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를 논한다.
東夷傳-1: 개요
오환(烏桓, 烏丸)과 부여(夫餘, 扶餘) 고구려(高句麗)란 이름은 삼국시대 이전 부터 있었다. 이 세편은 진수의 역사관을 다른 사가들과 비교해 볼수 있는 좋은 사료다.
오환(烏桓, 烏丸)에 관한 설명을 끝마첬다. 부여(夫餘, 扶餘)에 관해서는 뒤에 다루기로 한다. 고구려편에는 만주 땅에서 중원 세력을 쫓아 버리고 고조선의 전통을 이어 받아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이 였던 우리 민족의 조상이 동북아시아에서는 제일 동쪽에 있던 강국으로 등장한 예기가 실려 있다. 필자가 선정한 고조선(古朝鮮)찾기의 끝장이 된다.
기자가 조선 땅에 갔다하니 그 글자가 어떻게 삼국지에 실려 있나를 찾아 보았다. 하기(何夔, hé kuí]/흐어궤이)전에 기자의 충정(忠正)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한 일화가 있다. 하기(何夔)는 해씨 (解氏)란 뜻이다. 옛 상나라 경기 지역이 그의 본향이다. 동이전에는 기자 (箕子)에 관한 예기가 한전(韓傳)과 예전(濊傳) 두편에 실려 있다. 예전(濊傳)에는 기자 후손이 살던 왕검성을 한무제가 처벌하고 한의 4군(分其地為四郡)을 설치했다고 실었다. 한전(韓傳)에는 죽은 동호왕의 아들 (否死,其子準立)을 위만이 쫓아 버리자 바다로 도망가서 정착한 곳으로 되여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대왕이 잡아온 포로들을 묘지기로 쓰라고 지시 하면서 그들을 한예(韓穢) 라고 했다. 부여 (夫餘) 땅에 예성(濊城)이 있었고, 동이예군 남여(東夷薉君南閭)가 난민을 인솔하고 발해만 서남 일대에 왔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한전(韓傳)과 예전 (濊傳)은 발해와 요동만 연안에 살던 사람들을 뜻했다. 삼국지 동이전은 요동만 수계(遼東灣 水界, Liaodongbay Water shed)에 살던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 곳에 오손(烏孫)의 후예란 뜻이 잠긴 오단국(臼斯烏旦國)과 고조선의 잔여 세력이라는 뜻이 있는 비리국(卑離國) 월지국(月支國) 백제(伯濟)등 여러 나라가 한전(韓傳)에 있다 .
한서에는 한낙랑군 (漢樂浪郡)에 부조(夫租)현이 있었다. 사학계에서는 부저/저 예군/장 (夫租薉君/長)하는 직함과 인장(印章)을 근거로 을 주장 한다. 그러나 후한서에는 부조(夫租)현이 없고, 그 비슷한 이름마저 보이지 않는다. 부조(夫租)라 한 곳은 고조선이 붙인 이름이라본다. 필자는 이 모두가 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동북 아시아 고조선문제 연구가 들에게 새로운 시각에서 관찰 하라는 명제다. 많은 사학계 인사들과 학술 토론이 있기를 바란다.
진수는 어느 누구를 통해서 위지 30 동이전의 자료를 얻었나?
《武英殿二十四史》本。 안사고가 주를 단 필사본에는 조위시대 사람,여순이 한 예기(如淳曰)가 많이 나온다. 후한서 동이전은 삼국지의 내용을 인용 했다. 여순왈(如淳曰)하는 문구가 한대 이후에 편찬된 여러 고전에도 많이 나온다. 박식한 사람이지만 그에 관한 설명은 물론하고 생몰일자도 알려지지 않았다.
한 무제와 후한 초기에 정벌 되였던 흉노가 중원이 삼국시대의 혼란을 치루는 동안 다시 나타났다. 흉노 지도층에 금이 가서 오환(烏丸)과 선비(鮮卑)로 분리 되였다. 이들을 후한 말 하북을 통치하던 조조(曹操)가 실권을 잡은 싯점에는 귀순한 적도 있였지만 수시로 남쪽을 침범 했다. 북쪽 지방민을 흡수하여 군사력이 우세했던 원소가 관도 대전(官渡大戰, 200년)에서 조조에게 패하자 잔여 세력은 그들을 도와준 흉노땅으로 들어 갔다 . 그 기록에 서쪽에 살던 옛 고조선 후손들의 풍속을 그렸다: 북쪽 . 조위의 뒤를 이은 서진(西晉)이 이들을 이용하려다 나라를 빼았겼다. 중원 세력의 이라고 볼수 있다.
진수는 위지 30 동이전(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편에 기노(耆老) 또는 장노(長老) 들의 예기를 가장 많이 인용했다. 왜인전에는 기노(耆老)란 글자는 없고 장노(長老)들의 예기를 인용했다. 그가 하는 질문에 아직 정답이 없다. 왜인전에 나오는를 기록 했다고 본다.
한전과 왜인전에서 바다를 따라 섬나라에 관한 기록은 동옥저(요동반도 동쪽 해안) 에 가서 장노(長老)들을 만나 들은 예기다. 주로 백제와 가야, 왜인들이 한해를 누비고 다니던 사람들을 장노(長老)라고 했다.
그들이 강화도(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와 제주도(有一國,純女無男)를 찾았다. 한전에는 “靣, 面”자가 같은 글자라 했지만 진수는 두 글자를 섞어 써서 혼란을 가져온다. 동옥저전에 남긴 없다 . 관구검 일행이 동옥저 땅에가서 들은 예기를 한전에 많이 인용 했다.
동이편은 부여를 “夫餘, 扶餘” 다른 글자로 쓰고 동이전의 첫쩨로 기록 했다. 산해경에 실린 부여지국(不與之國)을 간약하여 부여(不與)라고도 적었다. 이들은 산서성 해지연안에서 분수를 따라 적봉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있었다. 강희자전에서도 부여(不與)의 는 풀이를 했다 . 그 일대에 숙신씨(肅愼氏)와 다리가 길고 피부색이 흰 사람들(烏孫, 胡)이 같이 있었다. 부여(不與)를 후한서에서는 훈역하여 고 했다 . 이 문제는 뒤에 부여전에서 다루기로 한다.
진수는 편찬자가 알려지지 않은 위약(魏略)을 삼국지 여러 곳에 많이 인용했다. 동이전에는 삼한의 후손들이 뱃길로 한반도 서쪽 해안을 따라 교류하면서 보고 들은 세간에 흘러나온 예기를 위약(魏略)에 실린 내용과 결부시켜 한전과 왜인전에 실었다. 그러나 동이를 어떤 연유로 어떻게 9묶금으로 나누어 실었는 따로 새분된 주제와 같이 다루기로 한다.
끝, 다음에 계속.
April 27, 2017.
I will be out for 2 weeks.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