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저지란(關雎之亂)-2:증자(曾子)가 바꾸었다.
옛 부터 이 시문 풀이에는 논란이 많다 . 원문의 글자를 올려 설명 한다:
關關雎鳩、在河之洲 . 窈窕淑女、君子好逑.
參差荇菜、左右流之,窈窕淑女、寤寐求之;
求之不得、寤寐思服,悠哉悠哉、輾轉反側。
參差荇菜、左右采之,窈窕淑女、琴瑟友之;
參差荇菜、左右芼之,窈窕淑女、鐘鼓樂之
황하의 자그만 섬에서 꽉꽉(關關, 郭郭)하고 우는 새를 아릿따운 숙녀 (窈窕淑女)에 비유하여 그녀를 [군자의 좋은 배필 君子好逑, 자나깨나 그리워지는 그녀 寤寐求之, 그리워도 못이룰 사랑 求之不得、 자나 깨나 그녀를 얻을 생각寤寐思服, 끝도 없이 그리움에 悠哉悠哉, 잠못들어 뒤척이네 輾轉反側.” 그토록 그리운 그녀를 현악기를 다루는 친구 (琴瑟友之)하고 마지막에는 종고악지 (鍾鼓樂之)라] 했다.
모시정의에는 후비의 덕을 찬미한 시문이라 했고, 시설에는 문왕의 본부인 (文王之妃太姒)과 후비가 사이좋게 지내는 상황을 읊은 시문이라 했다 .
초씨역림(焦氏易林)에서도 주군이 관저의 숙녀를 소처로 대려와 현명한 본부인과 짝이 되어(賢妃聖偶) (關雎淑女,配我君子;少妻在門) 집안의 복록이 장구 (宜家壽母 福祿長久)하다 .
맹자는 황하를 따라 올아와 고조선의 발생지 서쪽 기산 밑에 정착한 서주의 선조 고공단부 (古公亶甫,..,至于岐下)가 여자를 밝혔다 . 시경 문왕지습의 첫 수 영대(詩經 大雅 文王之什 靈臺)는 지역민을 동원하여 (수도를 풍에 정한 文王遷都于豐)토목사업을 이룩한 문왕을 찬미한 태평성대를 읊은 시문이라 했다 . 풍수가 흐른 곳은 우가 치수 하던 곳, 무왕이 호경(鎬京) 으로 천도 했다 . 서주 초기 문무왕의 영역이 70리(文王之囿方七十里)다.
시경을 어느누구 보다도 많이 인용한 순자는 해폐(荀子解蔽)편에서 그 지역에 인제가 많고 문명의 발생지 라고했다. 하여 두 유가가 남긴 글 에는 관저(關雎)란 글자가 실리지 않았다.
시문과 초씨역림에는 난리를 기술한 글자가 없다. 한시외전과 공자가어 에는 아릿따운 여인에 비유하여 그녀를 극찬 했다. 시문이 나타난 지역, 시대, 향가의 취지가 밝혀 졌다. 어느 누가 후에 란(亂)자를 첨가 했다.
관저지란(關雎之亂)이란 어휘의 출처: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알려진 노어(論語)에 관저의 란(關雎之亂)이란 문구가 나오고 여러 경전에는 “關雎之人. 關雎之義. 關雎之化行, 關雎之德” 으로 나타난다 .
선진시대부터 청조까지의 문헌을 보면 나쁜 뜻을 암시한 글자로 바꾸기도 했다: 물새 저구(雎鳩)를 “王雎, 雕鸘”라, 즉 주 왕실을 망친 악녀란 뜻을 넣은 별명으로 “물수리 악 鶚, 맹금 지 鷙”라하고, 황하 안에 있든 섬주 (在河之洲)를 바꾸어 던질 척 패백 지 척지(擲贄)하 본보기다.
논어주소(論語注疏)에는 옛 낙수 옆에 있던 낙양(洛陽)을 함곡관 동쪽 낙양(落陽. 雒陽)으로 바꾸어 장소를 바꾸어 魯나라 영역이라고 했다 .
바꾼 사람이 누구인가? 양심에 따르라는 충서(忠恕)란 글자를 달리 풀이한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 기원전 505년~기원전 435년)가 바꾸었다는 사실이 주자어류 (朱子語類)에서 밝혀젔다 . 한시외전에는 증자가 앞을 지나가는 자하(子夏,Bu Shang: 507–c. 420 BC?) 에게 들어와 먹어라 (子夏過曾子。曾子曰: 入食)하면서 저나름대로, 세간에 잘 알려지지않는 군자삼락(君子有三樂)과 군자삼외 (君子有三畏.君子有三費)를 설명 했다 . 사이가 별로 않 좋았던 듯 하다.
논어(論語)에는 관저(關雎)란 글자가 나라의 큰 제사 때에 추는 춤(佾舞) 이란 뜻의 팔일(八佾)과 오나라의 시조를 뜻한 태백(泰伯) 두편에 실렸다. 태백편에 실린 사지지시 (師摯之始)에 관저의란(關雎之亂)이 나타났다. 이 문구는 음이 같은 문왕 (文王)의 부인 태시(太姒)를 지극할 지, 잡을 시(摯: sì)로 작은 부인이란 뜻의 후비(后妃)를 정 부인으로 기묘하게 기록 했다 .
공자가 예기 했다고 출차를 밝힌 논어 팔일(八佾)편에 실린 (關雎,樂而不淫, 哀而不傷) 문구는 우현민(禹玄民)이 한역 禮記에서 “후세 도학자 (道學者)들이 왜곡(歪曲)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 그는 태백(泰伯)편에 실린 “師摯之始,關雎之亂”란 문구 또한 [대부분의 주석서는 본장을 넌센스라고 말하여 읽는 설도 구구하며 읽기 에도 어려운 장]이라 했다 . 태백편에 실린 쾌락각 불은예(快樂卻不淫穢) 란 문구는 풀이 하기가 애매 하다. 왜 예맥족을 상징하는 더러울 예(穢)자를 넣었는가 의심스럽다. 분명한 점은 시문의 발상지에 예맥족이 살았었다. 음란하지 않고 정숙한 예맥족 여자가 존경을 받던 문왕 (文王)의 후비를 은패하고 그로 인하여 또는 그 지역에 난리가 났다(關雎之亂)라 했다.
사마천은 주나라의 결여(周道缺)되어 시인이 (집권자의)옆에서 관저를 지었다(詩人本之衽席,關雎作)고 했다 . 시문 작성 시대를 서주 초기 또는 말기로 은미하게 기록 했다. 모시정의에는 주남에 실린 관저(關雎)란 시문이 향가의 첫쩨다. 상서우공편에 나오는 옹주, 기산 북쪽, 즉 한나라 때의 부풍미양현 이라고 했다 . 이를 빈풍에 실린 올배미(豳風鴟鴞)에 비유 했다. 공자가어에는 우조를 흥겹게 부른 (關雎:興于鳥)군자를 찬미 (君子美之)한 시문이라 부부간에 해야할 일이 다르다는 뜻을 취한 시문이라 했다 . 우저(于鳥)를 큰 또는 수리를 뜻한 글자로 풀이 했다. 양자방언에는 서주초기 (周康之時)에 시문을 지어 아래로는 백성을, 관저를 지어 웃대를 노래 했다. 시치(習治)를 뜻했다. 그 부족이 춘추시대 초기 (齊桓之時)에 난을 이르켜 고시치즉상습 /시란야 (故習治則傷始亂也)라, 즉 시(習: xí 奚. 息. 擕. 昔.解)가 다스리다 상하여 난리가 났다]고 했다 .
강희자전과 옥편에는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둘러말하여 간한 다는 뜻의 휼간(譎諫)을 설명 하면서 관저(關雎)의 주 내용이 휼간 이다. 정 반대가 되는 뜻이 후비가 된 미인에 있다고 했다 .
논어주소 태백에는 본문에 없는 “師摰之始 ,《關雎》之亂”란 문구를 만들어 “始,猶首也”라 했다. 시작(始shǐ)자는 사음자로 해지 연안의 지도자 “斯. 斯干” 또는 해(解 亥)를 뜻했다. 그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는 여울을 사수(斯水)라 했다 . 태행산맥에서 발해만으로 흐르는 해하 (海河) 에서 남만주 요동만 수계에 이르는 지역에 나타난 여울 이름이다 .
이렇게 공자가 그토록 극찬 했던 시문을 주자어류(朱子語類 論語十七 泰伯篇)에서는 논어에 실린 문구를 인용하여 란(關雎之亂)이란 말을 붙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란(皆是亂)이라 또는 (불길한 징조를 알려주는) 주이문(奏以文)이라 했다 .
증자가 인도하던 신흥 유학파들이 공자의 기본 사상을 바꾸면서 그들의 이념에 맞도록 이 시문 풀이를 바꾸었다.
매뚜기에 비유한 주남 종사(詩經 周南 螽斯)에 나타난 정정 당당한 너의 자손이란 뜻의 의이자손宜爾子孫, 선선해 詵詵兮, 진진해 振振兮,횅횅해 薨薨兮, 집집해 揖揖兮, 칩칩해 蟄蟄兮 등은 모두 옛적 예맥족이 쓰던 한글 어문이다. 윤영춘(尹永春)은 그의 시경풀이에서 “… 詵詵兮. 妃妃兮 등을 우리 말로 읽는다 해도…”라. 시경에 옛 우리 말이 있다는 암시를 했다 .
같은 국풍(周南)이나 두 시문은 어순이 다르다. 언어가 다른 부족이 같은 지역에 살았다. 이괘명문에서 어순이 다르다는 증거를 찾았다. 관저(關雎)는 작은 부인을 귀여워 하던 서주(西周) 왕실 사람들이 흥겨워 부른 노래라, 원주민이 지은 시문 기부( 詩經 小雅 祈父)이나 원주민의 향가와는 어순이 다르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12,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