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전(高句麗傳)-본론:남만주의역사-9:
고구려의 전성기-장안성(長安城)과 임유관 전투:
진수는 동이의 최 강국으로 고구려보다 우세 했던 대륙백제는 존제성 마저 부정하려 노력 했다. 그러한 의도에서 후세 사가들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과대 평가 했다. 장수왕이 남만주를 통일하고 손자 나운(羅雲)이 뒤를 이어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 491년- 519년) 부터가 고구려의 전성시대다.
그 뒤를 이은 고구려 왕들은, 수 문제 양견(隋文皇帝 楊堅, 제위:541년- 604년)
이 589년에 5호 16국 시대를 평정 하고 중원을 하나로 묶을 때까지, 오합지졸에 빠진 중원의 북부로 진출하여 동북아시아 최대의 강국을 이루었다. 24대 양원왕 (陽原王, 재위 : 545년 ~ 559년)은 552년에 요서에 장안성 (長安城)을 쌓기 시작하여586년에 그의 아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년 ~ 590년)이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 했다 . 이렇게 번창했던 고구려의 전성기는 철저하게 숨겨저 있어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이 뚜렷하게 밝혀 지지 않았다 .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추리 할수 밖에 없게 되였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가 대립하였다. 근400동안 고조선의 후예들이 하북지역의 주역이였다. 한해(翰海)를 주관하던 삼한의 후예들은 장수왕이 만주땅을 통일한 뒤에 밀려 중국 동쪽 해안 지대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 문제는 수나라 때에도 대륙 백제 일부가 대륙에 있었다는 사료를 제시 하며 다루었다.
간략히 기마민족 (Eurasian Nomadic steppes)으로 분류되는 고구려에 관한 사료를 근거로 오직 삼국사기에만 실린 장안성 (長安城)을 추리하여 본다.
1. 중원 세력이 고구려 왕에게 주었던 직위를 보면, 장수왕 부터는 고구려를 으로 인정 했다. 고구려 장안성 (長安城)이 다른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2. 선비족 탁발부가 새운북위(北魏, 386년~534년)는 점차로 한족 문화를 받아드려 수도를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쇠퇴해 갔다. 북쪽 세력의 공백지를 돌궐과 고구려가 다투어 점유한듯 하다.
3. 문자명왕 원년에 북위효문제(魏孝文帝)가 왕에게 이란 칭호를 주고 의관과 수래에 다는 깃발 등을 보냈다. 뒤에 금과 가옥(黃金, 珂) 을 부탁 했다. 왕이 답하기를 고 했다. 위나라에서는 고구려가 거짓말을 한줄 알면서도 정중이 고구려의 거절을 받아 드렸다 .
4. 3년 뒤, 494년에는 부여왕(扶餘王)이 처자를 대리고 와서 나라를 바쳤다. 같은 해에 제나라 황제가 왕을 에 봉했다. 11년에는 남쪽 양나라 고조(梁高祖)가 즉위하여 와을 거기대장군 으로 했다. 17년에는 양고조가 자기를 괴롭히는 북쪽 세력을 견제 하려고 고구려를 포섭하려는 목적으로 왕을 <무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可撫軍大將軍開府儀同三司)라 했다 . 일본 쇼궁에 버금가는 직책을 상의 했다. 중원세력이 분산되여 만리장성 남쪽으로 밀려 고구려를 동반자로 하려고 남북세력이 노력 했다. 제임 28년인 519년에 사망하니, 위나라 태후가 깊흔 애도를 표하고 을 추가하여 책봉 했다.
5. 고구려는 남조로 부터 그와 같은 직위와 대접을 계속 받았다. 24대 양원왕(陽原王; 재위 : 545년 ~ 559년) 은 551년에 서쪽 세력과 부디쳐, 돌궐(突厥)의 친입을 받았다. 이를 간단히 처리하고, 552년에는 장안성 (長安城)을 쌓기 시작 했다. 이를 반대하여 577년에는 환도성(丸都城)의 주리가 반항(朱理叛)하다 주살 당했다 .
6.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년-590년)28년인 586년에 장안성으로 천도했다. 천도 한지 4년 뒤인590년에 수문제가 진나라를 정복 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나라의 북진정책에 대비하다 사망 했다 .
7. 수 문제는 고구려와 겨루던 돌궐을 동맹자로 삼으려 했다 . 돌궐에 갔던 양견이 돌궐 가한과 같이 있던 고구려 사신을 알아 보았다. 동행 했던 배구(裵矩)가 아뢰기를하는 내용이 삼국사기와 수서에 실렸다 .
8. 수 문제는 양고조가 문자명왕에게 주려던 <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라는 칭호와 선물을 주었다. 수나라의 계획을 인식한 고구려는 그 다음해에 임유관을 첬다 .
9.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치려는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598년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臨渝關)을 선제 공격했다 .
10. 임유관(臨渝關)는 요서에 있는 유수(渝水, 在遼西臨渝)계곡 통로를 막으려고 만든 요새 였다. 현존하는 산해관을 임유관의 다른 이름이라고 풀이 한다. 큰 잘못이다. 북주(北周;557년-581년) 관리의 신도비 (神道碑)에는 유관(渝關)이 산서성에 있었다 .
11. 고구려의 전성시대 영토를 추리해 볼수 있는 자료가 영양왕 (嬰陽王)의 이름과 좌우명에 있다. 호를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라하고 제세안민 (濟世安民)을 좌우명으로 치세를 했다.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대흥왕(大興王)이다 . 대흥안령 동쪽에 있던 현토군 고구려현의 수도 였던 평양(平陽)에 장안성을 쌓았다고 추측 된다.
12.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고 대군을 집한한 곳이 북경-천진 서남쪽 탁군 (大軍集於涿郡)이고, 출전앞서 발표한 연설문에; 는 문구가 수서와 삼국사기에 있다 . 고구려가 갈석산 남쪽 까지 점유 했다는 근거다.
13. 발해인 무예(渤海人武藝)는 고구려가 내분으로 멸망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수 문제와 양제가 남긴 기록은 고려치 않고 무예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잘못들 이해 하고 있다 .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부터 국토를 확장하여 장수왕의 손자에 이르러 대흥안령을 너머 영양왕 (嬰陽王) 때에는 산서성에 까지 이르렀다. 임유관 전쟁이후 부터는 국내 불만이 생겼고, 만주에서 밀려난 신라와 백제가 동남쪽 변경을 공략하여 장안성 (長安城) 에 7-8년 있다가 평양성(平壤城)으로 돌아 왔다.
삼국사기에; 했고, 고기에는 평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古記云; 自平壤移長安) 하였스니, 두성이 같은 곳인지 아닌지, 얼마나 멀리 떠러저 있었는지 알수가 없다>고 했다 . 장안성 (長安城)에 살았던 기간이 짧았기에 평양성(平壤城)의 다른 이름으로 잘못 인식 했다고 본다.
끝, 다음에 계속.
August 1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