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46년-기원전 868년
중국사람들이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Xia Shang Zhou Duan Dai Gong Cheng)라는 야심적인 국책에 따라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전설의 역사화 고정에 포함되는 기간이다. 중화민족의 기원의 확립을 확립하려는 첫 단추 구멍(First button hole of the coat)이 단군조선의 건립이다. 한국 사학가들은 이점을 깊히 다루어야 마땅하다.
이 시대에 해당되는 사료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찾아 볼수 있다.
첫쩨: 상형글자의 발생과 변천 과정에서.
두쩨: 그들이 부르던 노래(詩經, 韓詩, 毛詩)에서.
셋쪠: 전쟁 기록에서.
넷쩨: 중국역사 기록 특히 “尙書, 逸周書,穆天子傳, 竹書紀年,春秋左傳”에서.
다섯쩨: 먼 훗날에 편찬된 유교경전과 각종 외서(外書)에서 인용한 내용.
필자는 이러한 사료들을 간단히 요약하여 세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 후에도 한국 사람들이 아직도 중국사람들이 그들위주로 편찬한 동양상고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았기에, “고조선 영토의 남방 한계선”이란 제목으로 보충 설명 한다.
수양산(首陽山)을 “키우드Key word”로 구글에서 다시 한번 찾아 보았다. 산해관 서쪽에 있다고 중국관광지에 실려 있더니 오늘 다시 보니 하남성 언사시(偃師市) 있었다 한다. 한글로는 “수양산은 황해남도 해주시와 신원군 경계에 있이라 했다”
고 어처구니 없이 풀이 했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필자는 몇차래에 걸처 “연(燕)과 고죽국 (孤竹國) 이산서성 해지 연안 단군조선의 수도 평양 가까이에 있었다는 확증”을 보여 드렸다. 협곡관 서쪽에서 나타난 제후국 연(燕)은 주 왕실과 동고 동락 하며 그 지역에 살던 고조선의 서쪽 유민과 계속 싸우다 왕이 살해 당하고 주나라를 따라 함곡관 동쪽으로 나와 점차로 하북성 북쪽으로 옮겨 왔고, 목야 전에서 일등 공신이였던 숙단(叔旦)을 협박 하여 서주의 도읍을 옮기는 내력을 설명한 기록이 일주서 도읍해(逸周書 度邑解) 편이다 . 숙단은 울면서 하소연 했다. 백이숙제의 사연이 얽힌 수양산이 산서성 서남쪽 해지연안에 있었다는 기록이 통전을 비롯한 여러 사서에 실렸다. 그 지역 사람들이 읊었다는 시경 당풍(唐風)에 수양산이 있다 .
숙단(叔旦)과 주 무왕이 어려서 다정하게 지내던 사연을 읊은 시문이 시경 소아 사한 (詩經 小雅 祈父之什 斯干)이다. 숙단(叔旦,公, 叔旦, 壇公, 攜)에게 하사한 기념품이 이괘(利簋)다. 시경 의 여러 국풍이외에도, 소아 홍안자십 (詩經 小雅 鴻雁之什)에는 옛 서주 수도 호경(鎬京, 鄗)이 있던 해지연안의 지형이 많이 나온다. 그곳에 단군(壇君)의 평양 (平壤, 平陽)이 있었고, 면수(沔水) 洛水 汾水 降水, 歷山, 首陽山 려희의 驪山, 梁山, 우왕의 아버지 곤이 쌓았다는 산성에 왕이 살았다는 왕옥산 (王屋山) 즉 왕검성 (王儉城) 있다. 가까이 키가 큰사람들, 동호(東胡), 부여 숙신 (肅愼) 씨가 살았다. 토탬 같은 장승을 새워 놓았던 이들을 연(燕) 가까이에 있던 맥국이라 했다. 불함산 (不咸山) 즉 부암 (傅巖)이란 이름이 나타난 곳이다 . 이지역에서 나타난 시경 소아학명 (詩經 小雅 彤弓之什 鶴鳴)은 설음 받던 고조선의 휴예들을 묘사했다.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보충 설명 한다.
고조선의 남쪽에 있었다고 판단되는 서주제후국 “진 연제 (晉. 燕.齊)과 고죽국 (孤竹國)의 설립”을 살펴본다.
여러 국풍중에 진풍(秦風) 당풍(唐風)은 있스나 연풍 (燕風) 진풍(晉風)하는 편명은 없다. 제후국 연과 진이 주 선왕 이전에는 없었다는 뜻이라 본다. 사마천은 “소공석이 주 왕실 가까이 있었다”고 했다. 시경에는 연(燕)자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이는 모두 유주의 동북지역으로 “편안히 쉬는 곳”이란 뜻으로 나타난다 . 그 지역에 봉했다는 소공석 (召公奭)의 연(燕)을 뜻하기도 했다. 소공의 뒤를 이은 소강공(召康公)이 서주의 수도 풍(豐) 가까이에 있는 낙수가에 자리를 잡았다 . 이 곳 낙도읍(洛度邑) 소공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소(邵)라 했다.산서성 해지 연안에 있었다. 이들이 서주와 함께 동쪽으로 피란하여 춘추시대 초기에는 함곡관 동쪽에 정착 했었다 .
백이숙제 수양산.
주 무왕이 서주 건국의 일등 공신인 죽마고우 였던 숙단(叔旦)을 배신하여 백이 숙제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전설이 나타났다. 또한 지난 일은 이제 그만 단념하라는 뜻으로 “이왕지사(以往之事) 또는기왕사(旣往事)라 하는 격언 상용어구”가 생겼다.
전국시대 초기에 편찬된 시자(慎子 逸文) 에는 잊혀졋다 또는 잘못 전해졋다는 예문이 많이 실려있다. 그 한 예가 “시경에는 왕지 (往志)라한 글자가 상서에는 왕고 (往誥)라 했고 이를 춘추에서는 왕사 (往事)라 했다”는 문구다 . 시와 서에 있다는 문구는 찾을수 없지만, 춘추에 실렸다는 왕사(往事)란 문구는 일주서 정전(程典)에서 무왕이 자기를 도와 전쟁에 이기도록 한 옛적 소꼽친구 “휴(攜,公, 叔旦, 壇公)에게 옛 평양(平壤)을 무왕에게 양보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기록한 내용이다 . 이를 여러 사서에서 인용했고, 현존하는 춘추에서는 제환공이 진나라 대부였던 순식(晉國大夫 荀息; ?-기원전651년)에게 무엇을 충정 (忠貞)이라 하느냐 물었다. 순식은 일주서에 무왕이 단공이 대대로 이어 받은 평양을 빼았던 고사를 인용하여 “무릇 왕실에 이익이 될 일이라면 무엇이던 못할 것이 없는게 충(忠)이요, 지나간 일은 잊저 버리고 (送往事居) 서로 시기함이 없이(耦俱無猜) 지내는 것이 정(貞)이요” 라고 간단하게 설명 했다 . 초절서(越絕書)에서는 “새로이 성취한 업적은 취켜 새우고 (恭承), 지나간 불미스러운 일은 거론하지 않음(述暢) 이 사기, 경전, 춘추의 내용” 이라 했다. 이렇게 왕사(往事)란 문구의 유래를 밝혀 놓고 시경과 상서에서 왕지 (往志) 또는 왕고 (往誥)라한 글자를 추적해 보면 “시경과 여러 사서에 은미하게 기록된 서주 초기의 불미스러운 배신 행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백이 또는 백이 숙제의 아버지가 무왕으로 부터 기념패를 하사 받은 단공(公,壇公)즉 숙단 (叔旦)이다. 그 후손이 해지연안 평양(平陽, 平壤)에서 동으로 옮겨와 발해만 서안에 정착 했던 고조선의 영역으로 옮겨와 고조선 고국현 (孤竹縣)이 되였다. 이를 중국사서에는 고죽국이라 풀이 했다.
유가에서 “극찬하는 주공과 성강지치 (成康之治)라 하여 서주가 번창” 했다는 중국황실 위주의 그릇된 풀이를 그대로 받아드릴수는 없다. 이러한 주 왕실의 불미스러운 정책에 개적(蓋狄)이고 부르던 원주민을 무마 시키려고 노력한 증거가 여러 곳에 보인다. 목왕은 “서쩍 멀리 원주민의 조상신 환웅천왕을 모시던 사당을 찾아가 속죄하고 돌아온 내용이 목천자전”에 실려있다. 서주는 결국 하후씨 후손의 끝없는 시달림에 왕이 살해 당하고 함곡관을 나와 중원에서 동주를 새웠다. 중원에는 상나라 이전부터 산융 이라 비하 하여 부른 하후씨의 후손들이 웅거하여 동주 왕실의 제후국들과 부닥치게 되여 춘주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제후국 진(晉)
죽서기년에는 3대 강왕9년에 당 (唐)이 진(晉)으로 옮겼다. 왕이 사신을 보내 선양을 요구 했다. 하상주단대공정 (夏商周断代工程)에 따르면 기원전 1011년이 된다. 앞에서 이 사건을 깊히 다루었다. 당 (唐)과 진(晉)은 단(旦, 亶, 壇)과 조선 (朝鮮)을 가차전주 하여 즉 “뜻과 음을 이지저리 뒤바꾸어” 만든 글자라 했다 .
제후국 진(晉)에는 “빛, 햇빗이라 보는 비, 또 해라 발음하는 글자”가 많아 나타난다. 같은 혈통의 여러 부족이 중원에 살았다. 좌전에는 노나라의 대부로 비백(費伯)란 칭호를 쓴 사람이 있었고, 중원 여러 곳에 비인(費人)이 살았다.
목천자전 내용을 살펴보면, 목왕 일행이 산서성 북쪽으로 다녀 왔지만 진(晉)으로 이란 글자가 없다. 시경 국풍에도 마땅히 있어야 할 진풍이란 편명이 없다.
일주서(逸周書 )에도 진(晉)이 서주의 성을 받은 제후국이였다는 증거가 없다. 태자진해 (太子晉解)편에는 이 시기를 엿볼수 있는 사료가 “진 평공(晉平公; 기원전557-532년)때에 진태자와 사광(師曠)과의 대화에 실려 있다. 진은 주와 같이 노동이란 것을 모른다. 지배층이란 뜻이다. 주문왕이 천하 2/3를 얻어 무왕이 단 한 사람(상, 帝辛/ 주, 紂王)을 살해 하여 많은 군중을 구했고, 동성 이성을 가리지 않고 살곳을 마련해 주었다. 태호 복희씨부터 요순우 (임금)에 이르기 까지 한 가문이 집권을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
서주선왕 (西宣王, 기원전 828-782년)때에 “晉, 秦, 齊, 燕, 魯”이란 제후국 이름이 나온다. 선왕16년인 기원전 812년에는 진(晉)에 가 있던 당(唐)이 강(絳)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조선의 서쪽 지역을 관장 하던 한 부족을 서이(西夷)라 했다. 그 부족장을 단/당 (旦/唐, 壇君)이라 했다. 그가 해지 북쪽에 있는 강수(絳水) 연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는 뜻이다. 기원전 790년에 선왕이 그와 함께 는 조(條)의 융 (戎)을 급히 공격하다 선왕의 군사가 포에서 패했다 . 이곳이 해지 연안에 있는 순임금이 죽었다는 명조(鳴條)란 곳이다. 많은 전쟁이 이곳에서 있었다.
사기에는 진세가가 가장 길다. 춘추에도 제후국 진(晉)이 많이 나오나, 기원전 719년에 처음 기록에 나온다. 상서에는서주가 망하고 함곡관 동쪽으로 나오는 기원전 770년 경에 처음 나온다 . 그가 바로 오패(五覇)의 한사람인 진문후(晉文侯, 781-기원전746년)다. 진(秦)은 서주의 서쪽에서 나타나 선왕때 공을 새우고, 주 왕실이 동쪽으로 도망치 때도 보호 해 주었다 .
사마천이나 그보다 전 사람인 좌구명(左丘明, 기원전 556 – 451년)이 인용할수 없었던 일주서(逸周書)에는 주려왕 (周厲王), 유왕(周幽王), 동천이후 동주 환왕 (東周桓王) 때 인물 예백(芮伯)하는 이름은 있지만, 진 (晉)이란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 춘추의 기초라 하는 조구명(左丘明) 이 쓴 국어(國語)는 중국 서주역사에 관한 기록이 없이 동주 역사부터 기록했다. 서주왕실을 계속 괴롭혔던 산서성 지역의 역사라 볼수 있는 진어(晉語)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 한다. 국어를 근거로 편찬된 좌씨춘주는 풀이 하기가 더 어렵고 분량도 많다. 오백지패(五伯之霸也)에서 앞의 세 사람은 서주 동천 이전 사람들이다 . 오늘 까지도 춘추오패에서 첫쩨 두쩨로 치는 제 환공(周伯齊桓)과 진 문공(晉文公) 이 포함 되였다. 두예가 선택한 글자를 자새히 보면 “제 환공는 모든 서주의 제후국 지도자(周伯)의 한사람”이고, 진 문공(晉文)은 “서주의 제후국 지도자(周伯)가 아닌 다른 혈통”의 한 사람이란 뜻이 숨어 있다.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면, 춘추시대 초기에는 제후국 제(齊) 또한 함곡관 동쪽에서 멀리 떠러저 있었다고 볼수는 없다.
상서에는 대소 하후지학이 있다는 문구가 한서 유림전등 여러 곳에 있다 . 그러나 아무도 하후지학(夏侯之學)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 지지 않았다. 더더욱 사음자라고 보는 “비씨고문, 비씨지학;費氏古文, 費氏經, 費氏之學”하는 문구가있다 . 비씨는 하우씨의 후손이다 . 갈석산 유역에는 옛 고구려의 선조들이 살았다는 내력이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나오고,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실려 실려 있는 하백(河伯) 이란 글자, 즉 치수사업에 성공한 우왕의 후손이란 뜻이다.
이 시대의 중국 영토를 순자는 이치에 합당하게 주장한다는 뜻에서 그의 정론(荀子 正論)에 남겼다 . 여러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새로 나라를 새웠다는 “상탕과 주무왕이 호에 수도를 정하고 살때는 땅이 방백리에 불과 했다. 그 이외의 땅은 모두 제후들이 다스렸다”고 했다. 같은 내용이 모시정의에도 있다.
모시정의에; “若以中國對四夷,則諸夏亦為中國”하는 문구가 있다. 서주 왕실 사방이 “하후씨 후예들”에 싸여 있다는 뜻이다 .
이를 앞에서 거론한 “대팽 실위 (大彭、豕韋)단군 시절의 영역”과 결부 시켜보면, 기원전 868년 주선왕중흥에 이르는 시대 까지 단군조선을 이룩한 사람들이 중원 전역에 흐터저 살았다. 고조선의 남방 한계선이 중원이였다고 주장할수 있다.
끝
November 4,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