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을 지나는 대석하(大石河)가 패수(浿水)
누구나가 인정하는 동양 최초로 황실이 이정한 사가 사마천이 “연나라 마지막 왕이 쫓겨서 요동으로가 요동왕이 되였고, 연 나라 마지막 태자 단이 죽은 곳이 연수 (衍水)라 하니, 연수를 태자하 (太子河)라고 부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현 요동의 심장부 요양을 지나는 강을 태자하라 하고, 연의 장성이 그 곳 까지 이르렀다”는 현 중국 공사당의 설명은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이 1945년에 출판한 풍자 소설, 동물농장(動物農場, Animal Farm)과 같은 지능지수 두자리 밨에 안되는 사람들이 감성에 치우처 받아 드릴수 있는 우수꽝 스러운 설명이다. 독자 여러분은 지능지수 두자리 밖에 안되는 저능아란 평을 듣지 않으려면 필자의 서투른 글이라도 이를 깊히 생각해서 읽고 풀이 하셔야 한다.
이론이 많은 한국 상고사 문제를 독자들이 이해할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주로 중국의 기록을 근거로 우리 선조들이 옮겨 온 자국을 따라 “단군조선의 발원지, 단군왕검, 수도 평양, 삼국유사에 나오는 장당경, 방홀산(方忽山), 왕건성, 평양성”이 모두 산서성 일대에 있었다는 추론을 발표 했다. 이러한 결론을 유도한 중요한 사료는 역사기록 보다는 “한자 풀이 (解字)와 각종 시문 풀이 특히 시경 (詩經), 유교경전, 모두들 등한시 하는 산해경, 역경, 잡가, 법가, 묵가 등등”이 중요한 자료로 인용 되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시각을 바꾸어 (on different paradigm) 문맥을 터득 하는 숙돈(熟讀,critical reading)을 해야 한다.
동물농장에서의 요동은 한나라 이후 위진 시대에 만든 요동이란 변조된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 공을 혼동하여 잘못 풀이(misunderstanding Spatial and temporal sequence of events) 하고 있다.
앞에서 “연장 진개는 갈석산을 지나지 못했다”고 추론 했다. 청조 때 편찬된 “독사방여기요( 讀史方輿紀要)”에도 진(秦)의 영토가 패수 (浿水)를 지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 진수는 사기에 나오는 1000를 늘려 2000리라 했고, 그 후에는 동서로 측정하여 2000리란 거리를 산해관을 지나, 요양 서쪽에 있는 요하(遼河) 를 건너, 오늘 만주의 동북쪽인 요동(遼東)에 이르는 땅2000리를 빼았았다고 설명하고, 연(燕)이 장성을 그 곳에 까지 쌓았다. 발해만 서안에 있던 요동을 남만주 동쪽이라고 뒤 바뀌어 설명하는 동물농장에서 볼수는 식의 설명을 했다.
진시황이 고조선 땅을 친입할 이유도 없고 했다는 했다는 근거도 없다.
진시황이 중국의 가장 동북쪽에 있던 연을 섭멸한 이후 옛 연의 장성을 서쪽에 있던 장성과 연결하여 만리 장성을 쌓았다. 그 렇게 긴 성을 쌓은 이유는 진시황이 북쪽 변경을 순회 할때 수행원이 녹도서(錄圖書)에 있는 문구를 인용하여 아뢰기를 “진을 멸망할 자는 호(胡)다”하여 그전 부터 중원을 괴롭히던 북쪽에 있던 호(胡, 東胡, 朝鮮胡)의 친입을 방지 하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 호 (胡), 즉 고조선을 두려워 했지 공격 했다는 기록은 없다 .
진시황 중국 통일과는 시대, 즉 “선진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때다. 사마천의 사기, 그후에 나온 여러 사려에 나오는 “요동, 요수 발해만 서안 천진 일대”였다고 앞에서 설명 했다. 그 곳 옛 요동에는 연 태자단이 자살한 넘칠 연자 연수(衍水)가 있어야 한다. 있었다고 사마천이 자객열전에서 예기 했다 . 연(衍)자는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삼각주에서 물줄기가 여럿이 되여 넘처 흐른다는 뜻을한 글자다. 간단히 말하면 국경선 (浿水)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해안 어는 돌섬에서 연태자는 자살 했다 . 그 곳은 산맥이 급히 바다에 이르는 지역이라 여울에는 돌이 많아 조개(浿) 가 많이 보이는 여울이라 패수(浿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본다. 한지에는 서쪽은 땅이 높고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가는 여울(浿水)이다. 패(浿)자를 “푸우[pǔ] 라 발음하고 크다는 뜻의 반대”즉 작을 여울이라 했다. 그 자그만 여울이 바다로 들어 가는 끝을 사마천은 연수(衍水)라 했다. 동한시대 설문해자에서도 청조 단옥제 또한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서 패수가 발해만 서안 낭랑군에 있다고 했다 . 이곳에서 나는 돌을 이용하여 진시황의 업적을 기리는 순수비 자료로 쓰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 곳에서 나는 돌(衍石)을 쓰지 않고 더 영구성이 있는 금속으로 만든 기둥에 비문을 새겼다 . 그러나 그 비문의 글자도 뒤에 후한 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느누가 글 내용을 바꾸려(tempering)했다. 연왕희의 마지막으로 버티고 섰던 방어선이 산해관 유역에 성를 쌓고 저항하다 진나라 군사에게 쉽게 잡혀 자수 했다 . 연왕이 잡혔다는 요동에 태자하가 흐르는 요양이였다면, 같은 해 짧은 시일안에 천애의 장애 물인요택을 건너 연왕을 잡고 돌아와 대왕 가(嘉)를 사로 잡고, 남쪽으로 내려가 제왕 건을 잡을수가 없다. 중원 세력이 요택을 건너 요동을 정벌 하려면 최소한 일년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
논란이 많은 국경선 패수(浿水)는 시황도 북쪽에 있는 대석하(大石河)다. 그 물길이 돌밭은 지나 바다로 드러가는 곳을 연수(衍水)라 했다. 그 국경선 해안 물가에서 연 태자 단이 죽었다. 어떤 이유로 발해만 소쪽에 있는 산해관을 지나던 강이름이 남만주 중심부로 옮겨왔나르 살펴 본다.
오늘 태자하(太子河)라고 부르는 강 연안에는 옛 부여(扶餘)시대 부터 제사장, 패자(沛者; 壇君, 昆倫人, 對盧)가 사는 큰 고을 (巿) 졸본이였다 시(巿)자에는 제사장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 있다 . 그 앞을 지나는 강을 패(沛, pèi. 氵, 巿, 水)로 기록 했다. 다른 강물에 비하여 작은 강이라 하여 소수(小水)라 하고, 그 옆에 흐르는 강을 비류수(沸流水) 또 하나는 혼하(渾河)라고 했다. 그 연안에 좋은 활을 만드는 해족(解, 蓋, 渴, kě hé jié kài)의 한 분파인 맥(貊)족이 살아 그들을 소수맥(小水貊)이라하고, 그 지역에서나는 활을 맥궁(貊弓) 이라 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을 “오늘의 로마 바타칸과 같은 하나의 독립된 부족 국가”로 인정 했다 . 그 곳이 고구려의 시조상을 모시던 성역이였다. 오늘의 당산 일대에 있던 단군조선의 수도를 사마천은 양평(襄平)이라 했다. 진수는 옛 부여의 수도가 있던 오늘의 요양(遼陽)을 서쪽에 있던 이름을 빌려다 양평(襄平)이라 했다. 그 고구려의 성역을 끼고 도는 작은 강(小水) 연안에 패자(沛者)가 사는 마을이 있서 이강 이름을 패수(沛水)라 부르다, 글자를 바꾸어 패수(浿水, 浿江)라 했다. 산해관을 지나는 패수(浿水)가 바다로 드러가는 연수(衍水)에서 연태자 단이 죽었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연태자 단(燕太子丹)의 비화가 담긴 연수(衍水)를 태자하 (太子河)라 불렀다. 공식 역사 문헌에는 태자하 (太子河)라는 여울 이름 이 나타날수 없다.
이 문제는 삼국연의에서 공손연(公孫淵)정벌하려는 계획에서 다루었다. 뒤에 한무제의 고조선 우거왕 친입, 수양제와 당 태종의 요동 친입을 설명할 때 다시 다루기로 한다.
다음은 국경 패수(浿水)가 산해관을 지나는 여울이란 증거를 다른다.
끝
December 7,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