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건립부터 목야전 바로전 까지:
기원전 2333년-기원전 1046년.
좀더 첨부하렵니다.
단군왕검 백익을 잃고 분邠수를 따라 북쪽으로 피란 갔던 고조선의 후손이 상나라 무을(武乙: 1147 to 1112 BC)원년에 기산 유역으로 내려왔다. 그 곳에 서주의 시조로 알려진 고공단보(周公亶父)가 들어와 알력이 생겼다.
단보(亶父)가 전사/하고 뒤를 이은 셋쩨 아들 계력(周公季歷)이 원수를 갚았다. 그가 주 문왕(周 文王,기원전 1152년~1056년)이다.
竹書紀年 武乙: 元年壬寅,王即位,居殷。邠遷于岐周
三年,自殷遷于河北。命周公亶父賜以岐邑. 二十四年,周師伐程,戰于畢,克之
무을의 두를 이은 문정(文丁) 2년에 계력이 해지 연안 전투에서 실패 했다. 그후 전공이 많은 계력(季歷)을 죽였다. 계력의 아들 창(子昌立)이 뒤를 이었다. 그가 서백 주문왕(西伯曰文王)이다. 그의 아들이 상나라를 정벌한 서주 무왕이다. 이때에 백이숙제가 나타 나고. 시경 주남 관저(詩經周南關雎)와 한국에는 잘 아려지지 않은 상용(商用)에 관한 내용이 고조선 사람들의 문명을 묘사 했다.
文丁: 二年,周公季歷伐燕京之戎,敗績. 十一年,周公季歷伐翳徒之戎,獲其三大夫,來獻捷。王殺季歷
史記 周本紀: 公季卒,子昌立,是為西伯。西伯曰文王,遵后稷、公劉之業,則古公、公季之法,篤仁,敬老,慈少。禮下賢者,日中不暇食以待士,士以此多歸之。伯夷、叔齊在孤竹,聞西伯善養老,盍往歸之。太顛、閎夭、散宜生、鬻子、辛甲大夫之徒皆往歸之
November 4th, 2019
이 시기는 단군조선이 수도를 해지연안 평야에서 발해만 서쪽으로 옮겨온 시기다.
이 당시 영역을 추정할 한국사료는 삼국유사에 실린 수도 이름이 중요 하다 .
중국기록은 목야전 전후를 다룬 기록, 상나라의 건국, 그리고 앞에서와 같이 상서, 춘추좌전, 시경에 실린 국풍이 중요한 사료가 된다. 이는 마땅히 역사 기록 이후라 확실히 밝켜 저야 한다.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 ,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대서양을 항해 하듯, 암흙의 세계를 답사한다.
단군조선 건국 시비:
저와 대화의 장을 마련한 “Kyung Sup Han”의 예기 같이 삼국유사에도 단군조선의 건국 년이 계산상으로 틀린다고 했다 . 동국통감에서도 그렇게 인식 했다. 역사와 신화의 뒤안길에서 확답을 얻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럴수 밖에 없었다. 일연 스님이 인용한 위서(魏書)는 중국사람들이 더러운 역사책 예사(穢史)이라 비하 하던 예맥족의 역사가 담겼다. 그 내용은 여러 사람들이 주물러서 현 존제하는 위서에는 일연 스님이 인용한 문구도 없고, 그 당시 위서에 따르면 약 이천년 전(乃往二千載)이라 했스니 정확한 숫자를 계산 할 길이 없었다. 예사(穢史)는 예맥족의 역사가 담겼기에 상당한 분량은 “한극어순”이 있었다고 본다. 앞에서 인용한 진세가, 흉노 열전, 유백자, 제공이 동행했던 목천자전의 내용을 읊은 시경 소아 기부(詩經 小雅 祈父)의 문구가 한글 어순입니다. 이 때 강조 어법으로; “주살 했서, 당을. 또 기부에 돌아와 보니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하도 서글퍼서 유(有)란 동사를 목적어/구(모두들 어머니의 시신을 둘러 싸고 울고 있다는 시적 표현) 앞”에 놓았다.
우리 역사와 직결되는 문구가 “신단수하위지 신시; 神壇樹下, 謂之神市”라 즉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앞/밑을 신시라 했다”는 뜻이다.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여인의 애절한 사연을 “고매어신단수하 주원유잉;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하다. 즉 “하여 매일 (하느님께 비는) 제단을 차려 놓고 그 앞에서 빌며 임신시켜 달라고 원했다.” 장당경(藏唐京) 또한 동사를 먼저 쓰는 강조법을 택했다. 이문구는 “피했서, 당경으로”라 풀이 함이 옳다. 그 당시 상나라 유민을 맞은 단군의 수도가 어디였나는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이를 필자는 오늘의 당산 일대, 아마도 청나라 강희황제 능이 있는 준화(遵化)가 아닌가 한다. 이을 사마천은 춘추 필법으로 서쪽에 있던 첫 수도 “평양 (平壤, 平陽)을 뜻과 음을 이리저리 바꾸어 양평(襄平)이라 했다. 물론 이 두 명사는 여러 곳에 나온다.
필자는 발해만 연안 양평(襄平)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거주 하던 곳 또는 단군과 절친 했던 부족장이 거주 하던 곳이 당경(唐京)이라 본다. 이 두 곳 “해(解) 와 북당(北唐)의 지도자” 들은 성주 대회에 상 유민 대표자 발인(發人)과 같이 나타 났다 . 그들의 “특산물, Trade Mark”인 “하늘의 인지를 받은 지도자를 상징하는 관에 옥(玉)이 주렁주렁 달린 유관 (隃冠)”을 선물로 바첬다. 이러한 옥으로 만든 큼직한 규 (圭,珪)를 한후가 갖고들어 왔다. 유가에서는 옛부터 “규는 제후가 자기 영역에서 나는 특산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禹)와 한후(韓侯)는 홍산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
그러나 중국기록에는 상무정 (商武丁, 기원전 1250-1192년) 8년에 신이 되였는데 그때 나이 4018세였다. 일연스님이 인용 했다는 위서 (魏書)란 말은 없고, 단군을 예군 (禮君 ) 이라했고, 같은 내용 이 내용이 이조시대 역사쳑으로 씌이던 동국통감 (東國通鑑)에 실려 있다. 고기, 태백 하는 글자도 다르고, 고기(古紀云)에 그렇게 실렸다’ 하는 내용이다. 중국사람들이 1779년에 본 고기는 계연수가 1911년에 환단고기 (桓檀古記) 를 편찬 할때 인용 했다는 “삼성기 三聖紀,단군세기 檀君世紀, 북부여기 北夫餘紀, 태백일사 (太白逸史)”와는 다른 사료였다. 무정과 부열(Buyuel 傅說)이란 이름이 조선의 기원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저는 첫 영문본에서 부여(扶餘)의 어원이 부열(傅說)이란 이름에서 나왔다고 추론 했다. 좀더 알아 보니 사마천은 ‘산서성 해지 연안에 살던 활을 잘 만들던 부유(浮游, fúyóu) 라는 부족 이름을 가차 전주 하여 부열(傅說, fùyuè)이라는 한 사람으로 기록’ 했다. 고사전(高士傳)에서는 ‘부유(浮游,) 허유 (許由), 요 임금, 기산(箕山)을 모두 해지(解池) 유역’과 연류시켰다. 고조선의 발생지가 해지년안이란 이론을 뒷빋침해 준다.
예문류취에 선양( 藝文類聚 卷二十一 讓)에 관한 기록에는 치수사업을 성공한 우왕의 상을 모셨던 사당(禹堂)과 그 안에 요 임금의 비(堯碑)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요 임금이(堯即位永嘉三年: 310 -2721)기원전2411년에 즉위했다. 단군 (기원전 2333년) 보다 78년 전이라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 된다. 그 당시 비문이 많이 손상 되였다고 했다 .
상나라의 건국과 멸망:
요는 고신씨(父則高辛)의 셋쩨 부인에서 태어났다. 두쩨부인 간적 (简狄)의 아들이 은나라를 새운 글/걸/계 (契)이라 했다. 네번쩨 부인 상의(常宜)는 상구와 관계가 있는 글자라 본다 . 그가 요순우 삼왕이 다스리던 시절의 변두리가 되는 상구(商丘)에가서 자리를 잡았다 . 우왕이 다스리던 구주의 변두리 숭산 (崇山, 常山) 계곡이였다는 뜻이다. 산서성 북쪽 상구에서 성장한 상나라는 하북평원에 내려와 함곡관을 나오려는 하 왕조의 후손과 부디쳤다. 하조의 마지막왕 걸과 상 탕이 싸운 전쟁을 명조전(鳴條戰)이라 한다. 그 내용을 깊히 살펴 보면, 전쟁터가 하북 평원이 아니라 협곡관일대에서 시작하여 걸을 해지 돈북쪽, 옛 우왕이 수도로 정했던 곳에서 가까운 요새에서 잡혔다 .
고조선 또한 수도를 여러번 옮겼다. 그 시대의 공통된 현상이라 본다.
전설로 취급하는 황제와 치우의 싸운 전쟁터가까운 산서성 동북 상구 (商丘)에서 상나라가 나타났다고 풀이 했다 .죽서기년과 사기 하본기에 은밀하게 남겨 놓은 사료에서 이러한 추리를 했다. 앞에서 공자님이 “자연스러운 합당한 청원이 거절 당하자 단군조선 사람들 (械, 契, 解)이 하나 같이 뭉쳐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열심히 싸웠었다”는 뜻깊은 문구가 이문제를 다시한번 살펴볼 동기가 되였다. 탕(蕩)자는 탕(湯, 暘)자와 같다 하니, 탕곡 (湯/暘谷)에 있는 모든 병사들 이란 뜻이다. 치우를 쫓겨가는 (돼지의) 제왕(逐帝)이라 했고 전쟁터 이름에도 돼지란 뜻이 있다. 당 (唐, 群書治要, 藝文類聚) 또 북송(北宋)시대에 편찬된 태평어람 (太平御覽) 에서는 이 전쟁터를 탁록과 음록(淫鹿)이란 두 곳에서 아니면 넓은 지역에서 싸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소호 김천씨의 뒤를 이은 전욱고양씨 (顓頊高陽氏)가 구리의 란을 평정 했다고 한다. 옛적에 전욱고양씨 영향력이 컸던내 몽고지역“홍산문화 권”의 영향으로 민중 봉기가 살젔, 이들이 동남으로 퍼저 나와 상 왕조를 이루었다고 본다. 하여 치우의 무던이 산동성에 있다고 본다.
중국 문헌에서는 상 을 은이라 한다.그 부족이 득새하기 시작한 고을이 상구 (商丘)다. 여기에 관한 근거는 시경에 있서야 하나 숨어서 찾기 어렵다. 그 실마리를 준사람이 사마천의 사기에 손질을 한 저선생 (褚先生)이다. 요 임금이 상나라 시조 설(契)은 70리 밖에, 서주의 원조 후직(后稷)은 100리 밖에 봉했다 . 상 (商)은 본질을 뜻함이요 은이란 글자는 호(殷號也)라 했다. 북쪽에 있던 상산 계곡(商丘) 에서 그 후손이 번창 했다(殷)는 뜻이다. 사마천은 은본기에서, 설(契)이 자리 잡은 상구(商丘)가 요순우임금이 다스리던 지역의 변두리라 했다 . 상나라와 서주의 시원이 요 임금이 다스리던 관중분지 해지 연안이 될수밖에 없다. 상구와 탁록은 멀지 않았다고 본다.
치우가 죽은 이후 약 3대 동안 여민 (黎民)의 저항이 있었다. 시경 운한(詩經 雲漢)에는 서주 (西周)의 백성을 여민 (黎民)이라 했다. 그 때는 구리 (九黎)와 삼묘(三苗)가 같은 지역에 있었다. 구리 (九黎)가 구리 (九夷)로, 리(黎)를 려융 (驪戎) 이라 했고, 려융이 구려(句驪 )로 바뀌었다가 고구려 (高句麗) 로 되였다고 본다. 탁록에서 죽었다는 치우의 묘가 산동성에 있다니 이치에 틀린 예기다. 소우는 소리로 기록 했던(濊貊) 부족들이 탁록에서 중원으로 또 만주로 퍼저 나갔다는 증거다. 더 뚜렷한 증거는 앞으로 계속 나타난다.
다음에 계속.
October 16,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