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6
공손(公孫)씨가 어떻게 양평성(襄平城)을 점령 했나?
고조선 지역의 통치 형태를 감안 하여 한마디로 표현 하면, 부여(扶餘, 夫餘)를 다리(connecting bridge)로 고구려와 백제, 왜(倭, 汗, 韓)를 혼용 했다.
뚜렸한 자치주였던 졸본주 (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라고도 알려진 삼국사기와 삼국지에 나타난 가구 수를 감안하면 고 풀이 함이 합당 하다 :
부여의 총 인구가 8만호(戶八萬), 고구려가 3만호 (戶三萬) 예전에 2만호 (濊傳:戶二萬)였다. 한전(韓傳)에는 50여국이 있다. 큰 나라가 1만 여가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에 총인구가 10만여호 (總十餘萬戶)였다.
발해만 서쪽으로 판명된 변진전에는 큰 나라가 4- 5천가구(四五千家), 작은 나라는 6-7백 가구(六七百家), 총 4-5만 호(總四五萬戶) 였다.
그 시절에, 는 기록은, 잠지락부가 고구려 서남쪽에 접해 있던 대륙백제의 연맹체에 편입 했다는 뜻이다. 잠지/우락부 (蠶友落部, 蠶支落部)를 남부(南部)라고도 불렀다 . 염사치 일행이 도착 했던 함자현 (含資縣) 과 같이 한서 지리지 낙랑군 (樂浪郡)에 나오는 잠대(蠶台)현 이다. 요동만 서북쪽 해안에 있었다 .
삼국지에 보면; 선비(鮮卑) 동쪽이 부여(夫餘)에 접했다. 기원전 9년에 고구려(高句麗, 夫餘) 2대 유리명왕 (瑠璃明王, 재위 : 기원전 19년 -기원후 18년)이 요하 서쪽에 있던 서비족을 굴복 시켰다 . 서남쪽 세력의 친입에 방비하려고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산을 너머 압록강 수계에 있는 곳으로 천도하여 성을 쌓았다. 위나암성 환도성(尉那巖城,丸都城) 또는 국내성이라고도 한다. 계속하여 일대에 있던 작은 국가들을 흡수하여 나갔다. 유리왕이 인솔 했던 20,000명의 병사에는 요하 서쪽에서 시조 주몽을 따라 왔던 오이 마리(烏伊, 摩離) 부족이 동참 했다 . 요하 서쪽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자기들과 혈통이 같은 고구려군에 동참 했다는 뜻이다.
제3대 대무신왕 (大武神王, 재위:18년~44년)의 어머니는 비류수상에 자리잡고 살다 주몽에게 양보 한 다물국왕(多勿國王)의 딸이다. 이 37년에 요동 반도에 있던 최리 낙랑을 정복하고, 북명사람 괴유(北溟人怪由)를 얻어 서쪽으로는 동부여도 흡수하고, 요하를 건너 더 서남쪽으로 진출하여 옛 고향 땅 현토군 고구려현을 회복 했다 . 같은 시대가 되는 기원후 20년에 괘유와 같은 지역 북명사람이 밭을 갈다 예왕의 도장(濊王印)을 얻어 신라의 2대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4년 ~ 24년)에게 바쳤다 . 고구려와 신라가 요동만 북쪽 해안 일대를 뚜렷한 국경 없이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서남 쪽으로 국토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동서 양한 사이에 잠깐 나타났던 신(新)나라의 왕망(王莽)과 부디쳤다. 요서(遼西)지역에 까지 진출하여 는 기록이 “漢書 王莽傳, 三國志, 南北史, 通典”등에 모두 실려 있다 . 왕망(王莽: 재위 8년 ~ 23년)을 제거하고 동한을 세운 광무제 (漢光武皇帝, 재위 25년 ~ 57년)가 고구려를 친입 했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말기에서 제6대 태조대왕 (太祖大王; 재위 53년 ~ 146년) 집권 초기다 .
대무신왕이32년에는, 대신 구도 일구 분구(大臣仇都、逸苟、焚求) 세사람이 비류부장(沸流部長)으로 일할 때 너무 지나친 상식이하의 자율권을 행사하여, 서민으로 만들었다 . 그때는 비류수상 이라고도 하는 졸본부여 지역이 대륙백제 연맹체와는 먼 거리라 그 쪽에 붙을수 없서 고구려왕의 명에 따랐다. 그 해에 계모의 모함에 호동왕자가 자살 했다. 호동왕자가 자살한 사건을 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이 시대를 설명하며, 44년에는 는 잘못된 기록을 남겼다. 살수(薩水)란 이름은 수양제의 대군이 참패한 장면을 보고 너무나 비참하여 이다. 그러한 기록에 상반되는 사건이 한중 두 나라 기록 여러 곳에 있다. 다시 5년후 .
요하 서쪽 발해만 연안에 자리 잡았던 공손도(公孫度,대륙백제)가 어떻게 졸본부여 비류수상으로 진출 했나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고구려가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169년에 부산(富山)의 적을 물리친 이후 왕위 계승권에 연류된 기록에 나타 난다 .
그러한 은공을 무시하고 3년 후 고구려를 친입 했다. 8대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년~179년) 은 172년에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 명림답부(明臨答夫,
67년~179년)의 전술을 받아 드려 적군의 생활 필수품을 모두다 없셔버리는 청야전법(淸野戰法)을 이용하여 한나라 군사를 좌원에서 격파 했다. 그 당시 피했던 곳이 환도성이였다. 신대왕은 그를 국상에 임명하고 내외 병마(兵馬)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梁貊) 숙신(息愼. 肅愼 )씨의 본향인 졸본부여 일대의 통치권을 받았다 .
연나부(椽那部)를 연노부(涓奴部) 소노부(消奴部)라고도 했다. 부(部)를 가(加)로 고쳐 쓰기도 했다. 소노(消奴)란 이름자는 삼국지에 이름이다. 주몽이 도읍을 정했던 졸본부여를 이렇게 표현 했다. 훈/혼하(混河, 渾河, 沛水, 太子河)유역에 살던 부족에서 나온 이름이다. 시냇물을 뜻하는 연(涓)자를 모양이 비슷해 보이는 사리질 소(消)자로 바꾸었다. 비류수를 뜻하는 시내 연(涓)자가 소(消)자로 이를 다시 음이 같은 소(召)자로 바꾸었다. 그곳에 살던 소서노(召西奴)가 졸본인 연타발의 딸로, 외지에서 온 주몽과 결혼 하여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다 . 비류수 유역 졸본부여에 살던 고구려의 핵심이 되는 집안이였다.
공손도란 이름이 처음 나타나던 시절에 고구려는 8대 신대왕(新大王, 伯固; 재위 165년~179년) 다스렸다. 그는 아들이 5이였다.
첫쩨가 발기(拔奇), 그 밑으로 이리모(伊夷模), 발기(發岐), 연우( 延優) 다섯 쩨가 계수(罽須)다. 왕이 죽은 뒤, 맏 형인 발기(拔奇)를 제치고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두쩨 동생 이리모(伊夷模)가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년~197년)왕위에 올랐다. 불만을 품은 발기(拔奇)가 소노가(消奴加)와 같이 각각 3만여호 (各將下戶三萬餘口)를 대리고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康)영역, 즉 대륙 백제로 가서 항복 했다가 곧 되돌아 와서 비류수상 (還住沸流水上)에 살았다 . 삼국지에는 산상왕(山上王) 때가 되는 경초중 (建安中; 196년 ~ 220년)에 공손도가 출병하여 . 고추(古雛)란 명칭의 본 뜻은이다. 이 문구에서는 주몽의 직계 후손을 뜻한다. 졸본부여가 대륙백제 연맹체에 가입 했다는 뜻이다.
고국천왕 (故國川王)집권 6년(184년) 에는(대륙백제) 요동태수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친입 했다. 왕자(다섯 쩨 동생) 계수(罽須)가 나가 싸우다 실패 하여 왕이 직접 출병하여 크게 이겼다. 그의 집권19년인197년에는 한나라에 난리가 나서 많은 중국사람들이 고구려로 왔다 . 비슷한 사건이 다음 세대에 또 다시 나타났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죽자 그의 네쩨 동생 연우(延優一名位宮)가 왕위를 이어 받아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년~227년)이 되였다 . 그의 형 (신대왕의 셋쩨 아들) 발기(發岐)가 불만을 품고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가서 투항하고 그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를 침략 했다. 연우(延優)가 동생 계수를 시켜 공손도군을 격파 했다. 궁지에 몰린 발기(發岐)는 막내 동생 계수(罽須)에게 하소연을 하고 부끄러워 자살 했다 . 상산왕 2년에 환도성을 증축하고 13년인 209년에 천도 (王移都於九都) 했다. 조조 밑에서 허수아비로 있었던 동한 헌제 (漢孝獻皇帝)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양위하기 3년전인 217년에는 한나라 평주사람 하요 (漢平州人夏瑤)가 1,000여 가호를 인솔 하고 고구려에 투항 하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 .
발해만 서남쪽에 자리 잡았던 대륙백제 연맹체는 한나라와 관련이 깊은 공손도 (公孫度)와 합세하여 주몽이 자리 잡았던 졸본부여, 양평(襄平)을 계속 공략했다. 백제 온조왕 2년에 졸본에 시조 동명왕의 사당(始祖東明廟)을 세우고 천지신에 교제를 (王祀天地)올렸다 .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자라잡 았던 졸본부여를 대륙백제에게 넘겨주고 수비에 적당한 환도성(九都, 丸都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백제와 고구려가 졸본에 설치된 시조조를 참배란 기록을 보면, 삼국초기에서 402년 까지는 졸본부여의 소유권이 백제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백제본기에서는 공손도를 사위로 맞아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고 했다 .
끝, 다음에 계속.
August 11,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