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868년-기원전 770년.
공화를 시작한 이유는 원주민의 폭동으로 서주 제 10대 여왕(周 厲王)이 매부가 살던 분수 상류로 도망을 가서 주왕실을 보필하던 “두 대신이 정사를 꾸려갔다” 하여 만든 말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견융 또는 여융”이라 부르던 원주민의 침입을 받았다. 주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 왕실은 도읍을 동쪽의 낙읍 (낙양)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를 주의 동천이다. 이때 부터 춘추전국 시대가 시작 된다.
이러한 혼란기를 수습하려고 태사(太史) 주(籒)와 같은 유능한 토착민을 등용하여 서주의 질서를 잡은 시기라 하여 선왕중흥이라 했다. 각종 대전(大篆)자 금문과 시경에 이 당시의 상황이 많이 나타난다. 사기주 본기, 일주서와 죽서기년을 위주로 고조선 영토의 남방 한계선을 살펴본다.
앞장에서는 유가에서 말하는 태평성세라 부르던 성강지치(成康之治, 기원전 1017년 -기원전961년) 기간은 “백이숙제 선조가 대대로 살아오던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몰아 내고, 서주의 땅을 확보”한 불미스러운 시기라 했다. 한서에도 실려 있다 . 서주 무왕이 상을 정벌하고 옛 고을로 돌아와 백이숙제를 박대 (薄待)하여 굶어죽었다. 이렇게 옛 친구를 배반하고 일어선 서주의 건국에서 멸망 까지를 사마천은 주본기 끝에 싫었다 . 그러던 주 초창기에 주강왕 (周康王)이 함곡관 동쪽으로 나와 영토를 넓히려다 한강(漢江, 漢水)상류 초구 (楚丘)에서 전사 했다. 그의 아들 목왕이 이러한 어려운 시국을 안정하려고, 원주민의 조상신 곤륜 (昆侖)을 모시던 곳을 찾아가 분향 재배하고 돌아온 업적을 소설화 한 기록이 목천자전 (穆天子傳)이다 . 서경(書經,尙書, 書)에 따르면, 그의 국책을 이끌어갈 자금을 마련키 위해 우 임금의 독형(贖刑)을 악용하여 막대한 벌금형을 시행 했다 .
일주서에는 대광 (大匡) 두편이 있다. 하나는 주공의 동생 셋이 상나라 유민들의 힘을 빌려 반항했던 때를 기록 했고, 또 하나는 목왕 때에 상유민을 옮겨다 강제 노역을 시켰던 지역에서 반항이 심하여 이를 다룬 내용이다. 목야전이 있었던 지역은 계속하여 폭동이 자주 일어 났다는 증거다.
함곡관 서쪽에서 주선왕의 아들,주유왕(幽王)이, 기원전 771년에 살해 당하고 쫒겨난 주 왕실은 기원전 770년에 함곡관 동쪽 낙읍(雒邑)으로 왕실을 옮겼다.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 주위에 있었던 여러 제후국의 분포도가 그려진다.
주 무왕의 죽마고우를 숙단(叔旦) 또는 당숙우(唐叔虞)이라 불렀다. 이들의 다정했던 시절을 읊은 시문이 시경소아 시한(詩經 小雅 祈父之什 斯干)이고, 그가 살던 곳이 앞에서 다루었던 “연, 연경”이라 한 안읍 또는 우읍(虞邑)이다 . 그곳을 무왕 아들이 빼았아 서주의 수도로 썼다. 이 억울한 사연이 시경 여러 곳에 있다. 한자 “祈, 秩, 斯”에 그 사연이 실려 있다 . 시(秩)자에는 서주의 수도 풍(豊)에 살던 사람과 의형제 간(豑)이 였다는 뜻이 있다. 사마천은 진세가를 쓰면서 승자편에 들었던 제후들이 “단공을 졸열한 무공이였다고 조롱 했다”고 했다. 서주 초기에 소공(召公)이 주 왕실을 잘 보살펴서 주민이 그를 흠모하는 시문이 소남 감당(召南 甘棠)이라 하여 연세가를 썼다고 한 사마천은 고백 했다. 당시 서주의 향읍은 협곡관 서쪽에 국한 되였다 . 그 가까이 제후국 연(燕)이 있었다.
이 시기에 선왕은 한후와 협정을 한 다음해 부터는 서울에 까지 친입하여 괴롭히던 원주민 ( 북적,匈奴, 혐융玁狁)을 정벌하려 유월에 북쪽으로 대원(大原) 까지 올라 갔지만 이를 과장 하여 오늘의 태원(太原)에 까지 올라 가 영토 확장을 했고 한다 .
“유월에 북쪽으로大原 .까지 가서 싸우고, 팔월에는 남쪽으로 형만을 정벌하고 동쪽 제후국제와의 경계에 성을 쌓았다”하는 기록은 지나친 과장이다. 또한 그의 영향력은 집권 후반기에 이미 사라저 갔다. 원주민의 압력에 밀려 주 왕실과 함께 함곡관 동쪽으로 밀여 왔다. 원주민 적인 (狄人)이 함곡관 동쪽, 하북성 서남쪽 옛 조가에 있던 제후국 위(衛)를 멸하자 그 가까이 있던 제후국 제 환공이 이들을 물리 치고 위를 제생 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공헌으로 그는 춘추오패의 첫 패자가 되였다 . 서쪽에 있던 진 (秦)이 서주왕실을 도와준 공으로 제후국이 되였다. 춘추시대 초기로 너머가는 시절에 함곡관 멀지 않은 곳에 “燕, 齊, 鄭, 楚, 衛”하는 제후국이 있었다. 사서에는 이 지역을 “朝歌、楚丘、帝丘、野王” 하는 이름으로 기록 했다. 태공망을 시조로 하던 제후국 제(齊)는 산동성이 아니라 이 곳 제구 (帝丘) 가까이에 있었다. 서주 초기의 제후국에 관한 기록은 상서와 사기 주 본기에 그 실체가 나타난다 . 시경 소남 에는 평왕의 후손이 제후의 자녀와 결혼하는 장면을 읊은 시문이 있다. 글자 제(齊)를 보아도 이는 중심이 되는 글자요, 무왕이 전쟁의 일등공신 강태공을 제일 좋은 곳에 처음으로 부임 시켰다. 이 곳이 시경 거공 (詩經 彤弓之什 車攻)에 실린 박수우오(搏獸于敖)의 오(敖)라는 곳으로 정(鄭)의 땅이라 했다 . 이 곳에서 주선왕 이 군사훈련을 했다. 선왕이 중산보를 이곳에 보내 제에 성(城齊)을 싸았다 .
제환공의 후손들이 싸우느라 시신을 처리 못하였다. 산동성 동북부에 있는 영구(營丘)는 환공이후 전(田) 씨가 옮긴 제의 수도를 옮긴 곳이다.
사기 정세가에는 시조 정 환공(鄭桓公)이 선왕의 서제(庶弟)라 했다. 선왕이 동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여기서만 볼수 있다. 서주 유왕(幽王)이 려융 (驪戎)의 손에 죽고 왕실이 함고관 동쪽으로 쫓겨와 제 환공의 도움으로 정세가는 뒤를 이었다 하니, 시조 정환공(鄭桓公)의 어머니는 “분수가에 살던 돼지(豚,亥, 屠)라고 부르던 부족의 여자”라야 이치에 맞는다 . 상서 문후지명(尚書 周書 文侯之命)은 제 환공이 패자가 되전의 실려자 진 문후(晉文侯, 기원전805-746년)에게 서주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는 평왕의 부탁이다. 그 내용은 목왕때부터 어려웠던 사연을 기록 했다 . 주동천 당시 공이 컷던 정나라와 연, 위, 동주 왕실은 함곡관 동쪽에 살던 원주민의 반발이 심하여 그들과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고, 이를 계기로 제후국 연, 위, 정과의 관계가 악화 되였다.
공자 시대에 주나라 좌구명(左丘明, 기원전 556- 기원전 451년) 이 춘추시대 (春秋時代) 8국의 역사를 기록한 국어에 연나라는 너무 작아 연의 역사 (燕語)편은 없고, “제 환공 당시 연(燕) 북쪽, 노(魯)가 남쪽, 서쪽에 위(衛)가 있다”고 했다 .
정어(鄭語)에서도 제후국의 분포도가 비슷하다. 당시 연의 위치는 함곡관을 나오 북으로 올라온 북연(北燕)을 뜻했다고 본다. 더더욱 정어(鄭語)에는 사관이 말하기를 “왕실은 힘이 약하고 주 왕실과 인척관계가 아닌 융적이 번창하여 그들을 재압할수 없다”고 했다 . 동주의 수습책은 다시 패자로 등장한 제 환공의 자녀와 결혼시켜 인척관계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시경 소남(詩經 召南 何彼襛矣)에 있다 .
고조선 영토에 있던 진(晉)은 토착민의 새력이 커지자 동주 위열왕 (東周 威烈王 ) 은 기원전 403년에 진의 세 대부에게 각각 한후(韓侯), 조후(趙侯), 위후(魏侯)로 봉했. 이를 삼가분진(三家分晋)라는 시대 구분이 되여 춘추시대는 끝나고 이때 부터 전국시대가 시작 되었다.
이를 일주서 선왕편의 기록에 따라 고조선의 남방 경계선을 그려 본다. 그 뚜렸한 근거가 주선왕과 한후의 정상 회담을 읊은 시문에 나타난 한혁(詩經 韓奕)의 마지막 구절이다. 끝없이 넓은 북쪽 땅을 통치하라고 부탁했고, 한후 (韓侯)는 이를 받아 들였다 . 옛부터 한후가 살던 부피한성(溥彼韓城)에 관해 풀이가 분분했다. 필자는 “한후의성이 마땅히 서주의 북쪽 제후국이라 하던 진 연(晉, 燕) 보다는 북쪽에 있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한성(韓城)은 요녕성 서남부 조양일대에 있었다고 했다. 이는 서주의 제후국인 연(燕)과 진 (晉)이 산서성과 북경 일대에 있었다는 중국기록을 믿고 잘못 판단 했다. 진개가 고조선 땅을 빼았기 전에 편찬된, 한비자의 기록을 보면 한후의 한성은 마땅히 북경서남 쪽에 있었다. 모시정의에서는 한후의 선조가 한때는 미약하여 동쪽으로 밀려 갔지만, 선왕을 찾아온 한후가 옛 위업을 되 찾았다고 하고, 그가 살던 곳을 “추 맥(追、貊)이 살던 융적의 나라 (戎狄國)라 했다. 한후가 살던 저 웅장한 한후의 성(溥彼韓城)이 있던 곳이 융적(戎狄, 山狄, 山戎, 北狄)이 살던 곳이 분명하다 .
통전에서 북쪽에 살던 융적을 요약해 풀이 했다. 내용을 보면 사기 흉노열전과 같다. 흉노가 융적이였다는 뜻이다.
“당숙우는 산융이였다. 하 주 이래로 그들의 피해가 막심했다. 주선왕 때에 그들을 정벌하여 태원 까지 영토를 확장 하여 사방의 오랑캐가 귀속하거나 복종했다. 그후 산융이 (극성하여)제후국 연을 지나(越燕)제후국 제를 침입했고, 후에는 이 곳에서 제 환공이 중흥을 이루었다. 그의 말년에 이름을 여러번 바꾸어 불렀다. 제후국 진(晉)은 피부색이 희고 노란 머리를 한 산융(山戎, 戎狄, 赤翟, 白翟)속에서 생존 했고, 연의 북쪽에는 동호 산융, 이라하는 오환의 선조들이 살았다 .”
한후가 살던 한성(溥彼韓城)은 하북성 보정시 탁주(河北省保定市涿州) 유역에 있었다는 설이 옳다고 본다. 이 곳에서 내려오던 노래가 한나라 때까지 존제 했었다는 한시(韓詩)다. 이 지역을 춘추전국 시대에 남쪽에 있던 제후국 연(燕)이 흡수하여 이를 북연(北燕)이라 이름 했다. 그 글자의 본 뜻은 앞에서 설명한 “해뜨기 전 동이 트는 모양을 그린 글자” 훤/환(桓)이 살던 곳(桓國)이라 했다. 즉 고조선의 후손들이 살던 곳에 전해오던 노래를 연인 한앵이 전했다고 했다 . 그 넓은 중원 일대에 “소가 우는 소리, 馬/牟; móu mù mào” 라고 기록 되던 부족”이 살아 “목야, 모시”하는 이름이 전해저 왔고,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를 제시 (齊詩) 노시 (魯詩)라 했다.
춘추시대 초기에도 중원은 고조선의 여러 부족이 흐터저 살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러한 곳에 서주의 제후국 이라 하는 “연, 제, 위, 노”가 자그만 마을 국가 (Town State)를 이루고 함곡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를 중국 사가들은 과대 평가하여 함곡관에서 산동성 해변에 까지 이르는 중원 전역을 다스렀다고 한다.
다음에는 “고조선 영토-6. 춘추시대 (기원전 770-기원전403년). 제 환공의고조선 친입”을 다루겠습니다.
끝
November 17,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