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 그려 놓은 갈석산(碣石山):
사마천 (司馬遷) 은 필자가 추론한 단군조선의 발생지 (陝西省韓城縣)에서 대대로 사관을 지내오던 집안의 마지막 사가다 . 그는 옛적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말을 어느정도 이해 했다고 본다. 사기에 나오는 어순과 사음자로 표기한 여러 모를 고려 하면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작성한 문장이 어느정도 실려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필자의 신간저서 첫장 조자법에서 다루었다.
그는 부친의 유명에 따라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설 신화 구전 등등” 중국역사에 관한 자료를 모두 모아 동양 최초의 역사서를 만들어 한 무제의 통치 영역을 온 세계의 중심이라는 개념으로 오제본기에는 사방이 바다로 싸이였다는 뜻으로 사해(四海)라는 글귀를 남겼다. 그러면서 “상서, 춘추, 국어”등 다른 사서에는 없는 북발(北發)이란 말을 산융과 숙신(山戎、發、息慎)사이에 넣었다 . 이 글자는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의 약자가 분명 하다 뜻은 “중화문명의 발생지 였던 구주(九州)를 설명 하던 글자”를 한무제 통치력이 미치는사해(四海)영역 안에 배치시켜 놓았다. 이는 사방이 상로 싸였던 분지라 상서 요전(尚書 堯典)에 나오는 사악(四岳)이란 말을 뒤바꾸어 표현한 글자다 . 필자는 대우가 치수 사업에 성공하여 다스렸다는 옛 12주를 바꾸어 구주(九州)로 했다는 지역이 오늘의 “서안에서 해지연안을 지나 동북으로 연결 되는 분수를 따라 산서성 임분시”에 이르는 관중 분지였다. 그 크기는 해지의 4-5배 정도 였다고 한다 .
치수사업에 성공하고 “그를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을 세겨 두었다”는 문구에서 갈석(碣石) 또는 각석(刻石)이란 글자가 나왔다. 관중 분지 분수 연안에 갈석산(碣石山) 이있었다 . 그는 한국 발음으로 해와 하(河, hé/허. 海, hǎi/하이)를 혼용 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동북쪽으로 옮겨 오면서 그를 따라 관중분지에 있던 이름; “갈석산(碣石山), 수양산, 열수, 평양, 부여, 숙신, 조선” 이 따라 동쪽으로 왔다. 또한 그곳사람들의 말을 사음하여 적은 글자를 훈역하여 동북아시아 상고사 풀이에는 여러가지 이론이 나타났다.
진시황이 전역을 통일 하고 동북 귀퉁이에 이르러 그의 제상 이사가 순수비문을 산해관 시황도 가까이 돌문에 새겨 놓았다 . 이 곳에 연나라 마지막 왕과 연태자 단이 배수의 진을 지고 버티던 곳이고, 기조선(暨朝鮮) 과 국경을 하고 있던 요동(遼東)으로 오늘의 산해관 유역이다 . 기조선(暨朝鮮)사람들을 동호 (東胡)라 했다. 기준의 아버지 동호왕(東胡王) 비(丕)가 죽은 후에는 기조선(暨朝鮮)을 예맥조선 (濊貊朝鮮)이라 했다. 그 국경선이 조선열전에도 나오는 패수(浿水)다. 그들이 싸았던 성곽을 부셔버리고, 성안에 땜을 쌓아 음료수로 쓰려던 저수지를 터 버리라고 진시황이 명했다 .
후에는 진시황 이세를 비롯하여, 한무제,간웅 조조, 당태종등 중원의 지도자들이 그들 영역의 동북 귀퉁이가 되는 곳을 찾았다. 그 지표가 오늘에 까지 전해지는 갈석산이다. 글자를 풀어 보면, 갈(碣)자 에는“해, 호, 흉노”하는 뜻이 있어 하북에서 발해만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 국한되여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적으로 비갈 (碣)을 뜻하고, 한국 사전에서는 “碣; 선돌 게, 둥근 비석 갈, 우뚝선 돌 갈, 크게 노할 알”이라는 복잡한 풀이를 했다. 반대로 남쪽 월남에서는 같은 글자“碣”를 글자 속에 숨은 뜻과는 완전히 다르게 풀이 한다 . 갈석 또는 갈석산이 있었다는 위치는 산서성에서 연산을 따라 발해만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 산제해 있었다. 한나라 이후사람인 문영(文穎)이란 사람은 요서 임유관이 있던 임유현에 있다고 했다.그러나 그의 실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후한의 양웅은 숭산 (崇山, 즉 항산)에 특이한 모양으로 서있는 산, 진시황의 충신이였던 당대의 석학 이사가 만든 비갈이다 . 한서를 편찬한 반고는 북쪽 흉노를 벌한 공을 새겼다 고 풀이 했다. 각종 사기 풀이에서도 이지역에 갈석산이 있었다고 한다 .
수경주에서는 옛적 기록에 후대의 사실을 접붙여 갈석산의 위치를 설명 했다 .
고죽군 백이 숙제의 비화가 담긴 수양산이 해지 연안에 있었다는 설명은 앞에서 박ㄹ혔다.>
그가 살던 시대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영토를 이어 받은 서한(西漢)이 한무제의 통치로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의 기강을 새운 “전한의 황금시대”였다. 당시의 가치관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공맹 사상”이 기로에 섰던 시기였다. 이 기로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던 학파가 공자의 가르 침을 따르던 유가였다. 그들은 “정권에 야합해야 산다 현실을 뼈저리게 느껴 이에서 새 출발한 신흥 유교 (Neo-Confucianism)로 탈 바꿈”하여 이를 한무제의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 그러나 사마천은 황실사관과는 다른 옛적부터 전해오던 “황로사상”을 믿어, 신흥 유가의 가치관에 따르던 후세 사관의 비판을 받게 되였다. 그의 불후의 대작은 세상에 알려지자 곧 비판의 대상이 되여, “보증, 삭제, 대필, 글자 바꾸기”하는 여러 형태의 사기 풀이가 나왔다 .
끝
November 28,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