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10:
금조선(今朝鮮)을 찾아-1:
중국 전사사(中國 前四史書)를 읽다 보면, 여기 저기에 조선(朝鮮)이라는 낱말이 나온다. 산해경 해내경 (山海經 海內經)에 실린 조선(朝鮮)은 산서성 해지 연안이라고 밝혔다. 해내북경 (海內北經)에 실린 조선은 정확한 위치와 시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발해만 서쪽 연안이라고 본다. 삼국지(三國志)에는 “오늘의 조선今朝鮮” 하는 구절이 있다 . 당나라 때 요사렴(姚思廉)이 부친의 유명에 따라 양서(梁書)는 중국 남조 양나라(梁, 502년 ~ 557년) 시대의 역사를 기록 하면서 “魏時,朝鮮以東馬韓、辰韓之屬,世通中國”는 문구를 남겼다. 그 시절에는 조선, 마한, 진한 하는 이름이 없었다. 조위 시대(魏時) 진수가 말한 금조선 동쪽 한 반도 전역을 뜻 했다 .
진수(陳壽, 233- 297 AD)가 49세 때인281년에 안에서 찾았다 . 비 또는 불(不) 로 읽는 글자는 햇 볓을 뜻하는 옛 말의 사음자다. 비준(汲郡人不準)이 삼한의 후예란 뜻이다. 그가 무덤에서 파낸 자료는 모두 단군 조선의 후예들이 세운 위나라의 족보(蓋魏國之史書)였다. 서진 초대 황제 사마염 (西晉武皇帝 司馬炎, 236년 ~ 290년)의 궁정에 전해졌다.
단군세기(檀君世紀)가 6 세기 까지 중원 사료집에 있었다:
장화(張華, 232년 ~ 300년)의 추천으로 진수는 사마염의 궁정에서 일했다. 도굴된 죽간의 내용을 당대의 석학이였던 진수는 읽었다. 많은 사람이 위서(魏書. 魏志)를 편찬 하여 무려 10여종이 있었다고 한다. 단군왕검의 혈통기록을 뜻하는 우본기 (禹本紀)가 있었다. 삼국지에 실린 내용이 섞여 있다고 본다. 여도원(酈道元, 466년? ~ 527년) 이 편찬 한 수경주(水經注)에는 인환(因桓) 하는 설명이 <황하가 곤륜산에서 출발하여 서안 분지를 지나는 위수(渭水)의 지류인 칠수(漆水) 를 설명 할때 나타난다. 상서 우공편에 실린 “西傾因桓是來”를 인용했다. 여도원이 살던 시절 까지 우본기(禹本紀), 즉 단군세기 (檀君世紀)가 존제 했었다. 그 안에는 단군조선 건국기록이 있었다. 서진이 강남으로 밀려간 후에는 왕검(王儉)에 관한 기록이 모두 위서(僞書)라 하여 사료를 제거 했다는 기록이 안씨가훈 (顏氏家訓 書證)에 있다 . 북송이 건국한지 몇달 후 부터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고 강남으로 쫓겨났던 남족 왕조는 급총주서 (汲塚竹簡)를 어떻게 처리 했다. 남족이 새운 명나라 때에 갑짜기 죽서기년이 나타났다. 원본과 달라 위작이라고 한다. 현제 인용되는 죽서기년은 신해혁명 (辛亥革命; 1911년) 이후에 나타났다. 양심있는 북경 대학 중심의 사학자 구힐강 (顧頡剛), 나근택(羅根澤)등이 옛 사서의 잘못을 모은 논문집, 고사변(古史辯)이 나타났다. 이들을 고사변학파 또는 의고파(擬古派) 라고도 부른다. 그 영향으로 옛자료를 모아 복원 시켜 “고본(古本) 죽서기년”이 나왔다.
급총주서가 발굴된 해에 숙신씨가 친목의 상징인 효시(肅慎來獻楛矢石砮)를 바쳤다. 고구려 제13대 서천왕(西川王)이 재위 (270년~292년) 하던 때, 숙신 씨가 반발하여 동생 달가 (達賈)를 시켜 숙신씨의 본거지인 단로성(檀盧城)을 점령했다. 졸본부여가 있던 지역을 금조선(今朝鮮)이라 했다 . 이 곳이 친위왜왕비미호 (親魏倭王卑彌呼)가 살던 곳이다 . 이를 통전에는 한말 공손도 덕택에 위진 시대에 그 땅을 얻었다고 했다 .
중국의 삼국시대 (中國三國時代)는 후한 (後漢, 25년-220년)말에 세나라 (魏, 蜀漢, 東吳)가 세력 다툼을 하던 (220에서280) 60년이다. 삼국지(三國志)는 후한 중말기 부터 265년 까지를 기록 하고, 고구려전(高句麗傳)은15년 짧게 245년 (正始六年) 으로 끝냈다. 서진 (西晉, 265-316) 이 건립한 해를 삼국의 끝으로 보았다고 해도 합당한 설명이 아니다. 그가 쓴“오늘의 조선今朝鮮”이란 구절을 사용한 “고구려전 高句麗傳”은 그보다 15년이 짧은 245년 (正始六年)으로 끝냈다. 그가 12살때 일어 났던 사건의 기록으로 고구려전을 끝내고 말았다. 그러면서 “오늘의 조선今朝鮮” 이란 구절을” 남겼다. 글자의 뜻은 분명하다. 그가 삼국지 三國志를 쓰고 있을 때 였어야 한다. 그때는 이미 고구려와 새력 다툼을 하던 공손도(公孫度) 집안이 멸망 (238 년)한 이후다. 한국 역사상으로는 신라 新羅 와 백제 百濟 그리고 가야 (伽倻) 가 설립해 있었고, 중원은 졸본부여, 즉 양맥지곡(梁貊之谷)에 살던 한(倭, 汗, 韓)과의 접촉이 빈번 하던 시기 였다 . 삼국지를 읽어 보면 백제百濟에 관한 예기는 없다. 같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150여년 뒤에 작성한 후한서 (後漢書, 范曄 398-446 AD)에도 백제百濟에 관한 예기는 없다. 백제와 같이 해양권을 즐기고 있던 왜 (倭人)에 관해서는 자새히 기록했다. 당시 글자 (漢字)사용의 제 일인자로 알려진 진수는 삼국지를 이렇게 미묘하게 만들었다.
끝, 다음에 계속.
August 1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