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저지란(關雎之亂)-1
관저(關雎)의 뜻: 시경 국풍의 첫 시문이라는 주남에 나오는 관관저구(關關雎鳩)를 간략한 글자다 .
장소를 치수 사업을 하던 구주 일대가 역수로 늪을 이룬 어느 섬(在河之洲)이라 했다. 이를 후세 사람들이 글자와 [사람이란 뜻의 발음 치를 저]로, 그리고 시대를 바꾸어 설명 했다 .
사기 공자세가에는 시경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위로는 계후직 (上采契后稷)부터 중간은 은주지성(中述殷周之盛) 마지막에는 서주 말기의 유왕과 려왕 시대로 끝냈다(至幽厲之缺)고 했다 .
사마천은 설이 우 후직 백익과 같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선포 하던 요순시대 (堯時而皆舉用)사람으로 상나라의 시조가 되어 성이 자씨(契為商,姓子氏)라 했다 .
고조선과 夏 商의 관계는 뒤에 설명 키로 한다.
동양 사람들이 구전으로 전해 오던 그들의 역사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너머가는 전환기다.
사마천은 요순시대에 이르러 상서와 예악이 나타났다 (堯舜之盛,尚書載之,禮樂作焉)고 했다. 기록으로 남기기전에도 언어는 있었고 노래도 불렀다. 상서가 첫 역사서다. 상서의 뜻을 선왕지사(先王之事)라 했다 . 지도자의 어록이란 뜻이다.
古典중의 고전인 詩書는 풀이가 어렵다:
시문은 감정과 의지의 본 뜻을 숨기려고 비유법을 인용한 글이라 풀이가 다양하다. 후세 사람들이 글자를 바꾸기도 했다. 공자 이후는 물론하고, 한무제 이전에 집필된 고전에 인용된 시경 문구가 현존하는 시경에는 없다.
사마천은 자서전에서 호수(壺遂)와의 대화에서 공자가 기묘하게 글자를 사용하여 춘추 해석이 다양 하다고 했다. 그는 이능사건 (李陵之禍) 으로 옥에서 자신의 신세를 탓하 면서 고전 풀이의 어려움을 대변 했다:[시서경은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하다. (독자들)이 문구의 뜻과 (저자의) 숨은 생각을 알아 따르기를 (夫詩書隱約者,欲遂其志之思也) 바람에 서다] 라고 했다.
아득한 옛적 사건이라 시대구별에 혼란이 있었다:
급총죽간에[경전 기록은 많이 다르다. 하나라때의 사건이 은 나라때의 사건으로 기록 되었다(其中經傳大異,則云夏年多殷)란 문구가 있다. 필자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시경과 역경등 사서 이외의 고전에서 보충자료를 찾아 글자 풀이와 비교해 본다.
고조선과 하나라 때에 글자를 사용 (壁中得古文虞夏商周之書 及傳)했다는 기록이 공자의 옛 집 벽속에서 나타났다 . 고조선 발생 당시에 문물 발전상이 논어주소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
공자께서 이르기를 순임금은 우 직 설/계 고도 백익(禹、稷、 契、皐陶、伯益) 다섯 신하가 나라를 다스렸다. 인제가 없었다고? 그렇지 않다. 요순교회지간(堯舜交會之間)에 사/시가 성했다(斯為盛) 대륙에서 내려온 부(婦, 阜의 사음 대자)사람 (大陸曰阜) 아홉명이 있었다. 서주가 번성할 때에(周最盛. 成康之治) 현명한 사람들이 많았던 사실과 (比於周) 비슷하다.
인제가 많았다는 사실이 비밀을 벗긴다는 뜻의 순자해폐 편 (荀子解蔽)에 [글자를 만들고, 활과 화살을 만들고, 말을 다루어 마차를 썼다는 등등. 창힐, 후직,순임금, 해중, 예(羿) 등등 여러 사람들이 문물 이기의 사용을 개발 했다는 사실]이 실렸다 .
이러한 기록은 [성강지치(成康之治)라고 평하는 서주의 문화가 발달 했다는 기록은 원주민의 제능을 이용하였다]는 증거가 상서 주서 군아(尚書 周書 君牙), 일주서 재공해(逸周書 祭公解) 에 있다 . 재공(祭公)이 읊은 대표적 시문이(小雅 祈父)다 .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8,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