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2
高麗本孤竹國
지난 번에는 처음으로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을 간략히 설명 했습니다. 장구한 시대에 걸처 아시아전역에 흐터져 있었던 예맥(濊貊, 斯)족의 역사에 관한 총괄적 개론(Introduction; Opening remark) 이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40평생을 의과 대학에서 보내면서 뼈저리게 느껴 재야 사학가로서 변신 하여 잃었던 한국 상고사를 되찾아 가는 경과 보고 “Research in Progress” 라 새로운 학설 입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없습니다. 생을 즐겨야 할 팔순 나이에 참으로 “외로운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많은 재야 사학가들이 활동 하지만 필자는 아직 벗을 찾지 못했습니다. 모두 나름대로 다른 패이지를 읽고 있기 때문이라 봅니다.
다시 한번 경종을 울립니다. 한국상고사는 상형글자 안에 숨어 있다. 옛적 노래를 적은 시경 (詩經)에, 각종 중국문헌 속에 숨어 있다고!
제가 발표한 글을 중국사람들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서 위키패디아(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올린 내용과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앞으로KAUPA News Letters 를 통하여 “잃었던 역사 되찾기” 경과 보고 를 하렵니다. 교직에 계시는 여러분들의 아낌 없는 비판을 바랍니다. 인공 지능 시설(AI)이 고전을 풀이하는 훈고학의 선두에 스게 되리라 봅니다. 漢學 은 물론,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 관여하신 분들의 도움이 필요 합니다.
I 高麗本孤竹國
일연 스님이 남긴 고려본 고죽국(高麗本孤竹國)이란 문구를 좀더 깊히 살펴 보면 이는 고조선의 수도 이전 (首都移轉), 이말 (始末)이다. 중국 에서는 고죽국이 북쪽에 남아 있던 상나라의 잔여 세력이라고 했었다. 이를 하북성 노룡현 (盧龍塞)에 있었다고 설명 했다. 한국에서는 중국사람들이 풀이한 동북아 역사를 그대로 받아 드렸다.
1 고죽군(孤竹君)의 첫 출원지와 시대: 백이 숙제의 고사가 실린 사기 열전 첫머리 백이 열전에 실렸다. 사마천은 그때 까지 전해 오던 가장 오랫적 기록을 읽을수 있었다고 했다.
살펴보면 중국고전에는 [禹本紀.懷舊志. 費氏經]란 책이 있었다. 우본기(禹本紀)가 급총죽간에서 확인 되었다. 그에 실린 환웅천왕을 황제 헌원으로 둔갑 시켜 중국사람들의 시조라고 설명 했다. 사마천은 자료 수집을 하려고 북쪽에 올라가서 그 곳 노인들로 부터 “기자가 한 예기”를 들었다. 산서성 역사 진세가 (晉世家) 에 실렸다. 그 곳을 “기산 箕山”이라 밝혔다. 그곳에는 “요임금이 통치권을 이양하려 했으나 그를 사양 했다는 허유(許由)의 무덤이 있을 것이란 예기”를 들었다고 했다. 또한 공자가 백이 숙제에 관해서는 자세히 기록 했지만, 사마천이 일고 전해 들은 옛 예기는 공자가 편술한 고전에 실리지 않아 의심 스러워 했다. 동양역사의 초석이 되는 “시 서 경” 에는 옛부터 전해오던 예기가 많이 누락 되었다. 즉 “SMa-In 이 많았다”는 뜻이다. 당연 하다. 사마천이 읽어 본 옛 기록은 유교 사상이 정립 되기 전에 편술 되어 유교 가치관이 반영 되지 않았다.
그 뚜렸한 증거가 왕검과 조선(古朝鮮,王儉朝鮮)에 관한 예기다.
2 상나라와 고조선의 관계: 상서와 사기에는 상나라의 건국에서 부터 고난과 종말을 기록했다.[1] 상나라 시조는 치수 사업에 관여 했다는 글 개 또는 설 (契; 音薛)이라고 읽는 글자로 기록 했다. 조선에 갔다는 기자가 나오고 북쪽에서 천독 (天毒)이 괴롭혀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다. 후에 불암성에서 죄수로 일하는 현인을 찾아 상나라의 중흥을 이르켰다. 서쪽 오지에 좌천 되었던 서백창의 후손이 나라를 세우고 유목민이 가축을 방목 하는 들판 이란 뜻의 목야 (牧野) 에서 대승하여 상나라를 정벌 했다. 상나라는 산서성 항/상산 /숭산(恒/常) 계곡 (崇丘) 에서 나타나 동쪽으로 태행산맥을 넘어 하남성 (河南省) 안양시 안양 현(安陽縣) 북서 일대에서 멸망 했다. 상나라 유적이 은허(殷墟)에서 나왔다.상나라 말기의 세 현인 중 한 사람이 기자(箕子)다. 몇 차례에 걸쳐,기자(箕子)가 갔던 조선땅은 산서성이라고 논증 했다. 기자(箕子)가 갔다 돌아와 주 무왕을 만나 홍범구주를 설명 했다. 그가 돌아와 맥수가를 읊었고, 고향에 죽어 그의 무덤이 있다.
고조선 수도 평양(平壤)이 있던 곳이 황하 동쪽 하동 해지 연안에 있던 명조 (鳴條)다. 순임금은 모두 없신 여긴다는 지역이란 뜻이 있는, 제풍 (諸馮) 에서 출생하여 하를 등지고 (負夏) 떠나 해지 연안 명조(鳴條)에 가서 죽었다. 그를 동이(東夷)라고 했다. 상나라에서 귀양을 와 황하 서쪽 기산 밑 (岐周, 文王之治岐)에 자리 잡았던 서주 시조 서백창( 西伯昌 周文王)을 서이 (西夷) 라 한다. [2] 서백창( 西伯昌)은 고향 필영(畢郢), 즉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 북쪽에 돌아가 죽었다.
서주의 수도 풍호(豐鎬)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정했다. [3]
초씨역림에 기자가 갔다는 살기 좋은 곳이 조선이다. 고조선의 한 부족이 명조 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 흉노 땅으로 도망을 가서 선우가 되었다. [4] 해지 연안에서 황제가 처음으로 싸웠다. 마지막 전쟁터를 탁록전이라 한다. 탁록(涿鹿)이란 족쇄를 채운 돼지와 사슴 때를 상대로 싸운 전쟁이란 뜻이다. 고조선 세력을 북쪽으로 밀어 금미달 (今彌達) 지역으로 알려진 산서성 오대산 공원 서쪽 대현 (代縣)에 황제 사당을 세우고 그 북쪽 계곡에 천하 제일의 요새 안문(雁門)관을 세웠다.
황제가 싸운 곳이 왕검조선의 첫 수도 평양이고, 마지막으로 싸운 탁록을 금미달이라 했다. 가공 인물 황제는 2,000년 가까이 살았다. 아사달에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단군이 1908년(壽一千九百八歲)을 살았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환웅을 황제로 둔갑 시킨 뚜렸한 증거다.
유가에서 인정 할수 없는 혁명을 합리화한 최초의 학자가 맹자다. 백익의 직위를 찬탈한 사건을 그렇게 설명 했다. 서주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甫) 가 고조선 땅에 들어와 미인계 (愛厥妃)를 썼다는 기록이 맹자 양해왕 편에 있다. 이는 동쪽 (河東)을 정벌하여 그곳 지도자의 여자를 마음대로 했다 (東征, 綏厥士女)는 문구와 일치 한다.
원주민(厥:夏曰獯鬻殷曰鬼方周曰獫狁)의 아릿다운 여자를 사랑했다는 뜻이다. 주(周)족이 그런 나뿐짓을 했다는 기록을 남긴 맹자는 만장편에 [백익 밑에 있었던 우(益之相禹也)가 치수사업을 하던 중에 신임을 잃어 (禹而德衰) 정권이 바뀐 사건]을 합리화 했다. 우격이란 낱말이 생겼다.
사기에 (단군왕검. 동이부락 수령 )백익이 우의 아들 개에게 양위하고 살았다는 곳을 기산지양 이라 했다(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 같은 곳을 기산 주위란 뜻에 여러 글자 (箕山之陽; 陰. 下. 節. 東) 로 기록 했다. 기(箕) 자는 기자를 뜻한 글자다. 기산은 어느 분지 안에 있던 산이라 그 주위에 마을이 있었다. 문헌을 종합해 보면, 오늘의 산서성 임분시 (臨汾市, 古稱平陽)가 아사달이다. 그 후 수도를 북쪽으로 옮겼다. 오늘의 태원시가 오랫동안 수도로 사용 되었다. 그 곳이 한국 선우씨의 본향이라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라 한다. 그 곳에 기자가 갔던 조선이라 선우씨는 기자조선의 후예라 한다. 그후 춘추시대에 밀려 삭주시 (朔州市) 로 옮겼다. 걱정이 많은 조선의 지도자라 하여 선우(鮮虞) 라 했다. 진 삼분 이후 조 (趙)나라에 흡수 되었다. 잠시 독립 했다가 다시 연나라와 같이 진나라에 정복 되었다. 금미달 지역이 오대산 국립 공원 서쪽 대현(代顯) 일대다.
금미달 (今彌達) 들판에 호타하가 흐른다. 조나라에서 북쪽에 성을 쌓았다. 안문雁門)관 이라 이름한 시기는 전국시대가 분명하다. 초기 불교가 전국시대에 들어와,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마지막 단군을 미륵(彌勒)으로, 또는 안왕 (鴈王 鵝王)이라 했다.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을 도교경전에 자부선인으로 기록 했다. 황제(黃帝)가 동쪽의 청구(靑丘) 땅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는 자부선인을 만나 삼황내문 (三皇內文)을 받았다. 昔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현제 동북아에서 쓰는 상형 글자 기원을 창힐이 육서 원칙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조선 사람들이 그에 앞서 문자를 사용 했다는 증거다. 불경 기록에의 거루/가라선인(Khara; 佉盧. 佉樓仙人) 이 창힐 이전에 글자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급총죽간이 모두 검은 옷칠로 그려진 과두자(漆書皆科斗字)로 적힌 위나라 역사서 (蓋魏國之史書) 했다. 과두 자와 비슷한 글자를 남쪽 으로 도망 갔던 사람들이 사용 했다. 이를 백익의 글자를 따서 이문(彛文)이라 한다. 이괘명문에 실린 글자다.
고조선 창립 부터 전국시대 초기 까지도 조선이 산서성 태원 일대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 [5] 그후 더 북쪽으로 밀려 가서 오대산 서쪽 호타하 연안 대현(代縣) 북쪽 계곡에 정착 했다. 이를 배구전에 고려는 본 고죽국 (高麗本孤竹國)이라 했다. 금 해주(今海州)라고 붙인 글자는, 태백산 (太伯山)을 오늘의 묘향산을 금묘향산 (今妙香山) 이라 풀이 했듯이, 스님이 출처를 확인 하지 않고 임의로 붙인 문구라고 봅니다.
고려(高麗)는 고구려(高句麗)를 뜻했다. 옛부터(本) 고죽(孤竹)과 관련이 깊은 나라다. 또는 “그 지역에 있었다. 같은 지역에 있었다. 같은 뿌리” 라는 뜻이 라고 풀이 됩니다
고죽(孤竹) 군의 아들이 백이와 숙제다. 이름은 기록에 밝혀 지지 않았다 주 문왕(周 文王,기원전 1152년~1056년)으로 추존된 서백창 (西伯昌)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고죽(孤竹) 군의 두쩨 아들이 뒤를 이었다. [6] 그가 명조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 흉노 땅에 가서 선우가 되었다고 본다.
단군의 이름을 밝히지 못 했듯, 이들의 이름자도 밝히지 못했다.
서백창 (西伯昌)은 함곡관 동쪽 상나라 경기 지역에서 들어온 이방인이다. 그의 혈통을 거꾸로 풀이 하여 큰 아들 둘이 남쪽으로 내려가 오나라를 세우고, 셋째 아들이 서백창이다. 그가 상나라 말기의 관직에 있었다. 상나라와 같이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와 옛 구주땅에 자리 잡고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강성하여 상나라를 괴롭 혔다. 그곳에 서백 창을 보넸다. 그가 원주민를 학살 했다. 이를 상서에 서백 감려 (西伯戡黎)라 했다. 시경에는 유신 (維新)이라 했다. 고조선 발생지에 나타난 두번쩨 유신이다. 유신 (維新;slogan of restoration)이란 글자가 처음 상서 우서 윤정(胤征)에 실렸다. 단군왕검 백익을 살해 하고 원주민을 학살하고 하(夏) 나라를 세운 사연이 오자지가 (五子之歌)에 실렸다. 후에는 수문제가 유신 (維新)이란 정책을 쓰려 했다 실패 하여 글자를 바꾸어 계이유신(戒以惟新)이라 했다. 일본에서 받아드려 명치유신이, 100년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정책을 시행 하여 모두 성공 했다. 이를 새마을 운동이라 한다.
서백 창의 가혹한 배신 행위에 수모를 당한 사람이 옛 구주당 경기지역에 남아 살던 원주민 지도자 고죽군이다. 필자는 시경 사한(斯干)이 고죽군 이라고 추론 했다. 원주민을 학살하고 그를 찬미한 시문이 문왕지습 영대 (靈臺) 라고 본다. 성강지치 (成康之治)라고 찬미하는 성왕이 유언으로 남긴 문구가 상서 주서 고명 (顧命) 이다. 그 안에 “기우미류(既彌留)라, 즉 이미 백익의 후손 원주민(彌:益也)들이 기회를 노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문구가 있다. 죽서기년에 “왕수 연사 성한 왕석 한후명 王帥 燕師城韓. 王錫韓侯命” 원주민의 수도를 빼앗고 성왕이 연나라 사람들을 인솔 하고 강건너에 성을 쌓아 한후(韓侯) 란 직책을 주어 살게 했다. [7] 이곳이 동북 영역 뒤에는 북경에 자리 잡았던 제후국 연(燕)의 시발 점이다. 같은 곳에 한후(韓侯)가 다스려 한원 (韓原) 이라 한다. 봄바람에 연날아 가듯 그곳 에서 나타난 연(燕)자는 고조선의 수도를 등에 업고 동북으로 날아 왔다.
백이숙제 사당의 원산지는 서안시 동쪽 영제시포주진(永濟市蒲州鎭)에 있다. [8] 이 일대에서 주 무왕이 목야전(牧野之戰)에 참가하여 깃발을 들고 앞장 섯던 전우에게 선물로 만들어 준 기념품이 한 명문(利簋銘文)이 새겨진 청동 으로 만든 제기가 1976년에 발굴 되었다. 이를 이괘라 한다. [9] 그 명문 초두에는 무왕정상초 (珷征商隹)라 하고,전공보존이 (旜公寶尊彝) 라고 끝에 색인 되었다. 초(隹)자는 “아직 꼬리도 생기지 않은 햇병아리”란 뜻이 있다. 주 무왕이 단군왕검(壇君王儉) 백익(伯益)의 먼 후손에게 주었다. 햇님의 후손을 사음하여 만든 글자 필/비공(畢 公)으로 시경의 사간(斯干) 이다. 고죽군(孤竹君)은 단군왕검이 수도로 정했던 운성시 일대에 남아 있던 백익의 먼 후손을 뜻한 글자다. 그들이 중원 세력에 밀려 선조들이 내려 왔던 분수 연안을 따라 북으로 올라 가다 분파가 생겨 북 부여와 고구려의 선조에게 지도권을 넘겨주고 아사달에 돌아 와 산신이 되었다. 사군자에 필수로 등장하는 송죽, 두루미 학, 사슴 으로 전통 풍속도에 나타난다. 제문의 첫머리에 관용적으로 쓰는 유세차 (維歲次)란 어휘 또한 중원에 남아 있던 유목민의 선조를 상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증거라 본다. 같은 맥락에서 전승 축제의 상징으로 돼지(亥, 九黎) 머리가 쓰인다.
3 고조선 사람들이 쓴 언어: 사마천은 고조선 발생지 사람이다. 그의 증조 사마희 (司馬憙)가 중상국의 제상을 지냈다. 사마천의 아버지는 아래와 같은 유언을 했다. “意在斯乎!意在斯乎!小子何敢讓焉。(내)뜻이 사에 있었다 야 응. 사에 있었어 응. 소자가 어찌 감히 사양 하겠습니까? 사마씨는 그들의 선조와 고향에 관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사마천은 사료 수집을 하려 다녔다. 산서성 지역을 돌아 보며 그곳 노인들을 만나 그 지역에 전해오던 구전을 그지역 사람들을 말을 그대로 사기에 남겼다. 산서성 사람들이 쓰던 말은 한국어와 어순이 같았다.
1.진세가 (晉世家) 첫장 첫줄이 한국말 어순(Korean syntax)이다:
晉唐叔虞者,周武王子而成王弟。初,武王與叔虞母會時,夢天謂武王曰:「余命女生子,名虞,余與之唐。」及生子,文在其手曰「虞」,故遂因命之曰虞. 武王崩,成王立,唐有亂,周公誅滅唐。끝은 강조법 표현이다.
노 나라(魯國) 목숙(穆叔)이 기원전 549년에 진(晉)나라를 찾아 갔던 장소에서, 실권자 범선자(范宣子)가 예기 했던 제후국 진(晉)의 먼 선조 도당씨(陶唐氏)를 주성왕 때에 주공 (周公)이 죽였다. 살인자를 주공단 (周公旦) 또는 당숙(唐叔, 唐叔虞)이라 했다.
진(晉:進也, 㬜)자는 산위에 이미 아침 햇살이 비친 상황의 상형자다. 맹자에 “晉國,天下莫強焉”, 즉 그 곳에 있는 나라는 세계 최강국이다” 란 문구가 있다. 춘추와 사기에는 모두 진세가를 가장 길게 설명 했다. 그 지역에 기자가 갔다. 당나라 때에 운성시 태생 유종원(柳宗元)이 기자를 기리는 글을 세겨 놓은 비석(箕子碑)이 산서성에 있다. 산서성에 있던 고조선 영역을 공자가 살고 십다한 동이 (東夷)의 땅이라 했다.
2.산서성에서 기자 (箕子)에 관한 예기를 들었다. 그 대화에 기자가 말한 문구가 실려있다. 그문장 또한 한글 어순 이다.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曰『其後必當大矣』,晉庸可滅乎!」
같은 내용을 춘추좌전(春秋 僖公十五年)에는 “當”자를 삭제했다: 且吾聞唐叔之封也,箕子曰,其後必大,晉其庸可冀乎,하는 뜻이다.
“幼伯子者,周蘇氏 客也。冬常著單衣,盛暑著襦,形貌穢異 ”
이 문구를 한글 어순으로 풀면; “유백자는 주 소씨의 객이였다. 겨울에도 늘 걸친 것은 홋옷(單衣) 뿐이요, 한창 더울 때도 걸친 것은 짧은 팔 적삼어서 형모가 (그 곳에 살던 예맥)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하는 뜻이다. 옛적에 홍산문화 권에서 내려와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은 예맥 (濊貊, 斯)족이라 현제 한국어와 같은 어순의 언어를 썼다.
“著道畧論,注易,往往有高麗言。太原王濟好談,病老、莊”
백이 숙제 설화는 왕검조선 이후에 상나라 말기에 서주가 탄생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10] 이렇게 고죽군이 살던 시대와 장소는 명확 하다.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언어는 옛적에 만주지역 살던 사람들의 언어와 같았다.
언어가 달라 후세에 훈고학이란 동양 특유의 학술 분야가 나타났다.
백익을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무왕이 선물로 만든 이괘에 색여진 떳떳할 이(彝) 란 글자가 백익을 뜻했다. 이 (彜)자는 “彝”가 원조다. 산해경에는 이 두 글자가 없다. 이 글자의 음과 뜻을 이리저리 뒤바꾸어 여러 글자를 만들었다. 두손 (모아 빈다는?) 상형자 (廾)는 언제나 “羿, 弈, 弁”살렸다.
무왕이라고 풀이한 글자 “珷”는 중국사람들이 만든 어느 사전에도 실리지 않았다. 백익을 뜻한어떤 사연에서 쌀 미(米)자는 살려 두고, 명주실 사(糸) 자를 나눌 분(分)자로 바꾸었나는 알수가 없다. 명주 실의 상형이 들어 있는 이(彝)자를 이아(爾雅)에는 제기로 풀이 하고, 모든 법도의 상징으로 풀이 했다[11]. 이아를 만들 시절에 백익(彝)의 후손이 중원에 넓리 흐터져 살았다는 뜻이다. 오얏나무 이(李)자를 성씨로 했다.
상서와 시경에는 彝 로 실렸다.[12] 彜자는 상서대전, 사기색은등 주로 한대 이후 문헌에만 나온다.[13] 설문 해자에 산서성을 예성 (今變隸作) 이라고 했고, 오경문자 (五經文字:羿,隸省作羿)에서도 그렇게 밝혔다. 광운 (廣韻)과 묵자한고 (墨子閒詁) 에서는 이 글자 설명에 의문을 제시 했다. 설문해자에는 상서에 있다는 문구를 인용 했지만 글자가 다르다.[14]
동이 수령 백익을 살해 하고 그를 여러 글자와 별명을 붙여 기록 했다[15]. 상서 순전에 <여러 사람들이 추천하여 백익을 지도자로 만들었다>는 문구를 한서 백관전에는 글자를 은패 했다[16]. 숨겨진 글자 “𠍳”를 응소는백익(伯益)을 뜻한 상형자라고 밝혔다.
끝에 두 글자 “尊彜”를 “鼎彝”라고도 하여 조상을 섬기는 제사에 쓰는 귀한 물건으로 풀이 했다. 단군 왕검은 다제 다능한 동이수령 (東夷部落的首領)이 였다. 그가 백익(伯益)이다. 하여 여러 형용사 로 왕검 백익을 기록 했다. 그 한 글자가 이(彝)자다. 이(彝)자 를 은익 하거나 여러 형의 글자로 기록 하여 혼란을 초래 했다[17]. 홍범에 나타난 이윤(彞倫)이란 글자는 여러 단군이 지켜 오던 한민족의 오래된 율법이란 뜻이다. 모든 일을 실천 할때는 순서를 따라야 한다 (攸敘)고 강조 했다.
II시대적 배경:
백이숙제가 태어나 살다 죽은 지역이 황하문명 발생지의 중심부, 즉 단군왕검이 다스리던 경기 지역이다. 맹자는 현제 해지 북쪽 연안에 있는 운성시(居北海之濱)라 했다. 가까운 곳 수양산에서 죽었다. 황하 수계에 있는 독두산 이라고도 부르던 곳이다. 그 곳에 사당을 지었이 있었다. [18]
수경주 황하(河水) 설명에 감숙성 돈황시(甘肅省敦煌市) 태생의 함인 (闞駰)이 편술 했다는 (十三州志) 내용에 백이숙제가 은퇴한 곳을 독두산 (獨頭山)이라 했다. 수양산을 그렇게 기록 했다. [19] 이 곳에서 단군왕검의 후손들이 북쪽으로 올라와 살던 곳을 고죽국이라 랬다.
그 출처를 배구전이라 했다. 배구(裴矩; 547년 ~ 627년)는 남북조 고조선 수도 평양이 있던 하동군(河東郡) 문희현 (聞喜縣)이 본향이다. 수隋), 당(唐) 양조의 정치에 참여 했던 청렴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수양제와 같이 돌궐가한을 찾아가 답했다는 “高麗本孤竹國” 문구는 일차 사료다. 고구려가 임유관 전쟁을 이르킨 이유를 묻는 수양제의 질문에 답한 문구다. [20] 고구려의 영역이 서쪽으로 돌권과 접했던 시절이다. 수서에는 한나라 두독(杜篤)이 읊은 수양산 부(漢杜篤首陽山賦)내용을 인용 하여 궐윤 고죽 작번북미(厥胤孤竹, 作蕃北湄)라,즉 돌궐족 후예 고죽이 변한 북쪽 (호타하, 쌍간하)여울가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 형제 이름이 백이와 숙제라고 했다. 또 다른 비문에는 고유 밀운산“地稱高柳,山名密雲” 이라, 즉 산서성 대(代; 涿鹿縣)현 안문(鴈門)관 유성(柳城)일대라 했다. [1]
[1].隋書 : 銘曰:朝鮮稱國,孤竹為君,地稱高柳,山名密雲,遼陽趙列, 武遂秦分,寶珪世冑, 雕戈舊勳,名稱實賓,言謂身文,朝傾地鎮,夜落台星. 水經注 㶟水(桑干河):《山海經》曰:鴈門之水,出于鴈門之山。鴈出其門,在高柳北。高柳在代中,其山重巒疊巘,霞舉雲高,連山隱隱,東出遼塞。其水東南流逕高柳縣故城北,舊代郡治。秦始皇二十三年虜趙王,遷以國為郡,王莽之所謂厭狄也。
평양(平壤, 平陽)은 고조선의 대명사: 수양제가 돌궐 가한을 찾아갔던 곳을 평양(平壤)이라고 기록 했다. 발해남 연안 천진 당산 일대에 있던 사기에 양평(襄平)이라고 기록 된 곳을 위서에 평양(平壤)이라 했다. 단군왕검의 칭호를 받고 수도로 정했던 평양(平壤)은 명조(鳴條), 즉 오늘의 운성시다. 금미달이 점령되어 북쪽으로 밀려 갔던 백익의 후손들이 수도를 모두 평양(平壤)이라고 기록 했었다.
III 고조선(古朝鮮, 故朝鮮)의 두 다른 글자
문헌에는 옛적이란 뜻을 지닌 고조선(古朝鮮, 故朝鮮)두 글자가 있다. 수경주에는 한서 지리지 내용을 인용 하여 그당시 연지현에 고죽성이 있었다. 이를 고 고죽국 (故孤竹國)이라고 했다. [21]
상형 글자에는 뜻과 음을 담고 있다. 사전에는 예 고, 연고 고 (故: 古,攵)라고 읽는 글자는 “舊也,事也,常也”라고 했다. 문제 풀이의 열쇠는 “칠 복, 글월 문”이라고 읽는 형상자 “攵”입니다. 이를 “攴”의 변형이라 합니다. 그 뜻은 <유목민들이 두손으로 북을 가볍게 치는 형상> 이라고 보입니다. 하여 “古”자는 고금” 하는 술어에서 와 같이 단순히 과거를 뜻한 형용사입니다. 방망이가 붙은 고“故”자는 “지난 날과 같은 상황이 남아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음 사전에는 고(古)와 고 (故)가 다 같이 옛적(old, ancient)이라고 했다. 옛적이란 고자에 [큰 북 鼓]을 칠때 사용하는 방망이를 붙인 글자는, [옛 풍속이 남아 있다]는 뜻글자로 풀이 함이 옳다고 본다. 단군왕검 백익을 비하 하여, 저 늙은이란 뜻의 이기씨가 큰북을 만들었다 (伊耆氏造鼓)는 기록이 있다. 개천절 행사를 소도 (蘇塗) 또는 영고 (迎鼓)라 했다. 고조선 (古朝鮮)은 [Old Korea]이다. 낭랑군과 평양을 설명한 고조선 (故朝鮮) 이란 글자에는 [The place where Old Korean custom remained]이란 뜻이 있다.이를 일연 스님은 낭랑즉 평괴성(樂浪即平壞城)이라 했다. 낭랑에는 고조선의 “유적/유풍”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앞서 필자가 창안한 SMa-In에는 “古”자, 중원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곳, 즉 “SMa- Out”을 표현한 글자가 “故”자입니다. 하여 통전에는 “高麗本 孤竹國”와 같은 형태의 문구 “高麗本朝鮮地”를 평양성이 있는 한반도에 접붙여 “즉 고조선국 왕검성야 則故朝鮮國王險城也”라고 기록 했습니다.
고조선(故朝鮮)이란 중원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곳에 옛조선 (古朝鮮)과 같은 문화와 언어가 쓰이던 (전해 오는)곳 “SMa- Out”을 뜻했습니다.
그당시 우주관에 따라 시야가 좁았던 일연스님은 신당서에 실렸다고 출처를 밝혀 한나라가 세운 낭랑군이 평양이고 그곳이 옛 조선국 (故朝鮮國)이라고 했습니다.
지리지에 실렸다고 출처를 밝힌 “令支有故孤竹國,故孤竹國也”는, 전후한서를 종합해 보면 요서군(遼西郡), 즉 옛적에 제 환공이 고죽과 산융을 치러 올라 갔다가 건넜다는 설원(說苑)에 실린 요수(遼水) 서쪽에 있었다. 오늘의 태원 일대가 된다. [22] 영지현 고죽성은 그 곳에서 자생한 본 고죽성(孤竹城)이 아니라, 서주 발상지 수양산(首陽山)에서 옮겨 왔다. 하여 옛적 풍속이 살아 있다는 뜻(故)에, 고 고죽국(故孤竹城) 이라 했다. 이 일대가 모두 고조선 영역이 었다는 뜻이 글자 속에 있다.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 중국 진나라[秦] 사람인 갈홍의 포박자 에는 황제(黃帝)가 청구(靑丘) 땅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는 자부선인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23] 자부(紫府)란 글자는 노자가 호를 가르쳐 원시 불교가 나타나 토속신앙이 발전 하여 도교로 정립된 이후 위진시대에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도덕경의 시발과 같은 유래로 설명했다. 옛부터 청구는 삼한 땅으로 기록 되었다. 청구영언, 청구대학 하는 이름이 남아 있다. 수경주에는 오대산 (五臺山)이 있는 금미달 지역을 뜻했다. 그 일대 즉, 하북성 탁록현. (河北省涿鹿县)에 호타하가 흐르고 황제조(黃帝祖) 가 있다. 탁록(涿鹿)이란 족쇄를 채운 돼지와 사슴이란 뜻으로 고구려와 부여를 뜻한 글자다.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에 관한 문제는 다음에 더 깊히 다루기로 한다.
IV 선우(鮮虞)국이 중산국(中山國)으로.
선우(鮮虞)란 글자가 전국시대 초기를 기록한 춘추삼전에 나타났다. [24] 우유 부단한 조선(鮮)의 지도자(虞)란 뜻이다. 산서성에 있었던 제후국 진의 문공(晉文公: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은 두번째 패자 (春秋五覇)가 된후에 나타난다. 시경 시경 추우 (騶虞, 騶𩦢)가 그를 풍자한 시문이다.
급총 죽간을 근거로 작성 했다고 보는 죽서기년과 일주서에는 실리지 않았다. 달변의 위력을 논한 설원 선설(說苑善說)에 우구수왕(虞丘壽王) 이란 글자가 있다. 옛적부터 지도자가 살던 고을의 나이 많은 왕이란 뜻이다. 우구수왕(虞丘壽王)의 우를 음역하여 오구수(吾丘壽王)이라 했다.
사료를 종합해 보면 산서성 태원 동쪽에 있었다. 선우(鮮虞)국이 “중산국 (中山國)으로 바뀌었다, 아니다”, 즉 “혈통이 같다. 아니 다르다”라고 하는 논쟁을 묵자한고에 나열 했다. 이는 SMa-Out 에서 나타났던 사실을 SMa-In의 사실러 기록 하느라 논쟁이 많았다는 증거다.
산중에서 잡혀온 사람이란 뜻에 번후 중산보 (樊侯 仲山甫)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원주민의 지도자로 서주의 중흥의 기반이 되었다. 그들이 서주를 동쪽으로 몰아 내서 춘추시대가 시작 된다.
동주의 수도 낙양이 고향인 소진(蘇秦:382年-前332年)이 연문후 (燕文侯: 를 만나 예기한 남유갈석(有碣石) 안문지요(鴈門之饒)라 했다. 수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 거리에 있다는 뜻이다. 이를 전국책에는 “彌地踵道數千里”, 사기에는 “彌地數千里”, 김원중의 한글번역판 사기에는 이 문구를 번역 하지 한고 진의 영역에서 연나라 까지 수천리라고 했다. 일차 사료인 전국책에 실린 문구가 사실을 기록 했다. 미개척지를 조심스럽게 한발꿈치로 다져가는 길이란 뜻으로 종도 (踵道)라 했다.
사기 여러 곳에 나오는 갈석(碣石)을 갈석산(碣石山)으로 풀이:
치수 사업을 마치고 참가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분수 연안 가까이 항산 돌 위(恆山至于碣石)에 새겼다는 뜻이다. 이를 갈석산(碣石山)으로 풀이 하여 여러 곳에 나타났다. 상서 우공(尚書 禹貢) 편에, 구주의 경기지역을 뜻한 기주(冀州) 설명에 (夾右碣石入于河)라 했다. 좁은 산모퉁이를 돌아 황하로 들어 갔다는 뜻이 분명 하다. 구주의 크기를 여러번 밝혔다. 전국책에 실린 연나라 남쪽 멀리 갈석과 안문(南有碣石、雁門之饒)이 있다는 갈석산은 태원에서 임분시(临汾市)를 지나 하동에 이르는 분수/ 분하 연안에 있었다.
진(晉)이 정벌 했다는 산서성 고조선의 천자(天子)를 우유부단한 지도자 란 뜻에서 선우(鮮虞)라고 했다. 그나라가 망했다는 기록은 없다. 북쪽 산속으로 옮겨 갔다고 본다. 기원전 529년에 진 순오(晉荀吳)가 그후 조간자 (趙簡子:?-476 BC)가 다시 선우(鮮虞)를 정벌 했다. 그곳에 중산국이 있었다. 이를 모용수 (慕容垂)가 비련 (不連),북제에서 안희(安喜),수나라(隋) 때에 선우현 (鮮虞縣), 안희(安喜), 다시 신악 (新樂)으로 바꾸었다. 비련 (不連) 이 모용부가 자리잡았던 비려현 (肥如縣)이다. 비려/여국(肥如國) 유적가 하북성 석가장시 에서 발굴 되었다. 한국어로 비여(肥如)라고 읽는 글자는 비류(Bbiru) 로 루번 (樓煩)과 같이 부여(夫餘)를 그렇게 기록 했다. 강희자전에 “비여는 요서군에 있었던 옛적 나라 이름이다 肥如 古國名 在遼西郡” 라고 밝혔다. 산융 고죽와 백적 비자 두 나라가 있었다는 호타하, 즉 쌍간하 유역으로 부여와 고구려 땅이였던 곳이다.
전국시대에 중원 세력이 처음으로 접한(SMa-Out 이었던) 지역이라 이에 관한 기록이 혼잡 하다. 선우(鮮虞)국은 옛 구주땅 산서성에 있었다고 풀이 해야 옳다. 중산국, 비련 (不連),루번 (樓煩)과 같이 고죽(孤竹)과 관련된 이름이다. 고구려와 같이 북쪽으로 옮겨간 부여(夫餘)를 그렇게 기록 했다.
V노룡현(盧龍縣) 갈석산(碣石山) 이제묘 (夷齊廟)
최신 중국판 백화 사전 격인 바이두(BaiDu)이는 백이숙제 사당(夷齊廟)이 원래는 시황도시 서쪽 노룡현(原屬盧龍縣)에 있었는데 그 지역이 해방후에 란현(灤縣)으로 귀속 시켰다. 하북성 노룡현 (盧龍塞)이란 학설 현존하는 동국대 윤내현씨가 갈석고 (碣石考)를 한글로 풀이 하여 1986년 3월에 출판된 한국고대사 신론 끝에 부록으로 올렸다. 그가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같이 중국사람들이 풀이한 하북성 노룡현(盧龍塞)에 고죽국이 있었다고 인식 했다. 시황도 일대 창려현(昌黎县)에서 자라서 시황도시 산문협회 회장을 있던1949年생 으로 필명을 동연(東燕)이라 하는 동보단 (董宝瑞)과 고홍장 (高洪章)의 공저 갈석고 (碣石考)가 그 기반이다.
옛 부터 갈석산 (碣石山) 이란 이름이 여러 곳에 나타났다. 조조 (曹操)가 원소 잔당을 소탕하고 돌아 가는 길에 산해관 가까이에 있는 갈석산 (碣石山)에 올라가 읊은 시문이 관창해 (觀滄海)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에 이르렀다. 그도 갈석산에 올라가서 시를 읊었다. 전승장군 조조의 시문은 즐거움과 활기가 가득 하다. 전쟁터로 나가는 당태종의 시문은 밝지 못하고 번민이 숨어 있다. 그를 수행 하던 양사도 (楊師道) 가 읊어 ‘답예로 바친 시문’이 봉화성제 춘일망해 (奉和聖制春日望海)다. 양사도의 시문에는 그 일대 지명이 많이 나온다. 앞에 내려다 보이는 바다를 창해 (滄海)라 했다. 한국상고사 에서 논란이 되는 “청구 (靑丘), 노룡새(盧龍塞), 숙신 (肅愼), 대방(帶方)” 하는 이름들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 지역을 진시황 (秦始皇)의 친 아버지로 알려진, 여불위(Lü Buwei 呂不韋) 가 남긴 여씨 춘추에서는 예인 (穢人) 들의 고향 이라 했다. 태평어람에서도 후한서 내용을 인용 하여 [부여는 본래 맥족의 땅이다. 동명왕을 부여의 시조라 했다. 태고적 부터 조선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 분명 하다. 허진의 설문에는 동해유 갈석 (東海有碣石山)이라 했다. 그는 그 일대에 흐르는 국경 패수 (浿水) 와 낭랑을 설명 했다. 패수와 낭랑의 일차 사료다. 이러한 일차 이차 삼차 여러 사료를 기반으로 소설 같이 작성한 논문이 갈석고 (碣石考)다. 그 내용은 배를 타고 떠나는 관점에서 본 기록 이라 갈석산이 바다속으로 사라져 간다고 했다. 하여 옛적에 있던 갈석산이 사라졌다는 낭설이 생겼다.
이는 일차 사료를 무시하고 이차 삼차적 사료를 인용한 창작 산문이다. 갈석(碣石) 청수(靑丘) 창해 (滄海) 하는 명사를 중원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지역에 중원 세력이 영토 확장의 기반을 만든 산문이다.
전국시대를 기술한 사서 내용에 조선과 연(朝鮮 燕)이 나타난다. 이 두 이름은 백익이 단군왕검 의 칭호를 받고 도음을 정했던 해지 연안에 있었다. 그 북쪽 가까이 분수연안에 기산(箕山) 이 있었다. 기자(箕子)가 살기 좋아 갔던 조선땅 (朝鮮之地,箕伯所保。宜人宜家) 이라 했다. 그 곳에 있던 이름들이 동북쪽으로 올라 왔다. 그 또 하나가 돌에 세겼다는 뜻의 갈석(碣石)이란 글자에 산을 붙여 갈석산이 발해만 서남쪽 연안에 나타났다. 이 갈석산이 있는 지역을 노룡현(盧龍縣), 그 곳에 금미달이 있었다고 풀이 했다. 그 경로를 통전에 간략하게 설명 했다. [25]
연(燕)의 북쪽에는 임호와 루번(林胡、樓煩 부여), 동쪽에 조선(朝鮮)과 요동이 있었다. 연의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지요(南有碣石、雁門之饒)라, 즉 적을 방어 하기에는 충분한 거리가 있다. 넉넉할 요(饒)라 했다. 서남 쪽에 있는 진나라 보다는 서쪽에는 조(趙) 나라가 가까이 있어 더 위험하다고 설명 했다. 진나라가 셋(三晉)으로 부서진 후에 금미달 서남쪽 영역을 조간자(趙簡子 趙鞅; ?-前476年)가 점령 했다. [26] 안문관을 쌓은 곳은 금미달 영역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좁은 통로에 설치 했다. 사기에 영수 (靈壽)가 금미달의 경기(京畿)지역이 였던 하북성, 석가장시 일대다. [27]
VI결론:
고려본 고죽국(高麗本孤竹國)이란 문구를 살펴 보았다. 고조선의 수도 이전 (首都移轉) 경로가 밝혀 졌다. 중산국의 옛 수도를 영수 (靈壽, 古中山邑)라 했다. 영수성 유적(靈壽城遺蹟)에서 중산국왕xx(中山王 xx)란 명문이 발굴 되었다. 이 곳이 오늘의 하북성 석가장시 평산현 상 삼급향(河北省石家荘市平山県上三汲郷 )이다. 그 서북 쪽 계곡 대현에 안문관 (雁門關)이 있다. 기러기 안자 안문(雁門)은 전국책에 처음 나타난다. 그 곳에 있던 단군이 산신 (山神)이 되었다는 기록에 착안하여 도교에서는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 불가에서는 미륵불(彌勒佛) 이라 했다. 또 두루미 미(彌)자를 기러기 안으로 바꾸어, 안왕 (雁王, 鴈王 鵝王) 이란 칭호를 붙여 비불(譬 metaphor佛) 이라고도 했다. [28] 불교가 중원에 전래된 시기에 논쟁이 많았다. 그 의문이 불교 경전에 실린 글자에 있었다. 미륵이란 글자는 금미달(今彌達)이 중원 세력권에 들어간 이후에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고죽국이 하북성 노룡현 (盧龍塞)에 있었다고 인식 하고 있다. 그러나 보니 한국 상고사의 뿌리를 찾지 못하고 고조선이 만주 에서 나타났었다고 한다. 소중화란 사고 방식에 따라 고조선에 관한 이름 들이 모두 한반도에 나타나; “백이와 숙제의 절의를 추모하여 세운 사당 수양사(首陽祠), 이제사 (夷齊祠)”가 황해도 해주시 수양산에 설치 되었다.
단군조선 초기 역사는 신화라고 무시 한다는 주장을 받아 드려도,일차 사료가 많은 전국시대에 사라진 마지막 수도는 현지도에서 찾아야 한다. 금미달을 현 지도에서 밝혀 그 시대와 지역을 기반으로, 소급 하여 올라 가면 또 다른 시각에서 상고사를 연구 하면 고조선의 발원지와 아사달을 밝힐수 있다고 본다.
끝
[1]. https://en.wikipedia.org/wiki/Guzhu。
[2]. 孟子 離婁下:孟子曰:「舜生於諸馮,遷於負夏,卒於鳴條,東夷之人也。孟子 離婁下:文王生於岐周,卒於畢郢,西夷之人也.四夷. 孟子 梁惠王上: 欲辟土地,朝秦楚,莅中國而撫四夷也。
[3]. 史記 本紀 周本紀: 武王營之,成王使召公卜居,居九鼎焉,而周復都豐、鎬。 史記 秦始皇本紀:於是始皇以為咸陽人多,先王之宮廷小,吾聞周文王都豐,武王都鎬,豐鎬之閒,帝王之都也
[4]. 焦氏易林大畜之: 大畜:朝鮮之地,箕伯所保。宜人宜家,業處子孫,求事大喜. 焦氏易林 明夷之: 升:鳴條之郊/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王君旄頭,立尊單于
[5]. https://en.wikipedia.org/wiki/Guzhu。
[6]. 三國遺事: 樂浪國前漢時始置樂浪郡。樂浪即平壞城。宜矣。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為始祖。宜矣。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水經注 濡水: 濡水從塞外來,東南過遼西令支縣北.《地理志》曰:令支有孤竹城,故孤竹國也.
[7]. 竹書紀年 成王: 十二年,王帥、燕師城韓。王錫韓侯命。呂氏春秋 原亂:秦繆公率師攻晉,晉惠公逆之,與秦人戰於韓原. 史記 晉世家:秦繆公,晉惠公合戰韓原。惠公馬騺不行, 秦兵至,公窘,召慶鄭為御. 戰國策 韓策 韓三 謂鄭王: 昔者,穆公一勝於韓原而霸西州.
[8]. https://zh.wikipedia.org/zh-hans/%E9%A6%96%E9%98%B3%E5%B1%B1 山西蒲州说:位于永济市蒲州镇南,也称方山、名尧山、独头山,山南有伯夷叔齐墓与祠 山西永济市蒲州镇
[9]. 利簋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10]. 史記 伯夷列傳: 夫學者載籍極博,猶考信於六藝。詩書雖缺,然虞夏之文可知也. 伯夷、叔齊,孤竹君之二子也。父欲立叔齊,及父卒,叔齊讓伯夷。伯夷曰:「父命也。」遂逃去。叔齊亦不肯立而逃之。國人立其中子。於是伯夷、叔齊聞西伯昌善養老,盍往歸焉
[11]. 爾雅 釋器:彝,卣,罍,器也.爾雅 釋詁: 典,彝,法,則,刑,範,矩,庸,恆,律,戛,職,秩,常也,柯,憲,刑,範,辟,律,矩,則,法也.
[12]. 武王既勝殷,邦諸侯,班宗彝,作《分器》. 詩經 -> 大雅 -> 蕩之什 烝民: 民之秉彝、好是懿德. 彝:〔古文〕𦇚𢇏𧤋 《正韻》 延知切,𠀤音姨。《說文》宗廟常器也。从糸。糸,綦也。升,持米器,中實也。彑聲。《左傳·襄十九年》取其所得,以作彝器。《註》謂鍾鼎爲宗廟之常器。又《廣韻》酒尊也。《爾雅·釋器》彝卣罍,器也。《註》皆盛酒尊,彝其總名。又《廣韻》法也。 《周禮·春官》司尊彝。《註》彝,灋也。言爲尊之灋也。書·洪範》彝倫攸敘。《詩·大雅》民之秉彝。《玉篇》一作𢍵.
[13]. 尚書大傳 天子衣服,其文華蟲,作繢、宗彜、藻火、山龍.
[15]. 康熙字典 :《前漢·百官公卿表》𠍳作朕虞。《師古曰》𠍳,古益字。《應劭曰》𠍳,伯益也。又《集韻》籀文嗌字。 ○按《說文》作𠍳,首上从卝,不連
[16]. 尚書 虞書 舜典:帝曰:「疇若予上下草木鳥獸?」僉曰:「益哉!」帝曰:「俞,咨!益,汝作朕虞。」益拜稽首,讓于朱虎、 熊羆。帝曰:「俞,往哉!汝諧。」
[17].帝乃震怒,不畀『洪範』九疇,彝倫攸斁。鯀則殛死,禹乃嗣興,天乃錫禹『洪範』九疇,彝倫攸敘。
[18]. 孟子 離婁上: 孟子曰:「伯夷辟紂,居北海之濱,聞文王作,興曰:『盍歸乎來!吾聞西伯善養老者。』水經注 卷四 河水: 闞駰《十三州志》曰:山,一名獨頭山,夷、齊所隱也.
[19]. 抱朴子 內篇 金丹: 余問諸道士以神丹金液之事,及三皇內文召天神地祇之法,其誇誕自譽及欺人,云己久壽。太平御覽:昔黃帝東到青丘,過風山,見紫府先生,受三皇內文以劾召萬神.
[20]. https://en.wikipedia.org/wiki/Guzhu
[21]. 三國遺事: 樂浪國前漢時始置樂浪郡。樂浪即平壞城。宜矣。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為始祖。宜矣。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水經注 濡水: 濡水從塞外來,東南過遼西令支縣北.《地理志》曰:令支有孤竹城,故孤竹國也
[22]. 說苑 辨物: 齊桓公北征孤竹,未至卑耳谿中十里,闟然而止,瞠然而視有頃,奉矢未敢發也。喟然歎曰:「事其不濟乎!有人長尺,冠冕大人物具焉,左袪衣走馬前者。」管仲曰:「事必濟,此人知道之神也。走馬前者導也,左袪衣者,前有水也。」從左方渡,行十里果有水,曰遼水。表之,從左方渡至踝,從右方渡至膝. 後漢書 郡國五 遼西郡: 五城,陽樂,海陽,令支,肥如,賓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新安平,柳城,有孤竹城。肥如臨渝
[23]. 抱朴子 內篇 金丹: 余問諸道士以神丹金液之事,及三皇內文召天神地祇之法,其誇誕自譽及欺人,云己久壽。太平御覽:昔黃帝東到青丘,過風山,見紫府先生,受三皇內文以劾召萬神.
[24]. 三國遺事: 樂浪國前漢時始置樂浪郡。樂浪即平壞城。宜矣。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為始祖。宜矣。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水經注 濡水: 濡水從塞外來,東南過遼西令支縣北.《地理志》曰:令支有孤竹城,故孤竹國也.
[25].通典 古冀州: 冀州,堯都,故禹理水自此而始也。以唐虞之都不言封略,餘州所至,即是其境平州今理盧龍縣。壺口、雷首,至于太岳。既脩太原,至于岳陽. 殷時孤竹國。春秋山戎、肥子二國地也。今盧龍縣。有古孤竹城,伯夷、叔齊之國也。戰國時屬燕。秦為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 二漢因之。晉屬遼西郡。後魏亦曰遼西郡。隋初置平州, 煬帝初州廢, 復置北平郡。大唐因之。營州今理柳城縣。殷時為孤竹國地.
[26].戰國策 燕策 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 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云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里。南有碣石、雁門之饒,北有棗粟之利,民雖不由田作,棗栗之實,足食與民矣。此所謂天府也。夫安樂無事,不見覆軍殺將之憂,無無過燕矣。故曰,秦之攻燕也,戰於千里之外;趙之攻燕也,戰於百里之內。 史記 蘇秦列傳: 去游燕,歲餘而後得見。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碣石、易水,地方二千餘里,帶甲數十萬,車六百乘,騎六千匹,粟支數年。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此所謂天府者也.
[27]. 戰國策 趙一 魏文侯借道於趙攻中山: 魏文侯借道於趙攻中山。趙侯將不許。趙利曰:「過矣。魏攻中山而不能取,則魏必罷,罷則趙重。魏拔中山,必不能越趙而有中山矣。是用兵者,魏也;而得地者,趙也.史記 樂毅列傳: 樂毅者,其先祖曰樂羊。樂羊為魏文侯將,伐取中山,魏文侯封樂羊以靈壽。樂羊死,葬於靈壽,其後子孫因家焉。中山復國,至趙武靈王時復滅中山,而樂氏後有樂毅.靈壽縣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石家莊市西北部
[28]. discionary:鴈王: 佛之異名。與鵝王同。以佛三十二相中。如鴈如鵝. 鵝王: 譬佛也.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