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문자(古朝鮮文字); 만주글자(滿洲文字)의 기원
고조선(古朝鮮)은 만주에 있었다. 한때 그 곳에서 큰 나라를 이루었던 발해에 관한 기록은 아주 희박하여 알수가 없으나, 그 뒤를 이어 받은 거란과 여진은 그들의 문자 가 있었다. 기원전2 세기까지 그 방대한 지역에는 동호(東胡, 古朝鮮, 發朝鮮,暨朝鮮, 濊貊朝鮮) 문하(文化)라 부르는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들의 남쪽에는 황하문화권의 문자가 사용 되였고, 중원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황하 문화권에서 난을 피하여 만주로 옮겨 와 살았다. 만주에 있던 정치 집단에서는 그들의 문자(滿洲文字)를 사용 했었다고 추측할수 있다. 과연 만주에 살던 사람들도 그들의 글자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글자 였을까? 고조선(古朝鮮)에도 문자가 있었다는 가설을 새워 놓고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만주에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는 증거가 뚜렸한 거란문자(契丹文字)와 한자 (漢字) 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 전후를 살펴본다. 한 마디로 패허에서 주서 모은 흔적을 근거로 과거 행적을 복원 시켜 보려 한다.
1.한자의 발생과 서체의 진전:
한자는 하남성(河南省)에 있던 상나라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갑골문(甲骨文字)이 그 기원이라 한다. 중원을 동서로 가르는 태행산맥 동쪽 (山東) 지역이다. 상 나라를 새운 사람들은 서쪽에서 왔다. 사용된 자료를 보면, 거북의 껍질이 많이 있다. 발생지가 산골짜기가 아니라 평원이나 늪지라야 한다. 상 나라 이전에 서쪽에 살던 사람들도 글자를 새겨 사용 하였을 가능성이 보인다.
한자의 기원은 중화문명의 시초와 직결된다고 상서(尙書)에 적혀 있다;
“《尚書序》古者伏犧氏之王天下也,造書契,以代結繩之政.”
하여 옛 부터 내려오던 ‘매듭으로 약속을 하여 다스리던 방법이 바뀌였다’ 했다.
그 글자를 계(契) 사람이 만든 글자라 했다. 하(夏)말 상(商, 殷) 초에 살았다는 이윤 (伊尹; 약 기원전 1600-1549년)이 그를 사용하는 법을 상 나라 첫 군주인 성탕(湯, 成湯; 약 기원 전1675 – 1646)에게 바첬다고 한다;
“伊尹朝獻,商書” “伊尹作書曰.”
상나라를 이은 서주에서는 보씨(保氏)자 지도층 자녀들을 교육 시키면서 글자 만들어 쓰는 법을 가르 첬다 한다; “保氏教國子,先以六書.”
갑골문자를 연구한 사람들은 ‘갑골문자에 이미 글자를 만든 방법이 육서(六書)의 기본을 갖추고 있다’ 한다. 이 말의 뜻은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甲骨文字) 보다 앞서 어떤 글자가 있다고 풀이 할수 있다. 이 갑골문을 상나라의 먼 시조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설문 또는 계문 (契文)이라 한다. 또는 무당이 점을 칠 때 사용했다 하여 갑공복사 (甲骨卜辭)라 부르기도 한다. 육서에서 말하는 전주와 가차 ( 轉注,假借)는 그 설명이 구구 하다. 그 이유는 옛적에 기록한 사음자 (寫音資, phonetic loan characters)를 후한 시대 억지로 설명을 만들어 붙엿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해석 사전인 이아(爾雅)에 있다. 중원과는 다른 말에서 전주와 가차를 발명 했다“方言所以發明轉注假借”는 기록이 있다.
이 방언이란 낱말의 글자들을 보면 거의가 다 동북쪽에 있던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東夷, 戎狄)의 쓰던 말’을 그렇게 부른 말이다.
서예계에서는 한자체의 발전 과정을, 상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서주, 춘주 전국시대, 진시황의 중국통일, 그 뒤를 이어 받은 한대를 거치면서 글자체(字體)가 정리 되였다 한다. 주나라는 융적의 본 고장인 태행산 서쪽에 자리 잡고 살던 부족 지역에 뛰어 들어 온 사람들이 새운 나라다. 서주 (西周, 1046-771기원전 ) 때에 이르면 글자체(字體) 가 많이 변하여 이를 대전(大篆) 혹은 주문(籒文)이라 부른다. 설문해자 (說文解字 卷一 序)에는 주나라 선왕(宣王) 의 태사(太史) 주(籒, zhòu )가 대전(大篆) 체를 만들었는데 옛 글자체 즉 공자가 쓴 육경 또는 좌구명이의 춘추전과는 다르다 했다. 그러나 선왕의 선조인 주무왕 (周武王, ?-1043 BC)이 상 나라를 멸망 하고 공로자 단공 (檀公)에게 선물로 준 주물 호궤 (胡簋, 利簋)에 이미 주문(籒文)이 씌여 젔있다. 주선왕 이전에 대전자가 있었다는 증거가 태평광기 (太平廣記 徵應一帝王休徵 周武王) 에도 적혀 있다. “중국 천하 3분의2가 그를 지지 했고 대전자를 이미(文皆大篆)사용” 했다 는 문구가 있다. 강희자전 서문에도 태사(太史) 주(籒) 조다 앞서 보씨(保氏)가 서주에서 앞날의 지도자들을 교육시킬 때 이미 육서를 가르첬다 했고, 주역 (易)계사전(繫辭傳)에 의하면 “상고에는 결승에서 시작하여 나무 또는 천 으로 만든 여러 형태의 의사소통 수단을 해를 숭상하던 부족(蓋) 사람들이 거더드려 (蓋取;諸離, 諸益, 噬嗑, 諸乾坤, 諸渙, 諸隨, 諸豫, 諸睽 등 등) 역(易)을 만들었고, 후세의 성인들이 이것을 서계(書契, 刻記)로 바꾸었다. “上古結繩而治,後世聖人易之以書契,百官以治,萬民以察,蓋取諸夬.”
한자 “蓋와 契”는 동음이자로 해(奚, 解)로 기록된 한 부족을 뜻한다.
하여 갑골문을 계문 (契文)이라고도 한다.
글자 “契;qì qiè xiè”의 음은 “音栔, 音習”라 했고, 나무나 뼈에 새겨 넣은 큰 “契約, 大約也,. 約也, 刻也” 약속 이란 뜻이다.” 이는 같은 발음을 다른 글자로 적은 부족 (解, 奚, 諧, 契, 海)와 같이 해를 숭상하는 부족이란 뜻이 있다. 그들이 만든 글자란 뜻이다. 전한 시대에는 그들의 나라 (契國)가 있었다. 지금도 쓰고 있는계약서 (契約書)란 말은 가장 큰 약속을 뜻하고 있다.
시설 (詩說)에는 태사 주(籀)가 선왕 때 많은 시문을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 “宣王考牧, 宣王勤政, 宣王憂旱,史籀美之,賦也.” 선왕때 윤길보가 장군으로 북쪽에 있던 융적 ((戎, 狄)) 을 정벌한 시문 유월도 태사(太史) 주(籒, zhòu )가 읊은 작품이라 한다 “六月:尹吉甫帥師征獫狁,史籀美之,賦也.”
시경에 실린 한혁(韓奕)은 주선왕(周宣王, 825-782 BC) 초기 때의 작품으로 알려저 있다. 태사(太史) 주(籒, zhòu )가 읊었던 시문과 같은 시대다. 주 왕실을 방문 한 한후(韓侯)를 북국의 패자 (覇者)로 인정했다. 시문에 나오는 추 (Zhui, 追)족과 모 (Mo,貊)족이 선왕 때는 서주 수도의 북쪽에 있던 부족 이름이 분명 하다. 맥족은 잘 알려진 부족이나 추(追)족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모전(毛傳) 에서 이 추(追)족을 설명 해준다. 시문 작성자가 흔히 알려진 종족 이름을 피하고 다른 글자로 기록했다. 그 뜻은 쫒기는 부족이였다. 잡히면 죽음을 당하던가 아니면 노예로 쓰일수 밖에 없다. 잡힌자들을 서주 왕실의 노예 (slave in the king’s court or palace, 官奴)로 일 했다. 서주에 관한 기록에는 노예(奴隷)란 글자가 많이 나온다. 그들이 서주의 궁궐에서 만든 각종 주물에 글자를 새기는 일을 맡아 보았다. 잡혀온 맥족의 노예 란 뜻으로 맥예 (貊隸)라 했다. 이들이 남긴 글자 체가 예서체 (隸書體, clerical script)의 기원 이다. 이 글체가 소전 (小篆)자 보다 앞서 있었다는 대전(大篆)자다. 이 들이 주물에 새겼기에 이 두 글체를 합처 부르기른 금문 (金文) 자라 한다. 예서체 (隸書體)는 서주에 잡혀 끌려 갔던 예맥 (濊huì huò wèi貊mò/ mak6) 사람들이 만든 글자체가 분명하다.이 사람들이 후에는 부여국을 만들었다; “獩; 本作濊,濊貊, 夫餘國名.” 그 중에 책임자로 있던 한 사람이 주 (周) 의 태사(太史) 주(籒)다. 가 대전(大篆)자를 창작했다고 사서 (史書, 周禮)에 적혀 있다. 그는 해를 숭상하던 부족 에서 잡혀온 노예 즉 해노 (奚奴)의 한 사람이다. 주공이 작성 했다는 주례에 있다.
“《秋官•貊隸》注雲” 征東北夷, 所獲是貊”者, 東夷之種, 而分居於北, 故於此時貊為韓侯所統.” “毛傳:「追, 雕也。金曰雕, 玉曰琢. 追, 貊, 戎狄國也.” “秋官司寇”
“춘관에서 일하는 맥족 관노를 설명했다. 그 곳에서 일하는노예는 동북 오랑캐를 정벌하여 얻은 맥족 이다. 그들이 흐터저 살았기에 한후 (韓侯)가 하나로 묶어 통치 했다. “모전; 추란 글자의 뜻은 독수리가 먹이를 쪼아 뜯어 먹듯 새긴다는 뜻이다. 금속 (金, 鑄物)에 새길 때는 조 (雕)라 하고 옥(玉)에 새길때는 탁(琢)이라 한다. 추맥은 융적의 나라다.” “춘관에는 또 도둑들을 관장 하는 관리가 있었다.” 궁궐에서 일하던 맥족 관노들도 같은 부서에서 담당 했는 풀이다.
예맥 (濊貊)이란 상대방을 비하 하여 부른 이름이다. 그들을 경어로 기록한 이름이 숙신 (Xishen息愼. 稷慎爲 肅愼)” 이란 표현으로 사서 (史書)에 적혀 있다. 예맥 (濊貊)사람들, 즉 숙신씨에 관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그들은 해를 숭상 하여 그런가 “해, 解, 奚, 楷, 태양, sun”을 뜻하고 “천신께 제사 지내는 사람이란 글자 아니면 그 뜻을 딴 한자로 기록에 나온다. 그 한 사람이 보씨 (保bǎo/bou/bɑǔ氏)다.
쇠퇴해 가던 서주 (西周)를 다시 부흥 시켰다는 주선왕(周宣王, 825-782 BC) 때에는 한자가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옛 상나라 지역에 있었던 고문자,즉 과두문(蝌蚪文) 계문 (契文)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 지지 않았다. 상나라 집권층이 발해만 서안을 따라 산해관 일대를 지나 만주로 옮겨 가 그 곳의 원주민들과 동화 되여 동호 문명으로 발전 되여 갔으니 그들이 쓰던 계문(契文)이 그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조선 (古朝鮮, 發朝鮮, 暨朝鮮, 濊貊朝鮮)으로 퍼저 갔으리라 추축할수 있다.
보씨 (保氏)의 “保” 자는 사음 (寫音)자로 관자 (管子)에 나오는 밝조선 (發朝鮮), 사기에 이를 의역하여 기조선(Gyi Joseon 暨朝鮮)의 기(暨, jì /kei3/gyì)자로 기록 했다. 밝다는 발 (發, fā fà bō/ biæt/볓) 말이다. 보씨 (保氏)가 만든 글자 (계문,契文)는 예맥 (濊貊)사람들 (계/설/지契/栔, 즉 해 解)이 칼 끝으로 자연계의 여러형상을 갑골에 새겼다. 이는 상나라 뒤를 이어 서쪽에서 자라 난 서주에서 쓰던 글자와는 달라 그 곳 사람들은 판독 하지를 못했다 “周 不能辨.” 글자를 새길수 있는 기술을 지닌 예맥 (濊貊)사람들 (계/설/지契/栔, 즉 해 解)이 서주에 노예 (관노, 官奴) 로 잡혀가 주물에 글자 (隸字, literally clerical script; chancery script)를 새겨 넣었다. 그들이 새겨 놓은 글자가 금문자(金文字)의 시작이고 그 글체를 서예가를은 예서체 (隸書體)라 한다. 한나라 후한(後漢)에 이르러 왕차중(王次仲)이 예서체를 다시 개량하여 해서체(楷書體)를 만들었다. 이 해서(楷書)란 뜻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태양, Sun해를고 숭상 하는 사람들이 만든 글자”란 뜻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해서체(楷書體)도 남북이 서로 다른 방향을 변하였다. 한국에서 쓰는 글자체는 한나라 때 부터 북쪽에서 쓰던 글체 (漢隸)에서 변해 온 글자체다. 이를 정체 (正體)라 하여 표준자체로 삼았다. 해서(楷書)에 씌인 해(楷) 자를 자전에서 찾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이 담겨 있다.
진서 위항전 (晉書•衞恆傳) 에 적혀 있기를 북경 북쪽 상곡 사람 왕차중 이 해서(楷書)로 쓰는 방법을 시작 했다 “上谷王次仲,始作楷法.”
광운에서는 해 (楷) 자를 옛적에는 “”로 기록 했는데, 이는 공자 무덤 위에서 특히 많이 볼수 있는 나무 이름이라 했다. 해는 즉 모 (模mó mú, 즉 牟) 다. 이 글자에서 마한 (馬韓, 牟韓, 慕韓)이란 이름이 나왔다. 공자 가문의 벽 속에서 나왔다는 (孔壁書) 즉 과두문자(蝌蚪文字) 는“태양, Sun해를고 숭상 하는 사람들이 만든 글자”란 뜻이 담겨있다. 광운 (廣韻) 해 (楷)자 설명에도 나온다. “《說文》云:木名孔子冢蓋樹也,廣志云孔子冢上特多楷樹。
《廣韻》楷:模也,式也,法也。《說文》曰:木也,孔子冢蓋樹之者又姓”
만주 지역에 있던 고조선 에서 문자(古朝鮮文字)가 있었다는 증거는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가야 연맹체를 포함한 삼국과 일본은 그 시원이 발해만 수계 (水界, watershed) 에서 발생 하였다. 삼국의 지도층에는 “해 또는 밝다”는 말에서 나온 성씨가 자주 나온다. 해모수 (解慕漱), 왕후 해씨 (王后 解氏), 고 (高), 계왕 (契王), 박 朴, 최 (崔) 하는 글자들이다.
삼국중에 제일 먼저 발해만 일대에서 첫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백제 (百濟)는 근초고왕 30년(375) 古記云:「百濟開國已來,未有以文字記事。至是,
박사 고흥을 맞아 (得博士高興) 서기 (書記)를 편찬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와의 전쟁에서 제왕을 상징하는 황색기를 쓰고, 고구려왕을 살해 했다.
이 깃발의 뜻은 당시 백제는 한자 문화권의 통치자란 자부심을 뜻하여 ‘제왕을 상징하는 색갈로 깃발을 만들었다. 어려운 국책 사업인 역사 기록을 작성 한 근고초왕의 심정은 그 지역에서 쓰던 글자’ 로 기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와 쌍벽을 이루었던 고구려에서는 나라 초기부터 유기 (留記)라 이름한 기록을 남겼다. “國初始用文字時,有人記事一百卷,名曰留記”. 건국 초기에 유리왕 (瑠璃明王, 기원전 38년 -기원후 18년)은 한족(漢族) 여인이 떠나자 한자로 황조가를 읊었다. 당시에 고구려의 수도가 한나라 새력권에 가까이 있었다는 증거다. 고구려에서 한자 만을 써 왔다는 증거는 아니라 본다.
고구려의 황금시데 였던 영양왕 11년(600)에 이문진이 옛 부터 전해 오던 역사기록을간략 하여 신집 (新集) 다섯권을 찬수하였다.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어느 누가 기록으로 남긴 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유기란 책이 있었다. “太學博士李文眞,約古史為『新集』五卷。國初始用文字時,有人記事一百卷,名曰『留記』”
당 나라에서는 궁중 학자 시어사 (侍御史) 가언충 (賈言忠)을 만주에 보내 고구려의 역사 기록 을 가저 갔다. 그가 갖고 간 역사책을 비밀 스러운 기록 이란 뜻에서 비기 (秘記 )라 기록 했다. 고구려의 유기 (留記) 아니면 신집 (新集)을 비기라 부른 듯 하다. 해동 만주 땅은 기자(箕子)이래로 한나라 초기에는 위만이 왕이라 칭하는 등 여러 나라가 있었고,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문자가 소약하여 자새히 알수 없다고 했다. “衛滿僭號於漢初,年代綿邈,文字疎略 固莫得而詳焉”
이를 종합해 보면, 만주땅에는 글자가 있었다. 전성기를 이룩한 백제와 고구려 에서는한자와는 다른 만주지역에 전해오던 고유 문자를 한자와 같이 사용 했다 (共用)고 본다. 만주에 글자가 있었다는 뚜렸한 증거는1180년에 남송의 섭융례 (宋葉隆禮)가 집필한 거란국지(契丹國志)와 그보다 반세기 전에 작성된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高麗圖經)에도 있다.
“觀夫倭辰餘國。或橫書。或左畫。或結繩爲信。或鍥木爲誌。各不同制。而麗人。乃摹寫隷法。取正中華” “볼것 같으면, 왜 (倭) 만주 지역 나라들은, 가로쓰고 혹은 왼쪽으로 획을 긋고 혹은 노끈을 매듭지어 신표로 하고, 혹은 나무를 파서 기록으로 삼고 하여 각각 방법을 달리 하고 있나,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와 같이 바로 잡았다.” 섭융례가 사절단을 따라 고려에 왔을 때는 김부식이 주도하여 삼국사기 편집 이전이다. 김부식이 섭융례 일생을 만났다. 그 당시 왜 (倭)는 여러 부족 국가로 통일된 언어가 아니였다. 오늘 일본의 어떤 지역에서는 만주에서 쓰던 방법과 비슷한 약속 방법, 즉 글자체를 썼다는 뜻이다.
2.거란 문자(契丹文字, Khitan scripts)의 탄생과 영향:
거란 대자(契丹大字)의 시작은 요 태조 920년 1월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에 3000여자를 만들었다.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대 소문자 두 종류로 되여 있다. 큰 글자 (거란 대자)를 거란인들은 ‘옛 글자’ 또는 ‘큰 도장 글자’라고 부르고 관인에 사용 되였다. 만주 동북쪽에서 일어난 여진족이 금(金) 나라 (1115-1234년)를 새우고 1125년에는 거란을 합병 하자 옛 요 제국의 서쪽 지역에서는 황족 일파가 여진에 반항하여 서요 (西遼; 1124–1218, Western Liao, Kara-Khitan or Qara-Khitai Khanate)를 새웠다 100년 이 되기도 전에 징기즈칸에 의해 망한다.
요 제국이 사양길에 들자 거란의 서남쪽 (중국 북서부의 감숙성, 섬서성 일대) 에서는 퉁구스족 이원호(李元昊)가 서하(西夏1038-1227년, Xī Xià, Minyak) 왕조를 새웠다. 그가 서하 왕국을 선포하기 전인 1036년경에 서하문자 (西夏文, Old Tangut script,古黨項文字) 6000자를 만들었다. 글자 형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거란 문자와 같이, 당시에 흔히 씌이던 중국의 해서체(楷書體, 正書) 보다는 옛 예서체(隸書體)를 많이 닮았다.
거란 문자(契丹文字, Khitan scripts)과 서하문자 (西夏文字)의 탄생과 관련된 여러 사건, 글자형, 작성 시기, 글자 작성에 소요된 기간 등을 종합해 보면 많은 의문점이 있다. 중앙 아시아에서 만주지역에서 발견된 문자들의 발생 변화 과정을 종합해 보면, 그 넓은 지역에 살던 퉁그스족들은 그 전부터 그들의 글자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 하다. 이 글자를 거란인들은 ‘옛 글자’ 또는 ‘큰 도장 글자’라고 부르고 관인에 사용 되였다. 거란인 (퉁그스족)들이 ‘옛 글자’라 부른 글자는 예서체(隸書體) 발생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보씨 (保氏)가 만든 글자, 즉 예맥 (濊貊)사람들 (계/설/지契/栔, 즉 해 解)이 칼 끝으로 자연계의 여러형상을 갑골에 새겨 만든 갑골문 (甲骨文, 契文)에 다다른다. 해를 숭상하는 예맥 (濊貊, 息愼, 肅愼)족이 중앙 아시아 천산 일대에서 동으로 옮겨 왔다는 증거는 밝혀 젔다. 그들의 한 후예인 이원호 (李元昊) 가 옛 선조들의 땅인 돈황 일대에 살면서 선조들의 글자를 근거로 서하문자 (西夏文, Old Tangut script,古黨項文字)를 만들 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하나라의 옛 글자를 모방 하여 만든 글자라 서하문자 (西夏文)라 이름 했다고 본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서는 거란(契丹)이 동호(東胡)의 후예라 했다 “論曰:契丹之興,本自東胡.” 요사에서는 거란은 옛 조선 땅이ㄱ고 그 곳에 상 나라 유민을 끌고 온 기자가 가르친 풍속이 남아 있다고 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教,流風遺俗”
한국역사에 따르면, 거란이 고려를 친입 했을 때 서로가 고구려의 영토를 물어 받은 고구려의 후손이라 했다. 거란 문자는 마치 지하수가 땅속을 흐르다 샘물이 되여 나타나듯,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만주지역 패자를 통하여 그 물줄기를 이어 왔다. 그 중간에 있었던 여러 나라들도 이 지하수의 영향을 받았다 본다. 발해가 이름을 진국(震/振/辰國) 이란 한자 이름에서 “밝은 해”라는 그들 고유 언어로 바꾼 취지는 그들의 항당운동의지가 뚜렸하다. 저들의 글자가 있었다고 본다. 하여 “발해가 이미 멸망 하였으니”하는 문구를 남겼다 했고, 발해 유민들을 위하여 ‘거란의 동쪽에 있는 계단국’ 이란 뜻의 동단국 (東丹國)을 만들어 주었다.
한자 (契丹, 계단 (Khitan, 해단, , 거란)이란 글자를 어떻게 발음 하느냐 하는 문제부터 그 뜻에 이르기 까지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필자는 이 글자 (契)를 중국 발음으로 “qì qiè xiè, kai3 kit3 sit3, kèi ket set”이라 하는데 이는 “해, sun”을 그렇게 발음 했다. 그 “契丹”이란 나라 이름은 ‘햇님’ 이란 뜻이다. 조선, 발해,거란은 그 이름이 모두 밝은 해를 어간 (語幹)으로 삼고 수식어를 붙여 부르기 쉽게 두음절 이름을 만들었다. 거란(契丹) 글자를 만든 내력을 사펴 보았다.
거란국지 (契丹國志) 보다 앞서 펀찬된 고려도경 (高麗圖經, 宣和奉使高麗圖經) 은1123년에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년)이 고려를 방문하고 송 휘종에게 바친 고려 방문기다. 그 보고서에 “觀夫倭辰餘國。或橫書。或左畫。或結繩爲信。
或鍥木爲誌。 各不同制。而麗人。乃摹寫隷法。取正中華” 하는 문구가 있다.
“살펴 볼것 같으면, 일본 섬나라와 만주는(觀夫倭辰餘國) 중국과는 달리 각각 다른 방법으로 기록을 하고 있으나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 잡고 있다”하는 풀이다. 만주 지역과 그 곳에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일본에 가서 자리 잡은 여러 군소 국가들도 미개한 글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예서체( 隸書體)를 사용 했던 예맥 濊貊족 후손들 (고구려, 신라)의 비문에는 예서체가 이용 되였다. 한반도 동남 끝에서 발견된 영일냉수리신라비 (냉수리비 , 迎日冷水里新羅碑)에 적힌 글자와, 그 보다 앞서 만주 땅에 설립 된 광개토대왕비문 (廣開土王陵碑)은 모두 예서체( 隸書體)라 한다.
신라는 만주에서 한반도 동남 끝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진흥왕 (眞興王) 6년(서기545년)에 거칠부등 여러 문사를 모아 국사 (國史)를 편찬 했다. 문맥을 보면 이 책은 중국사서의 편집 형태를 본 받아 한자로 기록 했다고 본다.
한국 삼국의 역사 기록은 소멸 되여 그 실체를 알수 없으나 그 옛기록에는 “만주 지역에서는 한자와는 다른 글자가 사용 되였다”는 기록이 삼국 사기에 있다.
그 전 위만조선에도 글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문자소약 文字疎略이라 했다 이 소 (疎 는 疏자와 같은 뜻으로 거칠다 적다, neglect; careless, lax” 하는 뜻이다. 글자가 있었다는 증거다. 발해를 정벌한 거란, 그를 뒤이어 받은 나라 여진족 (女眞)의 금국(金國)은 그들 대로의 문자가 있었다.
3. 또 다른 글자가 있다.
흔히 부르는 명도전 (明刀錢) 에 새겨진 글자가 논라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발해와 요동만 연안 일대에서 한반도 서북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조선 강역에서 나타난 유물이다. 중국 문자 의 한 종류로 알려진 과두문자 (蝌蚪文字) 와는 라른 모양의 글자로 풀이 하고 있다. 이 글자가 새겨진 주물은 중국 북부에서 산동성,내 몽고, 만주지역, 그리고 한반도 북부 일대에 서 발굴 된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한 주물은 그 지역에 한때 번성 했던 정치 집단이 만들었다고 볼수 밖에 없다. 그 정치 집단은 동호로 알려진 고조선 (古朝鮮; 發朝鮮, 暨朝鮮, 濊貊朝鮮)이다. 흔히 말 하는 ‘명도전 (明刀錢) 에 새겨진 글자는고조선문자(古朝鮮文字) 라 풀이 함이 타당 하다’고 본다. 오늘의 요양 심양 일대가 옛 조선의 수도였다는 기록이 요사지리지에 있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기록된 “爲信. 或鍥木爲誌”하는 문구가 명도전 (明刀錢)에 새겨진 글자에서 내려온 관습이고 그와 같은 뜻을 가진 글자들이라 본다. 명도전 (明刀錢) 에 새겨진 글자는 양자 간의 약속(爲信)을 뜻한다면, 그 글자는 넓은 지역에서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글자 (公用文字)라야 한다. 가장 오래된 글자라야 하고 분명 숫자 (量)와 물질(物質) 을 뜻 하는 글자가 있어야 한다.
사기 평준서에 따르면 옛적에는 거북 조개의 껍질, 금속으로 만든 칼, 그리고 천 (龜貝金錢刀布)을 화패로 썼다. 금속으로 만든 칼 (刀者,錢也) 일반 인이 사용했다. “如淳曰:名錢爲刀者,以其利於民也.” 금속으로 만든 칼 (刀錢) 이외에도 다른 형태 의 주물 (鑄物)로 만든 돈(錢)도 사용 했다는 뜻이다.
화폐의 형태가 칼 모양이 였고 이화폐는일반인이 사용했다 (其利於民)는 두 문구가 해답의 열쇠다. 이 칼 모양의 돈은 숙신씨 (肅慎氏; 追,貊)의 대명사다. 그들이 쓰던 중요한 쟁기였다. 칼 모양으로 만든 여러 형태 (明刀錢, 匽刀, 尖首刀)의 주물에 글자가 들어간 화패는 숙신씨 (肅慎氏)가 새운 고조선에서 만들었다. 나무에 어떤 글자 나 모형을 새겨 약속을 했다는 뜻이다.
이 글자 계 (鍥, qiè)에 해를 뜻하는 글자(契;계/거/설/해, qì qiè xiè /*kèi ket set) 가 들어 있다. 그 곳에서 한때 번창 했던 거란 (契丹,) 갈석산 일대에서 만주로 퍼저 나간 상(商)나라의 시조 설(契) 하는 역사적 사실과 일연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해를 숭상하는 풍습을 지켜오던 이들이 일반 인으로 전락 했고 옛 부터 써 오던 금속 화패라 넑리 쓰이였다고 본다. 그 화폐에 쓰인 글자가 퉁구스족이 쓰던 재일 오래된 글자다. 동양 여러 글자의 뿌리라 볼수 밖에 없다.
어느 특정 부족을 부를 때는 그들의 말과 문화를 의미 하기도 한다. 특정 문화의 대명사가 글이다. 당태종이 만주지역에서 고구려와 싸우고 남긴 글 극고구려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에 적혀 있다. 당 태종이 이끌고 온 당나라 군사와 용감하게 싸웠던 고구려 사람들을 삼한사 (三韓士)라 부르고 백암성 일대를 변진지야 (弁辰之野)라 했다.
만주지역을 남송 사람은 고려도경에서는 진여국 (辰餘國) 이라 했다. 남만주에 있던 진한 ( 辰韓)사람들 한 지류가 한반도로 내려가지 않고 만주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김씨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 (金日磾 134-86 기원전)가 시조다. 그가 감숙성 돈황일대에서 잡혀 한무제를 섬겼고, 그 후손이 만주에 가서 남만주에 있던 신라에 들어가 김씨 왕조를 이루다 한반도 동남쪽으로 옮겨 왔다. 만주에 남아 있던 김씨의 후손이 금국 (金國)을 새운 김함보다. 거란 또는 계단 (Khitan,해단, 契丹)이라 부르는 나라와 그들이 정복 한 해동성국 발해의 이름이 안고 있는 뜻이 갇다. 이 두 나라 이름은 “밝은 해, 햇님” 이란 이름이다. 이는 한자로 적은 조선 (朝鮮) 이란 뜻과 일치 한다.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6 Responses to 고조선문자(古朝鮮文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