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를 논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魏志) 30은 중원 북쪽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의 후예를 다루었다.
앞에서는 이를 멀리서 관찰 하여하는 제하에 고조선의 후예를 다루었다.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이 였던 우리 민족의 조상이 동북아시아에 이르러서는 지리지형과 문물 교류의 차이로 대흥안령을 경계로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기마유목민족의 특성을 유지하였고, 해안지대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교류의 수단이 배로 바뀌어 한해의 총치권을 잡게 되였다. 먼 훗날 한반도에 정착하여서는 를 정했다. 서쪽 사촌 기마유목 민족의 역사는 서양 사학계에서도 다루어 졌다. 그러나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역사는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하는 문제를 전반적으로 깊히 다루어진 적이 없다.
삼국지 동이전은 이 포함 되여 있다. 기록은 중국사람들이 했다. 그들과 직접 교류가 없었던 지역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청나라 이후에 내몽고와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을 누가 남긴 유물이냐 하는 논쟁이 생겼다.
내몽고 적봉 (赤峰) 일대에서 발굴된 하가점 상층문화 (夏家店上層文化, Xiàjiādiàn shàngcéng wénhuà)가 동호문명의 유산 이라고 한다. 이 유적지는 중원세력의 영역 밖이라 중국문헌에는 실리지 않았다. 같은 논리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도 적용된다. 중원 사람들은 그 곳에 동명산(東明山)이 있고 천지 장남의 궁궐 (天地長男之宮)이 있다고 믿었다 . 필자는 고 추리 했다. 이 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이 시경 한혁에 나오는 한후의 영역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다 . 서주의 영역 끝을 모르는 북쪽 땅은 모두 한후의 영역 이라고 주선왕이 약속을 했다. 춘추시대에 제 환공이 북주후(北州侯) 를 정벌하러 갔던 땅을 중국 관활 영역 밖이라 여주 (餘州)라고 했다. 그 곳에 살던 같은 부족이 대흥안령을 너머 만주 땅에 들어와 요하의 동쪽과 서쪽에서도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이들이 중원과 교류를 하면서 남긴 유물을 중원사람들이 명도전(明刀錢)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국시대 말기에 순자 영욕편(荀子 榮辱)에는 이들을 부여(夫餘)의 전성시대로 표현 했고, 서양 사가들은 동호(東胡)라고 한다. 필자는 을 했다 .
사기 화식열전에는 중원의 제일 동북쪽에 있던 제후국 연(燕)의 주위를 설명 했다 .
연의 북쪽에는 “오환과 부여(烏桓、夫餘), 동북 변두리에는 동호(東胡), 동쪽에는 예맥 조선 진번(穢貉、朝鮮、真番)”이 있었다. 진수는 옛적 제후국 연(燕)의 동쪽은 고조선과 번한지역을 경계(滿潘汗為界)로 하고, 북쪽에 살던 부족 “오환 부여 동호”를 오환과 선비 가비능(烏桓, 鮮卑, 軻比能)전으로 했다 . 그러나 동쪽과 동북쪽에 있었던 “예맥 조선 진번”은 미묘하게 기술 했다. 전사사(前四史) 내용을 종합해 보면 위서 30편 열전은 동호(東胡)의 후손를에 관한 예기가 분명하다. 이러한 근거가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 모용위(晉書 慕容廆[wěi])전에 뚜렷하게 기록 되였다 . 그는 서진(西晉) 말기 선비족 (鮮卑族)의 수령이였다. 제일 서쪽에 있던 부족을 오환이라 하고 제일 동쪽에 있던 선비족 또한 동호(東胡)의 후손이라고 했다. 선비족의 동쪽 경계가 요수(遼水)라 했다 . 한나라가 설치 했던 군현이 요하 서쪽에 국한 되였다는 증거다. 가비능(軻比能;?-235년)은 진수 당시 옛 동호(東胡)의 한 지도자 였다. 동호(東胡)란 서쪽에 살았던 호(胡)가 동쪽에 와서 살던 사람들을 뜻한다.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쪽은 중원의 영향을 받아 위만(衛滿, 魏滿)이 일인 독제의 왕정을 수립 하였고, 요하 동쪽 심양-요양일대에는 옛 풍속을 지켜 제사장(壇君, 禮君)이 다스리는 무군장 (無君長) 시절이 계속 유지 되였다 . 사기 조선열전 에는 한무제가 조선땅을 침략하게 된 이유를 들으면서 “真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란 문구를 남겼다. 우거왕은 그곳에 있던 많은 부족장들과 원만한 대화가 없었다는 뜻을 “옹안불통 (擁/雍閼不通)이라고 기록”했다. 하여 예군 남여와 역계경이 우거왕의 경기지역을 떠났다. 이 곳(真番旁眾國)이 삼국지에서는 변한과의 경계(潘汗為界)라 하더니 다시 삼한 땅으로 둔갑 했다. 한무제 친입이후 평화스러웠던 지역에 풍파가 일어 많은 사람들이 단합해가는 과정에 거주지를 옮겼다는 뜻이다.
삼국지에는 이 처음 나온다. 그 내용을 후한서에서 그대로 인용 했다. 삼국사기 기원전 28년에 시조 동명성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했다. 북옥저는 졸본부여 가까이에 있던 국가였다 . 후한서에는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에 현토군을 새웠다 . 삼국지 필사본에는 옥저성이 현훙군(玄薨郡)이 되였다 .
“地為四郡以沃沮城為玄薨郡後為夷貊所侵. 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
뒤에는 이맥(夷貊)이 파괴한 곳이라고 했다. 고구려가 정벌한 현토성을 묘한 글자로 적었다. 현도군 (玄菟郡)에 이 있었다. 서개마란 이름은만들었다. 현토군에 있던 옥저를 서쪽(西)에 있던 개마(蓋馬), 즉 해모수(解慕漱)가 나타났던 곳이다. 이를 말을 돌려 그렇게 기록 했다. 그 한 분파가 요하 동쪽에도 있었다. 해부루(解夫婁)가 그 곳에 정착 했다. 옛 옥저 보다는 북쪽이라 하여 북옥저(北沃沮)라고 부른다. 옛 부여의 북쪽으로 옮긴 부족을 북부여, 동쪽으로 옮긴 부족을 동부여라 했다. 이들 모두 요하 서쪽에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또한 요하 서쪽이다. 동해지빈(東海之濱)란 동쪽 에 있는 강가(東 河之濱)란 뜻이다. 옛적 발음을 사음한 “하(夏,荷,何,河)는 해(解,海,亥,奚,諧)로 통용되였다. 글자에 뜻이 숨어 있다. 이글자 (薨; 죽음 훙, 죽음 홍, 많을 횡)에는 의 뜻이 있다. 우거왕이 죽은 곳이란 뜻이다. 그 땅이 뒤에는 낙랑군 관활이 되였다.
통전에는 동옥저전을 설명하면서 개음하(蓋音合)이라 했다. 오늘에 개(蓋; gài gě hé/까이/그어/흐어)라고 읽는 글자를 옛적 발음으로는 (合; hé gě/흐어)라고 발음 했다 . 해(太陽, sun, sun-ray)를 뜻한 옛적 우리선조들이 쓰던 말의 사음자다.
이 문제는 필자의 “古朝鮮 찾기.첫 장: 어떻게 찾았나.글자 속에서”에서 다루었다.
또한 관구검이 고구려를 친입할 때에 옥저 땅을 지났다 . 통전에는 모용외가 부여를 공격하여 왕을 살해 하니 부여왕 아들과 동생이 옥저로 도망 갔다 . 많은 옥저 사람들이 현토군에 있던 옛 고향을 떠나 요하를 건너 여러 곳에 흐터저 동 남 북옥저라는 국가가 생겼다.
이렇게 사마천이 발해만 서쪽 해안 일대를 설명했던 글자를 진수는 이리저리 바꾸어 중원에서 점차로 먼 곳으로 밀어 버렸다. 뒤에는 후한서 통천, 태평어람등등 여러 사서에서 같은 방법으로 삼한의 후예들이 살던 땅을 도욱더 멀리 밀어 버렸다.
이문제는 필자의 “website 삼한 (三韓)의 후예 (後裔)들” 에서 설명 했다. 사마천이 진번방중국(真番旁眾國)이라 한 문구를 한서에는 진번 진국(真番、辰國)이라 했다. 위약에서는 이 지역을 위만이 통치하던 지역의 번한들(滿潘汗為界)이 살던 땅이라 했다. 진수는 한서에서 진국(辰國)이라 한 지역을 진한(辰韓)으로 바꾸어 삼한 (三韓)이 살던 곳이라 했고, 한(韓)자 앞에 여러 형용사를 붙여 편을 만들었다. 이 지역이 논어에서 공자님 예기를 인용했던 군자(君子,箕子)가 살았다는 구리(九夷) 의 땅이다 .
그뿐 아니라 사기 조선열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글자 예(濊, 獩, 穢)을 넣어 새로 예전(濊傳)을 만들었다 . 이 예(濊)를 여러 사서에는 여러 예(濊, 獩, 穢, huì/훼)자를 쓰기도 했다 . 이는 뜻의 또 다른 사음자다. 예자와 현(濊, 玄薨 沃沮)자로 기록된 부족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한 산서성 해지연안에서 나타났다.
옥저(沃沮)은 관중분지에 있던 옻칠 칠저(漆沮)를 바꾼 글자다.
다음에 계속, 끝
April 11,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