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長城과 영역 三十六郡.
창해군이란 말에는 지역을 나타내는 창해군 (滄海之郡, 蒼海郡)이 있고, 진시황을 죽이려고 철퇴로 휘둘렀다는 창해 역사(滄海力士)와 그 지역의 군주라 생각되는 창해군(倉海君)이 있다. 옛적에는 인명과 지명간에 깊은 관게가 있다고 때로는 이름이 그 지역을 뜻한다. 하여 창해군을 다루기 전에 진시황 통일 이후의 동북지역을 먼저 설명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동북쪽 변경을 돌보고 산동성에 이르러 51세의 한창 나이에 갑짜기 죽었다.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중원을 통일하고 옛적 부터 제후들에게 봉지를 주어 다루던 “봉건제후 (封建諸侯)제도”를 패지 하고 강한 중앙 집권 체제의 군현제도를 실시 했다. 그 당시 그의 영토를 36개의 군(三十六郡)으로 나누었다 .
동북쪽 군현의 이름은 “조 대 연”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북쪽 지역에 있던 “군의 이름을 어떻게 붙였는가”하는 질문에 옳바른 답을 찾을 사료가 인멸 되였다.
북쪽의 고조선 세력 동호를 막으려고 쌓은 성이 “진말의 혼란 시대”를 지나면서, 산동성 패현 사람 유방이 서한을 건립하여 진시황의 영토를 이어 받았다. 서한 초기의 영토의 북방 한계선이 진시황이 쌓은 장성 남쪽 이라야 한다 . 그는 옛 “봉건제후국” 제도를 받아 드려 그를 도와준 개국공신을 여러 곳에 봉했다. 그 결과 많은 새로운 군현 이름이 나타났다 . 그 한 예가 연왕이 된 노관이다. 그후 한무제 때에는 군현제가 패지 되고 하고 다시 군현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 동북 지역을 보면, 한사군이 였다는 4개의 군 이름이 아니라 “낭랑과 현토”두 군이 새로운 이름으로 나타났다. 한무제가 우왕의 영토를 친입하기 전에는 옛 진시황 시절의 동북국경이 였던 패수(浿水)가 남북 두 세력이 인정 했던 국경이 분명하다. 국경은 진시황이 쌓은 장성 동쪽 끝에 있었서야 한다.
진시황의 장성(長城)
그 당시 국경이 어디렸나는 사기에 “지동지 해 기조선, 地東至海,暨朝鮮”와 “패수 (浿水)로 국경을 삼았다”는 문구다 . 삼국지에도 패수가 국경이였다고 했다 .
사마천의 기록을 보면, 진시황의 영토가 동으로는 바닷가에 있었던 기조선 (暨朝鮮) 땅과 경계를 이루었다. 그 곳에 패수가 있었서야 한다. 그 곳의 지형지물이 국경을 정하기에 가장 적합 했다고 본다. 험한 산맥이 발해만 연안에 이른 곳이다. 흔히 말하는 진시황이 쌓았다는 만리장성(長城)은 “북쪽에 있던 고조선 세력 호(胡,東胡)를 막으려고 서쪽에서 진(秦)이 먼저 시작하여 동쪽에 있던 조(趙) 나라와 연 (燕)나라가 쌓은 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이라는 긴 성이 되였다.
진시황이 옛부터 잘 알려진 통로인 분수(汾水)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와 집권 13년에는 제후국 조나라 땅 평양(趙平陽)을 빼앗았다 . 이여 15년에는 대군을 동원하여 동쪽 함곡관 유역에 있던 한(韓)나라와 위 (魏)나라를 정벌하고, 18-19년 에는 강족의 범법자들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정벌(羌瘣伐趙)하여 왕을 잡고 동쪽 연나라를 칠 계획으로 중산국 땅에 진나라의 군사를 주둔 했다 .
그러니 조나라 왕자 가(嘉)는 동쪽으로 피난 한 잔당을 모아 대나라 왕이라 하고, 연나라의 도움을 받아 상곡(上谷)에 진을 첬다 . 이 상곡이 중원세격의 중요한 북방 방어선이였다. 흉노가 천신께 제사를 올리던 성역 용성이 상곡 북쪽에 있었다 .
흉노 열전에 보면, 상곡(上谷) 동쪽이 예맥조선(東接穢貉、朝鮮)과 접했다. 흉노와 동호 두 집단의 수도는 가까이 있었다. 고조선의 영역이 상곡 가까이에 까지 이르렀다는 증거다. 다른 한편에서는 연나라가 제일 서쪽이 상곡에서 어양,우북평, 요서, 요동군까지 동호를 막으려고 (以拒胡)성을 쌓았다고 한다. 연의 동북 경계선이 진시황 때에는 더 북쪽으로 올라 왔다 . 사기 주발세가에 보면,한고조 유방, 주발, 노관이 모두 같은 고향 사람이다. 주발이 옛 제후국 삼진(三晉)의 영역을 다스렸다. 고조가 죽고 연왕 노관이 북쪽 흉노땅으로 도망 가자 그 일당을 추격하여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破綰軍沮陽)에서 격파하고 장성 남쪽에 다섯개의 군 을 설치 했다. 서쪽에 상곡(上谷)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요서(遼西) , 동쪽 끝이 요동(遼東)이고, 흉노 열전에서는 그 곳에 (襄平)이 있다고 했다 .
전국 7웅 말기에는 “제후국 진(秦), 조,연” 세 나라 북쪽이 흉노의 남쪽과 경계를 이루었다 (三國邊於匈奴) 하였지만, 진은 연의 동북쪽, 무왕이 황제의 후손을 봉했다는 뜻있는 고을 계성(燕薊城)을 함락 하니 연왕은 태자 단의 머리를 바치고 요동으로 피했다 . 계성에 무왕이 요임금의 후손을 봉하여 당제(唐帝) 제사를 이으라 했던 곳이다. 명나라 때 북경순천부라 하던 곳으로 오늘의 북경 교외다 .
연태자 단이 진에 인질로 끌려 갔다는 시기부터 돌아와 형가를 자객으로 보냈다 실패하여 진시황의 노여움을 사서 연이 망했다는 시기까지의 기록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고들 엇갈린 이론이 제기해 왔다 . 사마천은 자객열전에 실은 태자단 과 그가 보냈던 자객 형가에 관한 내용이 그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하무저 (夏無且)란 사람과 친하게 지네던 동중서와 공손홍에게서 들은 예기라 신빙성이 높다고 했다 .
진시황은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공격을 받은 연왕은 요동으로 가서, 요동왕이라 하였다. 지휘관의 건강과 일기가 사나워 폭설이 내리고 강물이 불어 퇴군 하였다 한다. 이후 진시황이 3-4년동안 연을 정벌 하지 않고, 회수 남쪽에서 버티던 세력 을 토벌하고 돌아와 다시 연왕의 항복을 받고 남으로 내려와 26년에는 제 건왕 (得齊王建)을 잡아 천하를 통일 했다.
두 제후국 연과 진 두 왕실이 혼인 관계를 맺었고, 연태자 단이 진에 인질로 가서 진왕 정과 아는 사이가 되였는 점을 고려 하면 연은 북경 남쪽에 있었다. 앞에서 거론한 한비자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진이 동쪽에 있던 자그만 위와 한을 정벌한 뒤로는 진시황의 영역과 최후까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 경계선이 산해관 유역에 있던 갈석산을 지나지 못했다. 이 국경선을 너머 “저먼 낙원이라고 하던 곳(遼寧), 그 곳에서 나는 귀중품을 갖고저 함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던 곳을 한무제 조정에서 침략 하려는 계획을 새워 전쟁이 나타났다. 사마천은 그 비참한 함상을 자새 하게 조선 열전에 남겼다. 한무제가 제물에 욕심이 생겨 전쟁을 이르켰다는 새로운 학설을 필자는 영문본에서 밝혔다. 이를 뒤에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끝
January 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