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단부(古公亶父)의 혈통.
주나라(周族)의 시조는 산해경과 시경에도 나오는 후직 (后穫, 后稷)이라 한다. 시경에 나오는 공유 (公劉)는 후직의 증손 이고, 함곡관 동쪽 상나라 땅에서 들어온 고공단부(古公亶父, 古公亶甫)가 후직의 후손이라 한다. 공유 (公劉)란 공(公)을 죽이고 이긴 사람 (劉)이란 뜻이 있다. 백익을 죽인 제개(帝啟)의 후손이라 본다. 홍수 피해를 받던 지역에 살았다. 공손씨(公孫氏)란 살인자 공유 (公劉)의 후손 이란 뜻이다. 하여 공손씨를 황제의 후손이라 한다 . 사마천이 만들은 황제란 직책에는 백익의 업적을 많이 실려었다.
맹자는 詩가 사라진 후에 春秋가 나타났다고 했다. 시경의 내용을 보면 서주 시대의 역사가 주류를 이룬다. 특히 시경 문왕지습( 詩經 大雅 文王之什)는 서주의 건국을 읊은 시문이다 . 시경에는 단부 공손 (亶父. 公孫)하는 글자가 보이고, 공유 ( 詩經 大雅 生民之什 公劉)란 편명이 있다. 모시정의에는 공유(公劉)를 자세히 설명했다. 시설에는공유(公劉)를 소공의 작품이라 했다.설원 또한 전통적 유가의 가치관에 따라 설명 했다 . 모시서를 비롯한 유교경전에서는 서주의 건국을 천명사상으로 풀이 하여 천자란 이름을 도용 하여 제정일치의 총 책임자로 격상 시켰다. 공유 (公劉)란 글자가 “산해경, 죽서기년,여씨춘추 등 전통적 유교 서적 이외의 고전(外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문왕지습에는 서주 창립에 관한 두편의 시문에 실린 대용이 앞뒤가 틀린다 .
주공의 작품이라는 면(文王之什‧緜)에는 고공단부가 집이 없서 굴속에서 살았다 (古公亶父,陶復陶宂,未有家室)니 시대상이 다르다. 같은 시대 사람 소공의 작품이라는 공유 (公劉)에는 고공단부의 선조가 같은 장소에 큰 관저 (篤公劉、
于豳斯館)를 지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위수를 건너 다녔다(涉渭為亂)고 했다.
이렇게 서주 창립에 관한 내용이 사서와 시경, 시경을 다룬 모시정의에 모두 다르게 기록었다
순자(기원전 316년? ~ 기원전 237년?)와 맹자(孟子, Mencius;기원전 372년? ~기원전 289년?)는 60년 차이로 주희 성리학을 유교의 근간으로 하던 시절에는 “성악성설의 창시자” 라는 이름으로 냉대 당했었다. 순자는 제 양왕(齊襄王;?-BC 265년)시 제일 나이가 많은 학자였고, 진시황 을 섬겼던 법가로 알려진 이사(李斯) 와 한비자(韓非子)의 스승이다 . 모시(毛詩)란 이른의 유래가 되는 모장 모형 숙질이 순자의 문하생이였다는 설도 있다. 그의 저서 순자 (荀子)에는 어느 고전 보다 시경을 많이 인용 했다. 순자에 이런 말이 있다 :
“문왕은 넷을 죽이고, 무왕은 둘, 주공이 죽이는 일을 끝내서 성왕 강왕 때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었다”는 자신의 이론을 밝혔지만 맹자는 은미하게 위 혜왕(魏 惠王, 梁惠王)을 빌려 설명 했다.
양 혜왕(梁 惠王)을 장자에는 문혜군(文惠君, 재위: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70년)으로 그가 다른 제후들과 같이 칭호를 왕으로 바꾸어 위 혜왕(魏 惠王,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34년)이 되었다. 혜성왕(惠成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맹자 여러편에 실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우왕의 치수사업에서 서주의 초기까지를 뚜렷하게 정리 할수 있다 :
<당요시절에 물이 거꾸로 흘러 온 나라가 범람 했다 (當堯之時,水逆行,氾濫於中國). 백익을 죽인 단주(嗣子丹朱)의 치수 방법이 대우 보다 우수 했다 (丹之治水也愈於禹). 거꾸로 흐르는 물을 강수, 강수가 즉 홍수다(水逆行謂之洚水,洚水者,洪水也). 상서 우공편에 북으로 강수를지나면 대륙에 이른다(書•禹貢:北過降水,至于大陸). 대륙은 옛적 제후국 진이라 하던 선서성(晉之大陸)을 뜻했다. 문왕이 기산 밑에 살았다(文王之治岐也). 탕의 땅은 70리 문왕의 영역은 100리였다 (湯以七十里,文王以百里). 신이 듣기로는 70리를 다스렸다는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탕이다 미문이천리우인자야 “孟子對曰:「臣聞七十里為政於天下者,湯是也。未聞以千里畏人者也」”。
시경 문왕유성 (詩經 文王之什 文王有聲)에 우리 서울 호경(鎬京)의 동서남북 어느 누구도 복종치 않는 자가 없었다.>
시문에 나오는 호경(鎬京)은 무왕이 자리잡은 곳이다 . 기자가 기원전 1063년에 돌아와 이곳에 있던 무왕을 만나 홍범구주를 논했다. 우인(畏人)은 산해경에 나온 단군의 별칭 우인애인(偎人愛人)에서 사람 인변을 뺀 글자라본다.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맹자에는 주 무왕의 선조가 함독관을 지나 이곳으로 도망와 정착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 했다 : 공유는 제물을 좋아 했다. 시경 공유편의 문구를 인용 했다 .
대왕은 여자를 좋아 해서 오랑캐 여자를 사랑 했다(愛厥妃) 하여 시문에 고공단부(古公亶甫) 가 나오는 무왕지습 면(詩經 文王之什 緜)을 인용 했다 . 왕공대인을 죽인 사람이란 뜻이 있는 공유를 돈독한 공유(篤公劉)라고 묘사 했다. 옛적에 훈육(獯鬻 Xūnyù/쉰위: 匈奴於夏朝時的名稱)이라고 기록한 글자는 후에 선우(鮮于, 單于, 鮮虞)라고 부른 직책의 사음자다. 각종 사서에는 고공단부가 유목민(狄人, 北狄)이 사는 곳(단군조선 탄생지)에 들어와 훈육을 모셨다(大王事獯鬻)고 했다 .맹자의 설명은 과장이다.
선우(鮮于, 單于, 鮮虞)란 글자는<제단 위에 선 사람>이란 뜻으로 조선(朝鮮)의 지도자를 부르던 이름이다. 초씨역림(焦氏易林)에는 흉노의 선조가 지도(산해경의 초본)를 들고 북쪽으로 도망가서 큰 개를 기르는 오손의 한 분파인 동호 (北奔犬胡, 左衽為長)의 선우(單于)가 되었다고 했다 .
August 13th, 2018.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