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5
고조선 지역의 통치 형태:
통치형태와 체제의 운영에 관해서는 옛부터 깊히 다루어 왔지만 아직 정답을 찾지 못한 어려운 문제다. 이러한 심오한 문제는 주어진 시대와 장소 여건에 따라 그에 합당안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당연한 명제 (命題)다. 이 어려운 문제를 주 무왕이 기자에게 물었다 . 후위성제(後魏成帝)는 이윤유서(彝倫攸敘)란 뜻이 누구나 이해 할수 있는 상식적 판단(Situation ethics, Common sense ethics)이라고 풀이 했다. 누구나 실천 해야하는 명제를 동양에서는 병법(兵法)으로 다루었다. 손자벙법 번역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서양에서는 미학 (美學, Art)의 범주로 인식 했다. 이성과 감정이 결부 되여 판단을 내리고 최고의 기술로 실행 했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서로가 제것이 고 서슴치 않고 자신의 소견을 발표해 왔다. 자아인식(Autonomy)이 뚜렸했다. 그 명맥이 이조 말기까지 이어저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나타났다. 중원세력은 도덕적 우월주의 (Moral Imperialism)에 의거하여 남만주에서 평화스럽게 살던 상태를 무군장 (無君長)이라고 비하 했다. 이러한 운영 체제는 유목민족 특성이였다. 대인(大人) 또는 군장(君長)으로 기록된 작은 단위의 자치지역 지도자를 남녀 무당이 다스린다고 하여 옹안(擁閼, 雍閼)이란 글자를 썼다 . 대인 (大人)을 왜인(倭人)이라고도 했다. 공자님은 그러한 운영 체제를 이상향으로 그려, 남만주로 이어지는 동이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 삼국지 읍루전과 예전(挹婁傳 濊傳)에는 무대군장 (無大君長) 이라고 했다. 왕중왕이 없다는 표현이다. 고구려전에 를 남겼다 . 금사 (金史)에는 요양(遼陽)에 올로홀필렬(國名兀魯忽必剌) 이라고 부르던 나라가 있었다고 했다 . 그 곳이 삼국유사 권 2와 권 4에 의상대사와 진표율사(眞表律師) 일화에 나오는 하슬라주 (阿瑟羅州)라 한 곳이다. 한반도 강릉시 일대(溟州)가 아니라, 발해의 수도 요양(遼陽)이다 .
고조선 지역은 연방 자치제 였다:
이러한 자치제(Autonomy)가 오래 계속 되어왔다. 삼국지에 <부여전과 고구려전 에는 5-6개의 집권층 가문이 있다. 집권층 가문은 저나름 대로 부족지도자가 사는 성시(盛市)가 있었다. 유목민의 습성에 따라 에는 수도가 여러 곳에 있었다. 특히 전쟁 때는 왕은 필요에 따라 취침 장소를 옮겼다. 고조선 지역에는 여러 개의 부족 연맹체가 있었다. 때로 혈통이 다른 집안에서 왕(王)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를 유교 관념에서 는 인식으로 작성한 기록이라 왕위 계승에도 혼란이 많이 나타 났다. 삼국 발생 초기에는 어느 한 부족 국가가 때로는 인접해 있던 다른 부족 연맹체에 속했다고 기록 했다.
삼국지에 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서쪽에 인접해 있던 선비와 싸웠다는 근거가 삼국사기 고구려 2대 유리왕(瑠璃王; 기원전 19년 – 18년) 편에 처음으로 나온다 . 삼국유사에는
삼국지에는 동명이 부여땅을 떠나 부여땅에가서 왕이 되였다. 고구려의 시조를 밝히지 못하고, 부여의 별종이라 언어 제사(言語諸事)가 부여와 같다고 했다 .
고구려와 부여의 한계가 뚜렸치 않다. 동명(東明, 東明聖王)이 부여 또는 고구려의 시조라고 하는 이유다. 삼국의 건국 초기에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부여란 이름을 혼용 했다.
끝, 다음에 계속.
August 9,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