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태수 공손연의 지시로 233년 9월 달에 조위장수 전예(田豫)가 밀사로 온 오나라 장군 주가(周賀)를 죽였다 . 바로 다음 달 10월에는 사신을 오나라에 보내 아뢰기를 “요동태수 공손연이 손권의 번신이라 한다” 면서 중원사람들이 보물로 취급하던 남만주 지역의 특산물을 바쳤다. 오왕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공손연에게 작위를 더해 주고, 다음 해에는 공손연을 청주목 요동태수연왕 (青州牧遼東太守燕王)이란 칭호를 인정 했다 . 공손연이 받은 칭호에는 그의 영향력이 산동성 북쪽 해안(靑州)에서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남만주 요동만에 이르는 지역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이 지역이 대륙백제가 성장하던 시기의 영역이다. 이 사기극을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고구려 동천왕(東川王;227–248년)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 “왕 이 8년에 조위(曹魏)에 사신 호위(胡衛)을 보내 화친 했다, 10년(237년) 봄 2월에는 오나라 손권이 사신을 보내와 서로 화친을 요구 하자 그를 억류했다. 가을 7월에 참수하여 수급을 위에 보냈다.” 사기극을 부리던 공손연(公孫淵, ?-238년)은 오나라 사신을 처형한 다음 해에 조위 장군 사마의 (司馬懿)의 전략에 말려들어 옛 부여의 수도 였던 요양성(遼陽)에 숨었다가 잡혀 주살 당했다. 이 사실을 왜여왕 (倭女王)이 특사를 보내 대방에 알렸다. 필자는 여기 등장하는 이였다고 풀이 했다.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는 고조선 어느 한 부족(胡)의 지도자(胡衛)란 뜻이다.
대육백제의 영역이 양자강 입구에도 미쳤다는 증거라고 본다. 공손도 일당이 집권 했다는 시기에 요동만 일대에 살았던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기록이 미궁에 빠저 있다.
공손도 일당이 사라진후 해안 일대를 백제가 관리하는 백제 전성기가 나타 났다.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의 후손을 자처 하며 옛 부여의 수도 요양(遼陽, 卒本扶餘)의 종주권을 놓고 오랫동안 싸웠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끼어 있던 자그만 나라였던 했다. 그로 인하여 신라 지증왕(智證王, 智證麻立干, 재위: 500년- 514년)시절에 많은 국책사업을 했다. 국호를 신라로 확정 하고 그 시절에 울릉도를 발견고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다 (置京都東市)고 했다 . 삼국유사에는 지증왕 이전을 상고 그후를 중고라 했다. 당시 백제 무녕왕에 관한 기록에 의문이 있다고 지적 했다 . 그 시절 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영토 확장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해의 주도권을 잡았던 “삼한의 후예들 (백제, 신라, 가야, 일본, 유구)이 만주를 떠나 뱃길로 중국 동쪽 바다에 흐터저 있는 섬으로 퍼저 나갔다.
삼국지에 공손강이 낙랑군의 남쪽 땅을 잘라 대방군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진서 (晉書)에 가 살았다 . 공손도 아들 문의(公孫文懿, 公孫淵,?-238년, 避諱唐高祖李淵)가 제 멋대로 (並擅據) 요동구리(東夷九種)를 모두 부려 먹었다. 조위는 동이교위를 설치 하여 양평에 진을치고 “이를 나누어 요동,창려,현토, 대방, 낙랑 다섯 군을 평주로 했다. 뒤에는 다시 유주와 합첬다. 공손연이 멸망한 뒤에는 동이교위 관활로 하여 양평(襄平)에 본부를 두었다. 함녕2년 시월 (咸寧二年十月, 400년)에는 (동북지역의) 다섯 군국을 평주관하에 두었다. 통치했던26현에 18,100가구가 살았다. 삼국지에는 지리지도 호구 조사기록도 없어 비교 할수가 없다. 그러나 진서(晉書)의 기록과 사기 조선열전에 4개의 군사 통치소를 두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는 결론이 나온다.
이를 진수는 미묘하게 기록 했지만, 제도끼로 제발을 찍었다. 감추려던 꼬투리가 삼국지 동이전 서문에 있다 .
“3대에 걸처 공손씨가 요동과 관계를 맺었다. 천자는 그지역을 때벼려, 왜는 다른 나라 였다. 동이와는 떠러저 중원(諸夏)과는 교류가 없었다. 조위 명제 시절(景初; 237-239; 曹魏明帝)에 공손연을 주살하고, 또 비밀리에 뱃길로 낙랑과 대방 땅에 들어가 동이를 굴복 시켰다. 후에 고구려가 배반하여…..”
여기 실린 하는 뜻이 앞에서 설명한 “오림이낙랑본통한국(吳林以樂浪本統韓國)이라 한 사기극”을 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이 입증한다. 동이교위 본부를양평(襄平)에 두었다는 지역을 대왕이 왜를 추격해 갔던 양평로를 지나(過襄平道東來) 사냥도 하면서 해변의 경치를 즐기며 돌아 왔다 . 공손연이 주살 당한 이후 동천왕이 수도를 옛 비류수상 이라한 평양 (平壤)으로 도읍을 옮기고 계속하여 서쪽 세력을 물리처서 광개토대왕 때는 이미 발해만 서안 갈석산 일대에서 백제와 왜가 활동하고 있었다.
삼국지 선비전에도 있다. “오환 뿐만 아니라, 선비족 또한 동호(고조선 사람들)의 별종이다. 언어와 풍속이 오환과 같다. 선비의 땅은 동쪽은 요수(遼水, 遼河)를 서쪽은 당서성(當西城)이 경계다.” 진수 뿐만 아니라 는 사실을 인정 했다는 뜻이다 . 공손도가 폭정을 했던 근거가 진서에 보인다. 배를 다루는 솜씨가 있는 사람을 강요하여 창해(滄海, 渤海)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 오지 않았다 .
진서(晉書)에는 혜제(恵帝) 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 이후부터 영가의 난 (永嘉之亂, 312년에 시작)은 중국 서진(西晉) 말기에, 이민족(고조선의 후예들)에 의해 반란이 확산되자, 옛적 시문의 내용을 바꾸어 사마씨을 찬양하는 시문으로 바꾸었다 . 그 한 예가 애여장(艾如張)이란 7언시를을 정요동(征遼東)으로 바꾸었다 . 애여장 원문은하는 요지를 과장하여 륙지와 요동을 정벌(征遼東)로 바꾸어, 공손연이 죽으니 군역파담 (群逆破膽)이라, 즉 군중이 들고 이러나 지휘권이 깨졌다. 군중 봉기를 진압했다>란 뜻으로 바꾸었다.
진서 열전에는 사마중달이 고 했다. 공손씨의 본거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갈석산 일대에 있었다는 뜻이 분명하다.
시대가 지나면서 중원에 가까이 살던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화 되여 간다는 실예가 모용외전에 실렸다. “모용외(慕容廆)는 선비족으로 사마중달을 도와 공손연을 토벌한 공으로 (옛적에 전욱 고양씨 살던) 극성(棘城)에서 나라를 새웠다. 그들의 말소리를 잘못 기록하여 모용을 씨로 정했다. 후에 요동 북쪽으로 옮겨 유성(柳城)에 자리잡고 점차로 중원의 풍속을 모방했다” .
삼국지 위지(魏志卷三十)동이열전을 다루면서 고조선 후예들의 변천 과정을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끝
April 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