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1: 고구려(高句麗)의 어원과 발생지
고구려(高句麗)의 어원:
앞에서 여러차례 밝힌 바와 같이 만주에 살던 사람들의 선조는 황하문명의 발생지인 산서성 해지-분수 일대에서 옮겨 왔다는 사료를 찾았다.
문헌을 살펴 보며, 고구려는 이다. 한때 전한(前漢)의 외척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기원후 25년)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 8년 ~ 23년)나라를 세웠던 왕망(王莽) 은 높다는 뜻을 아래 하(下)자로 바꾸기도 했다 .
구려(句麗)와 같은 부족을 음이 같은 여러 글자로 기록 하기도 하고, 음과 뜻을 이리저리 돌려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 오늘 <려(麗)라고 읽는 글자는 옛적에는, 검을 려, 검을 여 (黎; lí/ lai4/ lei)와 같은 발음으로 “리이”라고 읽어 흔히 쓰는 “㛤 犂 梨 梩 梸 犁 琍 离 離 鯬 鵹 麗 .驪”와 같은 여러 글자로 기록 되였었다.
이를 추적해 올라가면 제일 오랫적 기록이태사공 자서에 나오는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동북 쪽으로 올라가는 분수 계곡에 사았다. 려(黎)란 이름은 치우천왕을 도와 탁록에서 싸었던 (涿鹿之戰) 구려/리 (九黎)가 고구려의 첫 이름으로 추리 된다 . 시경 운한(詩經 雲漢)에는 서주 (西周)의 백성을 여민 (黎民)이라 했다. 그 때는 구려 (九黎)와 삼묘(三苗)가 같은 지역에 있었다. 구려 (九黎)가 구리 (九夷)로, 리/려(黎)를 려융(驪戎) 이라 했다.
여씨 춘추에서는 작병 (作兵)이란 말을 ‘주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황제를 이겼다’고 풀이 했다 . 이 전쟁을 “구리지난; 九黎之亂”이라 부르기도 하고 치우 천왕을 “구리지군; 九黎之君” 또는 “구리치우; 九黎蚩尤”라고도 한다. 구리(九黎)는 여민 (黎民)의 여러 부족이란 뜻이다. 그 들을 그계 (其械)라 했다. 형틀 계 (械:xiè jiè/시애) 란 글자는 “契, 解”의 동음이자다. 탕병(蕩兵)이란 편명을 용병이라 하니 그 뜻이 뚜렸하다. “온 천하 사람들이 하나로 뭉쳤다,” ‘옛부터 현명한 왕은 의로운 병사가 있어 그들은 나태하지 않았다” 하는 기록이 있다.
전설과 미신을 그리 믿지 않았던 공자 님도 치우(尤)는 실존 인물이라 믿었다. 하여 치우의 반항는 “부자지간 또는 군신지간에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합당한 청원이였다”고 공자가어에 실려 있다 .
단군조선 사람들 (械, 契, 解)의 자연스러운 합당한 청원이 거절 당하자 하나 같이 뭉쳐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열심히 싸웠었다. 치우를 쫓겨가는 (돼지의) 제왕 (逐帝)이라 했고 전쟁터 이름에도 돼지란 뜻이 있다. 동양문화의 발생지에 살던 여러 부족(九黎, 九夷)들 중에 중화 세력에 동화 되기를 거부하여 그곳을 떠나 만주땅에 들어와 부여와 고구려를 세었다. 고구려와 부여의 선조들이 황제와 싸웠다. 고구려의 발생지는 산서성 해지-분수 연안이다. 지역적으로 북쪽에 산다하여 북이(北夷)라고도 했다 . 반고는 백호통덕론(白虎通德論)에서 북이의 악은 쫓겨 밀려난 사람들의 감정을 나타냈다는 뜻에서 나타냈다. 옛적에는 로 썼다 . 우왕의 후손이란 뜻에서 북적의 악(北狄之樂)이라고도 했다 . 북이(夷狄)를 북적(北狄)라고도 했다. 그들이 천자(天子)란 이름을 처름으로 썼다 .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직결 되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는 동명이란 같은 이름이 나타난다. 북쪽에 살던 부족이라 북이(北夷)로 기록되였다. 중원 사람들은 황하문명의 발생지에 있던 북이(北夷)라 하던 부족이름 또한 다른 이름과 같이 점차적으로 중원에서 먼곳으로 밀어 만주 땅에 이르렀다 . 강희자전에서는 송나라 때 동북이를 통상 해(奚, 傒, 解)로 적는다고 한다 .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 설화에는 이들을 모두 북이(北夷)로 기록 했다 . 앞에서 다룬바와 같이 삼국지 동이열전은 요동만 수계(Watershed)에 속하는 남만주 일대를 묘사 했다. 부여 연맹체 중에서 북쪽에 있던 자그마한 나라를 사음자로 논형에서는 탁리국(橐離國),후한서에서는 색리국 (索離國)이라 했다.
삼국지(三國志)에서 부여(夫餘)가 속했던 현토군(玄菟郡)에는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 (高句驪,上殷台,西蓋馬) 세 현이 있었다. 부여전에는 <동명(東明)이 부여땅에 가서 왕이 되였다는 위약의 내용을 인용하여 동명의 출생지가 고리국 (高離之國) 이라고 했다 . 검을 려/여 (黎; lí/ lai4/ lei/리이)자가 “북국, 부여,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다. 동명(東明)이 떠났다는 나라 이름에는 모두 떠날 이(離)자를 붙였다. 그 앞자(索, 橐, 高)가 어간(語幹)이다. 모두 발음이 다르니 뜻글자를 썼다고 본다. 아니면 글자가 비슷해서 잘못 적었다고 볼수도 있다.
새끼줄 삭/색(索)자는 상서 목경(尚書 周書 牧誓)에 희발이 목야전에 앞서 옛 속담이라면서 인용한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문구에 있다 . 상서 시경 역서등에 나온다 . 삭(索)자는 상나라 때에도 사용하던 글자다. 은민(殷民) 7족에 색씨(索氏)가 있다. 조세가(趙世家)와 세어(世語)에는 산서성 일대에 소삭정/성 (小索亭/城)이 있었다고 한다 . 삭씨(索氏)가 분수연안에서 하북 평원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흐터저 나갔다. 그들의 한 분파가 만주 땅에 들어 왔다.
설화 내용을 살펴 보면, 동명의 출생지는 졸본부여의 서북쪽 큰강 건너편에 있었다. 이를 삼국유사에서는 옛 기록을 인용하여 (古記云) 부여의 북쪽 지역이라 하여 북부여 (北扶餘)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북부여 (北扶餘)고 했다 . 졸본부여와 북부여 사이에는 큰강 지나갔다. 그 큰 강과 북부여 사이에 동부여가 있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고구려는 옛 위만조선 수도일대 경기지역에 이미 있었다. 그 지역을 고구려현(高句驪縣)이라고 하고 했다 . 삼국지에는 <고구려에서 현토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 갔다. 동쪽 경계(輯安縣)에 자그만 성을 짖고 조복의책을 보관 했다가 필요한 때(歲時)에 와서 가져다 사용 했다. 지금은 오랑캐들이 이 작은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한다. 구루(溝漊, 溝樓 , 溝婁)는 고구려말로 성(城)을 뜻한다 . 물(水)가 가까이에 있는 왕실의 사당(祠堂,family shrine)을 그렇게 이름 붙였다 . 사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 곳을 읍루(挹婁)라고 했다. 산해경에 따르면 호타하(虖沱之水) 유역에 그러한 사당이 있었다.
오늘의 지도로 설명하면 큰강 엄호수(淹淲; yānhǔ/biāo水)일명 개사수(蓋斯水; hésī)가 요하(遼河)다. 요하를 건너 보슬수(普述; pǔshù水)에서 세 친구를 만나 동행하여 졸본부여에 도착 했다. 도착한 비류수상(沸流水上)이 으로 오늘의 심양-요양 일대다. 이 곳이 부여의 경기지역이라 하여 졸본부여 (卒本扶餘)라 했다. 요하 서쪽에 있는 요녕성 부신시(阜新市)가 북부여 (北扶餘) 였다. 그 보다 동쪽에는 유하 (柳河, Liehegouzhen)라는 자그만 여울이 있다. 동부여 (東扶餘)는 유하구진 (柳河溝鎭)일대에 있었다. 그 곳이 압록수(鴨綠/淥水) 가까이에 있던 동부여 (東扶餘) 에서 동명왕 어머니 유화(柳花) 부인이 죽었다 .
금사(金史)에 이르기는 가섭원 (迦葉原)이라 하던 유하(柳河)는 발해의 월희 (粵喜yuèxǐ/위에 시)현이였다 하여 요하(遼河)란 이름을 붙였다. 구하(狗河)와 유하(柳河)가 있다. 월희(粵喜)는 옛 발음으로 위에 시(yuèxǐ/)와 비슷하여 햇 님(xǐ)같이 위에 높이>하는 뜻이다. 요하를 라한 근원이 설명 된다. 요양(遼陽)은 동양하(東梁河)에 의지(倚)하고 있다. 올로홀필렬(兀魯忽必剌)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속명으로 태자하(太子河)라 부르는 강이다 . 주몽이 떠나서 도착한 곳이 현제 요양(遼陽)으로 확인 되였다.
요하가 살수대첩에 나오는 압록수이다. 평양성(平壤城, 遼陽, 襄平城)은 압록수 동쪽 30리에 있었다 . 그 사이 늪지대를 살수(薩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붙였다. 압록수(鴨綠水yā lǜ lù. 鴨淥;야뤼수)는 이다 .
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동부여가 있던 곳을 동해지빈가섭원이라 했다 . 앞에서 해(sun,sun-ray)의 사음하여 여러 글자로 기록한 중에 바다 해(海)와 풀 해(解)자도 있다고 했다. 동해지빈 (東海之濱)이란 이란 뜻이다 . 일연 스님은 그곳을 불교에서 쓰던 이름을 인용하여 가섭원 (迦葉原) 이라고 했다. 가(迦)자는 앞에서 배하왜왕(拜假倭王)을 설명한 글자(假, 假衣幘, 拜假難升米)와 같은 뜻으로 먼 하늘 나라에서 보낸 햇님의 후손(葉, yè xié shè , 解)이 자리잡은 곳이란 뜻이 있다. 가섭원을 모둔곡(毛屯谷)이라고도 했다 . 모둔(冒頭, 毛屯, 旄頭)은 흉노전에 나오는 웃사람 중의 웃사람, 선우두만 (頭曼)의 태자였다. 그러한 뜻을 지닌 사람을 삼국지에 부여선우(扶餘單于)라고 실렸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졸본(卒本)이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홀본으로 나온다. 홀본을 후벤(忽本hū běn )으로 읽었다. 후(忽)는 호(胡,東胡)로 해(解,奚)의 본고장이란 뜻이다. 졸본(卒本)은 본래부터 햇 님의 후손(解,奚))이 살던 땅을 다스리던 수도였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를 부여의 경기지역이라고 풀이 했다.
고구려 건국설화에 나오는 이름들은 모두 남만주 서남쪽 의무려산(醫巫閭山, 醫無閭山) 또는 흑산 (黑山) 이라고 부르던 북진시(北鎮市) 일대에서 요하를 건너 심양-요양 일대에 이르는 동호 (東胡)문화가 번창 했던 고조선 지역에 있었다.
끝, 다음에 계속
July 24,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