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건립 이전:
Kyung Sup Han 씨가 아직 소식이 없군요.
저가 예기하던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예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단군조선 건립 이전 까지의 선사시대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태사공은 우왕의 혈통을 밝혔지만 그의 조부 이전은 확인 할수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치수사업에 실패한 곤(鯀)이고 조부 전욱이 처음으로 달력을 만들어 이를 전욱력(顓頊歷)이라 했다. 곤(鯀)과 전욱(顓頊歷)은 생존 했던 인물로 본다 .
글자가 나타나기 전에도 사람들은 시를 읊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동북 아시아 사람들이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을 “새와 동물의 털가죽을 쓰고 한 다리”로 박자에 마추어 춤을 추었다. 북미 원주민의 축제와 같은 현상”을 그렸다 . 그들은 양자강 이북 전역에 흐터저 살았다. 모시를 읊던 사람들이 알타이 산맥 동쪽 동북아시아 전역에 퍼저 살았다. 목야전쟁터(坶野/牧野之戰)가 그 뜻을 지니고,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 한 뒤에는, 그 지역에 천여개가 넘는 마을 국가를 봉지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나라 중반기 약 기원전 1000년 경에 서주의 선조가 되는 공유(公劉) 의 후손이 단군조선 의 핵심부에 들어와 고조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황하 서 쪽 “풍요 로운 마을 (豊, 酆)을 수도로 나라를 새우고” 그들의 도움으로 함곡관 동쪽의 상(商, 殷)나라를 정복 했다 . 상나라를 정벌한 신흥 세력은 옛적 친구를 배반 했다. 고조선의 수도를 지키고 있던 백이 숙제를 몰아 내고 “지도자가 살던 마을이란 뜻”의 호(鄗, 䧚)를 점령하여 서주의 수도로 사용 했다. 호(鄗) 라는 글자도 호(鎬)라 바꾸었다. 백이 숙제의 애달푼 사연은 잘 알려져 있지만, 서주 집권층이 단군조선의 옛 서울 평양을 빼았었다는 사실을 한국 사학자들은 모르고 있다. 이를 증명 할수 있는 사료가 여러 곳, 특히 시경에 많이 숨어 있다.
시간 (斯干) 이라는 뜻은 “쉬애한xiè hàn; 解汗, 즉公”을 가차 전주한 글자로 신(神)과 같은 존제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 죽서기년 재신(竹書紀年 帝辛)조를 보면 문왕(文王 西伯昌)의 아들 희발이 단공 (公)이 살던 안읍(安邑, 燕)에서 난을 피(辟廱)했고, 그 당시 사이 좋게 지대던 시절를 그린 시문이 앞에 말한 시간 (斯干) 과 대아 영대(靈臺)라 본다. 이 때 다른 여러 제후들과 같이 백이 숙제도 문왕의 정책에 동조 했다 . 무왕의 아들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로 전공을 새운 단공(公)을 당숙 우 (唐叔虞)라 불렀다. 그러나 뒤에는, 소공 석(召公奭)을 봉했다는 지역의 군사연(燕師)를 이끌고 시간 (斯干)의 궁에 친입 하여 항복을 받아 한후(韓侯)로 임명 했다. 이 상황이 일주서(逸周書)에 ‘수도를 옛 하우씨가 살던 곳 (夏之居)으로 옮기려는 계획에 실려 있다 . 시대와 장소 그리고 사건의 전개를 보면, 숙단(叔旦)은 백이 숙제와 직결 되는 사람이다. 그가 성왕 앞에서 울며 하소연 했다. 죽서기년 성왕 (竹書紀年 成王) 7년 부터 13년 까지의 기록은 해지 연안에 살던 사람들을 몰아 냈던 기록이다 . 이 성왕의 잘못을 뉘우치는 노래가 시경 소아에 실린 하인사 (詩經 小雅 何人斯)라 본다. 주 무왕을 도와 혁혁한 공을 새웠던 서이( 西夷) 들이 무왕의 아들에게 수모를 당한 서글픈 노래가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시경 국풍 이외에도 여러 사서에 실려 있다 . 후세에는 성왕의 이 불미스러운 행적을 은폐하려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당숙 우 (唐叔虞)라는 사람을 유가(儒家) 경전이 아닌 경전에는 숙단 (叔旦)이라고 기록 했다. 문맥을 보면, 주공 단 (旦)이 아니라 무왕과 단(旦)은 의형제 간이 였다 하여 아저씨 단(叔旦)이라 불렀다. 이렇게 순리적으로 풀이 해 보면 숙단(叔旦)이 백이 숙제의 아버지 시간 (斯干) 즉 신공(公)이였다. 이 신(神)이란 뜻이 있는 글자가 단(旦)이 당 (唐, 當, 擔, 湯) 으로 또 이 해 뜨는 이른 새벽을를 가차전주한 글자가 밝다 훤하다는 환(桓)자로 바뀌어 기록 되였다 . 백이 숙제의 사당이 수양산(首陽山) 에 있었다는 고사는 알려저 있지만, 그 산이 산서성 해지 연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필자는 논어주소와 수경주에 실린 내용을 종합하여 시경 당풍 채령 (詩經 唐風 采苓)에서 확인 했다. 산서성 해지 (解池) 연안에 있는 산이였다 . 해지의 동북 연안에 있던 평양 (平陽, 平壤)을 호(鄗), 살기 좋은 마을 이라 하여 “안읍 (安邑), 은자의 고을 유주 (幽州) 또는 연(燕)라 했다. 이 이름이 수양산과 같이 동쪽으로 밀려와 북경 유역에 나타 났다. 예기(禮記)에 실린 연거(燕居)는 “연이란 마을에 살때”란 뜻이다 .
서주는 이렇게 옛 고조선 땅에 들어와 자리 잡고 살면서 그 곳 원주민 들의 도움으로 숙적 상나라를 멸망 시키고 난 뒤에는 옛 친구를 배반 하여 원망을 샀고, 계속 그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이러한 국내 우환을 천신께 사죄 하려고 5 대 임금 목왕이 신화의 발생지 곤륜구 (昆崙丘)를 찾아가 환운천왕 신전에 분향을 하고 돌아 왔다 . 그러나 여민 (黎民) 여융(驪戎) 또는 개적 이라 부르던 원주민의 반항은 심하여 선왕의 아버지 여왕(厲王)이 매부가 사는 마을로 도망가 그 곳에서 죽었다. 그 곳이 분수 가에 있던 궐부(蹶父)의 영역이다. 이 지역이 모두 비하 하여 돼지들이라 부르던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중국 문헌에 나오는 삼시도하 (三豕渡河 ) 또는 해시지와 (亥豕之譌) 라 하는 우화의 출처다. 이 ‘돼지를 뜻 하는 “해(亥) 시(豕) 하던 글자”가 같은 사물의 이름’을 뜻 하니까, 밝은 빛을 내는 물체를 ‘해(sun, 太陽) 또는 시 (xie, xia)라 발음 했다’고 본다.
선왕이 한후를 초청하여 정략 결혼을 시켰다 . 정략 결혼은 성공 했다. 서주의 위상을 다시 새워 수도 호(鎬)경에 까지 창궐 했던 혐융 (戎狄)의 한 분파인 개적 (蓋狄) 를 정벌 했다. 시문에 나타난 대원 (大原)은 오늘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유역 이라 본다 . 그의 아들은 다시 호경에 살던 원주민의 폭동에 살해 당하고 서주는 함곡관을 너머 동쪽으로 피해 왔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 할때 까지의 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221)가 시작 되여 550년이라는 긴 전쟁속에서 시달렸다. 중원에 살던 사람들은 난을 피하여 흔히들 동호라고 부르던 고조선 땅으로 피란을 갔다. 고조선 땅에 황금시대가 이루어 졌다 . 사서에 찾은 이러한 기록, 시경에 나오는 시문 설명, 그리고 그와 관계 되는 글자들을 풀어(解字) 보면, 중원 세력의 영역과 접하고 있던 고조선의 경계를 그려 볼수 있다. 그러나 국경을 논하기 전에 한가지 유의 할 점이 있다. 당시의 사회 상을 새겨 풀이 해야 한다. 두 정치 세력의 경계가 오늘과 같은 국경이 아니 였다.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는 다른 마을을 자유로이 지나 다닐수 있었다 . 이에 관한 설명은 제 환공이 기원전 664년경에 고죽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에도 나타난다.
이렇게 먼 시각에서 선사시대를 살펴 보면, 단군조선을 이룩한 사람들은 산서성 서남쪽 관중분지 해지 연안에서 주로 분수를 따라 동북쪽 사람들과 교류가 많았다. 그 사연을 목천자전과 시경 기부(祈父)에 기록 “기부, 나는 왕의 친위병 지도자로, (북쪽으로는)동호의 영역을 돌며 갖은 고생 다시키고, (서쪽) 모해 (말갈)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胡轉予于恤、靡所底止”는 시귀가 입증 한다.
산서성 북쪽에 치우천왕이 황제와 싸웠다는 탁록이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옛적에 산서성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신화, 전설”에 따라 서쪽을 여행하고온 기록이을 근거로 쓴소설이 “목천자전”이다.
옛 중국기록이 과장 확되 도여 기술되였다는 기록은 강희자전, 안씨가훈 서증(顔氏家訓 書證) 또는 논형 서허(論衡)편과 같은 몇몇 유가 서적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논형에는 “순 우가 멀리 지방을 여행하다 그곳에서 죽었다 하나 다 허황된 예기다. 실로는 요순우 시절에 홍수를 완전히다스리지 못했다. 순과 우가(황하문명 발생지, 구주)를 분담하여 순이의 남부, 우가 동부에서 치수 사업을 했다. 우가 회계(會稽)에서 죽었다. 요를 기주 숭산에 묻었다” 라 했다 . 당연 하다. 황하문명 발생지인 구주 안에 요순우가 모두 묻혔다.
“높다. 존중하다. 모으다. 차다”는 뜻이 있는 숭산(崇山)이 구주 영역에 있었어야 한다. 그렇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 숭산(崇山)을 이리 저리 돌려 신기루 같이 만들어 그 본 고장을 알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선사시대의 전쟁을 필자가 가상 인물 강박사 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
이: 전쟁 기록에는 지명과 인명이 많이 나옵니다. 북쪽에 살던 사람들은 남긴 기록이 없어 중국 사람들이 쓴 “북쪽 사람들과의 전쟁 기록”을 통해, 한국 상고사를 살펴 보기로 합시다. 서안 분지가 중화문명의 발생지라 합니다. 태고적에는 전쟁의 원인이 생활 필수품의 수요공급과 직결 되였다고 봅다. 그 곳에 있는 해지 연안에서 특히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또 “한원에서 나는 소금으로 돈을 벌었다, 숙신이 살던 만주지역에서는 소금이 나지 않는다”는 하는 기록을 보면 생활 필수품인 소금이 나는 지역에서 전쟁이 많았다고 봅다. 지리지형을 보면, 돈황에서 황하 북쪽 구비 (오르도스루프 Ordos Loop)를 따라 동쪽으로 펼처진 방대한 초원에는 소금의 공급처인 염호(Salt Lake)가 여기 저기 몇 곳에 있습니다. 이러한 염호가 대흥안령 서쪽 시린골 초원 (Xilin Gol Grassland 锡林郭勒草原)을 바탕으로 관중 분지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이룰수 있는 요소였다고 봅다. 이 일대에서 홍산문화가 발생 하였고, 여기서 대흥안령을 너머 만주 평원에 이르러 찾은 소금의 공급처는 발해만이 됩니다. 이 두 문화권은 같은 유목 생활을 하던 부족이 이룩 하였으나, 중원의 영향권 밖이라 선진시대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내몽고와 만주에서 나타나는 유적은 돈황일대에서 번창 했던 문화와 같이 관중분지에서 나타난 황하문명 못지 않게 오래 되였다고 봅니다.
강: 그렇겠지요. 중국역사를 쓰면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역을 거론할 필요가 없지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먼 조상이 지나온 경로라고 보는 지역에는 우리가 지금도 쓰는 어휘가 보입니다. 내몽고에 있는 시린골이 한 예라 봅니다. 앞에서 이 박사는 어순도 같다는 증거를 보여드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견 입니다.
이: 네 옳습니다. 우리 언어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하는 의문도 옛 기록에서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상서 (尙書)와 춘추에는 나오지 않으나, 사기를 비롯한 다른 사서에는 삼황오제 (三皇五帝)가 중국역사의 시작이라 합니다. 황제(黃帝)와 염제 (炎帝)가 판천 전쟁 (阪泉之野)에서 싸웠고 그 전쟁에 이긴 황제가 치우천왕을 맞아 싸운 곳이 탁록 (涿鹿 )이라 하지요? 요사(遼史)에서는 그들이 고조선 땅에서 나타 난 염제(炎帝) 의 후손이라 했습니다. 저는 영문본에서 치우천왕을 단군조선의 어느 단군 이였다고 밝혔습다. 치우 와 염제 (炎帝)는 같은 혈통이라 봅니다 .
이 두 전쟁터가 아주 멀리 떠러저 있었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탁록전(涿鹿之戰)은 기원 전 2500년 경에 오늘의 북경 서북서쪽, 산서성 동북 쪽이 되는 탁록현(涿鹿縣) 일대에서 싸웠다고 하니, 판천 (阪泉 )전쟁은 내육 지방에서 생활 필수품이 되는 소금의 출처를 놓고 싸웠다고 봅니다. 이는 서쪽 신강성이나 청해성(青海省)에 있는 커다란 염호가 아니라 작은 염호 즉 해지 (解池, Xiechi) 연안에서 이 전쟁이 있었다고 봅니다. 시경 판 (詩經 大雅 板)이 판천(阪泉)전쟁터였다고 봅니다.
강: 네. 글안을 새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고조선의 후예입니다. 황제와 싸운 염제와 치우천왕은 핏줄이 같은 부족이였다고 봅니다. 앞에서 조자법을 다룰 때 그 해(解)자가 “해, 합,계,하” 하는 글자와 같은 발음이였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우천왕이 우리의 선조 였다는 전설은 이해 하고 있지만 염제(炎帝) 농신(農神)가 우리와 핏줄이 같다는 점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신라 시대부터 신농씨과 후직씨(后稷氏)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네. 옳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중국 몽고 한국사람이 다 비슷하지만, 중국 기록을 보면 우리는 황제을 조상으로 삼는 부족과는 다른 핏줄입니다.
옛 기록을 살펴 보니 탁록전은 지도권에 반대 하던 민중 봉기 였습니다.
사마천은 오제 본기에서 “치우가 새로운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벌했다” 했습니다. 벌했다는 뜻을 “치우천왕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서 이겼다”는 표현이라고 저는 풀이 했는데, 여씨 춘추에서는 작병 (作兵)이란 말을 ‘주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황제를 이겼다’고 풀이 했습니다. 이 전쟁을 “구리지난; 九黎之亂”이라 부르기도 하고 치우 천왕을 “구리지군; 九黎之君” 또는 “구리치우; 九黎蚩尤”라 하지 않아요? 구리(九黎)는 여민 (黎民)의 여러 부족이란 뜻입니다. 그 들을 그계 (其械)라 했습니다. 형틀 계 (械:xiè jiè/시애) 란 글자는 “契, 解”의 동음이자 입니다. 탕병(蕩兵)이란 편명을 용병이라 하니 그 뜻이 뚜렸합니다. “온 천하 사람들이 하나로 뭉쳤다,” ‘옛부터 현명한 왕은 의로운 병사가 있어 그들은 나태하지 않았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 네, 전설과 미신을 그리 믿지 않았던 공자 님도 치우(尤)는 실존 인물이라 믿었다고 봅니다. 하여 치우의 반항는 “부자지간 또는 군신지간에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합당한 청원이였다”고 공자가어에 실려 있습니다 .
이: 이 자연스러운 합당한 청원이 거절 당하자 단군조선 사람들 (械, 契, 解)이 하나 같이 뭉쳐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열심히 싸웠었다는 뜻입니다. 탕(蕩)자는 탕(湯, 暘)자와 같다 하니, 탕곡 (湯/暘谷)에 있는 모든 병사들 이란 뜻입니다. 치우를 쫓겨가는 (돼지의) 제왕(逐帝)이라 했고 전쟁터 이름에도 돼지란 뜻이 있습니다. 앞장에서 예기 했던 요동 돼지 일화의 발생지에 살던 사람들과 같은 종족이 황제와 싸웠다는 뜻입니다.
탁록전에는 환웅천왕(桓雄天王)이 나라를 새울 때 같이 일했다는 풍백 우사 운사 (將風伯雨師雲師)하는 이름이 나옵니다. 사기 오제 본기에 실린 이 일화를 분석해 보면, 치우가 인품이 좋아 지도자가 되였는데, 황제가 잔수를 써가며 이간시켜 치우 가 다스리던 부족이 분산되여 탁록전에서 실패 했습니다.
강: 동한 서간(東漢 徐幹著) 이 편찬한 중론(中論)에서는 구리의 란을 한국 김씨(金氏)의 시조로 알려진 소호(少皞, 少昊) 김천씨와 연결시켜 설명 했습니다. 당 (唐, 群書治要, 藝文類聚) 또 북송(北宋)시대에 편찬된 태평어람 (太平御覽) 에서는 이 전쟁터를 탁록과 음록(淫鹿)이란 두 곳에서 아니면 넓은 지역에서 싸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소호 김천씨의 뒤를 이은 전욱고양씨 (顓頊高陽氏)가 구리의 란을 평정 했다고 합니다. 치우가 죽은 이후 약 3대 동안 여민 (黎民)의 저항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시경 운한(詩經 雲漢)에는 서주 (西周)의 백성을 여민 (黎民)이라 했습니다. 그 때는 구리 (九黎)와 삼묘(三苗)가 같은 지역에 있었습니다. 구리 (九黎)가 구리 (九夷)로, 리(黎)를 려융(驪戎) 이라 했고, 려융이 구려(句驪 )로 바뀌었다가 고구려 (高句麗)로 되였다고 합니다. 구려(駒麗) 부여 (扶餘)라는 부족 이 상나라 말기에는 산동 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탁록에서 중원으로 또 만주로 퍼저 나갔다는 증거입니다.
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이 기원전 단군조선 건국 이전에 단군이 다스리던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청나라 건륭황제 (乾隆)시절에 편찬된 사고전서 조선사략 (欽定四庫全書 朝鮮史畧)에 실려 있습니다 .
삼국유사 단군조선의 일화를 실으면서; ‘인용된 고기 내용의 기록이 미약하고 난으로 분실 되였으나, 시조 단군 (檀君)이 요(堯) 임금과 나란히 나라를 새웠다. 상무정 (商武丁, 기원전 1250-1192년) 8년에 신이 되였는데 그때 나이 4018세였다. 일연스님이 인용 했다는 위서 (魏書)란 말은 없고, 단군을 예군 (禮君) 이라했고,
이 내용이 이조시대 역사책으로 씌이던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고기, 태백 하는 글자도 다르고, 고기(古紀云)에 그렇게 실렸다’ 하는 내용입니다. 중국사람들이 1779년에 본 고기는 계연수가 1911년에 환단고기 (桓檀古記) 를 편찬 할때 인용 했다는 “삼성기 三聖紀,단군세기 檀君世紀, 북부여기 北夫餘紀, 태백일사 (太白逸史)”와는 다른 사료였다고 봅니다. 무정과 부열(Buyuel 傅說)이란 이름이 조선의 기원과 연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첫 영문본에서 부여(扶餘)의 어원이 부열(傅說)이란 이름에서 나왔다고 추론 했습니다. 좀더 알아 보니 사마천은 ‘산서성 해지 연안에 살던 활을 잘 만들던 부유(浮游, fúyóu) 라는 부족 이름을 가차 전주 하여 부열(傅說, fùyuè)이라는 한 사람으로 기록’ 했습니다. 고사전(高士傳)에서는 ‘부유(浮游,) 허유 (許由), 요 임금, 기산(箕山)을 모두 해지(解池) 유역’과 연류시켰습니다. 사기와 한서에는 예군 (禮君) 즉 단군을 신군(神君), 전한기에는 그들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
언제나 북쪽이 문제였습니다. 양웅(揚雄;기원전 53- 기원후 18년)은 “북적 지역은 삼황 오제시절 부터 통제하지 못했고 신하가 된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
강: 그런 기록이 있어요? 처음 듣는 예기 입니다. 그렇다면, 예군 (禮君)이 기원전 5360년에 나라를 세웠다는 뜻입니다. 단군조선 건립 이전이라, 환국신시 (桓國神市) 시대의 지도자 들도 단군과 같은 기능을 했다는 뜻이 분명합니다.
이: 네. 그렇다고 봅니다. 제사장을 우리는 단군이라 불렀고, 중국기록에서는 최고 제사장 ( High Priest)을 예군이라 기록 했습니다. 앞에서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한 예기( 禮記 坊記)에 실렸고, 한서에는 왕망(王莽)이 전한의 황손녀를 예군 (禮君)에 봉했다고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중국문헌에서 단군을 선인 (仙人)이라한 낱말을 그대로 인용 하였 듯이 유교 경전에 실린 예(禮)자를 인용하여 단군을 예(禮)자로 기록 했습니다 . 백제의 첫 도읍지 였던 위례성 (慰禮城)은 옛적에 어느 “예군(禮君, 昆侖道人, 壇君)이 살던 곳”이란 뜻으로 심양에서 대련에 이르는 요동 반도 서남쪽에 있었아야 합니다. 태백산 (太白山)이라는 글자가 눈으로 덥힌 제일 높은 산이란 뜻으로, 알타이 산맥에 있는 천산(天山, Tengri Mountan, Khan Tengri)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서 부터 천산북로를 따라 돈황을 지나 관중분지 하동에 있는 해지 북쪽연안에 자리를 잡고 단군조선을 선포 했습니다. 이를 증명할수 있는 증거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 . 잠부론지씨성(潛夫論志氏姓)편에 해지 (解池, 咸池, 鹹, 鹽池) 연안의 부족이 돈황(燉煌)에서 함곡관을 지나 동쪽으로 갔다는 사연이 잘 설명되여 있습니다. 이 통로를 신주(神州) 또는 옹주 (雍州)라했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해단 (hé dàn,盍旦) 또는 모해(Mòhé, 靺鞨) 즉 말갈”이라 했습니다. 이곳을 감숙성 (甘肅省)이라 부르니, 숙(肅)자는 숙신 (肅愼)씨란 글자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서왕무를 서왕모라 풀이하듯 막고굴을 마고 할미가 살던 굴이라 잘목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춘추좌전에 “초휴이예; 招攜以禮”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문구는 “휴(携, xī xí xié , 해/희 와 같은 사음 자로,하느님 같이 다들 모시는 사람)는 예를 가추어 불러 모셔 오고”란 뜻인데 이를 잘못 풀이 하고 있습니다. 같은 문구가 여러 문헌에 나오는데, 한서와 포박자 (抱朴子)에 실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글자 휴(携)는 해지 연안에 있던 고조선의 한 분파였던 서리(西夷)지도자 그가 살던 곳을 뜻합니다.
강: 아무도 그렇게 풀이 하신 분이 없습니다.
이: 더 놀라눈 사실은 해지연안에 살던 부족이 신라로 왔다는 근거를 시경에서 찾았습니다. 시경 나(詩經 那)에 나오는 글자가 우륵 (于勒)과 가야금 ( 伽倻琴) 일화에도 나오고, 김유신이 보검 (携寶劒)을 휘대 하고 라 풀이 하난 옛 적 단군왕검 시대부터 전해오던 비법에 따라 만든 보검 이란 뜻이라봅니다 .
강: 네? 무어라 말씀 드릴수가 없군요. 놀랍기만 합니다. 아무도 김유신이 쓰던 보검이 단군조선 시대와 연관이 있는 “신비한 보검”이라고 풀이한 사람은 없습니다. 허나 강희자전에는 그와 비슷한 글자들 “携㩗擕 을 비 (非)다” 라고 했습니다. 비 (非)가 “빛, 햇살, 또는 햇빛”의 사음자라는 이 박사님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 시경에는 이 글자가 “기(猗,奇,箕)자와 같이 해지 연안을 읊은 시문” 여러 곳에 보입니다.
이: 아시는 바와 같이 순 임금에 관한 기록을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풀이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순 임금은 여러 사람에게 선양하려 했다가 끝에는 “대휴자이 입어해; 戴攜子以入於海하여,종신불반야;終身不反也”라 하는 문구가 도가 경전인 장자(莊子)와 고사전(高士傳)에 실려 있습니다 . 저는 이 문구는 순 임금이 스스로 지도자로서의 덕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여 부인을 대리고 해지 북쪽 연안에 있던 옛 단군왕검의 수도 평양 (平壤) 즉 오늘의 운성시에 가서 그 곳의 지도자 (攜子)를 모시고 (戴)살다 죽었지, 돌아 오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 합니다. 이를 중국사서에서는 순 임금이 대우(大禹)에게 선양 했다고 합니다.
강: 네? 순임금이 단군에게 항복 했다는 예기십니까?
이: 네. 좋게 말하면 선양 했습니다 . 그곳에 자리잡고 살던 지도자 휴자(攜子)가 치수 사업에 성고한 대우(大禹) 즉 왕검(王儉) 입니다. 순임금의 무덤이 여기 저기 여러 곳에 있다고 합니다. 혹은 물에 빠저 죽었다고도 하고 종적을 모른 다고 합니다. 바다 해(海)를 해지 (解池) 라고 풀이 하시니 순임금이 그 곳에서 살다 죽었다는 기록과 일치 합니다.
강: 음. 이 박사님이 인용한 같은 사료를 잘못 풀이하여 그런 낭설이 나왔군요.
우 임금이 우리 단군조선의 단군왕검이다. 그러니 상서 대우모 (尚書 大禹謨) 란 뜻은 ‘소우는 소리로 기록되던 부족의 태대각간’이란 뜻이 아닙니까? 참으로 놀라운 해석이십니다.
단국왕검의 수도 평양은 산서성 서남쪽에 있었지만, 통치 영역은 “선왕이 한후에게 주었다는 끝이 없는 넓은 땅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탁록전에서 싸운 치우천왕의 후손이 중국서남쪽에 가 있고, 치우천왕을 비롯한 선사 시대 인물들의 무덤이 산동성에 있다하니,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 牧, 謨”라고 기록 되였던 사람들이 중원 전역에 살았다고 본다.
사마천은 북쪽에서 중원을 괴롭히던 “흉노가 하후씨(夏后氏)의 후손이라 했고, 그들의 일부는 남쪽 세력(중국)에 동화 되였다”고 했다. 여러 사서에는 하후씨 (夏后氏)의 후손이 만주와 산동성 일대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 옛적에 유가에서는 흉노를 천시하고 중국의 걱정거리라 하여 자기들과는 다른 족속들이라 하더니, 근래에“하상주단대공정 (夏商周斷代工程)에 이어 동북공정을 토대로 그들이 살던 지역을 중국 영역이 였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역사 인시론이란 입자에서 보면, 뚜렸하다.
옛 부터 한국에서는 단군조선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황실위주로 결정한 신기루 같은 한자풀이에 휘말려, 그 당시 영토가 어디였나를 놓고 시시비비가 많았다. 한국은 계속 인저하려 했지만 중국 사서풀이라는 수렁이에 빠져 해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요 근래에 속칭 “재야 사학가들이 주동”이 되여 수렁이에서 빠져 나오겠다고 몸부림 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 두 나라 기록에 뚜렸하게 적혀있는 단군조선을 중국사람들이 설치해 놓은 덧에 걸려 “단군이 실존 인물에 붙여 쓰던 존칭이라는 사실을 부정” 하고, 그에 관해 “구전 되여 오던 예기는 신화니까 역사가 아니다”하는 주장은 논란의 기본을 부정 하는 꼴이다.
October 15, 2016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