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동호문화(東胡文化)
춘추전국시대를 통하면서 중원에서 계속되는 전쟁을 피하여 북쪽 멀리 떠러진 낙원 (遼寧)으로 피란을 갔다. 그 낙원을 만든 사람들이 관중분지에서 중원을 거치지 않고 분수를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와 다시 발해만 서북연안에 정착하였다. 이를 관자에는 “구진하; 拘秦夏”라 는 문구로 제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정벌”하려 올라가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를 동쪽으로 온 호 라 하여 동호라 했다. 이들이 갈석산 유역에 있던 정착민이다. 상나라 유민들 그들과 같이 고조선 땅에서 문화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북쪽 사람들과의 전쟁 기록은 사기흉노 열전에 요약해서 나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다른 문헌에서 찾아본 기록과 비교해 보면 어느정도 실체가 드러 납니다. 협곡관 서쪽에 살던 하후씨의 후손, 즉 흉노족에 밀려 동주가 된 후에도 흉노세력은 주 왕실을 우협하여 흉노를 서주 황후로 받아그리는 화친조약 과 같은 타협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 환공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저 그가 폐자가 된게 아닙니까? 하북 평원은 흉노라 하는 고조선 주민의 판도가 되였섰습니다. 제와 산융이 연을 지나(越燕) 서로 공격 했지않나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제후국 연(燕)이 하북성 북쪽에 있었겠습니까? 아주 미약한 세력이였다고 봅니다.
전국시대 말기가 소진(蘇秦,?-기원전317, 284년?)이 활동 하던 시기다. 동북아시아 강력도를 판가름 하는 전국시기의 절정기다. 그러나 그의 생사 년도가 확실치 않고, 당시 고조선과 국경을 같이 했다는 연(燕)의 강력도는 물론 하고 군주의 이름과 치세기간도 미궁에 빠저 있다. 확실한 것은 전국시대에 국력이 팽창하던 진(秦)을 함곡관(函谷關, 三門峽) 서쪽에 가두어둔 사람이 소진(蘇秦)이다.
중원 연합 세력은 서쪽에 있던 진(秦)이 함곡관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여러번 싸웠다.
그 첫번 쩨 함곡관 전쟁 (函谷關之戰) 이 기원전 318년 에 일어 났다. 그 때 한원의 맹자였던 진(晉)은 기원전 403년에 이미 “한조위(韓, 趙, 魏)세 나라”로 갈라젔다. 이 세 나라가 함곡관 동쪽에 있던 “초, 연; 楚, 燕” 두 나라와 합작 하여 다섯 나라 연합군이 진(秦)과 싸웠다. 동쪽에 멀리 떠러저 진(秦)의 위협을 직접 느끼지 않았던 제(齊)는 참전 하지 않았다. 소진은 전국시대에 함곡관 서쪽에서 팽창하던 진을 상데로 관문 입구에서 어쩔줄 모르던 연나라 문후 (文侯, 燕文公: 서기전 361-333년)를 찾아가 주변 상황을 설명 하면서 진 혜문공 (秦惠文公;기원전 356-311년) 이 연(燕) 세자를 사위로 맞아 드리는 합의를 함곡관 서쪽 해지 유역에 있는 안읍 (安邑) 에서 했다. 진 혜문왕은 서자 직(稷)을 연(燕)에 인질로 보냈다. 그가 돌아와 제28대 군주가 된 진소왕(秦昭王)이다. 지과 연 두 나라가 멀리 떠러저 있었다면 왜 서로 인질을 주고 받고 했겠는가.
20년 후에 같은 곳, 함곡관 일대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 났다. 그 때는 연(燕)에 와있던 소진이 연(燕)문후 부인과 사통한 사실이 드러나자 제(齊)로 도망 갔다. 하여, 두나라 사이가 악화되여 전쟁도 많이 했다. 연은 진(秦)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참전치 않았다. 연(燕)과 진(秦)의 지도자가 만나 합의 했다는 안읍이 옛적에 하 왕조 마지막 왕 걸이 성탕과 싸웠다는 명조 (鳴條)다. 이러한 문헌을 살펴 보면 그 때는 동주 (東周) 정 (鄭) 연(燕)이 함곡관 동쪽 일대 가까이 서로 접하고 있었다 .
세번쩨 함곡관 전쟁 (函谷關之戰)이 기원전 241년에 일어 났다. 이 때에도 첫번 전쟁 때와 같이 동쪽에 있던 “초,한,조,위,연; 楚, 韓, 趙, 魏, 燕”다섯 나라 연합군이 진(秦)을 막으려 했스나, 소진을 만났던 진(秦)의 새로운 군주 진왕 정(秦王政, 秦始皇)이 함곡관을 뚫고 나와 점차로 중원을 장악하고 결국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 했다. 이렇게 중원이 어수선한 상황 속에 피란민은 북쪽 고조선 땅으로 도망 갔다. 진수의 삼국지 한전(三國志 韓傳 )에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동주의 세력이 약해진 상황을 본 (고조선 서쪽에 있던) 연(燕)의 군주가 왕이라 칭하고 동쪽에 있던 조선을 치려하자 조선후(朝鮮侯)도 왕이라 칭하고 발병하여 연(燕)을 치러 했스나, 대부 예 (禮 )가 간언하여 그 계획을 중지시켰다. 조선왕은 대부 예를 연나라 보내 설득시켜 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였다. 후에 조선후의 자손이 교만하여 연(燕)이 진개로 하여금 조선의 서방을 곡격하여 땅2000리를 빼았고 만진번한을 경계로하여 조선이 쇠약해 젔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연의 북쪽 세력을 막기 위하여 동서로1000나되는 성을 쌓았다고 한 말”을 과장하여, 삼국지에느 산해관을 지나 남북으로 2000리나 되는 연의 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그 당시 중원의 사정을 고려 하면서 연과 조선후에 관한 기록을 숙독(熟讀)해 보면 그 때의 조선 왕은 기(暨)또는 발(發)자로 기록된 성씨였다. 한고조가 옛적 소꼽 친구 였던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했다. 뒤에 연에 살던 위만이 도망하여 호복을 입고 패수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다. 호복을 입고 왔다는 말은 가장이 아니라 그 곳 사람들이 모두 동호 (東胡)였다는 뜻이다. 이름자를 보아도 한족이 아니란 뜻이 분명 하다. 연에서 살던 위만을 한국 기록 에는 나라위 (魏)자로 적었다. 모두 ‘위/높다’는 뜻을 그린 표음문자다.
사마천은 사기 흉노열전을 쓰면서 이 기조선을 동호(東胡)라고 했다 . 옛 고조선이 흉노의 급습으로 와해 되기 전에는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동호라 했다는 증다. 그러면서 진시황의 땅이 동북쪽 산맥을 따라 요수 (遼水)를 지나 동쪽에 이르러 동북 국경은 바다와 “기조선 Gyi Joseon 暨朝鮮” 이라고 했다 . 서쪽 조양 (造陽)에서 동으로 양평 (襄平)에 이르렀던 연(燕)의 장성을 더 연결 하여 발해만 서쪽 바다에 접한 오늘의 산해관에 이르렀다.
진개가 동호에 인질로 갔다 돌아와 동호를 첬다는 기록은 위약에서 인용했다는 ‘대부 예가 연에 가서 연을 설득시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설명과 일치 한다.
진개가 “취 했다는 땅 2000리; 取地二千餘里” 땅은 어디였나?
삼국지 보다 먼저 편찬된 사기 (史記)에서는 “동호를 연의 북쪽으로 쫓고 거리가 1000되는 땅을 빼았아 그들을 막기위하여 (탁록전이 있었던 상곡(上谷)에서 부터 당산일대에 이르는, 즉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 에 이르러는 장성을 쌓아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이 동호와 접하게 되였다”고 했다. 후에 진시황이 쌓은 만라장성은 동쪽 끝이 발해만 서안에 이르렀다고 했다. 진시황 때에 쌓은 장성이 경계선이 였고 이를 한(漢) 나라가 그대로 이어 받았다 .
양평(襄平)은 오늘의 해하 (海河)를 건너 당산 일대에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산해관을 지나 천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은 진개의 친입 전까지는 고조선 영토 였다. 이를 염철론(鹽鐵論)에서는 연(燕)이 동호를 습격하여 “벽지천리; 辟地千里” 라 했다. 1000리 땅을 얻어/빼았아 개발했다는 뜻다. 그 후에 “도요동이 공조선; 度遼東而攻朝鮮”이라는 문구를 더 했다. 요수(遼水) 즉 오늘의 해하 (海河) 건너 편에 있던 조선땅을 첬다는 뜻이다. 진개의 공격으로 조선은 진시황 이전의 요동, 즉 해하(海河) 유역, 천진 당산 (唐山) 일대 에서 동북 쪽으로 밀렸다.
연의 영토를 넖였다는 강력도가 한비자(韓非子) 에 잘 나와 있다 .
연 소양왕 (燕昭襄王, 기원전312-279년) 이 “하(河,즉 海河/옛遼水) 를 경계로 하고 오늘의 북경과 천진 사이에 있는 계현(薊)을 속국으로 만들고, 탁군, 방성(方城)과, 제 (齊)의 잔여 새력 (山戎, 東胡)을 공격하고 서북쪽의 옛 중산국을 평정 했다.” 이 곳이 북경 서남쪽으로 유비의 고향인 탁군 일대다. 방성(方城)이 곧 앞에서 말한 퇴당성 (頹唐城)이다.
이 전공을 사기에서 부터 후세 여러 사가들이 춘추 필법에 따라 은밀하게 과장확대 하여 지금도 인용하고 있는 사료다. 진개는 갈석산을 지나지 못했다. 청조 때 편찬된 “독사방여기요( 讀史方輿紀要)”에도 진(秦)의 영토가 패수 (浿水) 를 지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진수는 사기에 나오는 1000를 늘려 2000리라 했고, 그 후에는 동서로 측정하여 2000리란 거리를 산해관을 지나, 요양 서쪽에 있는 요하(遼河)를 건너, 오늘 만주의 동북쪽인 요동(遼東)에 이르는 땅2000리를 빼았았다고 설명하고, 연(燕)이 장성을 그 곳에 까지 쌓았다 주장한다. 발해만 서안에 있던 요동을 남만주 동쪽에 있었다고 뒤 바뀌어 설명하고 있다.
고조선을 다른 이름으로 발조선, 기조선, 동호, 예맥조선:
진수는 옛 조선을 한전 (韓傳)에 넣었다. 그러니 삼국지에 기록된 조선후 (朝鮮侯)는 한후(韓侯)라고 부를수 있고 그가 살던 곳은 마땅히 한후의 성, 시문에 나오는 “부피한성;溥彼韓城 ” 이 라고도 풀이 할수도 있다.
조선후의 성이 한씨였다는 증거는 그 다음 문장에서 진수 스스로가 밝혔다. 위만이 서쪽 변방을 지키다 그의 정예부대를 끌고 준왕이 살던 궁에 들어가 (갑짜기 가면을 벗고) 칼을 빼어드니, 준은 황급결에 좌우 궁인만 대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 갔다. 하여 그곳에 남아 있던 준의 자녀와 친척이 “모성한씨(因冒姓韓氏)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했다. 이 모성 (冒姓)이란 형용어구가 한국에 있는 여러 가문의 이름 앞에 쓰이었다. 안록산의 후손이 안씨를 성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즉 모성(冒姓)은 그 부족의 어머니가 “소가 우는 소리; móu mù mào牟,馬”라고 기록 되였던 부족”이 란 증거가다. 조선후는 주왕실의 희성한씨 (姬姓韓氏)와는 다른 예맥(濊貃,貉) 조선의 한씨(韓氏)였다는 뜻이다. 모성(冒姓)이라고 하는 부족에서 신라 박씨 (朴氏)의 시조 박혁거세가 말(馬)에서 나타났다.
준왕이 바다로 들어 가니 부여 (不與)와 조선 (朝鮮)이 서로 왕래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왕래가 끊어저 사라지고 말았다.
준왕이 황급히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 갔다 하니 그는 해변 가까이에 숨었다가 점차로 해변을 따라 안전한 곳을 찾아 정착 했다고 본다. 필자의 영문본에는, 기준이 정착 한 곳이 뒤에 염사치(廉斯鑡) 일화에 나오는 대동강 하류라고 풀이한 마한 (馬韓)땅이라 했다. 그 곳을 한사군 낭랑(樂浪) 이라고 잘못들 풀이 한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더 자새히 다루기로 한다.
진시황이 고조선 땅을 친입 했는가? 그럴 수가 없다.
진시황이 중국의 가장 동북쪽에 있던 연을 섭멸한 이후 옛 연의 장성을 서쪽에 있던 장성과 연결하여 만리 장성을 쌓았다. 그 렇게 긴 성을 쌓은 이유는 진시황이 북쪽 변경을 순회 할때 수행원이 녹도서(錄圖書)에 있는 문구를 인용하여 아뢰기를 “진을 멸망할 자는 호(胡)다”하여 북쪽에 있던 호(胡, 東胡, 朝鮮胡)의 친입을 방지 하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 동호 (東胡), 즉 고조선을 두려워 했지 공격 했다는 기록은 없다 .
국경선이 어디였나: 패수 (浿水)가 국경이라 했지만, 그 곳이 어디에 있는 강이냐를 놓고 아직도 시비가 일고 있다. 앞에 인용한 사기와 삼국지에 있다. 패수가 있던 곳이 옛 요동이 분명 하다. 이 곳을 진수는 “지만번한위계; 至滿潘汗為界”라 했다. 이런 표현은 삼국지 한 곳에만 보인다. 진수가 만든 문구다. 무슨 뜻일 까요?
위만의 영토 반/번/판한 (潘汗)에 이르러 경계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두 글자는 그 지역에서 쓰던 말을 이리저리 뒤부꾸어 만든 표음문자가 분명 하다. 그 곳에 패수라고 하던 강/여울이 있어야 한다. 한 (汗)은 한 (韓)이다. 요동에 사마천의 조선 열전에 나오는 진번(真番)을 다른 글자로 적었다. 이곳이 한무제가 만들었다는 한사군의 한 이름이였지만, 곧 사라지고 한 무제시대에 발해만 서안에 있었던 낭랑군에 흡수 되였다. 진번(真番)은 산해관을 거처 우거왕의 수도에 이르던 길목에 있었어야 한다. 삼한 중에서 가장 흡사한 이름이 변한이다. 패수 (浿水)는 변한 (卞, 弁韓, 示韓) 땅에 있었다.
고조선의 수도 즉 제도 (帝都)가 산해관 북쪽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중원과는 이곳을 지나야만 되는 중요한 해육로(海陸路)를 통하여 무역을 했다는 증거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도이 (島夷)라 했고 그와 글자가 비슷한 글자 “鳥, 烏, 鳧”로 기록 했고, 우(禹)의 동음대자를 사용한 기록도 있다.
이 기록만을 보아도 하우씨의 후손이 고조선 땅에 살았다는 뜻이 분명하다. 이 혈연관계를는 하백의 딸이 주몽(朱蒙)의 어머니란 말이 또다시 증명해 준다. 청말의 훈고학자 장태염 (章太炎)은 “고조선은 말갈(韃靼)의 후예들이 새운 나라”라고 했다. 순임금 때부터 강력도와 (가첩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수도가 영주(營州)일대에 있였다고 했다 .
고조선 땅에 큰 전란이 있었지만, 중원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라 고조선 땅에서 있었던 커다란 전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흉노열전에 모두선우가 기원 전 208년에 동호을 멸했다는 기록이 짧게 나온다:
이 동호왕이 고조선의 부왕(否王)이다. 진시황도 감히 넘보지 못했으니 기준 (箕準:否死,其子準立)의 아버지는 자만 하여 (전과 같이) 서쪽 흉노를 바볍게 다루고 전쟁 준비마저 하지 않아 모둔선우에게 급습을 당하여 죽고 흉노는 많은 인질과 가축을 끌고 돌아 갔다. 이 사건이 고조선 황금시대의 마지막이다. 이후에 있었던 고조선 영역을 진수가 기술한 삼국지에 잘 나와 있다. 옛 고조선 연맹체는 무너저서 서쪽에는 선비 오환이 나타났고, 동쪽에는 부여를 비롯한 동이 여러 부족이 나타 났다. 선비산에 숨어 난을 피했다 하여 선비족이라 한다는 말은 그들이 만들어 붙인 이름이다. 선비산이 흑산 (黑山) 즉 의무려산이고, 이 산을 삼국유사에서는 “백악산 아사달”이다.
중원이 춘추전국시대라는 긴 전란을 격는 동안 만주 땅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은 그 곳에서 번영하여 “저 멀리 평화스러운 곳, 정치 싸움을 하는 군장이 없는 큰 사람이 다스리던 곳, 요녕 (遼寧)이란 말이 나타났다 . 중원 사람들은 그 곳에서 나는 좋은 상품을 구하려 노력했다. 이를 인간의 이성적인 욕구라 했다. 그러한 평화스러운 곳에 살던 우리 선조 고조선 사람들이 남긴 유적을 동호 문화(東胡文化)라 한다.
끝
November 30,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