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영토-8: 진말 한초의 혼란 시대.
8-1 개요.
남만주 해안 일대에 살던 사람들을 기술한 삼국지 예전(三國志 魏書三十 濊傳) 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
“진승등기, 천하반진,연,제,조민피지조선 수만구; 陳勝等起,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라, 산동성에 살던 농부 진승이 깃발을 드니 온천하가 진시황이 이루어 놓은 제국에 반기를 들 때, 옛 부터 있었던 ‘평화스러운 낙원, 요녕(遼寧), 조선땅’으로 수만 가구가 갔다.
이 난리통에 일어났던 사실을 사마천은 그의 아버지가 남긴 글을 읽고 진시황 여토가 초패왕신흥새력에 밀려 어떻게 변해갔나를 표로 만들었다.이 월표 “秦楚之際月表”를 자새히 드려다 보면, 그 때 까지 그 지역에 숨어 있던 역사 예기가 드려다 보인다 . 그 난리 통에 상곡 사람 한광(韓廣, ? 기원전 206년)이 옛 조나라 땅에서 북경 동쪽 계(薊)에이르는 지역에서 발기 하여 기원전 209년에 스스로 연왕이라 했다. 항우를 도운 공으로 그 직책을 초패왕으로 부터 인정 받았다. 그의 수하 장수 장도 (臧荼)가 서쪽 조나라 지역의 반란을 평정 하러온 초패왕 군을 도와 여러 곳에서 공을 새웠다. 초패왕은 연왕 한광의 땅을 둘로 나누어 장도(臧荼)가 연왕이 되고 한광은 요동왕(遼東王)으로 봉국이 옮겨졌다. 한광은 이에 반항하다 기원전 206년에 무종(無終)에서 죽었다 . 항우의 신임을 받아 연왕이 된 장도가 한왕에 반항하자 그를 살해 하고 죽마고우 노관을 연왕으로 봉했다. 한고조가 죽고 부인 여후가 주권을 장악하자 노관은 북쪽 흉노 땅으로 도망 갔다. 흉노는 그를 동호왕의 봉했지만 2년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
탁록전에 참가했던 구리(九黎)가 양곡(暘谷), 즉 상곡(上谷)에서 발해만 연안에 이르러 남북으로 흐터저 살던 곳이 발해만 서안을 따라 조양으로 이어지는 길목(Land Bridge,靑丘)에 있었다. 이와 같은 인구 이동 현상이 진말 혼란기에 축소 되여 나타났다. 양곡(暘谷)에 살던 구리(九黎)들과 같은 뿌리를 한 부족이 중원의 북쪽에 살았다. 그 사람들이 산해관을 지나 북쪽 조선 땅으로 들어 왔다. 그 곳에서 신라가 발생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실렸다 . 이 구리(九黎)가 만주 땅에 자리를 잡았다는 기록을 구이 (九夷) 또는 구리가 새운 나라들(九夷之國)라 했고, 정현은 구맥이 곧 구리(九貉即九夷)라 했다 . 공자님이 혼란스러운 중원을 떠나 차라리 구리의 땅에가서 살고 십다고 한 곳이 남만주 라는 뜻이다. 그 같은 내용이 고구려 본기에도 실렸다 .
이 혼란기에 많은 피난민이 진한으로 왔다고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실려 있고, 그 곳에 살던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에는 중원을 위협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최치원 열전에 실렸다 . 진시황이 ‘선남선녀 3000명을 보내 불사초 불사약 을 구해 오라고 보냈다는 곳이 일본이다, 제주도 아니면 유구다, 신라가 한반도 동남 끝에서 발생 했다’는 등등 상식 이하의 풀이가 나왔다. 이문제는 앞으로 다룰 원양 해운 기술을 분석해 보면 뚜렸하게 진위가 밝혀 진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에 기준 (箕準: 否死,其子準立)의 아버지 부왕 (否王)은 진시황이 공격해 올까 두려워 했지만, 조공은 바치지 않았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랜드 브릿지, Land Bridge” 또는 그 연안의 뱃길로 피란을 갈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남만주에 정착 했다. 그 곳을 진국, 뒤에는 진한이라고 했다 .
다음에는 창해군 (滄海之郡)의 생몰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끝
January 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