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 (開天節)은 한국만이 지내는 국경일이다. 이름으로 보더라도 이 명절은 가장 오래된 국경일이다.
한국역사에 관한 기록은 인접국가인 중국 문헌에 많이 숨어 있다.
개천절 (開天節)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진수 (陳壽 233-297)가 쓴 삼국지고구려전 (三國志高句麗傳)에 가장 자세하게 적혀 있다. 그 후에 편찬된 중국역사서에도 이 행사에 관한 기록이 여러 곳에 있다. 중국문헌 보다 먼 훗날에 편찬된 한국 삼국사기 (三國史記)에는 중국의 여러 기록을 인용해 제천 (祭天) 행사를 남겼다.
이 행사는 며칠 계속되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여있다. 이를 보면 그 축제를 어떻게 지냈나 하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그 들은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飲食歌舞), 종을 울리고 북을 치며(迎鼓, 鈴鼓), 수십 명이 줄을 지어 땅을 발로 구르며 제사장은 하늘에 바치는 춤을(舞天)을 추었다고 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그림 그대로다. 강강수월래 또는 밤새도록 굿을 하며 무당이 춤을 추던 장면, 미국 인디언들이 땅을 발로 치며 춤을 추던 장면과 일맥상통한다. 한자 풀이는 원본을 그려 놓고 설명해야 한다.
삼국지에는 개천절 (開天節)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名隧穴,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於國東上祭之,置木隧於神坐.”
“夫餘傳: 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
이 문장 사이에는 모든 사람들이 옷을 잘 차려 입고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그 뜻에 따라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에서는 “시월 (十月)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국경일을 치른다. 이를 동맹 (東盟)이라 부른다. 그 나라 수도 동쪽에 수/주혈 (隧穴)이라 부르는 큰 동굴이 있다. 시월에 열리는 그 나라 큰 행사는 수도 동쪽에서 ‘수/주신 환 隧神還’을 맞이하는 제사다. 그 곳에는 나무(木)로 깎은 “수/주隧”를 신좌(神坐) 옆에 설치했다”
상제(上祭)를 유교경전에서는 야외에서 지내는 제사라 했으나, 문헌에 나온 문장 전체를 놓고 보면 왕이 직접 참석하여 춤을 추며 며칠을 두고 치루는 큰 행사라 이는 중국 황실에서 치르던 봉선의식과 같다고 봄이 마땅하다.
같은 책 부여 (夫餘)편에는 이 하늘에 바치는 제사를 영고 (迎鼓)라 했다. 또 다른 책에서는 지역에 따라 무천(舞天) 소도 (蘇塗) 또는 영고 (鈴鼓)라고도 기록 했다. 제천 (祭天) 행사를 진수 (陳壽 233-297)가 살던 시대 달력으로는 시월 (殷正月) 에 지낸다 했다. 우리는 지금도 시월을 상(商)달 이라 부르는데 이는 옛 달력으로 첫 달 (上)달 이라는 뜻이다. 며칠을 두고 진행 되던 전국적 대회가 열리는 달을 납월 (臘月) 이라했다. 사냥을 하는 달이란 뜻이다.
개천절 (開天節) 행사를 시월 삼일(十月 三日)에 치루는 날자 선택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아주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던 축제라 그를 동양에서 쓰던 제일 오래된 달력에 따랐다. 가장 오래 된 달력이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때 부터 쓰던 전욱력 (顓頊曆)이다. 동짓달 전에 (冬至 前) 처음 나타나는 달 (月)을 그 해의 첫(上)달, 즉 상달이라 했다. 오늘 쓰는 10월 3일 개천절은 상(上)달의 초승달 (初生月)이 나타난 날을 정해 제사를 지냈다. 우리말에 전해 내려오는 “상달”은 중국기록에 보이는 은력(殷曆)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그 해의 첫 (上)달”이란 뜻이다. 대대례기 (大戴禮記)에는 하력 정월이 시월로 기록되어 있다 “夏小正. 正月. 十月豺祭獸.” 굳이 한자를 쓴다면 상(上)달이 맞는 풀이다. 이를 계절로 보면, 미국의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Holiday)과 거의 같은 때가 된다.
고구려에서는 나무를 깎아 주신 (隧神)이라 부르는 물체를, 제사를 지내는 단(壇, 神坐) 옆에 설치했다. 이 구절이 곧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기록된 신단수하 (神壇樹下)를 말한다. 이는 단군조선이 이곳에서 시작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전부터 전해오는 제천 의식을 고구려 사람들은 이 큰 동굴 옆에서 치렀다는 뜻이다. 마치 기자의 공헌을 추모하던 가짜 묘 (假廟)를 평양에 설치했던 내력과 같은 취지에서 나타난 현상이라 본다. 또 하나 그릇된 점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神壇樹下)를 풀이하기를 “박달나무 밑에”라 하고, 그 밑에 와 애기를 낳게 해 달라 기도 했다 한다. 이는 잘못된 해석이었다. 삼국유사에 뚜렷하게 기록된 단군(壇君, person in charge of altar)이라는 글자 는 박달나무“檀”가 아니라 제터 “壇”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를 보니 주신 또는 수신이라 부르는 글자는 “襚神” 이라 되어 있다. 비슷한 발음이지만 뜻이 아주 다르다. 이 글자 “襚”를 우리말로 풀이 하면, 죽은 시체를 덮는 천을 뜻한다.
이 밖에도 중국과 한국 옛 문헌에 나타난 제천 (祭天) 행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우리민족의 지나온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제천 (祭天) 행사에 관한 기록이 중국문헌에 많이 나타났던 시기는, 고조선이 멸망한 시기부터 고구려가 만주에 군림할 때 까지 오륙백 년간이다. 이 시기는 고조선 토착민들이 중원에서 올라온 세력에 반항하며 싸우기도 하고, 한반도 남쪽으로 또는 물길을 따라 동북아시아로 흩어져 갔던 시대다.
그 행사를 치르던 사람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들이 놓여있던 상황에 적응하여 전통적인 제천 (祭天) 행사를 치렀다. 이러한 이름을 근거로 그 행사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들은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飲食歌舞), 종을 울리고 북을 치며(迎鼓, 鈴鼓), 수십 명이 줄을 지어 땅을 발로 구르며 제사장은 하늘에 바치는 춤을(舞天)을 추었다고 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그림 그대로다. 강강수월래 또는 밤새도록 굿을 하며 무당이 춤을 추던 장면, 미국 인디언들이 땅을 발로 치며 춤을 추던 장면과 일맥상통한다. 그 장면을 하늘나라에 받치는 춤 (舞天)이라 기록 했다. 그 장소 “置木隧於神坐”를 한 반도 남쪽에 와서는 소도(蘇塗)라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나무 (목각) 끝에 (삼족오,三足烏, 새, bird)를 달았다. 그러나 기록에 나오는 이름들을 종합해 보면 그 ‘깎아 세운 목각木隧’은 그들의 최고 조상 을 의미 했다.
고구려에서는 이 행사를 수도 (首都) 동쪽國左(東)에서 거행 했었다. 그 곳에 있는 큰 동굴 이름을 귀신이 나오는 동굴 (大穴曰神隧)이라 했다. 이 성스러운 제사를 지내던 장소가 오늘 지도(地圖)로는, 요양 (遼陽)시 동쪽에 있는 본계 수동 (本溪水洞) 국립공원이다. 이 굴에 고구려 네 번째 임금민중왕 (閔中王)이 묻혔다. 하여 그랬던가 “죽은 사람을 덮는 천을 휘두른 귀신굴 號禭神”이 나오는 굴이라고도 했다. 호랑이에게 바치는 제사라고도 했다. 이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과 문맥을 살펴보면 고구려에서는 서울 동쪽에 환웅천왕 (桓雄天王)을 상징하는 장승 (Totem pole)을 새워 놓고 왕이 직접 하늘에 바치는 제사(上祭)를 드리며 무엇인가 굳은 맹세 (東盟)를 했다.
무엇을 맹세했나를 좀 더 알아보니 우리 삼국사기에는 “잃어버린 선조의 땅을 되찾겠다. “麗語謂復舊土為’多勿’” 는 맹세를 했다. 중국기록에는, 왜 고구려가 산해관 지역을 공격 했나 “임유관 전투(臨渝關戰鬪:598 AD” 하는 이유를 지적한 수양제 (隋煬帝)에게 바친 글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隋書 列傳 裴矩: “矩因奏狀曰:高麗之地, 本孤竹國也” 라는 두 구절이 입증한다. 이를 그 뜻에 따라 풀이 하면; 옛적에는 고국국(孤竹國) 있던 곳이라 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자기들 선조의 땅이 이었다고 하여 자주 침입한다고 보고 했다. 고죽국과 임유관은 요서(遼西臨渝)에 있었다.
환웅천왕(桓雄天王)이 조선(朝鮮)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신시 (神市)라 하던 곳,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마리가 들어가 백일을 있어라 했다는 동굴이, 이 만주 요양 (遼陽)시 동쪽이 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첫 나라를 공포 했다는 곳은 중국서쪽 천산 산맥에 있는 천지가 된다. 그 곳에서 부터 점차로 동쪽으로 옮겨 중화문명의 발상지라는 서안이 있는 관중분지를 지나, 갈석산 부근을 거처 만주로 옮겨 온 기록은 많은 중국기록에 숨어 있다. 진수 (陳壽 233-297)가 처음으로 우리민족이 옛적부터 지켜 내려오던 큰 잔치를 치르던 현상을 그렸다. 그 먼 곳에서 만주까지 밀려온 고구려 사람들이 시월에 주/수신 (主神, 朱愼, 最高神)환(迎隧神還)을 맞이하는 국가적 큰 행사를 신단수하 (神壇樹下)와 같은 설치를 해놓고 그 곳에서 하늘에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는 풀이다. 다른 기록들은 모두 그 보다 뒤에 남긴 기록들이라 그 행사가 변해가던 모양을 보여줄 따름이다.
특히 이에 관한 기록이 실린 삼국지 와 후한서에서 다룬 시기는 만주에 살던 사람들이 중원에서 올라온 사람들에 항거하여 저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중국 사람에게는 그 진실을 숨겼어야 했다. 환웅천왕(桓雄天王) 을 상징하는 “木隧, Totem pole” 이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뒤에 (北史)는 이를 숨기고자 하여 두개의 “Totem pole”을 새우면서, 고구려의 시조 와 그의 어머니 (河伯女朱蒙) 를 상징 한다고 했다. 뒤에 (또는 그 이외의 지역에) 는 그 행사를 하는 곳에 큰 사당을 지었다 (立大屋祭鬼神,冬祠零星社稷). 사람 모양을 깎아 세우니 그게 누구냐고 윽박질을 받았다. 그를 삼족오로 바꾸어 나무 끝에 달았다. 그러한 곳을 “소도 蘇塗”라 하여 종교적 의식이 뚜렷하다. 고조선이 멸망하여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뱃길로 한반도를 지나 일본 열도와 오키나와로 퍼져 나갔다.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馬韓之西海中大島上) 참성단 (塹星壇)이 “神坐” 였고, 이곳을 “소도 蘇塗” 즉 “神坐, 天壇” 라 불렀다고 보겠다. 그 곳을 지키던 사람이 마니 (壇君)이었다. 참성단 옆에는 나무 또는 돌로 만들었던 “환웅천왕을 상징”하는 “장승, 하루방,Totem pole” 이 있었었다고 본다.
제주도 에 나타난 “하루방,” 그리고 아직도 시골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장승”이 모두 “환웅천왕을 상징” 하는“Totem pole”에서 시작 되였다고 본다. 이 관습이 태평양 연안에서 볼 수 있는 “Totem pole”이라 본다.
삼국유사에 적힌 “제터 단”으로 기록된 단군 (壇君)이란 글자가 옳은 한자다.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가장 오래 되는 명절 의 뿌리를 짧게 정리해 보았다.
오늘도 이 거룩한 행사를 지내던 만주 땅에 사는 중국교포는 이 명절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그네들은 단오절 또는 삼일절 같은 행사를 이용하여 서로 만난다. 이 자유스러운 나라 미국에 살면서도, 이러한 중요한 명절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듯하여 옛 기록을 찾아보았다.
거래의 동질성을 이어나감이 통일을 이루는 뒷받침이 된다. 배달민족이라 자처하는 단군 (壇君)의 후손들에게 개천절은 오래오래 지켜 나가야할 명절이다.
2014년 개천절을 맞이하여,
모솔, 이 돈성
문학의식 99 2014 겨울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