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 이전 왕이 마지막 단군이다.
찾고 찾고 또 찾다 결국 금미달을 떠나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마지막 단군을 찾았다. 맹자가 만났던 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 가야국 가실왕 (加耶國嘉悉王) 이다. 그를 수유(須臾離禮)라고 했다. 수유이전 왕이 마지막 단군이란 결론이 나왔다.
고려 가요 가시리의 주인공이 가야국 가실왕이다. 사마천은 가시리 궁중악을 연주 하던 사실을 사기 악서에 수유이악(須臾離樂), 수유이예 (須臾離禮)란 문구로 남겼다. 전국시대 문헌에는 수유지 설(須臾之說) 또는 “수유지 xx”하는 문구가 있다. 모두 위나라 역사서였다는 급총 죽간 내용을 살펴본 황보밀 (皇甫謐: 215∼282) 은 마지막 단군을 제왕세기 (帝王世紀)에서는 제홍씨(帝鴻氏), 귀장씨 (歸藏氏) 제헌(帝軒) 이라 했고 고사전(高士傳)에서는 검루자 (黔婁子)라 했다.[1] 노공공(魯恭公), 제왕 (齊王)이 준 하사품도 받지 않았다.
중원 세력은 단군을 모두 도가(道家) 선인(仙人)으로 다루었다.
[1]. 太平廣記 幻術一: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 問其年, 云。 百四十歲。荷錫持瓶,云。發其國五年,乃至燕都。高士傳
봄 춘 기: 고려시대 가요 “가시리”의 유래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을 떠난 단군 가문이 나라를 다스린지 1500년이다.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1] 천독 (天毒; 천독 애비, 천또깨비)이 다스리던 고조선의 수도가 상나라 이전 부터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산해경과 상서 미자편에 있다.
논어에 당우지제 어시위성 (於斯為盛)이라, 즉 예맥족(斯, 濊貊)이 요순 시절부터 황하문명 발상지에 살았다.[2] 환웅의 아들이 그곳에 뜻이 있어 내려와 고조선(意在斯焉古朝鮮)을 세웠다. 그 곳이 사마천의 고향이다.
중원 세력은 가상인물 황제를 홍수를 관장하던 동이수령 백익 의 후손 두루미 미(彌)자를 기러기 홍 자로 바꾸어 제홍씨(帝鴻氏)라고 했다. 그가 금미달ㄹ로 돌아 갔다 하여 급총죽간 발굴 당시 이를 목격 했던 황보밀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귀장씨 (歸藏氏) 제헌(帝軒)이라 했다.[3] 이러한 이름은 금미달을 떠나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과 일치 한다. 신농이 아니라 마지막 단군이 귀장역(歸藏易)을 남겼다.
예맥족이 더 좋은 무기를 개발하여 서주를 몰락 시키고 중원을 석권 했다. [4]
관자에는 발조선 (發朝鮮), 북주후모(北州侯莫), 금국미란(今國彌亂), 해왕지국 (海王之國)이란 문구가 있다. 전국시대 후기에는 고조선 세력이 북쪽으로 밀려 연산산맥 북부 산속에 있어 중산국 (中山國), 또는 선우국 (鮮虞國)이라 했다. 서주의 발상지 가까이, 서안시 동쪽 영제시 포주진 (永濟市蒲州鎭) 에 있던 백이 숙제 사당을 계속 북쪽으로 옮겨 고죽 (孤竹) 이란 이름이 금미달 영역에 나타났다.
전국시대에 원시불교가 금미달 영역에 들어왔다. 불가에서는 금미달에 살던 마지막 단군을 미륵(彌勒)이라고 한다. [5] 미륵 (彌勒) 이란 글자는 “굴래를 씨운 미란 뜻”이다. 미병(彌兵)이란 글자가 있다. 잘 훈련되어 명령에 복종하는 군졸 이란 뜻이다. 새로 풀이 하여 석제의 노예 (新稱彌帝隸), 보살의 성이고 자씨(慈氏) 라는 등” 여러 뜻으로 풀이했다. 그 전 단군을 전륜왕 (轉輪王, 其先轉輪聖王), 이름을 양거(儴佉)라 했다. 수도 였던 양(襄)을 떠나간 사람이란 뜻이다. 하여 거루 (佉樓 佉盧) 또는 이루(離婁) 라고도 했다. 불경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란 이름이 있다. 문수(文殊)란 글자를 다루던 보살이란 뜻으로 거루 선인(佉盧, 佉樓仙人)과 같은 사람이다 .[6] 거루선인이란 대루각, 즉 고조선의 궁궐을 떠난 성인 이란 뜻이다. 궁궐을 떠나 가시는 왕을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 이라 했다.
원시 붕교가 금미달 지역에 들어와 가야란 어음을 여러 글자로 기록 하여; 가라 (Khara 伽羅, 加羅) 또는 가람(伽藍) 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불경 기록에 거루/가라선인 (Khara; 佉盧. 佉樓仙人) 이 창힐 이전에 글자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다. 위진 혼란기에 위나라 역사서 (蓋魏國之史書)가 발굴 되었다. 모두 옷칠로 그려진 과두자 (漆書皆科斗字)로 적혔다. [7] 과두조전(科斗烏篆) 자가 거루 선인(佉樓仙人)이 쓰던 고조선 문자다. 주 선왕 시절에 산서성 북쪽 대원에서 중산보(仲山父)가 잡혀와 구전해 오던 예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전(篆)자라 한다.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이 노예(奴隸)가 되여 만든 예서체 (隸書體)가 현제 쓰는 번체자(繁體字)의 기원이 되었다.
유가 기록은 혼미 하여 마지막 단군이전에 있던 단군과 분별 하기가 어렵다. 사마천이 남긴 수유이예(須臾離禮), 수유이악(須臾離樂)이란 문구가 우륵(于勒)이 주관한 송별회에서 부른 고려가요 가시리라 본다.
여름 하 승: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의 가야금(加耶琴):
가야금(加耶琴)이란 이름이 중국 문헌에는 없다. 삼국유사에는 거문고 갑을 쏘라는 사금갑 설화 (射琴匣說話)가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재위 417년 ~ 458년) 시절에 실렸다. 삼국사기에 가야금과 관련된 예기가 실렸다. [8]
일곱살에 왕이된 진흥왕 (眞興王, 재위: 540년 ~ 576년)이 551년에 개원개국 (改元開國)하고 삼월에 낭성(娘城)을 순찰하다 우륵(于勒)이 제자들과 같이 니문 지음악 (尼文知音樂) 하여 왕이 특별히 환대했다. 왕이 하임궁(河臨宮)에 머물면서 그 음악을 연주하라 했다. 그 시절에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 이 12 현금을 만들었다. 이는 옛부터 고조선 영역 산서성 (晉: 隸)에 전해 오던 7현금에, (일년) 12 개월을 상징 하여 현을 더해 만든 현악기다. 국란이 생겨 우륵이 악기를 들고 신라에 투항해 왔다. 하여 그 악기를 가야금이라 이름 했다.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가야국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그것을 만들었는데, 왕이 말하기를 여러나라 방언이 서로 다르니 성음을 어떻게 같게 할수 있겠나” 하는 문구가 있다. 진흥왕 시절에는 당나라가 없었다.
가야금의 발생 변천 과정에 관련된 지명은 한반도에서는 밝혀 지지 않았다. [9] 산서성에 국란이란 전국시대 부터 진(秦) 시황이 금미달 지역을 흡수한 시기다. 남조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는 왜왕이 다스렸다고 했다. 같은 글자 “新羅 任那 加羅”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실렸다. 대만섬에는 가라호 (加羅湖) 가라산( 加羅山), 알;링의 어근이 되는 아리산 (阿里山)이 있다. [10] 같은 글자 신라(新羅)가 한반도를 통일 했다.
신라는 법흥왕의 아버지인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437년? ~ 514년) 때에 한반도로 수도를 옮기고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중국 남쪽지역에 살던 “신라 백제 임나가라 왜”가 대만섬을 지나 한반도로 이사 오던 시기였다.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중국식 군주의 칭호인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전함을 만들어 울릉도를 정벌하고 배를 만드는 부서를 설치 했다.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우륵이란 글자가 없다. 진서 위서 십육국 춘추 등 여러 중국 사서에는 륵준의 난 (靳準之亂)이 있고, 우륵 (于勒)은 어를(於勒) 또는 선우륵(鮮于勒)의 약자로 풀이 했다. [11] 금미달 영역을 통치 하던 전후조록 (趙錄)에 나타난 이름자다. 조(趙)나라가 있던 산서성 사람들이 사방으로 분산 되었다. 황제가 자부선인을 만났다는 삼한 (三韓) 땅 청구(靑丘)에서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다. 화씨벽(和氏璧) 의 출원지가 되는 청구에 있던 가실왕이 남쪽 중원으로 내려 갔다.
상나라 이전 부터 고조선에서는 현악기를 썼다는 뜻이 사기에 실려 있다. 사기 악서에 수유이악(須臾離樂)이란 문구가 있다. 같은 문구가 설원 소문 (脩文)에도 실렸다. [12] 현대어로 소문(所聞, Rumor)이란 뜻이다. 영대(靈臺), 즉 제단(祭壇 Alta)에서 사용하는 악(樂)은 변인최극 (變人最極), 즉 변한 사람들이 제단에 드리는 음악이 최고라 했다.
수유(須臾)란 옛음을 따서 가차 전주한 글자로, 수인(燧人)씨를 고구려 에서는 수신(隧神·禭神)으로 모셔 개천절을 치루었다. [13] 수유이악(須臾離樂) 이란 수신(隧神·禭神)을 섬기던 후손이 떠나는 사연을 읊은 아악이란 뜻이다. 이에 대한 풀이가 사기 악서에 있다. 태사공이 희비 상반되는 의견으로 풀이 했다. 주례(周禮)에는 지역에 따라 악기의 이름를 붙여고죽지 관( 孤竹之管) 은, 소문에 화씨벽이 나온 지역의 현악기(云和之琴瑟) 이라 했다. [14] 화씨벽이 나온 지역이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라고 옥새의 유래 에서 설명 했다. [15] 옛적부터 고죽관 (孤竹之管) 이라는 현악기를 사용 했다는 뜻이다.
가을 추 전: 작가 미상의 고려 가요 가시리:
사료를 종합해 보면 단군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에 살던 단군이 가실왕 (嘉悉王)이다. 그가 전국시대에 금미달을 떠나 중원으로 내려 갔다. 가실이란 글자는 “excellent; joyful; auspicious, know, learn about, comprehend” 최선을 다해본 현명한 왕이란 뜻이 있다. 대평성대 (大平盛代)를 이루었던 지도자를 이별하는 송별회에서 남아있던 우륵과 그의 제자들이 떠나야만 하는 왕이 되돌아 와서 또다시 대평성대를 이루기를 기원하는 노래가 가시리다.
전국시대에 많은 학자들이 금미달 지역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가실왕 (嘉悉王)에 관한 기록이 맹자, 장자, 여씨춘추, 순자에 많이 실렸다.[16]
가실왕 (嘉悉王)이 아사달 지역 소량(少梁)에 갔다:
맹자(孟子,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에 실린 양양왕 (梁襄王: 魏襄王: 318 BC-296 BC)의 다리 량(梁)자가 소량을 뜻 했다. [17] 그에 관한 기술이 혼미하다. Wiki 에는 위나라의 대를 물려 받은 사람“梁襄王 : 即「魏襄王」: 姓名:魏嗣”이라고 했다. 장자(莊子)에는 문혜군 (文惠君)으로, 사기에는 위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뜻에 길할 희 위안희왕 (魏安釐王; BC 276년 ~ BC 243년)이라 했다. [18]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고려 하면 맹자가 찾아가 대화를 나눈 양 혜왕과 양왕 (梁惠王: 孟子見梁襄王)이 금미달 지역에서 내려 갔다.
탁군 사람 비준 (汲郡人不準)이281년에 위양왕 (魏襄王,或安𨤲王冢)의 무덤을 도굴 했다. 우왕의 아들 개가 백익을 죽였다(啟殺益)는 기록이 새상에 나타났다.[19] 스님이 인용 했다는 위서(魏書)가 이를 근거로 작성 된듯하다. 사마천이 보았다는 우본기(禹本紀) 즉 회구지(懷舊志), 비씨경 (費氏經) 이란 책은 예맥(濊貊) 족의 역사서다. 맹자는 양혜왕(梁惠王)에 금미달 지역을 뜻한 “홍안미록 (鴻鴈麋鹿), 영대(靈臺), 영소(靈臺) 하는 문구글 썼다. 맹자와 사마천은 예맥족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맹자 만장편에 우천익어천(禹薦益於天)이라, 즉 우가 백익을 천자로 천거 했다. 우의 아들 개(啟)를 피해 갔던 곳을 기산지음 (箕山之陰) 이라 했다. 오월춘추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산지양 (箕山之陽) 이라 했다. 가실왕 (嘉悉王)에 얽힌 사연을 오월 지역에서도 알고 있었다. 양왕 (襄王)이 여러 지역에 나타났다. 여러나라 지도자 이름자에 실린 “襄儴梁釐” 자에 사연이 있다. 조 양자(趙襄子;?- 기원전 425년)가 삼가분진이 나타난 시절에 살았다.
사마씨는 주 선왕때 부터 고조선 발생지에 살았다. 그들의 본향이 소량 (少梁更名夏陽)이다. 사마천의 조부가 중산국 제상을 지냈다. 세대는 밝히지 못하고 가실왕의 뒤를 이어었다는 뜻에 “위안희왕(魏安釐王)에게 위사(魏嗣)란 이름” 을 붙였다.
위안희왕(魏安釐王)의 이복 동생이 위무기(魏無忌), 모두 위소왕(魏昭王)의 아들이다. 형이 왕이되어 무기를 신릉군(信陵君,? – 기원전 243년)이라 했다. 그가 소량 (少梁) 지역에 내려가, 여러 나라 “韓, 趙, 齊, 秦” 싸웠다. 옛적에 “평양 아사달” 이라 하던 임분시 (臨汾市)와 운성시(運城市)가 그 일대에 있었다. 두 사람이 기원전 243년에 죽어 후사가 없다고 한다. [20]
신라가 금관가야를 흡수한 시기에 우륵이 신라로 와서 가야금이 알려 졌다고 한다. 산서성 대현 일대에서 산동성으로 옮겨 왔던 가야국 (加耶國)을 한반도 남단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는 (太祖天福五年) 후진 (後晉) 고조(高祖) 석경당 (石敬瑭) 시절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그렇게 실렸다. [21] 이는 가야 연맹이 신라에 흡수된 이후라 시대가 틀렸다.
신라 경덕주(景德主), 즉 경덕왕(景德王,재위: 742년 -765년) 이 산동성 사물현(史勿縣)일대에 있던 옛 적 신라 임나 가야(加耶)의 지명을 한반도로 옮겨 기록 했다.
김 수로왕의 10대 손 김구해(金仇衡 金仇亥)가 법흥왕 (法興王, 재위: 514년 ~ 540년)에게 나라를 바쳤다. [22] 통설에 따라 삼십년을 한 세대로 계산 하면 신라 발생 초기가 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초기 기록에 김수로왕을 현명한 연로자로 기술 했다. 그 곳에서 변진전에 철(刀錢)이 난다. 중국의 화패 같이 쓴다. 중국의 축과 같이 생긴 현악기(有瑟)가 있다고 했다.[23] 삼국유사에 실린 금갑 (琴匣)이 삼국지에 실린 유금(有瑟) 이다. 가락국(駕洛國)이 발해만에 있던 시절에 가야금을 사용 했다.
가야국 가실왕 (加耶國嘉悉王)이 가시리의 주인공이다.[24]
동국여지승람에는 우거진 고을이라 하여 유울국 가실왕(柳郁國嘉悉王)이라 하고 가야금을 연주한 시기를 중국(中國) 진사이제금음 (秦事而製琴音) 이라, 즉 진(秦)나라가 금미달을 점령한 시기라고 밝혔다. [25]
산서성 대현 금미달에 살던 사람들이 변진전(弁辰傳)에 실린 삼한의 선조다. 그들이 해하 수계를 따라 발해만 서쪽으로 내려 왔다.
신라 건국지에 조선 유민이 여섯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중원에 살던 사람들이 진-한 혼란기 (中國之人苦秦亂)에 발해만 일대에 내려 와 창해군이 생겼었다. 그 곳에서 후한 영제 때에 요서태수 황번이 상서 하기를 “나는 백이의 동생 고죽군 (我伯夷之弟 孤竹君子) 이다, 성은 이씨요 이름은 고죽 (姓李名孤竹)이라는 자가 났다”고 했다. 단군왕검 백익을 저 늙은이란 뜻에 이기씨(伊耆氏)라 했다. 이씨 (姓李)의 시조다. [26] 그가 살던 마을을 지나는 여울을 이수 (伊水), 실권 했다 하여 낙수(洛水)라 했다. 장화의 친구였던 진수는 발해만 변진한의 지도자를 하늘 내려온 멀 하자 하왜왕 (假倭王) 이라 했다. 신조를 건국한 왕망(王莽)을 하황제(假皇帝)라 한다.
쌍건하가 흐르는 역수 계곡에서 연태자가 자객으로 형가(荊軻)와 그의 친구 음악가 고점려(高漸麗)를 보냈다. 고점려가 변한 사람들이 부르던 징(變徵) 소리를 내자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여기에 변한 (弁韓)지역 금미달 (今彌達)에서 개발한 변궁 변징 (變宮,變徵)두음을 더 했다. [32] 자객 형가 (荊軻) 가 실패 하자 같이 갔던 고점려가 축(筑)으로 진시황을 때렸다. [33]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고점려(高漸麗)가 쓰던 고조선의 현악기 축(筑)에 현을 더하여 12 현금 (十二弦琴) 가야금 (伽倻琴)을 만들었다.
축(筑)은 본래 5현금으로 5음이 있었다. 수미(胥靡)가 불암성 (傅險)에서 5현금으로 연주 했다. [34] 가야금 (伽倻琴)은 쌍건하가 흐르는 금미달 지역에서 만들어 썼었다.
금미달을 떠난 예맥족(斯, 濊貊) 삼한의 후예가 동남아로 흐터져 나가 불교를 받아드려 왔다. 이를 진서와 책부원귀에 [금미달에서 떠난 사람들이 남중국 해안 4000 여리에 걸쳐 신미제국 (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이를 송서등 남조 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는 왜왕이 다스렸다고 했다. 이에 실린 삼한의 “秦韓慕韓” 은 삼국지 동에전에 실린 글자다. 이들이 동남아 해안에 이르러 그 곳에 번성 했던 남방불교를 강남에 전했다. 월남에도 여러 종류의 현악기있고, 대만에는 가라산 가라호가 있다. 한때는 신라 백제 왜 가라 가 대만섬에 있었다. [35]
가야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륵이 곡을 붙여 연주 했다. [36] 같은 글자 가야산 (伽倻山) 가야사 (伽倻寺)하는 이름이 섬진강 (蟾津江)과 낙동강 수계에 나타났다. 낙동이란 동쪽 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경상남도 창녕군에 진흥왕 순수비 (眞興王巡狩碑)가 있다. 가야산 (伽倻山) 서쪽 섬진강 수계에 있던 가야국 들은 진흥왕 이후에 백제에 흡수 되었다.
산서성 진나라 사람들(晉人)이 쓰던 현악기가 고죽국이 라던 고구려 (高麗本孤竹國)에 알려 졌다.[37]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북쪽에 있던 돌궐가한 막사를 찾아 가, 먼저 그곳에 가 있던 고구려 사신을 만나서 수양제에게 사연을 설명 하면서 나온 문구다. 고구려가 수문제의 아들 양량(楊諒)이 이끌었던 수나라군을 대파한 임유관 전쟁을 치루었던 곳에 고죽국이 있었다. [38]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하던 금미달 영역이었다.
신라 가야 모두 발해만에서 내려 왔다. 신라 고기에 우륵을 열숙현(省熱縣), 즉 열하성 사람이라 하고 그들이 부른 음악을 진(秦聲)나라의 성으로 병주 양주 (幷梁二州) 지역이라 했다. 가야국 가실왕은 진(秦)나라가 친입 한 금미달 지역에 있었다. 가시리를 가야 망국 지음 (加耶亡國之音)이라 했다. 현명한 지도자를 이별하는 송별회에서 우륵과 그의 제자들이 떠나야만 하는 왕이 되돌아 와서 대평성대 (大平盛代) 를 다시 이루기를 기원하는 애절한 감정을 가야금을 뜻으며 읊었던 노래다.
가시리 4장 후렴 은 흔히 풀이 하는 “악기 소리를 흉내낸 말”이 아니다. “나ᄂᆞᆫ 위 증즐가”는 “대평성대(大平盛代)” 와 같이 당시 훈역 했던 어음“위 증즐가 (危症增加)를 한글로 기록 했다. 선학들이 가요의 발생지와 장소, 그 유래를 몰라 잘못 풀이 했다. 진흥왕 또한 가시리의 내력을 몰라 (남녀간을 애정을 읊은) 음란한 음악이라 했다.
현대어로 풀이 하면 “나라는 위태로운 증상이 날로 증가 하는데 , 아 태평성대 여”가 된다.
신원 불명의 성인 유하혜(柳下惠):
고전에 유하혜 (柳下惠)란 글자가 혼잡하게 설명되어 있다. 동진의 초대 황제 원제 (晉元帝)가 319년에 유하혜의묘를 참배 (脩柳下惠之墓) 하란 명을 내렸다. 산동성 신태시(山东省新泰市)에 유하혜의 묘(柳下惠墓)가 있다. 이를 화성묘(和聖墓)라 한다. [27] 신원이 불명한 화성(和聖) 유하혜(柳下惠)다.
유(柳)자는 북쪽에서 글을 만들었다는 뜻의 “성할 욱, 울창할 郁; 文盛貌”의 다른 사음 자다. [28] 유하혜 (柳下惠) 란 북쪽 버드나무 고을에서 내려온 혜(惠, 해)란 뜻이다. 모두들 혼미하게 서술한 유하해(柳下惠)를 맹자의 뒤를 여불귀와 순자 (荀子)가 은유적으로 밝혀 기술 했다. [29] 고조선에 관한 기록에는 해(sun) 를 뜻을 이리저리 돌려 적은 글자가 많이 실려 풀이에 혼란이 있다. 삼한 땅 청구라고 하던 고조선 영역, 산서성 대군(代郡)과 요서군(遼西郡)에 버들 유(柳)자를 어근으로 하는 지명이 많이 있다. [30] 앞서 “화씨벽 (和氏璧), 새(玉璽)의 유래”에서 다룬 영역이다. [31]
그는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의 믿음을 지켰다. 세번이나 쫓아 냈지만 가지 않았다. 윤이 백이 공자(伊尹伯夷孔子)와 같은 반열의 성인으로 기술 했다.[39] 윤이 (伊尹)는 임자(任者), 백이(伯夷)는 청자(清者), 공자는 시자 (時者)의 성인이라 했다. 화자(和者) 란 뜻이 오묘하다. 또한 “柳下惠, 不羞汙君, 不卑小官”, “知柳下惠之賢”, “「柳下惠非朝隱者與” 도 있다.
유하혜는 더러운 군주라 해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낮은 직위에 있는 비천한 사람이 아니라 현인이다. 유하는 고조선(非朝)의 은자다.
그러나 출생지와 이름은 의문이다. 성인 반열에 넣어 화자 화해의 성인“聖之和者”이라 했다.
동방삭이 익살스러운 표현으로 [백익을 우부풍(益為右扶風), 중산부는 광록 대부, 자하는 태상(子夏為太常) 유하혜 (柳下惠為大長秋)를 환관의 우두머리]라 했다.
그의 간락한 행적과 부인에 관해 기록이 열여전 현명(列女傳 賢明) 편에 있다. 부인이 남긴 기록은 무능역지(莫能易之),즉 번역할수가 없었다.
설원 일문에 “유하혜 (柳下惠) 사후 여러 사람이 조사를 했다. 그의 부인이 조사를 하면서 그의 시호가 혜 (諡宜為惠 sun)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40]
삼국지에는 손성(孫盛)의 말을 인용하여 그를 이방인 동이라 유하리어 삼출 (柳下夷於三黜)이라 했다. 기록을 두루 살펴 보면, 신원 불명의 성인 유하혜 (柳下惠)는 북쪽 유울국 (柳郁國)에서 내려온 가야국 사람이 있다.
북쪽 금미달 지역을 버드나무 가지가 느러진 낙원으로 묘사한 시문이 많이 있다. 북부여기에 시조의 어머니를 유화(柳花)다. 요서 변한 (變汙) 땅에 있던 여울 유수(渝水)일대에 요새를 만들어 임유관(臨渝關)이라 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첫 전쟁지로 배구가 고죽국(孤竹國)이 옛 고구려라 했던 곳이다. [41] 오랫 동안 유성 (柳城) 이 선비족의 수도였다.
청련거사 (靑蓮居士) 이태백(太白)이 남긴 춘일독좌(春日獨坐)에서 “연맥청청 유자비 (燕麥青青遊子悲), 하제약 유욱금지(河堤弱柳郁金枝), 아재하남 별리구 (我在河南別離久)라 읊었다.
유하혜 (柳下惠)가 살던 시기를 공자 이전 또는 이후 사람이라 한다. [42] 미자하 (彌子瑕) 또한 춘추시대 사람으로 금미달 지역 사람이다.
한서에는 “사기에 실린 위양왕 (魏襄王:?- 기원전 317년) 때에 여자가 장부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었다 . [43] 사 한서 오행조에 실린 기록은 궁중에서 풍기 문란 한 사건들이 옛 부터 있었다는 예를 들었다. 그를 미자하(彌子瑕)라고 잘못 풀이 한다.[44] 미자하(彌子瑕)와 공자 제자 자로(子路; 기원전 542- 기원전 480년)는 동서간으로 변한 (卞) 사람이다.
겨울 동 결 결론: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란 고려시대 가요 “가시리” 에서와 같이 가야국을 떠나려는 왕이란 뜻이다. [45] 금미달을 떠나 아사달에 돌아가서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 이후 사람이 가실왕이다. 남쪽 시각에서 볼때는 돌아 왔다. 죽서기년에 죽어서 별이 되었다(王垣) 는 위무후(魏武侯, 기원전 424년 ~ 기원전 370년)가 산신이 되었다는 위대한 단군이었다.
북국 나라 왕이 별이 되어 자미원(紫微垣)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가실왕은 그 전 두 왕의 위업을 계승하려고 무리한 행위를 했다. 그를 만류 하려는 궁중악이 고려 가요 거시리다.
금미달 지역 유울국 (柳郁國)이 있었다. 유울국 (柳郁國)에서 내려갔다 하여 유하혜 (柳下惠)라 했다. 유하혜(柳下惠)를 성인 반열에 넣었지만 그의 생존 시기는 모호하다. 그가 살던 시기를 공자 전 후라 한다. 갖은 시련을 겪은 그를 이윤, 백이, 공자 와 같은 반열의 성인으로 기록 했다.
이문 (尼文)이란 문수보살 (文殊菩薩),즉 거루선인(佉樓仙人 )이 만든 글자를 뜻 했다. 신라에서 지도자를 이사금(尼師今)이라 한 어원인듯 하다.
소량 일대에 “평양, 아사달이라고 기록했던” 임분시 (臨汾市)와 운성시 (運城市) 가 있다. 가실왕 (嘉悉王)의 후손을 맹자가 만나 (孟子見梁惠王, 魏安釐王, 魏襄王, 魏惠成王) 대화를 했다. 그의 무덤이 도굴되어 단군 왕검 설화가 사실로 확인 되었다.
끝
Revised October 30, November 14th, November 21, 2023. Published in KAUPA Letters – April 1st, 2024. Adjusted June 7th, 2024
[1]. 三國遺事 : 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 壽一千九百八歲。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 尚書 商書 微子: 父師若曰:「王子! 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2]. 論語 泰伯: 孔子曰:「才難,不其然乎?唐虞之際,於斯為盛。有婦人焉,九人而已. 《說文》日初出東方暘谷,所登榑桑若木也 榑桑,神木,日所出也. 杻一名檍, 今宮園種之, 名萬歲木” “桑”은 약(若)으로香草名,即杜若北海海神名. 暘:日出也。从日昜聲。 《虞書》曰:「暘谷。」日初出東方湯谷,所登榑桑,叒木也。象形。凡叒之屬皆从叒.
[3]. 太平御覽 黃帝軒轅氏: 《帝王世紀》曰:黃帝,有熊氏少典之子,姬姓也. 其史倉頡, 又取像鳥跡,始作文字。史官之作,蓋自此始。記其言行,策而藏之,名曰書契。黃帝一號帝鴻氏,或曰歸藏氏,或曰帝軒.帝王世紀:青丘丹浦《歸藏啟筮》曰:蚩尤出自羊水,八肱八趾,疏首。登九淖以伐空桑。黃帝殺之於青丘。《帝王世紀》曰:有苗處南蠻而不服,堯征而克之,於丹水之浦。論衡 謝短: 故伏羲以卦治天下,禹案《洪範》以治洪水。古者烈山氏之王得《河圖》, 夏后因之曰《連山》;烈山氏之王得《河圖》,殷人因之曰歸藏;伏羲氏之王得《河圖》三聖重業,《易》乃具足。」問之曰:「《易》有三家。一曰《連山》,二曰《歸藏》,三曰《周易》
[4].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5]. 康熙字典 : Maitreya,新稱彌帝隸,梅低梨,迷諦隸,梅怛麗,每怛哩,梅怛麗藥,菩薩之姓也 。譯曰慈氏。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為補處之菩薩。光佛入滅,生於兜率天內院。「彌帝隸,古云彌勒,皆訛略不正也,正音云每怛哩。」西域記七曰:「梅怛麗耶,唐言慈,即姓也。舊曰彌勒,訛略也。」在密教,胎藏界之彌勒,坐於中台八葉院東北方之蓮上,金剛界之彌勒在賢劫十六尊中,坐於東方,羯磨會三十七尊中之西方金剛因菩薩,即為此尊之本誓,大輪金剛者,此尊之教令輪身也。
Xlibris: We Need Another Voice — Taoism to Zen Buddhism. Lee Mosol. April 11, 2023.
[6]. 大唐西域記:釋梵窣堵波前。是蓮華色苾芻尼欲先見佛化作轉輪王處。如來自天宮還贍部洲也。時蘇部底唐言善現。舊曰須扶提。或曰須菩提。皆訛也宴坐石室.凈飯王太子捨轉輪王位。悲愍六趣苦行六年。證三菩提具一切智。是吾師也. 全唐詩: 帝作轉輪王,師為持戒尊.
[7]. 晉書 列傳第二十一 皇甫謐 摯虞 束皙 王接: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
[8].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 真興王立。時年七𡻕.十二年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晉人以七絃琴,送高句麗。麗人雖知其為樂器
[9]. 낭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 真興王立。 時年七𡻕.十二年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
[10]. Silla from Zhina(Southern China) to Korean Peninsul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1]. 가시리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wikisource.org)
[12]. 說苑 脩文 : 積恩為愛,積愛為仁,積仁為靈,靈臺之所以為靈者,積仁也 。神靈者, 天地之本, 而為萬物之始也。凡從外入者,莫深於聲音,變人最極,故聖人因而成之以德曰樂, 樂者德之風,《詩》曰:「威儀抑抑,德音秩秩。」謂禮樂也。故君子以禮正外,以樂正內;內須臾離樂,則邪氣生矣,外須臾離禮,則慢行起矣;故古者天子諸侯聽鐘聲,未嘗離於庭,卿大夫聽琴瑟,未嘗離於前;所以養正心而滅淫氣也。呂氏春秋 安死: 禹葬於會稽,不變人徒.
[13]. 史記 樂書: 太史公曰:余每讀虞書,至於君臣相敕,維是几安. 故聞宮音, 使人溫舒而廣大。 故君子不可須臾離禮,須臾離禮則暴慢之行窮外;不可須臾離樂,須臾離樂則姦邪之行窮內。故樂音者,君子之所養義也. 不可須臾離樂,須臾離樂則姦邪之行窮內. Phonetic Loan Characters are Gojoseon Language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4]. 史記 樂書: 凡樂,圜鐘為宮,黃鐘為角,大蔟為徵,姑洗為羽,雷鼓雷鼗,孤竹之管, 云和之琴瑟. 孫竹之管,空桑之琴瑟,陰竹之管,龍門之琴瑟.
[15]. 옥새(玉璽)의 유래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6]. 孟子 萬章上: 彌子之妻與子路之妻,兄弟也. 說苑 雜言: 彌子瑕愛於衛君,衛國之法: 竊駕君車罪刖。 彌子瑕之母疾,人聞,夜往告之。彌子瑕擅駕君車而出,君聞之.呂氏春秋 貴因: 孔子道彌子瑕見釐夫人,因也。湯、武遭亂世,臨苦民,揚其義,成其功,因也。故因則功,專則拙。因者無敵。國雖大,民雖眾,何益?周易 繫辭上: 易與天地準,故能彌綸天地之道。 仰以觀於天文,俯以察於地理,是故知幽明之故。原始反終,故知死生之說。《虞書》曰:「暘谷。」日初出東方湯谷,所登榑桑,叒木也。象形。凡叒之屬皆从叒.
[17]. 孟子 梁惠王上: 孟子見梁襄王。語人曰:「望之不似人君,就之而不見所畏焉。 卒然問曰: 『天下惡乎定?』吾對曰:『定于一。』魏惠王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18]. 史記 列傳 太史公自序:司馬氏世典周史。惠襄之閒,司馬氏去周適晉。晉中軍隨會奔秦,而司馬氏入少梁。自司馬氏去周適晉,分散,或在衛,或在趙,或在秦。其在衛者,相中山。在趙者. 太平御覽 太史令: 《漢書》曰:司馬喜生談,談為太史公。魏安釐王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司馬喜 (戰國)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史記 魏世家: 安釐王元年,秦拔我兩城。二年,又拔我二城,軍大梁下,韓來救,予秦溫以和。 三年,秦拔我四城,斬首四萬。四年,秦破我及韓、趙,殺十五萬人,走我將芒卯。史記 趙世家: 武靈王元年,陽文君趙豹相。梁襄王與太子嗣,韓宣王與太子倉來朝信宮。武靈王少,未能聽政,博聞師三人,左右司過三人。及聽政,先問先王貴臣肥義,加其秩;國三老年八十,月致其禮.
[19]. 晉書 列傳第二十一 皇甫謐 摯虞 束皙 王接: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 或言安𨤲王冢,孫守真按:冢,原作「●缺字:冢冖下豖上有一橫」,餘同不贅。得竹書數十車。其《紀年》十三篇,記夏以來至周幽王為犬戎所滅,以事接之,孫守真按:一曰當作「以晉事接之」,脫「晉」字。三家分,孫守真按:點校本云「三家分何焯批云,「分」下當有「晉」字,殆當日諱而去之。」仍述魏事至安𨤲王之二十年。蓋魏國之史書,大略與《春秋》皆多相應。其中經傳大異,則云夏年多殷;益乾啟位,啟殺之;太甲殺伊尹;文丁殺季歷;自周受命,至穆王百年,非穆王壽百歲也;幽王既亡,有共伯和者攝行天子事,非二相共和也。其《易經》二篇,與《周易》上下經同。《易繇陰陽卦》二篇,與《周易》略同,《繇辭》則異。《卦下易經》一篇,似《說卦》而異。《公孫段》二篇,公孫段與邵陟論《易》。《國語》三篇,言楚、晉事。《名》三篇,似《禮記》,又似《爾雅》、《論語》。《師春》一篇,書《左傳》諸卜筮,「師春」似是造書者姓名也。
[20]. 史記 魏公子列傳: 魏公子無忌者,魏昭王子少子而魏安釐王異母弟也。昭王薨,安釐王即位, 封公子為信陵君。是時范睢亡魏相秦,以怨魏齊故,秦兵圍大梁,破魏華陽下軍,走芒卯。魏王及公子患之. 史記 世家 魏世家:二年,魏敗韓于馬陵,敗趙于懷。三年,齊敗我觀。五年, 與韓會宅陽。城武堵。為秦所敗. 十七年,與秦戰元裏,秦取我少梁。圍趙邯鄲。 十八年, 拔邯鄲。趙請救于齊,齊使田忌、孫臏救趙,敗魏桂陵. 史記 高祖本紀: ,高祖曰:「秦始皇帝、 楚隱王陳涉、魏安釐王、齊緡王、趙悼襄王皆絕無後. 赦代地吏民為陳豨、趙利所劫掠者,皆赦之
[21]. 東國輿地勝覽 :園幽御井黯一里有父伽郁國宮闢其旁有石井俗傳御井琴谷柳郁國嘉悉王樂師于勒家中國秦事而製琴音伽郁琴縣址三里有地名琴谷世傅勒率工人肄琴之地或云烘琴出於金海之柳僻國但金海柳槨世代無稱嘉悉王者恐出打跳舄是錦林王陵縣西二里許朴古藏俗稱錦林王陵束京堤在縣東十謀攻大聊雕雜傳新羅兵萊知有備而邊夜築鞅堤以示其眾新復縣金富軾云本加尸穹縣為高靈郡領縣景德主改名今未詳口接縣西十里地名有加西谷者凝尸音轉為西
[22]. 金仇衡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金仇衡或金仇亥即仇衡王(521年-532年在位),是朝鮮三國時期的金官伽倻的第10位國王。
[23]. 三國志 魏書三十 弁辰傳: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飲酒。 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 진한전(辰韓傳)-6: The birth place of gayageum (加耶琴) :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4]. 三國史記 : 十二年春正月,改元開國。三月,王巡守次娘城,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論衡 感虛: 堯之時,洪水滔天,懷山襄陵.
[25]. 東國輿地勝覽 : 弓裔將軍領共過貞州態一古柳下見川上有一女甚美問誰女對曰跳村長著 天弓參女木祖到.園幽御井黯一里有父伽郁國宮闢其旁有石井俗傳御井琴谷柳郁國嘉悉王樂師 于勒家中國秦事而製琴音伽郁琴縣址三里有地名琴谷世傅勒率工人肄琴之地或云烘琴出於金海之.戰國策 燕策 燕王喜使栗腹以百金為趙孝成王壽: 昔者,柳下惠吏於魯,三黜而不去
[26]. 太平廣記: 桓公北征孤竹,來至卑耳之谿十里,見人長尺. 漢靈帝光和元年, 遼西太守黃翻上書。 海邊有流屍,露冠絳衣,體貌完全。翻感夢云。我伯夷之弟,孤竹君子也。海水壞吾棺槨,求見掩藏。民嗤視之,皆無病而死。出《博物志》. 清泰末,有徐坦應進士舉, 坦遂詰其由, 樵夫濡瞍而答曰:「某比是此山居人,姓李名孤竹。有妻先遘沈疴,歷年不愈.
[27]. 晉書 帝紀第六 中宗元帝 :詔曰:「漢高經大梁,美無忌之賢;齊師入魯,脩柳下惠之墓。 其吳之高德名賢或未旌錄者,具條列以聞。」. 柳下惠墓(山东省新泰市柳下惠墓)_百度百科 (baidu.com). 岱史 : 柳下惠墓,在州治东南百里,一至今村人尚多展姓者,名曰柳里村。
[28]. 康熙字典·邑部·六 郁:《集韻》地名。 《前漢·地理志》右扶風有郁夷縣,膠東有郁秩縣, 又郁郅縣,屬北地郡。又郁郁,文盛貌. 說文解字: 渝:變汙也。一曰渝水,在遼西臨俞,東出塞. 北史: 文帝優冊為王。率靺鞨萬餘騎寇遼西,營州總管韋世沖擊走之。帝大怒,命漢王諒為元帥下詔黜其爵位。時餽運不繼,六軍乏食,師出臨渝關,復遇疾疫,王師不振。及次遼水.
[29]. 呂氏春秋 : 齊攻魯,求岑鼎,魯君載他鼎以往。齊侯弗信而反之,為非,使人告魯侯曰: 「柳下季以為是,請因受之。」魯君請於柳下季,柳下季答曰:「君之賂,以欲岑鼎也?以免國也?臣亦有國於此,破臣之國以免君之國,此臣之所難也。」於是魯君乃以真岑鼎往也。且柳下季可謂此能說矣,非獨存己之國也,又能存魯君之國。荀子 大略:子夏家貧,衣若縣鶉。人曰:「子何不仕?」曰:「諸侯之驕我者,吾不為臣;大夫之驕我者,吾不復見。柳下惠與後門者同衣,而不見疑,非一日之聞也。爭利如蚤甲,而喪其掌。」
[30]. 漢書 地理志下: 代郡:桑乾,道人,當城,高柳,馬城,班氏, 延陵, 狋氏,且如,平邑,陽原,東安陽,參合,平舒,代,靈丘,廣昌,鹵城。遼西郡:且慮,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賓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臨渝,絫.
[31]. 옥새(玉璽)의 유래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2]. 史記 刺客列傳:至易水之上,既祖,取道,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為變徵之聲,士皆垂淚涕泣。又前而為歌曰:사기열전 1 :김원중 옮김.2007년 믿음사. P.657 슬픈소리이다.
[33]. 燕丹子 卷上:高漸離擊筑,宋臆和之。論衡書虛:《傳書》又言:燕太子丹使刺客荊軻刺秦王,不得,誅死。後高漸麗復以擊筑見秦王,秦王說之;知燕太子之客,乃冒其眼,使之擊筑.。
[34]. 史記 殷本紀: 帝武丁即位,思復興殷,而未得其佐.得說於傅險中。是時說為胥靡,筑於傅險。
[35]. Silla from Zhina(Southern China) to Korean Peninsul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6]. 三國史記: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加耶亡國之音. 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https://zh.wikipedia.org/zh-hant/嘉悉王. 热河省 (中华民国)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37]. 三國史記 雜志第一: 玄琴之作也,新羅古記云:「初,晉人以七絃琴,送高句麗.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箏形如瑟。」 羅古記云:”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豈可一哉,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造十二曲。後,于勒以其國將亂,攜樂器,投新羅眞興王。王受之,安置國原,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傳其業。
[38]. 고구려의 삼경(三京) 장안성(長安城)과 임유관(臨渝關):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9].孟子 萬章下 : 「柳下惠,不羞汙君,不辭小官。進不隱賢,必以其道。 孟子曰:「伯夷, 聖之清者也;伊尹,聖之任者也;柳下惠,聖之和者也;孔子,聖之時者也. 韓詩外傳 : 王子比干殺身以成其忠,柳下惠殺身以成其信,伯夷叔齊殺身以成其廉,此三子者,皆天下之通士也,豈不愛其身哉. 列女傳 柳下惠妻:魯大夫柳下惠之妻也。柳下惠處魯,三黜而不去, 憂民救亂。妻曰:「無乃瀆乎!君子有二恥。國無道而貴,恥也;國有道而賤,恥也。
[40]. 抱朴子內篇: 故孟子謂伯夷,清之聖者也;〔柳下惠,和之聖者也;伊尹,任之聖者也〕。 吾試演而論之,則聖非一事。 孟子: 孟子曰:「伯夷,聖之清者也;伊尹,聖之任者也;柳下惠, 聖之和者也;孔子,聖之時者也。孔子之謂集大成。韓詩外傳: 伯夷、聖人之清者也,柳下惠、 聖人之和者也,孔子、聖人之中者也。說苑 佚文: 柳下惠死,人將誄之。妻曰: 「將述夫子之德 , 二三子不若妾之知。」為誄曰:「夫子之不伐,夫子之不謁,諡宜為惠。」弟子聞而從之. 太平廣記 詼諧一 東方朔: 益為右扶風 仲山甫為光祿。百里奚為典屬國。柳下惠為大長秋,
[41]. 고구려의 삼경(三京) 장안성(長安城)과 임유관(臨渝關):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康熙字典:渝:《唐韻》羊朱切《集韻》《韻會》容朱切,𠀤音兪。《說文》變汙也。《爾雅·釋言》渝,變也。《詩·鄭風》舍命不渝。水名。《說文》渝水,在遼西臨渝,東出塞.
[42]. 柳下惠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史記 仲尼弟子列傳: 孔子之所嚴事: 於周則老子;於衛,蘧伯玉;於齊,晏平仲;於楚,老萊子;於鄭,子產;於魯,孟公綽。數稱臧文仲、柳下惠、銅鞮伯華、介山子然,孔子皆後之,不并世. 史記 孔子世家: 謂「柳下惠、少連降志辱身矣」
[43]. 漢書 五行志 : 史記魏襄王十三年,魏有女子化為丈夫。京房易傳曰:「女子化為丈夫, 茲謂陰昌,賤人為王;丈夫化為女子,茲謂陰勝,厥咎亡。」一曰,男化為女,宮刑濫也;女化為男,婦政行也。彌子瑕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44]. 孟子 萬章上: 彌子之妻與子路之妻,兄弟也. 呂氏春秋 慎大覽 貴因: 禹之裸國, 裸入衣出, 因也。墨子見荊王,錦衣吹笙,因也。孔子道彌子瑕見釐夫人,因也。湯、武遭亂世,臨苦民,揚其義,成其功,因也。故因則功,專則拙。 彌子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45]. 가시리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wikisour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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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마지막 단군이다. 수유( 須臾) 라 했다.
봄 춘 기: 거문고 (琴) 와 가야금
궁중 아악은 제사와 같이 (祭祀 樂) 시원이 요원 하다. 오랜 시간을 두고 동북아시아에 흐터져 살던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기록은 현지음을 가차 전주하여 남겼다.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는 정치 판도가 자주 바뀌였고, 도가 유가 원시 불교등 가치관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현지음을 가차전주 하여 남긴 기록이라 풀이가 더더욱 난해 하다. 우리 역사의 핵심이 되는 단군, 특히 마지막 단군에 관해서는 더더욱 혼잡하게 기 했다.
중원기록에는 거문고와 가야금 (加耶琴)이란 글자가 없다. 삼국사기에 가야금에 관한 예기가 실렸다. [1] 삼국유사에는 “사통(私通)하던 분수승
(焚修僧)이 숨은 거문고 갑을 쏘라”는 설화 (射琴匣說話)가 있다. [2] 이는 신라가 한반도 경주에 정착 하기 전인 눌지왕 (訥祗 麻立干; 재위 417년 ~ 458년) 시절에 실렸다.
진흥왕 (眞興王, 재위: 540년 ~ 576년)이 551년에 개원개국 (改元開國) 하고 삼월에 낭성(娘城)을 순찰하다 우륵(于勒)이 제자들과 같이 니문을 읽을 알고 말소리를 아름답게 (尼文知音樂) 하여, 왕이 특별히 환대했다. 이러한 한글 어순을 잘못 풀이 하여 이문(尼文)을 사람 이름으로 풀이 한다.
사마천의 아버지(談)가 도당씨 (陶唐氏)의 수도(唐都; 아사달?)에 가서 천문과 역(易) 도론(道論)을 배웠다.[3]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 (山神)이 되었다는 글자를 [멀리 멀리 산속에 들어가 오래 오래 산 사람이란 상형글자 “僊 仙遷”로 기록 하여 불가에 입적한 사람 (尼) 으로 기록 했다. [4] 금미달(今彌達)을 귀신 또깨비가 사는 곳이란 뜻에, 신령 령 령구(靈丘)라 하고, 이를 음차 하여 영지현 (令支縣),영지(靈芝) 버섯 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귀신 또깨비를 천독 (天毒) 또는 영수(靈壽)이라 하여, 그가 사는 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방홀산(方忽山)이라 했다. 이를 고유(高柳) 북쪽 안문산(雁門山)이라 했다.
남만주에서 탄생한 고려(高麗)는 이자겸(李資謙,? ~ 1127년)에게, 동진이 모용씨에게 주었던 조선공이란 작위보다 더 영역이 넓은 조선국공(朝鮮國公) 이란 칭호를 주고, 그가 귀양간 전라도 해변 마을에 영광(靈光) 이란 이름을 붙였다. [5] 그 일대에는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이 생겼다는 정읍 (井邑)이 있다. 모두 마지막 수도 금미달과 관련이 있는 이름자다.
왕이 머물었던 하임궁(河臨宮)은 임유관(臨渝關)을 새운 요서(遼西)에 있었다. 유(渝)자를 여러 글자로 적은 변한(弁韓)과 비슷한 글자, 변오/우(變汙)라 했다. 하임(河臨)은 임유(臨渝)와 같은 뜻으로 이 또한 한글 어순이다. 한고조가 수모를 당한 마읍전투(馬邑戰鬪, BC 133)가 있었던 곳이다.[6] 람전 이라 기록된 청구(靑丘) 땅에 있었다.[7] 그곳 고유(高柳) 에 있던 유울국(柳郁國), 즉 가야국 가실왕 (加耶國嘉悉王) 이 옛부터 전해 오던 7현금에, 일년을 상징 하는 12 현을 더해 만든 현악기다. 가실왕 (加耶國嘉悉王) 이 만든 현악기로 그를 떠나 보내는 애절한 사연을 읊은 이별곡이 고려 가요 가시리다.
국란이 생겨 우륵이 가야국에서 악기를 들고 신라에 투항해 왔다 하여 악기 이름을 가야금이라 한다. [8]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가야국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는데, 왕이 말하기를 여러나라 방언이 서로 다르니 어찌 성음을 같게 할수 있겠나” 하는 문구가 있다. 진흥왕 시절에는 당나라가 없었다. 그 때 한반도에 나타난 신라 가야 영역에 말이 통하지 않을 많은 나라가 없었다. 가야국 가실왕이 살던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원이었다.
국란이란 삼가분진(三家分晋) 때 부터 진(秦) 시황이 고조선 마지막 수도 금미달 지역을 흡수한 전국시대다. 그러한 혼란기에 금미달 지역 사람들이 사방으로 흐터졌다. 남조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倭 百濟 新羅 任那加羅” 일곱 나라를 왜왕이 다스렸다고 했다. 같은 글자 “新羅 任那 加羅 倭”가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실렸다. 대만섬에는가라호 (加羅湖)가라산 (加羅山)이 있고,아리랑의 어원인 아리산(阿里山)이 있다.[9] 같은 어음 아리수(夫餘奄利大水) 가 부여에 있었다. 그 큰 강을 추모왕이 건너 비류곡홀본(沸流谷 忽本,卒本) 부여에 이르렀다. 같은 글자 신라(新羅) 가 한반도를 통일 했다. 신라 지증 마립간 (智證麻立干, 437년? ~ 514년) 때에 한반도로 수도를 옮기고 , 지나(支那) 라고 부르던 중국 남쪽지역에 살던 “신라 백제 임나가라 왜”가 대만섬을 지나 한반도로 이사 오던 시기였다.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중국식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전함(戰艦)을 만들어 [높은 산봉우리 나라] 우산국 (于山國), 울릉도(鬱陵島) 를 정벌하고 배를 만드는 부서를 설치 했다.[10] 옆에 있던 바위섬 독도는 울릉도에서 보인다. 사람이 살지 않아 기록하지 않았다.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우륵이란 글자가 없다. 진서 위서 십육국 춘추 등 여러 중국 사서에는 근준의 난 (靳準之亂)이 있고, 우륵 (于勒)은 어륵(於勒) 또는 선우륵(鮮于勒)으로 금미달 영역을 통치 하던 전후조록 (趙錄)에 실렸다.[11] 전국시대에 금미달 영역에 조(趙) 나라가 나타 났다. 그곳 변한(卞韓)의 지도자란 뜻에 변화벽 (卞和璧) 이라고도 부르는 화씨벽(和氏璧)의 출원지다. 그 지역을 삼한 (三韓) 땅 청구 (靑丘)라 했다. 청주(菁州) 가야국(加耶國)에 살던 가실왕 (嘉悉王)이 남쪽 중원으로 내려 갔다. 중원기록에는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읽을 수가 없었다. 옛적 부터 전해 오던 이상한 글자 기자 (奇字), 예자 (隸字, 此國篆隸諸書)에 능통한 고야왕 (顧野王)이 옥편을 만들었다. [12] 그를 양나라의 이승(異僧) 선율사 (宣律師) 라고 했다. 즉, 다른 지역에서 온 현악기를 잘 다루던 사람이란 뜻이다. [13] 중국 고씨성(顧姓氏)은 상나라 이전 곤오씨를 시조라 한다. 고야(顧野)라고 읽는 구야(gùyě)란 어음은 가야(加耶)의 다른 사음자가 분명 하다. 신해혁명 이후 나타난 의고파의 고힐강(顧頡剛)또한 가야국의 후손이라 본다.
금미달을 떠나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 (山神, 神仙)이 되었다는 단군을 중국기록에는 수유(須臾), 화자(和者), 화성(和聖), 성지화자 (聖之和者), 유하혜 (柳下惠)라고 기록 했다. 태평어람에는 이승(異僧) “須臾還隱”이라고 실렸다. 수유(須臾)란 두 글자 어음 풀이가 모두 오묘하다. 일설에는 기자 (箕子)를 서여 (胥餘) 또는 수유 (須臾)라 한다. [14] 수유 (須臾)란 명사는 고조선과 관계가 있는 글자다. 설원 수문(脩文)편과 사기 악서에 수유를 보내는 송별 예식(須臾離樂, 須臾離禮)이란 문구가 실렸다.
오늘의 산서성 대현(代县; Replaced. What or Whom? Three Kahan Replaced 삼감三監)이 금미달 영역이었다. 지도자를 대신한 세 지도자가 나왔다는 뜻이 있다. 그곳을 지나는 여울을 쌍건하(桑乾河), 호타하(滹沱河), 치수(治水), 성수(聖水)라고도 불렀다. 영정하(永定河)와 같이 발해만 천진(天津)을 지나는 해하(海河)의 지류다. 它 뱀 사(snake), 다를 타,수유(須臾; serpent. a noxious snake) 라고 하는 명사가 나타난 곳이다. 그 곳을 고유(高柳)라 했다. 산해경에는 우가 공공의 신하 였던 상유 (禹殺相柳)를 죽여 피가 달과 별이 되였다는 기록이 있다.[15] 매우 짧은 시간 이라고 풀이한 수유( 須臾: 臾잠깐 유,약한 활 유. 須:面毛也)란 봉변 당한 귀인의 후손 이란 뜻이 있다. 수유란 글자의 출원지는 북쪽에 수도(玄都)를 두고 숙신씨(肅愼氏)와 같이 있던, 북부여(鳧臾, 卽扶餘) 의 출원지로 알려진 삼한 땅 청구다. 전국시대 위(魏) 나라 재상 전유 (魏相田需)가 쌍간하 유역에 살았다. 그 곳을 람전 (藍田) 이라고도 했다.[16]
여름 하 승: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가야금(加耶琴)을 만들다.
가야(加耶)란 어음에서, 가량(加良), 가라 (伽羅, 加羅), 가람(伽藍),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金官伽倻) 등등 여러 이름이 나타났다. 한국어에 가라마(加羅馬)란 명사가 전해온다. 수경주에는 가야국 (加耶國)이 있던 곳을 (가)랑현(良鄉)이라 했다. 그 곳을, 옛적 연나라 상곡군(故燕地, 上谷郡) 을 지나는 “성수(聖水)라고도 부르던 영정하 상류에 탁수 (涿水),도수(桃水), 역수(易水 ), 상간하 (桑乾河) 등 여러 지류 연안” 이라고 설명 했다. [17]가람(伽藍)이란; 람전(藍田), 즉 청구(靑丘)에 있던 가야국 (加耶國)을 떠난 지도자란 뜻의 “監 볼 감, 살필 감, 헤아릴 감” 자에 초두 변(艹)을 붙여 비하한 글자다.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설화를 가차전주한 이름이 가람 신명(伽藍 神名)이라 하고, 큰 거위를 가람조(伽藍鳥: 鵝之大者)라 했다. 산신이 되었다는 마지막 단군을 미륵(彌勒), 그 이전 단군을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름은 양거(名儴佉) 라고도 했다. 양 (襄,陽,汾陽)을 떠난 단군이 글자를 만들었다.
전국시대에 원시불교가 황제가 자부선인 (紫府仙人)을 만났다는 청구에 들어 왔다. 불가 기록에 거루/가라선인 (Khara; 佉盧. 佉樓仙人) 이 창힐 이전에 글자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금에 관한 예기의 출차를 신라고기 (新羅古記)라 했다. 그 시절에 임나가량(任那加良), 즉 임나가라가 있던 산동성 사물현 (史勿縣) 사람 강수선생 (强首先生)이 나타났다. 그곳에 있던 가야국 (加耶國)과 싸우다가 청혼을 원하고 신라에 흰꿩을 바쳤다. 그일대 황하 지류 문수(汶水) 수계 편안할 녕 녕양현(寧陽縣)에 사구(蛇丘)란 이음이 있었다. 수유(須臾)라고 부르던 유하혜(柳下惠)가 정착 했던 곳이다. 이를 동관 한기에는 대군 고유(代郡高柳)에서 나타난 삼족오가 산동성 패현(三足烏集沛國)에 자리잡았다고 했다. 신라는 법흥왕이 처음으로 남북조 시대 양 (梁; 502년-507년)나라에 방물을 바쳤다. [18] 강수(强首,? ~ 692년)가 사서오경에 능통하여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답서를 쓰게 하였다. [19] 통일 신라 초기에는 중원의 고전을 그와 같이 풀이할 사람이 없었다. 사찬(沙飡)으로 임명된 강수와 관련된 지명 또는 명사 “任那加良, 沙汭, 沙梁, 昔諦”, 그리고 중국문헌에 실린 임군(任郡) 임국(任國), 임성(任城), 휴인(休忍)”은 모두 대왕 비문에 실린 임나가라 (任那加羅) 일대에 있던 이름을 가차 전주한 글자다.[20] 사수현은 옛적에 사물현 (泗水縣,本史勿縣) 이라 했다. xx 하지 말아라 (勿: must not, do not; never)는 뜻 글자는 물(water) 수자를 가차한 글자다. 이렇게 한중 고전 (韓中古典)에는 한국어음이 많이 실려 있다.
국한사전(國韓辭典)의 대명사 옥편(玉篇)은 옛적 부터 전해 오던 이상한 글자 기자 (奇字)에 능통한 고야왕 (顧野王; 519-581)이 만들었다. 옥편이란 글자를 새겨 놓은 옥돌이란 뜻이다. 옥새 (玉璽) 와 같이 북쪽 홍산문화권 에서 나타났다. 호공만(胡公滿)의 후손으로 알려진 진(陳) 나라는 춘추시대 산동성 서쪽에서 나타나 동쪽으로 밀렸다가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밀려 복건-광동성 일대에서 수(隋, 581년- 619년)나라에 정복 당했다.[21]
고야왕의 옥편(玉篇) 일부가 바다를 건너 한국과 일본에 이르렀다.
수유이악(須臾離樂)이 고려 가요 가시리다:
수유이악(須臾離樂)이란 수유가 떠나는 이별가 란 뜻이다. 같은 문구가 설원 수문 (脩文), 즉 제단에 바치는 글편에 실렸다. [22] 수유(須臾)를 특별한 사람이었다. 영대 (靈臺)에서 사용하는 악 (樂)은 변인최극 (變人最極)이라, 즉 변한 (弁韓, 卞 示; 變隸) 사람들이 제단(祭壇 Alta)에 드리는 음악이 최고 였다는 뜻이다. 이를 주 문왕을 찬미한 가악(假樂. 遐樂 Ha-ak/ 하악)이라 했다. 수유(須臾)란 예맥족의 지도자 사수(斯須)을 따서 가차 전주한 글자다. [23] 두루미 미자 미륵 (彌勒)과 같이 금미달 (今彌達)을 떠난 유하혜(柳下惠/해 sun)는 단군과 같은 뜻이 있다. 고구려 에서는 [부싯돌로 불을 처음 피운] 수인 (燧人)씨를 상징 하는 수신 (隧神· 禭神)을 모셔 개천절을 치루었다. 수유이악 (須臾離樂) 이란 수신 (隧神· 禭神) 을 섬기던 후손 어느 지도자가 떠나는 사연을 읊은 아악이란 뜻이다.[24] 수유란 별명을 붙인 사람을 여러 뜻으로 풀이 했다. 일자 천금이란 별명이 붙은 여씨춘추 (呂氏春秋)에 삼가 분진 시대에 나타난 조나라의 시조 조 양자 (趙襄子,? ~ 기원전 425년)와 수유( 須臾)란 글자를 결부 시켰다. [25]
공자에게 현악기 연주를 가르쳤다는 스승 양자(孔子學琴於師襄子)란 글자는 풀이가 다양하여 시대 판정이 혼미 하다. 노자 (老子)가 복수를 뜻하듯 양자 또한 양 (襄)에 살던 사람(儴)이란 뜻으로 풀이 할수도 있다.[26] 양, 즉 오늘의 산서성 태원 (太原), 진양(晋陽)을 떠난 사람이 글자를 만들었다. 그를 불가에서는 문수보살이라 했다. 이렇게 글자를 이리저리 돌려 평양 (平壤,平陽)을 두 다른 글자로 실었다.
순자 권학편에 “不如須臾之所學”, “若其義則不可須臾舍” 란 문구가 있다. 부여를 “夫餘, 不如[부루], 浮游 [부유]”라는 여러 글자로도 기록하여 현혹 시켰다. 청출어람이란 사자성어와 같이 수유(須臾)란 글자 풀이가 오묘 하다. [27] 불경에서는 [인생은 눈 짬깍 할 사이]란 뜻으로 쓰이었다. 중원 세력에는 달갑지 않은 뱀 같은 사람 이라고도 풀이 했다. 불교가 중원에 알려진 전국시대에 나타난 특출한 지도자를 수유(須臾)라 했다.
수유이악이란 문구를 군서치요에는 가악 가성왕야 (假樂, 嘉成王也)라 했고, 모시정의에서는 가성왕(嘉成王) 을 찬미한 노래의 발생지를 청주 (菁州, 靑丘)라 했다. 삼국사기에 가량악 청주 (加良岳菁州) 라한 곳과 같은 글자다. 가량악(加良岳)은 가야갑악(加耶岬岳)과 같은 곳으로 신라와 인접해있었다.
주례 (周禮)에는 지역에 따라 악기의 이름를 붙여 고죽지 관( 孤竹之管) 은, 화씨벽(和氏璧)이 나온 지역의 현악기(云和之琴瑟) 이라 했다. [28] 화씨벽이 나온 지역이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라고 옥새의 유래 에서 설명 했다. [29]
옛적 부터 청구에서는 고죽관 (孤竹之管) 이라는 현악기를 사용 했다. 고죽군이 살던 중산국 (中山國)을 하북성 령수현(靈壽縣)이라 한다. [30] 그 곳에 살던 지도자가 오래 오래 살았다는 뜻이 있다.
가야금 (伽倻琴) 의 유래:
가야국 (加耶國) 현악기를 가야금 (伽倻琴)이라 했다. 쌍건하 일대 금미달 지역에서 쓰던 현악기다. 현악기는 태고적 부터 있었다. 유목민이 쓰던 삼현금( 三絃琴) 악기가 해금 (奚琴), 호금 (胡琴)이다. 이에 현을 더하여, 현학금(玄鶴琴), 비파 (琵琶)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현악기 줄을 당기는 축(筑)은 본래 5현금으로 5음이 있었다. 수미(胥靡)가 불암(傅險) 성에서 5현금으로 연주 했다. [31] 고구려에 5현금이 있었다. 역수에서 연태자가 자객으로 형가와 그의 친구 음악가 고점리(高漸離) 즉 고점려 (高漸麗)를 보냈다. 고점려가 변한 사람들이 부르던 변치(變徵)소리를 내자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32] 자객 형가 (荊軻) 가 역수(易水) 를 건너 진나라에 가서 진시황을 살해 하려다 실패 하자 같이 갔던 고점려가 축(筑)으로 진시황을 때렸다. [33] 그 현악기를 들고 점점 멀리 떠나가던 사람이란 뜻에 고점리 (高漸離)라 했다.
산서성 진나라 사람들이 쓰던 7현금 현악기 (晉人以七絃琴)가 고죽국이 라던 고구려 (高麗本孤竹國)에 알려 졌다.[34]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북쪽에 있던 돌궐가한 막사를 찾아 가, 먼저 그곳에 가 있던 고구려 사신을 만나서 수양제에게 사연을 설명 하면서 나온 문구다. 고구려가 수문제의 아들 양량 (楊諒)이 이끌었던 수나라군을 대파한 임유관 (臨渝關)전쟁을 치루었던 곳에 고죽국이 있었다. 그곳이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 라던 금미달 영역이었다. 미륵이 살던 방홀산, 즉 궁홀산(弓忽山) 에 요새를 만들어 임유관 (臨渝關)이라 했다.
산서성 대현 일대에 석정곡전에 왕실 전용 우물 금곡(石井俗傳御井琴谷) 이 있었다. 통지 (通志)에는 변한을 산정한(山井韓)이라 했다. 석정 어정 (御井)이란 단군왕검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 (井 淸也. 伯益作井)이 생겼다는 뜻에 단군의 후손이 사용 하던 우물을 뜻했다. 그곳에 살던 유울국 가실왕(柳郁國嘉悉王)이 해안으로 내려와 신라 가까이 산동성에 정착 하여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라 했다. 그후 한반도 남단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실렸다. [35] 통일 신라 시대 , 경덕왕 (景德王,재위: 742년 -765년) 이 산동성 사물현(史勿縣)일대에 있던 옛 적 신라 임나가야 (加耶) 의 지명을 한반도로 옮기고, 가락국(駕洛國) 수로왕이 살던 김해시에 물을 끌어 드려 밭을 논으로 만들어 상형자 답(畓)자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36]
김 수로왕의 10대 손 김구해(金仇衡 金仇亥)가 법흥왕 (法興王, 재위: 514년 ~ 540년)에게 나라를 바쳤다. [37] 통설에 따라 삼십년을 한 세대로 계산 하면 신라 발생 초기가 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초기 기록에 김수로왕을 현명한 연로자로 기술 했다. 그 곳에서 변진전에 철(刀錢; 명도전)이 난다. 중국의 화패 같이 쓴다. 중국의 축과 같이 생긴 현악기 (有瑟)가 있다고 했다. [38] 삼국유사에 실린 금갑 (琴匣)이 삼국지에 실린 유금(有瑟) 이다. 가락국(駕洛國)이 가야국 (加耶國)이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남조 역사서에는 임나가라(任那加羅)로 실렸다. 발해만- 산동성 연안에 있던 시절에 가야금을 사용 했다.
도교(道敎)를 숭상 했던 시선(詩仙) 이태백(太白)이 남긴 춘일독좌 (春日獨坐)에 연(燕)나라 가까이에 있었다는 뜻에서 “연맥청청 유자비 (燕麥青青遊子悲), 하제약 류욱금지 (河堤弱柳郁金枝), 아재하남 별리구 (我在河南別離久)라 읊었다. 성할 욱, 답답할 울, 울창할 울(郁)이라고 읽는 글자는[ 울릉도 높은 산섬 우산국을 뜻한 글자와 같은 사음자로 높다]는 뜻이 있는 글자다. 유울국 가실왕(柳郁國嘉悉王)이 살던 곳을 고유(高柳)라 했다. 연(燕)의 영역은 금미달 영역을 뜻했다.
[산서성 진나라 사람들(晉人)이 쓰던 현악기가 고죽국이 라던 고구려 (高麗本孤竹國)에 알려 졌다.[39]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북쪽에 있던 돌궐가한 막사를 찾아 가, 먼저 그곳에 가 있던 고구려 사신을 만나서 수양제에게 사연을 설명 하면서 나온 문구다. 고구려가 수문제의 아들 양량(楊諒)이 이끌었던 수나라군을 대파한 임유관 전쟁을 치루었던 곳에 고죽국이 있었다. [40] ]
신라 가야 모두 발해만에서 내려 왔다. 신라 고기에 우륵을 열숙현 (省熱縣), 즉 열하성 사람이라 하고 그들이 부른 음악을 진(秦聲)나라 음성 (音聲) 으로 고조선 영역인 병주 양주 (幷梁二州) 지역이라 했다. 가야국 가실왕은 진(秦)나라가 친입 한 금미달 지역에 있었다. 가시리를 가야 망국 지음 (加耶亡國之音) 이라 했다. 왕이 하임궁(河臨宮)에 머물면서 가야금을 뜯는 소리를 들었다는 낭성(娘城)은 임유관(臨渝關)이 있던 금미달 영역이었다. 그곳에서 현명한 지도자를 이별하는 송별회가 열렸다. 우륵과 그의 제자들이 떠나야만 하는 왕이 되돌아 와서 대평성대 (大平盛代) 를 다시 이루기를 기원하는 애절한 감정을 가야금을 뜯으며 읊었던 노래다.
가시리의 출현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 사연이 그려졌다.
가시리 4장 후렴은 흔히 풀이 하는 “악기 소리를 흉내낸 말”이 아니다. “나ᄂᆞᆫ 위 증즐가”는 “대평성대(大平盛代)” 와 같이 당시 훈역 했던 어음 “위 증 증가 (危症增加)를 한글로 기록 했다. 두 어휘는 현제도 쓰이고 있다.
선학들이 가요의 발생지와 장소, 그 유래를 몰라 잘못 풀이 했다. 진흥왕 또한 가시리의 내력을 몰라 (남녀간의 애정을 읊은 음란한 음악)이라 했다.
후렴을 현대어로 풀이 하면 “나라는 위태로운 증상이 날로 증가 하는데 , 아 태평성대 여”가 된다.
신원 불명의 성인 유하혜(柳下惠):
고전에 유하혜 (柳下惠)란 글자가 혼잡하게 설명되어 있다. [41] 사마천은 유하혜 (柳下惠)와 공자의 관계를 혼미하게 기술 했다. 맹자에는 그를 성지화자야 (柳下惠,聖之和者也)라고 했다. 그는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의 믿음을 지켰다. 세번이나 쫓아 냈지만 가지 않았다. 윤이 백이 공자 (伊尹伯夷孔子) 와 같은 반열의 성인으로 기술 했다.[42] 윤이 (伊尹)는 임자 (任者), 백이(伯夷) 는 청자(清者), 공자는 시자 (時者)의 성인이라 했다. 화자(和者) 란 뜻을 오묘 하게 풀이 했다. 또한 “柳下惠, 不羞汙君, 不卑小官” , “知柳下惠之賢”, “「柳下惠非朝隱者與” 란 문구도 있다.
유하혜는 더러운 군주라 해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낮은 직위에 있는 비천한 말단 관리도 아는 현인이다. 유하는 고조선(非朝)의 은자다.
동방삭이 익살스러운 표현으로 [백익을 우부풍(益為右扶風), 중산부는 광록 대부, 자하는 태상(子夏為太常)으로, 유하혜 (柳下惠為大長秋)를 환관의 우두머리]라 했다.
그의 간락한 행적과 부인에 관해 기록이 열여전 현명(列女傳 賢明) 편에 있다. 부인이 남긴 기록은 무능역지(莫能易之),즉 번역 할수가 없었다.
설원 일문에 “유하혜 (柳下惠) 사후 여러 사람이 조사를 했다. 그의 부인이 조사를 하면서 그의 시호가 혜 (諡宜為惠:해sun)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43]
삼국지에는 손성(孫盛)의 말을 인용하여 그를 이방인 동이라, 유하리어 삼출 (柳下夷於三黜)이라 했다. 강희자전에 안문산이 고유북(鴈門山 在高柳北) 쪽에 있다고 했다. 기록을 두루 살펴 보면, 신원 불명의 성인 유하혜 (柳下惠)는 옥새(玉璽)의 시원이 되는 화씨벽 (和氏璧)이 나온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 사람이다. 전국시대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개혁 정책을 실시한 조 무령왕(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이 그곳에 있던 중산국을 정벌 하고 고유(高柳)란 이름을 붙였다. 유울국 (柳郁國) 수도를 고유 (高柳)라 했다.
고유(高柳)의 버드나무 유(柳: 木,卯: 木名)자는 설명이 혼잡 하다. 고유(高柳)의 버드나무 유(柳: 木,卯: 木名. 檉; 河柳)자는 설명이 혼잡 하다. 그러나 서왕모 숙진씨와 같이 순임금을 찾아 갔던 현도(玄都,玄菟)를 비하한 토끼 묘(卯:辰名)아침 별, 즉 목성(木星, 영어: Jupiter)을 뜻이 있다. [44] 예맥족의 수도 궁정에 서 있던 나무위로 샛별이 나타나면 세금을 바쳤다. 고조선의 수도가 “세성 (歲星)” 이란 명사의 발상지다. 세(歲:木星也)자에 물수변을 붙여 예맥(濊貊)이란 부족이름을 만들었다. 이들이 북쪽으로 밀여 가 살던 곳을 고유라 했다. 분수(汾水)를 따라 북쪽 분양(汾陽)으로 피란 갔던 고조선 사람들이 번성하여 기원전 1147년 (武乙元年)에 다시 옛 구주 땅으로 내려 (邠遷于岐周)왔다. 분양(汾陽)을 간략한 글자가 “邠”자다.
수도를 아사달에서 금미달로 천도 했던 사연이 유(柳)자에 남아 있다. 북쪽 수도란 뜻에 북경(北京)이라한 글자는 별(北本別字 Bei 빛 별 Star), 즉 북두 칠성에서 유래 했다. 하여 궁궐을 자금성(紫禁城) 이라 한다. [45]
황해남도 신천군 문화면을 본관으로 하는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발원지가 중산국으로 알려진 금미달이다. 그 일대 태원이 선우씨의 본향이다.
시경에 혜(惠)자가 여러 곳에 실렸다. 혜차중국(惠此中國)란 문구도 있다.
유하혜(柳下惠)의 후손을 만났던 맹자에는 수유( 須臾)란 글자가 없다. 내용을 살펴 보면 그를 “이루지명 (離婁之明), 즉 궁전을 떠난 현명한 사람” 이라 했고, 한국 기록에는 부루(夫婁 扶婁) 태자, 해부루왕 (解夫婁王) 이라 했다. 공자가 현악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는 양자(襄子)의 생몰이 혼잡 하듯, 유하혜(柳下惠)의 생몰 또한 공자 이전 사람이라 한다.
사마천이 미지수천리 (彌地數千里) 라 하던 고조선 영역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3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았다.
북쪽 금미달 지역을 버드나무 가지가 느러진 낙원으로 묘사한 시문이 많이 있다. 북부여 (北夫餘)기에 시조의 어머니를 유화(柳花)다. 요서 변한 (變汙) 땅에 있던 여울 유수(渝水)일대에 요새를 만들어 임유관(臨渝關)이라 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첫 전쟁지로 배구가 고죽국(孤竹國)이 옛 고구려라 했던 곳이다. [46] 오랫 동안 유성 (柳城)이 고조선의 후예인 선비족의 수도였다.
유울국 가실왕(柳郁國嘉悉王)이 살던 방홀산(方忽山)에 임유관을 설치 하고, 단군왕검 백익이 실행했던 납을 가평(更名臘曰嘉平)으로 바꾸었다. 그 지역을 평정 했다는 뜻이 있다.
해안으로 내려와 신라 가까이 산동성에 정착 하여 가야국 가실왕 (加耶國嘉悉王)이라 했다. 그를 중원에서는 유하혜(柳下惠) 라 이름 했다.
금미달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유울국 가실왕(柳郁國嘉悉王)을 보내면서 읊은 가요가 고려 가요 가시리다. 이를 수유이악(須臾離樂)이라 했다. 금미달에서 북부여가 나타났다.
류하혜가 산동성 노나라에 가서 죽어 여러 사람들이 조사를 했다. 부인의 조사가 열여전(列女傳 柳下惠妻)에 있다. 그가 살던 당시의 어려움과 그의 인품을 서술했다. 시호였다는 혜 (諡宜為惠:해sun)가 지도자의 성씨가 되었다. 부여의 시조를 해모수, 해부루라 한다. 뒤에 부여씨라 했다. 북부여를 떠나 새로 나라를 새운 고구려 또한 해를 성씨로 하다 높을 고(高)자로 바꾸었다.
공자를 만났다는 미자하 (彌子瑕) 또한 고죽국이 있던 금미달 지역 사람 이다. 한서에는 “사기에 실린 위양왕 (魏襄王:?- 기원전 317년) 때에 여자가 장부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었다 하여 여도지죄 (餘桃之罪)란 사자성어 와 도수(桃水)란 글자가 나타났다. [47] 그를 미자하(彌子瑕)라 한다.[48] 그와 공자 제자 자로(子路)는 동서간으로 변한 사람(卞人)이다. 전국시대 사람들이다.
동진의 초대 황제 원제 (晉元帝)가 319년에 유하혜의묘를 참배 (脩柳下惠之墓) 하란 명을 내렸다. 산동성 신태시(山東省新泰市)에 유하혜의 묘(柳下惠墓)가 있다. 이를 화성묘(和聖墓)라 한다. [49] 그 일대에 신라에 흰 꿩 (加耶國送白雉)을 바쳤다는 가야국이 있었다. 유울국 가실왕 (柳郁國嘉悉王) 이 신원이 불명한 화성(和聖) 유하혜(柳下惠)다.
전국시대 말기까지 대부분의 산동반도 동북부는 고조선의 영역이 었다. 단군 설화의 유래를 엿 볼수 있는 무씨벽화가 산동성 가상현(嘉祥縣)에서 나타났다. 산동성 낭아 서쪽에 대택(大澤) 이 있다. 호수 늪지대 서남쪽 패현(沛縣)에서 한고조 유방이 태났다.
가을 추 전: 작가 미상의 고려 가요 가시리:
고구려를 고려라 했다. 부여와 같이 고조선 발생시 부터 있던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을 떠난 단군 가문이 나라를 다스린지 1500년이다. 첫 수도 아사라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50] 천독 (天毒; 천독 애비, 천또깨비)이 다스리던 고조선의 수도가 상나라 이전 부터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산해경과 상서 미자편에 있다.
논어에 당우지제 어시위성 (於斯為盛)이라, 즉 예맥족(斯, 濊貊)이 요순 시절 부터 황하문명 발상지에 살았다.[51] 환웅의 아들이 그곳에 뜻이 있어 (북쪽 에서) 내려와 사마천의 고향에 고조선(意在斯焉古朝鮮)을 세웠다.
예맥족이 더좋은 무기(銕䥫)를 개발하여 서주를 몰락 시키고 중원을 석권 했다. [52] 관자에는 발조선 (發朝鮮), 북주후모(北州侯莫), 금국미란 (今國彌亂), 해왕지국 (海王之國)이란 문구가 있다. 북쪽에 있던 고조선 세력이 중원을 석권했다는 증거가 시경에 실린 혜차중국(惠此中國)란 문구다. 모시정의에 실린 변풍(變風)이란 글자를; 국풍 중 주남 (周南)과 소남(召南)을 제외한 13국풍이 모두 변풍 (變風)이라 했다. 삼한 (三韓) 중에 유독히 여러글자로 기록한 변한(弁, 示, 卞韓)사람들이 부르던 민요를 변풍 (變風)이라 했다. [53]
전국시대 후기에는 계속 북쪽으로 밀려 연산산맥 북부 산속에 있어 중산국 (中山國), 또는 선우국(鮮虞國)이라 했다. 서주의 발상지 가까이, 서안시 동쪽 영제시 포주진 (永濟市蒲州鎭) 에 있던 백이숙제 사당을 계속 북쪽 으로 옮겨 고죽(孤竹)이란 이름이 금미달 영역에 나타났다.
전국시대에 원시불교가 금미달 영역에 들어왔다. 불가에서는 금미달에 살던 마지막 단군을 미륵(彌勒) 또는 수유(須臾)라고 한다. [54] 미륵 (彌勒)이란 글자는 “굴래를 씨운 미란 뜻”이다. 미병(彌兵)이란 글자가 있다. 잘 훈련되어 명령에 복종하는 군졸 이란 뜻이다. 성은 자씨 (慈氏) 이름은 아일다(名阿逸多), 무능하여 이길수 없다는 뜻(譯曰無能勝)이라 했다. 예맥족(斯)의 지도자란 뜻을 자석(magnet) 에 비유한 표현이다. 새로 풀이 하여 석제의 노예 (新稱彌帝隸), 그 전 단군을 전륜왕 (轉輪王, 其先轉輪聖王), 이름을 양거 (儴佉)라 했다. 수도 였던 양(襄)을 떠나간 사람 이란 뜻이다. 하여 거루 (佉樓 佉盧) 또는 이루(離婁) 라고도 했다. 불경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란 이름이 있다. 신선 문수(文殊)란 글자를 다루던 보살이란 뜻으로 거루 선인(佉盧, 佉樓仙人)과 같은 사람이다 .[55] 거루 선인이란 대루각을 떠난 성인 이란 뜻이다. 청출어람이란 글자에 나타난 람전 (藍田山, 藍田, 藍田壁玉 藍三種. 令支縣之藍山), 즉 청구에 있던 가야(加耶)을 떠난 사람(伽)이란 뜻글자가 가람이다. 그를 사찰 안에 사는 신 (伽藍 神名) 이라 했다. 가야국 가실왕 (加耶國嘉悉王) 이 고조선 궁궐을 떠나 산신이 되었다는 마지막 단군이다. 그를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가야란 어음은 현제 한국 여러 이별(離別)의 노래에도 실린 “나도 가야지” 에서와 같이 오늘도 쓰고 있는 한국어다. 가실왕이란 [가시려고 마음을 결정한 왕]이란 뜻이다. 불가에서는 여러 글자로 기록 하여; 가라 (Khara 伽羅, 加羅) 또는 가람(伽藍) 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불경 기록에 거루/ 가라선인 (Khara; 佉盧. 佉樓仙人) 이 창힐 이전에 글자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다. 위진 혼란기에 위나라 역사서 (蓋魏國之史書)가 발굴 되었다. 모두 옷칠로 그려진 과두자 (漆書皆科斗字)로 적혔다. [56] 과두조전(科斗烏篆) 자가 거루 선인 (佉樓仙人)이 쓰던 고조선 문자다. 주 선왕 시절에 산서성 북쪽 대원에서 중산보(仲山父)가 잡혀와 구전해 오던 예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전(篆)자라 한다.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이 노예(奴隸)가 되여 만든 예서체 (隸書體)가 현제 쓰는 번체자(繁體字)의 기원이 되었다.
위진 남북조 시대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옮겨 갔다. 고야왕이 북쪽에서 쓰던 글자를 남쪽 사람들이 알수 있도록 옥편을 만들었다.
진서와 책부원귀에 [금미달에서 떠난 사람들이 남중국 해안 4000 여리에 걸쳐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이를 변한 사람 지도자, 왜왕이 다스렸다는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이라고 했다.
[이를 뒤에는 백가 제해에서 류래된 나라 에는 22개의 담로(二十二擔魯)가 있다고 했다. 2/21/2024]
[가야국 (加耶國)의 후손들이 뱃길로 Ceylon (師子國. 無憂國)에 도착 했다. 무역상 승가라(僧伽羅)에서 오늘의” Sinhala”란 명사가 나타났다고 본다. 동쪽에 있는 다른 승가라(僧伽羅) 국에 이르는 통로에 포구 [浦口]가 Singapore의 어원이라 본다.]
[ 중원 세력은 마지막 단군을 독사 수유(須臾) 라고도 했다. 그가 떠나가는 특별한 행사, 즉 수유이례(須臾離禮 須臾離樂) 의식을 취했다. [1] 대당서역기 스리랑카 (僧伽羅國) 설명에 미력세시 (彌歷歲時) 란 문구가 있다. [2] 지낼 력 (歷)자에는 떠났다 (離)는 뜻이 있다. 마지막 단군이 금미달을 떠다나던 시절(歷)에 남천축국 해상에서 풍랑을 만났던 때에 매달려(梅怛麗, hang on)란 뜻이 있는, 도솔천(兜率天)에 이른 다는 미륵불이 나타났다. [3] 불가에서 미시 (彌時; Sabbath)가 서구종교에서 안식년의 개념이 되었다. 가야사람들이 미륵불을 모시는 신앙을 동북아에 전했다
[1]. 佛學大辭典 : 彌勒為名。 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 南天竺際大海. 大唐西域記 : 隱士曰。我求烈士 彌歷歲時。幸而會遇。奇貌應圖非有他故願。一夕不聲耳。烈士曰。死尚不辭 商主於是對羅剎女王歡娛樂會。 自餘商侶各相配合。彌歷歲時皆生一子。時僧伽羅夜感惡夢知非吉祥。贍部洲有大商主僧伽者。其子字僧伽羅
[2]. 佛學大辭典 : 彌勒為名。 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 南天竺際大海.
[3]. 佛學大辭典 : 彌勒為名。 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 南天竺際大海. 大唐西域記 : 隱士曰。我求烈士 彌歷歲時。幸而會遇。奇貌應圖非有他故願。一夕不聲耳。烈士曰。死尚不辭 商主於是對羅剎女王歡娛樂會。 自餘商侶各相配合。彌歷歲時皆生一子。時僧伽羅夜感惡夢知非吉祥。贍部洲有大商主僧伽者。其子字僧伽羅
大唐西域記 卷第十一 :時贍部洲有大商主僧伽者。其子字僧伽羅。父既年老代知家務。與五百商人入海採寶。風波飄蕩遇至寶洲.
僧伽羅國。古之師子國。又曰無憂國。即南印度。其地多奇寶。又名曰寶渚。昔釋迦牟尼佛化身名僧伽羅.
February 18, 2024]
[僧伽羅國 설명에 [彌歷歲時] 란문구가 있다. 彌가 떠나던 (離)시절(歷)이란 뜻으로, 중원에서 개발한 달력 이전이란 뜻도 있다.
겨울 동 : 결론
거문고를 현학금(玄鶴琴), 또는 간략 하여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가시리를 영산회상 (靈山會相)을 읊은 악곡의 서곡이라 한다. [57]
현학금(玄鶴琴)의 발생시대와 장소는 위진 시대(魏晉時代) 가 아니라, 고조선 영역 산서성에 있던 서주의 제후국 진(晉)이 조(趙), 위(魏), 한(韓) 세나라로 부서지던 시절이다. 고조선 세력이 밀려 안문산 (鴈門山)이 있는 중산국 또는 고죽국(高麗本孤竹國) 으로 알려진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영역에 살던 가야국(加耶國)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다. 현학금 (玄鶴琴) 이라고 하던 거문고 (琴)가 가야금 (加耶琴)이다. 가야금의 거-문 (검은)은 옛적 어음이다.
거문고는 옛적 우리 말이요 가야금(加耶琴) 이란 가차전주한 글자다.
현도군(玄菟郡)에서와 같이, 중원 세력의 수도 북쪽 먼 곳에 있던 변한(弁韓 靈丘) 즉 청구(靑丘)를 떠나가는 가야국 가실왕 송별곡 (嘉悉王)이 “가시리”다. 북쪽에 살던 “변한 사람들이 제단 (靈臺)에서 “떠나가는 지도자를 위해 가야금을 뜯으며 읊은 아악”을 수유이악 (須臾離樂) 그 행사를 수유이예(須臾離禮 )라 했다. 즉 지도자 수유 (聖之和者,佉樓仙人) 를 보내 면서 읊은 이별곡이 고려가요 가시리다. 전국시대에 그곳에 원시 불교 가 들어와 마지막 단군을 미륵(彌勒) 라고 했다. 한국어로 두루미(彌)라 부르던 큰 새를 중원 사람들이 학 (鶴) 또는 기러기 안 (雁) 이라고 풀이했다. 산서성 대현(代縣)에 있는 천하 요새 관문을 안문관 (雁門關)이라 했다. 그곳이 미지수천리 (彌地數千里)를 빼앗아 장성을 쌓았다는 고조선의 금미달 (今彌達) 영역이었다.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란 고려시대 가요 “가시리” 에서와 같이 가야국을 떠나려는 왕이란 뜻이다. [58] 금미달을 떠나 아사달에 돌아가서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이 가실왕 (嘉悉王)이다. 고유 (高柳)라 새로 이름한 북쪽 유울국 (柳郁國) 에서 내려간 불평이 없는 현명한 사람이라 하여 화지성자(和之聖者) 유하혜 (柳下惠)라 했다. 공자는 유하해를 절개를 굽힌 사람이라 했다. 한편 맹자는 갖은 시련을 겪은 유하혜 (柳下惠)를 이윤, 백이, 공자(伊尹, 伯夷, 孔子)와 같은 반열의 성인으로 기록 했다.
유하혜는 전국시대 북쪽 금미달 지역에서 내려온 사람이다. 그의 묘 (柳下惠墓)가 가야국이 있던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동북쪽 신태시 (山東省新泰市)에 있다. 신라고기 (新羅古記) 에 실린 강수 (强首)의 고향은 산동성 사물현 (史勿縣; 泗水縣)이었다. 그 곳에 예맥(濊貊, 斯 )족이 살았다 하여 사수(泗水, 斯水)라 했다. 이를 음차한 글자가 사물(史勿)이다. 공자는 사수현 (泗水縣) 곡부(曲阜)에 묻혔다. 맹자의 고향 또한 그 일대다.
유울국 (柳郁國)에 살던 유하혜(柳下惠)의 후손 위사(魏嗣) 들을 맹자가 만났다. 소량 (少梁)에 갔다 하여 맹자는 “양 혜왕 (梁惠王)이라 했다. 사마천은 위세가 와 위공자열전에서 안희왕 (安釐王) 이라” 했다. 그들은 단군 설화를 알고, 기자가 갔다는 조선을 익피 우지자 어 기산지음 (益避 禹之子 於箕山之陰) 이라 했다. 기자가 은퇴 했다는 곳에 단군왕검 백익이 은퇴 했었다. [59]
양혜왕 (梁惠王, 魏安釐王, 魏襄王, 魏惠成王)의 무덤 급총이 도굴되어 1900여년간의 단군 세기가 사실로 확인 되었다. 중원에는 옛적부터 중국 고전에 [우본기 禹本紀, 회구지 懷舊志. 비씨경 費氏經]이란 책, 즉 [빛을 숭상하던 사람들의 후손(天孫)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그 내용을 근거로 사마천은 하우 (夏禹)씨를 시조로 하는 하본기 (夏本紀)를 만들었다. 그 혈통을 이어온 지도자를 자부선인 (紫府仙人)이 이라 했다. 북극성을 숭상하는 부족의 지도자가 옛적 부터 사는 곳 (故宫) 이란 뜻에 궁전을 자금성 (紫禁城)이라 했다.
금미달에 살던 유울국 가실왕(柳郁國嘉悉王)이 산동성에 정착 하여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라 했다. 그 곳에 이를 화성묘(和聖墓)가 있었다. 가야국 가실왕 (加耶國嘉悉王)이 지녔던 옥새를 화씨벽(和氏璧, 和氏之璧, 和之璧, 井里之厥也)출원지 이름을 붙여 수극지벽 (垂棘之璧)이라 한다. 이를 진시황제가 얻어 한나라에서 전국옥새 (傳國玉璽)로 사용 했다.
가야국 왕 (加耶國王)이 남쪽으로 내려가 옥편(玉篇)을 만들었다. 한반도와 일본으로 건너와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대명사가 되었다.
신라 왕(王)을 이사금 (尼師今 琴) 이라 하던 명칭은 [거문고를 다루던 신선 같은 사람 (仙人)이란 뜻]이다. 고려가요 가시리는 산정한(山井韓)이라 고도 부르던 곳에서 수신 (隧神· 禭神) 을 섬기던 예맥족의 지도자 유하혜, 가야국 가실왕이 떠나는 사연을 우륵이 주관하여 읊은 아악이다.
끝
Revised October 30, November 14th, 24th, December 28th, 2023. January 9th, 2024. February 2nd, 2024.
Ps: 새로운 학설이라 계속 보충 설명을 첨가 하렵니다.
白登之圍是公元前200年 漢高祖劉邦被匈奴圍困於白登山(今中國山西省大同市東北馬鋪山)的事.
《史記》:渝水之人善歌舞,漢高祖采其聲.
임유관 전투(臨渝關戰鬪):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금미달(今彌達)
마읍전투(馬邑戰鬪, BC 133)은 모두 같은 곳
[1].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 真興王立。時年七𡻕.十二年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晉人以七絃琴,送高句麗。麗人雖知其為樂器
[2]. 三國遺事 : 乃立訥祗為王而去射琴匣第二十一毘處王一作炤智王即位十年戊辰。幸於天泉亭。 時有烏與鼠來鳴。鼠作人語云。此烏去處尋之或云神德王欲行香興輪寺。路見眾鼠含尾怪之而還占之。明日先鳴烏尋之云云。此說非也王命騎士追之。南至避村今壤避寺村在南山東麓。兩豬相鬥。留連見之。忽失烏所在。徘徊路旁。時有老翁自池中出奉書。外面題云。開見二人死。不開一人死。使來獻之。王曰。與其二人死莫若不開但一人死耳。日官奏云。二人者庶民也。一人者王也。王然之開見。書中云射琴匣。王入宮見琴匣射之。乃內殿焚修僧。與宮主潛通而所姧也。
[3]. 史記 列傳: 太史公學天官於唐都,受易於楊何,習道論於黃子。三國遺事 :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又名弓一作方忽山, 還隱於阿斯達 為山神。 壽一千九百八歲
[4]. 康熙字典: 尼,音泥。《說文》从後近之也。从尸匕聲。《徐鍇曰》尼猶昵也。《廣韻》又和也。又先師孔子仲尼。《家語》顏氏禱於尼丘,而孔子生,故字曰仲尼。尼丘,山名。又女僧也。《釋典》有比丘尼。《爾雅·釋詁註》尼者,近也。引尸子,悅尼而來遠。《孔穎達曰》尼,近也。通作昵。《爾雅·釋詁》尼,定也。《孟子》止或尼之。今讀泥去聲,義同。尼猶曳止之也。 康熙字典: 僊: 人䙴: 音仙。《類篇》本䙲字,或从㔾。 升高也。 音遷。義同。《集韻》同仙。又僊僊,舞貌。 《詩·小雅》屢舞僊僊。 《註》軒舉之狀。《莊子·在宥篇》鴻蒙謂雲將曰:毒哉,僊僊乎歸矣。 又叶斯人切,音新。《班固·東都賦》建章甘泉館御列僊,孰與靈臺明堂統和天人
[5]. 高麗史: 甲申冊李資謙為朝鮮國公. 文敬太后李氏朝鮮國公資謙第二女選入宮號延德宮主。仁宗 廢妃李氏朝鮮國公資謙第三女資謙恐他姓為妃權寵有所分強請納之仁宗不得已納之冊為延德宮主.
[6]. 康熙字典 渝:變汙也。从水俞聲。一曰渝水,在遼西臨俞,東出塞.說文》渝水,在遼西臨渝, 東出塞。又水名。水經注:宕渠郡,蓋古賨國,今賨城縣有渝水。〈書〉借指北方邊塞。有詔進公都督瓜州諸軍事、瓜州刺史。是以名馳梓嶺,聲振渝關(北周‧庾信〈周柱國大將軍大都督同州刺史爾綿永神道碑. 藍:音籃。染靑草也。 說文解字: 《史記》:渝水之人善歌舞,漢高祖采其聲.
[7]. 康熙字典 : 藍:音籃。染靑草也。《詩·小雅》終朝采藍。三藍皆可作澱,色成勝母, 故曰靑出於藍而靑於藍。爾雅·釋鳥》秋鳸,竊藍。《註》竊藍,靑色。又濫也。《水經注》新河出令支縣之藍山。《通志·氏族略》戰國時中山大夫藍諸。又通襤。靈芝結就清靈地,真是蓬萊迴不群
[8]. 낭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 真興王立。 時年七𡻕.十二年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
[9]. 加羅湖、加羅山初心者攻略 – 洛一山林 (hikerzoe.com) . Silla from Zhina(Southern China) to Korean Peninsul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0]. 三國史記 新羅本紀: 十年春,命有司修理戰艦。十三年夏六月,于山國歸服,𡻕以土宜為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或名欎陵島。真興王立。 時年七𡻕.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加耶國 嘉悉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
[11]. 가시리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wikisource.org)
[12]. 顏氏家訓 書證: 顧野王玉篇誤為黑傍沓。顧雖博物. 太平廣記 異僧七 宣律師: 梁顧野王, 太學之大博也,周訪字源,出沒不定,故玉篇序云:「有開春申君墓得其銘文,皆是隸字。」
[13]. 康熙字典:律:《玉篇》六律也。《廣韻》律呂也。《說文》均布也。十二律均布節氣,故有六律, 六 均。《爾雅·釋器》律謂之分。《前漢·律歷志》律有十二,陽六爲律, 隂六爲呂,黃帝之所作也。
[14]. 箕子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기자 (고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大唐西域記: 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蘇迷盧山。 又曰須彌婁皆訛略也 ,四寶合成. 史記 太史公自序:維我漢繼五帝末流,接三代(統)[絕]業。
周道廢, 秦撥去古文, 焚滅詩書,故明堂石室金匱玉版圖籍散亂 (玉篇) 臾匱: 臾:音匱。同蕢。
[15]. 山海經 海外北經: 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 禹殺相柳, 其血腥. Ancient Korean Religion: Polaris and Small Dipper.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6]. 康熙字典 臼部 :《字彙補》鳧臾,東方國名。卽扶餘也.濡水。出涿郡故安,東入漆涑。从水需聲.
史記 魏世家: 與秦王會臨晉。張儀、魏章皆歸于魏。魏相田需死。楚相昭魚謂蘇代曰:「田需死, 吾恐張儀、犀首、薛公有一人相魏者也。太平御覽 : 《神仙傳》曰: 黃盧子者, 姓葛名越, 年二百八十歲,行及走馬。王真者,上黨人也,年十七八,乃學道,服食胎息之術,行及走馬,力兼數人。河上公者,莫知其姓名也。太平御覽 楊柳下: 《春秋后語》曰: 魏哀王以田需為相,
需音須。甚貴信之.許慎《淮南子》注曰:展禽之家有柳樹,身行惠德,因號柳下惠。 一曰邑名
[17]. 水經注:聖水自涿縣東與桃水合,水首受淶水于徐城東南良鄉,西分垣水,世謂之南沙溝, 即桃水也。東逕逎縣北,又東逕涿縣故城下與涿水合。世以為涿水,又亦謂之桃水,出涿縣故城西南奇溝東八里大坎下,數泉同發,東逕桃仁墟北,或曰因水以名墟,則是桃水也。應劭又云:涿水出上谷涿鹿縣,余按涿水自涿鹿東注㶟水。㶟水東南逕廣陽郡與涿郡分水.
[18]. 三國史記: 加耶國請和. 法興王. 八年,遣使於梁貢方物。九年春三月,加耶國王遣使請婚.
[19].三國史記 玄琴之作也,新羅古記云:「初,晉人以七絃琴,送高句麗。麗人雖知其為樂器, 而不知其聲音 及鼓之之法,購國人能識其音而鼓之者,厚賞。時,第二相王山岳,存其本樣, 頗改易其法制而造之,兼製一百餘曲,以奏之。於時,玄鶴來舞,遂名玄鶴琴,後但云玄琴。」羅古記云:”加耶國嘉實王,見唐之樂器,而造之。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豈可一哉,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造十二曲。後,于勒以其國將亂,攜樂器,投新羅眞興王。王受之,安置國原,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傳其業。三人旣傳十一二曲,相謂曰:’此繁且淫,不可以為雅正。’遂約為五曲。于勒始聞焉而怒,及聽其五種之音,流淚歎曰:’樂而不流,哀而不悲,可謂正也,爾其奏之王前。’王聞之大悅。。新羅古記曰:「文章則強首、帝文、守眞、良圖、風訓、骨●骨番。」帝文已下事逸,不得立傳。
[20]. 通典: 北齊亦有儀同三司者, 任城王湝等諸王多為之。湝戶皆反。水經注 濟水:「黃水又東南逕 任城郡之亢父縣故城西,夏后氏之任國也。漢章帝元和元年,別為任城在北,王莽之延就亭也, 太平廣記 女仙三 魏夫人:魏夫人者,任城人也。晉司徒劇陽文康公舒之女,名華存,字賢安.。
[21].《康熙字典·阜部·八》陳:《詩·小雅》彼何人斯,胡逝我𨻰。《註》北當階,其南接門內霤。又國名。《廣韻》周武王封舜後胡公滿於𨻰,楚滅𨻰爲縣,漢爲淮陽國,隋爲𨻰州。又姓。胡公滿之後,子孫以國爲氏。又《玉篇》或作𢽬塵。音顚。《易林》秋糧未成,無從至𨻰。水深難涉,使我不前。《黃庭經》火兵符圖備靈關,前昂後𤰞高下𨻰。關音涓
[22]. 說苑 脩文 : 積恩為愛,積愛為仁,積仁為靈,靈臺之所以為靈者,積仁也 。神靈者, 天地之本, 而為萬物之始也。凡從外入者,莫深於聲音,變人最極,故聖人因而成之以德曰樂, 樂者德之風,《詩》曰:「威儀抑抑,德音秩秩。」謂禮樂也。故君子以禮正外,以樂正內;內須臾離樂,則邪氣生矣,外須臾離禮,則慢行起矣;故古者天子諸侯聽鐘聲,未嘗離於庭,卿大夫聽琴瑟,未嘗離於前;所以養正心而滅淫氣也。呂氏春秋 安死: 禹葬於會稽,不變人徒.
[23]. 康熙字典 須: 鬚 《說文》曰:面毛也, 風俗通云太昊之後史記魏有須賈. 又斯須,猶須臾也.
左傳遂人四族有須遂氏 又虜複姓匈奴貴姓有須卜氏. 仇: 忘大暮於千祀兮,爭朝榮於須臾.
[24]. 史記 樂書: 太史公曰:余每讀虞書,至於君臣相敕,維是几安. 故聞宮音, 使人溫舒而廣大。 故君子不可須臾離禮,須臾離禮則暴慢之行窮外;不可須臾離樂,須臾離樂則姦邪之行窮內。故樂音者,君子之所養義也. 不可須臾離樂,須臾離樂則姦邪之行窮內 . Phonetic Loan Characters are Gojoseon Language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5]. 呂氏春秋 孝行覽 長攻: 凡治亂存亡,安危強弱,必有其遇,然後可成,各一則不設
越國大饑,王恐,召范蠡而謀。范蠡曰:「王何患焉?今之饑,此越之福而吳之禍也。夫吳國甚富而財有餘,其王年少,智寡材輕,好須臾之名,不思後患。 呂氏春秋 慎大覽 慎大: 趙襄子攻翟,勝老人、中人,使使者來謁之,襄子方食摶飯,有憂色。左右曰:「一朝而兩城下,此人之所以喜也,今君有憂色何?」襄子曰:「江河之大也,不過三日;飄風暴雨,日中不須臾。今趙氏之德行,無所於積,一朝而兩城下,亡其及我乎?」孔子聞之曰:「趙氏其昌乎!」夫憂所以為昌也,而喜所以為亡也;勝非其難者也,持之其難者也。賢主以此持勝,故其福及後世。齊、荊、吳、越皆嘗勝矣,而卒取亡,不達乎持勝也。唯有道之主能持勝。孔子之勁,舉國門之關,而不肯以力聞;墨子為守攻,公輸般服,而不肯以兵加。善持勝者,以術彊弱。
[26]. 康熙字典 : 《書·堯典》懷山襄陵。《註》包山上陵也。又《臯陶謨》思曰:贊贊襄哉。
又除也。又地名。《史記·高祖功臣侯表》襄平。《索隱曰》屬臨淮。《後漢·郡國志》上黨郡襄垣。
又《廣韻》州名,本楚之西津,魏置襄陽郡,西魏攺襄州.《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 儴、仍,因也. 福州府志乾隆本: 趙希予字岩起.,趙時儴.
[27]. 须臾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 CTP Dictionary: 須臾xū yú : 人名 . 《三國演義》:須臾,蛇不見了。 The serpent disappeared.
[28]. 史記 樂書: 凡樂,圜鐘為宮,黃鐘為角,大蔟為徵,姑洗為羽,雷鼓雷鼗,孤竹之管, 云和之琴瑟. 孫竹之管,空桑之琴瑟,陰竹之管,龍門之琴瑟.
[29]. 옥새(玉璽)의 유래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0]. 靈壽縣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中山國為魏國所滅後,公元前381年前後, 中山桓公率鮮虞餘眾驅逐魏人復國,定都於此,稱靈壽邑,城址在今平山縣三汲鄉附近。西漢初年置靈壽縣,屬常山郡,縣治仍在中山故都,晉移至今址。北周置蒲吾郡;隋初郡廢,縣屬恆州;隋末曾於靈壽縣短暫設燕州,唐初州廢,縣屬井州,貞觀中還屬恆州,
[31]. 史記 殷本紀: 帝武丁即位,思復興殷,而未得其佐.得說於傅險中。是時說為胥靡,筑於傅險。
[32]. 史記 刺客列傳:至易水之上,既祖,取道,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為變徵之聲,士皆垂淚涕泣。又前而為歌曰:사기열전 1 :김원중 옮김.2007년 믿음사. P.657 슬픈소리이다. 變徵 – 다음 한자사전 (Daum 漢韓辭典): 중국계 아악에서, 칠성 음계 중 넷째 음을 이르는 말
[33]. 燕丹子 卷上:高漸離擊筑,宋臆和之。論衡書虛:《傳書》又言:燕太子丹使刺客荊軻刺秦王,不得,誅死。後高漸麗復以擊筑見秦王,秦王說之;知燕太子之客,乃冒其眼,使之擊筑.。
[34]. 三國史記 雜志第一: 玄琴之作也,新羅古記云:「初,晉人以七絃琴,送高句麗.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箏形如瑟。」 羅古記云:”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豈可一哉,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造十二曲。後,于勒以其國將亂,攜樂器,投新羅眞興王。王受之,安置國原,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傳其業。
[35]. 東國輿地勝覽 :園幽御井黯一里有父伽郁國宮闢其旁有石井俗傳御井琴谷柳郁國嘉悉王樂師于勒家中國秦事而製琴音伽郁琴縣址三里有地名琴谷世傅勒率工人肄琴之地或云烘琴出於金海之柳僻國但金海柳槨世代無稱嘉悉王者恐出打跳舄是錦林王陵縣西二里許朴古藏俗稱錦林王陵束京堤在縣東十謀攻大聊雕雜傳新羅兵萊知有備而邊夜築鞅堤以示其眾新復縣金富軾云本加尸穹縣為高靈郡領縣景德主改名今未詳口接縣西十里地名有加西谷者凝尸音轉為西.
[36]. 논란이 많은 여러 가야의 실체.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7]. 金仇衡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金仇衡或金仇亥即仇衡王(521年-532年在位),是朝鮮三國時期的金官伽倻的第10位國王。三國遺事: 俾創假宮而入御。 但要質儉。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38]. 三國志 魏書三十 弁辰傳: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飲酒。 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 진한전(辰韓傳)-6: The birth place of gayageum (加耶琴) :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9]. 三國史記 雜志第一: 玄琴之作也,新羅古記云:「初,晉人以七絃琴,送高句麗.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箏形如瑟。」 羅古記云:”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豈可一哉,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造十二曲。後,于勒以其國將亂,攜樂器,投新羅眞興王。王受之,安置國原,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傳其業。
[40]. 고구려의 삼경(三京) 장안성(長安城)과 임유관(臨渝關):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41]. 柳下惠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史記 仲尼弟子列傳: 孔子之所嚴事: 於周則老子;於衛,蘧伯玉;於齊,晏平仲;於楚,老萊子;於鄭,子產;於魯,孟公綽。數稱臧文仲、柳下惠、銅鞮伯華、介山子然,孔子皆後之,不并世. 史記 孔子世家: 謂「柳下惠、
[42].孟子 萬章下 : 「柳下惠,不羞汙君,不辭小官。進不隱賢,必以其道。 孟子曰:「伯夷, 聖之清者也;伊尹,聖之任者也;柳下惠,聖之和者也;孔子,聖之時者也. 韓詩外傳 : 王子比干殺身以成其忠,柳下惠殺身以成其信,伯夷叔齊殺身以成其廉,此三子者,皆天下之通士也,豈不愛其身哉. 列女傳 柳下惠妻:魯大夫柳下惠之妻也。柳下惠處魯,三黜而不去, 憂民救亂。妻曰:「無乃瀆乎!君子有二恥。國無道而貴,恥也;國有道而賤,恥也。
[43]. 抱朴子內篇: 故孟子謂伯夷,清之聖者也;〔柳下惠,和之聖者也;伊尹,任之聖者也〕。 吾試演而論之,則聖非一事。 孟子: 孟子曰:「伯夷,聖之清者也;伊尹,聖之任者也;柳下惠, 聖之和者也;孔子,聖之時者也。孔子之謂集大成。韓詩外傳: 伯夷、聖人之清者也,柳下惠、 聖人之和者也,孔子、聖人之中者也。說苑 佚文: 柳下惠死,人將誄之。妻曰: 「將述夫子之德 , 二三子不若妾之知。」為誄曰:「夫子之不伐,夫子之不謁,諡宜為惠。」弟子聞而從之. 太平廣記 詼諧一 東方朔: 益為右扶風 仲山甫為光祿。百里奚為典屬國。柳下惠為大長秋,
[44]. 글자 속에 역사가 숨어 있다-3: 예 또는 회 라고 읽는 “濊” 글자: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45]. 康熙字典: 柳: 《說文》小楊也。本作桺。《埤雅》柔脆易生,與楊同類。縱橫顚倒植之皆生。 又柳谷,日入處。《書·堯典》宅西曰昧谷。徐廣云:柳谷。《宋祁筆記》古文卯本柳字,後借爲辰卯之卯。北本別字,後借爲西北之北。虞翻笑鄭元不識古文,以卯爲昧,訓北曰:北,猶別也。又星名。《爾雅·釋天》咮謂之柳。又車也。服虔曰:東郡謂廣轍車爲柳。李奇曰:大牛車爲柳。鄧展曰:喪車爲柳。又《爾雅·釋樂》宮謂之重,商謂之敏,角謂之經,徵謂之迭,羽謂之柳。《前漢·地理志》屬渤海郡。又姓。《姓譜》魯子展之後,食邑于柳,遂以爲氏。○按楊柳一物二種,《毛詩》分而言之者,《齊風》折柳樊圃,《陳風》東門之楊是也。《小雅》楊柳依依是也。《本草》云:楊枝硬而揚起,故謂之楊。柳枝弱而垂流,故謂之柳。《正字通》據古詩南楊北有柳分爲二,非。
[46]. 고구려의 삼경(三京) 장안성(長安城)과 임유관(臨渝關):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康熙字典:渝:《唐韻》羊朱切《集韻》《韻會》容朱切,𠀤音兪。《說文》變汙也。《爾雅·釋言》渝,變也。《詩·鄭風》舍命不渝。水名。《說文》渝水,在遼西臨渝,東出塞.
[47]. 漢書 五行志 : 史記魏襄王十三年,魏有女子化為丈夫。京房易傳曰:「女子化為丈夫, 茲謂陰昌,賤人為王;丈夫化為女子,茲謂陰勝,厥咎亡。」一曰,男化為女,宮刑濫也;女化為男,婦政行也。彌子瑕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48]. 孟子 萬章上: 彌子之妻與子路之妻,兄弟也. 呂氏春秋 慎大覽 貴因: 禹之裸國, 裸入衣出, 因也。墨子見荊王,錦衣吹笙,因也。孔子道彌子瑕見釐夫人,因也。湯、武遭亂世,臨苦民,揚其義,成其功,因也。故因則功,專則拙。 彌子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49]. 晉書 帝紀第六 中宗元帝 :詔曰:「漢高經大梁,美無忌之賢;齊師入魯,脩柳下惠之墓。 其吳之高德名賢或未旌錄者,具條列以聞。」. 柳下惠墓(山东省新泰市柳下惠墓)_百度百科 (baidu.com). 岱史 : 柳下惠墓,在州治东南百里,一至今村人尚多展姓者,名曰柳里村。
[50]. 三國遺事 : 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 壽一千九百八歲。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 尚書 商書 微子: 父師若曰:「王子! 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51]. 論語 泰伯: 孔子曰:「才難,不其然乎?唐虞之際,於斯為盛。有婦人焉,九人而已. 《說文》日初出東方暘谷,所登榑桑若木也 榑桑,神木,日所出也. 杻一名檍, 今宮園種之, 名萬歲木” “桑”은 약(若)으로香草名,即杜若北海海神名. 暘:日出也。从日昜聲。 《虞書》曰:「暘谷。」日初出東方湯谷,所登榑桑,叒木也。象形。凡叒之屬皆从叒.
[52].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53].毛詩正義 : 「風」言賢聖之遺化, 舉變風者, 以唐有堯之遺風, 故於「風」言賢聖之遺化。 變風:《詩經》“國風”中 邶 至 豳 等十三國的作品。變風_百度百科 (baidu.hk)
[54]. 康熙字典 : Maitreya, 新稱彌帝隸, 梅低梨, 迷諦隸, 梅怛麗, 每怛哩, 梅怛麗藥, 菩薩之姓也 。譯曰慈氏。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 生於南天竺 婆羅門家。 紹釋迦如來之佛位,為補處之菩薩。光佛入滅,生於兜率天內院。「彌帝隸,古云彌勒,皆訛略不正也,正音云每怛哩。」西域記七曰:「梅怛麗耶,唐言慈,即姓也。舊曰彌勒,訛略也。」在密教,胎藏界之彌勒,坐於中台八葉院東北方之蓮上,金剛界之彌勒在賢劫十六尊中,坐於東方,羯磨會三十七尊中之西方金剛因菩薩,即為此尊之本誓,大輪金剛者,此尊之教令輪身也。
Xlibris: We Need Another Voice — Taoism to Zen Buddhism. Lee Mosol. April 11, 2023.
[55]. 大唐西域記:釋梵窣堵波前。是蓮華色苾芻尼欲先見佛化作轉輪王處。如來自天宮還贍部洲也。時蘇部底唐言善現。舊曰須扶提。或曰須菩提。皆訛也宴坐石室.凈飯王太子捨轉輪王位。悲愍六趣苦行六年。證三菩提具一切智。是吾師也. 全唐詩: 帝作轉輪王,師為持戒尊.
[56]. 晉書 列傳第二十一 皇甫謐 摯虞 束皙 王接: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
[57].三國史記 廣開土王: 四年,王與百濟,戰於浿水之上,大敗之,虜獲八千餘級. [倭不軌侵入帶方界]. [예봉국악원] 가야금과 거문고의 차이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58]. 가시리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wikisource.org)
[59]. 史記三家注:帝禹東巡狩,至于會稽而崩。〈一〉以天下授益。三年之喪畢,益讓帝禹之子啓, 而辟居箕山之陽。〈二〉孫守真按:辟=避=闢,字形結構換部首耳。禹子啓賢,天下屬意焉。及禹崩,雖授益,益之佐禹日淺,天下未洽。故諸侯皆去益而朝啓,曰「吾君帝禹之子也」。於是啓遂卽天子之位,是為夏后帝啓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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