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漢江)을 한강(韓江)으로,
빼앗긴 이름을 되 찾자.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의 팽창주의에 입각하여 진행되는 영토확장을 우려 한다. 한국과 직결되는 문제가 “동북공정” 이다. 모두들 하나 같이 우려하지만 속수 무책이다. 필자는 “정부 언론 각계각층에 그 핵심이 되는 또 실천 하기 쉬운 사안”을 여기 보여 드린다.
간단한 문제다. 정당은 상대방이 받아드리기 거북한, 또는 받아드릴수 없는 사안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누구나 이해할수있는 합당하고 쉬운 문제부터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도 커다란 사안이 밀어 닥처 꼭 다루어져야할 사안은 계속 뒤로 처지고 말았다. 국정교과서를 계기로 우리 민족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지니고 있는 이름자를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뿌리 찾기의 첫 걸음”이다.
한자는 상형문자, 즉 로고그램(Logogram)이라 많은 뜻을 지니고 있다. 한자를 쓸때는 정확하게 획수를 갖추어 적어야 한다. 고려시대 부터 만주 땅에 붙어 있는 반도를 삼한 (三韓)땅이라 했다. 그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강이라 하여 한강(韓江)이라 했던 강을 모화사상이 팽배하던 시절에 글자를 바꾸어 한강 (漢江)으로, 서울을 한성(漢城)으로, 서울의 관문이 되는 한강 하류에 있는 섬을 강화도 (江華島)라 슬며시 바꾸었다. 한강(漢江)은 원 이름이 한강(韓江)으로 기록 되였었다는 필자의 의견은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본다.
삼국유사에는 제터 단자, 단군(壇君)으로 기록된 글자가 박달나무 단(檀)자로 바뀐 근거는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기원전 1046년 목야전쟁 전공자에게 하사한 이괘(利簋)라 부르는 청동기념품에서 밝켜젔다. 중국사람들이 “壇”자를 “檀”자로 뒤 바꾸어 중국어법으로 풀이하여 이 모양이 되였다. 간단히 설명하면, 일연스님이 인용한 신단수하(神壇樹下)라는 문구는 우리말 어순이다. 그 문구는 “신께 제사 드리는 제단을 차려 놓고, 그 앞 또는 아래에서”라는 뜻이다.
강화란 글자가 처음 나타나기는 고려 제11대 문종(1046- 1083년)때다. 불교를 국교로 삼아 승려를 육성하고 사찰을 많이 짔고 화려한 팔관회를 열었다. 그 시대 기록에 강화와 장단 (江華長湍)이란 두 고을 이름이 나온다 . 그러나 이 강화는 강화도가 아니라 육지에 있던 파주시 서북을 지나 한강으로 이어지는 임계 (臨溪流, ? ) 즉 임진강 하류에 있었던 이름이다. 임계 연안 서북에, 2800간의 흥왕사(興王寺;文宗 12년 공사)를 짔고, 1000명이 참석하여 밤낮 닷세를 치룬 전대 미문의 화려 장엄한 연등회가 열렸었다 . 그 행사를 위하여 강화 장단 두현을 시켜서 뜰에서 절문에 이르기 까지 채붕(綵棚)을 꾸미게 했다 . 이 강물에는 연꽃 모양으로 만든 등불(燃燈)을 띄워 놓고 밤낮 오일에 걸치는화려 찬란(華麗燦爛)한 축제를 열었다.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고 작성한 보고서 고려도경에는 예성강으로 들어가는 인천 앞 바다 일대를 해?(海口?)라 했다. 그러나 강화도라는 이름은 나타 나지 않았다. 김부식이 안내 했던 서긍 일행이 다녀가고, 묘청의 난(1135년 – 1136년)을 치룬이후,무신 최충헌(1149-1219년) 이 실권을 장악하고, 고종 안효대왕 18인1221년에 몽고군의 친입을 받았다. 강화도가 안정한 피난처로 나타난다 .
삼국사기에는 옛 고구려에서 압비고차 (甲比古次)라고도 부르던 휼/혈?(穴口?)를 해?(海口?)라 했다. 이를 고려도경에서는 합굴 (蛤窟) 이라 했다. 같은 장소를 기록 하면서 “뜻과 음을 일저리 돌려PSLC, PLC” 적었다. 해 협 합(海,穴, 蛤) 세 글자가 같은 뜻으로 사용 되었다. 고려 고종 안효대왕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塹星壇) 이름을 바꾸어 전성 (氈城)이란 글자로 기록하고 “동서 방향을 뒤바꾸어 기록한 증거”가 보인다 . 모전 전(氈:zhān/ zin1 )는 단 (左:亶)과 모 (右:毛)를 합한 글자로, “소가 우는 소리, 馬/牟; 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던 부족의 지도자, 단군(壇君)을 뜻”하는 글자다 .
현대 북경어로 쉐 (穴xué)자는 사음자 아니면 훈역한 글자다 . 이 글자는 토실 (土室)이란 뜻이고, 소전(小篆)자와 같은 뜻이고, 한가로울 용 (宂)자 와 같다 (同宂)고 했다. 이를 깊히 살펴 보면 갓 머리 밑에 아해 아자를 겹친 상형 글자다. 용(宂) 자는 “上:宀, 下:儿”로 모자(宀)를 쓴 “兒 아이 아, 연약할 예”를 뜻한다. 그 사람은 소 “牛”와 관계가 있다 하여 “”자로 쓰기도 했다. 소우는 소리로 기록 되던 부족 즉 천손의 후예를 이끄는 지도자란 뜻이다 . 단군왕검의 후손이 만주 에서 살다가 뱃길로 서해안을 따라 인천 앞 바다에 있는 큰 섬에 자리를 잡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마니(摩尼, 摩利)산에 참성단 (塹星壇)을 앃았다 . 중국 역사책 삼국지에 따르면, 이섬에 “만주에 살던 부여(扶餘)의 한 부족”이 내려와 살았다. 백제를 남부여 (南扶餘)라 부르기도 했다. 한자 마(摩)는 호(胡, 東胡)를 대신한 글자로 “소 우는 소리란 글자로 기록된 부족”을 뜻하고, 니(尼) 와 이(利)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 민족의 뿌리 찾기 첫 걸음이 국조를 제터 단자, 단군(壇君)으로, 삼한(三韓) 땅을 가로지르는 강을 한강 (韓江) 이라 되찾아 쓰고, 강화도 이름을 바꾸어 마니섬이라 함이 타당 하다.
끝
October 28,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