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공자(孔子, 기원전 551 – 479년)생전시대.
국어를 편찬한 좌구명의 생존 기간이다. 이 시기에 공자가 만난 노자를 도덕경을 쓴 사람이라고 잘못 알려저 있다. 고전 여러 곳에 나오는 명사 “노자는 복수”로 풀이 된다. 이 시대 기록에는 고조선과 관계되는 사료가 유교 경전을 비롯한각종 제자 백가 경전에 많이 실려 있다. 유가에서 가르치던 경전의 글자를 풀이한 내용과는 다르게 또는 유가의 귀에 거슬리는 풀이도 있다. 냉정한 입장에서 “잃어버린 한국 역사”를 되찾으려는 필자의 입장을 고려해 주시기 바란다.
춘추좌전을 다른 춘추 삼전이나 국어와 비교해 보면, 극히 은미 하여 해석하기가 몹시 어렵다. 작은 도시국가 이름도 많고 제사를 맡아 보는 사람( 단군, Shaman)이라고 볼수 있는 대제(大宰) 란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현인 은자란 표현을 많이 썼다. 하여 뒤에는 춘추학이란 새로운 분야 마저 생겨 났다. 그러나 먼 시가에서 보면, 옛적에 연(燕)이라 하던 이름이 노양공 (魯襄公; 기원전575-542)시대 부터 북연(北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였다 . 주 왕실과 함께 협곡관을 나온 연(燕)이 동북쪽으로 옮겨 갔다는 뜻이다.
필자는 고조선의 발생지인 해지 연안에 서주 왕실이 나타나 초기에는 원주민들을 몰아 냈던 근거를 여러 사료를 종합 하여 특히 “시경에 실린 내용을 인용하여” 서주 왕실의 불미 스러운 행위를 지적 했다. 유가(儒家)의 경전인 예기(禮記)의 내용에는 글자를 잘못 풀이한 곳이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가(儒家)에서 뿐 아니라 동양 사상에서 중요시 여기는 윤리 (倫理)의 원천은 환웅천왕의 가르침이다. 이를 뫼산자 변이 없는 곤륜(昆侖)이라 했다 . 그의 가르침을 단군(壇君)이 이어 오며 가르처 왔다. 주왕실이 기로에 섰슬 당시 이를 타개하려는 시도로 “옛 고조선 발생지에 살던 사람들이 믿고 있던 정신적 지도자가 살았다는 곳, 곤륜지처 (昆侖之墟)를 찾아 갔다온 기록”을 소설화 한 내용이 목천자전이라 했다. 서주 창립 시기에 나타난 “숙단, 주공 단, 당숙 우, 시경에 나오는 여러 국풍이 있지만 진(晉)풍이 있어야 할 지역에 당풍(唐風) 위풍(魏風) 빈풍(豳風)이 있을 뿐 시경에 진 (晉)는 않고, 제후국 진(晉)의 등장에 관한 기록이 지극히 혼미한 점등”을 설명 했다. 유교 경전 예기(禮記)에서 윤리의 표본이라하는 주공단(周公 旦)은 단군 (壇君)의 가르침을 그렸다고 본다 . 편명 단궁 (檀弓)은 단군 (壇君)의 사음 대자로, 제사장 “祭司長, shaman, Section of Levi”편이란 뜻이라 본다.
공자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충서(忠恕 )를 후학들이 해석 하면서, 공자께서 인용한 시경 빈풍 벌가(詩經 國風 豳風 伐柯)에 나오는 “벌가벌가 그즉불원; 伐柯伐柯, 其則不遠) 하는 시경의 문구 풀이를 바꾸었다. 이 가지 가“柯 kē/크어” 자는 가한 (可汗)을 이리저리 돌려 만든 글자로 그 시구절의 뜻는 “가한으로 가한을 벌하라, 그들은 서로 멀지 않다”는 뜻이다. 공자님이 인용한 말씀이 중용(中庸)에 있다.
“가한으로 하여금 가한을 벌하면 그들은 서로 염탐 할것이고 그러면 가한은 서로 멀어진다. 하여 옛 말에 군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다스리게 한다, 바뀌었다면 그만 끝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가 충서다.”
이 “가한을 벌했다(伐柯)는 시문”을 시설에서는 노송(詩說 魯)에 넣고 설명하기를 “관숙이 주공을 맞아 상의”한 사실을 기록한 시문이라 했다. 그러나 모시서 (毛詩序)와 주희의 시경집전 (詩經集傳) 에서는 모두 주공 (周公)을 찬미한 노래라고 했다. 그러나 시경에는 이 시문이 협곡관 서쪽, 한원에 있던 나라 빈풍(豳風)에 실려 있다. 그 가까운 지역 위풍 (魏風)에 나오는 벌단(伐檀)과 같이 한원에 살던 부족장을 처벌한 장면을 그린 시문이 분명하다.
예기에 실린 중니연거(仲尼燕居)는 “공자 께서 연(燕)에 기거하실 때”란 뜻이다 . 이를 유가에서는 “공자께서 편안히 쉬실 때 즉 안거(安居)란 뜻”으로 풀이 한다. 그러나 갗은 예기에는 그와 갗은 뜻을 지닌 “공자한거(孔子閒居)라는 편”이 있다.
예기 방기(坊記)편에는 공자께서 시경의 한 구절 “상피합(hé/흐어)단 상유환지; 相彼盍旦, 尚猶患之”을 인용하여 방위의 중요성을 설명 했다. 그러나 유가에서는 그 글자의 본 뜻을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풀이 했다 .
문제가 되는 글자는 옛적에 중국 제일 서쪽을 진단(震旦) 또는 옹주(雍州)라 했는대,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모해Mòhé, 靺鞨” 희단 (盍旦, hédàn /흐어단)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이라 본다 . 이 글자는 빛을 내는 삼신(三辰, 日月星)을 공경 하는 사람들, 즉 단군조선의 근간이 되던 “예맥,숙신”이 살던 곳이란 뜻으로, 돈황에서 감숙성 통로를 따라 서안으로 내려오는 통상로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글자를 바루 풀이 하면, 방기 (坊記)여 실린 내용은 뚜렸하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군주가 없고, 한 집에는 두 주인이 없다. 이 것은 백성들에게 신하와 군주 간에는 마땅히 구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말이다. 춘추에는 초나라 월나라의 왕이 죽었다 하지 않고, 예군(禮君)을 천자라 부르지 않고, (지도자 밑에서 지도자를 도와주는 직책에 있는)대부를 지도자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백성들이 현혹될까 두려워 하여 그리하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 흐어/계단 (盍hé kě 旦)이란 부족을 보아라, 저들은 뚜렀한 통치자가 없어 유(猶 ,戎의 지도자들,즉 가한, 可汗)끼리 늘 싸우고 있지 않느냐” 하는 뜻이다.
유가에서는 이 문구를 잘못 번역하여 “해단을 보고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미워한다”로 풀이 하고, 예군 (禮君) 즉 천신께 제사 드리는 직책을 맡은 제사장인 단군(壇君)을 ‘예 (禮)에는 임금을 천자라 부르지 않고’라 풀이 하고 있다. 공자 께서 제자들에게 “시를 공부하라”는 말씀을 했드시 예기(禮記)와 춘추좌전 (春秋左傳)에는 시(詩經)의 글귀를 어느 고전 보다도 많이 이용 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시경에서 인용 했다던 많은시귀는 찾아 볼수가 없다.
방기에 나오는(蓋, 盍)앞에서 인용한 서묘(黍苗)에 나오는 “개운귀처 (蓋云歸處)라 한 시구” 는 본 뜻이 “개/해, 蓋/盍hé kě (그들의 지도자)가 예기 하기를 고향으로 돌아 간다고 약속 했다”라 풀이 해야 시인의 본 뜻이 나타 난다.
유가에서는 이를 ‘왜 못가느냐’라고 풀이 한다.
이 “흐어,盍hé kě”자는 “蓋, 葛, 解, 契”와 같이 모두 해를 뜻하는 글자다. 이글자는 흐어이 사람 (蓋耳)이란 뜻이라 했다. 서주 시대 궁중에서 일 하던 사인은 합(蓋)자를 “해 흐어何”라 발음 했다 . 서역전에 ‘저인(氐人)은 서로 ‘희/거/그/저치 (盍稚)라 부른다’고 했다 . 이렇게 중국 황실에서 임명한 사관은 모든 근거를 찾아 자기가 설계한 역사관을 글자로서 남기면서 그와 관계되는 시문 까지도 글자를 바꾸어 뜻을 다르게 풀이 하거나, 어떤 시문은 없여 버렸다.
방기(坊記)의 내용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공자께서 살아 계실 때는 “합(蓋,해 흐어 何)라 발음 하여 부르던, 즉 고조선의 근간이 되던 부족”이 중원에 흐터저 살았다. 그 뚜렸한 예가 공자가어에 있다. 하후씨가 살던 집에 들어가 고문(古文)체 로 기록된 해비씨의 가첩(費氏經)을 찾았다 .
상서에는 대소 하후지학이 있다는 문구가 한서 유림전등 여러 곳에도 보인다. 그러나 아무도 하후지학(夏侯之學)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 지지 않았다. 더더욱 사음자라고 보는 “비씨고문, 비씨지학; 費氏古文, 費氏之學”하는 문구가 있다는 사실도 넗리 알려 지지 않았다 . 비씨는 하우씨의 후손이란 뜻으로 어는 한 지손은 “해배씨, 해씨”라 했다 .
제의 서북쪽에 있던 연(燕)이 늘 산융의 친입을 받아 노나라와 모의 하여 제 환공이 고조선을 친입 었다 . 공자께서 살아 계실 당시에 숙신씨가 만든 화살에 맞아 죽은 새매 (Falcon)가 진 (陳)나라 궁중에서 발견된 기록이 있다 . 발해만 서남쪽에는 상 유민의 후손(亳) 과 연(燕) 그리고 숙신씨가 같이 살고 있었다 . 이들을 산융(山戎) 예맥(穢 貊) 또는 개적 (蓋狄)이라고도 기록 했다. 이들이 중원에 넗리 흐터저 살았다. 특히 그들이 살던 발해만 서남 쪽 지역에 흐르는 강을 해하 (海河)라 이름 했다. 논어에 차라리 “땟목을 바다에 띄워 타고 살던 곳을 떠나고 십다”한 공자의 심정은, 그 당시 혼란 했던 중원의 실상을 잘 표현 했다. 설문해자의 기록을 보면, 그가 가고 싶었던 곳이 동이의 어진 군자가 다스리던 만주를 의미 했다 . 중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저 먼 평화스러운 곳,요녕(遼寧)으로 많이 옮겨 갔다고 본다.
다음에는 “고조선 영토-7: 전국시대의 고조선. 연장 진개 (秦開)와 연의 장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끝
November 23,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