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이해하기 위한 어휘사전 편찬.
이씨가 주장하는 “고전을 이해하기 위한 어휘사전 편찬이 필요하다”는 문제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면 언제나 느끼는 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한마디 한마디 깊히 생각하여 사용한다. 한국사람으로 한국학, 언어학, 한학등에 조예가 깊으신 분으로 애국충정에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대변 하셨다고 본다.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되도록이면 한자를 피하고 우리 고유 어휘를 살려 한글 전용을 주장하던 필자는 한국상고사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 씨가 대변한 문구 는 한자를 더 많이 써야 한다고 나서던 분들의 목소리다.
한국고전에 실린 어휘는 크게 세 부류로 볼수 있다. 옛 부터 한국 사람들이 쓰던 말을 오늘도 쓰고 있는 “상형표의문자(象形表意文字, 漢字)로 가차하여 기록된 어휘, 순수 고대 한국말, 이 두 어휘를 복합 간소화하여 만든 새로운 어휘” 등으로 분류 된다. 이 씨의 의견은 타당해 보이나 완성된 어휘사전을 가상해 보면 마땅히 “같은 어휘를 여러가지 뜻으로 풀이 했었다”는 근거를 실어야 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문제는 “한자(漢字)를 어떻게 풀이(Chinese hermaneutics) 하느냐” 하는 똑 같은 난관에 봉착 한다. 중국학(中國學, Sinology)을 다루는 전 세계 학자들 은이 문제를 “미로에 빠졌다,양파 껍질까기, 러시아 인형”같다고 표현한다. 논란에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자학 문제는후한 초기부터 논란이 계속 되여온 사안이다. 중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 Sinologists)은 “옛 중국 사람들이 풀이한 글자의 뜻에 오류가 많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서양식 인식으로는 “그림 글자의 다양한 풀이 운영 방법”을 학문의 기초가 되는 논리(論理, logic)로서는 꼭 집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어려움을 해결할수 있는 사람은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서 한자 (漢字) 풀이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를 다루던 삼한의 후예 들이 국제 학계에 나서서 “새로운 의견을 발표” 해야 한다.
필자는 한국 상고사의 비밀은 “한자의 발전 과정에, 옛적 노래를 적은 시경 (詩經)에, 각종 중국문헌속에 숨어 있다”는 가설 아래 중국 고전을 분석하여 2014에는 영문본을, 지난 해에는 한국어로 “古朝鮮 찾기” 를 내 놓았다. 필자가 2010년에 새운 “뿌리를 찾아서”의 뿌리를 밝혔다고 본다.
동양문화의 발생지에서 치수사업에 성공한 “우왕이 단군왕검이고,첫 수도 평양이 산서성 해지 동북에 있은 운성시 일대, 단군이 피했다는 장당경이 산서성 임분시 일대, 기자가 상 유민을 이끌고 들어온 단군조선 영역이 오늘의 당산 일대, 그들과 연립정부를 만들어 고조선 (동호)문명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시절의 수도가 만주 서남쪽에 있는 조양시(朝陽市) 일대 이고, 그 곳에 사기열전에 나오는 왕검성이 있었다. 발해만 서안을 따라 조양시에 이르는 길에 한사군이 있었다. 고조선의 최후 수도는 심양-요양(遼陽) 일대 였다. 고구려가 이를 흡수 했다”는 윤곽이 드러 났다.
이렇게 추론을 내리기 까지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중국학자들은 황실사관에 따라 시경 (詩經)을 필두로 각종 고전에 실린 글자 풀이에 심혈을 기우렸다. 시경 풀이를 바로 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훈고학, 춘추좌전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유로 “춘추학”이 나타 났고, 이를 종합하여 연구해야 한다는 뜻에서 경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나타났다. 남송시대에는 북쪽 사람들이 쓰던 어휘를 정리하기 위한 대대적 사업으로 어휘사전을 만들었고, 옛 글자 풀이를 바꾸거나 삭제한 근거를 여러 곳에서 밝혀 최근 Face Book과 website에도 올렸다.
상고사 연구가들은 금석문을 중요시 한다. 글자를 바꾸기가 어려워 처음 새겨 놓은 글자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문헌을 보면, 진시황의 순수비가 여러 곳에 세워 졌지만 동북 경계선이 되는 갈석산 일대에 새웠던 비문은 손실 되였고, 산동성에 세웠던 비문은 글자 몇자를 지워 버렸다. 필자가 간략하게 설명한 이와 같은 중국의 행위는 황실위주로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동북아시아 역사 위조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동북아시아 상고사 연구에 핵심이 되는 금석문이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문이다. 이를 단군조선 발생지부터 옮겨온 경로를 종합하여 지리지형과 시대에 합당한 풀이를 하면, 광개토대왕이 활동 했던 전쟁터는 남만주 연안으로 추리 된다. 한일간에 역사 분쟁의 핵심이 되는 문제가 신묘년 조에 나오는 이왜이 (而倭以)란 문구다. 이 두 글자를 현존하는 한한사전과 강희자전에서 찾아 보면 해답이 나온다. 그러나 “글자의 뜻이 여러가지로 기록되여 선택을 잘못”하여 한일 양국 학자들 간에 비문 풀이를 놓고 시비가 나타났다.
설문해자에서는 이(而)자의 원 뜻이 턱수염의 모형 글자(象形)라고 했고,석문 (釋文)에는 능(能)이라고 읽느다는 기록이 강히자전에 있다 . 한자 문화권에서 한국만이 이 글자를 “편안할 능, 능히 능”이라고 풀이 했다는 근거가 “Daum 한자 사전” 에 실려 있다. 글자의 내력을 살펴 보면 “여유 있고 능력 있는 융족의 지도자, 너/당신(猶)이라 쓰던 뜻”에서 유래된 글자다. 이 글자는 논어(論語)에 많이 쓰였다. 흔히 인용하던 “사십이 불혹 (四十而不惑)은 나이 사십이 되니 능히(能) 불혹이라” 는 뜻이다. 논어 학이(學而) 편은 마땅히 학능(學能)이라 읽고 능력으면 그 뜻이 쉽게 풀이 된다. 이렇게 “능히 능”자라고 풀이 하면, 논어를 비롯한 여러 선진시대 고전의 본문이 자연 스럽게 풀려 나간다 .
이 글자(而)가 비문 몇 곳에 쓰이였다. 생능유성덕 (生而有聖德)이라 “날때 부터 천부의 능력을 타고 났고 성덕이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서도 광개토왕 출생을 같은 “능할 능자 (生而雄偉)로 묘사” 했다. 대왕이 전쟁에 승리하여 돌아 왔다는 문구 끝에 전렵능환 (田獵而還)이라 했다. 쫒겨 온게 아니라 사냥도 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 왔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신라를 신민같이 받아드리고 (新羅以爲臣民) 난 후에, 대왕이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평양에 이르니 신라왕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而) 사신을 보내 협조를 요구 했다는 표현을 “巡下平穰而新羅遣使”라고 새겨 넣었다.
비문 전체를 보면, 첫 면“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까지는 대왕의 업적을 종합하여 실었다. 이 문구는 한글 어순의 문장이라,“백제와 신라는 永樂五年 부터 속민이였다. 그래서(由) 매년 와서(來) (고구려에)조공을 바첬다” 는 뜻이다.
그 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부터는, 대왕이 그렇게 공을 새운 자초지종을 설명 했다. 이 문구를 일본 사람들이 풀이한 대로 “신묘년(대왕 원년, 391년)부터 지금까지 (年來) 왜가 바다를 건너와 (渡海), 백잔을 깨트리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로 풀이 하면, 다음 문구부터 자세한 업적을 설명한 내용과는 문맥이 맞지 않는다. 어찌 하여 일본 사람들이 정벌한 백제(百殘)를 광개토대왕이 오랜 시간을 두고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백제의 각료들을 인질로 잡아 고구려로 돌아 갔서도, 백제(百殘)의 상관이 였서야 할 왜(倭)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나? 어느 누가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에 숙적으로 싸우던 집안의 업적을 새겨 넣겠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풀이다. 필자가 “시경풀이에서 앞뒤가 틀린 풀이를 하는 이유는 원래의 글자를 바꾸었거나 글자의 뜻을 잘못 풀이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역설한 바와 같은 현상이 광개토대왕비문 풀이에서도 나타 났다.
백잔과 신라 사이에 두 글자가 손실되여 분명치는 않으나, 신라 부터는 다른 문구로 봄이 타당 하다. 앞에서 설명한 능(而)자와 여기 나오는 이위(以爲)는 논어에 실린 “온고능지신 (溫故而知新)하면 가위사이여 (可以為師矣)라는 문구에서와 같은 용도”로 썼다 . 하여, 그 다음 문구는 “신라가 고구려의 시민이 되였다고 생각 해서 (以為) 그들을 써서 (以) 대왕 6년에는 ….”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제의 문구는 “능왜이 신묘년 래(而倭以辛卯年來)로 읽어, 연래(年來)을 “xx년 부터 계속하여”란 숙어로 풀이 하지 말고, 두 글자를 떼여 순서 대로 풀이 해야 한다. 그 전의 전쟁에서 얻어온 왜인 포로 중에 바다에서 배를 잘 다를 수 있는 제능(才能)이 있는 자들(而)이 드디어 “신묘년 (年)에 대왕의 군영에 와서 (來)” 이들을 사공으로 사용(以)하여 노를 젓는 배를 타고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발해만 동남쪽 요동 반도 끝에 이르러 백제가 가장 중요시 하던 통상로에 있는 성을 함락 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대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바닷물에 둘러 싸여서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공격 한지 20일 만에야 함락 시켰다”고 했다 .
이왜이 (而倭以)의 이(而)자는 형용사로 “편안할 능, 능숙한 능”의 뜻이고, 이(以)자를 “다스리다. 거느리다, 쓸용用,使用… 을 이용하여” 하는 뜻으로 사용한 흔적이 삼국지 한예전 (韓濊傳) 에도 보인다. 비문에는 또한 지금도 한국 말에 쓰이는 이후 또는 이래(以後, 以來) 하는 글자를 쓰기도 했다 .
한자 풀이는 이렇게 어렵다. 백석도인 이라고 많이 알려진 강기 (姜夔, 1155-1221년)는 주희 (朱熹, 1130-1200년)와 거의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은거생활을 하면서 당송팔대가 (唐宋 八大家)의 시풍을 이어 받은 시인이다.
그 가 “시설(詩說)을 쓰고 한 말”이 있다 :
“아 그렇구나! 나는 이 시문 풀이를 하여 옛 시인에게 큰 죄를지었다. 다음 사람은 또 다시 더 무거운 죄를 지을게 아닌가.”
남의 작품을 평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실토했다. 옛 글자 (古文字)로 편찬된 여러 사료를 풀이 한다는 문제는 그보다 도 더 어렵다. 글자 하나 하나는 물론이고, 몇몇 글자를 어떻게 붙여 뜻을 전했나를 판단한다는 점은 지극히 어렵다. 강기 (姜夔, 1155-1221년)는 시문풀이가 그렇게 어렵다 “시인에 죄를 지은 느낌이 든다”고 실토 했지만, 같은 남송시대의 유가를 대표하는 주희(朱熹, 1130-1200년)의 시경 풀이에 많은 의혹이 남아있다.
그는 서문에서 연(燕)자를 향연이란 뜻으로 사용 했다. 한혁(詩經 韓奕)에 세번이나 나오는 연(燕)자를 두번은 같은 ‘향연, 또는 편안히 즐기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마지막 장에 나오는 “부피한성 연사소완 (溥彼韓城, 燕師所完)하는 문구에 나오는 연(燕)자 만은 연나라 사람들이 성을 쌓았다”고 풀이 했다. 어느 시인이 같은 시문에 같은 글자를 세번이나 쓰면서 한 곳에는 다른 뜻으로 사용 했겠는가. 그 글자도 다른 연(燕)자와 같이 즐거운 마음이란 뜻으로 썼다. 필자는 그 시구를 “저 장엄한 한후의 성은, 평화로운 시절에 많은 자원 봉사단이 즐거운 마음으로 지은 곳”이라고 풀이 했다. 주희는 한후를 기록 하면서 후(侯)자를 사람인 변(亻)를 빼고 한후수명 (韓矦受命)이라 적었다. 그 글자(矦)속에는 “작위를 받은 후(矦)자에는 옛적 하우씨의 후손”이란 뜻이 있다 . 한후가 우왕의 후손이라 그를 비하한 글자라고 본다. 또 “간부정방; 榦不庭方”하는 ‘완전동사 줄기 간자에는 한(韓, 甘 , 汗) 이란 뜻이 있다. 그는 이 글자를 불완전동사’ 로 바꾸어 풀이하여, 부정방 안에 살던 한후가 부정방 밖에 있는 사람으로 풀이 했다. 시문의 원 뜻은 “부정방의 기둥인 한후”란 뜻이다.
성왕과 당숙우가 편안 하게 살았다고들 풀이 하는 “연거 (燕居)라는 글귀는 두 사람이 같은 지역, 해지 북쪽 연안에서 편안히(燕) 살았다”는 뜻이다. 그 연결 고리가 여씨춘추, 예기와 묵자한고 (墨子閒詁)에 있다 . 우왕이 개발한 구주중에 북쪽 유주(幽州)가 살기 좋은 땅(燕)이라 했다. 이를 설원에서는 시간(斯干)에 실린“원거원처; 爰居爰處”라 즉 무왕과 단공 (壇公. 公, 叔旦)이 동고 동락 했다”는 시귀를 의역하여 무왕이 아니라 성왕이 당숙우와 사이좋게 살았다 (燕居)로 기록 했다 . 이 사이 좋게 살았다 (燕居)는 문구의 연자를 후세 사람들은 편안 안 (安)자로 또는 지명으로 바꾸어 사용 했다. 사기 시황 본기에 나오는 기조선 (暨朝鮮)의 기(暨)자는 관자가 사음자로 기록한 발조선(發朝鮮)을 훈역한 글자다. 이 글자를 접속사로 풀이 하여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요하 동쪽에 까지 왔다고 한다.
단군(檀君)이라고 기록한 글자는 재터 단(壇)자를 동음이자로 바꾸어 적었다.
이렇게 글자를 중국황실사관에 맞추어 고전을 풀이 한 예를 필자가 많이 거론 했다. 중국고전에 나오는 많은 글자가 옛 한국 말의 사음자다. 옛적에 하북평원 북쪽, 특히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은 한글 어순이였다는 근거가 “신선전 유백자, 기자가 했다는 한구절, 사기 진세가와 흉노열전의 첫 문구”에 보인다. 그 곳 사람들이 작성한 위서(魏書)에서 인용 했다는 “신단수하(神壇樹下)는 한글 어순으로 천신께 제사드리려고 제단을 차려 놓고 그 앞에서” 하는 뜻이다. 이러한 뜻의 단수하(壇樹下)를 “박달나무 밑에서”라고 아직도 잘못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풀이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 보지 못했다. 삼국사기에는 낙랑(樂浪)이란 글자가 많이 보이지만 지리지형에 맞는 방향을 분간할수 없이 기록 되였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연을 분석해 보면 최리왕의 낙랑국은 요동 반도에 있었다. 최리왕의 낙랑국이 있던 요동반도를 삼국지에서는 “낙랑본통한국 (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즉 낙랑은 옛적부터 가한들이 다스리던 땅”이라 했다. 진수가 본통(本統)이라고 기록한 그 당시 사람들이 “본래부터, 전통적으로”란 뜻으로 쓰던 어휘을 최근에 어느 한국 사람이 “낙랑이 옛 부터 한국을 통치 했다”고 잘못 풀이 했다. 이는 마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등 많은 한국 고전이 “중국고전에 실린 글자와 그 문맥을 잘못 풀이”하여 “평양, 패수, 살수, 낙랑, 대방, 창해군, 맥국”하는 지명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기록에 남겨 이를 지금 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이 믿고, 중국 사람들은 이 잘못을 역이용하여 그들의 주장에 힘을 더하고 있다.
이기백(李基白)씨가 하바드대학에 가 있는 동안 미국 학자들과 같이 영문으로 한국역사책을 썼다. 그 내용은 옛적에 중국사람들이 주장하던 “한나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여 아직도 서양세계에서는 그 학설을 따르고 있다. 1980년 대 후반기에는”김용옥 최영애”부부가 원음주의 표기법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이 한국에서도 받아드려 중국여러 지역에서도 거부하는 북경식 발음”으로 중국 지명을 기록 하고 있다. 이는 “한자의 특성인 표의문자”를 무시하고 “그들의 말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글자”라면 하는 가설에 따라야 적용되는 학설이다. 중국지명은 옛 부터 한국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새로 어휘자전을 만들 때에도 똑같은 오류가 발생하지나 않을까 우려 된다.
한국에서 출판되는 여러 역사에 관한 내용을 보면, 일인/일당 독제의 역설 (Paradox, Monoloque)이다. 학술지는 사립화가 되여가고 있다는 얘기도 나돈다. 학문의 세계에는 역설이 아니라 대화 (Dialogue)가 필요 하다. 어휘자전은 대화(Dialogue)의 창문이 없다. 판권을 가진자 만이 수정할수 있는 역설(Paradox, Monoloque) 만이 허락된 독점물이다. 하여 국가가 또는 국가가 인준한 기관이 다루어야 할 사안이다.
새로 사전을 만드는 방법 보다는 “온 세계 중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인정하는 강희자전에 실린 뜻을 삼한의 후예들이 바로 인용해” 중국사람들이 망쳐놓은 동북아시아 상고사를 중국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어휘사전을 이용하여 바로 잡아 가는 길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러는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어휘는 토론의 대상이 된다. 어느누가 새로운 풀이를 하면, 학자는 새로운 의견을 깊히 살펴 찬반 의견을 보여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새로운 어휘사전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발생하여 성숙해 지고 발전하게 된다.
끝
모솔, 이 돈성 드림.
March 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