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7
선인 왕검이 살던 곳 평양(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이 어디인가?
제야 사학계에서는 흔히들 고 한다.
이는 필자가 한 논지와 일치 한다.
필자는 요사 지리지에 나오는 양평현(平陽縣)이 한서 지리지 현토군에 속했던 고구려현의 수도라고 본다. 그 현의 장소는 요사(遼史)와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내용을 분석하여 오늘의 북진시 일대였다고 밝혔다.
According to the Tang era encyclopedia, this region had been a part of Bian Zhin (弁辰韓) and produced salt. The “Salt Prefecture鹽縣” was the “Dunyu Prefectures屯有縣” and one of the prefectures in the Han era Liaodong (遼東) County.
It appears that the Wei people had been in the Nangnang region (樂浪之丘) before moving down to the south. The seventh King Chadae (次大王 146–165) of Goguryeo enjoyed hunting over there as well: “遂成獵於倭山, 與左右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之下.”
“The seventh king Chadae (遂成, 次大王 r. 146–165) of Goguryeo enjoyed hunting with his staff around the mountain Wei 倭山之下.”
The History of Liao (遼史) provides dim light to the eastern slope of the Greater Hinggan Range大興安嶺, where the Pingyang平陽 prefecture had been for short time:
“太祖滅渤海, 復置安東軍。開泰中置縣 … 寧昌縣。本平陽縣.”
The 中國古今地名大辭典 provide clear answer about the Pingyang平陽 prefecture had been around the current Beizhen北鎭市Yiwulü Mountain醫巫閭山 region:
遼置, 後廢, 在今遼寧省北鎮縣東北。
元置, 為寧昌路治, 今闕, 當在遼寧省舊錦州府境.
지리지에 는 점을 근거로 “舊고구려” 란 이름을 쓰기도 한다. 구고구려의 수도가 요서에 있던 평양(平陽)이다.
이곳에서 고구려는 668년 나당(羅唐)연합군에 정복 당했다. 그 당시수도는 한반도 대동강 연안에 있는 평양이 아니라 삼국사기에 실린선 인 왕검이 살던 곳 평양(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이다. 남만주 태자하 유역에 있는 요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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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2, 2017
이러한 사실을 백제본기에서는 공손도는 요동에 기반을 둔 대륙백제 연맹체를 이용하여 주몽이 자리 잡았던 졸본부여, 양평(襄平)을 사용할수 있게 되였다. 고구려는제10 산상왕 2년(山上王, 재위 197년~227년)인 198년에 서쪽 세력의 수비에 적당한 환도성 (丸都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서남 쪽으로 옛 영토를 찾으려 노력 하던 동천왕 21년(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은 관구검의 난으로 환도성(丸都城)이 크게 손상되여, 전쟁이 끝난 다음해 인 247년에 평양(平壤城)으로 천도 하고 종묘사직 을 모셨다 . 삼국사기에는 평양(平壤)이란 이름이 이때 처음실렸다.
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嶽。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
故每於壇樹下咒願有孕。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號曰壇君王儉
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산상왕(山上王, ?~227년, 재위 197년~227년)은 고구려의 제10대 군주이다.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 (三國遺史)》에는 다른 이름으로 위궁(位宮)이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북사에도 위궁은 그의 이름이라 한다. 《삼국지(三國志)》 등의 중국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위궁은 산상왕이 아닌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이라 한다.
형 고국천왕이 아들 없이 죽자 그가 형수 우씨의 지지를 얻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셋째 아들인 그가 즉위하여 즉위 초 고발기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山上王 二年,春二月,築丸都城) 21년(247,
삼국에는 245년;正始五年; 正始: 240-249 )로 기록 했다.
고구려는처음에 연노부(涓奴部),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의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 젔다. 처음에는 연노부(涓奴部)에서 왕권을 잡았다. 점차로 미약해저서 진수가 삼국지를 작성 하던 시기에는 계루부 (桂婁部)가 대신 한다 . 제10대 산상왕(山上王:재위; 197년~227년)이된 이리모 (伊夷模)가 동쪽 경계(東界築小城)에 가까운 압록원 환도산 남쪽에 있던 옛 환도성(丸都城) 을 수리 하고 그 성을 수도로 정했다. 오늘의 통화시 일대다. 고구려 건국이후 관구검 친입시대 까지 왕권과 수도 변화를 간략히 설명 했다.
고구려전에서는 소수맥(小水貊)이 살던 자치국으로 이라 했다 . 관구검전에는 양맥지곡 (梁貊之谷)을 양구(梁口)라 하고 양음크어(梁音渴; kě hé jié kài)라고 밝혔다. 패자(沛者)가 살던 곳을 지나는 강이라 하여 패수(沛水)라 했다 . 이를 산해관을 지나는 옛적에 조선과의 국경 패수(浿水)와 음이 같다하여 요양(遼陽)시를 지나는 태자하를 패수 라고 부른다. 진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한 연태자 단(燕太子丹, ? ~ 기원전 226년)은 고조선과의 국경이던 패수(浿水) 하구 바닷가에 있는 바위에서 자살 했다. 이 곳을 넘칠 연자 연수(衍水)에 있는 섬에서 그가 잡혔다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동천왕 (東川王)이 246년 가을에 관구검 (幽州刺史毋丘儉)의 친입을 맞아 으로 피했다. 이 격전지를 금사(金史)에 고 한 곳이다 . 이곳이 진수가 고구려편에 고한 곳이다. 삼국사기
에 라고 했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환도성을 준비한 과정을 종합해 보면 천신께 재물로 바치려는 돼지 (郊豕)의 안내로 지혀적으로 수비하기에 좋은 위나암(尉那巖)을 찾고, 서기 3년에 그곳에 환도성을 쌓았다 . 압록강 서쪽 오늘의 집안 현이다. 동한 초기에 이 곳으로 피란 했다가 명림단부의 전략으로 한나라 대군을 좌원에서 섬멸 시켰다.
조위의 유주자사관구검의 공격으로 관구검 동천왕이 요하 일대에서 두번 크게 실패하고 쫓겨 갔덧 곳을 압록강 유역 (奔鴨綠原)이라 했다. 다시 남쪽으로 옥저 땅으로 피했다. 다닌 경로는 압록강 서쪽에 국한 되였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환도성 (丸都城)이 있던 곳을 고구려의 동쪽 국경(境界)에 가깝다고 했다 . 전쟁 이 끝난 다음 해에 옮긴 평양성은 옛 부터 사용해 오던 마을이였다. 압록강을 건너 남의 땅에다 성을 쌓고 종묘사직을 모셨다는 해석은 무리다. 평양은 졸본부여 패자 (沛者)가 살던 마을을 흐르는 물가(沛水)에 있었다. 오늘의 요양시 일대를 그가 삼국지를 작성할 때라는 그(今)자를 형용사로 쓴 “금조선(今朝鮮),비미호 여왕 今以汝為親魏倭王”이 살던 곳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는 로 나온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하평양(下平穰) 종평양(從平穰) 하는 문구가 있다. 앞장에서 사료를 근거로 살펴본 바와 같이 비문 내용을 보아도, 평양 (平壤)이 광개토대왕의 수도가 아니였다. 그의 아들 장수왕이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평양을 여러 글자로 썼다. 원주민들이 쓰던 말의 사음자란 증거다.
삼국사기 신라편에 제18대 실성 이사금(實聖 泥師今, 재위 402년 ~ 417년)은
평양주(平壤州)에 새로 큰 다리를 놓았다 . 비류수(沸流水, 卒本川)가 흐르는 졸본주(卒本州) 서남쪽을 평양주(平壤州)라고 했다 .
고구려의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國罡上王;재위: 331년 ~ 371년)이 옛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고 국력을 키우려 했다. 남쪽에 있던 대륙백제와 서쪽 연(燕) 나라의 침입에 방어 하려고 342년에 환도성(丸都城, 安市城)으로 천도 했다 . 수차례에 걸쳐 연(燕)나라의 침입에 시달렸다.백제 근초고왕과 371년에 평양성(平穰城) 소유권을 놓고 싸우다 전사 했다. 아들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
371년~384년)이 뒤를 이었다. 실의에 가득찬 그는 불교에 집착했다 .
아들 없서 동생이 뒤를 이었다. 그가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384~391) 이다. 부친이 다못한 일을 처리 하고저 385년에는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 현도를 점령했다. 백제와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 392년에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실성(實聖)을 인질로 했다 . 그러나 역 부족이였다. 아들 담덕 (談德)이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년- 413년)이다. 공손연 세력이 사라진 이후 부터 그 때 까지는 졸본주(卒本州)의 소유권을 놓고 백제와 치열한 점쟁을 했다. 그통에 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나라로 피란을 가서 갑까지 강국이 되었다 . 신라의 제22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년 ~ 514년) 4년에 다시 이름을 신라(新羅)라고 했다 . 삼국유사에는 지증왕(智證王)이전을 상고 이후를 중고(上爲上古,下爲中古)라고 했다. 이 때 수도를 오늘의 경주로 옮겼다고 했다.
광개토대왕의 수도는 환도성이였다. 하여 비문에 하는 문구가 있다.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첫 수도가 있던 졸본부여 지역을 탈환하고 백제의 요새 였던 독산성(禿山城)을 포함한 6 성을 수리하고 평양(平壤) 민호를 옮겼다 . 장수왕은 부친이 확장하여 놓은 졸본주(卒本州) 평양성(平壤城)으로 427년에 수도를 옮겼다 .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에 30,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옛 수도 한성(都漢城)을 고수하고 있던 백제 개로왕 (蓋鹵王, 近蓋婁。諱慶司) 부여경(扶餘慶)을 살해 하고 삼한의 발원지인 남만주 일대를 통일 했다 . 부여경이 전사한 옛 수도 한성(都漢城)을 삼국유사에는 근고초왕이 371년 (咸安元年)에 고구려로 부터 남평양(取高句麗南平壤)을 빼았고 수도를 옮긴 한성 (移都北漢城)이라고 했다 . 한성이 두 곳으로 나타났다. 오늘의 요양시 남쪽 해변에 가까운 해성시(海城市) 일대였고 또 하나는 낙랑유적지로 알려진 대동강 하류 강서군 북안구야한국 (北岸狗邪韓國)이라한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그와 같은 내용의 출처를 고전기 (古典記)라고 했고, 한성(漢城)을 한홀, 또는 시성, 내홀(漢忽, 息城, 乃忽)이라고 고도 했다. 백제 개로왕 (蓋鹵王)은 해성시(海城市)에서 죽었다.
끝, 다음에 계속.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