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천도(遷都):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삼국지 동이전은 남만주 수계(水界,Watershed)에 국한된 지역을 다루었다. 하여 고구려와 부여 왜에 관한 역사를 설명하면서 남만주의 역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고구려의 첫 수도가 있던 졸본부여는 오늘의 심양-요양일대 라고 밝혔다. 나당 연합군에 함락 당했던 마지막 수도 평양성(平壤城)이 어디였나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졸본(卒本)이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홀본(忽本)으로 나온다. 이곳을 흘승골성(Citadel in the Holseunggol, 訖升骨城) 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이름자들이 모두 원음을 일저리 두섞은 한자로 기록 (假借轉注, PLCs and PSMCs)하여 정확한 뜻과 음을 찾기 어렵게 되였다.
옛적에는 홀본을 후벤(忽本hū běn )으로 읽었다. 후(忽)라는 사음을 호(胡,東胡) 또는 해(解,奚)자로도 적었다. 졸본(卒本)은 본래부터 햇 님의 후손(解,奚)이 살던 땅을 다스리던 지도자의 수도였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를 부여의 경기지역이라고 풀이 했다. 옛적에는 햇 님의 후손(解,奚)이 살던 땅을 다스리던 지도자의 수도를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 (平壤)이라고 했다. 사마천은 평양을고 했다 . 삼국사기에 라고 했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깊히 다루기로 한다.
일설에는 주몽이 졸본(卒本)부여에 이르니 그곳 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을 사위로 맞아 드려 나이 22살 (漢孝元帝建昭二年; 기원전 37년)에 부여의 왕이 되였다고 한다. 졸본은 부여 연맹체의 경기지역이였다. 삼국지에는 고구려 역사를 잘라 버리고, 뒷 예기는 관구검전(毌丘儉儉)에 있다고 했다 . 관구검(毌丘儉;?-255년)이 돌아가 공손연(公孫淵 , ?-238)을 치다 돌아 가니까, 공손연은 237년(紹漢元年)에 연왕(燕王)이라 자칭했다가 그 다음해에 주살 당했다 .
조위 유주자사 관구검(魏遣幽州刺史毋丘儉)이 인솔하여 고구려를 친입한 사건이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건국초기 기록에 모두 나타나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모두 남만주에 있었다는 뜻이 분명하다. 고구려본기에는11대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 20년(246년)에 부류수언덕 (沸流水上)과 양맥지곡(梁貊之谷) 에서 크게 싸우다 실패하여 환도성이 함락 되였다 . 동옥저로 도망갔던 동천왕은 구사 일생으로 왕이 살아 돌아 왔지만 환도성을 사용할수 없어 247년에 평양성 (平壤城)으로 천도 했다 . 다음 해인248년에는 신라와 화친 결의를 하고 왕이 사망하여 자원 (柴原)에 매장하니, 순장을 하려는 사람이 많고 애도의 물결이 끄치지 않았다 . 나라 사람들이 자결한 사람들의 시신을 나무섶으로 덮어 그 곳을 자원(柴原)이라고 했다.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사건이 백제본기에는8대 고이왕 (古爾王; 재위: 234년 ~ 286년) 13년(247년)에 있었다 .
고구려가 수도를 졸본부여에서 평양성으로 옮긴(遷都) 경로를 다루면서 이 시대 까지 의문에 싸인 한국상고 역사를 살펴 보려고 한다.
끝, 다음에 계속.
July 2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