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By siting the book of Wei, Buddhist monk Ilyeon left the story related to the birth of Gojoseon; Dangun Wonggeom, all the capitals, Gija and Wiman Joseon. Gija went to Joseon in 1046 BC, came back within few years and met the first king of Western Zhou. No one has yet confirmed the birthplace of Joseon. Chinese claimed the capital of Gojoseon was in the current Pyongyang. By casting the conceptual net as wide as it can be under the spectrum of Time, Place and Events, band of Yaemaek people move down along the Fen-river valley, built a commune during the era of Epic Flood in China. It was the dividing point of oral history to the written one and dawn of Chinese civilization. Gojoseon people were Scythian from the west, who spoke the ancient Tungusic language, built Hong-Shan culture enslaved by alien Zhou clan and left original scripture in the NEA with archaic ideographs.
One band of Yaemaek people known as elders moved down to the south went up to the eastern slope of Himalaya mountains left primitive Buddhism. Tragic demise of Gojoseon capitals became the theme of Buddhism. It flourished in India and spread out to the NEA,
Chinese excavated Taosi (陶寺) in the Xiangfen County, Shanxi that is a part of the Hong-Shan culture from the North. But they claimed it as a part of Longshan Culture in Shandong Province. We have heard only one-side story from China. There ought to be other voices to assess the event.
This essay illustrates the new method to study the history of NEA and trail of migration under panoramic view till Silla Unified Korea and Japan emerged. Gojoseon descendants spread out wide area in the NEA and through the sea rout as well. They left Totem poles in the new places. Sinja Village in Nepal is one example that Buddhism originated from the ancient Korean religion. Ancient Korean language remained in the ideo-logograms of ancient scriptures including the Buddhist scriptures.
I 머릿말
삼국 유사에 단군조선의 [첫 수도는 아사달 평양이고, 마지막 수도를 방홀산(忽山) 또는 금미달 (今彌達) 이다. 금미달에서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가 아사달에 돌아와 조용히 살다 산신이 되었다. [1] 이어 고구려는 고죽국이 옛적에 자기들 땅이라 침략 한다]는 문구가 있다. 인용한 얘기의 출처를 위서(魏書)라고 밝혔다. 전국시대 말기다. 금미달은 상나라 발생 이전 부터 있었던 동북 아시아에서 제일 오랫적 수도다. 금미달에 관한 연구는 동북 아시아 상고사의 연구다. 이를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 본다.
금미달(今彌達)은 홍산 문화권에서 황하문명 발상지로 내려오는 중요한 통상로에 있었다. 진시황은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북쪽에 쌓았던 성을 이어 장성을 만들었다. 영정하(永定河)의 상류 쌍간하(桑乾河)가 지나는 중요한 통상로에 성을 쌓았다. 이곳에서 고구려와 수나라가 첫 전쟁을 했다. 임유관 전쟁이라 한다. 오늘의 지도로는 산서성 삭주시(山西省 朔州市) 동쪽, 오대산 국립 공원 서쪽 대현(代顯) 일대에 있었다.
금미달 (今彌達)이 점령된 전국시대에 관한 일차 사료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황하문명 발생지는 국한된 작은 지역이었다. 그 곳 사람들 예맥족이 글자를 만들어 구전해 오던 예기(濊記)를 글로 남겼다. 예서(隸書)라 한다. 그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에는 어음과 뜻이 감겨 있다. 역사 시대의 시작이다. 현존하는 모든 사물에는 연혁(沿革; History)이 있다. 그 많은 사연을 모두 기록 할수는 없다. 역사서를 작성한 장소에서 멀리 떠러진 곳 사연은 알수 없었다. 이를 편의상 기록 뒤지 않은 사건은 Silent Majority (SMa-In), 글쓴 사람의 영역 밖은 (SMa-Out 알려지지 않은 대부분 )라 구분 한다.
중원에는 말이 다른 여러 민족이 살았다. 선진 문헌은 현지인의 어음을 가차 전주 하여, 육서(六書) 벙법으로 글자를 선택 하고, 춘추 필법으로 문장을 만들었다. 육서(六書)란 대륙 륙자(陸)를 여섯 육자로 바꾸었다. 대륙, 즉 북쪽에서 홍산문화권을 이룬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어 써 오던 방법 이란 뜻이다. 위진 삼국시대 까지 그러한 방법이 인용 되었다. 방법 또한 교묘하게 중원 위주의 역사관에 따라 춘추 필법으로 기록 했다.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각종 음과 뜻을 정리한 운서(韻書)가 나타났다. 당-송 시대 부터는 지금과 같이 글자 하나하나의 선택이 치밀해 졌다. 그러한 방법으로 선진 문헌을 풀이 하여 고조선의 발생지를 찾지 못하고 기자가 갔다는 조선이 한반도라는 오류를 범했다. 기자는 산서성 태원 일대에 갔다 곧 되 돌아가서 주 무왕을 만나 홍범구주를 상의 했다.
중원 세력과 인접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사람들의 기록은 수사학(Forensic Science)적 관목으로 풀이 해야 한다.
해지 연안에 살던 고조선의 지도자를 천독(天毒)이라 했다. 상나라 북쪽에 있던 천독 (天毒)이 상나라를 괴롭혀 수도를 여러번 옮겼다. [2] 이독이 천또깨비라 했다. 상나라 말기에 서쪽에 웅거한 천또깨비를 방어 하라고 임명 되었던 자, 서백(西伯)의 손자가 서주를 새워 원주민을 노예로 다루었다. 그때 그곳에서 백이숙제(伯夷 叔齊) 설화가 나타났다. [3] 원주민이 들고 일어나 서주를 함곡관 동쪽으로 내 몰아 춘추시대가 시작 되었다. 해지 연안 운성시에 수도를 두었던 고조선 사람들이 옛 수도를 되찾고 계속 중원을 석권 했다. 백익을 모시던 원주민들이 난을 이르켜 미란(彌亂; 彌:益也) 이라 하고, 되찾은 나라를 해왕지국(海王之國)이라 했다. [4] 또한 서쪽에 나타난 불교 국가를 천독국 (天毒國)이라고 했다. 금미달에 살던 사람들이 호(胡)를 가르쳐 불교 발생지에 갔었다. 오랑캐 호(胡) 자를 두루미 미 미 (彌) 자의 노인 으로 풀이 했다. [5] 고조선 원주민이 서쪽에 가서 고조선의 이념을 가르쳐 불교가 나타났다. 김일제가 금인 하라전 앞에 꾸러 앉아 호(日磾捽胡, 何羅殿下)에게 빌었다.
II 간략한 설명
필자가 첫 수도 아사달과 평양을 찾았다. 그 후에도 같은 방법으로 연구를 계속 하여 금미달이 있던 장소를 찾았다. 소진 (蘇秦, ? ~ 기원전 317년?)이 활거 하던 시절이다. 상나라 말기에 나타난 전설의 백이숙제 고죽군을 금미달에 접붙여 산속에 있던 중산(中山)국 이라고 기록 했다. 전국시대에 그 지역이 조(趙) 연(燕)에 병합 되었다가 다시 기원전 223년에 진(秦) 나라에 점령 되었다. 고조선 세력을 막으려고 성을 쌓았다. 사마천은 방대 했던 고조선 영역을 둘로 나누어 서쪽 세력은 흉노 (匈奴, 胡) 라 하고 동쪽 세력은 동호(東胡)라 했다. 동호왕을 조선왕이라고 했다. 고조선의 영역을 전국책에는 수지종도 수천리 (彌地踵道數千里), 사마천은 미지수천리 (彌地數千里) 라고 했다. [6]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한 사기에는 고조선 지도자 미(彌)가 통치 하던 지역이란 뜻의 미지(彌地)란 글자를 무시 했다.
II 단군왕검의 유언
진서(晉書) 열전에 급총에서 발굴된 죽간 내용이 모두 햇님을 섬기는 위나라의 역사 (蓋魏國之史書)라고 했다. 그 내용에 금미달이 점령 단한 시기를 알수 있는 기록을 간략히 설명 하면서 요사(繇辭)란 글귀가 두 곳에 나타난다. 단군조선의 초기 역사다. 더더욱 옥중에 가쳤던 단군왕검의 어명이요사(繇辭; 합당한 사연)에 실렸다.
그 내용이 (항간에 전해오던 소문과는)다르다(繇辭 則異).중국 문헌에는; 요(繇) 주문 주(籀), 사(辭)는 말씀 사 (詞)라고 설명 했다. 亦作“ 繇詞 ”。卦兆的占詞。繇,通“ 籀 ”
요사(繇辭)는 상나라가 (산서성에서) 천도하기 이전, 여러 왕들의 노래와 숭덕을 기록한 내용이다. 개(乾啟)가 즉위하고 한창 번영하던 시절에 회계염(鹽)현 (會稽剡縣) 사람이 우물에서 길이가 7촌 2분 되는 종를 찾아 냈다. 그 종에 고문 18자가 있었다 . “회계악명(會稽嶽命)이외 글자는 당시 사람들이 판독하지 못했다” (당대의 석학) 곽박이 보기에는 (郭璞曰) 해왕(蓋王)이 만든 작품이다. 아래 글귀는 서진 초기에 전해오던 산해경의 자료를 모아 주(註)를 달았다는 곽박이 한 예기(郭璞曰)다 :
<햇님의 후손 지도자 해왕(蓋王, 海王)가 회계산 정상에서 내린 명이다. 틀림없이 영부(靈符), 즉 “자신의 속 마음에서 약동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천서”의 뜻이 있다. 옥에 가친 천인지심 (塞天人之心)은 여 신물합계(與神物合契)라 연후에 가이 언수명 (言受命) 이리라. 개(啟)가 종을치며 진능(晉陵)에 왜치는 소리가 회계에 들려온다…. (天人之際不可不察)천심이 인심이라 꼭 알려 지리라. 해왕은 과연 심중 하시구나>
III 고기에 실렸다는 간략한 北扶餘와 고구려 건국 설명
삼국유사에는 <단군기(壇君記)내용을 인용하여 해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 라고 했다. 중국기록에는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에 나오는 해모수 (解慕漱), 그의 아들 해부루(解夫婁), 그리고 금와(蛙, 蝸)란 이름이 없다. 한서 지리지와 통전에 나온 개마 (蓋馬: 蓋; gài gě hé音合; hé gě) 란 이름을 비교해 보면,부여와 고구려 시조에 나오는 해모수의 해모(解慕) 같은 뜻이 분명하다 . 수(漱)자는 도망을 간 지도자 (澣)란 뜻으로, 현토군에 있던 서개마현의 지도자로 도망갔던 사람이 해모수 (解慕漱)다 . 흑(黑; [hēi] hēi hè/흐어/해) 자 해(解)자가 모두 해(sun, sun-ray)를 사음한 글자(蓋音合)와 같은 사음자다. 고구려와 부여는 현토군에 있는 선비산(鮮卑山)으로 증명된 의무려산 (醫巫閭山)이 있던 곳에서 나타났다. 조양시 동쪽에서 북진시 서쪽에 있는 높은 산이다.
순자정론(荀子正論)에는 난세의 어려움을 다루면서<왕옥산 요새에 숨었던 사람이 어떻게 동쪽에 있는 낙원 땅을 알수 있겠느냐 면서,이를 우물안의 개구리 우화 (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로 다루었다. 황하 문명의 발생지에서 요순임금이 양위(堯舜擅讓)를 했다. 그곳을 떠난 부족이 중산국(中山)에서 부유(扶柳)족을 흡수하여 호타하(滹沱河)연안에 제단(擅呼沱)을 쌓았다. 오손의 오(烏)자를 음이 같은 “호:呼, 乎,虖, 戶, 胡”자로도 기록 했다 . 호타(滹沱.呼沱)란 뜻은 <호(胡) 저 다른 사람(它)이 사는 땅>을 지나는 여울(沱)이란 뜻으로 예하(濊河)라고도 했다. 산서성에서 나와 천진을 관통하여 발해만으로 빠지는 해하 (海河)의 한 줄기다. 타(它)자는 시경 홍명(鶴鳴)에 나오는 타산지석(它山之石)이란 타자에 물수변을 더한 글자다. 타(它: 宀:匕)자는 “他, 牠”와 같이 <저들 유목민>이란 뜻으로 해지(解池)연안에 살턴 토착 민을 그린 합성 상형글자다. 설문에 바다해(海)자를 천지(天池)라 했다. 천독(天毒)이 살던 지역이란 뜻이다. 광운(廣韻)에는 설문해자에 실린 천지를 설명 했다. 산서성에 있는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해지(解池)가 분명하다 . 장성의 서쪽은 옥문 대군 (鴈門, 代郡), 동쪽 끝이 양평 (襄平) 이라 했다. [7] 수경주에는 장성이 대군 쌍간하(代郡 桑乾河)가 지나는 옛적 탁록현 북쪽이라 한다.[8] 쌍간하 (桑乾河)란 고구려와 부여의 두 지도자가 살던 지역을 흐르는 여울을 뜻했다. 이를 호타하(滹沱河), 치수(治水), 요수 (遼水), 성수 (聖水)라고도 불렀다. 영정하(永定河)로 이어져 북경과 천진(天津)을 지나는 해하(海河)의 지류다.
그 일대에 맥국이 있었다고 한다. 사기 평준서에 오팽이 멸한 조선에 창해군이 생겼다2년 후에 사라졌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 하기 약 25년 전에 천진 일대에 조선이 있었다. 한서에는 예맥군 남여 (穢貊君南閭)가 280,000명을 인솔하고 요동 (遼東)에 들어 와서 창해군(蒼海郡)이 생겼다고 밝혔다.
창해군이 있던 곳을,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 즉 진수와 장화는 조선을 “州鮮國, 為鮮國” 라고 기술 했다. 장화는 금미달 지역 태생이다. 처음으로 기자가 연 나라를 벌(其後伐燕)하고 조선에 돌아와 바다로 도망 가서 위 선국(為鮮國)이 라고 왔다.[9] 한서에 북방에는 호(胡)가 살고 조선이 바다안에 있다는 표현과 같은 뜻이다.
창해군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 황하 하류에 이르는 늪지대가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왜인들이 살던 곳이다. [10] 진수가 단석괴(檀石槐;137 ~ 181)에 관한 설명을 할때 나타난 한인(汗人) 이 망으로 생선을 잘 잡는다는 곳이다. 왜인들이 살던 곳을 한국 (汗國)이라 했다. 삼국지 왜인전과 후한서 에서는 한(汗)자를 왜로 바꾸어 왜인 (倭人) 왜인국 (倭人國)이라고 기록 했다. 이러한 사실을 한서에서는 조선이 바다 안 (朝鮮在海中) 에 있다. 옛적에 공자가 동이 땅에 가서 살로 싶다 하던 사람들이 바다 속에 있는 왜인 (海中有倭人) 이라고 기록 했다. [11]
동한 말기(靈帝和光元年; 177 년)에 해변에서 관(coffin)을 구했더니 살아있는 사람이 나와 (我伯夷之弟孤竹君也) 나는 백이의 동생 고죽군이다” 라고 했다. 이는 여러 경외서 (經外書)문헌에 실렸다. 금미달에 살던 사람들이 발해만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12] 장화의 박물지(博物志) 에는 倭 자가 없다. 한인(汗人, 韓人), 즉 조선(朝鮮)인 삼한 사람들을 왜인 (倭人)으로 둔갑 시켜 동북아시아 한해의 동쪽 연안 사람들이 싸우게 만들었다.
IV 노자가 예맥족 글자 시문(斯文)을 전했다
금미달 일대 (彌地) 에 살던 사람들이 해하를 따라 내려와 발해만 연안에 여러 작은 국가들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이 세운 나라 이름에 미(xx彌)자가 붙었다. 비미호 (倭女王卑彌呼), 미추홀(彌鄒忽), 신라와 백제의 옛적 이름이 보인다. 이는 모두 광개토대왕 비문에 적힌 여러 미(彌)자와 신라,임나가라(任那加羅)가 인접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나타난 염사치 사건과 오림이낭랑(吳林以樂浪)에 관한 예기는 [백제 온조왕의 수도 였던 대동강 하구 강서고분 유적지와, 그의 형 비류가 정착 했던 미추홀 (彌鄒忽),즉 천진항 사이에 활발했던 해상 교류]를 그렇게 기록 했다.
온조형 비류가 정착 했다는 미추홀(彌鄒忽)이 낭랑 남쪽 땅을 잘라 만든 대방 땅, 즉 천진항 일대에 있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임나 가야, 미추성(彌鄒城), 양평, 염전의 북쪽” 이라고 실렸다. 이곳이 “신라, 백제, 가야 연맹, 왜라 부르던 사람들”의 옛 고향 이다.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할 당시 벌써 고조선 유민들이 여섯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 예왕인 (濊王印)을 얻었다. 돌산 (突山) 고허촌(高墟村) 이란 중앙 아시아 에서온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13] 예맥족의 기원을 밝힌 글자다.
진시황(秦始皇)의 장성이 양평 (襄平) 에서 끝났다. [14] 전후한 혼란기에 김일제의 후손 공손도(公孫度)가 천진 일대, 요동으로 도망 가서 부여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공손도를 진수는 공손홍의 아들로 분장해서 사기 공손홍 편에 실렸다. 태어나지도 않았던 한서의 저자 반고의 예기를 인용 했다. 고구려 왕자 발기가 왕위 쟁탈전에 밀여 공손도 세력에 동참 했다. 그 후손이 연왕 (燕王) 공손연(公孫淵, ? ~ 238년)이다. 사마의 (司馬懿, 179년 ~ 251년) 가 오환과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부족을 동원 하여 양평성에 웅거 했던 공손연 을 잡았다. 그곳에서 귀중품을 가져다 조위(曹魏)왕실에 바쳤다. [15]
이는 필자가 여러 사서를 종합하여 풀이한 결론이다. 당시 중원의 사가들은 글자 훈고학의 대가 였다. 글자 장란의 도사들이었다. 아직도 강단 사학계에서 고수하는 “1+1=2 이라는 자연 과학적” 방법으로 글자 풀이를 하면 진실을 찾을 수가 없다.
진수를 출세 시킨 장화 (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는 대흥안령 북쪽과 황해 동쪽은 끝을 알수 없다고 했다. [16] 진수는 통역을 사이에 두고 동이전을 만들었다. 한반도와 일본 영도에 관한 설명은 만주에 살던 노인들의 예기를 이중 삼중으로 들은 예기다.
공손연 당시 중국 동해안을 따라 강남에 있던 동오와 고구려의 해상 교류를 설명 했다. 삼국지 본문에는 장군 하달등 장병만인(將軍賀達等將兵萬人)을 인솔하고 태상 장미 (太常張彌)가 공손연에게 많은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乘海授淵) 했고, 같은 사건을 오서 (吳書曰)에는 오나라 사절단 400여명(官屬從者四百許人)이 공손연 (公孫淵 , 제위; 237-238) 영역인 갈석산 남쪽 양평(襄平)에 도착 했다. [17] 공손연은 손권의 진의를 타진 하려고 사절단을 요동 여러 현에 분리시켜 감시 했다. [18] 동오의 사절단60명을 (黃彊等及吏兵六十人)요동에서 북쪽으로 200리 떠러진 현토군 (玄菟郡在遼東北)에 보냈다. 현토군에 배속 되었던 동오 사람60명이 공을 세우려고 그곳에서 반항 하다 실패 했다. 구사 일생으로 600여리를 도망처서 고구려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알리니,고구려왕 궁(句驪王宮)이 이들을 후대하여 양평(襄平)항구을 떠나 동오에 돌려 보냈다. 동오에서는 큰 배를 만들어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해안을 지나다 실종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작은 배를 만들어 안전 하게 항해 했다.
양자강 하구와 요동항 사이에 해상로가 위험 했지만 활발 했다. 손권은 진시황과 같이 불사약을 구해 오라고 갑사만인 甲士萬人)을 바다로 보냈다. 멀리 갔던 갑사는 돌아 오지 못하고, 겨우 대만섬(夷洲)에 들려 현지인을 포로로 잡아 왔다. 남쪽 해남도에 갔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이 해안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 갔다.
후에 진서에는 신미제국(新彌諸國)이 헤안을 따라 4000여리에 흐터져 산다고 했다. 남조 역사서에는 왜오왕 (倭五王)이 다스렸다는 여러 나라로 나타났다. 왜왕이 비미호 (卑彌呼)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왜오왕 (倭五王)이 임나가야와 신라를 포함한 7 나라 “倭百濟新羅 任那加羅秦韓慕韓” 라고 했다. 양서에는 왜왕이 다스렸다는 6 7 나라 이외에, 한반도 에서 왕모명진(王募名秦)이 처음 진통2년(普通二年)에 백제 사신을 따라 조공을 바쳤다. [19] 현제 사용하는 신라(新羅) 와 임나 가라(任那加羅)란 이름은 “진한 모한秦韓慕韓” 과 같이 모두 중원에 있던 이름자다. 동이강국 백제(百濟)는 가라(加羅)를 부용국으로 한해의 해상로를 장악 하여 동서 양안에 있었다. 중국 강남 해안에서 한반도 서남 해안에 이르는 남방 황해 해상로는 부여씨가 세운 백제가 부용국이었던 가라국과 같이 479년에 처음 왕복 항해에 성공 했다. 중원 세력은 수양제가 처음으로 같은 길을 따라 한반도 남단를 거처 구주와 유구를 다녀 갔다. 수서에 대만섬이 백제 영토로, 백제와 신라가 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고 기록 했다. [20]
지금 까지 동북아 역사 연구에서 등외시 했던 불교 경전속에서도 많은 역사적 사실을 찾았다. 간략하면 사 또는 시(斯)라고 부르던 예맥족 사람들이 운남성 으로 밀려 갔다. 그곳에서 히말리아 산맥 동쪽 수지(隨地;따지,땅)에 정착 하여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동북아 전역에 예맥족이 흩어져 살았다. 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는 여울을 사수 (斯水) 라 했다. 후한서(後漢書) 에는 시경(斯經), 시문(斯文) 과 시도(斯道)란 글자가 보인다. 공자가 주나라 중정에 세워 놓았던 동상 뒤에 세겨진 금인명(金人銘)을 읽었다. 글자가 시문(斯文)이라 했다. 예맥족이 쓰던 글자란 뜻이다. 공자가 살던 옛집 벽속에서 고문 상서가 나왔다. 공자 가어에 [비씨, 비씨궁 (費氏之宮) 하는 문구]가 있다. 예문지에는 비씨경과 고문(尙書?)이 같다 했고, 전한기에는 비씨경이 노고문과 같다(費氏經與魯古文同) 했다. 이를 빛을 숭상 하던 사람들이 사용 하던 글자라 해서 (楷書)라 했다. 노자(老子)가 주나라 사관(周守藏室之史)이었다. [21] 공자와 노자는 예맥족이 쓰던 시문(斯文) 글자를 알았다.
노자가 운남성을 지나 서쪽으로 가서 호를 가르쳐 불교가 나타났다. 백익의 이름 자를 따서 붙인 이족(彝族)이 치우천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귀주(貴州)란 고귀한 사람의 후손이 사는 땅이란 뜻이다. 그들 고유의 표음문자로 분리 되는 이문자 (彝文字)가 현존 한다. [22] 그러한 글자를 쓰던 사람들의 언어가 불교 발행지에 전해졌다. 예맥족이 옛적에 사용 하던 글자(가림토문자?, 녹도문? 蝌蚪文?) 가 이문자 (彝文字)의 원조라고 본다. 예맥족의 언어와 옛 글자가 원시불교 발생지에 전해졌다.
맹자는 예맥(濊貊)족의 풍습, 시도(斯道)를 맥도(貊道)라 했다. 시/사(斯)자가 불교 경전에 많이 나타난다. 세존이 이르기를 예맥(濊貊 斯人)족은 나와 같은 종족(世尊曰; 斯人者我之族也) 이라 했다. 석가모니는 예맥(濊貊,斯)의 외손이다. 어머니 마야부인 (摩耶夫人)이 일찍 죽어 이모(姨母)가 길렀다. 마야란 “엄”이란 어음을 생략한 “엄마야”의 사음자다. 석가모니의 모국어(mother tongue)은 고조선 예맥족의 언어 였다. 그 언어가 불교 경전에 실려 전해 와 Pali (파리婆夷)Language 라 한다. [23]
고조선 후예들이 북쪽으로도 올라 갔다. 시배리아 (Siberia)는 선비야(鮮卑也) 에서 왔다. 호주에서 Kangaroo 란 명사 발생과 같은 현상이 원시불교 발생지에서 나타나, Himalaya(흰머리야), Hindus (賢頭,흰머리 ) Ganges River (降水)란 명사가 생겼다.
간략하면; 아사달을 훈역한 글자가 비구(比丘), 그 곳에 사원이 있었다. 그 사원에 사는 사람들을 비구니라 했다. 그 곳에 전해오던 전설을 인도 사람를이 듣고 처음 만들어진 기록이 대루탄경 (大樓炭經; 즉 큰 사원이 불에 탄 예기) 기록이다. 이 처참햇던 현상을 표현한 글자에서 사자성어,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나타났다.
단군 왕검을 잃은 고조선 실향민이, 떠돌이 부여(扶餘,浮游, 蜉蝣,不與)의 어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남쪽세력과 겨루었다. 금미달에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을 미륵(彌勒) 으로 둔갑 시켰다. 부/불암(아사달)에서 죄수로 일했던 수미, 즉 부열에서 수미산(須彌山)이 나타났다. 수미산 (舊曰須彌)을 옛적에 묘고산 (唐言妙高山)이라 부르던 높은 산이라 하고, 동서 남북 네곳을 통치하며 수미를 보호하는 자를 사천왕 (四天王)이라 했다.
계속되는 중원의 전란 속에 지나(支那) 라고 부르는 운남성 귀주 광동 광서 일대에 삼한의 후예들이 자의 또는 타의로 정착 했다. 백익과 같은 글자 떳떳할 이 이족(彛族) 이 치우천왕의 후손이라 한다. 이들이 수지로 올라가 귀한 손님으로 대우 받아 그 곳에 는 오늘도 이해 할수 있는 한국어가 남아 있다. 한편 중국 동해안을 따라 동남아 해안 으로 내려 갔던 삼한의 후예는, 운남성에서 매콩강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과 같이 귀빈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어와 같은 어순을 쓰고 있다.
수지에서 나타난 원시 불교가, 운남성 사천성에 정착 했던 초기 도교(道敎)와 이론적 대화 교류를 통해 발전 시켜(Academic discourse) 오늘의 도교 경전이 나타났다.
인도 동남부에서 성장 했던 불교가, 운남성 육로, 또는 동남아 해상로들 따라 중국 강남에 전래 되었다. 그 곳에 정착했던 금미달 사람들의 믿음과 융화 되어 미륵불 (彌勒佛) 이란 불교 선종(禪宗)의 한 종파가 나타났다. 황해(Yellow Sea) 남쪽 해로를 타고 한반도 남단에서 남방불교가 번창 했다. 미륵 신앙은 예맥족의 태고적 신앙 과 풍속 (貊道, 斯道)이 도교와 불교를 거처 나타난 한국 최초의 신앙이다.
왜오왕 (倭五王)이 다스렸다는 신라 (新羅) 왕의 성씨를 김가(金可)라 했다. 태평광기에 김가전이 있다. [24] 휴도왕(休屠王) 김일제의 후손이 화친 하여 공손도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이 김가로 기록 되었다. 신라의 제 일족은 김가 (金哥), 먼 선조를 방이(旁㐌), 수도를 의의(宜矣)라고 했다. [25] 도깨비 방망이 방이(旁㐌) 설화 내용에 누애와 코끼리가 나온다. 의의란 글자가 삼국유사에, 양평성을 평회성 의의 “平壞城。宜矣” 라고 숨긴 글자다.[26] 의성(宜城)이란 삼국유사에 실린 사언의 후손들(傿 斯焉)이 사는 신선의 도성이라 했다.[27] 평회성을 사마천은 양평 (襄平), 위서 (魏書)에는 평양(平壤) 이라고 했다. [28] 고조선 수도 뿐만 아니라, 지나 (支那) 라고 하던 남쪽 지역에 신라가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은미 하게 기록 했다. 후에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에 처음으로 골품제를 부활 시켜 여왕이 나타났다. 연속극에 미실로 나타 난 김덕만(金德曼)이 진평왕과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 金氏)의 딸이다.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이 석가모니의 어머니다.
중원에서는 전국시대 말기에 불교의 존재를 인식 했다. 태평광기에 보인다. 처음 나타난 곳이 금미달 지역이다. 올라 갔던 길을 따라 운남성을 지나 강남을 거처서 한반도에 이르러 미륵 신앙으로 나타났다.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북쪽에 방대한 영역을 통치 하던 고구려와 세력 다투을 했다. 한국에서는 임유관전(臨渝關戰)이 진주강씨 기록에 실렸다. 임유관(臨渝關)이란 글자 속 “渝 濡:變汙”에 장소가 나타났다. [29]
변한(變汙, 弁韓) 이 다스리던 고죽국 이란 별명을 붙인 금미달 (今彌達)이 있던 있던 곳이다. 또깨비가 활을 지니고 사는 산 궁홀산(弓忽山), 방성(方城)이라고 했다. 이곳을 회복 하려고 고구려가 공격 했다. 임유관 전투에서 고구려는 수나라를 물리 치고 화해 했다. 중국에서는 임유관을 안문관(雁門關) 으로 바꾸어 숨겼다.
V금미달 (今彌達)이 미륵(彌勒)의 어원 발상지
금미달을 진시황에게 빼았겼던 고조선 사람들은 분산되어 북쪽으로 밀려 갔다. 진나라가 망하자 금미달 지역으로 다시 내려와 동서 진영이 서로 책임을 따젔다. 그 결과 기원전 209년에 모둔 선우가 급습하여 동호왕을 죽였다. 사마천은 이를 쓸모 없는 땅 구대지(歐代地)의 소유권을 놓고 싸웠다고 했다.
새로 등장한 남쪽세력 총수 한고조 유방(漢高帝)이 금미달을 되 빼앗으려고 올라 갔다가 포위 당해 화친 맹약을 했다. 이를 마읍의 사변(馬邑之變)이라 한다. 그 장소를 안문군 마음(雁門郡馬邑)이라고 현 중국 정부에서 밝혔다. [30] 금미달(今彌達)이 있던 곳은 수경주 보인다.[31] 중국 기록에는 임유관 전투가 발생 했던 곳을 골대 또는 골대성(滑臺城) 이라 했다. 수문제의 동생 양찬(楊瓚:550-591)이 한창 젊은 나이에 북쪽 세력 (獯虜閒釁)을 방어 하다 죽었다. 그의 고별사에 미달(彌達)이란 글자가 보인다. [32] 고죽(孤竹) 이란 어음을 차음전주하여 독고(獨孤)씨가 나타났다. [33]
수모를 당 했던 유방이 이곳을 항산군(恒山, 常山郡)이라 명했다. 한경제 (景帝帝 劉啓,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41년)가 중산국 (中山國) 으로 바꾸었다. 오호 십육국 남북조 시대에 고조선의 후예들이 그곳을 차지 하고 항주(恒州)라 했다. 중원을 통일 한 수나라 양제가 그 곳을 빼앗스려다 수모를 당했다. 후에 수나라 세력을 확립한 수양제가 그 곳을 개명하여 다시 상산군(常山郡)이라 했다.[34]
기러기 안자 안문(雁門)은 전국책에 처음 나타난다. 필자는 전국시대에 불교가 중원에 처음 알려 졌다는 논증을 했다. 불가에서는 그 곳에 있던 단군이 산신(山神) 되었다는 기록에 착안하여 미륵불(彌勒佛) 이라 했다. 또 두루미 미(彌)자를 기러기 안으로 바꾸어, 안왕 (雁王, 鴈王 鵝王)이란 칭호를 붙여 비불(譬 metaphor佛)이라고도 했다. [35]
한중 두 나라 기록에 고구려 장안성(長安城)을 별도로 썼다고 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장소를 밝히지 못했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 보면 장안성(長安城)은 발해만 서쪽에 있었다. 축성한 시기가 남북조시대 말기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기 전, 대륙백제와 고구려가 중원에서 넓은 영역를 통치 하던 시절이다.
중원을 통일한 수 문제가 고구려 평양왕(平陽王; 590년 ~ 618년)에게 사신을 보내 습작요동군공 (襲爵遼東郡公) 이라 하고 사신이 전한 외교문서에는 사배왕(使拜王) 이라 했다. [36] 왕의 아버지 평원왕(平原王) 또한 요동군공 이였다는 뜻이다. 수나라 이전에 있던 북제에서 붙인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이란 칭호를 계속 인용 했다. 고구려는 남북조 시대에 육로로는 서쪽세력과 중원 세력과는 해상 교류를 했다. 고구려는 제24대 양원왕(陽原王, ? ~ 559년) 부터 제26대 영양왕(嬰陽王, ? ~ 618년)이 수나라와 싸울 때 까지 서쪽으로 넓리 진출하여 돌궐과 분쟁이 있었다. [37]
당시 고구려 왕에게 붙인 여러 이름자가 또한 이를 입증 한다. 돌군 세력을 막기위해 새로 썽을 쌓고 이름을 신성이라 했다. 이를 침략한 돌궐군을 백암성(白巖城)에서 물리 쳤다. 의문의 백암성과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첫 전쟁이 발생한 임유관은 같은 곳이다. 한때 그곳에서 고구려군에 포위 당했던 수양제를 왕자였던 당 태종이 출군하여 풀어 주었다. 배구가 수양제 (隋煬帝)에게 바친 글에 나타난다. 옛적에는 고국국(孤竹國) 있던 곳이라 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자기들 선조의 땅이 이었다고 하여 자주 침입한다고 보고 했다. 고죽국과 임유관은 요서(遼西臨渝)에 있었다.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치려는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598년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臨渝關)을 선제 공격했다. [38] 임유관(臨渝關)의 뜻을 보면, 유수(渝水)계곡 통로를 막으려고 만든 요새 였다. 설문해자(說文)와 북주(北周; 557년-581년) 관리의 신도비 (神道碑) 에도 유관(渝關)이 산서성(在遼西臨渝)에 있다고 했다. 수양제가 옥문에서 돌궐군에 포위 당해 “煬帝於 雁門為突厥所圍”, 이세민이 구조대에 응모(太宗應募救援) 했다. [39] 한고조가 흉노에게 포위 당했던 곳이다. 그가 태종이 되어 고구려를 침략 한 첫 결전장이 같은 곳 백암성을 점령하고 읊은 시문이 극 고려 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다. 백암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많이 적혀 있다. 그 위치는 요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는 추리가 나온다. 송대에 편수된 태평어람에 나온다. 그 문구 “師次白巖城,將軍李思摩中弩矢, 太宗親為之吮血” 를 보면, 태종이 작심하고 한번 혼내주어야 겠다고 처음으로 직접 관장한 전투다. 그곳 이른이 여러번 바뀌었다. 강희 자전에는 “漢中山郡,唐改定州,以安定天下爲名”라 했다.
금미달(今彌達)이 있던 곳은 수경주 보인다.[40] 중국 기록에는 임유관 전투가 발생 했던 곳을 골대 또는 골대성(滑臺城) 이라 했다. 수문제의 동생 양찬(楊瓚:550-591)이 한창 젊은 나이에 북쪽 세력 (獯虜閒釁)을 방어 하다 죽었다. 그의 고별사에 미달(彌達)이란 글자가 보인다. [41] 고죽(孤竹) 이란 어음을 전주하여 독고(獨孤)씨가 나타났다. [42]
이러한 사실을 은패 하려고 글자와 장소를 바꾸고 동생을 아들로 바꾸었다.
관자가 여주(餘州, extra state)라고 했던 곳은“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여 오던 기마유목민족의 지도자를 북주후모(北州侯莫)라고 했다. 금국미란(今國彌亂) 문구도 있다. 서주 세력을 쫓아 버린 고조선 사람들(彌)이 중원을 석권 했다. 하여 환공이 하소연을 해서 제후들의 협조를 얻어 북쪽에 있던 여주/북주후 모(北州侯莫)가 다스리던 발조선 (發朝鮮)정벌에 나섰다가 활 한발 못쏘고 도망 쳤다. 그 후에도 미란 (彌亂) 이란 글자가 여러 시대 문헌에 실렸다. 조선 (朝鮮)이 활발(發)해 졌다는 뜻이다. [43]
산서성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그전 보다는 더 좋은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여 좋은 철기를 생산 했다. 춘추시대의 말기에는 철의 공급이 보편화 되면서 산서성 사람들 세 가문이 철(鐵)로 만든 무기로 동주를 압박하여 제후의 반열에 들어 섰다. 철과 소금이 나는 지역을 해왕지국(海王之國)이라 했다. 해왕(海王)을 비주(非主), 범인군(凡人君), 또는 모비왕 (莫非王) 이라는 등등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온 천하는 모두 비왕의 땅 (溥天之下、莫非王土)이란 시구가 옛 부터 북쪽에 천독이 산다하던 시경 북산(北山)에 있다.
그곳 사람들이 개발한 새로운 금속 재조기술이 중원 전역에 퍼져 전국시대 (戰國時代,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가 시작 되었다.
서주족의 노예로 취급 당했던 고조선 사람들이 왕검조선의 발생지인 하동 해지(解池, small salt lake) 일대를 되 찾았다. 이어 서주를 동쪽으로 쫓아버린 때부터 금미달이 남쪽 세력에 점령 당한 시기 까지를 조선이 활발 하던 시대(發朝鮮 時代)라고 정의 함이 타당 하다.
단군왕검을 살해 하고 나타난 중국 문화권에서는 황제치하 유교사상에 따라 역사서를 만들어 고조선의 시말을 숨겼다. 고조선 발동시대(朝鮮發動 時代) 후기에 나타난 제자 백가등, 외서라고 부르던 여러 기록에 고조선의 시말이 은미 하게 실려 있다.
북쪽으로 되돌아 갔던 고조선의 후예들은 그들의 전통 사상에 따라 구전해 오던 옛 예기를 만주 땅에 정착한 이후에 기록으로 남겨, 환단고기의 시초가 되었다.
사천성을 지나 운남성에 이르렀던 고조선의 후손들이 인도 동북부에 올라가서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불교 서적에는 옛적 한국어가 많이 남아 있다.
간단한 예로 불교 스님을 음과 뜻을 인용 하여 “梵語謂僧曰苾芻: Bì chú: Bhikṣu,又云煏芻。同於舊譯之比丘。譯曰乞士,除士,除饉男,熏士,道士等。出家為佛弟子,受具足戒者之都名也。以此方無正翻之語,故經論中多存比丘。苾芻之梵名,或以乞士 苾芻尼:又作煏芻尼 Bhikṣuṇī,即比丘尼也。尼者女聲。男僧云苾芻,女僧云苾芻尼”등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인도(印度)란 천부인(天符印)이 도착한 곳이란 뜻이다.
[1]. 三國遺事:都平壤城 始稱朝鮮。移都於白岳山阿斯達。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壽一千九百八歲。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2]. 尚書 商書 微子: 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太平御覽:《括地圖》曰:天毒國最暑熱,夏草木皆乾。
[3]. 尚書 西伯戡黎: 殷始咎周,周人乘黎。祖伊恐,奔告于受,作《西伯戡黎》.孟子 離婁上: 孟子曰:「伯夷辟紂,居北海之濱,聞文王作,興曰:『盍歸乎來!吾聞西伯善養老者。』太公辟紂,居東海之濱,聞文王作,興曰:『盍歸乎來!吾聞西伯善養老者。』二老者,天下之大老也,而歸之,是天下之父歸之也. 新序 善謀下:周之先自后稷,堯封之邰,積德累善十餘世,公嬌避桀居邠,大王以狄伐去邠,杖馬策居岐國,人爭歸之,及文王為西伯,斷虞芮訟,始受命,呂望、伯夷自海濱來歸之,武王伐紂,不期而會孟津上八百諸侯,滅殷,成王即位,周公之屬傅相,乃營成周雒邑,以為天下中,諸侯四方,納貢職道里均矣。
[4]. 管子 海王:桓公曰:「何謂官山海?」管子對曰:「海王之國,謹正鹽筴。」桓公曰:「何謂正鹽筴?」管子對曰:「十口之家,十人食鹽。桓公曰:「然則國無山海不王乎?」管子曰:「因人之山海假之,名有海之國,讎鹽於吾國。釜十五吾受,而官出之以百,我未與其本事也,受人之事。以重相推,此人用之數也。」. 二 年,桓公彌亂,又告管仲曰:「欲繕兵。」管仲又曰:
[5]. 康熙字典: 彌:益也,長也,久也.《說文》弛弓也。徧也。彌綸天地之道.《前漢·李廣傳》彌節白檀。《註》彌節,少安之意。通作弭. 康熙字典 胡:《詩·豳風》狼跋其胡。《傳》老狼有胡,進則躐其胡。《釋名》胡,互也。在咽下垂,能斂互物也。《前漢·郊祀志》有龍垂胡䫇。《註》胡謂頸下垂肉也。又《韻會》何也。《傳》胡,壽也。《史記·諡法》彌年壽考,保民耆艾,𠀤曰胡。《註》胡簋,禮器。夏曰胡.《註》黃帝臣。康熙字典:《前漢·金日磾傳》捽胡投何羅殿下
[6]. 戰國策 燕策:且夫秦之攻燕也,逾云中,九原,過代,上穀,彌地踵道數千里,雖得燕城, 秦計固不能守也. 史記 蘇秦列傳: 且夫秦之攻燕也,九原,過代,上谷,彌地數千里,雖得燕城,秦計固不能守也.
[7]. 史記 匈奴列傳:北破林胡、樓煩。而置雲中、鴈門、代郡。其後燕有賢將秦開, 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8]. 康熙字典: 𧸟作𨝌。又桑乾,河名。卽濕水。《水經注》濕水,出鴈門隂館縣東北,過代郡桑乾縣南,又東過涿鹿縣北,又東南出山過廣陽薊縣北。
[9]. 博物志: 箕子居朝鮮,其後伐燕,復之朝鮮,亡入海,為鮮國. 漢書:「南戍為越門,北戍為胡門。」其後漢兵擊拔朝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10]. 三國志 魏書三十 鮮卑傳: 聞汗人善捕魚, 於是檀石槐東擊汗國, 得千餘家. 然荒域之外, 重譯而至. 譯人傳辭,皆跪,手據地竊語. 廉斯鑡為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 吏譯轉有異同.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後漢書:烏桓鮮卑列傳: 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
[11]. 漢書 志: 然東夷天性柔順,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 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 其後漢兵擊拔朝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12]. 博物志: 大宛國有汗血焉,天馬種。漢魏西域時有獻者. 靈帝和光元年,遼西太守黃翻上言:海邊有流尸,露冠絳衣,體貌完全。後翻感夢云,我伯夷之弟孤竹君也,海水壞吾棺郭,求見掩藏。民有襁褓視者,無疾而卒.
[13].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 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 是為辰韓六部。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北溟人耕田,得濊王印,獻之. 突山高墟村
[14]. 史記匈奴列傳: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遼西、遼東郡以拒胡. 《史記·高祖功臣侯表》襄平。《索隱曰》屬臨淮。
[15]. 晉書: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
[16]. 康熙字典:《說文》𧸟作𨝌。又桑乾,河名。卽濕水。《水經注》濕水,出鴈門隂館縣東北,過代郡桑乾縣南,又東過涿鹿縣北,又東南出山過廣陽薊縣北。
[17].三國志: 吳主傳: 特下燕國,奉宣詔恩,令普天率土備聞斯慶。」三月,遣舒、綜還,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乘海授淵. . 吳書曰:初,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衆,置遼東諸縣.
[18]. 康熙字典:《說文》𧸟作𨝌。又桑乾,河名。卽濕水。《水經注》濕水,出鴈門隂館縣東北,過代郡桑乾縣南,又東過涿鹿縣北,又東南出山過廣陽薊縣北。
[19]. 梁書: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辰韓亦曰秦韓,相去萬里,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馬韓亦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魏時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普通二年,王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晉書: 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
[20].隋書: 初平東夏,人情未一,叢臺之北,易水之南,西距井陘,東至滄海,比數千里,舉袂如帷。 護兒率樓船,指滄海,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與高麗相遇。進擊,大破之,乘勝直造城下,破其郛郭.通典 漕運:別以舟師濟滄海,舳艫數百里,並載軍糧,
[21].論語注疏 述而: 王弼云:「老是老聃,彭是彭祖。老子者,楚苦縣厲鄉曲仁里人也,姓李氏,名耳,字伯陽,謚曰聃,周守藏室之史也。」云「好述古事。我若老彭,但述之耳」者,言老彭不自制作,好述古事。仲尼言,我亦若老彭,但述之耳。
[22].彝族: Yi script – Wikipedia.
[23]. 大唐西域記: 姨母所獻金縷袈裟。慈氏成佛留以傳付。若比丘比丘尼鄔波索迦唐言近事男。舊曰伊蒱塞。又曰優波塞。又曰優婆塞。皆訛也鄔波斯迦唐言近事女。舊曰優婆斯。又曰優婆夷。
[24]. 太平廣記 金可記: 金可記,新羅人也,賓貢進士。性沉靜好道,不尚華侈。或服氣鍊形。自以為樂。博學強記,屬文清麗. 全唐詩 自淇涉黃河途中作十三首: 南登滑臺上,卻望河淇間。竹樹夾流水,孤城對遠山. 秋日登滑台,台高秋已暮。
[25]. 太平廣記 新羅: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畝,乃求蠶穀種于弟,弟蒸而與之。旁㐌不知也。其後子孫戲錐求狼糞,因雷震,錐失所在。出《酉陽雜俎》@.방이(旁㐌)설화
[26]. 三國遺事: 樂浪國前漢時始置樂浪郡。樂浪即平壞城。宜矣。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為始祖。宜矣。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三國史記:中國史書也,猶存楚語「穀於菟」、匈奴語「撑犁孤塗」等。今記新羅事,其存方言,亦宜矣。臣等以為新者德業日新,則其為國號,宜矣.
[27]. 康熙字典:渝:變汙也。一曰渝水,在遼西臨俞,東出塞。《水經注》宕渠郡,蓋古賨國,今賨城縣有渝水。本巴國. 隋攺爲渝州。《詩·鄭風》羔裘如濡,洵直且侯。彼其之子,舍命不渝.
[28]. 魏書帝紀第五 高宗紀: 和平四年七月壬午 詔曰:「朕每歲以秋日閑月,命群官講武平壤。所幸之處,必立宮壇,糜費之功,勞損非一。宜仍舊貫,何必改作也。」八月丙寅,遂畋於河西.
[29]. 康熙字典:傿:《唐韻》音匽。《玉篇》引爲價也。與鄢同。縣名。《前漢·地理志》傿屬𨻰留郡。《註》同鄢。又《國名記》傿,䢵姓。今襄之宜城,楚之鄢都。音焉。神仙名。《揚子·太玄賦》納傿祿於江淮兮。《註》二神仙名. 三國遺事: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30]. 馬邑之圍:馬邑之謀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馬邑: 今山西北部朔州
[31].藝文類聚 給事中:誄】《宋顏延之給事中楊瓚誄》曰:瓚少稟志節,資性忠淳,永初之末,佐守滑臺,獯虜閒釁,劑剝司兗,瓚立乎將帥之閒,以緝華裔之眾,疲困相保,堅守四旬,兵盡器竭,斃于旗下,非夫貞壯之氣,勇烈之志,豈能臨死殉義,以死償節者哉。烈烈楊子,在困彌達,力雖可窮,氣不可奪,義立邊疆.通典 兵五 明賞罰:後漢大將曹公每攻城破邑,得靡麗之物,則悉以賜有功者。若勳勞宜賞,則不骡萬金;無功冀施,分毫不與.
[32].水經注 河水: 河水又東,右逕滑臺城北,城有三重,中小城謂之滑臺城,舊傳滑臺人自脩築此城,因以名焉. 通典:十六國前燕將慕容垂討丁零翟釗於滑臺. 全唐詩 自淇涉黃河途中作十三首: 南登滑臺上,卻望河淇間。竹樹夾流水,孤城對遠山. 秋日登滑台,台高秋已暮。
[33]. https://zh.wikipedia.org/wiki/%E7%8D%A8%E5%AD%A4%E5%A7%93
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A%B3%A0.
[34]. 通典 古冀州:鎮州今理真定縣。春秋時鮮虞國之地。左傳曰:「晉荀吳以上軍伐鮮虞。」注云:「中山新市縣也。」戰國時屬趙。趙之東恒邑也。秦屬鉅鹿郡。漢高帝置恒山郡,後避文帝諱,改曰常山郡,亦屬真定國。後漢屬常山國。後周置恒州,領常山郡。隋初廢,煬帝初州廢,復置常山郡。大唐武德元年復置恒州,或為常山郡。[鉅鹿郡 清河郡 涿郡勃海郡]
[35]. dictionary:鴈王: 佛之異名。與鵝王同。以佛三十二相中。如鴈如鵝. 鵝王: 譬佛也.
[36].水經注 河水: 河水又東,右逕滑臺城北,城有三重,中小城謂之滑臺城,舊傳滑臺人自脩築此城,因以名焉. 通典:十六國前燕將慕容垂討丁零翟釗於滑臺. 全唐詩 自淇涉黃河途中作十三首: 南登滑臺上,卻望河淇間。竹樹夾流水,孤城對遠山. 秋日登滑台,台高秋已暮。
[37].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七: 七年夏五月,遣使入北齊朝貢。秋九月,突厥來圍新城,不克,移攻白巖城。王遣將軍高紇,領兵一萬,拒克之,殺獲一千餘級。新羅來攻,取十城郡
[38].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七: 三國史記 嬰陽王九年,王率靺鞨之衆萬餘,侵遼西,營州摠管韋●擊退之。隋文帝聞而大怒,命漢王諒、王世績王世積●
[39].舊唐書太宗上: 大業末,煬帝於雁門為突厥所圍,太宗應募救援,隸屯衛將軍云定興營。
[40].藝文類聚 給事中:誄】《宋顏延之給事中楊瓚誄》曰:瓚少稟志節,資性忠淳,永初之末,佐守滑臺,獯虜閒釁,劑剝司兗,瓚立乎將帥之閒,以緝華裔之眾,疲困相保,堅守四旬,兵盡器竭,斃于旗下,非夫貞壯之氣,勇烈之志,豈能臨死殉義,以死償節者哉。烈烈楊子,在困彌達,力雖可窮,氣不可奪,義立邊疆.通典 兵五 明賞罰:後漢大將曹公每攻城破邑,得靡麗之物,則悉以賜有功者。若勳勞宜賞,則不骡萬金;無功冀施,分毫不與.
[41].水經注 河水: 河水又東,右逕滑臺城北,城有三重,中小城謂之滑臺城,舊傳滑臺人自脩築此城,因以名焉. 通典:十六國前燕將慕容垂討丁零翟釗於滑臺. 全唐詩 自淇涉黃河途中作十三首: 南登滑臺上,卻望河淇間。竹樹夾流水,孤城對遠山. 秋日登滑台,台高秋已暮。
[42]. https://zh.wikipedia.org/wiki/%E7%8D%A8%E5%AD%A4%E5%A7%93
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A%B3%A0.
[43]. 管子:二年,桓公彌亂,又告管仲曰,鮑叔謂管仲曰:「異日者,公許子霸,今國彌亂,子將何如?」管仲曰。惡金以鑄斤斧鉏夷鋸欘. 管子 輕重甲 管子對曰:「吳越不朝,珠象而以為幣乎!發朝鮮不朝,請文皮毤。服而以為幣乎!禺氏不朝:@: 紂政彌亂. 以彌亂發姦. 管子海王. 管子對曰:「海王之國,謹正鹽筴。」 請以令斷山木鼓山鐵,今鐵官之數曰.
VI 불교 서적에도 마땅히 한국 상고사가 실렸다.
확실한 근거가 중국 스님들이 작성한 불교 백과 사전에 아래와 같이 실렸다.
《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其書下行. 《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 阿斯陀
제가 계속 주장해 온 “우리 선조가 동북아에서 음으로 상형 글자를 만들어 썼다는 증거가 스님들이 남긴 기록으로 나타났다.
글자를 만든 사람은 셋이다. 첫째가 범(梵)으로 오른 쪽으로 쓴다. 두째는 구로(佉盧)다. 왼쪽으로 쓴다. 막내가 창힐이다. 아래로 쓴다. 기록에 나타난 글자의 사용은 선왕 때에 중산국에서 잡혀 온 태사(太史) 주(籒)가 쓰던 글자다. [1] 이사가 처음으로 황제의 도장 화씨벽(和氏之璧) 을 만들고 진시황 송덕비문을 남겼다. 기가 전해 오던 대소 전자(大小篆)를 정리 하여 창힐편 (蒼頡篇)을 썼다. [2] 급군에 있던 위 양왕(魏襄王; 318–296 BCE) 묘 에서 많은 죽간이 발국 되었다. 그 내용은 모두 소전자(小篆古書)로 기록된 위나라의 역사서였다. 그 내용에 백익이 살해 당했다는 기록이 실렸다. [3]
육서“六書” 란 “陸書”를 고의적으로 바꾼 글자다. 즉 홍산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던 방법이란 뜻이다.
불가 서적에 고조선의 첫 수도 아사달과 그 곳에 살던 단군이 적혀 있다. [4]
거루(佉盧)는 (Khara,又作佉樓,仙人名,見佉樓條)으로, 고조선 마지막 수도 금미달에 살던 단군을 비하해서 적은 글자다.
숙구(儴佉)라고 읽는 글자는 조나라 옆에 있던 양국 “趙國襄國” 에 살다 떠나간 사람이란 뜻을 지닌 글자로,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금미달의 마지막 단군을 비하한 글자다. 단군선인이 살던 큰 집을 다락 루(樓)라 했다. 거루(佉盧)가 여러 글자로 그록에 나타난 가라의 어원이다.
그의 선대 여러 단군을 “轉輪聖王” 또는 “轉輪王” 이라 하고, 아사달을 아사다(阿私多) 또는 아사타(阿私陀)라고 기록 했다.
[1]. 康熙字典: 史籒,周宣王太史名,造大篆。《法書攷》籒文者,史籒所作也,與古文大篆小異,後人以名稱書,謂之籒文。《七略》曰:卽周時史官敎學童書也,與孔壁古文異體,卽奇字也。其跡則《石鼓文》存焉。《學古編》李斯旣作小篆,遂以籒文爲大篆。又《說文》讀書也.
[2]. 太平廣記李斯: 秦丞相李斯曰。上古作大篆,頗行於世,但為古遠。人多不能詳。今刪略繁者,取其合體,參為小篆.斯妙篆,始省改之為小篆。著「著」原作「者」,據明鈔本改。。《蒼頡篇》七章。雖帝王質文,世有損益,終以文代質,漸就澆醨。則三皇結繩,五帝畫象,三王肉刑,斯可況也。古文可為上古,大篆為中古,小篆為下古。三古為實,草隸為華。妙極於華者羲、獻,精窮其實者籀、斯。始皇以和氏之璧。琢而為璽,令斯書其文。
[3]. 晉書 魏襄王: 初,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或言安𨤲王冢,孫守真按:冢,原作「●缺字:冢冖下豖上有一橫」,餘同不贅。得竹書數十車。其《紀年》十三篇,記夏以來至周幽王為犬戎所滅,以事接之,孫守真按:一曰當作「以晉事接之」,脫「晉」字。三家分,孫守真按:點校本云「三家分何焯批云,「分」下當有「晉」字,殆當日諱而去之。」仍述魏事至安𨤲王之二十年。蓋魏國之史書,大略與《春秋》皆多相應。其中經傳大異,則云夏年多殷;益乾啟位,啟殺之;太甲殺伊尹;文丁殺季歷;自周受命,至穆王百年,非穆王壽百歲也;幽王既亡,有共伯和者攝行天子事,非二相共和也。
[4]. https://ctext.org/zh: 阿私仙: 又作阿夷,阿私陀,阿斯陀Asita等。譯曰無比端正。名義集二曰:「阿斯陀,或云阿夷,此翻無比,又翻端正。」有二人:一人於過去世為釋尊說法華經者。見法華經提婆達多品。一人為釋尊生於淨飯王宮時相之者。見因果經一. 淨飯王: 迦毘羅衛國之王,釋尊之父王也。名義集三曰:「首圖馱那Śuddhodana,此云淨飯或云白淨。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