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경(詩經)에서 찾아본 고조선. Old Joseon in the Classic Poetry.
강: 이 박사는 동북아시아의 상고사는 기자 (箕子)를 꼭 연구 해야 한다고 강조 했습니다. 그 의견에는 동의 합니다만, 이 박사의 영문책에는 “단군조선의 첫 수도 평양이 중국 산서성 (山西省)에 있었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 했다”는 예기를 듣고, 그 이외에도 영문본에는 이 박사 께서 많은 새로운 학설을 내 놓으셨습니다. 선학들은 물론하고 현제 역사학 또는 한학을 한 사람들이 그런 예기를 하신 분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새로운 학설을 내셨습니까?
이: 첫 수도 평양이 산서성에 있었다는 예기는 뒤에 다시 자세하게 말씀 드리 겠습니다. 저가 이렇게 외람된 학설을 내 놓을 수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다 저가 살고 있는 좋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현대 문명의 덕이 라고 봅니다. 저가 한학을 전공으로 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저 좋은 시대에 살고 있기에 선현들이 보지도 듯지도 못한 숨겨저 있던 사료를 책상 앞에 앉아서 찼아 볼수 있습니다. 한학을 오래 공부 하신분들, 또 한국 상고사를 전공하신 여러분들 앞에 서기가 부끄럽고 송구 스럽습니다. 급히 펴낸 책이라 틀린 점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책 두권에 실린 내용은 바둑에 비유 하여 말씀 드리자면, 저는 이제 포석을 마첬습니다. 그 후 부터는 시간을 두고 하나 하나 차근히 정리해 가고 있습니다. 기자와 시경 한혁의 주인공인 한후에 관하여 더 연구 하다 보니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찾아 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강 박사님과 한번 상의해 보고자 찾아 왔습니다.
1: 시경(詩經)
사: 이 박사님은 시경 속에서 한국상고사에 관한 자료를 많이 찾아볼수 있다는 뜻으로 예기를 하셨습니다. 시경이란 책 이름은 우리 모두가 많이 들었지만 이를 강 박사님이 간단히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 시경(詩經)은 동양에서 옛적 부터 전해 내려오던 제일 오래된 노래를 글로 묵은 책입니다. 그 속에는 그 때까지 중국 전역에 퍼저 있던 사람들의 부르던 토속적인 노래, 조정에서 향연을 배풀 때 또는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노래로 나누어 이들을 풍(風) 아(雅) 송 (頌) 이라는 편명을 붙여 분류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이를 모아 제자 교육에 쓰셨다고 합니다. 오랜 시대를 지나면서 전란으로 많이 손실되고 지금은310여 편만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도 네 가문에 전해 내려 오던 “제시(齊詩), 노시(魯詩),한시(韓詩), 모시(毛詩)가 있었다” 하나, 오늘날 남은 것은 모시뿐이어서 흔히 말하는 시경을 모시라 부르기도 합니다. 전한 시대에는 모형(毛亨)이 옛 글을 모아 풀이하여 모시고훈전 (毛詩故訓傳) 이라 이름을 붙였고, 후한시대에 정현 (鄭玄 )이 그 시문을 다시 풀이 하여 모시전 (毛詩箋)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그 독단적인 책자는 전해오지 않고 당나라 때에 공손달 (孔穎達)이 두 책자를 묶어 다시 풀이한 모시정의 (毛詩正義)가 많이 알려저 있습니다. 여러 지방에서 부르던 노래를 옛 글로 기록된 시문이라 그 글을 읽어 뜻을 파악 하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그 후에도, 남송때 주희, 청 나라 때에는 마단진 (馬瑞辰)이 모시 전전통역 (毛詩傳箋通釋)을, 청나라 후기에 단옥제 (段玉裁)는 고문상서찬이(古文尙書撰異) 와 모시고훈전 (毛詩詁訓傳)을 내 놓았습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시를 중심으로 한 옛 글들을 연구하여 발표했습니다. 시설 (詩說)이라 이름한 책은 여럿이 있습니다 마는 저는 남송의 강기 백석도인 (姜夔, 白石道人; 1155-1221년)과 청조에 혜주척 (惠周惕, 1671-1741년)이 편찬한 또 하나의 시설만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시정의에서 보면:순자 (荀卿)은 조나라 사람으로 모형의 스승이였습니다 (荀卿授魯國毛亨)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모시를 많이 알았다고 봅니다.
모형 (毛亨)과 모장(毛長, 毛萇)은 산서성, 즉 예성(隸省)사람들(東胡)입다.
후에 유생들은 큰소리로 서로 다투어 가며 다 같이 모(毛)와 정(鄭玄)의 설을 부정했습니다. 시비는 모와정이 “何語”를 썼다는 점을 모두 몰랐기 때문이였습니다. 주희의 전(傳)도“何語”에 관한 예기가 없기는 일반이였다. 선진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글에는 여러 곳에 시경의 글귀를 인용했습니다마는 그러한 시구는 찾아볼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순자가 산서성 사람으로 모형의 스승이다 (荀卿授魯國毛亨)니 순자에는 지금 전해오는 詩經에 없는 문자와 시귀가 많이 보입니다. 순자가 60이 너머 고향으로 돌아가 책을 쓴 이후에 시경을 많이 바꾸었다는 증거 입니다. 모시는에는동호(東胡) 즉 옛 고조선 사람들이 읊은 시(詩)가 많다고 봅니다.
혜주척은 옛 고전이 모두 사음자가 많아 풀이 하기 어렵다고 했지요? 하여, 당나라 때에 완성된 모시정의를 그 분들의 의견을 넣어 시설을 편찬 했다고 봅니다.
강: 백석도인 이라고 많이 알려진 강기 (姜夔, 1155-1221년)는 주희 (朱熹, 1130-1200년)와 거의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은거생활을 하면서 당송팔대가 (唐宋 八大家)의 시풍을 이어 받은 강서시파 (江西詩派)를 복구 시킨 시인이라 합니다.
이: 저는 그가 남긴 문구를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유사종 고묘, 詩有四種高妙”라, 즉 시문 안에는 “이 (理) 의 (意) 상 (想) 그리고 자연의 고묘 (高妙)함”이 있다. 그 후에 남긴 또 한 마디가 저를 감명 시켰습니다. 시문 풀이는 더 어렵다는 말을 했지않아요?
강: 네, 그 가 “시설을 쓰고 한 말”이 있습니다 :
“아 그렇구나! 나는 이 시문 풀이를 하여 옛 시인에게 큰 죄를지었다. 다음 사람은 또 다시 더 무거운 죄를 지을 게 아닌가.”
남의 작품을 평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실토한게 아닙니까? 옛 글자 (古文字)로 편찬된 여러 사료를 풀이 한다는 문제는 그보다 도 더 어렵다고 봅니다.
이: 네. 그렇습니다. 하여 역사서를 다루기에 앞서 글자 만드는 방법과 그 풀이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까마득한 옛적에 글자를 골라 문장을 만든 상황을 생각해 보면, 고문자 (古文字)는 오늘 말로 표현 하면 시화 (詩畵)라고 봅니다. 동양 상고사를 옳바로 인식하려면 중국 문헌의 고문자 (古文字), 즉 옛적 시인이 남긴 시화 (詩畵)를 그때 그 사람의 시각에서 풀이 해야 됩니다. 주객을 바꾸어 상반된 입장에서도 시문을 풀이 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만주사람들도 그들의 시각에서 시경을 풀이 했다는 증거가 청나라 때 혜주척 (惠周惕 )의 글이 아니겠습니까?
모두들 옛부터 있었다는 시문의 이름에 나타난 바와 같이 네 가문 (四家詩)에 전수 되여 오던 초기의 시문들은 모두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읊은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를 남송 때에는 주희가 남족위주의 시각에서 풀이 했습니다. 글자 제(齊) 와 노(魯)는 산동반도에 있는 회하(淮河) 이북의 화북평원 ( 華北平原)을 뜻하니, 지금 까지 전해 오는 모시의 모 (毛)자는 한 (韓)자와 같은 하나의 가차 (假借 ) 즉 사음문자 (寫音文字, 表音文字, Phonetic Loan Character, PLC)라고 봅니다. 이 글자는 “우명야;牛鳴也”라 즉 “소가 우는 소리(牟;móu mù mào)를 나타 낸 글자”라고 기록 되여 있습니다. 죽서기년에는 무왕이 상나라 군사를 맞아 싸운 전쟁터를 “우무야, 于坶野”라고 그록 했지만, 시경과 한시외전 (韓詩外傳)에는 “우목지야; 于牧之野”라는 글자가 다르지만 소리가 같은 글자를 썼습니다 . 예전에는 “무(坶, 㙁)와 목 (牧)”이 같은 발음이였고, 죽서기년과 광운(廣韻)을 편찬 한 사람은 다른 지역 사람이였다는 증거입니다. 그 전쟁 터는 “소우는 소리로 불리우던 사람들이 살던 벌판” 즉 말을 바꾸면, 마한(馬韓)의 전신이 되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고 상의 수도에서 30리, 옛 수도 조가 (朝歌)에서 남쪽으로 70리 거리에 있던 벌판 이라는 뜻입니다. 그 일대에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뜻하는 글자를 살려’이름 붙인 중모현 (中牟縣)이 한 (漢)나라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이“소가 우는 소리”로 기록 된 부족을 시대와 지방에 따라서는 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여러 글자들; “木, 無, 坶, 慕, 牧, 馬,母,毛, 暮, 貊, 貃”로 기록 되였습니다. 우는 소리가 어디 다 같습니까? 여러 사람이 다르게 표현 했다고 봅니다.
옛 고전 복구사업의 시조인 모현 (毛亨)은 모공 (毛公)이라고 까지 칭송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생년월일도, 자라온 지역도 모르고, 그의 뒤를 이어 모시를 완성 했다는 소 모공 (소毛公) 모장(毛萇)은 목야에서 멀리 떠러지지 않은 하북성 한단 (邯鄲)사람 이라 알려져 있으니,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가 시경의 여러 국풍 (國風)편에 실려있다고 봅니다.
강: 처음 듯는 놀라운 풀이 입니다. 모시가 주로 옛 마한의 머나 먼 전신이 되는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라. 편찬자가 다른지역 사람들이였다. 그럴까요? 한번 더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허기는 목 (牧)”자 이외에도 그와 같은 발음이였다고 이 박사 님이 풀이 한 “맥 모(貊, 牟)란 글자”가 시경에는 여러번, 여러 지역에 흐터저 나옵니다.
이: 중국 사서에 보면, 서주 초기의 봉후국들은 모두 무왕이 그의 형제 또는 자식들에게 분봉하여 나타난 국가들이라 하는데, 시경의 국풍에 나오는 지역과 도시 국가의 이름이 다릅니다. 서주의 발생지로 알려진 곳을 뜻하는 빈풍(豳風)의 월령가 칠월(七月)은 억압을 받던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 분명 합니다. 그 이외에도 국풍에는 의문점이 많이 있습니다. 강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강: 그레요. 특히 위풍 (魏風)은 옛부터 의문이 많은 편명입니다. 분수(汾水)라는 뚜렸한 진 (晉)나라의 땅 이름이 나오고, 순임금과 하우씨가 도읍을 정했던 곳이라 합니다만, 위(魏)나라의 시조는 물론하고 그 나라의 처음과 끝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 합니다.
이: 저도 그에 관한 사료를 최근에야 찾았습니다. 시 위풍보(詩•魏風譜)에 실려 있기를 “위자,우순하우소도지지야; 魏者,虞舜夏禹所都之地也”라 했습니다. 이 문구를 “순임금과 우왕의 수도가 있던 곳이다”라고 풀이 합니다. 순 임금을 뜻하는 글자 앞에 붙은 우(虞)자에 관한 설명이 없습니다. 또, 시 당풍보 (詩•唐風譜) 에는 “숙우어 요지고허; 叔虞於堯之故墟, 즉 요임금이 다스리던 패허가 된 곳이다” 라고 풀이 하면서 같은우(虞)자을 이름자로 풀이 했습니다. 조자법에서 설명 한바 와 같이 여기서도 두 우자(虞, 禹)는 모두 높다는 뜻의 사음자가 분명 합니다.
광운에서는 “요소도평양우공익주; 堯所都平陽禹貢兾州, 즉 요 임금의 서울 평양이 있던 곳이고, 우공이 치수한 기주다” 했습니다. 위풍(魏風)에는 요순시절부터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가 남아 있다고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위풍 (魏風) 과 당풍 (唐風)은 중국문명의 발생지에 살던 사람들이 부르던 민요가 뚜렸합니다. 요 순 우 임금 즉 “웃 사람”이 그 지역을 다스렸습니까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왕검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새우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시절이 요임금과 비슷한 때라 했지 않아요? 이 설명에 나오는 평양이 요 임금과 단군조선이 모두 위풍(魏風)에 실린 시문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다시 계속하여, 그 곳을 “예성작진(隸省作晉)이라, 즉 옛적에 노예들이 살던 곳을 진(晉) 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하는 설명이 있습니다. 위풍에는 진(晉)나라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가 석여 있다고 하는 주희의 설명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이 제일 평화스러웠던 시대라하는 요순임금이 다스리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노예가 되였다 하니 참으로 놀라운 설명입니다.
한한 사전에 “나라 이름 위, 빼어날 위, 빼어날 외”하는 글자(魏)는 높다는 뜻이 있지 않아요? 이 글자도 앞에서 말씀 드린 글자들 (韓, 毛, 木, 無, 坶, 慕, 牧, 馬,母,毛, 暮, 貊, 貃)과 같이 모두 가차한 글자 입니다. 그들이 서주의 노예가 되였다는 뜻입니다. 이 문구들을 종합해 보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조선의 기원을 설명한 “당고( 唐高 /요堯)가 즉위 한지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하는 때와 일치 합니다. 장소가 ‘우리 말과 같이 발음 되나 한자로는 다른 글자’로 적혔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평양 (平壤)을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평양 (平穰)이라 새겼습니다. 평양이라는 도시 이름이 사음자가 틀림 없지 않아요? 하여 여러 모로 중국 사료를 살펴 보았습니다. 요순 시절에 살았던 핑조 (彭祖)를 시조로 하는 핑씨의 출처가 평양 (坪壤)이란 기록을 찾았습니다. 평씨 (平氏)의 본향이 산서성 임분이란 기록도 있습니다. 단군왕검이 요 임금과 같은 시절에 조선을 새우고 첫 수도를 평양이라 한 곳이 산서성에 있었다는 증거가 확실합니다.
산서성에 살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잘못 전해저서 글자를 다르게 썼다는 기록이 수경주(水經注; 㶟水,래이수)에 있습니다 . 쌍건하 (桑乾水)가 ‘마읍 (馬邑)서 쪽을 지나서 이를 그 곳 사람들(개/합적; 蓋狄)의 말 소리가 잘못 전해 저서 마천 (磨川) 이라 한다’고 하니, 마(馬)와 마(磨)는 현대 중국어로는 달리 발음하나 한국어 에서는 같은 발음이지 않아요? 이를 보면, 그 시대 산서성 쌍건하 일대에 살던 “합/개적 蓋狄”이 쓰던 말이 한국어와 비슷했다는 풀이가 됩니다.
강: 네, 이치에 맞는 풀이 입니다. 그를 잘못 풀이 하여 옛 글자 풀이는 어렵다고 한듯 합니다.
이: 양자 방언(揚子•方言)에는 높다는 뜻의 가차 위(魏)를 잘 설명했습니다 .
“위, 세야” 란 뜻은 ‘가늘고, 작고, 섬세하다’하는 뜻이니, ‘위에, 높이’하는 뜻과는 반대되는 뜻이 아닙니까? 그 곳을 다스리던 지도자의 성품을 그렸다고 봅니다. 그 지역을 설명 했습니다. 황하가 관중분지 동쪽에 있는 ‘산서성 서쪽에서 남남서로 흐르다 갑짜기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협곡관을 지나기 전의 황하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남긴 민요’가 위풍(魏風) 입니다. 어쩌면 서주를 거처 후한 시대에 가서는 ‘옛 고조선의 지도자 위치에 있던 집안이 몰락’ 하여 ‘예스 맨’이 되였는지도 모르지요. 이 ‘요임금의 수도 평양’이란 문구를 보는 순간 저가 추측하였던 “단군조선의 첫 수도 평양 (平壤)이 바로 이곳에 있었구나’ 하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일연 스님이 인용한 위약(魏略)의 위자는; “그 지역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록 했던 역사서란 뜻의 글자”로 우(禹)자와 같은 뜻이고, 앞에 예를 든 글자들과 같이 모두 우리가 지금 쓰는 “높다, xx위에” 하는 뜻의 가차 (假借, PLC)가 분명 합니다.
강: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런 가설을 증명하려면 또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할터 인데…, 그렇다면 위약 (魏略)이나 위서 (魏書)에 실린 글들이 모두 한글 어순이란 말씀인가요?
이: 우선 이름을 봅시다. 위서(魏書)를 비하 하는 글자로 예서(穢書)또는 예사 (穢史)라 하지만, 그 참 뜻은 “예맥 (濊貊, 穢貃) 족의 역사서”란 뜻이 아닙니까?
그들이 살던 지역에 남긴 말이 사음자로 밣여 젔으니, 그 전부라고는 할수 없으나, 중국고전에 실린 상당히 많은 문구가 한글 어순에 따라 번역하면 글귀가 쉽게 풀립니다. 신선의 행적을 모아 놓은 열선전 (列仙傳)에 있는 한 구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강: 그래요? 열선전은 전한 시대에 유향(劉向); 기원 전77–6 년)이 편집 했다 합니다. 도가 (道家)경전은 경외서(經外書)라 저는 숙독하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우리 말과 같은 어순으로 쓴 문장이 있다는 예기는 금시 초문 입니다. 한번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네: 열선전 유백아 (列仙傳 幼伯子)의 한 구절입니다: “幼伯子者,周蘇氏 客也。冬常著單衣,盛暑著襦,形貌穢異 ”
이 문구를 한글 어순으로 풀면; “유백자는 주 소씨의 객이였다. 겨울에도 늘 몸에 걸친 것은 홋옷 뿐이요, 한창 더울 때도 걸친 것은 짧은 팔적삼어서 형모가 (그 곳에 살던 예맥)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하는 뜻이 아닙니까?
강: 음, 그렇군 그래. 그렇습니다. 한글 어순이분명 합니다. 향찰의 시초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중국 문헌 여러 곳에 옛 우리 조상이 쓰던 말을 가차 전주 했다는 이 박사의 의견은 합당 합니다.
이: 이 문구를 자새히 살펴 보면, 한나라때 까지만 해도 ‘발해만 서쪽 연안 어느 곳에는 예맥 (濊貊)족이 살았었고, 그들은 우리와 같은 어순의 말을 썼다’는 증거가 입니다.
강: 그렇게 풀이가 됩니다. 문헌에는 맥국(貊國 ) 있었다는 기록이 몇 곳에 있으나, 정확한 장소를 찾지 못하여 의견이 분분 합니다. 산해경에는 한수(漢水) 동북쪽, 연(燕) 가까이에 있다 망했다는 기록이 있고, 수서 백제전(隋書 百済傳) 에는 “맥국천여리지, 至貊國千餘里云, 즉 서쪽으로 3일을 가면 맥국 천리에 이른다” 한 기록이 이 곳을 뜻했다고 봅이다. 같은 내용이 북사(北史) 에도 실려 있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예맥 (濊貊)족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는 뜻이 군요. 그 건 그렇고, 옛적부터 내려 오던 시문은 한글 문법으로 풀이해도 된다고 보십니까?
이: 아닙니다. 시문은 다르지요. 문법상으로 완전한 문장이 아니니까요. 또 시경의 국풍은 여러 지방에 전해 내려오든 노래를 기록 했기에 변수가 너무 많아 강 박사님의 질문에 단적으로 ‘그렇다 아니다’ 하는 뚜렸한 답을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중국 역사의 근간이 되는 춘추좌전과 사기에는 진 (晉)나라를 가장 자새하게 기록하였지만, 진풍 (晉風)이란 편명은 없고 그 지역에 관한 시문이 당풍 (唐風)에 많이 실려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였습니까?
강: 그 곳에 봉작 된 사람이 당숙우(唐叔虞)라 해서 그렇게 되였다고 합니다.
왜 진풍 (晉風)이란 말을 쓰지 않았는지는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 옛 순우 임금 이름에 실린 ‘우’로 발음되는 글자가 모두 한국 말로 ‘높다는 뜻’을 표음문자로 적었다고 봅니다. 시경에 실린 시문을 공자님 께서 제자 교육에 사용 하셨다니, 사마천의 사기는 물론하고 상서 (尙書) 또는 춘추보다 더 오랫적 사실이 기록되였다고 봅니다. 시경에 있는 여러 글자들이 고조선과 관계가 깊다고 봅니다. 무왕이 4 형제 였다하고 그 셋쩨 동생이 한후 (韓侯)라 하니 그 지역에 있던 시문이 한시(韓詩)였다고 볼수 있지 않을 까요?
강: 시문이 남아 있지 않고 기원 전 약 200-150년 후한 시대 사람인 한앵 (韓嬰) 이 편집 했다는 한시외전 (韓詩外傳) 만 남아 있으니 무어라 답을 할수가 없군요.
이: 또 하나는 무왕의 선조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을 그린 시문이라고 하는 빈풍 (豳風)은 있는데, 서주의 개국 공신인 소공 석(召公奭)을 북경 지역에 봉했다고 하는 연 (燕)나라를 그린 연풍 (燕風)이란 편목은 보이지 않아요. 그 이외에도 옛 부터 풀이 해온 한글 번역판을 보면 특히 여러 국풍에 의문이 많이 생깁니다.
강: 네, 역사서에 실린 “무왕이 소공 석을 연(燕)에 봉했다”는 기록과 시경에 나오는 소공 (召公)의 후손들이 활동 한 지역과는 일치 되지 않아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모시정의 (毛詩正義)에 실린 시보서 (詩譜序) 와 주남 소남보 (周南召南譜) 에는 여러 예기가 실려 있습니다만 확실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소공 석 이후 구대 (九代) 까지의 기록이 없어졌다는 쪽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저는 아무리 보아도 소공 석을 북경 부근에 봉했다는 예기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앞에 말씀 하신 그 문헌에는 “상서 (尙書)에 실린 중국 역사 초기의 기록도 일종의 시문”이라 하면서 시경에는 “옛 역사 기록이 남아 있다”는 인식을 뚜렷하게 심어 줍니다. 시경에 나오는 모든 자료를 종합 해보면 소공 석(召公奭) 의 봉지가 북경 일대 였다는 설명은 이치에 어긋 납니다. 첫 9대의 기록이 상실 되였다면, 북경 지역에 자리 잡았던 소공의 후손들이 전멸 하였거나, 아니면 서남 쪽으로 도망 갔다는 예기가 아닙니까? 소공 석(召公奭)이 서주초기에 제상으로 일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봉지는 서주 기내에 있었다고 봅니다.
강: 그렇게 볼수도 있지요. 시경은 어렵습니다. 하여 옛 부터 공자님께서는 시경을 읽으라고 제자들에게 권하셨지요. 모시는 북쪽 사람들이 읊은 시를 묶은 시집이고, 남쪽 사람들이 읊은 시는 초사 (楚辭) 입니다. 남쪽 방언으로 쓰였기에 이 두 시집 만으로도 남북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비교해 볼수 있습니다.
이: 네. 그럴수 밖에 없지요. 억지로 뜯어 마추려니 제대로 풀이가 안되고 그러니 어렵다고 했습니다. 시경과, 죽서기년에 나오는 “召康公. 召穆公, 召伯, 燕”하는 글자들이 소공 석(召公奭)과 관계가 있다고도 하고, 소(召)라는 성씨는 따로 있었다는 억지춘향 같은 풀이도 있습니다.
사: 두 분의 예기를 듣고 보니, 시경에는 많은 동양 역사가 여러 시문에 들어 있군요. 한 7분간 이 박사님이 준비 하셔 온YouTube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시경에 실린 한혁 (韓奕)을 토대로 만든 “저 멋진 사나이”라는 뮤지컬 (Musical)을, 시사회 이전에 여러 분들에게 보이려고, 추려서 만드셨다고 합니다.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