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儉의 古朝鮮과 夏 商의 관계-1:
古朝鮮의 발생 시대와 장소.
Screenshot-11에서 보신 바와 같이 일연스님은 [古朝鮮의 발생 시대와 장소]를 찾을수 있는 사료를 위서(魏書云)라고 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古朝鮮 王儉朝鮮”이라 했서요. 그 때가 요고동시(與高同時), 즉 요임금 시절이라 했습니다. 각종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삼황오제의 “堯舜禹”, 즉 치수 사업을 하던 시절입니다. 그로 부터 2,000을 지난 전국시대의 위나라 역사서에 [古朝鮮의 발생 사연]이 실렸다고 했습니다.
전국시대의 위(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나라는 산서성에 있던 진(晉)나라가 셋으로 분산되어(三家分晉) 나타났던 전국칠웅 (戰國七雄)의 하나다. 중국 역사서에는 치수사업을 하던 시절에 위(魏)나란 기록이 없고, 현존하는 여러 위서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연 스님이 [인용 했다는 위서는 허위가 아니면 사료를 감추었다] 고 추측 된다. 중국에 위서(魏書)라는 이름의 역사서는 279년(太康元年) 에 위양왕 (魏襄王;?-296년 BC)의 무덤에서 나온 죽간이 이후에 보인다. 그 내용이 모두 위나라 역사서(蓋魏國之史書)라고 했다.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위나라가 옛적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때 부터 약 2000년 전이라 했고, 정확 하게는 1,908년니라 했스니 2,333년 이란 계산은 타당성이 있다.
선학들은 물론 현 한국사학계에서도, 중국사람들이 감추었으리라는 가정은 거론 하지 않고, [전설, 또는 신화] 라고 인식(認識)하고 더 이상 찾으려 노력 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평양(平壤) 왕검(王儉)하는 글자가 삼국사기에도 실렸다. 삼국사기를 편찬 한 사람들도 스님이 인용한 위서를 보았다. 그 위서가 [어떻게 한반도에 들어 왔고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를 연구해 보셔야 합니다.
위서(魏書云)에;아래를 내려다 보니(삼위태백가이 홍익인간(三危太伯可以
弘益人間)이라고 했다. 치수사업을 하려고 만든 산해경 서산경(山海經 西山經)에 삼위지산(三危之山)이라 했다. 직역하면 세 높은 등산이다. 산위(三危)의 위란 한국말로 높은 곳(high, on top of)이란 뜻이다.
詩經에도 치수사업을 하던 곳의 향가가 보인다. 앞서 screenshot 13 에 나타났던 선서성 서남쪽 분수 (汾水)를 뜻한 글자가 한혁에 분왕의 조카딸 (汾王之甥)이란 글자가 있고,시경 위풍 (詩經國風魏風)에는 분수가에서 읊은 시한편(汾沮洳)이 있다.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 위나라(魏風)가 분수 하류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 곳에 있던사람들이 [옛부터 전해오던 전설을 역은 역사서]에 고조선의 발생을 남겼다. 古朝鮮의 발생 장소가 밝혀 졌다. 시대를 계산해 보면 기원전 2333년니 합당 하다.
단군왕검(壇君王儉)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하나?
우서의 내용을 감추었듯 이 글자 또한 감추었다고 봅니다.
단군왕검(壇君王儉)이란 글자 “壇君과 王儉”을 붙인 복합 명사 입니다.
단군(壇君)이란 제사장 (high Priest, person in charge of Altar)이란 뜻이고 왕검(王儉)의 검(儉; 亻:僉)자는 모든 지도자란 뜻의 다첨(僉)들이 만장 일치로 뽑은 사람(亻) 으로 왕중 왕(King of the kings)의 직책을 뜻합니다. 하여 통치권을 지닌 왕검(王儉)이 최고 제사장의 역활을 겸한 동양 역사상 최초의 지도자란 뜻입니다. 그러니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은 동양에서처음으로 나타난 강력한 국가 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단군왕검(壇君王儉)이였나요:
사기우본기에 백익이 단군왕검(壇君王儉)이였다는 근거를 남겼습니다.
Screen에 보이는 마지막 문구 [백익이 지도권을 우왕의 아들 계에게 넘겨주고(益讓帝禹之子啟),마음편히 피신하여 기산지양에서 살았다 (而辟居箕山之陽)에 기산은 기자 또는 그의 추종자들이 살던 곳]입니다.
주무왕이 기원전 1046년에 목야전에서 상나라를 정복하여 기자가 朝鮮에 와서 단군이 장당경(藏唐京)갔다. 그 전 까지 1,500년을 다스렸다. 뒤에 돌아 왔다. 후에 다시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 그러니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러 수도 이름(阿斯達,平壤城,白岳山阿斯達. 名弓一作方忽山. 今彌達.藏唐京)은 모두 산서성이 있던 태행산맥에 있던 지명입니다.
기자가 朝鮮에 갔다는 곳은 산서성에 있었다. 산해경 내경과 최씨역림에 살기 좋은 곳(宜人宜家,業處子孫,求事大喜)으로 나오는 朝鮮이다.
유가에서 도둑이라고 풀이하여 [훔칠 절 qiè竊; qì qiè xiè/ kai3 kit3 sit3/ kèi ket set]이라고 읽는 글자는 고조선을 뜻한 글자 “解, 㼤, 挈, 弃, 棄”를 비하한 다른 사음자다 . 치수 사업은 분수 상류에서 공공(共工) 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그의 신하 상요(相繇)가 융우위 아버지다. 조선의 지도자를 천독이라한 산해경 해내경에는 절제(竊帝)로 축융을 시켜 치수 사업에 실패한 우왕의 아버지 요(祝融殺鯀)를 처형 했다 .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은 하나라의 시조라고 하는 사람보다 앞서 분(汾)수 상류 아사달에서 나타 났다. 분수를 따라 내려 오면서 하동 일대에서 치수 사업을 완수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가 지도자 백익을 잃고 북쪽 분수가(𨸣)로 밀려 났다. 최씨역경에 실렸다 . 그후 다시 내려와 서안시 일대에 자리잡고 동쪽에서 들어온 서주의 시조 고공단부를 도와 서주 문화를 이루었다 .
선학들이 못찾은 세로운 학설입니다. 궁금하시지 않나요?
학문을 하는 분들은 누구나 [의사였던 사람이 어떻게 찾았나]궁금해 하리라 봅니다. 이를 설명 해 드리려는 취지에서 [동북아 상고사 인식]이란 역사 문제와 철학걱 개념을 포함한 논제로 세시간에 걸처[역사 인식 상형 글자의 탄생 변천과정, 옥편의 유래 등등]을 설명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상식적인 판단에서 고조선 찾기 수사를 진행 했습니다.
요순시대 이전부터 전해 오던 설화나 전설을 상형 글자로 기록하여 중국 최초의 역사서 상서(尙書)가 나타났습니다. 단군왕검 백익의 선조들 사이에 구전되여 오던 전설이 사마천이 읽었다는 우본기(禹本紀)입니다.
이를 햇님의 후손이라 자칭하던 사람들이 세운 위나라의 역사서를 “蓋魏國之史書. 懷舊志. 費氏經”라고 기록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사마천 이전부터 중원의 지식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단군왕검의 혈통과 시원지가 적혀 있던 기록을 당대의 사가 사마천과 석학들이 판독 했습니다.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 부터가 한국역사의 시작입니다. 공자가 고조선 역사를 취해서 (丘竊取之) 춘추좌전을 만들었다. 또는 반고가 도둑했다 (班固盜竊父史)지만, 그게 아니라 서주 초기부터 계획적으로 우리 역사를 훔쳐다 감추고 발견되지 않도록 온갓 수단과 방법을 다했습니다.
고조선은 선사시대에서 역사 시대로 이어지는 싯점에 나타났습니다.
글자를 사용하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고 노래도 불었습니다. 그들이 부르던 노래를 모아 놓은 책이 시경입니다.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의 언어를 상형 글자로 만들어 남겨 놓았죠. 그러니까 [古朝鮮의 발생 시대와 장소 등등 고조선 연구는 상현 글자와 시경]에 남아 있다는 가설에서 이를 찾았습니다.
古朝鮮의 발생 시대와 장소, 그리고 이동 경로를 설명한 뒤에 제가 개발 인용한 [동북아시아 역사연구 방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18,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