고도 합니다. 동주로부터 통치권을 이어 받은 진시황의 선조가 중원을 통치하려는 기반을 닦은 기초 작업의 하나로 방언집을 만들었습니다.
공자가 했다는 “沒而微言闕” 문구를 후세 사람들이 모두<궐(闕; watch tower; palace)자를 절(絕; cut, sever, break off, terminate)로 바꾸어> 풀이 하여 공자가 사실을 은패(沒)하고 은미한 글로 표현 했다(微言闕)는 사실을 숨겼습니다[4].
좀더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조선이 있었나를 밝히려 하니, 전국시대의 역사 기록은 너무 혼잡하여 모두 옳바른 해석을 못했습니다.
옛적 황하문명의 발생지를 중심으로 작성된 고전에는 변두리에 관한 기록이 희박 합니다. 하여 강남지역에 관한 기록에도 의문이 많습니다. 유목민의 한 지류가 한수 (漢水) 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 가서 양양 무한(襄陽/句吳/襄樊, 武漢) 일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강남의 제후들은 춘추오패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王)이란 칭호를 썼습니다.
남쪽으로 옮겨간 유목민은 무시 하고, 하북지역 제후들이 왕이라고 칭호를 바꾼 시기부터를 전국시대라고 했습니다. 연이 있던 하북지역에서는 언제부터 왕이란 칭호르 썼나를 살펴 봅시다.
사기에는 기원전 334년(楚威王六年)에 동주현왕(周顯王)이 문무백관을 대리고 조어진혜왕 (周顯王致文武胙於秦惠王)이라 했습니다. 기원전 324년에 진 혜왕 (秦惠王)이 처음으로 왕이란 칭호를 썼습니다. 상징인 구정(九鼎)의 시몰을 살펴 보면 기원전 327년(周顯王 四十二年) 에 구정을 잃었습니다[5]. 조(胙, zuò)자는 한국 어린 애들 속어에 <야 나조; Give. Blessing. 줘라. >라고 읽었습니다. 복을 내린다는 뜻의 복 조 (祚)자와 같은 뜻으로, 신께 바치는 제물이란 뜻으로 제사, 즉 패백을 드린 후에 음복을 같이 했다로 풀이 함이 옳다고 봅니다[6].
이러한 주위 상황을 고려해 보면, 삼국지 내용을 인용한 <연(燕)이 제 멋대로 왕이라 칭한 시기>는 기원전 320년경이 됩니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하북성 보정시 남쪽이 조선과 연의 경계 였다고 추리 할수 있습니다. 북경-천진 일대를 지나는 해하(海河) 수계가 전국시대 초기의 조선 영역이었습니다.
지난 “May 31, 2018,”에 올린 “양웅의 방언 (方言)에 실린 조선(朝鮮)”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사기에는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년 ~ 기원전 117년) 가 양웅의 시구(詩句)를 인용 했습니다. 양주 익주(梁州,益州)가 해지 위하 일대란 뜻이 방언에 있습니다[1].
[1].方言: 自關而西秦晉之間曰躡,東齊海岱之間謂之躋,魯衛曰郅,梁益之間曰𢓜,或曰跂. 自關而西秦晉之郊梁益之間. 東齊言布帛之細者曰綾,秦晉曰靡
필자는 모두가 인정하는 한서에 나타난 양웅전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드려 조선이 조양일대라고 풀이 했습니다. 이를 수정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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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三國志 韓傳: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
[2]. 戰國策 燕策 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云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里。燕王曰:「寡人國小,西迫強秦,南近齊、趙。齊、趙,強國也,今主君幸教詔之,合從以安燕,敬以國從。」於是齎蘇秦車馬金帛以至趙
[3].風俗通義序:昔仲尼沒而微言闕,七十子喪而大義乖。重遭戰國,約從連橫,好惡殊心,真偽紛爭。故《春秋》分為五,《詩》分為四,《易》有數家之傳.“周秦常以歲八月遣輶軒之使,求異代方言,還奏籍之,藏於秘室。及嬴氏之亡,遺脫漏棄,無見之者。” 太平御覽 : 應劭《風俗通》曰:周秦常以八月,輶軒使采異俗方言,藏之秘府.
成書背景: 戴震曾考订《方言》为汉扬雄所著。《漢書·藝文志》和《漢書·揚雄傳》均無揚雄編撰本書的記載。
[4]. 越絕書 篇敘外傳記: 萬代不滅,無能復述。故聖人沒而微言絕。賜見春秋改文尚質. 太平御覽 廢學: 是故孔子憂道之不行,
歷國應聘。自衛反魯,然後樂正,雅頌乃得其所;修易,序書,制作春秋,以紀帝王之道。及夫子沒而微言絕,七十子終而大義乖。孝經注疏 御製序并注: 嗟乎!夫子沒而微言絕,異端起而大義乖
[5]. 竹書紀年 殷商成湯: 十八年癸亥,王即位,居亳。始屋夏社. 二十七年,遷九鼎于商邑.周武王十五年,肅慎氏來賓。
初狩方岳,誥于沫邑。冬,遷九鼎于洛. 周顯王: 四十二年,九鼎淪泗,沒于淵 史記 楚世家: 威王六年,
周顯王致文武胙於秦惠王. 漢書 郊祀志上: 或曰,周顯王之四十二年,宋大丘社亡,而鼎淪沒於泗水彭城下
[6].爾雅 釋天:春祭曰祠,夏祭曰礿,秋祭曰嘗,冬祭曰蒸,祭天曰燔柴,祭地曰瘞薶,祭山曰庪縣,祭川曰浮沈,祭星曰布,祭風曰磔,是禷是禡,師祭也,既伯既禱,馬祭也,禘,大祭也,繹,又祭也,周曰繹,商曰彤,夏曰復胙. 說文解字 肉部:胙:祭福肉也。从肉乍聲。廣韻: 胙: 祭餘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