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古朝鮮),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 (阿斯達) 금미달(今彌達)
순서: 1. 어떻게 찾았나? 2. 단군(壇君)조선 개국 설화. 3. 사료의 신빙성:
왜 못찾았나?
찾는 방법이 틀려 못찾고 포기. 상식적 판단이 찾는 방법의기초.
기록(SMa-In, Out) 찾고 찾고 또 찾아-연구硏究. 절차적 삼단논법.
어부, 사냥꾼, 강력범 수사 등등. 모두 상식적 판단에서 시작.
역사학은 모든 이문 사회 과학의 모체다. 학문은 연구를 해야 진전.
그림글자로 기록된 동북아 상고사: A New Band of Forensic Science
첫 영문본: College of William Mary vs Johns Hopkins University
Lee Mosol’s Book Collection: Type in “Work. MEDIA”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book/. Mosol Lee Facebook.
“We Need Another Voice; Taoism to Zen Buddhism” to many places
문헌 기록: 고려시대 삼국유사 와 제왕운기 (帝王韻紀)에 단군에 관해 언급.
삼국사기 에는 “평양이 선인 왕검이 살던곳”이라. 그후 억불 정책(抑佛政策) 의 이조시대 편술된 고려사등 많은 사료에 단군(壇君)조선 발생지를 한반도로
가야금: 삼국사기 加耶國嘉悉王. 東國輿地勝覽: 柳郁國 嘉悉王樂師于勒.
Brief Overview through the panoramic View. Google Map
아사달:우리 양곡(堯命羲仲 宅嵎夷,曰暘谷). 共工씨. 분수 -강수 연안 臨汾
융우戎禹가 신임을 잃어 동이수령 백익이 단군왕검으로 추대 받아 산서성 운성시에 수도를 정하고 조선(朝鮮)이라 했다.
금미달 (今彌達) 에서 아사달 (阿斯達)에 돌아와 산신(山神, 神仙, 僊人) 이 되었다는 단군을 안문왕, 미륵, 보살, 유하혜라 한 가실왕 이다. 아사달 (達) 이라고 부르던 산서성 사람들과 같은 예맥 족(斯)이 한반도에 살았다. 대구(大邱)를 달구( 達丘 벌, 들판, prairie) 대전을 한밭 이라 했다.
배구가 아뢰기를 고죽국은 본래 고구려 땅이라 한 곳은,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 하고 요서 (遼西) 방홀산 (弓忽山: 弓裔)이 있는 유수 (渝水)계곡에 요새 임유관(臨渝關)을 만들었다. 임유관(臨渝關)전쟁 원인을 설명 한 내용이다.[1]
오늘의 오대산 서쪽 호타하 계곡 대현 (代县)이 금미달(今彌達) 영역이었다
단군을 대신하는 세 지도자 “三監, 삼한”가 나타난 곳이라, 쌍건하 (桑乾河), 호타하(滹沱河), 치수(治水), 성수(聖水)라고도 불렀다. 이를 음이 비슷한 글자 로 바꾸어 유수 요수(遼水 堯水 渝水 濡水) 라 했다. 임유관 서남쪽 숭산 계곡 에 갈석이란 뜻이 있었다. 맹자에 실린 공공 환두 삼묘를 귀양 보냈던 곳이다.
여씨 춘추에 옛 구주 이름을 확장 하여 설명 했다. [2] 제환공이 고죽국을 치러 갔다 도망올때 요수를 건넜다. 요수에서 건저낸 목관에서 고국군의 동생이 나왔다. 발해만 천진(天津)을 지나는 해하 (海河)의 상류다. 타沱자의 어근이 되는 뱀사 (它 snake, 다를 타)에서 독사란 뜻으로 풀이하는 수유(須臾; Serpent. A noxious snake. 毒蛇) 라고 하는 명사가 나타난 곳이다. [3] 춘추삼전, 국어에는 보이지 않는 사룡 (蛇龍居之)이 맹자에 실렸다.
전국시대에 원불교가 금미달(今彌達)에 전래: 미륵(彌勒菩薩)-안문(鴈門)관-안왕(鴈王). 雄率徒 -불교에서 도솔천(兜率天) 이란 문구가 나타났다.
해하 수계
3.사료의 신빙성:
일차 사료를 찾아라! 일연 스님은 중국에 다녀 왔다는 기록이 없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도서 기증. (맹자가 만 난)위 양혜왕 (梁惠王의 묘: 魏襄王墓. 매장자 이름이 혼잡) 가 급총에서 (汲冢竹簡)이 발굴 되었다. 그 내용에 우왕의 아들 개가 백익은 죽였다 (益乾啟位,啟殺之)는 기록이 있다. 孟子 에는 금미달 역사가 있다 !!.
魏惠王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魏惠王:400年~前319年 맹자:372-289
단군조선의 첫 왕검 백익(伯益)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임유관 전쟁: 최치원이 남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 말기에 수문제가 중원을 통일 했다. 수나라 세력을 막으려고 중원의 북쪽 요새를 고구려가 선제 공격 했다. 아사달이 있던 지역에서 나타난 고죽군 (孤竹)이란 글자를 북쪽 대군 고유(代郡高柳)로 옮겼다. 그곳에서 까마가 발가락 셋이 달린 새끼 (烏子生三足烏)를 낳았다, 그곳에서 내려와 패국 (集沛國)에 정착 했다. [4] 삼족오의 발상지인 고유에 살다 산동성 패수(沛水; 涕泗水) 연안으로 내려 왔다.
단군을 대신한 세 지도자가 나타났던 곳이라 대현(代縣) 그 지역을 지나는 여울을 호타하 (滹沱河), 치수(治水,) 성수(聖水)하는 여러 이름을 붙였다. 청출어람의 출원지다. 그 곳에서 석 혜미 (沙門 釋惠彌者)가 남쪽으로 내려와 유하혜(柳下惠)라 했다. 그가 미륵으로 기록된 가실왕 이다.[5]
유하혜(柳下惠)가 죽어 그의 부인이 조사를 바쳤다. 그 내용에 호는 마땅히 해야할 혜(諡宜為惠)라 했다. 은혜 혜(惠)자는 해(解,奚,sun)의 다른 사음자인듯 하다. 위나라가 중산국 영역에 장성을 설치 하던 시절 (魏築城), 즉 조 무령왕(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집권 시기에 그곳을 떠나 산동 반도 노(魯)나라 영역에서 살아 있었다. [6]
공도자(公都子)가 금미달 영역 영구(靈丘. 大同市. 靈壽) 에 임명 되었다.
맹자가 그의 질문에 답한 내용에 연대 미상의 고려 가요 사룡(蛇龍)과 일맥 상통한 사회질서 파괴 내용이 있다.[7] 요순시대의 대 홍수에 비유 했다.
전국시대에 해당하는 금미달에 관한 사료는 여러 사람들이 혼미하게 기록.
시대와 장소가 분명: 찾고 찾고 또 찾아. 칼갈듯이 연구硏究 해야 한다. 사냥
My website: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마지막 단군이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예맥족이 사는 땅意在斯焉.意在斯
史記: 太史公曰:「先人有言:意在斯乎!意在斯乎!小子何敢讓焉。」 어순
論語 泰伯:唐虞之際,於斯(斯, 離也)為盛. 당우지제 (唐虞之際), 도당씨에서 우순 임금 시절에는 천할 사/시, 노예 예맥( 斯, 隷. 隷書) 예맥(濊 /濊·穢·薉貊) 사람들이 중원에 넓리 퍼저 살았다. (山西隷省: 隷省. 진晉 㬜明出地上) : “朝鮮” 과 같은 뜻. 帝舜:숙신(肅愼/息慎氏來朝貢弓矢 ). 玄都氏來朝貢寶玉.
중국 고전에는 한국말 어음과 어순(Korean syntax)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小子何敢讓焉. 소자가 어찌何 감히敢 사양 讓하겠습니까? 讓 사양할 양. 趙襄子 ? ~ 기원전 425년). 양을 떠난(儴佉) 거로(성인 佉盧)이 창힐 이전에 글자를 만들고 불교의 수호병-(4天王)이 되었다. [8]
도울 양 襄자설명: 廣韻 에 除也 제거 [除去],上웃상也,임금의 수레 가 駕也
1.晉世家 첫장 첫줄. 2. 기자 (箕子)가 말한. 2. 고려언어 (注易, 往往有高麗言). 3. 열선전 유백자 (列仙傳 幼伯子) 의 첫 구절이다: 蘇: 되살아날 소
Yellow River Valley Civilization
Xiechi Lake ( 解池), 산서성 운성山西省 运城시에 평양 (平壤).
홍익 인간(弘益人間)과 홍범구주 (洪範九疇) 이윤유서(彝倫攸敘):
사마천의 고향이 고조선의 발생지다. 아버지 태사공의 유언(意在斯乎)에 따라 온갖 고난을 격으면서 사기를 마쳤다. 사마천은 홍법구주 이윤유서란 글자를 바꾸었다. 홍범 (洪範)을 “鴻範”, 구주(九疇)를 구등 (九等), 이윤 (彝倫) 을 상윤(常倫), 유서 (攸敘) 를 소서(所序) 이라 했다. 치우天王의 후손으로 고유문자를 지키고 있다는 이족(彝夷族)이 강남 지나 (至那)영역에 살고 있다.
맹자가 이르기를 詩가 망한 후에 역사서 춘추가 나타났다고 했다. 시경 국풍 (國風)은 향가를 뜻한다. 모시정의에 “《周南》《召南》 “ 을 재외한 국풍은 변풍( 變風)이라 했다. 변한(弁/卞/示韓) 사람들의 풍속을 읊은 시란 뜻이다.
시경, 상서, 산해경, 관자 논어등 많은 고전에서 예맥족이 중원을 석권 했었다는 뜻이다. 상나라 시절 북쪽(고조선)에서 천독 (天毒 천 또깨비)이 내려와서 괴롭 혔다. 산해경에 실린 조선은 아사달- 금미달 두 시대의 朝鮮 을 그렸다. 오월춘추에 우의 아버지 와 백익이 산해경 초본을 만들었다. [9]
헌원(黃帝軒轅)이란 밝음의 기원, 환인(桓因)과 같은 뜻이다. 길게 발음
여러 차례 싸웠다. 마지막이 탁록전이다. 황제는 2000년을 살았다는 꼴:
史記 五帝本紀: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三戰然後得其志。蚩尤作亂, 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涿鹿之野. 涿鹿之野 를 점점 북쪽으로 밀어 금미달 지역에서 치우를 죽였다고 한다.
연나라 장수 진개 (秦开.秦開, ?~?) 란 유령 인물이다. 산간지 邢丘. 형(邢; 开:阝)자는 열을 개(开, 開)와 마을(邑, 陵阜)이란 상형자를 겹해서 만든 글자로, 새로 생긴 마을(frontier town)이란 뜻이다. 평평 할 견(幵)자를 幵->开 로 바꾸었다. [10] 고조선 땅 미지(彌地)을 빼앗고 장성을 쌓았다.
육서 육법언(陸法言) 또한 가상 인물이다. 북쪽 사람들이 글자 만들어 사용.
구주(九州, 九疇,九等)의 범위: 순방천리( 純方千里)라 했다. 지리지형을 보면 답이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하동염지는 [기리가 51리,폭이 7리, 둘래가 106리.解池: 河東鹽池. 袤五十一里,廣七里,周百十六里]라고 했다.
한원지전 韓原之戰: 秦晉兩國的軍隊在韓原(陝西韓城)交戰,晉軍兵敗。
涿郡涿县(今河北涿州)
유신(維新)정책
경전에 유신 두 다른 시대에: 수나라는 실패 하여 생가할 유“惟新”
尚書 夏書 胤征: 殲厥渠魁,脅從罔治,舊染污俗,咸與維新。嗚呼!
詩經 文王之什 文王: 文王在上、於昭于天。周雖舊邦、其命維新。
有周不顯、帝命不時。文王陟降、在帝左右. 竹書紀年 成王: 十二年 王帥、燕師城韓。王錫韓侯(斯干《玉篇》幹,體也)命
성강지 치:서주 창업자가 원주민을 학살하고 개혁한 정책을 후대로 밀어 성강지치: 무왕은 백익의 후손-숙진(肅慎)씨을 위해. 백어(白魚),필공이 양때 같이 이끌고 참전한 장면을 그린 “麾之以肱、畢來既升”란 시귀가 무양 (祈父之什 無羊)편에 실렸다. 백어(白魚) 필공이 당숙우(唐叔虞); “백이 숙제 사형제 중 막네 다. 魏之先,畢公高之後也。Beam of Light from sky high,해 解.
장자 (莊子)에 백이 숙제는 굶어 죽고 막둥이(季氏)가 새장의 새 처럼 (富於展禽) 부를 누렸다. 현명(明夷) 하여 해지연안 명조(鳴條) 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 흉노 땅으로 올라가 선우로 살았다는 사람이 중仲형이다.
서주 발생지 가까이 [해지(解池) 가까이 영제시永济市?] 에 있던 백이 숙제 사당을 북 쪽으로 갔던 仲형 明夷의 후손 영역 금미달에 심었다.
해지(解池)일대에 남아 있던 고조선 사람들(曹風 蜉蝣)의 지도자季氏 斯干. 중원에 남아 있던 예맥족(斯)이 운남성을 지나 서승西升 하여 천축국에 갔다.
금미달(今彌達): 지금 큰 활을 지닌 너가 다스리던 땅 이란 뜻이다. 그가 살던 곳을 궁홀산 (弓忽山, 方(房)忽山 , 中山國)이라 했다.
시대: 숫자를 계산 해 보면 지금이란 형용사는 맹자가 만났던 양혜왕 (孟子見梁惠王: 400-319 BC)시대다. 서진 말기 279년에 급군(汲郡) 있던 그의 무덤이 도굴 당했다. 금미달(今彌達)을 떠난 마지막 단군은 양혜왕 이전 위나라가 몰락해 가던 지도자를 가실(가시려는)왕이라 부른듯 하다. [11]
장소와 영역: 산서성 동북쪽 청량산이 있는 오대산 국립 공원 서쪽이다. 발해만으로 흐르는 영정하(永定河) 즉 해하 수계 상류다. 수경주에는 가야국 (加耶國)이 있던 곳을 가(加)랑현 (良鄉)이라 했다. 그 곳에 신라 혜초 스님이 입적(入寂) 했다. 원시 불교가 처음 자리잡은 곳이다.
마지막 단군.
필자가 여러 기록을 근거로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고 추론한, 화성 유하혜의 생몰]이 다르게 기록 되었다. 산서성을 노예의 땅 (隸省) 이라 했다. 조선이란 뜻이 있는 진(晋:㬜)이 셋으로 갈라졌다.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은 삼가분진 (三家分晋)의 초기, 또는 산서성 지역이 점령 당하던 전국시대 말기에 나타 나야 한다. 바이두(Baidu)에는 유하혜 (柳下惠; 前720—前621)라 했다. 논어 위영공(衛靈公: 前540年—前493年) 편에 유하혜가 현인임을 알고 있었다(知柳下惠之賢) 는 기록이 실렸다. 포박자(抱朴子)에는 기원전 481년 (魯哀公十四年)에 산동성 대야택 (大野澤) 서쪽에서 기린(麒麟)이 잡혀 죽었다.[12] 그 일대에 유하혜 (柳下惠) 화성(和聖)묘가 있다. 공자(孔子: 기원전551년 ~기원전 479년)와 같은 시절에 [금미달의 지도자란 뜻이 있는] 미자하(彌子瑕)가 살았다. 유하혜 (柳下惠)를 미자하(彌子瑕)라 했다.
진양(晋陽)이라고 부르던 산서성 태원 (太原)을 떠난 사람이란 뜻이 양거(儴佉)다. 화성(和聖) 유하혜 (柳下惠)가 산동성 사수현 (泗水縣 史勿縣) 으로 내려와 가랑(任那加良, 加耶)의 가실왕 (嘉悉王)이다. 그가 마지막 단군이다. 진양(晋陽)을 평양(平陽) 이라 했다. 중원 세력은 이렇게 글자를 바꾸었다. 영토에 이해관계가 작용 되지 않은 불가기록에 실린 안왕(雁王) 미륵(彌勒)불이라 한 명사가 더 신빙성이 있다.
미 (彌) 자가 붙은 여러 이름이 발해만에 나타났다. 그곳에 예맥군 남려 (穢貊君南閭)가 인솔하고 온 창해군(滄海郡)이 생겼었다.
三國史記: 弓裔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弓裔自北原入何瑟거문고羅. 弓裔取浿西道.
박혁거세와 궁예(弓裔)는 궁홀산(弓忽山) 사람의 후손이란 뜻이다. 신라 영역에서 예왕인(濊王印)이 나타났다. 금미달 영역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천진항 일대로 나와 바다로 흐터저 나갔다. 이를 조선이 정벌 되어 일부는 북쪽 호의 땅(胡之域)으로 가고 일부는 바다에 있다 (朝鮮在海中)고 기록 했다.[13] 한해 동서 해안을 따라 멀리 갔다는 뜻이다. 그들이 나라를 새워 신미제국 (新彌諸國)이 남중국 해안을 따라 천여리에 흐터저 나타 났고, 그 지역에서 왕오왕 (倭五王) 이 다스렸다는 신라 임나가라 (新羅任那加羅)와 같은 글자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
동쪽 해안 상황은 삼국지 왜인전: 남만주 사람들 예기를 통역을 통해 듣고 왜에 관해 위대 하다는 뜻과 왜소 하다는 석갈린 기록을 남겼다. 한반도에 관한 기록은 몇자 없고, 천진항을 떠나 남만주 해안 (歷韓國)을 돌아 대동강 하구 (狗邪韓國)를 지나 총 7000리를 가서 큰 바다를 건넌 다음 부터 자새 하게 기록 했다. 그들의 항로 또한 뱃길로 일년, 만 이천리라는 등 혼미 하게 기록 했다. [14] 한반도 남단에 정착 했던 사람들이 찾은 해안 지역을 기술 했다.
서쪽 해안 기록은 진수의 삼국지에 처음 대만 (臺灣, 台灣) 섬을 설명 했다. 발해만 양평성에 있던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을 토벌 하려고 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교류 하던 시절이 었다.[15] 강동사람 육손 (陸遜; 183년 ~ 245년)에 명하여 복건성 해변에 사는 사람들을 동원 하여 대만 (夷洲及 亶洲/臺灣)과 해남도 (朱崖/海南島 ) 정벌을 계획 했다. 육손(陸遜)이 바다는 끝을 알수 없다고 우려 했다. 결국 멀리 갔던 배는 돌아 오지 못하고 (夷洲) 에 갔던 사람은 돌아와 아뢰기를 대만 사람들의 선조는 불사약을 구하려고 봉래산에 갔던 사람들의 후손이라 했다.
수나라가 마지막으로 남쪽에 있던 진나라를 정벌 하던 시절 (平陳之歲)에 수나라 전함이 담모라국(𨈭牟羅國)에 표류 하여 백제를 통해 보냈다. 섬의 크기는 남북이 천리 동서 수백리 사슴이 많이 산다. 백제 부용국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이라 했다, 대만섬이 분명 하다. [16] 이 담모라란 글자를 후세 사람들이 다른 글자를 바꾸어 제주도라 했다. 대만해협 (臺灣) 양안의 번(蕃, 番)은 남북조 시대 부터 거래가 있었다. 수나라때 만든 대만섬 설명서 동번기는 사라지고 1603년 복건성 사람이 편술한 동번기가 있다. 옛기록을 참조한 증거가 보인다.[17] 변한 후손의 어느 지도자란 뜻의 번우 (番禺)가 왜왕(倭王)이 였다고 본다.
원시 불교가 전국시대에
원시 불교가 전국시대에 금미달 지역(燕都)에 들어 왔다. 금미달에 살던 단군을 (鴈王, 彌勒佛) 이라 했다. 太平廣記 天毒國道人: 燕昭王(311-279) 七年, 沐骨之國來朝, 則申毒國之一名也。 有道術人名尸羅。 問其年, 云。 百四十歲。 發其國五年,乃至燕都 그곳에서 신라의 초기 이름 시라 (尸羅 斯羅)가 나타났다. 연소왕 시절에는 궁홀산에 살던 마지막 단군이 떠나고 없었다. 그 곳에서 들은 예기를 근거로 굴래를 찬 지도자란 뜻에 미륵(彌勒)이란 별명을 만들어 붙었다. 두루미(彌)를 기러기(鴈 雁)로 바꾸어 궁홀산 (弓忽山)에 안문관을 지었다. 오늘의 산서성(山西省) 대현 (代 县) 안문산雁 门 山) 중 요새에 살던 지도자를 [안왕(雁王) 또는 아왕 (鵝王: 舒鴈 鵝) 즉; 내가 삼족오 (三足烏)를 숭상 하는 금미달 지역 사람들의 왕이란 뜻]이 있다.
Origin of Tibetan Buddhism-미륵신앙의 유래.
예맥(濊貊 斯)족의 원로들이 인도 동북부에 이르러 원시 고조선 신앙에 바탕을 둔 원시 도교 이념을 전했다. 두 지역 지식인 들이 학술적 토론 (discourse) 을 통해 오늘의 불교와 도교가 나타났다. 안문산 (雁門山), 즉 궁홀산 (弓忽山) 요새에 살던 지도자(雁王, 鵝王)가 권력을 잃었던 사람을 불가에서는 미륵(彌勒-蘇彌樓.須彌樓 )라 한다. 이 때 풀이가 오묘한 수유 (須臾)란 글자가 타났다.
시경을 비롯한 여러 문헌(經典文獻)에는 [이 사,떠날 시, 천할 시 斯 ] 라고 읽는 글자가 많다. 예맥족을 뜻한“彌 斯”자다. 시경(斯經)-詩經, 절(寺)에서 유래한 말씀이란 뜻이다.
후한서에는 시경(斯經), 시문(斯文) 과 시도(斯道) 가 있다. 맹자는 시도 (斯道) 를 예맥도(濊道)라 했다. 공자가 읽었던 금인명은 시문(斯文)이었다. 그가 만났던 노자가 서쪽에 가서 호(胡)를 가르쳤다. [18] 그 또한 시문(斯文)을 이해 했다고 본다. 대당 서역기에 예맥족을 뜻한“彌 斯”자가 많이 보인다. [19]
불교 서적: 天毒 印度 천부인(印)이 도착. 천축국 (天竺國一名身毒)
대당서역기에 “汝子我之族也。斯人者我之族也 ” 란문구가 있다. 지존,즉 석가모니가 예맥(斯: 濊貊; 夫餘國名)족의 후손 이란 뜻이다. [20]
사기에 실린 “身毒國”을 후한서에 “天竺國”이라 기록 하듯, 불가에서는 가야 (加耶, ought to go, 去)란 어음을 가차 전주 하여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가람(伽藍) 이란 람전(藍田), 즉 청구(靑丘)에 있던 가야국 (加耶國)을 떠난 사람이 산신 (伽藍 神名)이 되었다”는 단군설화를 가차 전주한 글자다.
대루탄경(大樓炭經): 큰 건물이 불에 타버린 내력을 기록 했다는 뜻이다.
맹자 이루(離婁上. 離婁下)편은 궁궐을 떠나 남 북으로 갔다는 뜻이다.
세기경 (世記經): 환인(桓因)이, 즉 빛의 종주권을 놓고 “帝釋”과 다투었다.
원시불교와 신라 가야 관계:
시라(斯羅, 尸valor羅) 란 글자에는 예맥족(斯) 동북아 전역에 그물 같이 퍼져(羅) 있었다. 불교 포교과정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Cast system vs 골품제.
三國志 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 반대 방향.
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
Sinja village (신앙촌) in Nepal was added to the UNESCO World Heritage
大唐西域記 : 渡大河至迦摩縷波國東印度境。斯則王化所由國風尚學。Veda period. 시경 Poem. 今印度諸國多有歌頌。摩訶至那國秦王破陣樂者。 豈大德之鄉國耶。 曰然。此歌者美我: 無為之教彌新, 斯則釋迦法中。 最初窣堵波也。釋迦如來- 동방성인 아기예수 탄생. 無為.無憂王Maurya Empire.
고대 한국어가 범어 [梵語]에 남아 있다. We Need Another Voice — Taoism to Zen Buddhism. Origin of Tibetan Buddhism-미륵신앙의 유래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印度支那 운남성 귀주 일대로 퍼져 나갔다. 미륵彌勒, 伽羅, 伽藍이 나타났다. 미륵을 성은 자씨 (慈氏) 이름은 아일다 (名阿逸多), 무능하여 이길수 없다는 뜻(譯曰無能勝)이라 했다. 예맥족(斯)의 지도자란 뜻을 자석(magnet) 에 비유한 표현이다. 是梅呾麗耶는 고조선 사람들 이 ”매달려”, 즉 유능한 지도자 였다는 뜻, 阿逸多:수도를 잃었다는 뜻이다.
Ceylon 사자국(獅子國, 師子國), 스리랑카 Sri Lanka 라 한다. 삼랑(三郞)이란 뜻이 있다. 삼한 사람들이 불교국가 Ceylon에 갔던 사실을 명나라 정화 (鄭和, 1371년 ~ 1434년)가 그 섬을 정복 했다고 실려 있다. 분명하다. 당 나라 현장이 남긴 “大唐西域記”에 후세에 어느 누가 접붙였다. [21]
삼한 사람들이 불교국가 Ceylon에 갔다. 뱃길로 동남아를 돌아 대만섬을 지나 한반도에 들여온 히로애락을 읊은 가요가 아리랑이다.
민요 아리랑에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 에 실린 스리랑은 삼랑 (三郞)을 뜻한다. 사자(師子,獅子) 우(禹)의 후손 사자 (嗣子), 소 우(牛)를 숭상 하는 전통. 힌두 힌머리 (노인, Elders) Himalaya, Indus River, Ganges River 降水.
천축국(불교 발생지)와 운남성은 교류가 활발 했다. 원나라가 정벌하자 매콩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와, 미지(彌地)를 떠나 뱃길로 남중국해안에 온(新彌諸國) 사람들과 만나 태국(泰國) 미안마등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었다. 화랑 (花郞), 패르샤 왕자 -쿠시나매와 허왕옥( 許氏)가 나타났다.
삼국유사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신라 진골 선덕여왕이 석가모니의 이모(姨母)어 즉Pali (婆尼唐言辯了)어를 쓰는 동남아 불교국가 (真臘 zhēn là/신라. 林邑)의 왕족(剎利耶伽)과 같은 혈통이라 치수사업을 하던 공공족 (東夷共工之族)의 후손과는 다르다]고 신라 진골의 유래를 밝혔다.[22] 하루방 같은 동상, Hwarang Statue가 태국에 있다.
太平廣記 에는 “金可記,新羅人也”라 출처를 “續仙傳”이라 했다. 흥부-놀부의 원전이라 한다. 지나라고 하는 남쪽에는오랫동안 신라가 있었다.
云南省: 今百濟王夫餘氏: 송나라가 “廣韻”을 만들던 시절 중원에 있었다. [23]
동양 특유의 춘추필법과 훈고학: 훈고학(訓詁學)은 한나라(BC 206 ~ AD 220) 시대부터 당나라(618-907) 시대까지 성행한 유학으로 진나라 때에 훼손, 상실된 경전을 정리하고 자구 해석을 하면서 성립된 학문이라 한다.
고전기록 위조 증거
영토확장
後漢書: 逵所著經傳義詁及論難百餘萬言,又作詩、頌、誄、書、連珠、 酒令凡九篇,學者宗之,後世稱為通儒, 世主以此論學,悲矣哉. 가규賈逵 (賈逵174年—228年)與班固、賈逵共述漢史,傅毅等皆宗事之。부의(傅毅 ?. —90年)
한혁:奕奕梁山、維禹甸之、有倬其道。韓侯受命、王親命之、纘戎祖考. 공자가 옛저 부터 전해오던 4000여수를 줄여 300여 수를 모아 시경. 그후대 사람들이 인용 한 여러 시구(詩句)가 현존하는 시경에는 없다. 《孔安國·尚書序》九州之志,謂之九丘.言九州所有,皆聚此書也。又崇丘,亡詩篇名。孟子 萬章上:舜流共工于幽州,放驩兜于崇山,殺三苗于三危
**중국정사에 실린 냉용만으로는 고조선 아사달, 금미달을 찾을수 없다.
징검다리 몇개를 연결-찾고 찾고 또 찾고- 절차적 삼단론법 연구硏究:
張華 : 미지수천리 (彌地數千里) -新彌諸國依山帶海. 彌鄒忽- 倭, 卑彌呼 . 倭王
소진 (蘇秦, ? ~ 기원전 317년?)이 활거 하던 전국시대 말기에 미가 다스리던 고조선 지역(彌地)이 조(趙) 연(燕)에 병합 되었다가 다시 기원전 223년에 진(秦) 나라에 점령 되었다. 고조선 세력을 막으려고 동북 쪽에 있던 연나라가 쌓은 장성이 양평(襄平)에 이르렀다. 이를 2000리 라고 했다. 진수는 남북 3000리로 요하를 건너 요양을 양평 (襄平,今朝鮮) 이라 했다.
사마천은 방대 했던 고조선 영역을 둘로 나누어 서쪽 세력은 흉노 (匈奴, 胡) 라 하고 동쪽 세력은 동호(東胡)라 했다. 동호왕을 조선왕 이라고 했다.
미지수천리 (彌地數千里)는 연나라 서쪽 끝 “燕東有朝鮮” 이었다. 임유관 서남쪽 숭산 계곡에 있던 갈석을 해안으로 옮겼다. 조조의 觀滄海에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彌, 斯, 韓, 伯濟” 등등 여러 부족국가 이름이 발해만 연안에 실렸다. 그들이 뱃길로 흐터져 나갔다.
진-한 혼란기 고조선의 동남방 한계: 秦既并天下,東絕沛水,並滅朝鮮 《說文》曰:受沛水東入淮又涕泗也 이 4 강은 모두 산동성에 있다.
진시황이 통일한 영역은 산동성 대야택 남부. 반도 북부를 포함하지 못했다.
유방이 늪 패자 패(沛水)현 태수. 패수를 음이 같은 조개 패수(浿水)로 바꾸어 국경이라 했다. 두 이름자 설명을 보면 앞뒤가 않맞는 풀이를 했다. 글자를 바꾸어 고조선의 영역을 산동성에서 천진항 북쪽으로 밀어 버렸다. 필자는 산해관을 지나는 대석하(大石河)가 패수(浿水)하라고 논증 했다. [24]
광개토대왕 비문
비문에 실린 “新羅 任那加羅”가 “어찌하여 발해만, 중국해안, 한반도 세 지역에 나타났나?”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
임나와 고구려 백제는 훈역 이요, 부여와 신라 가라는 가차전주 한 글자다.
대왕의 가계를 보면 서쪽에 있던 부여 대륙 백제세력에 밀려 환도성에서 태어 났다. 그는 조부를 살해한 서쪽 세력과의 투쟁이 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내려올 이유도 근거도 없다. 왜倭 정벌하려고 한반도를 지나 일본 구주(九州)에 갔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사망 원인: 부여에서 보낸 자객을 만나 같이 죽었다: 永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岡黃.東夫餘舊是鄒牟 王屬民 中叛不貢. 王太子解明在古都,有力而好勇。黃龍國王聞之
북위 말엽 산동성 임치(山東省淄博市臨淄) 태생의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 춘추 (十六國春秋)에 실린 백제는 그 영역이 중원이였다는 사실을 그렸다 . 그 시절에 고구려가 서쪽에 있던, 연(燕)나라 위(魏)나라와 자주 전쟁을 했던 사실이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실려 있다 . 그러나 남쪽으로 깊히 전진했던 광개토대왕은 실지 않았다. 대왕 비문에 실린 “任那加羅”가 강수 (强首)의 고향 임나가랑(任那加良)이다. 그곳에 있던 가야가 신라와 화친 했다.
빌가 멀하 왜왕 (假倭王) 비미호 (卑彌呼) 후손이 다스렸다. 이를 남조 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를 비미호 (卑彌呼)의 후손 왜왕이 다스렸다. 삼국지에 실린 “假作遐. 假倭王” 먼 하늘 나라로 부터 온 천손이란 뜻이다. 미자하 (彌子瑕)의 하자와 같은 뜻이다. 동남아 지나(支那)해안에 거주 했던 모한 “慕韓” 을 “馬韓”으로 바꾸어 었다. [25]
아리랑과 미륵 (彌勒) 신앙:
불학 대전(佛學大辭典)에 미륵 (彌勒)의 출생지를 남 천축국(Ceylon: 彌勒為名。 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 南天竺際大海)이라 했다. Ceylon, Sri Lanka,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 하는 나라의 어음에는 삼랑(𣬛郞) 이란 뜻이 있다.
금미달에서 발해만으로 내려와 동남아로 내려가, 스리랑카로 부터 해안을 따라 [토속신앙이 불교에 가미된 미륵 (彌勒) 신앙]을 한반도에 전하던 시절에 아리랑이 나타났다.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강남지역에는 객가(客家)가 많았다.
삼한의 후손들이 동남아 해안을 돌아 뱃길로 한반도에 이르렀다. 아리랑과 미륵 (彌勒) 신앙은 한반도, 특히 신라 가야가 있던 한반도 남쪽에서 나타났다.
백제 사신 양호가 원세조 (忽必烈 可汗,재위 : 1260년 ~ 1294년)를 조알 했다. 운남성 곤명호 일대에 신라 와 가라의 농경지/사냥터 (其地曰羅伽甸/자치구)도 그 곳에 있었다.[26] 대당서역기에 자씨성이 訛 xx 화(change) 되어 미륵불이 되었다는 예기록이 있다.
大唐西域記: 是梅呾麗耶唐言慈即姓也。舊曰彌勒訛略也菩薩受成佛記處=鵝王
원사(元史)에는 당나라 때 통치 못했던 지나 영역을 정벌 하고 [동쪽 끝은 고려(高麗) 서쪽으로는 곤명 (昆明, 滇池) 남쪽으로는 주애(朱崖)에 이르는 옛적에 미치지 못했던 지역]이라 했다. 고려(高麗)가 있었다는 곳은 옛적에 고구려 유민들을 이주 시켰던 지역이다.
**통전에 관구검에 쫓겨 요동반도에 갔던 고구려가 돌아가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 신라 었다는 기록은 위조. 만주에 있던 고구려 평양성을 신라가 먼저 입성하여 고구려는 함락. 고구려 유민은 지나라고 하던 운남성 귀주성 으로 이주 시키고 만주에 주둔 했던 신라 사람들이 남아 신라 사람 함보가 금나라 시조로 나타났다. [27]
남중국 (支那) 에는 신라만 (新羅灣), 신라 시조 성씨를 김가 (金哥), 방이 (旁㐌) 라 했다. 태평광기 (太平廣記)에는 방이(旁㐌) 를 시조로 하는 김씨 (金哥)의 신라(新羅) 가 풍랑 에 시달리고 해객이 신라 (海客往新羅)에 자주 들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모두 중원에 있던 신라 (新羅)에 관한 기록이다.
큰 님 이란 뜻 아리랑이 비문에 실린 부여 아(yān)리대수(夫餘奄利大水)다. 탐모라국 (𨈭牟羅國)으로 기록된 대만섬에는 가라호 (加羅湖)가라산 (加羅山) 이 있고, 아리랑의 어근이 되는 아리산(阿里山)이 있다.
고향을 떠난 가야국 가실왕의 후손들이 해안을 따라 동남아를 거쳐 Ceylon에 도착 했다. 그를 대상주 (大商主僧伽者。其子字僧伽羅), 그들이 살던 곳을 가라, 남천축국 라 했다. 동천천국에 허황옥(許黃玉) 의 고향 아유타국(阿踰陁國) 있었다. 가야국 사람들이 한해 (瀚海)를 건너 진해에 정착 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 ? ~ 475년 )이 남해상로를 통해 보냈던 사신이 479년 경 양나라를 다녀 왔다. 남조 역사서에 실렸던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일부가 북제(北齊, 550년 ~ 577년)와 남쪽 진(陳, 557-584)나라가 망하던 남북조시대 말기에도 대만섬에는 물론 남중국(支那) 에 계속 남아 해상왕 장보고가 활동 하던 마을 (village, colony)이 되었다.
[가야국 (加耶國)의 후손들이 뱃길로 Ceylon (師子國. 無憂國)에 도착 했다. 무역상 승가라(僧伽羅)에서 오늘의” Sinhala”란 명사가 나타났다. Singapore란 승가(僧伽)의 포구(浦口)를 사음한 이름자라 본다
大唐西域記 卷第十一 :時贍部洲有大商主僧伽者。其子字僧伽羅。父既年老代知家務。與五百商人入海採寶。風波飄蕩遇至寶洲.
僧伽羅國。古之師子國。又曰無憂國。即南印度。其地多奇寶。又名曰寶渚。昔釋迦牟尼佛化身名僧伽羅.
February 18, 2024]
[僧伽羅國 설명에 [彌歷歲時] 란문구가 있다. 彌가 수모를 당하고 떠나던 (離)시절(歷)이란 뜻으로, 중원에서 개발한 달력 이전이란 뜻이다.
작가 미상의 가시리 출원지는 금미달
신라 가야 모두 발해만에서 내려 왔다. 남쪽 기록에 [돌아 왔다는 기록이 있다. 북쪽 기록 에는 갔다는 기록이 있어야 합당하다. 아사달에 돌아 간 환은(還隱) 이란 글자가 태평어람 이승(異僧)에는 “須臾還隱” 이라고 실렸다.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을 중국기록에는 “수유 (須臾), 화자(和者), 화성(和聖), 성지화자 (聖之和者), 유하혜 (柳下惠 해) 라고 했고, 불가에서는 안왕(鴈王 鵝王) 미륵불(彌勒佛)로 기록 했다. 그의 이름과 생몰 연대가 가치관이 다른 학파에 따라 혼잡하게 그려 졌다.
사기 악서에 실린 수유이악(須臾離樂), 수유이예 (須臾離禮) 란 문구에는 수유가 높은 사람이란 뜻이 있다. [28] 그를 화성(和聖)이라 했다. 그가 화씨벽 (和氏璧), 수극지벽 (垂棘之璧), 옥새 (玉璽)의 첫 소유자 였다.
이자겸(李資謙)을 조선국공(朝鮮國公) – 귀양 간 곳을 영광(靈光), 고려 초기에는 고죽국이라 했던 금미달 지역을 옛 조선의 영토라고 인식 했다. 고려는 왕건이 남만주에서 개국했다. 서긍은 고려의 발생지가 남만주라 했다.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가야금(伽倻琴)을 만들었다는 우륵(于勒, ?~?) 또한 석륵(石勒)과 같이 후조(後趙)영역에만 있다. 그곳에 가야국, 즉 유울국 (柳郁國)가실왕 악사 우륵 (嘉悉王樂師于勒이 있었다.
고유柳에서 내려간下 유하혜가 가야국 가실왕이다 . 그들이 부른 음악을 진성(秦聲) 이라 했다. 진(秦)나라가 친입 한 금미달 지역 (加)良鄉 에 있었다. 가시리를 가야 망국 지음 (加耶亡國之音) 이이라 했다. 나라를 [떠나 도망 가는] 음악 소리라는 뜻이다.
왕이 하임궁(河臨宮)에 머물면서 가야금을 뜯는 소리를 들었다는 낭성(娘城) 은 임유관(臨渝關)이 있던 금미달 영역이었다. 그곳에서 현명한 지도자를 이별하는 송별회 (須臾離禮, 須臾離樂)가 열렸다. 활동이 제한 당한 우륵 (于勒) 과 그의 제자들이 떠나야만 하는 왕이 되돌아 와서 대태평성대 (大平盛代) 를 다시 이루기를 기원하는 애절한 감정을 읊었던 노래가 가시리다. 가시리의 정서가 아왕 (鴈王 鵝王) 미륵의 이름 (名阿逸多, 譯曰無能勝) 어음에도 있다. 가시리는 국무총리 격인 우륵이 부른 가사다. 나ᄂᆞᆫ은 우륵 또는 그가 대표 하는 나라 (Nation)를 뜻한다. 나라(國)와 날아(飛) 는 어원이 같다.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마지막 단군이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가시리 4장 후렴은 흔히 풀이 하는 “악기 소리를 흉내낸 말”이 아니다. “위 증즐가”는 “대평성대(大平盛代)” 와 같이 당시 훈역 했던 어음 “위 증 증가 (危症增加)를 한글로 기록 했다.
선학들이 가요의 발생지와 장소, 그 유래를 몰라 잘못 풀이 했다. 진흥왕 또한 가시리의 내력을 몰라 (남녀간의 애정을 읊은 음란한 음악)이라 했다.
후렴을 현대어로 풀이 하면 “나라는 (나ᄂᆞᆫ) 위태로운 증상이 날로 증가 하는데 , 아 태평성대 여”가 된다. 한번 읊어 볼까요?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ᄂᆞᆫ(나란),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위 증즐가 아 대평성ᄃᆡ(大平盛代) 여
날러(于勒)는 엇디 살라ᄒᆞ고,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나ᄂᆞᆫ 위 증즐가 아 대평성ᄃᆡ(大平盛代) 여
잡ᄉᆞ와 두어리마(ᄂᆞ)ᄂᆞᆫ, 선ᄒᆞ면 아니올셰라,
(나ᄂᆞᆫ) 위 증즐가 아 대평성ᄃᆡ(大平盛代) 여
셜온님 보내ᄋᆞᆸ노니 나ᄂᆞᆫ(날아), 가시ᄂᆞᆫ ᄃᆞᆺ 도셔 오쇼셔 ,
나ᄂᆞᆫ 위 증즐가 아 대평성ᄃᆡ(大平盛代) 여
중국정사에 실린 내용만으로는 도둑맞은 고조선 역사를 찾을 수 없다.
새로운 시각에서 개발한 방법을 인용 하여 고조선(古朝鮮)의 첫 수도 아사달 (阿斯達) 과 금미달 (今彌達)에 따른 많은 의문점들을 살펴 보았다.
항산 계곡에 있던 갈석을 북쪽으로 옮겨 산속에 도둑들이 사는 지역을 지나는 여울 구수(滱水) 지류에 소진이 말한 갈석(南有碣石)이 있었다. [29]
기세경(起世經)에는 제석(帝釋)이 환인(桓因) 과 천상의 패권 다툼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 수도가 중원세력의 침략을 받아 패허가 된 상황을 모티브로 대루탄경 (大樓炭經)이 나타났다.
두루미 미 (彌)자가 발조선 시대 이전 문헌에도 실렸다. 관자에는 금국미란 (今國彌亂) 문구가 있다. 제 환공 당시에 고조선 세력이 중원을 석권 했었다. 사기에 실린 미지수천리 (彌地數千里)가 고조선 의 서쪽, 연나라 서남쪽 영역을 뜻했다. 그곳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살던 남중국-지나 해안을 뜻했다. 필자는 [금미달(今彌達)에서 떠난 사람 들이 대만섬을 포함한 남중국(지나) 해안 4000 여리에 걸쳐 신미제국 (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고 논증 했다. 미지수천리 (彌地數千里)에 안문관이 있다. 소진이 설명한 “南有碣石、鴈門之饒”은 진(秦)나라에서 대현(鴈門)으로 올라 오는 숭산 계곡 (崇丘)에 [치수 업적을 새겨 놓았던] 갈석 (碣以崇山)이다.
4.가야국 가실왕 도장 (圖章, 玉璽) 이 조나라를 거처 진시황 손에 들어 갔다. 이를 수극지벽 (垂棘之璧) 또는 화씨벽 (和氏璧)이라 한다. 양서에 실린 옥편 (玉篇) 을 만들었다는 고야왕 (顧野王)이 가야국 왕 (加耶國王) 후손이다. 신라 첫 왕 (王)을 궁홀산에 살던 미 (彌)의 후예(弓裔) 라 했다. 이사금 (尼師今 琴) 이라 하던 명칭은 [거문고를 다루던 신선 같은 사람 (仙人)이란 뜻]이다.
Lastly, please look over the Warring States period maps. 여러 지도를 보세요.
지정학적이란 교류와 시대가 핵심 요소 입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옛적 지정학적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Ukraine 를 보세요. 대만을 보세요.
일제 강점기에 해외 교민들이 항일 운동에 깊히 관여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북아시아에 사는 교민들도 중원 세력에 항거하지 못하고, CCP 가 주장하는 동북공정 방안에 그대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한국 대학에는 “시진핑 (習近平)관을 설치 하고, 금미달을 금며달(今㫆達)이라 하고, 아사달의 위치는 알 수 없다”는 등, 얼빠진 새로운 친중파가 등장 하고 있습니다.
언행은 사람의 품격이요, 역사는 민족의 혼(靈魂)이라 합니다.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혼(靈魂)은 지켜야 합니다. 선구자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같은 분들이 미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듯이, 이 자유스러운 나라에 사는 재미 교민들이 [동북 아시아 상고사 바로 세우기 운동]에 중역을 담당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끝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의 장소 :
현 Google 지도에 산서성 대현
https://1drv.ms/f/s!AjYPVFDXYobFgn2cnwIp5KJTZVZo?e=glEqDt
진시황이 6국을 통합 하고 장성 쌍간하 (桑乾河)유역.
호타하(滹沱河)는 치수(治水) 성수(聖水)라고도 불렀다. 쌍간하(桑乾河) 란 글자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세 지도자 (三監)가 살던 곳을 지나는 여울이다. 서영정하(永定河)와 같이 발해만 천진(天津)을 지나는 해하(海河)의 지류다.
한무제 마읍전투 지
산속 (中山) 쌍간하 (桑乾河)유역. 같은 곳 방홀산에서
산서성 대현(代縣) 임유관 전쟁 高麗本孤竹國
금미달 (今彌達)영역에 馬邑 안문관 (雁門關)이 있었다. 그곳에서 한무제가 항복 했다. 今山西北部朔州.흉노(匈奴)와 한나라의 전쟁- 마읍전투(馬邑戰鬪, BC 133)
白登山今馬邑郡界。http://startour.pe.kr/local/china/인물-한무제-마읍전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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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2 시황 몰락후 책임 추궁:
필자 약력: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금강리. 강릉 상업 고등학교. 가톨릭 의대.
군복무 필 도미.
Don S. Lee, pen name “Mosol” was born in 1940, educated, received MD degree in Korea, came to US in 1970. He was trained in the Indiana University Medical Center, hold a faculty position in th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and retired in 2010 from the Georgetown University Medical center.
He had learned to understand the Ancient Chinese classics in Korea, joined a group of Korean scholars interested in Neo Confucian Study; “Study of Toegye philosophy “退溪學,” and served the position of vice president representing the Washington DC area for two years.
He had been active in writing critical essays, and was formally
recognized as a writer by the Korean circles in 2010.
Retired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By Xlibris, USA.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By Xlibris, USA.
2015 November: Co-author; Korean Heritage Room. Cathedral of Learning University of Pittsburgh.
2016 August 8th: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책 미래. Seoul Korea.
2018 August 29th: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東北亞 古代史 新論. By Xlibris, USA.
2020 October 29th: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 By Xlibris, USA.
[1]. 三國遺事 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 都平壤城 始稱朝鮮。 移都於白岳山 阿斯達。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 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壽一千九百八歲。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 . 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開國號朝鮮。與高同時。 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 莊子 逍遙遊: 堯治天下之民,平海內之政,往見四子藐姑射之山,汾水之陽. 夷、齊餓於首陽,季氏富於展禽. 焦氏易林 屯之 &明夷之: 升:鳴條之圖 主君旄頭, 立尊單于。 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王君旄頭, 立尊單于 革:朝鮮之地, 箕子所保, 宜家宜人,
[2]. 呂氏春秋 有始:何謂六川:河水、赤水、遼水、黑水、江水、淮水. 說苑 辨物: 管仲曰: 「事必濟,此人知道之神也。走馬前者導也,左袪衣者,前有水也。」從左方渡,行十里果有水,曰遼水。水經注 濡水: 遼水浮棺,有人言語. 語曰:我孤竹君也. 《揚雄·羽獵賦》碣以崇山
[3]. 康熙字典:它:《玉篇》古文佗字。佗,蛇也。《正譌》它。今文加虫作蛇. 孟子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當堯之時,水逆行,氾濫於中國。蛇龍居之,民無所定。下者為巢,上者為營窟。
[4]. 임유관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山海經: 鴈門山 鴈出其間, 在高柳北. 東觀漢記: 代郡高柳烏子生三足烏. 康熙字典 鳥部 : 鴈. 《地理志》 鴈門郡。 鴈門山, 在高柳北。柳檉:木名。《說文》云:河柳也.
[5]. 孤竹國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중산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Mount Wutai – Wikipedia. 清凉山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水經注 易水: 易水出涿郡故安縣閻鄉西山. 故傅逮《述遊賦》曰:出北薊, 歷良鄉,登金臺, 觀武陽,兩城遼廓,舊迹冥芒。蓋謂是處也。易水東流而出于范陽. 水經注: 聖水出上谷. 《耆舊傳》言:昔有沙門釋惠彌者,好精物隱,嘗篝火尋之。
[6]. 淮南子 說林訓:秦通崤塞,而魏築城也。조 무령왕(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饑馬在廄,寂然無聲,投芻其旁, 爭心乃生; 柳下惠見飴,曰:「可以養老。」盜蹠見飴,曰: 「可以黏牡。」見物同,而用之異。 說苑 佚文: 柳下惠死,人將誄之。妻曰:「將述夫子之德, 二三子不若 妾之知。」為誄曰: 「夫子之不伐,夫子之不謁,諡宜為惠。」弟子聞而從之[7]. 孟子 滕文公下:當堯之時,水逆行,氾濫於中國。蛇龍居之,民無所定。下者為巢,上者為營窟。《書》曰:『洚水警余。』洚水者,洪水也。使禹治之,禹掘地而注之海,驅蛇龍而放之菹。
[8]. 康熙字典: 佉:《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 其書下行。見《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伽切,釋之爲是。
[9]. 孟子:「王者之迹熄而詩亡,詩亡然後春秋作。晉之乘,楚之檮杌,魯之春秋,一也。 其事則齊桓、晉文,其文則史。毛詩正義: 「風」言賢聖之遺化, 舉變風者, 以唐有堯之遺風, 故於「風」言賢聖之遺化。 變風:《詩經》“國風”中 邶 至 豳 等十三國的作品。尚書 商書 微子: 天毒降災荒殷邦. 山海經 海內經:北海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 偎人愛人. 山海經 海內北經: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 吳越春秋: 遂巡行四瀆。與益、 夔共謀,故名之曰「山海經」。方言: 燕代朝鮮洌水之間曰盱. 北燕朝鮮洌水之間謂之蝳蜍.
[10]. 邢丘 란 글자가 史記: 魏世家, 韓世家에 있고, 史記 白起王翦列傳: 秦嘗攻韓,圍邢丘, 困上黨,上黨之民皆反為趙,天下不樂為秦民之日久矣。今亡趙,北地入燕. 연나라 장수 진개(秦开)란 풀이는 잘못: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1]. 魏惠王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12]. 柳下惠墓(山东省新泰市柳下惠墓)_百度百科 (baidu.com).
[13]. 苍海郡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 史記 平準書: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及王恢設謀馬邑, 匈奴絕和親, 侵擾北邊. 漢書 武帝紀: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為蒼海郡. 漢書 天文志:占曰:「南戍為越門,北戍為胡門。」其後漢兵擊拔 朝鮮, 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14]. 三國志 倭人傳: 女王國東渡海千餘里, 復有國, 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 人長三四尺, 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15]. 三國志 陸遜傳:陸遜字伯言,吳郡吳人也。本名議,世江東大族.權欲遣偏師取夷州及朱崖, 皆以諮遜,遜上疏曰:「臣愚以為四海未定,當須民力,以濟時務。」한해 따라 二萬里-5: 누가 언제 한해를 처음으로 건넜나-보충: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6].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明年,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
[17]. 東番記 –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wikisource.org) 陈第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18]. 孔子家語: 觀周: 孔子觀周,遂入太祖后稷之廟,廟堂右階之前,有金人焉. 孔子既讀斯文也.
史記: 孔子適周,將問禮於老子。老子曰:「子所言者,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耳。
[19]. 大唐西域記: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 印度者。月有多名。斯其一稱。
言諸群生輪回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 如來問曰。 汝子我之族也。 世尊曰。 斯人者我之族也
[20]. 大唐西域記: 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 印度者。唐言月。 月有多名。斯(Sikkim)其一稱。言諸群生輪回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 如來問曰。 汝子我之族也。 世尊曰。 斯人者我之族也, 吳越春秋: 堯聘棄使教民山居,隨地造區, 研營種之術。老子西升 教胡 장소. 三國志 魏書三十 東沃沮傳: 刻木如生形隨 死者為數. Totem Pole
[21]. 康熙字典 毛部 𣬛:音三。《海篇》𣬛郞𥓓名。𣬛郞神,本三郞神也。蠻人呼參爲𣬛, 轉聲爲三。又𣬛陽鎭,在沂州費縣。行唐西有𣬛趙村.大唐西域記 : 僧伽羅國。古之師子國. 鄭和勸國王阿烈苦柰兒ā ièkǔnàiér 。敬崇佛教遠離外道。王怒即欲加害。鄭和知其謀遂去。 後復遣鄭和往賜諸番。 拜賜錫蘭(xí -lán. Ceylon)山國王王益慢不恭。
[22]. 三國遺事 : 善德王代。 寺初主真骨 歡喜師。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感文殊 授法詳見 本傳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剎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
通典 婆利: 俗類真臘,物產同於林邑。王姓嬌陳如,自古未通中國。 武帝天監中來貢。 隋大業中,又遣使貢獻。其王姓剎利耶伽。大唐貞觀中,又遣使朝貢.
[23]. 康熙字典 : 廣韻:作濊,濊貊,夫餘國名。東明因都王夫餘之地.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 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24]. 《說文》曰:受沛水東入淮又涕泗也. 산동성. 康熙字典 : 《說文》沛水 出遼東番汗塞外, 西南入海。說文解字: 浿水。出樂浪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史記 蘇秦列傳: 且夫秦之攻燕也,踰雲中、九原,過代、上谷, 彌地數千里, 雖得燕城,秦計固不能守也. 史記 秦始皇本紀:車同軌。書同文字。地東至海暨朝鮮,西至臨洮、羌中,南至北向戶,北據河為塞,并陰山至遼東. 戰國策 燕一: 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 遼東, 北有林胡、 樓煩,西有云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里,彌地踵道數千里,雖得燕城,秦計固不能守也。 康熙字典: 又桑乾,河名。卽濕水。 《水經注》濕水, 出鴈門隂館縣東北, 過代郡 桑乾縣 南,又東過涿鹿縣北,又東南出山過廣陽薊縣北. 朝鮮의 어원 濕水冽水汕水
[25].晉書: 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冊府元龜 : 晉張華為都督 幽州諸軍事領 護烏桓校尉安北將軍撫納 新舊戎夏懷之 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強盛。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1774-2/
[26].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 禁僧官侵理民訟. 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 元史 地理四: 昆陽州下。 在滇池 Dian Lake南,僰、獹雜夷所居, 有城曰巨橋, 今為州治。 叛唐,令曲旂蠻居之。段氏興,隸善闡. 今夷中名其地曰. “東極高麗, 西至滇池,南踰朱崖(해남도),北盡鐵勒,是亦古人之所未及為者也” 開元中,降為羈縻州。 今夷中名其地曰羅伽甸。初,麼、些蠻居之,後為僰蠻所奪。南詔蒙氏為河陽郡,至段氏,麼、些蠻之裔復居此甸,號羅伽部。元憲宗四年內附,六年以羅伽部為萬戶.
[27].通典 新羅國,魏時新盧國焉,其先本辰韓種也。魏將毋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 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Silla from Zhina (Southern China) to Korean Peninsul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28]. 史記 樂書: 太史公曰:夫上古明王舉樂者. 夫禮由外入,樂自內出。故君子不可須臾離禮, 須臾離禮則暴慢之行窮外,不可須臾離樂,須臾離樂則姦邪之行窮內。故樂音者, 君子之所養義也。
[29]. 康熙字典: 《揚雄·羽獵賦》碣以崇山. 水經注 滱水: 滱水出代郡靈丘縣高氏山. 其水東南流, 山上有石銘,題言: 冀州北界。 故世謂 之石銘陘也.滱水西流, 又南轉東屈逕北海王 詳之石碣南、滱水東逕嘉牙川, 有一水南來 注之, 水出恒山北麓, 稚川三合, 注于滱水. 《史記》稱,魏文侯使樂羊滅中山。蓋其故城中山所造也. 滱水又東逕唐縣故城南.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