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새로운 고찰
Reexamination of Imna Gala(任那加羅) in the Stele.
Abstract: The Book of Song has the same name and characters of Imna Gala(任那加羅) as engraved in the Gwanggaeto Stele. Silla, Imna Gala, and all other small town-states were around the western shore of Balhae Bay. Old name of Silla known as Xiē la(薛羅), Sala (斯羅), and Sila (尸羅) were near the Balhae Bay along with Baekjae and Hyu-In (休忍) before the King Gwanggaeto. Many phonetic variants of Silla and Gala had been moving around the Eastern Part of Asia.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was the last place.
The King Gwanggaeto lived in Manchuria during the turbulent period and assassinated. His son king Jangsu chased out his rivals. Silla moved the capital to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took the refugees, adapted the Buddhism, and became a strong nation.
Taoist Elders went up to the eastern part of Himalaya Mountains through the ancient trading route and taught the locals. The new religion emerged around the kingdom of Sikkim region, spread out along the Indus River valley to the entire subcontinent during the 3rd century BC, and evolved to many variant forms of Buddhism. Southern Buddhism came to the southern part of China and spread up to the Balhae Bay during the Eastern Jin (東晉; 317-420) dynasty. It replaced the Eurasian Buddhism from the west through the silk-road, assimilated with the folk religion, left a new branch of Buddhism which is Mahāyāna Buddhism, “Miruk-bul” by Korean.
The southern sea-route of Yellow Sea was established around 479. The King Beopheung (法興王: r. 514–540 AD) adapted Southern Buddhism. Silla unified Korea in 668. The people in the Korean peninsula went to the Japanese archipelago, cultivated the locals, and made the new island nation strong. Wei(倭) changed the name to Nihon in 670.
주제어:4-5. 백익. 홍산문화. 환단고기. 임나가라(任那加羅). 원시불교. 팔리어. 미륵신앙. 인도. 卍자. 지나. 태국 화랑. 남조, 대리국. 삼태극.
I. 머릿말 |
IV. 삼한 사람들이 해상로를 개발 |
II. 광개토대왕 전후 시대 |
V. 가락국 허황후 화랑 가야금 |
III. 원시불교의 발생과 전래 |
VI. 맺음 말 |
I 장: 머릿 말
남조 송나라(宋;420 -479년) 역사서 송서(宋書)에 실린 왜(倭) 국왕이 한의 7 나라 (韓七國)를 다스렸다는 신라 임나가라(新羅任那加羅)와 같은 글자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1] 뒤를 이은 남제 (南齊; 479-502 년)에는 같은 글자 가라국왕 하지 (加羅王荷知)가 478년에 사신을 보냈다. 그 뒤를 이은 양나라 (梁; 502-559) 역사서에는 같은 글자 신라가 작은 나라여서 그 전 에는 못 오다가 521년에 백제 사신을 따라 와서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2] 하지가 살았던 가라국의 위치를 현제 지도에서 찾았다.
전국시대 말기에 요동만 -발해만 연안에서 해하 (海河) 수계에 “신라 왜 가야 백제, 고구려, 낭랑 말갈등 여러 부족 국가”가 서로 인접해 있었다.[3] 그 지역에 공손씨가 올라와 부여왕의 대릴사위가 되었다. 고구려 왕자 발기 (拔奇) 세력을 흡수 하고 연왕이라 했다. 사마씨가 원주민 세력을 이용하여 연왕 공손연 (公孫淵, ? ~ 238년)을 제거 하고 조위로 부터 양위를 받아 서진 (西晉; 265-317)이 나타났다. 전란 통에 일부는 만주 내륙으로 도주 하고, 많은 삼한의 후손들이 황해의 동서 해안을 따라 흐터졌다.
진서와 책부원귀에 [금미달에서 떠난 사람들이 남중국 해안 4000여리에 걸쳐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고 남겼다. [4] 황해 남쪽 항로가 개발 되기 전이다. 이를 송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는 왜왕이 다스렸다고 했다.
고구려 왕자 발기가 비류와 김일제의 후손에 동참하여 강남에 정착 했다. 그후 동남아로 진출 하여 남방불교를 강남에 전파 했다. 양자강 하류 남경 가까이 거발성(居拔城)에 수도를 두었던 대륙 백제는, 성왕 (轉輪聖王; 재위: 523년~554년) 시절에, 황해의 동서를 종횅하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절에 풍월주 사다함(斯多含, 547년? ~ 564년)의 화랑도가 한반도에 있던 가락국을 정벌 했다. 그때 우륵이 신라에 가야금 (加耶琴)을 전했다.[5]
불교가 번창 했던 시절에 원나라가 중원을 점령하고 편찬한 송사 (宋史) 에는, 980년 (至道二年)에 부족장 급가라 니(岌伽羅膩)가 태원 지역에 있었다. [6] 백제, 임나 (任那) 와 왜는 같은 글자로 기록 했고, 신라(新羅)와 가라 (加羅)는 여러 지역에 여러 글자로 나타났다. 불교의 어음을 가차전주 하여 적은 이름자다. 이 가설을 증명해 본다.
1 절:동북아 역사 요략: 만리 장성 이북 광활한 지역은 황하문명권 밖이라 중원사람 들이 편찬한 기록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를 “Silent Majority; SMa”라고 간략하여 표현 했다.[7]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사용 했던 시기에, 장소와 용도에 따라 어음을 결정 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이 치수사업을 완성하고 황하문명을 이루 었다. 내릴 강, 북녁 북, 흰 백(降,北,伯) 북적(北狄), 백적(白狄), 백작 (白翟),적인(狄人), 빛 (comb, sun-ray) 등 몇몇 글자 어음속에 두 문화권 의 관계가 남아 있다.[8] 횃불(torch; 白,自)을 천정 까지 올려, 온 (all, whole) 방안이 밝아 진다 하여, 흰백(白)자 에서 숫자 백(百)을 만들어 온 (Ohn) 으로 읽었다. 고전에는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어음이 이렇게 남아 있다.
여러 부족이 합심하여 치수사업을 하던 공공 “龔工, 共工”이라 부르던 집단이 강수(降水)가 분수 (汾水)와 만나는 산서성 지역에서 나타 났다. 그때에 우의 아버지와 동이 수령 백익이 산해경을 만들어 젊은 융우(禹) 를 시켜 치수 사업을 이끌었다. 그러다 분란이 생겨 어른이신 백익(伯益) 을 지도자로 뽑았다. 그가 왕검 (王儉)이란 칭호를 받았다. 순임금이 은퇴 했던 해지 연안 명조 (鳴條)에 수도를 정하고 공공(邛邛) 시대 부터 써오던 이름 평양으로 바꾸고 왕검조선 (王儉朝鮮)을 선포 했다.[9] 이 지역을 한, 가한 혹은 칸이라 부르던 지도자들이 다스린다 하여 한원(韓原)이라 했다.
치수 사업 말기에 분란이 생겨 도산 (塗山)에 모여 회의를 했다. 융우 를 지지 하던 일파가 백익을 죽이고 하(夏)나라를 세웠다.[10] 상호상부하며 평화롭게 살던 고조선 영역에 처음으로 처참한 권력 투쟁이 나타났다. 이를 (가상인물) 황제와 동이 수령 치우가 싸웠다고 한다.[11] 여씨 춘추 에서는 작병 (作兵) 이란 말을 ‘주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황제를 이겼다’고 풀이 했다. 사서에는 치우 천왕 을 “구리지군(九黎之君) 또는 구리치우(九黎蚩尤) 라고도 한다. 구리난덕 (九黎乱德) 이라 했다.[12] 구리 는 난리뿐 아니라 덕(德, 悳, 惪)을 또한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경 운한 (詩經 雲漢) 에는 서주 (西周)의 백성을 여민 (黎民) 이라 했다. [13] 옛적 시경의 문구를 인용한 홍범의 왕도 (王道)에서 도덕경이 나타났다.[14]
초기 공동체 였던 엄숙한 공공국의 지도자 가 덕있는 사람 (邛邛君之德)이 었다. 그를 우러러 보았다.시경에 앙앙(卬卬)이란 문구가 있다.[15] 구리난덕 (九黎 乱德) 이란 문구 속에 고구려의 어원과 도덕경의 관계가 있다. 세 지도자 (三, 參仙, 參禪)의 후손이라 삼묘 (三苗)라는 글자로도 기록 했다. 서주가 완성되고 실행한 박람회에 나타난 공공 (邛邛)은 북쪽에서 왔다.
황하문명 발생지에서 지도자 백익을 잃은 고조선 후예는 남쪽 세력과 오랫동안 싸우다가 최후에는 수도 아사달이 점령 당했다. 북쪽으로 올라 갔던 사람들이 잃어 버린 역사를 복원한 기록이 환단고기다.
고조선의 한 지류는 한원(韓原)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들을 부여 (夫餘),부유(蜉蝣,浮游) 란 글자로 기록 했다.[16] 양산(梁山)일대에 살다가 사천성(益州)을 지나 남쪽 으로 도망 갔다. 떠돌이 생활하던 사람들의 노인이 고조선 발생지에 전해 오던 설화를 히말라아 산맥 동쪽 수지(隨地) 에다 전했다. 아사달이 점령하던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종교적으로 승화 시켜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그지역 인도 사람들이 노자가 전해준 내용을 번역 하여 불경의 초안을 남겼다. 그 내용이 다시 중원에 전래 되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수정 보충하여 첫 불교 기록인 대루탄경 (大婁炭經)이 나타났다 [17] 그에는 비류 (比流) 도솔(兜率) 미륵(彌勒) 유리(琉璃), 환인 (桓因) 수미산 (須彌山) 하는 한국 고대사에 보이는 글자가 실렸다.
북쪽 으로 피해 갔던 고조선 사람들이 내려와 주여왕 (周厲王, ? ~ 기원전 828년) 을 잡아 가고, 공공국의 지도자 화(和) 가 다스렸다.[18] 이를 주공 단과 소공 석이 다스려 공화 (共和) 라고 했다. [19] 급총에서 죽간이 발굴 되여 개가 백익을 죽였다(益乾啟位, 啟殺之)는 사실이 밝혀 졌다.
아버지를 빼았 겼던 주선왕 (宣王)이 한후(韓侯) 에게 끝없이 넓은 북쪽 땅을 통치해 달라고 부탁 했다. 자신이 요청 하여 이룩된 화친맹약을 깨고 한후의 영역을 점령하여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옛 부터 전해 오던 전설을 상형 글자로 새겨 놓아 첫 기록이 나타났다.[20] 이를 노예들이 만든 글자란 뜻에 예서(隸書)라 했다. 산중에 있던 중산국 지도자가 잡혀 새장에 갇힌 신세가 돠었다 하여 그를 중산부(仲山甫) 번후(樊侯)라 했다. 번후 (樊侯; 變汙) 가 지도하여 만든 글자가 “주 籀, 전 篆,예서 隸書” 로 진전 되었다. 이를 정통한자 번체자(傳統漢字, 正體字; 繁體字,繁体) 라고 한다. [21]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천할시(斯)로 표기 했다. 그들이 부르던 민요가 시경의 국풍에 나타난다. 시서경(詩書經)의 원조다.[22] 국풍에는 후에 만들어 붙인 이름이라 “夏 晉 燕”풍이 없다.고조선 사람들이 순임금이 살던 해지연안 명조(鳴條)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으로 올라가 흉노국의 지도자가 되었다.[23] 흉노 또한 고조선의 후예다. 진수의 삼국지 에는 “역경에는 때때로 고려언어 (高麗言) 가 있다”고 했다
삼한 (三韓; 馬韓,辰韓,弁韓)을 기록 할때 변한을 변 또는 시 (卞,示, 弁) 로 바꾸어 기록 했다. 설문해자에 금예변작(今隷變作)이란 표현이 많이 있다. [24] 새싹의 상형글자를 초 (楚)나라 지역에서는 복(葍), 진나라 지역 에서는 공 (秦謂之藑)이라 부르고, 변한(變汙, 弁韓)사람들은 순이라 읽는다. 고죽군(孤竹君)이 있던 지역 사람들이 죽순(Bamboo shut; 舜:艸也) 이라 부르던 어음이 어질 었다는 유우씨(有虞氏)에 붙었다.[25] 삼한의 선조들이 상형글자를 만들었다. 한자(漢字)가 아니라, 클한 한자(韓字)가 옳은 표기다.
2 절:조선 (朝鮮)이란 이름의 이동 경로: 북쪽에서 내려와 분하 (汾河, 汾水) 계곡에서 합심하여 치수 사업을 시작 하던 시절에 아사달( 阿斯達)을 수도로 정한 조선 (朝鮮)이 나타났다. 사마천은 치우와 싸웠다는 가상 인물 황제를 체계화하여 중화문명권의 시조로 만들고,치우가 통솔 했던 고조선 연맹체를; 구려 (九黎), 삼묘 (三苗), 북발, 산융, 숙진 이라고 기록 했다. [26]
춘추시대 초기에 제 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군사를 이끌고 북쪽 세력을 토벌하러 갔다. 비이지계(卑耳之谿) 에 이르러 활 한번 못쏘고 도망 갔다. 관자에 발조선 (發朝鮮)의 지도자를 북주후 모 또는 막(北州侯莫)라고 했다.
춘추에는 조선을 미약한 선우가 다스리던 나라(鮮虞國)라 했다. 조선이 전국책과 방언에 다시 나타났다. 사마천은 조선을 더 북쪽으로 밀어 만주땅 에 붙였다.[27] 조선은 해하 수계를 따라 발해만에 이르는 지역을 뜻했다.
서주의 북쪽 제후국 진(晉; 明出地上 㬜) 자는 [이미 해가 떳다는] 뜻 글자로 발해 (勃海) 와 조선(朝鮮) 이란 글자와 같다. 한국어로 진 이라고 읽는 제후국 셋 “晉, 秦, 陳”이 중화 문화권에 나타났다. 한 무제 때 부터 북주 (北州)란 뜻의 영역을 더 북쪽으로 밀어 불모지 흉노 땅을 뜻했다.
고조선 영역 산서성(山西省作, 隸省)에 있던 진(晉)나라가 “조위한 趙 魏 韓”셋 으로 분열된 삼가분진 (三家分晋) 이후에 나타난 위나라의 역사서 위서(魏書)에 단군왕검에 관한 기록이 실렸다. 진나라 승상으로 진시황 송덕비문을 남긴 이사(李斯) 는 한거중국 (韓居中國) 이란 문구를 남겼다.[28] 삼한의 선조들이 중원 땅에 살았었다는 뜻이다.
강희자전 해(解)자 풀이에, [북위 에는 해비씨(解枇氏)와 비씨(費氏, 毗)가 있었다. 고구려 성에 북씨 (北bèi/) 씨가 있었다. 북은 별(Star)이다. 대(代) 라 했다]라고 실렸다.[29] 백적(白狄,白翟, 北狄)이 구주의 북쪽, 산중에 있다 하여 중산구(中山國) 이라고 했다. [30] 해하 수계 상류에 대국(代國)이 세대 (世代, generation. 歲) 의 어원이 되었다. 세(歲)자에 물수변을 붙여 그곳 여울가 에 살던 부족을 예맥족이라 했다. 지도자가 활을 잘 쏘아 항아(姮娥) 의 남편을 예 (羿)라고 한다. 삼국지 한전에는 기자의 후손인 한후 (韓侯) 즉 조선후 (朝鮮侯) 의 성이 서주왕실의 핏줄과 는 다른 예맥 (濊貃,貉)의 핏줄 이라 모성 한씨(冒姓韓氏) 라 했다. 힌옷을 입는다 하여 백적이라 했던 예맥족 모성 한씨가 한반도로 내려 왔다.
전국시대 고조선의 수도 금미달 (今彌達)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맥군남여 (南閭)를 따라 내려와 창해군이 나타났다. 그 일대에 오팽이 들어가 조선을 매멸시켜 창해지군 (滄海之郡)이 생겼다. 연의 장성이 양평(襄平)에서 끝났다. 예인(濊印)이 나온 신라의 발생지다.[31] 그곳에서 공손연이 잡혔다. 발해만 연안에 “비미, 미추홀”하는 이름이 나타났다. 그들이 해양권을 관장해여 한해(瀚海)란 이름을 황해(黃海)에 붙였다. 이를 한서에는 조선재 해중(朝鮮在海中)이라 했다. 황해를 횅단하는 남쪽 항로를 백제와 가라 (加羅)국 하지가 개통한 시절에 만주에 있던 신라가 한반도에 내려 왔다.[32]
사마천이 폐허가 된 고조선 수도에 양평(襄平)이란 글자를 만들어 붙였다. 일연 스님이 한서 내용을 인용하여 평회성 의의(平壞城, 宜矣)라 했다. [33]
한서에는 고조선 사람들이 육지와 바다로 흐터져 나갔다는 사실을 은미 하게 기록했다.[34] 모두들 지나쳐 버렸던, 물수 변을 붙이지 않은 발해 (勃海) 란, 글자 뜻을 간략히 설명 했다. 신선이 사는 세 산봉우리에 [이미 우뚝히 해가 떠서 올라 간다는 뜻을 지닌 글자가 진(晉;㬜)자]다. 그들의 어음을 음차한 글자가 발해 (勃海, 渤海), 훈역한 글자가 조선(朝鮮)이다.
II 장: 광개토대왕 전후 시대
역사의 흐름을 고려 하면서 사서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풀이 하면, 광개토대왕의 격전지는 남만주에서 해하 수계에 이르는 지역이 었다.
가까이 홍산문화권 사람들이 산너머 의무려산 일대에 정착 했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만주에 전해 오고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장병린(章炳麟: 1868~1936년) 이 남긴 구서 (訄書)에는 “만주 지역이 계림과 말갈 (雞林 靺鞨)의 영역이 되었다.”고 한탄 했다.[35] 그가 외국인 이라고 칭한 계림 과 말갈 (鷄林 靺鞨)은 고구려 신라 백제의 건국 초기에 나타난 이름이다. 말갈 (靺鞨, Mòhé)이 해(奚, 亥, 解 )족 이다. 중앙아시아 에서 만주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 들이 수도를 평양(平壤)이라고 했다.
후주(後周, 951- 960) 시대 돌궐 가한이 다스리던 영역에 평양무초 (平壤 茂草)란 문구가 있다. 수나라 양제가 돌궐과 협약을 하려고 개민가한 (啟民可汗) 을 찾아 갔다. 그 막사에는 이미 고구려 사신이 와 있었다.[36]
잃어 버렸던 환단고기 초본이 20세기 초, 일본 구주에서 나타났다. 현제 많이 사용 되는 삼국유사는 일본에서 1902 년 (明治三十五年)에 출판 되었다.[37] 그 서문에 실종된 편명; “사편 斯編”은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고, “말갈발해조 靺鞨渤海條”는 만주역사를 뜻했다고 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천제 (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 (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수도를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정하고 나라를 북부여 (北扶餘)라고 했다.[38] 고조선의 수도 금미달에서 만주 (滿洲)로 올라가 세로 나라를 세운 부여씨가 사제권을 이어 받았다.
태평광기에는 해부루 (解扶婁) 가 불교 전래와 신라의 옛 이름 시라 (尸羅)와 관련되어 나타난다.[39]
햇님의 후손 석(昔脫解)씨가 휴인 (休忍) 을 정벌하고 왕이 되어 벌휴 이사금 (伐休泥師今, ?~196년) 이라 했다. 활잘 쏘는 예 (羿;濊)의 후손이 라 (羅)자를 성씨로 하여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었다고 급취편에 실렸다.[40] 예의 후손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마을을 지나는 여울을 사수(斯水)라 했다.
천진 일대에 정착 했던 비류왕 후손과 남쪽에서 올라온 휴도왕(休屠王) 김일제의 후손이 화친 하여 공손도 세력이 나타났다. 고구려 왕자 발기 (拔奇,? ~ 197년)가 이에 동참 했다. 추모왕의 후손과 비류의 후손은 남만주 발해 요동만 해안에서 오랫동안 싸웠다. 고구려는 요하를 방어 선으로 서쪽 세력을 견제 했다. 사마씨가 공손연을 토벌 할때 고구려도 오환 선비족과 같이 참전해서 238년에 공손연을 양평성에서 잡았다.
그후 숙신씨가 고구려를 배반하여 조위의 관구 검(毌丘儉, ? ~ 255년)이 고구려를 침략 했다.[41] 그당시 백제 장군 진충(眞忠)이 한나라 낭랑 (漢樂浪) 을 친입 했다가 돌려 주었다. 같은 사람 진충(真忠) 이 신라의 이벌찬이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이를 은유법으로 [시조 사당이 있는 금성(金城)에 여우가 울고 금성(金星, 太白星)이 달을 침범 했다]고 기록 했다. 신라 수도를 금성 또는 월성이라 했다. 낙랑에서 자객을 보내 백제왕을 죽였다.[42] 관구검에 쫓기던 동천왕은 옥저 (沃沮) 땅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이 끝나 고구려는 돌아 가고, 남아 있던 세력이 신라라고 했다.[43] 그 곳에 호동왕자 가 사냥을 갔던 최리왕의 낭랑국이 있었다. 이는 모두 남만주에 있었다.
대륙으로 흐터져 갔던 김일제 후손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신라의 제 일족은 김가 (金哥), 먼 선조를 방이(旁㐌), 수도를 의의(宜矣)라고 했다. [44] 도깨비 방망이 방이(旁㐌) 설화 내용에 누애와 코끼리가 나온다. 의의란 글자가 삼국유사에, 양평성을 평회성 의의 “平壞城。宜矣” 라고 숨긴 글자다.[45] 의성(宜城)이란 삼국유사에 실린 사언의 후손들(傿 斯焉)이 사는 신선의 도성이라 했다.[46] 평회성을 사마천은 양평 (襄平), 위서 (魏書)에는 평양(平壤) 이라고 했다. [47] 고조선 수도 뿐만 아니라, 지나 (支那) 라고 하던 남쪽 지역에 신라가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은미 하게 기록 했다.
환도성이 황패되여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고 했다.시조 사당을 증축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네 결화를 했다.[48] 졸본주 태자하 연안 숙신씨 본향이던 곳이다. 이를 삼국사기에는 옛적에 선인왕검이 살던 평양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 이라 했다. 왕검조선 수도에 붙인 평양 이란 이름이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나타났다.
1 절: 고구려 수도 평양의 위치: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이르니, 신라 사람이 편안 하게 (而) 왕에게 아뢰었다. 그후 실성마립간 (實聖麻立干, 재위 402년 ~ 417년)이 평양으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49] 금사 (金史)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평양이 태자하 다리건너 있던 요양기 올로홀필라 (兀魯忽 必剌) 라고 했다.[50] 대왕이 자객을 만나 다같이 치명상을 입고 승하 했던 곳이다. 이 곳으로 아들 장수왕이 천도 했다. 건국 초 부터 시조 사당 (始祖廟)을 모시던 남만주 졸본주의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다.[51] 수서와 당나라 때에 작성된 살수대첩을 보면 평양이 오늘의 요양(遼陽)이 분명 하다. 국내성 (國內城) 과 한성(漢城) 을 별도(別都)라고 했다. [52]
오늘의 평양시(平壤市)는 장수왕이, 욱리하(郁里 河) 연안, 즉 대동강 하구 강서 유적지에 있던 백제 한성(漢城) 을 점거한 이후, 양원왕 부터 36년 동안 지은 고구려 평원왕 (平原王)의 장안성(長安城)이다.
원나라 때에 편찬된 송사(宋史)에는 고구려 후손인 왕건이 옛 현토군이 있던 지역에서 고려를 세워 후에 한반도로 내려 왔다고 했다.[53] 왕건의 선조는 황하문명의 발생지 구주의 중심부 기주(冀州)에서 나타 났다. 만주에 자리 잡은 부여의 별종이, 평양에 수도를 정했다.이곳을 수양제와 당태종 이 점령을 못하고, 당고종 때에 이적이 뿌리를 뽑았다. 그후 중원이 분란한 시절에 왕건이 현토군 도독이 되어 고려왕으로 책봉 되었다. 왕건의 손자 소(昭) 가 951년 에 현토주 도독 고려국왕 (玄菟州都督 高麗國王) 이 되었다. 송나라 사신을 따라 왔던 서긍 (徐兢, 1091-1153) 또한, [왕건이 현토군 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밝혔다. 고려는 삼경이 있다고 했다.
만주 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요사 내용을 인용하여 발해의 수도 였던 홀한주 (忽汗州)에 동단국을 두었다.[54] 발해를 점령하고 홀 한성(忽汗州, 忽汗城)을 빼았아 그왕 대인선 (大諲譔, ? ~ 926년)을 동단국 왕으로 책봉했다. 명나라가 원나라 역사(元史)를 편찬 했다. 그 내용에 [고구려를 침략 했던 수 양제와 당태종은 장수왕(王高璉)이 살던 고구려 수도를 점령하지 못했다] 고 기록 했다. 고구려 유민이 안승 (安勝; 安舜) 을 왕으로 모셨다는 한성이 욱리하 연안의 옛 백제 수도였다. 신라 문무왕 (文武王; 626- 681)이 사찬수미산 (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왕으로 봉했다. 문무왕 마지막 조에 신원을 알수 없는 수세란 사람을 한성주 총관 (漢城州 捴管 藪世)으로 했다, 그가 모반하여 주살 했다.[55]
동천왕은 만주 땅에 전해 오던 북부여기(北扶餘古記), 단군기 (壇君記) 동명기(東明記) 등, 중원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각종 고기를 알고 있었다.
국권을 되 찾은 동천왕은 졸본부여에 돌아와 추모왕이 수도로 정했던 곳을, 옛 적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의 수도에 붙였던 명칭을 따서, 평양이라 했다. 진수가 금조선(今朝鮮) 이라고 숙신(肅愼)씨 마을에 붙인 이름이다.[56]
요하 서쪽에서 태어난 유리명왕의 아들이 제4대 민중왕(閔中王: 44년 ~ 48년)이다. 그가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閔中原)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 하고 이곳에 자신을 장사 지낼 것을 명하였다. 민중원이 본계 (本溪) 수동 (水洞, 名隧穴)이다. 그곳 서낭당에 수신 (木隧於神,totem pole)을 차려 놓고 치루던 개천절을 동맹 (東盟) 이라고 했다.
전국시대 말기에 천독국 도인 시라(道人尸羅)가 수래에 불상을 싣고 연나라 수도에 왔다.[57] 광개토 대왕 비문에는 시라(尸羅)와 음이 같은 시라성(斯羅城)이 있다. 삼국 초기 역사에 나타난 지명과 부족명을 보면 불교 경전에 나타난 이름이 많이 보인다. 재상 아란불 (阿蘭弗)은 불교 신자 또는 승려 였다. 석가모니를 처음 목욕 시켰던 유하(油河)가 한국 상고사에 왕모유화 (柳花) 로 기록 되었다. [58] 유리 (瑠璃明王), 또는 유리이사금 (儒理尼師今)은 유리(glass, crystal) 같이 깨끗하고 맑은 왕 이란 뜻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년 ~ 371년)이 같은 북부여의 후예인 모용황과 백제에 수모를 당했다. 백제와 싸우다 평양성 (平壤城)에서 전사 했다.[59] 고구려는 다시 산 너머 국내성 으로 피해 갔다. 국내성에서 광개토 대왕이 태어 났다. 중국 사람들은 이 일대에 단군설화와 관련된 환인(桓因) 이란 이름을 붇였다. 전진 (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냈다. 소수림왕 (371–384) 2년에, 불상과 불경 이 고구려에 전래되었다. 그후 374년 에는 아도(阿道)가 불도를 전했다.
아도(阿道; 我道) 란 나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불교를 전한 사람을 아도라 했다. 침류왕 (枕流王, ? ~ 385년) 집권 시기 에도 나타났다. 그 전에 신라 에도 나타났다. 당시 호승 마라난타 (胡僧摩羅難陀)가 욱리하 (郁里河) 로 알려진 대동강 하구, 백제 수도 한성 (漢城)에 불교를 전했다. [60]
광개토대왕 이전에 남방불교가 발해만 일대에 전래 되었다. 백제 침류왕 (枕流王; 재위 384년-385년)의 어머니가 아이부인 (阿爾夫人) 이고, 신라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부인이 아이혜(阿爾兮)다. 모두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다. 남방불교를 따라 올라온 이름자다. 남조역사에 왜오왕이 다스렸다는 “任那加羅”와 같은 글자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렸다.
2 절: 광개토 대왕의 생애: 대왕은 다물(多勿; 되 물려) 정신을 다해 옛 땅을 되 찾으려고 많은 전쟁을 하다 젊은 나이에 승하(昇遐)했다. 대왕의 격전지는 모두 요동 발해만 일대 였다. 대왕의 사망 원인이 비문에 실렸다.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不迎王. 王于忽本東岡, 黃龍負升天
태자하를 끼고 있는 수도 평양 옆에 별도로 시조사당과 각종 병기를 보관 하던 곳에 황룡국에서 보낸 자객을 만나 치명상을 입고 같이 죽었다.
황룡국은 요하 건너 옛 우거왕이 살던 위만조선의 수도다. 유리명왕의 아들 해명 (解明)이 인질로 잡혀 갔다 활을 꺾어 버려 힐책을 받고 자살 했던 곳이다. 그곳을 별도 의의(別都 宜矣) 라고 했다. [61] 의 (儀.宜) 두자는 같은 뜻으로, 의성(宜城) 또는 의의(宜矣)란 문구는 나라를 잃은 백익(伯益) 의 후손들이 정착 했던 수도에 붙여던 이름이다. [62]
광개토대왕 비문을 필자는 여러 차례 설명 했었다.[63]
흔히 “말 이을 이, 而”로 읽는 글자는 능할 능으로 풀이해야 옳다. 麒麟의 수염을 묘사한 상형글자라 했다. 수염이 자란 건장하고 능력이 있는 서쪽 에서 온 월지국 사람 호(胡:而, 髵)을 묘사한 글자다.[64]
문제의 “능왜이 신묘년 래(而倭以辛卯年來)란 문구는, 그 전의 전쟁에서 얻어온 왜인 포로 중에, 바다에서 배를 잘 다를 수 있는 기술(才能, skill)이 있는 자들이 드디어 “신묘년(가을)에 대왕의 군영에 와서 (來)” 이들을 사공으로 사용(以)하여 노를 젓는 배를 타고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발해만 동남쪽 요동 반도 끝에 이르러 백제가 가장 중요시 하던 통상로에 있는 높은 나무가 없는 대머리 산, 독산(禿山; 성 사면이 바다로 싸인) 성을 함락 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대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바닷물에 둘러 싸여서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공격 한지 20일 만에야 함락 시켰다.[65]
대왕의 비문에 실린 지명은 모두 사기 조선 열전과 한서 지리지 낭랑군, 요동군 일대에 있던 지명이다. 인용한 비문 내용을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의무여산을 지나 (갈석산?) 산을 뒤로(負山) 하고 염수의 북쪽(鹽田上; Salt farm)에 이르러 그 지역에 있던 3부락 6~7백 진영(當營)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많이 노획해 왔다. 그곳에서 돌아 오면서 양평으로 가는 길 (襄平道)을 따라 올라와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을 하며 (요하 동쪽으로)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가 옛적 같이 속민 (結和)이 되여 조공을 바쳐왔다. 도망가는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 (任那加羅)에 이르러 종발성(從拔城; 敦拔城) 하니,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新羅)인 으로 지키게 했다.[66] 발성은 고구려 왕자 발기 (拔奇가 살던 성(城) 이다. 평양성(平穰城)과 미추성국(彌鄒城國)이 같은 활당을 받아 묘지를 관리 했다. 당시 여러 소읍국가 (xx國)가 있었다. 이름자에는 “나라 (那羅) 산나성(散那城)등” 햇볓을 숭상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67]
후에 발기(拔奇)가 강남으로 가서 손책과 친하여 남경 주위에 정착 했었다. 발기가 살던 곳이라 하여 거발성(居拔城)이라 했다. 그 성을 양나라 때에 후경(侯景, ? -552년)이 점령 했다. 그때 그 곳에 남방불교가 번성 했다.
남북의 언어가 달라 기록이 분분 하다. 고조선의 부족 한예가 해하 상류 호타하 유역(韓穢沙水城國. 炅古城國)에 살았다. [68] 고조선 사람들이 “爹; 아버지 다”라 부르던 사음자를 북방인과 남쪽 강(羌)족의 언어라 했다.
북송(北宋) 시대에 편찬된 백화사전격의 4대서(四大書)로 알려진 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어람(太平御覽), 책부원귀(册府元龜), 문원영화 (文苑英華)가 있다. 문원영화 (文苑英華)에는 해외 여러 나라에 관한 사연이 실려 있다. 표국(驃國)은 대표적인 불교 국가로 오늘의 태국(Siam) 이라 했다. 그로 부터 해안을 따라 남방불교 가 전래 되던 사실이 적혀 있다. 진덕왕과 진평왕의 관계도 실렸다.[69] 또한 장보고 (新羅人張保臯)와 정년 (鄭年)에 관해 자세히 읊었다. 흑치상치와 사다함(斯多含, 풍월주 재임: 562년 ~ 564년)이란 글자도 있다. 책부원귀 에는 강남서 (江南書云) 내용을 인용하여 송나라 황제와 강남국 주의 대화에서 용사다식(用斯多食) 폐사다 (弊斯多)하는 글귀가 실렸다.[70] 토번 랑 사다 (吐蕃浪斯多)란 문구도 있다. 사다(斯多)란 글자는 고조선의 후예를 많은 말썽 꾸러기 라는 뜻으로 기록 했다.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강남 넓은 지역에 있던 신라 사람이 한반도에 올라와 위용을 떨친 사람이 사다함이다.
삼국사기에는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신라기(新羅記) 와 신라국기 (新羅國記) 를 남겼다고 했다. 그러나 송사(宋史)에는 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은 고음(顧愔)이 신라국기 (新羅國記)를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와 신라가 해상권을 장악한 기록도 있다.[71] 신라에서 제일 가는 귀족이 김가 (金哥), 선조 이름을 방이 (旁㐌)라 했다. 그들이 나침판을 달고 행해를 했다.[72] 당(唐)나라의 단성식 (段成式)이 남겼다는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신라 김씨의 시조 방이(其遠祖名旁)의 글자를 감추었다.[73] 유양(酉陽) 이란, 당나라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방대한 남쪽 지역이다.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강남지역에는 객가(客家)가 많았다. 북쪽에서 내려온 삼한 사람들이 살던 자그만 성을 객가라고 했다.
동남아 일대에서 해상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당나라 언어로 의사 소통을 했다. 신라의 특산물로 공작과 해무(孔雀,解舞)를 바첬다. 왜국인(倭國人) 한지화 (韓志和)를 중국이 비룡위사(飛龍衛士)로 썼다. 그가 나침판을 개발 한 해비(解飛)다. 고음(顧愔)의 신라국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실렸다고 본다.
3절: 신라의 수도 이전: 신라는 나라를 잃은 조선 사람들이 여섯 마을에 흐터져 살던 곳에서 나타났다. 후에 김씨의 시조로 모시는 김알지가 금성 (金城) 서쪽, 닭이 우는 숲속에서 태어 났다 하여 계림(雞林) 이라 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평괴성(平壞城)은 풀이를 못하고, 서울이란 뜻이 있는 의의 (宜矣) 란 글자를 [건의 또는 상의 했다]는 뜻으로 풀이 했다.[74]
당서와 만주원류고 에는 백낙천(白居易 樂天, 772년 ~ 846년) 의 시문을 인용하여 만주 길림(吉林)은 신라의 별명 계림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했다. 금나라의 시조 함보가 신라 사람이란 기록이 있다.[75]
광동성 계림(桂林) 또한 지나(支那) 영역에 살던 신라의 별명 계림(鷄林; 雞林) 과 관련이 있다.[76] 십육국시대 하북 지역에서 활거 하던 모용수 (慕容垂; 326~396) 가 모용진(慕容鎮)을 계림왕(桂林王)에 봉했었다.[77] 선비족 모용씨는 부여의 후손이다. 고구려사람 고운이 모용운이 되었다.
의의(宜矣)란 뜻: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신라가 성장 했다. 왕이란 칭호를 쓰기 전, 내물 마립간 (奈勿 麻立干, 재위: 356년 ~ 402년) 때 부터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재위 417년 ~ 458년) 을 거쳐 지증왕(智證王, 437?~514년)이 어린 시절인 478년 경에 수도를 옮겼다. 삼국사기에는 그당시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의의 (宜矣)란 글자를 썼다. 고구려 해명왕자, 의의(宜矣)라고도 했다. 건의 또는 상의란 뜻으로 썼다.[78] 의의란 글자는 전국시대 문헌에 실렸지만 풀이가 혼미 하다.
강희자전에는 제사왈 의(祭社曰宜)라 했다. 토신에 제사를 지내던 곳, 서울을 뜻한 글자다. 한서지리지 내용을 인용하여 [마땅할 의(宜)와 거동 의 (儀)는 같은 뜻이다. 옛적 백월 땅 (古百越地)에 속했던 월주(粵州)를 의주 (改宜州) 로 바꾸었다] 고 했다. 그곳은 백익의 후손들이 살던 풍요 로운 곳이라 백익 능의백물 (伯益 能儀百物) 이라 했다. 남사(南史)에는 신라는 수도를 건모라 (健牟羅)라 하고, 후경이 점령한 곳을 의의 (宜矣)라 했다. 통전과 태평어람에서 이를 인용 했다. [79] 신라가 남쪽 지나(支那) 땅에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은밀하게 기록 했다.[80] 책부원구에는 글자가 비슷한 탐모라(眈牟羅) 로 바꾸어 수서에 나오는 오늘의 대만섬(𨈭牟羅)을 뜻했다.
법흥왕립(法興王立) 이란 글자에 사연이 있다. 한반도에 정착한 신라에 [불교가 왕성 했다하여 국가의 기반(諱原宗)을 닦았다]는 뜻이 있다. 신라가 가라연맹을 합병하고 영토를 확장하던 시절에 중원 세력이 처음 으로 한반도 남해안을 거쳐 유구까지 이르 렀다. 수서에는 가라국은 없다. 백제와 신라의 지역이 얽히고 설켜 지역도를 그릴수가 없다고 했다.[81]
남조 역사서에 부여 (夫餘)씨 왜오왕이 나타 났다. 앞서[금미달에서 떠난 사람들이 남중국 해안 4000여리에 걸쳐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는 지역이다. [82] 그들이 동남아 해안을 따라 천축국에 까지 이르렀다. 개로왕 (蓋鹵王)은 바다 건너 북위 와, 한반도에 이사 오고 있던, 신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구원병이 도착 하기 전 475년에 성은 함락 되였다.[83] 백제 한성이 점령 당한 이후 백제와 가라국 (加羅國)왕 하지의 사신이 남제에 갔다 479년에 돌아 왔다. 같은 책, 같은 해에, 같은 남제의 지도자가, “新羅·任那·加羅·秦韓” 등 6국 을 부여씨 왜오왕에게 통치 하라고 했다.[84] 가라국 (加羅國)이 같은 사건 479년 기록에 두번 나온다. 하지왕의 가라국은 왜왕의 통치 영역이 될수 없다. 한반도에서 도사마국(都斯麻國)을 지나 왜에 갔다.구지봉이 있는 하지왕 (國王荷知)의 수도였다. 그곳을 수나라 이전에 신라가 흡수 했다.
4절: 신라의 골품제도: 김씨 왕으로는 미추이사금(味鄒泥師今,재위: 261년 ~ 284년)이 처음이다. 그가 김알지의 6대손이라 한다. 김가의 수도라 하여 금성 (金城)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금성을 14대 유례 이사금 (儒禮尼師今; 284년 ~ 298년) 14년에 정체불명의 이서국이 친입했다. 그때 김씨 왕조가 시작 되고 운제부인(雲帝夫人), 갈문왕 (葛文王), 월성 (月城) 이라는 수도가 나타났다. 백제에도 월성이 있었다.[85] 월성이란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지존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동남아 해상로가 열려 남쪽 지나 영역에 있던 신라와 교류가 활발 하여 한반도 신라 왕실에 급격한 변화가 왔다. 양쪽 부모가 모두 왕의 자손일 경우에 성골(聖骨)이라는 골품제가 나타났다. 첫 여왕 선덕여왕 (善德女王 德曼, ? ~ 647년)이 성골이다. 진평왕(真平王)과 마야 부인(摩耶夫人)이 선덕왕 덕만의 부모다. 마야부인(摩耶夫人)의 혈통은 불명이나, 석가모니의 어머니가 마야 부인이다.[86] 마야부인과 사다함 (斯多含)은 선조 이름을 방이 (旁㐌)라 했던 대륙 신라의 김가다. 방이 설화가 전해 온다. 그당시에 세웠다는 삼랑사 (三郞寺) 는 장소가 불명 하다.
여진족(金朝)이 만든 해편 (海篇)에는 삼랑을 산동 반도에 있던 비석 이름 (𥓓名) 이라 했다. 남쪽 사람들은 석삼 자를 털모 자와 비슷한 상형자로 “蠻人呼參爲𣬛” 기록 했다. 고조선이래 전해 오던 삼랑신 (𣬛郞神), 즉 환웅과 같이 내려온 풍백 우사 운사 (風伯雨師雲師) 세 지도자 를 모신 사원이 삼랑사다.[87] 최치원 (崔致遠)이 남긴 난랑비서 (鸞郞碑序) 에 지도층의 언행 지침이 되는 풍류도 (風流徒)의 내용이 실렸다.
백제는 전성기에22 곳 담노 (擔魯)라는 큰 마을에 부여씨의 자손을 봉했다. 담로를 때로는 수도로 사용 했다. 중원을 다시 통합한 수서에는 백제 왕제천 급 오제지신 (王祭天及 五帝之神)이라 했다. 삼국사기 또한 책부원귀(冊府元龜) 를 인용하여 같은 문구를 남겼다. 삼국에서 백제왕 만이 전통적인 중원 황제의 역활을 했다는 표현이다. 삼국유사에 “백제 전성기 에는 아침 저녁 쉴새 없이 세 봉우리 를 날아 다녀 비상왕래 (飛相往來)라”고 표현 했다.[89] 강남, 한반도, 일본 열도 세 곳에 백제의 성도 (盛都) 가 있었다는 뜻이다. 광운에 부여(夫餘)씨의 발원지라 한 곳이 거발성 (居拔城) 이다.[90] 발해 고(高) 씨가 강북 업 (鄴)에 북제(北齊: 550 ∼ 577년) 를 세웠다. 백제는 동성왕 무녕왕 성왕 때에 한해의 동서 두 곳에 수도를 두고 남방 에서 들어온 불교를 받아 백제의 전성기를 이루 었다.[91] 그 시절에 열도 부여에는 [새가 난다는 뜻의 비조 시대 (飛鳥時代) 가 나라 (奈良, 那羅)에 수도]를 두고 나타났다. 전성기에 있었던 22 담노 (擔魯) 중에 알려 지지 않은 담로는 동남아에 있었다.
III 장:원시불교의 발생과 전래:
현장의 서역기에는 옛적에 전해오던 명사를 당나라 초기 어음으로 설명 했다.[92] 그후에 나타난 각종 불교기록에 쓰인 글자를 종합하여 상식적인 판단을 하면 원시불교의 발생지와 분포 및 전래를 알수있다.
1 절: 글자 속에 사실이 있다:
저자 불명의 노자서승경(老子西昇經)이 돈황(敦煌)에서 나타났다. 서승 이란 글자는 노자가 도덕경을 갖고 서쪽으로 올라 갔다는 뜻이다. 초나라 역사서 도올(檮杌)과 같은 뜻으로 노자는 차마고도를 따라 올라 갔다.
1 항: 불교가 나타난 곳:장건(張騫)이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대나무와 죽장 촉포(竹杖, 蜀布)를 보았다. [93] 그전 부터 서촉지역과 인도는 교류가 있었다. 초기에는 스님을 부도(浮屠)라 했다. 떠돌리 백정이란 뜻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 합당하지 못한 글자다. 단군왕검을 잃은 사람들을 묘사한 시문이 시경 종사(螽斯) 부유 (蜉蝣)다. 이와 관계가 있는 글자다.
석가모니칭호의 꼬깔 모(牟)자는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의 상형자”다. 그가 유목민의 후예란 뜻이 있다. 출생지가 람비니원(嵐毘尼園), 부친이 설두야 (屑頭耶), 생모를 마야(摩耶, maya)라고 한다.[94] 어머니가 일찍 죽어 이모(姨母)가 길렀다. 산들 바람 이 부는 골짜기에 살던 빛을 숭상하는 유목민의 외손(外孫) 이다.[95] 석가모니의 모계(婆) 언어가 불교 공요어 팔리(婆羅門僧, 佛陀波利Pali language)어가 되었다.
부다가 탄생한 지역에 흐르는 여울을 유하(油河)라 했다. 갠지스강 (Ganges River)의 한 지류다. 그 물가에서 애기를 목욕 시켰다. 기독교 에서 이르는 세례 성사(洗禮聖事, baptism) 의 기원 이다. 같은 어음이 하백의 딸 유화 (柳花) 로 북부여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 대왕 비문에 나타난다.[96] 출처를 고기운 (古記云), 또는 단군기(壇君記云)라고 했다. 홍산 문화 권에 전해오던 예기가 불교 발생지에 전해졌다는 증거다.
2 항:가라(加羅)의 어원: 여러글자로 표기된 가라는 향나무를 태워 기도를 드리던 타가라 (Tagara;多伽羅) 의 사음자다.[97] 석가모니가 생불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난 기특(奇特)한 곳, 즉 성스러운 곳을 승가라(僧伽羅) 라고 했다.[98] 사자(獅子, 嗣子)상을 세워 놓은 섬나라 옛 사자국 (古之師子國) 을 스님이 다스려 승가라국 이라 했다. 남방불교가 발해만 연안에 이르러 스님에게 맏겨 다스리던 나라가 임나가라(任那加羅)다.[99] 후한 위진시대에 걸쳐 발해만 서남쪽에 임성(任城)이 있었다. 성을 맏겼다는 뜻이다.. 도덕경의 무위(無爲) 사상을 지키는 나라라 사자국 (古之師子國) 을 무위국 (無憂國)이라고 했다. 무우왕(無憂王)이 다스렸다.
3 항:인도(印度)의 어원: 황로 사상이 차마고도를 통해 인도 동북쪽 산악 지대 전래 되었다. 서로를 존경하여 현지인 (婆羅門 Brahmanas)들은 동쪽 운남성 에서 오라온 사람들이 살던 곳을 수지(隨地)라 했다. 이곳을 위키 피디아 에서는 네팔의 옛 고을 신자촌(信仰村.Sinja 信者Valley)이라고 했다.[100]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시/Sa (斯)라고 했다. 시경과 수경주에 많이 나오는 고조선 후예 를 뜻한 글자다. 고구려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수산곡 (隨山谷)이라고 했다. 장승(totem pole)을 새워 놓은 지역 이란 뜻이다.[101] 노자가 올라간 수지, 신자촌에도 장승이 남아 있다. 처음으로 솔도파 (窣堵波, 率都婆; Stupa)가 설치 되었다.[102] 환두 (讙兜 驩兜) 가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곳을 상징한 건문이 도솔 (兜率; 彌勒天) 이다.[103]
수지 사람들은 새로 정착한 곳을 천부(天符)인 (印)이 도착 한 (度; reach to. deliver to) 곳이란 좋은 뜻으로 인도라고 했다. 선비족 우문씨의 우문 (宇文) 이란 글자는 위(하늘로) 부터, 글자(天符印) 을 받았다는 뜻이다. 선비족 탁발부는 아사달에 살던 집안 이란 뜻이다.[104] 그 곳에서 발해만 으로 내려와 정착 했던 신라 여섯 마을을 모모 댁[xx宅 family clan] 이라 했다. 당나라 현장이 인도를 방문한 때에도 천부경이 아사달에 있었다.
인도 지도자 에게는 수지 사람들이 믿던 종교가 세로웠다 하여 무위지교 미신 (無為之教彌新) 이라 했다. 도가 경전에는 모두 무위지익 (無為之益) 이라 한다.[105] 사마상여는 천자가 다스리는 지역을 대표한 가상 인물을 무시공 (無是公) 이라 했다. 또 무시인 명 천자지의 (無是人也, 明天子之義) 라 했다. 한서에는 현명한 천자가 죽었다 하여 망시공 (亡是公) 이라 했다. [106] 무위지교란 [왕공대인 (王公大人) 의 가르침이란 뜻]이다.[107]
4 항: 대루탄경(大樓炭經): 숱으로 낙서를 한 큰 사원에 얽힌 사연을 모집한 책이란 뜻이다. 아사달에 전해 오던 태고적 역사와 어음이 대루탄경 에 실려 있다. 아사달에서 싸운던 장면에 종교관을 더해서 은유적 으로 기록 했다. 그에 실린 석제환인(釋提桓因)이란 문구는 제석 (帝釋)이 환인 을 만나 지존 (至尊)의 자리를 놓고 단판을 해보자는 뜻이 있다. 이를 불가 (일연 스님)에서는 환인 위제석 (桓因謂帝釋)이라 했다.
급총죽간에 나타난 왕중왕이 된 [백익이 개를 제후 (乾啟)로 임명 하니, 개가 백익을 죽였다] 는 사실을 양서의 저자가 인용 했다.[108] 후경 (侯景: 503-552년)이 거발성을 점령하고,북제가 나탄난 전환기를 석이예란하 (昔夷羿亂夏), 견융액주 (犬戎厄周) 라, 즉 [옛적에 왕검 조선의 주민 들이 우왕의 아들 개가 세운 하나라와 싸웠고, 서주를 괴롭 혔다]는 사실에 비유 했다. 백익 살해 사건은 산해경을 비롯한 선진 문현 여러 곳에 실렸다.[109]
5 항: 불교 문양(佛教Logo)에는 삼태극 문양이 있다: 천부경을 받은 고조선 사람들이 연산역(連山易)을 남겼다. [110] 단군설화에 나오는 세 보좌관 “風伯 雨師 雲師”이 삼랑신 (三郞神; 𣬛郞神)이다. 셋이란 뜻을 삼“三 參”로 기록 했다. 삼을 털모자와 비슷한 글자“參爲𣬛”라 했다. 이에 약초란 뜻에 풀의 뜻을 붙여 산삼(山蔘)이란 이름자가 나타났다. 밝은 햇살이 비춘 세 산봉우리가 있던 발해(勃海)에서 산삼이 났다. 숨겨 놓았던 발조선 땅에 장도 (銀粧刀)를 지닌 세 유목민 남자 삼랑(𣬛郞)이 살았다는 뜻이다. 삼극(三極) 으로 표기 되고, 삼태극 문양의 근간이 되었다.[111]
도가에서 지존으로 치는 북극자미궁 (北極紫微宮)에서 자금성 (紫禁城) 이란 이름이 나왔다. 천부경 (天符經) 의 무시일석 (無始一析)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무우왕 (無憂王) 이란 칭호가 나타났다. 온천지 사방을 밝히는 만 (卍)자 와 태극 문양을 원시 불교에서 인용해 갔다.[112] 도교 에서 말하는 무위 (無爲) 가 와전되여 무우 또는 아육 (唐言無憂 舊曰阿育; No one above) 이란 낱말이 나타났다. 아육 (阿育) 이란 내가 위 (I am the highest, 唯我獨尊, 至尊, 無爲)란 옛적 어음이다.[113] 삼국유사 여러 곳에 나온다.
6 항: 한국 고유의 칠성사상: 삼국유사에 풍백(風伯)우사(雨師) 운사(雲師) 와 같이 3000명을 거느리고 내려 왔다는 기록에서 나타났다. 산해경에 우공운우 (禹攻雲雨)라는 문구가 있다. 우가 상유를 죽이고, 운사 우사를 공격했다. 픙(風) 우(雨) 운(雲) 자와 짙은 구름을 뜻한 우뢰 뢰(雷; 靁雲)자 가 있다.[114] 세 동반자와 단군을 살해한 세력과의 오랜 싸움을 묘사한 기록 이 치우와 황제가 싸웠다는 탁록전 설명에 있다. 백익을 수호하다 죽어 모두 별이 되었다. 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삼태성 (三台星), 북두칠성과 견우직녀 하는 전설과 그에 연유된 어음이 한국어에 [북두고리 같은 손. 북두 갈구리] 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논형에는 백익 살해 사건이 은미하게 기록 되었다. 또한 길험편(吉驗篇)에 동명(東明)의 부여 건국 설화가 실렸다. [115] 전허(論衡雷虛)편 <하왕조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살인 사건이 일어 났다. 이를 세간에는; 세워 놓은 나무 (장승)를 자른 사람이 하늘에 용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가 살인자 > 라고 했다. 전허(雷虛)란 글자에는 루탄경 (樓炭)과 같은 뜻이 있다.
감허(感虛)편에는 다제 다능한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이 생겼다. 재의(祭意)편에는 일월성진 세 별이 되었다고 했다. [116] 해를 설명한다는 뜻의 설일(說日)편에는 우사(雨師) 를 [霣 떨어질 운, 우뢰 곤]으로 떠러진 별“星霣如雨”이라고 설명 했다. [117]
우사(雨師)가 견우성 (牽牛)이 되어, 북극성 (해, 日, sun.단군왕검 백익을 뜻한)을 옆에서 보좌 하는 칠성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이를 농기구 가대기 또는 무논을 고루는 써레(plough) 또는 국자(Dipper) 라 한다. 백익이 군사 훈련 목적으로 사냥을 권장하여 납형절이 나타나고, 바둑을 창안 하여 실내에서는 작전 계획을 익혔다. [118] 칠성 신앙에는 우물 정(井) 자가 같이 붙어 나온다. 첫새벽에 우물에서 물을 떠다 장독대에 놓았다.[119] 백익 이기씨 (伊耆氏)가 북 (鼓,Drum) 을 고안 했다.[120] 백익이 처음으로 우물을 파서 마을이 생겼다. 가공인물 황제가 우물을 팠다 하고, 그를 실존 인물 하나라의 시조로 하우(禹)씨로 바꾸어 옹달샘에 우물이란 어음을 붙였다. 불교경전에는 우(禹)를 소 (牛) 사자(嗣 子, 獅子)로 음차 하여 기록 했다.
홍산문화권의 종주국인 부여에서는 출전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이 붙었나 버러졌나(牛觀蹄)에 따라 결정 했다. 소는 우(禹)의 세력을 상징 했다. 시월 상달 개천절을 영고(迎鼓) 라 했다.[121] 이는 북을 만든 사람을 맞아 드리는 행사란 뜻이다. 옛부터 큰 행사에는 북을 치는 풍속이 나타났다. 이아의 하늘 설명과 태평어람에 별 (星中) 을 설명한 내용에는 “河鼓謂之牽牛” 라 했다. [122] 시경 대동에 견우란 글자가 있다. 여걸도 나타났다. 무녀와 견우 가 만나는 날 이란 음력 칠월 칠석 무렵에 피는 나팔꽃 (morning glory)을 견우화 (牽牛花)라 한다. 태평어람에는 모시정의 에서 풀이한 “河鼓 謂之牽牛也” 문구를 되풀이 했다. 이 문구의 풀이가 구구 하다. 남쪽 형초 사람들은 하고를 큰 북 담고(檐鼓)라 견우성(牽牛星)을 뜻했다.[123] 문헌을 종합해 보면 [河伯을 위해 북을 치는 사람이 견우]다.
우(禹)가 방풍씨(殺防風氏)를 죽였다는 예기는 선진문헌 여러 곳에 실렸다.[124] 산해경에는 우가 치수 사업의 실패를 백익의 보좌관의 잘못으로 몰아 상유(相柳)를 죽이고, 분수연안의 공공을 공격 (禹攻共工)하고, 또한 운우 (攻雲雨)를 공격했다. [125] 이 때에 우(禹)가 폭력을 가하여 우격(禹擊) 다짐이란 낱말이 생겼고, 이 사람들이 풍운아 (風雲兒)의 어원이다.
위험(危險)이란 글자는 왕검이 살던 곳 , 즉 왕검성(王儉城)을 올라 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던 결과에서 나온 문구다. 이 견우성 별 자리 (Small Dipper, Plough) 또한 주객을 바꾸어 쓸어 낸다는 쓰래박, 평편하게 땅을 고른다는 뜻에서 소 두마리가 끄는 농장기 “쌍 쓰레”란 말이 생겼다. 옛적에 소 등에 짐을 실을 때에 당기는 끈을 북두끈, 북두 고리, 북두고리 같은 험한 손 이란 표현이 있다. 그 들을 추모하여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 으로 전해 오고 있다.[126] 쟁인에게 의사 전달이 잘못 되여 일곱개 (별) 빛이란 뜻이 가지로 전해 져서 칠지도 (七支刀)가 나타났다.
7 항: 수미산(須彌)을 묘고산 (妙高山)이라 했다: 삼묘(三苗)를 삼위(三峗) 에 몰아내고 공공(共工)을 유도(幽都)로 유배 보냈던 높은 항산(恒山, 常山, 桓山, 嵩山)을 뜻한 글자다. 동서남북 네곳을 통치하는 수미 (須彌)를 보호 하는 자를 사천왕 (四天王)을 금은동철 륜왕 (輪王) 이라 이름했다.[127] 금륜왕 (金輪王) 이 사방 (四方) 을 다스린다.[128]. 인도 동북 쪽 차를 많이 생산 하는 지역(荼城)에 전륜성왕 (輪王之苑囿)이 기거 했다.[129] 불교국 백제와 신라에서도 륜왕 (輪王)이란 이름들을 썼다.
하(夏) 나라 영역에 살던 사람들이 도덕경을 옮겨 우(禹,昔禹)를 숭상 했다.[130] 돌기둥 또는 나무 위에 올려 사자(獅子, lion) 상을 놓았. 산해경 숙신 (肅慎) 씨 마을에 나타난 웅상(樹名曰雄常, Totem pole)의 변형이다.
8 항: 아사달을 수미산(須彌山) 또는 비구(比丘)라 했다. 최고의 지도자를 곤륜 (昆侖) 이라 했다. 제일 높은 제사장이 되살아 나서 사는 높은 곳을 곤륜산 (崑崙山) 수미산 (須彌山), 또는 소미로산(蘇迷盧山)이라 했다.[131] 그 곳은 찾을 수가 없다. 미로 (迷路, mirror, maze)의 어원이 되었다. 요순시절에 삼묘 환두 (驩兜) 를 북쪽 분수연안 공공국에 있는 항산에 [귀양을 보냈던 무리가 되살아 나타났다]는 전설을 설명 했다. 되살아 났다는 뜻이 회소곡 (會蘇曲) 이다. 신라 초기 육부 촌장 (六姓始) 이 살던 시절, 유리이사금 당시 도솔가 (兜率歌)가 나타났다.[132]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 (烏忌日)이라고 한다.[133] 삼족오와 관련된 표현이다. 도교에서는 상원(上元) 이라고 한다. 옛적에 월력(月曆)정월 대보름 다음날 아침이 천축국 새해 첫날이 었다.[134] 현재의 스리랑카는 사자국(師子; 嗣子 獅子國 Lion) 국 또는 승가라국 (僧伽羅國)이라 했다. 나라이름은 세 선인 즉 삼랑 (𣬛郞, 三郞) 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들은오랫동안 음력을 썼다.
아사달(阿斯達, Asadal)의 음과 뜻을 이리저리 바꾸어 적은 글자가 비구 (比丘)다. 아사달에 큰 사원이 있어 그 건물에 수도자가 많이 있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비구니(比丘尼) 라 했다. 아사달이 점령 당한 상황을 제석이 싸우던 곳(常與帝釋戰鬥之神)이라 했다. 인도 설화에는 불가에서 쓰던 아수라 (Asura) 를 악한 귀신 무리로 나타 묘사 했다. 아수라장 (阿修羅場) 이란 용어가 여기서 생겼다.[135]도사유적지(陶寺遺址) 로 발표된 곳이 아사달 이다.[136] 그곳에서 싸우던 용사를 아라한(阿羅漢), 또는 나한 (羅漢) 이라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최 측근 이었다. 사살 되기도 했다. 하여 죽음시 시라 (尸羅)란 글자가 불교 전래 경로 여러곳에 나타난다. 신라의 어원이다. 같은 음의 시라성(斯羅城)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
9 항: 원시불교의 발생지에 고조선 후예가 정착 했다: 당태종 시절에 현장이 천축국을 방문하고 [어린 왕자가 노자로 부터 배워 믿음이 바뀌었 다는 구마라 나다 (拘摩羅邏多 Kumara; 童子王)왕을 만나 대화를 했다.[137] 인도 동북쪽에 수지(隨地)를 지나 복지국 (至那 僕底國)을 한봉질자소 (漢封質子所) 라 했다. 관노 (隸;slave, servant) 였던 사람들이 살던 곳 이다. 인도기(印度記)에 이르기를; 한왕자 (漢王子) 가 그곳에 정착 하여 동쪽땅을 몹시 그리워 했다. 고향에서 봉숭아와 자두를 갖고 가서 심었다. 복숭아를 지나이(至那爾, 至那儞), 오얏을 지나도불 달라 (那羅闍弗呾邏) 라 한다. 당시 인도에서는 현장 (玄奘)이 살던 곳을 진단 (震旦) 이라 부르던 동쪽 큰 나라 (東土), 즉 진나라 (大秦)를 마하지나국 (摩訶至那國) 이라고 했다. 그곳에 힌눈이 덥힌 산맥을 흑령(黑嶺)이라 했다. 나(那)에 이른 다는 뜻의 지나(至那)란 글자를 명사 또는 형용사로 사용 하여 동쪽에서 온 사람들 이라 했다. 오월춘추에는 “오태백의 선조, 후직의 후예가 수지에 가서 연영종지술(研營種之術)을 가르쳤다” 고 했다. [138]
동이족 숙신씨 마을에는 환웅을 뜻한 형상 (雄常,하루방, totem pole) 을 세웠다. 이를 복상수(服常樹; 옷입은 나무) 또는 사랑간수 (伺琅玕樹) 라고 했다.[139] 융우가 죽인(禹殺) 공공국 상유 (相柳, 相繇)를 허신(許愼)이 상형 (相 象形) 자를 설명 하면서 수체 힐굴 (隨體詰詘) 이라 했다.[140] 서낭신이 길한 예기 를 하려는 모양과 같이 그럴듯 하게 그려 놓은 글자가 “日. 月” 이란 상형자 라고 설명했다.[141] 진수가 남긴 고구려 전에는 [웅상을 세워 놓고 산간지역에서 맑은 여울 물을 마시며 살았다]는 문구가 있다. 시경에 “무종궤수無縱詭隨” 란 문구가 있다. 거짓말을 따르지 말라로 풀이 했다. 환웅상을 숭배 하던 고조선 신앙과 관계가 깊은 문구다.[142]
10 항: 범서(梵書)란 글자의 기원: 허신은 [범(梵)자가 서역 불가에서 쓰는 글자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 현종이 남쪽나라를 읊은 시 제목을 제범서 (題梵書)라 했다. 맹자는 시가 죽고 역사서가 세 곳에서 나왔다고 했다. 진지승(晉之乘), 노지 춘추 (魯之春秋), 초지도올 (楚之檮杌) 이라고 했다. [143] 산서성의 실권자였던 범선자(范宣子)가 그를 찾아온 손님에게 <산서성 사람들은 세록(世祿, 가계의 혈통을 기록한 책자) 를 갖고 있다>고 했다. 고조선 사람들의 기록이 중국역사서의 기원이다.
범(范)선자의 선조들이 지켜오던 가치관을 히말라아 산맥 수지에 전하여 글로 남겼다. 범서(Sanskrit)는 산서성과 관계가 깊다는 뜻이 글자에 있다. 해상로를 통해 불교가 전파 되었다. 안전을 기원하는 선도성모(仙桃聖母) 상을 모시고 돛을 달아 바람을 타고 멀리가는 배를 범선 (帆船)이라 했다.
맹자(孟子; ~기원전 289년?)의 이루하 (離婁下) 편명은 산서성에 있던 부루국 (扶婁國) 사람들이 떠러져 내려 갔다는 뜻이다. 또한 도올 (檮杌) 이란, 도 즉 (도덕경)을 갖고 (서)쪽으로 올라 갔다는 옛 한국어 사음자다. 태평광기 에는 “루사덕婁師德. 재상루사 宰相婁師” 문구가 많이 있다. 산서성에서 덕있는 단군(宰相)의 한 지류가 남쪽으로 내려가 북송시대 문헌이 부루국인(扶婁國人) 이 나타났다. 이를 요술쟁이(幻術)에 비유 하여,상나라 부열(傅說)이 노예로 일하던 부암(傅巖)에 접 붙였다.[144]
북쪽으로 올라가 북부여를 세우고 왕자를 해부루 (解扶婁)라 했다. 여러 글자로 적은 비류수 (沸流水), 비류왕 (比流王)이란 글자는 부루(扶婁)의 어음 변화에서 온 글자다. 맹자 이루 (離婁), 즉 부루가 떠난 사연의 상하편에는 고조선의 발생부터 전국시대 까지의 사연 이 실려 있다.
전국시대 제후국 연(燕)의 권력을 잡았던 자지(子之, ? – 기원전 314)에 관한 기록 또한 혼미하다.[145] 연소왕(燕昭王; ?-279 BC) 시대에 도술인 시라 (尸羅)가 불상 (浮圖)을 수래에 싣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에 해하 수계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지역에 불교 문화가 도착 했다.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당시 이름에 불교 경전에 많이 보인다.
2 절: 황로 사상이 원시불교의 기원:
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가서 호(胡), 즉 천축국 지도자 에게 도덕경을 가르쳤다. 같은 뜻이다.는 기록을 동진의 도안(道安: 312-385) 이 인용 했다. 언어를 서로 이해 할수 있었고, 스님들이 도덕경 두편을 사용 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 했다.[146] 무위(無爲) 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마우리아 제국 (Maurya Empire:기원전 320년-기원전 185년) 왕의 호칭으로 사용 하고, 불교를 인도 전역에 퍼뜨리고 사자상 (lion statue, 桓雄像,嗣子)을 세웠다.
고조선 삼묘의 후예가 묘족 (苗族)이다. 묘족은 고양씨의 후손 으로 산서성에서 천축국에 갔다.[147] 그곳 부라만 도인( 婆羅門道人)이 새로운 교리를 배웠다고 대루탄경에 실려 있다.[148] 소는 하우 씨 후손을 뜻하고, 피해 갔던 백익의 후손을 사슴 개 닭으로 기록 했다.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 하는 (Holy cow) 풍속이 나타났다. 삼묘의 묘자에서 고양이 묘(貓)자를 만들어 불교 사원에 고양이 상을 세웠다. 체계가 잡힌 새로운 종교가 운남성을 따라 돌아와에 도교에 큰 변화를 이르켜 전국시대 부터 위진 시대에 여러 도학자가 나타 났다. 도학자 갈홍 (葛洪)이 한 본보기다.[149] 도가의 초기 경전이 역이다. 초시역림, 연산역(連山易)등 몇몇 역경이 나타났다.[150] 주역계사(繫辭)에 미륜천지지도 (彌綸天地之道)란 문구가 있다. 지도자 [미彌의 륜( 綸 倫)이 자연의 법칙, 우주관]을 설명 했다.
3 절: 원시불교의 중원 전레:
대루탄경에는 도솔(兜率), 미륵 (彌勒),비류 (比流) 유리(琉璃), 수미산 (須彌), 시라(迦羅 尸羅)등등, 한국 상고사에 나오는 이름이 실렸다.
장건(張騫)이 한무제 때에 서역을 다녀 왔다. 무제 이후 정치 사회적 혼란에 휘말려 왕망이 신조를 세웠다. 이러한 시대에 토속신앙을 비롯한 각종 신앙이 번창 했다. 그때 부터 신독(身毒)국을 천축국(天竺國)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황노 부도를 모시는 사당(黃老 浮屠之祠)을 짖고, 부도 (浮圖)란 글자도 사용했다.[151] 산동성 사람으로 강남에 정착 했던 사람이 남긴 모자 (牟子) 에는 광서-광동성에는 불교가 성했다고 했다.[152] 대당 서역기와 송고승전에 [지나(支那) 라고 알려진 광부에 불경을 전했다] 는 기록이 있다.[153] 십육국춘추에도 실렸다.[154] 원시불교가 들어온 차마고도를 통한 교류는 중원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현장의 서역기 또한 마등 (摩騰) 이 곤명도가 막혀 (昆明道閉) 통하지 못하고 먼길을 돌아 낙양에 도착해서 불경을 석실에 보관 했다고 한다.[155] 동진(東晉:317 ~ 420)시절에 해상로 를 따라 남방불교가 중국 동해안에 이르렀다. 월지국에서 달을 숭상 했다.
발해만 연안에 있던 백제 설라 휴인 (百濟及薛羅 休忍)을 남방불교 영향을 받아 설을 신으로, 가라 (加羅)를 스님에게 통치권을 일임한 나라 이름으로 바뀌어 광개토대왕비에 “新羅, 任那加羅”로 나타났다. 여러 곳에 있던 신라의 수도 월성 (月城)은 지존 (至尊)의 거처란 뜻이 있다.
4절: 미륵 보살(彌勒菩薩)의 유래:
신라가 발해만 연안에 나탄 6부촌장에 성씨를 주던 시절에 처음으로 개천절을 기리는 도솔가 (兜率歌)가 나타났다. 유리이사금 (儒理尼師) 5년 왕망의 신조를 대치한 유성공 시절이다. [156] 동진(東晉: 317-420) 시대에 석도안이 고조선 영역 태행산 (太行恒山 創立寺塔)에 사탑을 짖고 수도승이 되었다. 그가 고조선 토속신앙에 원시불교를 접붙인 신흥 종교가 미륵 신앙 (彌勒信仰) 이다.[157] 서진 회황제 (西晉 懷皇帝: 284년 ~ 313년)가 그를 하늘 나라 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도솔 (兜率)의 지도자라 하여 미천 석도안 (彌天釋 道安)이라 했다. 고조선의 언어 풍속이 불경에 반영 되여 미륵 도솔(彌勒, 兜率)이란 이름이 초기 불교에 나타났다. 자전에는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내려 왔다는 도솔천(兜率天) 에서 났다고 한다.[158] 환웅 (桓雄)의 가름침이 미륵 (彌勒)신앙 으로 한국에 나타났다. 미륵을 시매달려야 란 당나라 때 표현으로 자씨 (慈氏) 이름은 아릴다(名阿逸多), 무능하여 이길수 없다는 뜻(譯曰無能勝)이라 했다. 예맥족(斯)의 지도자란 뜻을 자석(magnet) 에 비유한 표현이다.
동진의 법헌 (法顯;337-418)이 남긴 불국기(佛國記) 에는 석가모니 탄생을 [동주 평왕(周平王;기원전 781-720) 때에 노인들이 미륵보살상 (彌勒菩薩像)을 세웠다. 미륵대사가 석가의 뒤를 이어 받지는 않았다 (非夫彌勒大士 繼軌釋迦)고] 했다.[159] 석가모니 이전에 인도에 들어가 도를 가르쳤다는 노자(老子; elders)가 환웅(桓雄)상을 갖고 가서 불교가 나타 났다는 뜻이다. 상나라 말기에 기자 보다 먼저 살았던 상용 (商容, 相容) 이 기록에 나타난 첫 노자(老子) 다.[160] 상나라 두 현인이 갔던 곳이 산서성 분수 계곡 아사달(阿斯達)이다. 자부선인이 살던 것이다. 고조선 사람들이 모시던 환웅상이 미륵 보살상 (彌勒菩薩像)으로 변하여 섬나라 세일 론“Ceylon. Sri-Lanka”, 사자국 (古之師子國) 남천축국에 나타났다.[161]
불교 발생지 현지인 사제들(Brahmin. Brahman)이 고조선 말로 전해진 내용을 경전으로 만든 대루탄경 (大婁炭經) 을 [옛적에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던 육서(六書) 방법] 을 모두 인용하여 한어(漢語)로 번역 했다.[162]
IV 삼한 사람들이 해상로를 개발
양자 방언과 설문해자에는 선(船)자 뿐, 범(帆)자는 없다. 불가를 뜻한 석명(釋名)에 처음 실렸다. 범(帆; 巾,凡. 䬚,𩗋)자는 알 환에 천을 달아 바람에 밀려가는 큰 배란 뜻이다.염사치가 타고 한낭랑(漢樂浪)에 갔다.[163]
신대왕의 맏아들 발기(拔奇)가 강남으로가서 손책의 친구가 된 이후 오나라는 풍력을 이용하는 큰 배를 만들어 고구려와 교류 했다. 손책이 전당에서 해적호왕(海賊胡玉)을 만났다. 진시황명에 따라 발해만에서 바다로 나갔던 사람들이 이주(夷洲; 대만섬)에 정착 했다. [164] 북쪽사람들이 해안을 따라강남으로 먼저 내려 왔다.
1 절: 범선(帆船)의 유래: 범(帆)이라 읽는 글자를 환(fan) 이라고 읽었다. 둥근 밝은 물체의 상형자 로 [해 달 새알] 등을 암시했던 글자다. 범선의 범자는 고조선 영역에서 유래 했다. 오환(烏桓 烏丸)의 성산인 항산, 즉 아사달과 관련된 글자다.[165] 그 지역에 숙신씨가 웅상을 세우고 살았다.[166]
서낭신(隨體 隨神)에 매달은 천 조각이 바람에 날리는 형상을 뜻한 글자가 돛 범(帆)자다. 범선으로 동남아 해안을 돌아 남방불교가 강남에 들어 왔다. 스님이 배를 타고 먼 이역 땅으로 가는 장면이 불교 서화에 있다. 불교에 관한 설명에는 선도 성모 수희 불사 (仙桃聖母隨喜佛事)란 문구와 같이 수(隨)자가 여러 곳에 실렸다. 복숭아 나무를 심었던 마을에서 석가모니 어머니(慈氏母, 摩耶Māyā; Eum-Maya) 와 이모 (佛姨母)가 나서 선도성모 라고 했다. 범선 (帆船) 위에는 안전한 항해를 인도 하는 성모상(慈氏母, 聖母 摩耶 Māyā; Eum-Maya, Goddess) 또는 사자상을 조각한 나침판을 설치 했다. 중세기 항해선박 (medieval voyager) 선두에도 나타났다.
왜왕이 다스렸다는 삼한의 후손들이 나침판을 개발하여 범선을 타고 중국 동남아 해안으로 진출 했다. 그후 부터 한반도 서남 지역에 있던 여러 부족 국가들이 앞에 형용사를 붙여 “xx 가야” 하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신라는 불교에 입적한 법흥왕이후 해상강국, 백제를 제압하고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 했다. 그때에 마야 부인, 풍월주, 화랑, 처룡하는 이름이 나타났다.[167]
진서에는, 서진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라 백제(新羅, 百濟) 란 이름이, 동진 말기에 복건성 이남 지역에 나타났다. 서진말기 291년에 발성(拔城) 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 발기의 후손이 살던 곳을 발성 (拔城)이라 했다.[168]
2 절: 항해의 필수 요소 나침판:
동진시대 부터는 동남아 해로를 통하여 남방불교가 남조에 들어 왔다. [169] 송서에는 범선으로 二三萬里를 항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170] 황해 남쪽 항로를 백제가 개발 했다. 통일 신라에서 배 만드는 부서를 두었고 (중원에 없는?) 좋은 활과 나침판을 사용 했다. 문무왕 말기에 당승법안 (唐僧法安) 이 자석과 좋은 포궁(砲弩)만드는 방법을 구해오라는 황제의 명을 전했다.
통전 지남차 (指南車) 편에 나침판의 유래를 설명했다.[171] 신빙성 있는 자새한 설명은 북위의 사관 최홍 (崔鴻, 478- 525)이 쓴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 실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의 제3대 황제 석호 (石虎:334년 – 349년)가 출처를 알수 없는 불교에 심취한 해비 (解飛: Xiè Fēi; fl. 334–349) 를 임용 했다.[172] 해비 (解飛; 解批, 解毗)는 고구려와 부여의 성씨다. 그는 다재 다능한 쟁인이었다. 그가 자석을 사용하여 남쪽 을 가리키는 목각을 수래 위에 설치 했다. 그 기술을 동진 시대에는 배에 붙여 지남주 (指南舟)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허수아비 사자상을 세우고 울릉도를 정벌 했다는 막힐 울(鬱,위, 우)자 또한 남방불교에서 나온 글자다. 사다함(斯多含)이 앞서 들어 갔다는 전단양 (栴檀梁)이 대당서역기에 전단울금(栴檀鬱金)으로 실려 있다.[173]
한해를 통치 하던 부여씨의 뒤를 이어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 ~ 846년) 가 나타났다. 그가 처형된 이후 부터 신라는 사양길에 들어 간다. 그러한 혼란기에 신라 사람들이 불교의 성역 으로 피란을 갔다고 본다. 고려 초기 에도 해상 교류가 왕성 했다. 서양에서는 이스람교가 번성했다. 불교 전래 해로를 따라 동남아지역으로 진출 했던 중동 문물이 한반도 들어 왔다.[174]
고려의 군부세력 삼별초(三別抄)가 원나라에 대항해 싸우다 최후로는 옛적 부터 잘 알려진 수로를 따라 환사씨가 다스리던 유구에 정착 했다. 곤륜인(昆侖人)을 통해 의사 소통이 가능 했던 곳이다.[175] 곤륜이란 남소의 표신(驃信, 驃國)과 같은 제사장을 뜻했다유구의 수도 파라(波羅)란 글자가 표신이 읋은 남소와 여러 불교 서적에 실렸다. 같은 글자가 동남아 임파 부남(林邑 扶南) 광동지역에 나타났다.[176]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을 지나(支那)라고 하던 남쪽 오지(奧地) 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이 세력을 모으자 당이 두차례 걸쳐 정벌을 시도 하다 실폐 했다. 지상의 낙원 으로 알려진 남조를, 원나라 쿠빌라이가 정벌 했다. 백제 양호(梁浩)가 원 세조4년(1263년)에 사신으로 갔다.[177] 고려 에서도 사신을 보냈다. 남조에 살던 삼한 사람들은 원나라 통치를 피해 분산 되었다. 옛부터 알려진 차마고도를 따라 원시불교 발생지에 이르렀다. 허황옥의 선조가 내려온 길이다. 그 곳에서 불교 성직자 들의 환영을 받아 옛 한국어가 파리어 (婆尼Pali language)에 남아 있게 되었다 고 본다.
다른 한 부류는 매콩강을 따라 동남아 해안으로 내려와, 부여씨의 후손이 동남아 해안을 따라 천축국에 다니던 사람들과 만났다. 매콩강 해안에는 삼한의 혈통을 이어 받은 세 지류가 만나 방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3.절: 지나 (支那)의 어원: 현장(玄奘;602년 – 664년)의 서역기에 지나는 전왕 대진 (大秦)의 국호(至那者前王之國號) 라고 했던 표현을, 당 현종 (唐玄宗; 685년 – 762년)이 정벌하지 못한 남조 표신을 비하해서 읋은 시문 제법서(題梵書)에 가지 지자 지나 (支那)로 바꾼 글자가 China 의 어원이 되었다.[178] 현장은 지나 (至那) 를 형용사로 동쪽(東土)에서 온 사람들(斯, 東夷)이 정착한 인도 동북지역에 사용 했다. 당나라 사람이 편술한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김일제 후손의 한 지류가 강남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왕의 성씨를 김가 (金哥), 먼 선조를 방이(旁㐌), 수도를 의의 (宜矣) 라고 기록 했다. 기록에는 누애치는 예기와 코끼리가 나온다. 남쪽 지나라고 부르던 백월 (百越), 월주 (粵州)에 신라 수도가 있었다. [179] 원사 (元史)에 이르기를 복건성에 신라현 (新羅縣) 이 있었다.[180] 운남성에 있던 지나황제(支那皇帝) 가 다스리던 사람들이 원나라의 친입을 받아 매콩강을 따라 태국(泰國; Siam) 땅에 내려와 살았다. 시라 (尸羅 Sila) 와 음이 비슷 하다. 중국의 특산물로 명주견사 (Silk)가 서양에 아려저 동남아 지나 (支那) 에 있던 작은 왕국 시라 (尸羅 Sila, 新羅) 가 Cina 의 어원이 되었다.
4 절:화랑의 어원: 패르샤 왕자가 이스람교 발생시기에 피란을 갔다. 그곳은 풍요롭고 코끼리가 있었다. 폴투갈 사람들이 처음으로 동남아 해안에 도착 했다. 청나라 말기에 위원(魏源)은 이태리 선교사 가 만든 만국지도 내용을 인용하여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만들었다. 태국을 섬라 (暹羅)라고 했다.[181] 지나(支那)의 일부였던 씨암 (Sayam)으로 알려 졌던 태국(泰國)이다. 이곳이 꽃다운 실라 (Sila)공주 화랑 (花娘, 花郞, Farang) 의 출원지다. 섬라 (暹羅)와 음이 비슷한 이름 [섭라(涉羅) 탐모라 (耽牟羅) 탐라 (耽羅)]어음이 타이완(Formosa, 夷洲)과 제주도에 붙였다.
남조 역사서에는 신라 수도를 “x 모라 牟羅” 라고 적었다. 수서에 복건성 앞에 있는 대만을 “x모라 𨈭牟羅”란 글자로 적었다.[182] 섬의 크기가 남북이 천여리 (南北千餘里) 동서가 수백리,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밝힌 이섬을 제주도라고 잘못 인식 한다. 태국에 화랑의 모습 “Giant Farang Guard Statue”을 세웠다. 그와 비슷한 석상이 제주도 하루방이다.[183]
V 가락국 허황후 화랑 가야금
1 절: 가락국 허황후: 수로왕(首露王)이 허황후를 만난 곳은 구지봉이 있는 오늘의 김해시다. 그곳에 가락국 수로왕의 부인 허씨의 비석이 있다.
가락국과 수로왕은 중앙 아시아에 이르렀던 원시 불교가 육로로 전래된 발해만에 나타났다. 가라연맹이 신라와 같이 한반도 남쪽에 정착한 이후 남방해상로를 따라 들어온 남방불교에 결부 시켜 허황후가 나타났다.
가야국(加耶國) 수로왕(首露王) 이서국(伊西國) 하는 이름이 신라 초기 발해만 연안에 나타났다. 후에 한반도로 옮겨 졌다. 가락국기에 자주색 실이 내려 다섯개의 알이 내려와 다섯 가야의 지도자(五伽耶之主)가 나타났다. 수로왕이 여섯 가라 연맹체의 수장이 되었다는 가락이란 글자는 내려 왔다는 뜻이 있다. 그가 자리잡은 곳을 자성(茲城)이라 했다.[184]
이서국 또한 서쪽에서 왔다는 뜻이다. 그때 죽엽군이 나타났다. 모두 서역 에서 온 오손족이다. 그곳에 구자 (龜茲)국이 한나라와 화친을 하여 교류가 왕성 했었다. [185] 대당 서역기에 굴지국 (屈支國)이 옛적 구자국 (龜茲) 이라 했다. 이에서 구지가 (龜旨歌), 구지봉 (龜旨峯), 하지왕(荷知王), 구지하성 (久知下城) 하는 이름 이 금관가야의 수도 김해시에 결부 되었다.
허왕후의 선조는 불교 발생지역인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옛 통상로 차마고도를 통해 지나(支那)라고 알려진 운남성에서 이르렀다. 태평광기 에는 신라에 관한 예기가 많이 실렸다. 출처를 당나라 사람 단성식 (段成式) 의 유양잡조 (酉陽雜俎)라 했다. 당시 지나는 당나라 영역이 아니였다. 그는 풍문에 들은 예기를 모아 기록 했다. 내용에는 도깨비방망이 설화가실렸다. 키큰 사람이 사는 나라와 키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털보들이 사는 나라 (長鬚國), 코 큰사람 (鼻長)이 사는 사이에 방이(旁㐌)를 시조로 하는 김씨 (金哥)의 신라(新羅)가 있었다.[186] 코끼리와 누애를 치던 곳이었다.
남쪽나라에는 고조선 사람들이 고난을 치루던 예기가 설화로 많이 남아 있다.[187] 항아 (嫦娥)가 궁수 예 (羿,백익)의 불사약을 훔쳐먹고 달에 가서 두꺼비가 되었다. 해 안에는 삼족오, 달안에는 토끼 한마리와 두끼비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나 지역에 살았던 도가(道家) 곽홍의 포박자(抱朴子) 는 남쪽 지역을 설명 하며 원숭이는 5백년을 자라 확(玃, 고릴라?)이 되고, 두끼비는 3천년, 기린은 2천년을 산다고 했다. [188]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강남에는 객가 (客家) 라 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가락국 수로왕 비문에 새겨진 보주 (普州)는 보자군 (普慈郡) 과 같이 사천성 양자강 (長江) 수계 에 있었다.[189] 허씨는 운남성 에서 해안으로 나와 남방 항로를 따라 원화, 화랑, 풍월주가 나타 나던 시절에 한반도 낙동강 하류에 이르렀다.
가락국기 (駕洛國記)는 고려 문종(文宗,재위: 1046년 ~ 1083년) 때에 김해 지주사가 지었다.[190] 폐허가 되어 밭으로 쓰던 땅에 수로(水路)를 만들고 물을 넣어 신답평 (新畓坪) 이라 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지 않는 수로 (水路)란 글자가 삼국유사에 몇차례 실렸다.성덕왕(聖德王) 때에 강릉태수로 가던 사람의 부인을 바다에서 나타난 용(龍)에게 잃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해가(海歌) 를 불렀다. 그 내용에 [거북아 거북아 어서 수로 부인 (水路夫人)을 내놓아라 (龜乎龜乎出水路) 하는 구절이 있다. 꽃을 따서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헌화가(獻花歌)도 이 때 나타났다. 한국에 없는 사자상을 실은 배로 우산국을 정벌 했다. 모두 음과 뜻을 이리저리 돌려 만든 글자다. 답(畓)자 가 설문해자에는 없다.
열하일기에 답(畓)자 설명이 있다.[191] 가락국이 있던 밭에 수로(水路)를 만들어 논(畓)으로 제 정리 하면서 만든 글자라 짐욕 (朕欲) 정 치 경도 (定置京都)라 했다.[192] 신라 말기 경덕왕이 석도안 (釋道安) 을 존경 하여 도안현(道安縣) 이라는 이름을 그곳에 남겼다. 가라국왕 하지 (加羅王荷知) 가 살던 곳에 수로 (水路) 를 만들어 가야금 노랫가락이 들리는 가락국 (駕洛國)수로왕 (首露王) 이라 했다. 김유신의 12대 선조가 수로왕이다. 그가 어서 왔는가는 아무도 모른다.일설에는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 한다. 후한건무(後漢建武) 18년에 구봉 (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 (金官國)으로 고쳤다.[193] 고조선 발생지 구주(九州, 九疇)의 뜻을 살려 구지봉에 올라가 내려다 본 광경을 “망 가락 구촌 望駕洛九村” 이라 했다. 구촌의 이름이 없다. 김유신의 증조를 구해 (仇亥) 손이라 했다. 가라연맹은 고구려와 같은 유목민(亥, 解, 蓋)이 였다.
진흥왕 때에 나이 십오륙세 였던 젊은 화랑 사다함 (斯多含)이 압장서서 전단량 (旃檀梁), 즉 구름다리 건너 정문으로 들어가 깃발을 꼿아562년 에 가야국(加耶國)을 정벌 했다. 가라(加羅 加耶)언어로 성문, 즉 사원으로 드러가는 곳에 세워 놓은 여문(閭門Torii)을 (다리 양梁 구름운)양운이라 했다. 그 위에 신라 화랑의 깃발을 달았다.[194] 갑작스런 친입에 성은 아수라 장이 되었다. 백제의 담로 (簷魯) 였던 구지하성 (久知下城) 이다.[195] 그곳에 살덩 하지왕 (荷知王)이 남제(南齊) 에 사신을 보냈던 곳이다.[196]
아수라장 (阿修羅場) 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아수라 (阿修羅) 와 음이 같은 아소(阿蘇)란 이름을 일본 구주에 있는 활화산에 붙였다.[197] 처음 그곳을 발견한 불교국가 수나라가 붙인 이름이다.
서쪽에서 오던 배가 동쪽으로 갔다. 가야는 신라 보다 먼저 한반도 남쪽에 도착하여 낙동강 하구에 자리를 잡고 점차로 상류로 올라 갔다.[198] 또 하나는 두꺼비 나룻터란 뜻에 섬진강 (蟾津江)이라 했다. 낙동강과 섬진강 수계에 가라연맹국이 있었다.
2 절:가야금 (伽倻琴) 의 유래: 가야국 악기라 가야금 (伽倻琴)이라 한다. 현악기는 태고적 부터 있었다. 유목민이 쓰던 삼현금( 三絃琴) 악기가 해금 (奚琴), 호금 (胡琴)이다. 이에 현을 더하여, 현학금(玄鶴琴), 비파(琵琶)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변진한(弁辰傳)이 살던 발해만에서는 축과 같은 현악기 실(瑟, 其形似筑)을 사용 했다. [199] 고조선 유민이 6 마을에 살던 신라 발생지다. 그곳에서 철전을 쓰던 가야 백제 왜가 나타나 바다로 진출 했다.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은 발해만 연안에서 내려온 고조선의 후예다.
상나라 고종이 죄수로 일하던 수미를 축어부험(筑於傅險) 즉 아사달에서 토목공사를 하던 현인을 얻었다. 역수에서 연태자가 자객으로 형가와 그의 친구 음악가 고점려(高漸麗)를 보냈다. 고점려가 변치(變徵)소리를 내자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축은 본래 5현금으로 5음이 있었다. 여기에 변한 지역(今彌達)에서 개발한 변궁 변치 (變宮,變徵)두음을 더 했다. [200] 자객 형가 (荊軻) 가 실패 하자 같이 갔던 고점려가 축(筑)으로 진시황을 때렸다. [201] 그러한 내력에서 현악기에 축이란 이름이 붙었다. [202]
우륵과 가실왕이 어느 가야 사람 인가는 뚜려하지 않으나 같은 나라 사람이다.[203] 같은 글자 가야산 (伽倻山) 가야사 (伽倻寺)하는 이름이 섬진강 과 낙동강 수계에 나타났다. 낙동이란 동쪽 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경상남도 창녕군에 진흥왕순수비 (眞興王巡狩碑)가 있다. 가야산 (伽倻山) 서쪽 섬진강 수계에 있던 가야국 들은 진흥왕 이후에 백제에 흡수 되었다.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은 고점려(高漸麗)가 쓰던 고조선의 현악기 축(筑)에 현을 더하여 12 현금 (十二弦琴)을 만들었다. 우륵은 금관가야 사람이었다. 고국을 진흥왕에게 빼았겼다.[204] 망국의 한을 담아 상하 가라도 를 읊었다. 우륵이 신라에 가서 가야금을 전하고 읊은 곡 이름에 하 상 가라도 (加羅都)가 있다. 그 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가야 하나를 더 병합 했다. 모두 만주에서 내려 왔다. 백제 무령왕(武寧王 斯麻, 재위: 501-523 년) 이름이 사마다. 수서에 실린 도사마(都斯麻)가 백제의 구지하성 (久知下城)이다. 낙동강 하구 구지봉이 있는 김해시가 그들의 고향이다.
3 절: 임나(任那)는 의역(意譯)이요 가라(加羅)는 음역(音譯)한 글자다:
가라란 어음의 여러 사음(寫音)자는 모두 오호 십육국시대 남조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 가야산(伽耶山)은 인도 동북부에 있는 영산(靈山)이라고 부르던 천애 (天涯) 의 요새(要塞)다.[205] 산정상에는 솔도파(率堵婆)라는 위쪽이 뾰족한 불교의 탑이 있다. 무위왕(無憂王)이 여러 곳에 석탑을 세웠다. 동진 시대에 2,000리 떠러진 사자국으로 부터 남방불교가 강남에 이르렀다. 스님이 신임을 받아 다스려 임나가라 (任那加羅)라 했다.
나라(那羅) 또는 날라(捺羅) 라고도 적은 글자는 옛 한국어를 음역한 글자다.[206] 이를 국가 또는 날 비(飛, fly)로 풀이 했다. 서역기에 금왕 본 나라연천지 조윤(今王本那羅延天之祚胤)이라, 즉 하늘로 부터 내려온 왕의 후손이란 뜻이다. 천손강림(天孫降臨)사상에 근거한 글자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삼족오 (三足烏)가 후에는 장닭으로 상여에 올려 놓았다. 상나라 시조 은계(殷契)의 어머니 간적 (簡狄)이 제비(帝妃; 제비, swallow) 알 (玄鳥卵)을 먹어 임신하여 상나라 시조를 낳았다. [207] 그녀는 서쪽에서 온 유목민(娀氏之女)의 여자로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의 두쩨 부인이었다.
신라가 수도를 한반도로 옮기고 남방 불교를 따라 올라온 김일제의 다른 후손이 올라와 신라에 성골(聖骨)이란 명칭이 나타났다. 진평왕(真平王; 재위 579 ~ 632년)의 이름은 백정(白淨), 부인이 마야 부인(摩耶)이다.[208] 석가모니의 어머니가 마야 부인이다. 백정이란 불가의 부도(浮屠), 즉 떠돌이 소백정 (白丁,屠殺者, butcher)이다. 다른 글자로 부도 (浮圖)라고 적기도 한다. 옛적에 쓰던 한국어가 불교 경전과 현대 한국에 살아 있다.
스님 도림(浮屠道琳)이 백제왕을 찾아 갔던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앞을 지나는 강이 욱리하 (郁里河)라 했다. 이 또한 높은 사람이 사는 마을을 지나는 강이란 뜻이다. 백제 개로왕 (蓋鹵王,?~475년)과 바둑을 두었다는 도림은 남방불교 스님이었다. 평양 교외에 단군능 지하 궁전 벽화는 불교 풍이 많이 섞였다.[209] 관동팔경 의 하나인 삼일포(三日浦)는 신라 국선이 놀다 남긴 이름이라 한다. 속초 가까이 아야(阿耶)진 이란 해수욕장이 있다. 설악산 북쪽에는 미시령 (彌時嶺)이 있다. 높다는 뜻(鬱為稱首)의 사음자 울(鬱)을 붙인 [울릉도, 울진, 울산바위] 하는 이름 들이 신라 영역에 나타났다. 모두 남방 불교가 신라에 전래된 이후에 나타난 이름이다.
남방 불교가 전래된 시절에 동남아 특산물이 한반도에 이르렀다. 현지음이 잘못 번역되어 뜻이 다른 글자로 나타나기도 했다. 옥으로 만들었던 규를 상아로 만들고 사자 허수아비로 우산국 을 정벌 했다.
4 절: 남방과의 교류가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화랑도가 나타났다. 신라 진평왕 시대 원광 법사 (圓光法師; 542년 ~ 640년 )가 초씨역림(焦氏易林)에 나오는 일신오심(一身五心)을 불교에 접붙여 세속오계 (世俗五戒) 나타났다.
오계의 원천은 백익(益)의 경계하라는 몇 구절을 불가에서 적용 했다.[210] 유가에서는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문자(斯文)로 작성된 금인명(金人銘)을 환제가 한 예기라 한다. 스님이 가르친 다섯 가지 계율이 신라 화랑 (花郞) 오계의 뿌리가 되었다.
수서에 “新羅 百濟 皆以倭為大國”란 문구가 있다. 다개(皆)자는 백제의 부용국을 모두 포함 했다는 뜻이다. 신라 백제 가야 연맹 여러 불교국가 들이 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대륙을 잃고 열도로 피해 갔던 부여씨가 수야제에게 보낸 서한에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 천자에게 무양 (沒處天子無恙) 한가 하는 문구] 가 실려 수양제가 크게 화를 냈다.[211] 일본 승려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친서를 전했다. 일본은 백제로 부터 흠명 천왕 13년 (欽明天皇;539 – 571년)에 불경을 전해 받았다고 했다.[212] 이를 양나라 승희원년 (梁承聖), 즉 552 년이라 했다. 위덕왕(威德王, 525- 598년)시절에 후경이 거발성을 점령하던 무렵이다. 원나라 때에도 강남 복건성에 신라(현)가 있었다. [213] 그 지명을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에는 남조 역사서에 실린 신라에 관해 설명 했다. 신라어의 많은 명사가 만주어를 사음한 글자라고 했다.[214]
문무왕이 특사로 사찬(沙飡) 수미산 (須彌山)을 보네, 왕실의 후손 안승을 왕으로 봉하여 장수왕이 빼았은 부여경의 한성 (漢城)에 살도록 했다. [215] 오늘의 한반도에 있는 평양은 고구려 유민이 설립한 안승(安勝, 安舜)의 후고구려 (後高句麗) 수도 였다. 오대산 상원사 (上院寺) 고양이 석상은 천축국에서 성수로 쓰던 사자 (獅子)상이 고양이 석상으로 나타났다. 달을 숭상하던 불교에서 만월 을 뜻한 상원을 사찰 이름으로 사용 했다.
VI 장: 맺음 말
백익을 잃은 고조선의 한 부족이 사천성을 지나 운남 지역에 정착 했다. 그 지역 도사(道士)들이 옛적부터 알려진 길을 따라 올라가, 히말리아 산맥 동쪽 수지(隨地)에 천부경을 전했던 곳이라 인도(印度)라 했다. 그곳에서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같은 길을 따라 내려와 지나 (支那) 방대한 지역에 불교가 전파 되었다. 마술사 시라 (尸羅)가 전국시대 연나라 수도에 불상을 갖고 와서, 불교 문화가 해하(海河) 수계 상류 임유관 (臨渝關) 일대 금미달 (今彌達)에 알려 졌다. 금미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만주 땅에 북부여가 나타났다. 그때에 고조선의 사제권이 부여씨에게 너머갔다.
해하(海河) 수계 상류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맥군 남려(薉君南閭)를 따라 발해만 일대로 내려와 왔다. 이를 창해지군 이라 했다. 그곳에 부여의 혈통을 지닌 비류가 정착 했다. 그 곳에 살던 삼한 사람들을 한(可汗, 韓)이 다스렸다. 삼한의 한 부류를 왜(倭) 라고 했다. 왜오왕이 다스리던 부족이 동남아로 내려가 운남성 에서 매콩강 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과 같이 지나 (支那) 땅에 여러 불교 국가를 이루었다. 사마씨가 강남으로 이주한 이후, 동남아 해안을 따라 남방 불교가 광동성 해안에 전래 되었다. 그 곳에서 해안을 따라 발해만 일대에 전래 되여 설라 휴인 (薛羅,休忍)이라 하던 이름이 신라 (新羅), 임나 가라 (任那加羅) 란 이름으로 바뀌었다.[216]
남만주에 있던 신라와 금관가라는 광개토 대왕 이후에 한반도 남쪽으로 수도 를 옮겼다. 황해의 남방 해로가 개발된 후에 남방불교가 한반도로 전래 되여 신라를 부흥 시켰다. 동남아에 있던 작은 왕국 신라의 공주 화랑 (Farang) 이 남자로 바뀌어 제주도에 하루방으로 나타났다. 동남아 섬나 (Siam)와 음이 비슷한 이름이 대만(𨈭牟羅) 과 제주도에 붙었다.
동남아에 있던 신라 공주 화랑에서 호랑도란 이름이 나타났다. 가락국 수로왕 부인 허황옥이 공주 화랑이었다. 진흥왕 23년(537년) 에 나마신득 (奈麻身得)이 신무기 포노(砲弩, cross bow)를 만들었다. 사다함 (斯多含) 의 화랑도가 백제의 부용국이었던 김해 가야국 (加耶國, 駕洛國)을 정벌 했다.[217] 가락국 음악기 가야금을 우륵이 신라에 전했다. 허황옥의 딸이 신라 선덕 여왕 이다. 신라 귀족 출신 원광 스님이 불교의 세속오계를 근간으로 화랑 오계를 남겨 신라 젊은이의 가치관이 확립 되었다.
양자강 하류 남경 일대에 있던 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이 549년에 점령 당했다. 대륙북제와 강남에 있던 진(陳) 나라를 수나라가 병합하던 시절에 중원세력이 만든 큰 배가 백제 영역이 었던 대마도에 표류 되었다. 그때에 처음으로 중원 세력이 황해의 남쪽 항로를 따라 한반도 남단 항구를 지나갔다. 그 곳을 백제의 부용국 이었던 금관가라를 도사마국 (都斯麻國) 이라 했다. 가락국왕 하지 (荷知)의 수도였다. 구자(龜玆)국에서 왔다는 뜻에 구지봉이라 이름을 붙인 경남 진해시를 구지하성 (久知下城)이라 했다.
일본 영역에 여관 (許家)이 많은 섬나라 일지국(一支國)이 있었다. 대마도 와 일지국 사이가 현해탄이다. 대륙을 잃는 열도백제 부여씨 왜왕이 603년 에 사신과 함께 스님 10여명 을 수양제에게 보네 불경을 배우도록 했다. 일본이란 이름은 화랑도 였던 김춘추가 백강 전투에서 왜를 물리치고 고구려 마저 흡수한 뒤에 나타났다. 왜가 혼슈 동쪽에서 두번째 혼(魂)이란 뜻의 니혼(日本; 二夲) 이란 새 나라를 세우고 670년에 신라에 알렸다. 그후 당나라에 알렸다. 문무왕은 구주에 사는 왜의 침입이 우려 되여 동해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겨 문무왕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암 (大王岩) 이 울산 앞 바다에 있다.
불교가 강남에 전래된 시기에 있던 신라 임나가야 (新羅 任那加羅)라는 이름자가 남방불교를 따라 발해만 연안에 이르러 광개토대왕 비문에 같은 글자로 실렸다. 옛 한국어를 음역한 글자를 잘못 풀이 하여 불교경전 대루탄경에 실린 글자 또한 옳바로 풀이 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바꾸었다.
이렇게 번역이 잘못 된 사실을 일본 열도 사람들이 아전 인수격으로 풀이 하여 임나가야 일본부 (任那加羅日本府)라는 낭설이 나타났다.
끝
January 15th, 2022. Revised August 15th, October 12th, 2022
[1]. 宋書: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別本云。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太元(376-396年)是東晉皇帝晉孝武帝司馬曜的年號.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弁辰傳: 倭 有瑟,其形似筑
[2].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梁書: 魏時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普通二年(521),王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3]. 史記 平準書: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通典 新羅: [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
[4]. 晉書 列傳第六 衛瓘 張華 劉卞: 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彊盛。冊府元龜:晉張華為都督幽州諸軍事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強盛
[5]. 三國 史記:真興王立: 「十二年春正月,改元開國。三月,王巡守次娘城,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
[6]. 宋史:至道二年,徙延州都巡檢使兼署州事,改本路副都部署,與範重召等五路討賊。有岌伽羅膩數族率眾來拒,保興選敢死士數百人銜枚夜擊,殲之。引師至監城,吳移、越移四族來降,惟岌伽羅膩十四族怙其眾不下,乃與尹憲襲擊之,夷其帳千餘,俘斬七千餘級.
[7].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8].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 By Xlibris. 2020. (韓原之戰)
p 8 Session 1: Study of Northeast Asian History. https://ctext.org/zh:北狄. 逸周書 王會解: 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虛。不令支玄模。不屠何青熊。東胡黃羆。山戎戎菽
[9].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竹書紀年 帝舜有虞氏:帝居于鳴條. 商自陑征夏邑。克昆吾。大雷雨,戰于鳴條。焦氏易林:鳴條之郊,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
[10]. 禮記 祭法:,夏之衰也,周棄繼之,故祀以為稷。共工氏之霸九州也,其子曰後土,能平九州,故祀以為社。帝嚳能序星辰以著眾;堯能賞均刑法以義終;舜勤眾事而野死。鯀鄣洪水而殛死,禹能修鯀之功。黃帝正名百物以明民共財,顓頊能修之。《說文》云:大頭也。魚容切,四.爾雅 釋地: 西方有比肩獸焉。與邛邛岠虛比,為邛邛岠虛齧甘草,即有難,邛邛岠虛負而走
[11]. 詩經 韓奕:奕奕梁山、維禹甸之、有倬其道。韓侯受命、王親命之、纘戎祖考.、溥彼韓城、燕師所完. 其追其貊、奄受北國、因以其伯。詩經: 亦孔之邛 . 維王之邛.
[12]. 史記:其後三苗服九黎之德、史記 五帝本紀.三苗在江淮、荊州數為亂 漢書:顓頊帝春秋外傳曰,少昊之衰,九黎亂德,顓頊受之,乃命重黎. 孟子萬章曰:「舜流共工于幽州,放驩兜于崇山,殺三苗于三危,殛鯀于羽山,四罪而天下咸服,誅不仁也。」、尚書 虞書 舜典:分北三苗。
[13]. 이돈성 지음: 古朝鮮 찾기. 책미래. 2016. P 141 중원과의 전쟁 기록에서. 蚩尤與赤帝之戰. 黃帝與蚩尤之戰. 蚩尤請來了風伯雨師,「天大晦冥」,雷電交作,衝破了應龍的水陣。
[14]. 강희자전: 德:凡言德者,善美,正大. 墨子 兼愛下,《周詩》曰:『王道蕩蕩,不偏不黨,王道平平,不黨不偏。《易·乾卦》君子進德修業。《詩·大雅》民之秉彝,好是懿德。尚書 洪範:無偏無黨,王道蕩蕩;無黨無偏,王道平平;無反無側,王道正直。會其有極,歸其有極.
[15]. 爾雅 釋訓: 顒顒邛邛君之德也.詩經:顒顒卬卬、如圭如璋、令聞令望。豈弟君子、四方為綱
[16].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By Xlibris. 2018. p Etymology of Few words, Buyeo (夫餘) and Goguryeo.
[17]. 漢傳佛教與東方文化.任繼愈. 中華佛學學報第12期 (1999.7月出版 ).中華佛學研究所發行.
[18]. 晉書: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幽王既亡,有共伯和者攝行天子事,非二相共和也。其《易經》二篇,與《周易》上下經同。
[19]. 夏商周断代工程. 史記 周本紀: 召公、周公二相行政,號曰「共和」。共和十四年,厲王死于彘。
[20]. 이돈성 지음: 古朝鮮 찾기. 책미래. 2016.. Seoul Korea. 1 장 어떻게 찾았나.
[21]. https://zh.m.wikipedia.org/zh-hant/%E9%9A%B8%E8%AE%8A : 隸變,是漢字由小篆演變為隸書的過程,大約發生在秦漢之間,是漢字發展的轉捩點.
[22]. 이돈성 지음: 古朝鮮 찾기. 책미래. 2016. P 85 시경(詩經)에서.
西周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共和與中興.
[23]. 焦氏易林: 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主君旄頭,立尊單于. 三國志 鍾會傳:弼注老子,為之指略,致有理統。著道畧論,注易,往往有高麗言。太原王濟好談,病老、」
[24]. https://zh.m.wikipedia.org/zh-hant/%E9%9A%B8%E8%AE%8A : 隸變,是漢字由小篆演變為隸書的過程,大約發生在秦漢之間,是漢字發展的轉捩點.
[25].說文解字: 變:更也. 眞:僊人變形而登天也. 舜:艸也。楚謂之葍,秦謂之藑。蔓地連華。象形。从舛,舛亦聲。凡䑞之屬皆从䑞。今隸變作舜
[26]. 史記 五帝本紀: 黃帝者,少典之子,姓公孫,名曰軒轅. 讙兜進言共工,堯曰不可而試之工師,共工果淫辟。四嶽舉鯀治鴻水,堯以為不可,於是舜歸而言於帝,請流共工於幽陵,以變北狄;放讙兜於崇山,以變南蠻;遷三苗於三危,以變西戎;殛鯀於羽山,以變東夷:四罪而天下咸服
[27]. 史記 五帝本紀:.北發,西戎、 氐、羌,北山戎、發、息慎,鳥夷,四海之內咸戴帝舜之功。
[28]. 三國遺事: 駕洛國記.迦葉原 阿蘭弗. 신라의 수도 이전: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揚子·方言》比。代也.
[29]. 강희자전: 代。更也,替也。《書·臯陶謨》天工人其代之。又世也。《家語》古之王者,易代攺號,取法五行。又不還曰代。又國名。趙之先有代國。《應劭曰》古。漢代郡屬幽州,魏攺爲州。
[30]. https://zh.wikipedia.org/wiki/%E4%B8%AD%E5%B1%B1%E5%9B%BD. 白狄 中山國
[31]. 三國史記: 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閼川楊山村,二曰突山高墟村.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北溟人耕田,得濊王印,獻之. 改始林名鷄林,因以為國號.
[32].. 신라의 수도 이전: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3].. 三國遺事: 應邵曰。故朝鮮國也新唐書注云。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國史云。 據上諸文。樂浪即平壞城。宜矣.太平御覽: 《漢書》曰:燕王都薊,大風拔宮中樹七圍已上十六枚,壞城樓。
[34]. 漢書 志 郊祀志上: 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傳在勃海中,去人不遠. 漢書 志 天文志: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35]. 訄書:則以雞林、靺鞨之賓旅,而為客帝於中國也何損?知是,而逐滿之論,殆可以息矣.。
[36]. 隋書:先是,高麗私通使啟民所,啟民推誠奉國,不敢隱境外之交。是日,將高麗使人見,勑令牛弘宣旨謂之曰:「明年當往涿郡。爾還日,語高麗王知,宜早來朝,勿自疑懼。存育之禮,當同於啟民。如或不朝,必將啟民巡行彼土。」使人甚懼。啟民仍扈從入塞,至定襄,詔令歸藩
[37]. 三國遺事校訂三國遺事敘:一斯編。本無目次。今據編中標題補之。又第一卷靺鞨渤海條闕二葉。第三卷南月山條闕一葉。伯嚴寺石塔舍利條闕二葉。其他或佚標題。或脫篇名。
[38]. 三國遺事: 北扶餘古記云。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於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三國史記: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北扶余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39]. 太平廣記 幻術一 扶婁國人:南垂有扶婁之國。其人善能機巧變化,易形改服,大則興雲霧,小則入纖毫。綴金玉毛羽為衣服。或為巨象獅子龍虵犬馬之狀。或為虎口中生人,或於掌中備百獸之樂,宛轉屈曲於指間。得粗得精,代代不絕。乃欲謂之婆侯伎。則扶婁之音訛耳。出《拾遺錄.。
[40]. 潛夫論 五德志: 羿恃己射也,不脩民事,而淫于原獸;棄武羅、伯因、熊髡、尨圉,而用寒浞。浞、柏明氏讒子弟也. 柏明氏惡而棄之。夷羿收之,信而使之,以為己相。浞行媚于內,
[41]. 三國志高句麗傳: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正始三年,宮寇西安平,為幽州刺吏毌丘儉所破。語在儉傳。東沃沮傳: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遂進師擊之,宮奔北沃沮 三國史記: 魏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大守太守劉茂、朔方帶方大守太守王遵弓遵,伐高句麗,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茂聞之怒,王恐見侵討,還其民口
[42]. 三國史記 儉攻陷丸都城,屠之。乃遣將軍王●,追王。王奔南沮南沃沮,至于竹嶺,軍士分散殆盡,唯東部密友獨在側,謂王曰. 王分軍為三道,急擊之,魏軍擾亂不能陳,遂自樂浪而退
[43]. 通典 新羅: 初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其國小,不能自通使聘。
[44]. 太平廣記 新羅: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畝,乃求蠶穀種于弟,弟蒸而與之。旁㐌不知也。其後子孫戲錐求狼糞,因雷震,錐失所在。出《酉陽雜俎》@.방이(旁㐌)설화
[45]. 三國遺事: 樂浪國前漢時始置樂浪郡。應邵曰。故朝鮮國也新唐書注云。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國史云. 樂浪即平壞城。宜矣。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為始祖。宜矣。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三國史記:中國史書也,猶存楚語「穀於菟」、匈奴語「撑犁孤塗」等。今記新羅事,其存方言,亦宜矣。臣等以為新者德業日新,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為國號,宜矣.
[46]. 康熙字典:傿:《唐韻》音匽。《玉篇》引爲價也。與鄢同。縣名。《前漢·地理志》傿屬𨻰留郡。《註》同鄢。又《國名記》傿,䢵姓。今襄之宜城,楚之鄢都。音焉。神仙名。《揚子·太玄賦》納傿祿於江淮兮。《註》二神仙名. 三國遺事: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47]. 魏書帝紀第五 高宗紀: 和平四年七月壬午 詔曰:「朕每歲以秋日閑月,命群官講武平壤。所幸之處,必立宮壇,糜費之功,勞損非一。宜仍舊貫,何必改作也。」八月丙寅,遂畋於河西.
[48]. 三國 史記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新羅遣使結和。秋九月,王薨。葬於柴原,號曰東川王
[49]. 三國 史記 新羅本紀第三: 實聖尼師今立. 十二年 雲起狼山,望之如樓閣,香氣郁然,久而不歇。王謂:「是必仙靈降逰,應是福地。」從此後,禁人斬伐𣗳木。新成平壤州大橋
[50]. 金史 志第五: 遼陽府.本渤海遼陽故城,遼完葺之,郡名東平。升為南京,府曰遼陽. 遼陽倚。東梁河、國名兀魯忽必剌,俗名太子河,為遼東盛國。
[51]. 三國 史記: 王如卒本,祀始祖廟. 榮留王,王幸卒本,祀始祖廟. 通典高句麗:隨山屈曲,南臨浿水,在遼東南千餘里。城內唯積倉儲器械,寇賊至,方入同守。王別為宅於其側。
[52].隋書: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 通典 邊防二 高句麗:自東晉以後,其王所居平壤城。自為慕容皝來伐,後徙國內城,移都此城。亦曰長安城,隨山屈曲,南臨浿水。城內唯積倉儲器械,寇賊至,方入同守。王別為宅於其側。其外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
[53].宋史:高麗,本曰高句驪。禹別九州,屬冀州之地,漢之玄菟郡也。在遼東,蓋扶餘之別種,以平壤城為國邑。隋煬帝再舉兵,唐太宗親駕伐之,皆不克。長興中,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封高麗國王。至王建,以平壤為西京。王居開州蜀莫郡,曰開成府.@.以新羅為東州樂浪府,號東京。平壤為鎮州,號西京。西京最盛。總之,凡三京. @顧愔《新羅國記》一卷.@ 顧愔 撰,原釋闕。 @ 顾愔生卒年不详。知与大诗人顾况为从兄弟关系, 是苏州海盐县横山(今属浙江)人
[54]. 欽定滿洲源流考: 遼史忽汗州故平壤城也號中京顯徳府太祖攻渤海拔忽汗城俘其王大諲撰以為東丹王國 遼史: 忽汗州: 中宗賜所都曰忽汗州,封渤海郡王。十有二世至彞震,僭號改元,擬建宮闕,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為遼東盛國。忽汗州即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55].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 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為名。漢城州捴管藪世取百濟□□□□□□國,適彼事覺,遣大阿飡真珠誅之。十二□□□□賁書所六□□□僵事同□異可□
[56]. 三國志 濊傳: 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三國史記: 肅愼來侵,屠害邊民氓。王謂群臣曰王大悅,拜封達賈為安國君,知內外兵馬事,兼統梁貊、肅愼諸部落
[57]. 太平廣記: 天毒國道人: 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云。發其國五年,乃至燕都。喜衒惑之術。於其指端,出浮圖十層,高三尺,乃諸天神仙。尸羅歕水為雰霧。闇數里間。俄而復吹為疾風,雰霧皆止。又吹指上浮圖,漸入雲裏。又於左耳出青龍,右耳出白虎。更張口。則向見羽蓋螭鵠。相隨從口中而出。尸羅常坐日中 出《王子年拾遺記》
[58]. 大唐西域記:傍有小河東南流。土俗號曰油河。是摩耶夫人產孕已。天化此池光潤澄凈。欲令夫人取以沐浴除去風虛。三國遺事:云我是河柏之女名柳花。與諸弟出遊. 三國史記:始祖東明聖王,姓高氏,扶餘王解夫婁老無子.王母柳花薨於東扶餘。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遂立神廟
[59]. 三國史記: 故國原王. 十三年春二月,王遣其弟,稱臣入朝於燕,貢珍異以千數。燕王●乃還其父尸,猶留其母為質 移居平壤東黃城。遣使如晉朝貢 四十一年,百濟王率帥兵三萬,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
[60]. 三國遺事: 按古典記云。東明王第三子溫祚。以前漢鴻佳三年癸酉。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稱王。十四年丙辰。移都漢山 胡僧摩羅難陀至自晉。迎置宮中禮敬。明年乙酉。創佛寺於新都漢山州. 四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三國史記: 金大問本新羅貴門子弟。聖德王三年,為漢山州都督,作傳記若干卷。其『高僧傳』、『花郞世記』、『樂本』、『漢山記』猶存。枕流王 秋七月,遣使入晉朝貢。九月,胡僧摩羅難陁自𣈆至,王迎之,致宫內,禮敬焉。佛法始扵此
[61]. 三國史記: 孝子之事親也 若文王之為世子。解明在於別都,以好勇聞,其於得罪也,宜矣
[62]. 呂氏春秋 貴直論:亡國之主,不可以直言。左右皆曰「鄉之死者宜矣。」康熙字典:伯益能儀百物。儀讀與宜同. 本作宐所安也. 宐,隸作宜.《襄陽耆舊記》曰:宜城縣東北角,有熨斗陂
[63]. The Imna Gara(任那加羅) engraved in the Stele was in the Chin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64]. 說文解字 而部:而:頰毛也。象毛之形。《周禮》曰:「作其鱗之而。」凡而之屬皆从而. 今俗別作髵,非是. 《集韻》奴登切,音能. 《釋文》鄭讀而曰能,能猶安也。다음사전: 而 말 이을 이, 편안할 능, 능히 능
[65]. 三國史記 廣開土王,諱談德,故國壤王之子。生而雄偉,有倜●之志。故國壤王三年,立為太子。王薨,太子卽位。南伐百濟。攻陷百濟關彌城。其城四面●絶,海水環繞,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66].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대륙백제 중시조 고환 (高歡)의 혈통- 2: 陳留高氏:
[67]. 水經注 :那:何也,都也,於也,盡也,詩云受福不那那多也《說文》西夷國安定有朝那縣。《玉篇》何也。又多也。《詩·小雅》受福不那。又《集韻》安貌。《詩·小雅》有那其居。《玉篇》俗言那事。後漢·韓康傳》公是韓伯休那。《說文》本作𨙻。廣韻: 爹:羌人呼父也. 北方人呼父
[68]. 水經注 汝水: 水出魯陽縣北將孤山北長岡下,東歷永仁三堆南,又東逕沙川,世謂之沙水
[69]. 文苑英華:新羅王真德永徽五年合從本傳作元年新羅 王真德即新羅王金真平女也平卒無子 女乃嗣立為王. 廣韻 哿 爹:北方人呼父. 沱:瀢沱沙水往來皃. 爹:羌人呼父也. 說文爹,㸙父也.
[70]. 冊府元龜: 江南書云:皇帝恭問江南國主劉承 用斯多食. 弊斯多一昨再辱使
[71]. 宋史:賈人由海道往外蕃,令以物貨名數並所詣之地,報所在州召保,毋得參帶兵器或可造兵器及違禁之物,官給以券。擅乘船由海入界河及往高麗、新羅、登萊州境者,罪以徒,往北界者加等. 顧愔《 新羅國記》一卷
[72]. 太平廣記 新羅: 東南與日本隣。東與長人國接。常使弓弩數千守之,由是不過, 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其兄旁㐌。新羅國獻孔雀,解舞。新羅國有人於江淮。其畫佛像真仙人物子女,皆神也。唯鞍馬鳥獸,竹石草木.@. 韓志和者,本倭國人也,中國為飛龍衛士。善雕木為鸞鶴鳥鵲之形. 唐韓幹,京兆人也. 其後果能狀飛龍之質,盡噴玉之奇.
[73]. 酉陽雜俎: 新羅國有第一貴族金哥。其遠祖名旁,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因分居. 南人相傳,秦漢前有洞主吳氏,土人呼為吳洞。有女名葉限,少惠,善陶一作鉤金,父愛之。末歲父卒,為後母所苦,常令樵險汲深. 舊唐書:前地理書以黔州屬酉陽,今則改入巴郡
[74]. 三國遺事: 樂浪即平壞城。宜矣。或云樂浪中頭山下靺鞨之界. 皆稱某王。不言居西乾等。豈以其言 鄙野不足稱之也. 今記新羅事。具存方言亦宜矣。羅人凡追封者稱葛文王.說苑 脩文宜矣,夫子之言也!」
[75]. 欽定滿洲源流考: 新羅一作斯盧一作新盧雞林附.其妄也若夫三韓命名苐列辰韓馬韓弁韓,而不詳其義意當時三國必有三汗,各統其一,史家不知汗為君長之稱,遂以音同誤譯,而庸鄙者甚至訛韓為族姓,若唐時所稱雞林,應即今吉林之訛,而新羅百濟諸國亦皆其附近之地. 按遼宋以後每以雞林稱髙麗金元時亦以雞林郡公為髙麗封號葢新羅嗣王既世襲都督雞林遂為新羅之通稱迨渤海盛而新羅偏安南境又為髙麗所併故髙麗亦襲是稱號雖地非其舊而名仍沿之耳興光本名與太宗同先天中則天改焉而. 舊唐書:白居易傳居易最工詩當時士人爭傳雞林行賈售其國相率篇易一金其偽者相輒能辨之案雞林即今吉林詳前疆域門
[76]. 大越史記全書:置桂林今廣西明貴縣是也、南海即今廣東、象郡即安南,以任囂為南海尉,趙佗為龍川令龍川,南海属縣,領謫徒兵五十萬人戍五嶺.蒼梧唐曰益州,古甌貉,我越之地、鬱林桂林郡,漢武更名、合浦秦象郡,廉州之屬郡、交趾、九真、日南秦象郡、珠崖、儋耳並在大海中九郡。自是漢始置刺史、太守。.初,帝之先世閩人或曰桂林人有名京者,來居天長即墨鄕
[77].晉書:鬱林郡秦置桂林郡,武帝更名. 晉書慕容垂:垂潛遣其桂林王慕容鎮、驃騎慕容國於黎陽津夜濟,壁于河南。通典:十六國前燕將慕容垂討丁零翟釗於滑臺,次於黎陽津 垂潛遣其桂林王慕容鎮、驍騎慕容國於黎陽津夜濟,壁於河南。桂林、南越之地
[78]. 三國史記:奈勿王之曾孫,王薨,謚曰智證。新羅謚法始於此. 法興王立。諱原宗,今記新羅事,其存方言,亦宜矣. 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為國號,宜矣. @ 解明在於別都,以好勇聞,其於得罪也,宜矣.
[79]. 南史 : 新羅,其先事詳北史.《註》祭社曰宜。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其拜及行與高麗相類。無文字,刻木為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處以危邦,死其宜矣. 冊府元龜: 梁高祖普通二年新羅王募秦始遣使隨百濟奉獻其俗呼城曰:健矣。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語言待百濟覆通。觀屈原離騷之作自是狂人死其宜矣
[80]. 康熙字典:《註》祭社曰宜。冢土,社也:《傳》宜者,和順之意《前漢·地理志》伯益能儀百物。儀讀與宜同. 庸置粵州,改宜州. 冊府元龜: 梁高祖普通二年新羅王募秦始遣使隨百濟奉獻其俗呼城曰:健矣。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語言待百濟覆通。觀屈原離騷之作自是狂人死其宜矣
[81]. 隋書: 新羅國,或稱斯羅。大業以來,歲遣朝貢。新羅地多山險,雖與 百濟構隙,百濟亦不能圖之
[82]. 晉書 列傳第六 衛瓘 張華 劉卞: 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彊盛。冊府元龜:晉張華為都督幽州諸軍事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強盛
[83].三國史記:「大王之國,四方皆山丘河海,是天設之險,非人為之形也. 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84].南齊書: 加羅國,三韓種也 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 都督倭·新羅·任那·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 P 150
[85]. 三國遺事:伊西國人來攻金城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金氏始立父仇道葛文王. 三國史記: 儒禮尼師今十四年 伊西古國来攻金城,我大舉兵防禦,不能攘。忽有異兵來,其數不可勝紀。人皆珥竹葉.
[86]. 三國史記: 真平王立。諱白淨,真興王太子銅輪之子也。母金氏萬呼一云萬內。夫人,葛文王立宗之女。妃金氏摩耶夫人,葛文王福勝之女。王生有竒相,身體長大,志識沉毅明逹。
[87].강희자전:《海篇》𣬛郞,𥓓名。𣬛郞神,本三郞神也。蠻人呼參爲𣬛,轉聲爲三。又𣬛陽鎭,在沂州費縣。又村名。行唐西有𣬛趙村。
[88]. 三國志 倭人傳: 使大倭監之。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 왜인전(倭人傳)의 새로운 고찰-3: 대화국(大和國)의 기원: Etymology of Yamatonokuni (大和國).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89]. 三國遺事:因名龍嵒又郡中有三山。曰日山吳山浮山。國家全盛之時。各有神人居其上。飛相往來。朝夕不絕又泗泚崖又有一石。可坐十餘人。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所居北龜旨是峰巒之稱若十朋伏之狀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眾庶二三百人集會於此。有如人音。隱其形而發其音曰。此有人否。九乾等云。吾徒在。又曰。吾所在為何。對云龜旨也。
[90]. 廣韻 魚:餘: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91]. 冊府元龜: 治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笫且翦愚汕諧嵌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以子弟宗族分據之。又云:其都曰:居枝城國南海行三月有眈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獐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二日至貊國西南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南齊太宗建元元年七月祭五帝之神於明堂有功德之君配明堂制有五室從尚書僕射王儉議也
[92]. 大唐西域記: 則可無大過矣。始可與言譯也。李老曰。美言者則不信。信言者則不美。韓子曰。理正者直其言。言飾者昧其理。是知垂訓範。物義本玄同。庶袪蒙滯。昇-climb up
[93]. 史記大宛列傳: 騫曰:「臣在大夏時,見邛竹杖、蜀布。問曰:『安得此?』大夏國人曰:『吾賈人往市之身毒。身毒在大夏東南可數千里。其人民乘象以戰。其國臨大水焉。』
[94] 三國志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父曰屑頭邪,母云莫邪。大唐西域記:土俗號曰油河。是摩耶夫人產孕已. 其母摩耶自天宮降於此處。世尊隨機示教利喜。
[95]. Pali-English Dictionary: māyā: [f.] fraud; deceit; magic; jugglery.
[96] 三國史記: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問之曰:「我是河伯之女,名柳花。古記云:「東明王十四年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大后太后禮葬之 遂立神廟。三國遺事: 誘我於熊神山下鴨綠邊室中知之而往不返壇君記云。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產朱蒙。壇君記云產子名曰夫婁.
[97]. User dictionary: Tagara,多伽羅之略,香木名. 伽羅陀 :菩薩之位名。譯曰度邊地. 入伽羅陀者,此云度邊地也. 太平御覽 獅子:獅子國,東晉時通焉,天竺旁國也.宋文帝元嘉五年,其王剎利摩訶南遣使貢獻。梁武帝大通元年,后王迦葉伽羅訶犁耶亦使使貢獻
[98] 大唐西域記:僧伽羅國。古之師子國。又曰無憂國。即南印度。其地多奇寶。又名曰寶渚。昔釋迦牟尼佛化身名僧伽羅. 會場西北渡河至阿奢理貳伽藍唐言奇特庭宇顯敝佛像工飾.User dictionary:僧伽藍摩Saṁghārāma之略,譯曰眾園。為僧眾所住之園庭,寺院之通稱也。見僧伽藍摩條
[99] 太平廣記 幻術一 天毒國道人: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發其國五年,乃至燕都。喜衒惑之術。於其指端,出浮圖十層,乃諸天神仙。尸羅歕水為雰霧。又吹指上浮圖,漸入雲裏。更張口。則向見羽蓋螭鵠。相隨從口中而出。尸羅常坐日中,漸漸覺其形小,或化為老叟,或變為嬰兒,倏忽而死,如向之形。神怪無窮。出《王子年拾遺記》
[100]. https://en.wikipedia.org/wiki/Nepal/Medieval Nepal: Sinja Valley.
[101]. 三國志 高句麗傳, 都於丸都之下。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祠靈星、社稷。
[102].大唐西域記: 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印度者。唐言月。月有多名。斯其一稱。言諸群生輪回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 사기에 身毒國 후한서에 天竺國
[103]. 史記 五帝本紀: 讙兜曰:「共工旁聚布功,可用。」堯曰:「共工善言,其用僻. 莊子在宥:堯於是放讙兜於崇山,投三苗於三峗,流共工於幽都,此不勝天下也夫
[104].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family-names-of-xian-bei-tribes/
[105]. 馬王堆 老子甲: 天下之至柔,□騁於天下之致堅。無有入於無閒,五是以知無為□□益也。不□□教,無為之益. 道家 道德經:天下之至柔,馳騁天下之至堅。無有入無間,吾是以知無為之有益。不言之教,無為之益,天下希及之
[106]. 史記 司馬相如列傳: 相如以「子虛」,虛言也,為楚稱;「烏有先生」者,烏有此事也,為齊難;「無是公」者,無是人也,明天子之義。漢書: 「亡是公」者,亡是人也,欲明天子之義.
[107]. 왕공대인(王公大人)의 뜻: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墨子: 子墨子言曰:「古者王公大人為政於國家者,孔子家語:德如泉流,至于今,王公大人述而弗忘. 漢書:司馬遷稱「春秋推見至隱,易本隱以之顯,大雅言王公大人,而德逮黎庶,小雅譏小己之得失,其流及上。
[108]. 梁書:夫道不恆夷,運無常泰,斯則窮通有數。若乃侯景小豎,叛換本國”昔夷羿亂夏. 雖曰人事,抑乃天時。昔夷羿亂夏,犬戎厄周,漢則莽,晉則敦,玄構禍,方之羯賊,有逾其酷,悲夫!
[109]. Ancient Korean Religion: Polaris and Small Dipper. 단군왕검이 실존 인물이다: 백충장군 현령비 , 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百蟲將軍顯靈碑)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10]. 太平御覽 禹妃:故《連山易》曰:「禹娶涂山之子,名曰攸女,生啟是也。」. 水經注 淮水: 故《連山易》曰:有崇伯鯀,伏于羽山之野者是也. 古三墳 山墳: 天皇伏犧氏連山易爻卦大象
[111]. https://ctext.org/zh 𣬛:《字彙》蘇甘切,音三。《海篇》𣬛郞,𥓓名。𣬛郞神,本三郞神也。蠻人呼參爲𣬛,轉聲爲三。又𣬛陽鎭,在沂州費縣。隋書:琅邪郡舊置北徐州,後周改曰沂州.
[112]. 宋高僧傳 :玄奘也立五種不翻。謂譯字譯音為一例。胡語梵言為一例。重譯直譯為一例 一譯字不譯音。即陀羅尼是。二譯音不譯字。如佛胸前卍字是。三音字俱譯. 其書豎讀。 同震旦歟。 至吐貨羅言音漸異 度蔥嶺南迦畢試國. 十:數之具也。一為東西,丨為南北,則四方中央備矣
[113]. user dictionary: 阿育Aśoka,舊稱阿恕伽。新稱阿輸迦。譯曰無憂。西紀前三百二十一年頃,於印度創立孔雀王朝之旃陀掘多大王(Chandragupta)孫也。統一全印度,大保護佛教
[114]. 山海經: 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 有禹攻共工國山. 焦氏易林: 師: 과 泰:雷行相逐,無有休息。戰於平陸,為夷所覆
[115]. 論衡: 吉驗:東明走,南至掩淲水,東明得渡。因都王夫餘, 雷虛 :盛夏之時,雷電迅疾,擊折樹木,壞敗室屋,時犯殺人。世俗以為「擊折樹木、壞敗室屋」者,天取龍;其「犯殺人」也,謂之陰過。教. 論衡: 感虛:《傳書》又言:「伯益作井,龍登玄雲,神棲崑崙。」
[116]. 論衡:祭意: 群神謂風伯、雨師、雷公之屬。風以搖之,雨以潤之,雷以動之,四時生成,寒暑變化。日月星辰,人所瞻仰。水旱、人所忌惡,四方、氣所由來。山林川谷。此鬼神之功也。
[117]. 康熙字典: 霣:《集韻》羽敏切。《說文》雨也。齊人謂雷爲霣。齊人謂靁為霣。公羊傳:夜中星霣如雨。齊人謂雷曰霣。《集韻》王問切,音運。義同.。
[118]. 太平御覽星中: 《詩》曰:晥彼牽牛,不以服箱。注:「晥,星明貌。河鼓,謂之牽牛也,教
[119]. Dictionary:古者伯益初作丼今作井見經典省.《世本》伯益作井。《汲冡周書》黃帝作井。《玉篇》穿地取水,伯益造之,因井爲市也。古文井與𠛬通用。《左傳》有井伯,卽郉伯。
[120]. Dictionary 鼓:伊耆氏造鼓。故謂之鼓。樂書,鼓所以檢樂,爲羣音長。星名。《爾雅·釋天》河鼓謂之牽牛。春秋鼓國,白狄別種。扶餘國,正月,國中連日大會飮樂,名曰迎鼓
[121]. 三國志 夫餘傳: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尚白,白布大袂,履革鞜. 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為凶,合者為吉。
[122]. user dictionary: 阿育Aśoka,舊稱阿恕伽。新稱阿輸迦。譯曰無憂。西紀前三百二十一年頃,於印度創立孔雀王朝之旃陀掘多大王(Chandragupta)孫也。統一全印度,大保護佛教
[123]. 山海經: 共工之臣曰相柳氏. 有山名㱙塗之山。有雲雨之山,有木名曰欒。禹攻雲雨. 禹殺相柳. 共工臣名曰相繇。禹湮洪水,殺相繇,其血腥臭,不可生穀,其地多水,不可居也。
[124]. 竹書紀年:帝禹夏后氏: 帝即位,居冀。頒夏時于邦國. 五年,巡狩,會諸侯于塗山. 八春,會諸侯于會稽,殺防風氏。秋八月,帝陟于會稽。禹立四十五年. 帝啟: 元年癸亥,帝即位于夏邑. 二年年,費侯伯益出就國。王帥師伐有扈,大戰于甘.六年,伯益薨,祠之. 八年,帝使孟涂如巴涖
[125].강희자전: 檐:屋檐. 爾雅·釋天》河鼓謂之牽牛。《郭註》荆楚人呼牽牛星爲檐鼓。檐者荷也。
[126].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 By Xlibris. 2020. p 225.The Seven-Branched Sword(七支刀). P. 226 Zen Buddhism in the NEA
[127]. 大唐西域記: 末田底迦舊曰末田地訛略也阿羅漢之所造也。羅漢以神通力攜引匠人.升睹史多天舊曰兜率他也。又曰兜術他。訛也親觀妙相。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
[128]. 大唐西域記: 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飛英天竺。文傳貝葉。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蘇迷盧山唐言妙高山。
[129]. 大唐西域記: 從烏鐸迦漢荼城北踰山涉川。行六百餘里至烏仗那國。唐言苑。昔輪王之苑囿也。舊云烏場。或曰烏茶皆訛北印度境遂 Pali English dictionary.
[130]. 大唐西域記: 此藥叉神變現異形。或作師子。或作蟒蛇猛獸毒蟲。上作師子蹲踞向階羅. 城西南有比羅娑洛山唐言象堅山神作象形。故曰象堅也。昔如來在世。象堅神奉請世尊及千二百大阿羅漢。山巔有大盤石。如來即之。其後無今人謂之象堅窣堵波也。亦雲中有如來舍利一升餘
[131]. 大唐西域記: 為一佛之化攝也。今一日月所照臨。諸佛世尊皆此垂化。現生現滅導聖導凡。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又曰須彌婁皆訛略也四寶合成。據金輪上。日月之所照迴。
[132].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負家一女子起舞歎曰:「會蘇,會蘇!」其音哀雅,後人因其聲而作歌,名《會蘇曲》。於是鄰國百姓聞而來者衆矣。是年,民俗歡康,始制兜率歌。此歌樂之始也。三國遺事: 劉聖公更始元年癸未。甲申即位改定六部號。仍賜六姓始作兜率歌. 復感慈氏。從兜率駕雲而下。與師受戒法。師勸檀緣。鑄成彌勒丈六像。復畫下降受戒威儀之相於金堂南壁
[133].三國遺事: 自爾國俗每正月上亥上子上午等日。忌慎百事。不敢動作。以十五日為烏忌之日中
[134]. 大唐西域記:每歲至如來大神變月滿之日出示眾即印度十二月三十日當此正月十五日也此時也或放光或雨花。僧徒減千人. 習學大乘上座部法。律儀清肅戒行貞明。昔者南海僧伽羅國。其王淳信佛法發自天然。有族弟出家想佛聖迹。遠遊印度寓諸伽藍。於是返迹本國。王躬遠迎。
[135].https://ctext.org/zh阿修羅: Asura,又作阿須羅。新稱阿素洛。譯曰非天。其果報勝似天而非天之義。為常與帝釋戰鬥之神。名義集二曰:「阿修羅,舊翻無端正。大唐西域記: 石室西南隅有巖岫。謂之阿素洛舊曰阿脩羅。又曰阿須倫。又曰阿修羅。皆訛也宮也。往有好事者深閑咒術.@. 黑嶺已來莫非胡俗。雖戎人同貫。而族類群分。畫界封疆。大率土著。建城廓務殖田畜.
[136]. 陶寺遗址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Taosi – Wikipedia:
[137]. 大唐西域記:大唐國來請求佛法。王曰: 大唐國在何方。經途所亙去斯遠近。對曰。當此東北數萬餘里。印度所謂摩訶至那國是也。王曰。嘗聞摩訶至那國有. 秦王天子。少而靈鑒長 而神武。昔先代喪亂率土分崩。兵戈競起群生荼毒.@. 印度記曰。窣堵波中有多舍利。或有齋日時放光明。或有齋日時放光明。從此東行五百餘里至那僕底國北印度境.昔經部拘摩羅邏多唐言童受論師.
[138]. 吳越春秋: 吳之前君太伯者,后稷之苗裔也. 堯聘棄使教民山居,隨地造區,研營種之術
[139]. 山海經 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先入代帝,於此取之.
[140]. 山海經 海外北經: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其血腥,不可以樹五穀種。在崑崙之北,柔利之東。相柳者,九首人面,蛇身而青。不敢北射,畏共工之臺。臺在其東,臺四方,隅有一蛇,虎色,首衝南方. 山海經大荒北經: 共工臣名曰相繇,九首蛇身,自環,食于九土。禹湮洪水,殺相繇,其血腥臭,不可生穀,其地多水,不可居也。禹湮之,三仞三沮,乃以為池,群帝是因以為臺。在崑崙之北。
[141]. 說文解字 序:: 二曰象形。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三曰形聲。
詩經大雅 民勞:惠此中國、以綏四方。無縱詭隨、以謹無良。民亦勞止、汔可小休。惠此中國、以為民逑 。 無縱詭隨、以謹惛怓. 惠此京師、以綏四國 。無縱詭隨、以謹罔極。
[142]. 隨 따를 수, 게으를 타1 따르다2. 거느리다3. 몸에 지니다4. 따라서. Follow, listen to, submit; to accompany; subsequently, then. 墮 떨어질 타, 무너뜨릴 휴1. 떨어지다2. 무너지다3. 깨뜨리다
[143]. 孟子 離婁下:孟子曰:「王者之迹熄而詩亡,詩亡然後春秋作。晉之乘,楚之檮杌,魯之春秋,一也。其事則齊桓、晉文,其文則史。孔子曰:『其義則丘竊取之矣。』」
[144] 太平廣記 幻術: 扶婁國人,南垂有扶婁之國。其人善能機巧變化,易形改服 太平御覽 四夷樂: 西夷之樂曰離,南夷之樂曰任. 王子年《拾遺記》曰:成王之時,南垂之南有扶婁夷國
[145] 史記:燕噲既立,齊人殺蘇秦。蘇秦之在燕,與其相子之為婚,而蘇代與子之交。及蘇秦死,而齊宣王復用蘇代。燕噲三年,與楚、三晉攻秦,不勝而還。子之相燕,貴重,主斷。蘇代為齊使於燕,燕王問曰:「齊王奚如?」對曰:「必不霸。」燕王曰:「何也?」對曰:「不信其臣。」蘇代欲以激燕王以尊子之也。於是燕王大信子之。子之因遺蘇代百金,而聽其所使
[146]. 宋高僧傳: 卷第三: 故道安云。斯為不易矣。或曰。漢魏之際盛行斯意。致使陳壽國志述臨兒國云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而相出入。蓋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竺教胡為浮屠。此為見譯家用道德二篇中語。便認云與老子經互相出入也。設有華人能梵語與西僧言說。兩相允會。
[147].孟子 萬章上:萬章曰:「舜流共工于幽州,放驩兜于崇山,殺三苗于三危,殛鯀于羽山,四罪而天下咸服,誅不仁也。」. 《屈原·離騷》帝高陽之苗裔兮。《左傳·》晉人與之苗。《註》苗,晉地。
[148]. 大樓炭經:若有婆羅門道人。行求牛。奉牛 意戒具足。若有婆羅門道人。行求狗道。奉狗意戒行具足。若有婆羅門道人。行求鹿道 奉鹿意戒具足 死後生鹿中。若有婆羅門道人 行 求雞道者。
[149]. 說苑 敬慎:孔子之周,觀於太廟右陛之前,有金人焉,三緘其口而銘其背曰:「古之慎言人也.戒之哉!戒之哉!無多言,多口多敗;無多事,多事多患。安樂必戒,無行所悔. 《漢書。藝文志》有《黃帝銘》六篇,今已亡。《金文銘》據學者考證,即為《黃帝銘》. 道家向來被稱為黃老之術, 以《金人銘》對照《老子》,갈홍(葛洪)도교 이론가·의학가·연단술가(煉丹術家).
[150]. 史書 古三墳. 水經注 淮水:「故《連山易》曰:有崇伯鯀,伏于羽山之野者是也.
[151]. 後漢書 : 天竺國一名身毒,在月氏之東南數千里。俗與月氏同,而卑溼暑熱。其國臨大水。乘象而戰。其人弱於月氏,脩浮圖道,不殺伐,遂以成俗. 聞宮中立黃老、浮屠之祠
[152]. 大唐西域記 序: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曰阿耆尼國舊曰烏耆. 舊唐書:《牟子》二卷牟融撰. 牟子 漢桓帝時蒼梧太守牟融著書號牟子,推美釋氏。
[153]. 宋高僧傳:釋智慧者.北天竺迦畢試國人.常聞支那大國文殊在中。錫指東方誓傳佛教。乃泛海東邁。垂至廣州風飄卻返抵執師子國之東.釋極量。中印度人也。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 大唐西域記:大唐國來請求佛法.王曰。嘗聞摩訶至那國有.
[154].: 十六國春秋:法明罽賓人少而好學為弗若多羅所知及長氣幹髙爽神識明悟與眾不群博覽經典潛思八禪遊心七覺時人方之浮頭婆馱孤行山澤不避虎兕晉隆安中至廣州住白沙寺善誦毗婆沙律咸稱為大毗婆沙時年已八十五徒眾八十五人晉故丹陽
[155]. 大唐西域記: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156]. 三國遺事: 劉聖公更始元年癸未。即位年表云。甲申即位改定六部號。仍賜六姓始作兜率歌。三國史記: 儒理尼師今五年.兜率民俗歡康,始制兜率歌。此歌樂之始也.
[157]. 三國遺事: 生義寺石彌勒 興輪寺壁畫普 彌勒仙花 未尸郎 真慈師. 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 -etymology-of-mitianshi-daoan/
[158]. 大唐西域記:三佛經行側有窣堵波。是梅呾麗耶唐言慈即姓也。舊曰彌勒訛略也菩薩受成佛記處. User dictionary Maitreya,新稱彌帝隸,梅低梨,迷諦隸,梅怛麗,每怛哩,梅怛麗藥,昧怛[口*履]曳。菩薩之姓也。譯曰慈氏。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為補處之菩薩。光佛入滅,生於兜率天內院。
[159]. 佛國記: 僧問法顯。佛法東過其始可知耶。顯云。訪問彼土人。皆云。古老相傳. 自立彌勒菩薩像。後便有天竺沙門。齎經律過此河者。像立在佛泥洹後三百許年。計於周氏平王時。由茲而言。大教宣流始自此像。非夫彌勒大士繼軌釋迦。
[160]. 古朝鮮과 夏 商의 관계-3: 문화와 역사. 상용(商容) 과 관저(關雎)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鶡冠子 泰鴻:同和者仁也,相容者義也,仁義者,所樂同名也,能同所樂,無形內政,故聖知神方調於無形,以為神明之根者也,地受時以為萬物原者也。神聖詳理
[161].User dictionary: 彌勒: Maitreya,新稱彌帝隸,梅低梨,迷諦隸,梅怛麗,每怛哩,梅怛麗藥,昧怛[口*履]曳。菩薩之姓也。譯曰慈氏。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為補處之菩薩。光佛入滅,生於兜率天內院。
[162].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Fallacy of 六書.
[163]. 三國志 韓傳: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女王國東渡海千餘里 去女王四千餘里。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 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
[164]. 山海經:先以六書。服常樹,其上有三頭人,伺琅玕樹. 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 詘:詰詘也。一曰屈襞。从言出聲. 詰:問也。从言吉聲. 詩經民勞: 無縱詭隨.
[165]. 字書 釋名:釋船: 帆,泛也,隨風張幔曰帆,使舟疾汎汎然也.〔古文〕𩗋《廣韻》音凡。《集韻》舟上幔以帆風。《廣韻》船使風。船使風也。《玉篇》與𦨲同。塞外有烏桓山。一作烏𠁽。《魏志·烏丸傳》太祖引烏𠁽之衆,服從征討,而邊民得用安息。又通作垸 樹木
[166]. 三國志 孫策傳: 父共載船至錢唐, 會海賊胡玉等從匏里上掠取賈人財物. 其友士拔奇.三國志 吳書二:. 恂等到安平口 遣將軍衞溫、諸葛直將甲士萬人浮海求夷洲及亶洲。亶洲在海中,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止此洲不還.但得夷洲數千人還。
[167].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68]. 晉書: 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是歲,扶南等二十一國、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天下兵起,大戰。日鬥,下有拔城. 冊府元龜:開拔奇之津使天下馳騁而起矣. 高岱字孔文受性聰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無名氏皆世之英偉也.
[169]. 三國志倭人傳: 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女王國東渡海千餘里. 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170].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南夷、西南夷,大抵在交州之南及西南,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171]. 通典 指南車: 魏明帝青龍中,令博士馬鈞紹而作焉。車上有木仙人,舉手恒指南。車箱迴轉,所指微差。晉亂復亡 東晉義熙十三年,劉裕平長安,始得此車,復修之。一名司南車。駕駟其下,制如樓,三級,四角金龍銜羽葆。刻木為仙人,衣羽衣,立車上,車雖迴運,而手恒指南
[172]. 十六國春秋 : 解飛,不知何許人。機巧若神,妙思竒發。虎至性好佛,眾巧奢麗,不可勝紀。飛嘗為虎作檀車,廣丈餘,四輪作金佛像,坐於車上,九龍吐水灌之。又作一木道人恒,以手摩佛心腹之間。宋書 “指南舟:石虎使解飛,姚興使令狐生又造焉。宋武帝平長安,始得此車。其制如鼓車,設木人於車上,舉手指南。車雖回轉,所指不移。晉代又有指南舟。索虜拓跋燾使工人郭善明造指南車,彌年不就。扶風人馬岳又造https://bf.wiki2.wiki/wiki/Xie_Fei_(inventor)
[173]. 大唐西域記: 金銀銅鐵每加摩瑩。饌食既訖嚼楊枝而為凈。澡漱未終無相執觸。每有溲溺必事澡灌。身塗諸香。所謂栴檀鬱金也。君王將浴。鼓奏絃歌祭祀拜祠沐浴盥洗。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美文德之盛。鬱為稱首。北拘盧洲舊曰。鬱單越。鳩樓。訛也金輪王乃化被四天下.
[174].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圖經.
[175]. 隋書:流求國,居海島之中,當建安郡東,水行五日而至。土多山洞。其王姓歡斯氏,名渴剌兜,不知其由來有國代數也。彼土人呼之為可老羊,妻曰多拔荼。所居曰波羅檀洞.KBS역사저널 그날. 마도3호선의 비밀. 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로 갔다
[176]. 通典: 天子從昆侖道入。昆侖道,即依黃帝時制也,舊唐書: 廣州地際南海,每歲有昆侖乘舶以珍物與中國交市。舊都督路元睿冒求其貨,昆侖懷刃殺之. 自林邑以南,通號為「昆侖. 貞臘國,在林邑西北,本扶南之屬國,「昆侖」之類。新唐書: 廣州昆侖殺其都督路元睿。武后時,累遷廣州都督。南海歲有昆侖舶市外區琛琲,前都督路元睿冒取其貨. 驃國 as Key word.
[177].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四年春正月.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辛亥,封安肅公張柔為蔡國公,以趙璧為樞密副使。癸丑,敕封昔木土山為武定山,其神曰武定公;泉為靈淵,其神曰靈淵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城大都。帝撫慰之曰. 무우왕 無憂王 Ashoka Origin of Tibetan Buddhism « Lee Mosol’s Book Collection 。
[178]. 唐玄宗《題梵書》:鶴立蛇形勢未休,五天文字鬼神愁。支那弟子無言語,穿耳胡僧笑點頭。支那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179]. 太平廣記 蠻夷二 新羅 又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其後子孫戲錐求狼糞,因雷震,錐失所在。出《酉陽雜俎》: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苻堅伐慕容桓於遼東.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180]. 元史:汀州路。唐開福撫二州山洞置州,治新羅,後改臨汀郡,汀州宋隸福建路。
[181]. 海國圖志 卷五: 東南洋一海岸之國. 萬國地理全圖集》曰:四大地之中,亞齊亞最廣大。大地北極出地二度,至七十八度,英國中線偏東。南及印度海,有東京、暹羅、北耳西海隅。
[182]. 三國史記 : 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捴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捴管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
[183]. Wikipedia:「Giant Farang Guard Statue at Wat Pho in Bangkok, Thailand.
[184]. 三國遺事: 伊西國人來攻金城.金官五伽耶按駕洛記贊云。垂一紫纓。下六圓卵。五歸各邑。一在茲城則一為首露王。餘五各為五伽耶之主。金官不入五數當矣。而本朝史略。
[185].前漢紀 孝宣皇帝紀二:龜茲王及其夫人來朝。龜茲夫人。即烏孫公主女也。自以得尚漢外孫.大唐西域記: 屈支國。東西千餘里。南北六百餘里。國大都城周十七八里. 屈居勿反支國舊曰龜茲
[186]. 太平廣記 新羅: 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畝,乃求蠶穀種于弟,弟蒸而與之。旁㐌不知也. 他日有中旨,令與一官謫去,特授長江縣尉,稍遷普州司倉而終
[187]. 論衡 說日: 儒者曰:「日中有三足烏,月中有兔、蟾蜍。」.
[188]. 說苑 猿壽五百歲變為玃。玃壽千歲。蟾蜍壽三千歲,騏驎壽二千歲。,酉陽雜俎:舊言月中有桂,有蟾蜍,故異書言月桂高五百丈,下有一人常斫之,樹創隨合。人姓吳名剛,西河人,學仙有過,謫令伐樹。釋氏書言須彌山南面有閻扶樹,月過,樹影入月中。或言月中蟾桂地影也,空處水影也,此語差近. 《後漢·天文志》嫦娥竊羿不死藥,奔月,及之,爲蟾蜍。
[189]. 舊唐書:普州中隋資陽郡之安岳縣。武德二年,分資州之安岳、隆康、安居、普慈四縣置普州
[190]. 隋書: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牟羅國,其船得還,經於百濟,昌資送之甚厚,並遣使奉表賀平陳.其南海行三月,有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
[191]. 熱河日記「所謂畓洞 以其長時沮洳 故我人所名云 畓本無字 我東吏簿水田二字合書作會意 借音沓
[192]. 三國遺事: 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沓坪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193]. 三國史記 金庾信,王京人也。十二世祖首露,不知何許人也。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登龜峯,望駕洛九村,遂至其地開國,號曰加耶,後改為金官國。其子孫相承,至九世孫仇亥仇充,或云仇次休,於庾信為曾祖。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故姓金。庾信碑亦云:「軒轅之裔,少昊之胤。」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
[194]. 三國史記 : 異斯夫或云苔宗。姓金氏,奈勿王四世孫. 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先入●檀梁●檀梁,城門名。加羅語謂門為梁云。。其國人,不意兵猝至,驚動不能禦,大兵乘之,遂滅其國 云南=雲南省
[195]. 北史: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三國志 倭人傳於羅屬大秦,其治在汜復東北,從於羅東北又渡河,斯羅東北又渡河。斯羅國屬安息,與大秦接也
[196].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197]. dictionary: 阿蘇羅之略。譯曰非天。西域記九曰:「阿素落,舊曰阿修羅,又曰阿須倫,又曰阿蘇羅,此皆訛也。」見阿修羅條。阿蘇羅 見阿修羅條
[198].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三: 奈勿尼師今 十八年,百濟禿山城主,率人三百來投,王納之,分居六部。 「兩國和好,約為兄弟。今大王納我逃民,甚乖和親之意,非所望於大王也,請還之。」答曰:「民者無常心, 故思則來,●則去,固其所也。大王不患民之不安,而責寡人,何其甚乎?」百濟聞之,不復言。
[199]. 三國志 弁辰傳:魏略曰:明其為流移之人,故為馬韓所制。魏略曰:其國作屋,橫累木為之,有似牢獄也。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俗喜歌舞飲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200]. 史記 刺客列傳: 至易水之上,既祖,取道,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為變徵之聲,士皆垂淚涕泣。又前而為歌曰:사기열전 1 :김원중 옮김.2007년 믿음사. P.657 슬픈소리이다.
[201]. 燕丹子 卷上:高漸離擊筑,宋臆和之。論衡書虛:《傳書》又言:燕太子丹使刺客荊軻刺秦王,不得,誅死。後高漸麗復以擊筑見秦王,秦王說之;知燕太子之客,乃冒其眼,使之擊筑. 。
[202]. 史記 殷本紀: 帝武丁即位,思復興殷,而未得其佐.得說於傅險中。是時說為胥靡,筑於傅險。
[203]. 三國史記: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加耶亡國之音.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https://zh.wikipedia.org/zh-hant/嘉悉王
[204]. 隋書: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
[205]. 大唐西域記: 東至小川澤。泉池澄鏡林樹青蔥。有僧伽藍. 商諾迦縛娑舊曰商那和修訛也大阿羅漢 所持鐵缽量可八九升。及阿羅漢於中漱口嚼楊枝. 越黑嶺入北印度境至濫波國北印度境.
[206].大唐西域記: 今王本那羅延天之祚胤。婆羅門之種也。字婆塞羯羅伐摩唐言日胄號拘摩羅唐言童子自據. User dictionary Nara-nari,那羅為男性,那里為女姓。言男女兩性之會合,為那羅那里之娛樂。理趣釋上曰:「妙適者,即梵語蘇羅多也。蘇羅哆者,如世間那羅那里娛樂。「那羅,此云力。即是捔力戲,亦是設筋力戲也。」二曰:「那羅,翻上伎戲。」正言捺羅,此云人
[207].史記 殷本紀:殷契,母曰簡狄,有娀氏之女,為帝嚳次妃。三人行浴,見玄鳥墮其卵,簡狄取吞之,因孕生契。婆羅門之種也。字婆塞羯羅伐摩唐言日胄號拘摩羅唐言童子自據. User dictionary Nara-nari,那羅為男性,那里為女姓。言男女兩性之會合,為那羅那里之娛樂。理趣釋上曰:「妙適者,即梵語蘇羅多也。蘇羅哆者,如世間那羅那里娛樂。「那羅,此云力。即是捔力戲,亦是設筋力戲也。」二曰:「那羅,翻上伎戲。」正言捺羅,此云人
[208]. 三國史記: 真平王立。諱白淨,真興王太子銅輪之子也。母金氏萬呼一云萬內。夫人,葛文王立宗之女。妃金氏摩耶夫人,葛文王福勝之女。王生有竒相,身體長大,志識沉毅明逹。
[209].단군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10]. 尚書 虞書:益曰:「吁!戒哉!儆戒無虞,罔失法度。罔遊于逸,罔淫于樂。任賢勿貳,去邪勿疑。疑謀勿成,百志惟熙。罔違道以干百姓之譽,罔咈百姓以從己之欲。無怠無荒,四夷來王。
[211].隋書: 倭國.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隋大業三年,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212]. 宋史:日本國僧奝然與其徒五六人浮海而至,獻銅器十餘事,並本國《職員今》、《王年代紀》各一卷。奝然衣綠,自云姓藤原氏,父為真連;真連,其國五品品官也。奝然善隸書,而不通華言,問其風土,但書以對云:「國中有《五經》書及佛經、欽明天皇即位十三年,壬申歲始傳佛法于百濟國,當此土梁承聖552/2/11 – 553/1/29 承聖元年元年 壬申歲始傳佛法于百濟國
[213].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 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 元史 地理四: 昆陽州,下。在滇池南,僰、獹雜夷所居,有城曰巨橋,今為州治。閣羅鳳叛唐,令曲旂蠻居之。段氏興,隸善闡. 今夷中名其地曰羅伽甸 [元史: 汀州路,唐開福、撫二州山洞置州,治新羅,後改臨汀郡,又仍為汀州。宋隸福建路. 帝欲通好日本,以高麗與日本鄰國. 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朝議興兵討暹國、羅斛、馬八兒、俱藍、蘇木都剌諸國. 會蘇木達國亦遣人因俱藍主乞降.]
[214]. 欽定滿洲源流考卷十八: 梁書新羅土地肥美宜植五榖多桑麻作縑布. 北史新羅田甚良沃水陸兼種其五榖果菜鳥獸物產略與內地同.隋書新羅田甚良沃水陸兼種物產輿華同.”新羅”梁書新羅國有六喙█五十二邑勒詳後語言條內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按滿洲語哈濟親近也新羅官名不止于此而此數官皆有旱支二字之稱與哈濟音實相近或皆屬近臣之稱耳
[215]. 三國史記: 陷王所都漢城,殺其王扶餘慶,迎致漢城中.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遣沙飡須彌山封安勝為高勾麗王。新羅王致命高勾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仁教被於玄菟。本支不絶 ,年將八百。至於津
[216]. 晉書志第五 地理下: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苻堅伐慕容桓於遼東.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217].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官皆有旱支二字之稱與哈濟音實相近或皆屬近臣之稱耳
[215]. 三國史記: 陷王所都漢城,殺其王扶餘慶,迎致漢城中.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遣沙飡須彌山封安勝為高勾麗王。新羅王致命高勾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仁教被於玄菟。本支不絶 ,年將八百。至於津
[216]. 晉書志第五 地理下: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苻堅伐慕容桓於遼東.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217].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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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새로운 고찰
Reexamination of Imna Gaya(任那加羅) in the Stele.
Abstract: The Book of Song has the same name and characters of Imna Gala(任那加羅) as engraved in the Gwanggaeto Stele. Silla, Imna Gaya, and all other small town-states around the western shore of Balhae Bay. Old name of Silla known as Xiē la(薛羅), Sala (斯-si羅), and Sila (尸羅) were near the Balhae Bay along with Baekjae and Hyu-In (休忍) before the King Gwanggaeto. Many phonetic variants of Silla and Gaya had been around in the Eastern Part of Asia.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was the last place.
The King Gwanggaeto lived in Manchuria during the turbulent period and assassinated. His son king Jangsu chased out his rivals. Silla moved the capital to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took the refugees, adapted the Buddhism, and became a strong nation.
Taoist Elders went up to the eastern part of Himalaya Mountains through the ancient trading route and taught the locals. The new religion emerged around the kingdom of Sikkim and current Bhutan region, spread out along the Indus River valley to the entire subcontinent during the 3rd century BC, and evolved to many variant forms of Buddhism. Southern Buddhism came to the southern part of China and spread up to the Balhae Bay during the late stage of Jin (東晉; 317-420)dynasty, replaced the Eurasian Buddhism from the silk-road, assimilated with the folk religion, left a new branch of Buddhism known as Mahāyāna Buddhism “Miruk-bul” by Korean.
The southern sea-route of Yellow Sea was established around 479. New Buddhism reached to the Southern part of Korea. The King Beopheung (法興王: r. 514–540 AD) adapted Southern Buddhism. Silla unified Korea in 668. Wei(倭) changed the name to Nihon in 670. The people in the Korean peninsula went to the Japanese archipelago, cultivated the locals, and made the new island nation strong.
주제어:4-5. 백익. 홍산문화. 환단고기. 임나가라(任那加羅). 원시불교. 팔리어. 미륵신앙. 인도. 卍자. 지나. 태국 화랑. 남조, 대리국. 삼태극.
I. 머릿말 |
IV. 삼한 사람들이 해상로를 개발 |
II. 광개토대왕 전후 시대 |
V. 가락국 허황후 화랑 가야금 |
III. 원시불교의 발생과 전래 |
VI. 맺음 말 |
I 장: 머릿 말
남조 송나라(宋;420 -479년) 역사서 송서(宋書)에 왜(倭) 국왕이 한의 7 나라 (韓七國)를 다스렸다는 “新羅任那加羅”와 같은 글자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1] 뒤를 이은 남제 (南齊; 479-502 년)에는 478년에 가라국왕 하지 (加羅王荷知)가 사신을 보냈다. 그 뒤를 이는 양나라 (梁; 502-559) 역사서에는 신라가 작은 나라여서 그 전에는 못 오다가 521년 에 백제 사신을 따라 와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2] 하지가 살았던 가라국을 찾았다.
전국시대 말기에 남만주 지역해하 (海河) 수계에 “신라 왜 가야 백제, 고구려, 낭랑 말갈등 여러 부족 국가”가 서로 인접해 있었다.[3] 그 지역에 공손씨가 올라와 부여왕의 대릴사위가 되었다. 고구려 왕자 발기 (拔奇) 세력을 흡수 하고 연왕이라 했다. 사마씨가 원주민 세력을 이용하여 연왕 공손연 (公孫淵, ? ~ 238년)을 제거 하고 조위로 부터 양위를 받아 서진 (西晉; 265-317)이 나타났다. 전란 통에 일부는 만주 내륙으로 도주 했다. 많은 삼한의 후손들이 황해의 동서 해안을 따라 흐터졌다.
송서에 왜왕이 다스렸던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新羅 任那加羅秦韓慕韓” 일곱 나라는 황해 서쪽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고구려 왕자 발기가 비류와 김일제의 후손에 동참하여 동진 강남에 정착 했다. 그후 동남아로 진출 하여 남방불교를 강남에 전파 했다. 양자강 하류 남경 가까이 거발성(居拔城)에 수도를 두었던 대륙 백제는, 성왕 (轉輪聖王; 재위: 523년~554년) 시절에, 황해의 동서를 종횅하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절에 풍월주 사다함(斯多含, 547년? ~ 564년)의 화랑도가 하지의 가라국을 정벌 했다. 가라국의 우륵이 신라에 가야금 (加耶琴)을 전했다.[4]
불교가 번창 했던 시절 원나라가 중원을 점령하고 편찬한 송사 (宋史) 에는 980년 경(至道二年)에 부족장 급가라 니(岌伽羅膩)가 태원 지역에 있었다. [5] 백제, 임나 (任那) 와 왜는 같은 글자로 기록 했고, 신라(新羅)와 가라 (加羅)는 여러 지역에 여러 글자로 나타났다. 불교의 어음을 가차전주 하여 적은 이름이라 본다.
1 동북아 역사 요략: 만리 장성 이북 광활한 지역은 황하문명 밖이라 중원사람 들이 편찬한 기록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를 “Silent Majority; SMa”라고 간략하여 표현 했다.[6]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사용 했던 시기에, 장소와 용도에 따라 어음을 결정 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이 치수사업을 완성하고 황하문명을 이루 었다. 내릴 강, 북녁 북, 흰 백(降,北,伯) 북적(北狄), 백적(白狄), 백작(白翟), 개적(蓋狄), 적인(狄人) 등등 몇몇 글자 속에 두 문화권의 관계가 남아 있다.[7] 횃불(torch; 白,自)을 천정 까지 올려, 온 (all, whole) 방안이 밝아 진다 하여, 흰백(白)자 에서 숫자 백(百)을 만들어 온 (Ohn) 으로 읽었다. 고전에는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어음이 남아 있다.
여러 부족이 합심하여 치수사업을 하던 공공 “龔工, 共工”이라 부르던 집단이 강수(降水)가 분수 (汾水)와 만나는 산서성 지역에서 나타 났다. 그때에 우의 아버지와 동이 수령 백익이 산해경을 만들어 젊은 융(禹) 를 시켜 치수 사업을 이끌었다. 그러다 분란이 생겨 어른이신 백익(伯益) 을 지도자로 뽑았다. 그가 왕중왕이란 뜻의 왕검 (王儉)이란 칭호를 받았다. 순임금이 은퇴 했던 해지 연안 명조 (鳴條)에 수도를 정하고 공공(邛邛) 시대 부터 써오던 이름 평양으로 바꾸고 왕검조선 (王儉朝鮮)을 선포 했다.[8] 이 지역을 한이라 부르던 지도자들이 다스린다 하여 한원(韓原)이라 했다.
치수 사업 말기에 분란이 생겨 도산 (塗山)에 모여 회의를 했다. 우 를 지지 하던 일파가 백익을 죽이고 하(夏)나라를 세웠다.[9] 상호상부하며 평화롭게 살던 고조선 영역에 처음으로 처참한 권력 투쟁이 나타났다. 이를 (가상인물) 황제와 동이 수령 치우가 싸웠다고 한다.[10] 사서에는 치우 천왕 을 “구리지군(九黎之君) 또는 구리치우(九黎蚩尤) 라고도 한다. 여씨 춘추 에서는 작병 (作兵) 이란 말을 ‘주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황제를 이겼다’고 풀이 했다. 구리난덕 (九黎乱德) 이란 표현을 했다.[11] 구리는 난리뿐 아니라 덕(德, 悳, 惪)을 또한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옛적 시경의 문구를 인용한 홍범의 왕도 (王道)에서 도덕경이 나타났다.[12] 시경 운한 (詩經 雲漢) 에는 서주 (西周)의 백성을 여민 (黎民) 이라 했다. [13]
초기 공동체 였던 엄숙한 공공국의 지도자 가 덕있는 사람 (邛邛君之德)이 었다. 그를 우러러 보았다.시경에 앙앙(卬卬)이란 문구가 있다.[14] 구리난덕 (九黎 乱德) 이란 문구 속에 고구려의 어원과 도덕경의 관계가 있다. 세 지도자 (三, 參仙, 參禪)의 후손이라 삼묘 (三苗)라는 글자로도 기록 했다. 서주가 완성되고 실행한 박람회에 나타난 공공 (邛邛)은 북쪽에서 왔다.
황하문명 발생지에서 지도자 백익을 잃은 고조선 후예는 남쪽 세력과 오랫동안 싸우다가 최후에는 아사달이 점령 당했다. 북쪽으로 올라 갔던 사람들이 잃어 버린 역사를 복원한 기록이 환단고기다.
고조선의 한 지류는 한원(韓原)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들을 부여 (夫餘),부유(蜉蝣,浮游) 란 글자로 기록 했다.[15] 양산(梁山)일대에 살다가 사천성(益州)을 지나 남쪽 으로 도망 갔다. 떠돌이 생활하던 사람들의 노인이 고조선 발생지에 전해 오던 설화를 히말라아 산맥 동쪽 에다 전했다. 그지역 사람들이 노자가 전해준 내용을 번역 하여 불경의 초안을 남겼다. 고조선 수도 아사달이 점령하던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종교적으로 승화 시켜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그 내용이 다시 중원에 전래 되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수정 보충하여 첫 불교 기록인 대루탄경 (大婁炭經)이 나타났다 [16] 그에는 비류 (比流) 도솔(兜率) 미륵(彌勒) 유리(琉璃), 환인(桓因) 수미산 (須彌山) 하는 한국 고대사에 보이는 글자가 실렸다.
북쪽 으로 피해 갔던 고조선 사람들이 내려와 침략자 서주를 압박 했다. 주여왕 (周厲王, ? ~ 기원전 828년) 이 잡혀 갔다. 공공국의 지도자 화(和) 가 내려와 다스렸다.[17] 사마천은 이를 주공 단과 소공 석이 다스려 공화 (共和) 라 한다고 연막극을 쳤다. [18] 급총에서 죽간이 발굴 되여 개가 백익을 죽였다(益乾啟位, 啟殺之)는 사실이 드러 났다.
아버지를 빼았 겼던 주선왕 (宣王)이 한후(韓侯) 에게 끝없이 넓은 북쪽 땅을 통치해 달라고 부탁 했다. 자신이 요청 하여 이룩된 화친맹약을 깨고 한후의 영역을 점령하여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옛 부터 전해 오던 전설을 상형 글자로 새겨 놓아 첫 기록이 나타났다.[19] 이를 노예들이 만든 글자란 뜻에 예서(隸書)라 했다. 산중에 있던 중산국 지도자가 잡혀 새장에 같힌 신세가 돠었다 하여 그를 중산부(仲山甫) 번후(樊侯)라 했다. 번후 (樊侯; 變汙) 가 지도하여 만든 글자가 “籀, 篆文隸變.隸書” 로 진전 되었다. 이를 정통한자 번체자(傳統漢字, 正體字; 繁體字,繁体) 라고 한다. [20]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천할시(斯)로 표기 했다. 그들이 부르던 민요가 시경의 국풍에 나타난다. 시서경(詩書經)의 원조다.[21] 고조선 사람들이 순임금이 살던 해지연안 명조(鳴條)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으로 올라가 흉노국의 지도자가 되었다.[22] 흉노 또한 고조선의 후예다. 진수의 삼국지 에는 “역경에는 때때로 고려언어 (高麗言) 가 있다”고 했다
삼한 (三韓; 馬韓,辰韓,弁韓)을 기록 할때 변한 만이 (卞,示, 弁) 로 바꾸어 기록 했다. [23] 설문해자에 금예변작(今隷變作)이란 표현이 많이 있다. [24] 새싹의 상형글자를 초 (楚)나라 지역에서는 복(葍), 진나라 지역에서는 공 (秦謂之藑)이라 부르고, 변한(變汙)사람들은 순이라 읽는다. 고죽군(孤竹君)이 있던 지역 사람들이 죽순(Bamboo shut; 舜:艸也) 이라 부르던 어음이 어질 었다는 유우씨(有虞氏)에 붙었다.[25] 삼한의 선조들이 상형글자를 만들었다. 한자(漢字)가 아니라, 클한 한자(韓字)가 옳은 표기다.
2 조선 (朝鮮)이란 이름의 이동 경로: 산서성으로 내려와 분하 (汾河, 汾水) 계곡에서 합심하여 치수 사업을 시작 하던 곳에 아사달을 수도로 정한 조선 (朝鮮)이 나타났다. 고조선 연맹체를 구려 (九黎)와 삼묘 (三苗)라고 했다.
춘추시대 초기에 제 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군사를 이끌고 북쪽 세력을 토벌하러 갔다가 비이지계(卑耳之谿) 에 이르러활 한번 못쏘고 도망 갔다. 관자에 발조선 (發朝鮮)의 지도자를 북주후 모/막(北州侯莫)라 했다. 춘추삼전에는 조선이란 글자가 없다. 서주의 제후국 진(晉; 明出地上 㬜) 자는 [이미 해가 떳다는] 뜻 글자로 밝은 해가 떳다는 어음 발해 (勃海)와 조선(朝鮮)이란 글자와 같다. 진(晉)나라 영역에 아사달이 있었다. 한국어로 진 이라고 읽는 제후국 셋 “晉, 秦,陳”이 나타났다.
고조선 영역 산서성(山西省作, 隸省)에 있던 진(晉)나라가 “조위한 趙 魏 韓”셋 으로 분열된 삼가분진 (三家分晋) 이후에 나타났다. 방언에 실린 조선은 해하 수계를 따라 발해만에 이르는 지역을 뜻했다. 위나라의 역사서 위서(魏書)에 단군왕검에 관한 기록이 실렸다. 당대의 학자로 진시황 송덕비문을 남긴 이사(李斯) 는 한거중국 (韓居中國) 이란 문구를 남겼다.[26] 삼한의 선조들이 중원 땅에 살았었다는 뜻이다.
강희자전 해(解)자 풀이에, [북위 에는 해비씨(解枇氏)와 비씨(費氏, 毗)가 있었다. 고구려 성에 북씨 (北bèi/) 씨가 있었다. 북은 별(Star)이다. 대(代) 라 했다]라고 했다.[27] 구주의 북쪽에 대국(代國)이 있었다. 산중에 있다 하여 중산구(中山國)이라고 했다. 세대(世代,generation. 歲) 의 어원이 되었다. 해하 수계 상류다. 세(歲)자에 물수변을 붙여 그곳 여울가에 살던 부족을 예맥족이라 했다. 삼국지 한전에는 옛 기자의 후손인 한후(韓侯) 즉 조선후 (朝鮮侯) 의 성이 서주왕실의 핏줄과 는 다른 예맥(濊貃,貉)의 핏줄 이라 모성 한씨(冒姓韓氏) 라 했다. 모성 한씨가 한반도로 내려 왔다.
전국시대 고조선의 수도 금미달 (今彌達)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맥군남여 (南閭)를 따라 내려와 창해군이 나타났다. 전국책과 방언에 조선이 해하 수계에 나온다. 그 일대에 오팽이 들어가 조선을 매멸시켜 창해지군 (滄海之郡)이 생겼다. 연의 장성이 양평(襄平)에서 끝났다. 예인(濊印)이 나온 신라의 발생지다.[28] 그곳에서 공손연이 잡혔다. 발해만 연안에 “비미, 미추홀”하는 이름이 나타났다. 그들이 해양권을 관장해여 한해(瀚海)란 이름을 황해(黃海)에 붙였다. 황해를 횅단하는 남쪽 항로를 백제와 가락국이 개통한 시절에 만주에 있던 신라가 한반도에 내려 왔다.[29]
한서에는 고조선 사람들이 육지와 바다로 흐터져 나갔다는 사실을 은미하게 기록했다.[30] 모두들 지나쳐 버렸던, 물수 변을 붙이지 않은 발해(勃海)란, 글자 뜻을 간략히 설명 했다. 신선이 사는 세 산봉우리에 [이미 우뚝히 해가 떳다는 뜻을 지닌 진(晉;㬜)자와 같은 뜻]이다. 그들의 어음을 음차한 글자가 발해 (勃海, 渤海)다. 조선(朝鮮)은 훈역한 글자다.
II 장: 광개토대왕 전후 시대
역사의 흐름을 고려 하면서 사서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풀이 하면, 광개토대왕의 격전지는 남만주에서 해하 수계에 이르는 지역이 었다.
가까이 홍산문화권 사람들이 산너머 의무려산 일대에 정착 했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만주에 전해 오고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장병린(章炳麟: 1868~1936년) 이 남긴 구서 (訄書)에는 “영주 지역이 계림과 말갈 (雞林 靺鞨)의 영역이 되었다.” 라고 한탄 했다.[31] 그가 외국인 이라고 칭한 계림 과 말갈 (鷄林 靺鞨)은 고구려 신라 백제의 건국 초기에 나타난 이름이다. 말갈(靺鞨, Mòhé)이 해(奚, 解)족 이다. 중앙아시아 에서 만주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선조가 수도를 평양(平壤)이라고 했다.
후주(後周, 951- 960) 시대 돌궐 가한이 다스리던 영역에 평양무초 (平壤 茂草)란 문구가 있다. 그곳이 불교국이 되었다. 중앙아시아에는 여러 민족이 같이 살았다. 수양제가 돌궐과 협약을 하려고 개민가한 (啟民可汗) 을 찾아 갔다. 그 막사에는 이미 고구려 사신이 와 있었다.[32]
환단고기는 초본이 만주에서 나타났다고 필자는 밝혔다. 잃어 버렸던 홍산문화권 역사를 복원한 기록이 일본 구주에서 나타났다. 현제 Chinese Text Project (https://ctext.org/zh)에 실려 있는 삼국유사는 일본에서 1902 년(明治三十五年)에 출판 되었다.[33] 그 서문에 실종된 편명; “사편 斯編”은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고, “말갈발해조 靺鞨渤海條”는 만주역사, “백암사 석탑 사리조 伯嚴寺 石塔 舍利條”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동사 (大同寺) 라고도 부르던 산서성 화엄사(華嚴寺) 석탑 사리함을 뜻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천제 (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 (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수도를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정하고 북부여 (北扶餘)라고 했다.[34] 고조선의 수도였던 금미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세로 나라를 세운 부여씨가 사제권을 이어 받았다.
태평광기에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解慕漱)의 아들로 부루 (解扶婁)가 불교 전래와 신라의 옛 이름 시라(尸羅)와 관련되어 나타난다.[35]
햇님의 후손 석(昔脫解)씨가 휴인 (休忍) 을 정벌하고 왕이 되어 벌휴 이사금 (伐休泥師今, ?~196년) 이라 했다. 활잘 쏘는 예 (羿)의 후손이 시라(斯羅)의 라 (羅)자를 성씨로 하여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었다고 급취편에 실렸다.[36] 그들이 살던 마을을 지나는 여울을 사수(斯水)라 했다.
천진 일대에 정착 했던 비류왕 후손과 남쪽에서 올라온 휴도왕(休屠王) 김일제의 후손이 화친 하여 공손도 세력이 나타났다. 고구려 왕자 발기 (拔奇,? ~ 197년)가 이에 동참 했다. 추모왕의 후손과 비류의 후손은 남만주 발해 요동만 해안에서 오랫동안 싸웠다. 고구려는 요하를 방어 선으로 서쪽 세력을 견제 했다. 사마씨가 공손연을 토벌 할때 고구려도 오환 선비족과 같이 참전해서 238년에 공손연을 양평성에서 잡았다.
그후 숙신씨가 고구려를 배반하여 조위의 관구 검(毌丘儉, ? ~ 255년)이 고구려를 침략 했다.[37] 그당시 백제 장군 진충(眞忠)이 한낭랑 (漢樂浪) 을 친입 했다가 돌려 주었다. 같은 사람 진충(真忠) 이 신라의 이벌찬이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이를 은유법으로 [시조 사당이 있는 금성(金城)에 여우가 울고 금성(太白星)이 달을 침범 했다]고 기록 했다. 신라 수도를 금성 또는 월성이라 했다. 낙랑에서 자객을 보내 백제왕을 죽였다.[38] 관구검에 쫓기던 동천왕은 옥저 (沃沮) 땅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이 끝나 고구려는 돌아 가고, 남아 있던 세력이 신라라고 했다.[39] 피란 갔던 옥저 땅에 호동왕자가 사냥을 갔던 최리왕의 낭랑국이 있었다. 이는 모두 남만주에 있었다.
대륙으로 흐터져 갔던 김일제 후손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신라의 제 일족은 김가 (金哥), 먼 선조를 방이(旁㐌), 수도를 의의(宜矣)라고 했다. [40] 한국 역사서에는 실리지 않은 이름이다. 방이(旁㐌)설화 내용에 누애와 코끼리가 나온다. 남쪽 지나 (支那)라고 하던 지역에 신라가 있었다. 삼국유사,낭랑즉 평회성 의의 “樂浪即平壞城。宜矣” 라고 수도를 숨긴 글자다.[41] 이곳을 위서 (魏書)에는 463년 가을 조에 (平壤)이라고 했다. [42]
환도성이 황패되여 고구려가 졸본주 태자하 연안 숙신씨 본향이던 요양을 수도로 정하고 평양(平壤)이라고 했다. 시조 사당을 증축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네 결화를 했다.[43] 이를 삼국사기에는 옛적에 선인왕검이 살던 평양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 이라 했다. 왕검조선 수도에 붙인 평양 이란 이름이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에 으르는 방대한 지역에 나타났다.
1 절 고구려 수도 평양의 위치:
대왕비문에, 대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이르니, 신라 사람이 편안하게 (而) 왕에게 아뢰었다. 그후 실성마립간 (實聖麻立干, 재위 402년 ~ 417년)이 평양으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44] 금사 (金史)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평양이 태자하 다리건너 있던 요양기 올로홀필라 (兀魯忽必剌)라고 했다.[45] 대왕이 자객을 만나 다같이 치명상을 입고 승하 했던 곳이다. 이 곳으로 아들 장수왕이 천도 했다. 건국 초 부터 시조 사당 (始祖廟)을 모시던 남만주 졸본주의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다.[46]
오늘의 평양시(平壤市)는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점거한 이후 양원왕 부터 평원왕(平原王)에 이른 36년에 걸처 지은 고구려 장안성(長安城)이다. [47]
통전에 고구려왕의 사택이 따로 있다. 그 곳이 잠정적 고구려의 수도 였던 동황성(東黃城) 이다. 당나라 때에 작성된 살수대첩을 보면 평양이 오늘의 요양(遼陽)이 분명 하다. 수서와 통전에는 국내성 (國內城) 과 한성(漢城) 을 별도(別都)라고 했다. 장수왕이 빼앗은 백제 수도 욱리하(郁里河) 연안 한성(漢城)이 고구려의 별도 였다.[48]
원나라 때에 편찬된 송사(宋史)에는 고구려인의 후손인 왕건이 옛 현토군이 있던 지역에서 고려를 세워 후에 한반도로 내려 왔다고 했다.[49] 왕건의 선조는 치수 사업을 마치고 만든 구주의 중심부 기주(冀州)에서 나타 났다. 만주에 자리 잡은 부여의 별종이, 평양에 수도를 정했다. 수양제와 당태종이 점령을 못하고, 당고종 때에 이적이 뿌리를 뽑았다. 그후 중원이 분란한 시절에 왕건이 현토군 도독이 되어 고려왕으로 책봉 되었다. 왕건의 손자 소가 권지국사(子昭權知國事)가 되었다. 소 가 951년 에 현토주도독 고려국왕 (玄菟州都督 高麗國王) 이 되었다. 송나라 사신을 따라왔던 서긍 (徐兢, 1091-1153) 또한, [왕건이 현토군 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밝혔다. 고려는 삼경이 있었다. 서경이 제일 크다. 평양을 진주 서경 (平壤為鎮州)이라 했다. 고려의 발생지가 한국 사서 와는 다르다.
만주 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요사 내용을 인용하여 발해의 수도 였던 홀한주 (忽汗州)에 동단국을 두었다.[50] 발해를 점령하고 홀 한성(忽汗州, 忽汗城)을 빼았아 그왕 대인선 (大諲譔, ? ~ 926년)을 동단국 왕으로 책봉했다. 태자하 연안에 있던 평양을 여러 글자로 적었다.
명나라가1369년에 원사(元史)를 편찬 했다. 그 내용에 [고구려를 침략 했던 수 양제와 당태종은 장수왕(王高璉)이 살던 고구려 수도를 점령하지 못했다]고 기록 했다. 오늘의 한반도 평양은 장수왕이 대동강 하류에 있던 백제 한성을 점령 하고, 백제를 멀리 쫓은 후에 나타났다.[51] 고구려 유민이 안승을 왕으로 모셨다는 한성이 욱리하 연안의 옛 백제 수도였다. 신라 문무왕 (文武王;626- 681)이 사찬수미산 (須彌山)을 보내 안승(安勝)을 왕으로 봉했다. 문무왕조 마지막 조에 신원을 알수 없는 수세란 사람을 한성주 총관 (漢城州 捴管 藪世)으로 했다, 그가 모반하여 주살 했다.[52]
동천왕은 만주 땅에 전해 오던 북부여기(北扶餘古記), 단군기 (壇君記) 동명기(東明記) 등, 중원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각종 고기를 알고 있었다.
국권을 되 찾은 동천왕은 졸본부여에 돌아와 추모왕이 수도로 정했던 곳을, 옛 적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의 수도에 붙였던 명칭을 따서, 평양이라 했다. 진수가 활동 할 당시의 금(今)朝鮮 이라한 요양에 붙인 이름이다.[53]
요하 서쪽에서 태어난 유리명왕의 아들이 제4대 민중왕(閔中王: 44년 ~ 48년)이다. 민중왕은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閔中原)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 자신을 장사 지낼 것을 명하였다. 민중원이 본계 수동 (本溪水洞, 名隧穴)이다. 그곳에 수신 (木隧於神,totem pole)을 차려 놓고 치루던 개천절을 동맹 (東盟) 이라고 했다.
전국시대 말기에 천독국 도인 시라(道人尸羅)가 수래에 불상을 싣고 해하 수계에 있던 연나라 수도에 왔다.[54]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시라(尸羅)와 음이 같은 시라성(斯羅城)이 색인 되었다. 삼국 초기 역사에 나타난 지명과 부족명을 보면 모두 남만주 요하 동서에서 세력을 다투었다. 불교 경전에 나타난 이름이 많이 보인다. 재상 아란불 (阿蘭弗)은 불교 신자 또는 승려 였다. 석가모니를 엄마 마야 부인이 처음 목욕 시켰다 는 유하(油河)가 한국 상고사에 왕모유화 (柳花) 로 기록 되었다. [55] 유리 (瑠璃明王, 또는 類利, 儒理尼師今) 는 유리(glass, crystal) 같이 깨끗하고 맑은 왕 이란 뜻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년 ~ 371년)이 같은 북부여의 후예인 모용황과 백제에 수모를 당하고 백제와 싸우다 평양성 (平壤城)서 전사 했다.[56] 고구려는 다시 산 너머 국내성 으로 피해 갔다. 국내성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어 났다. 중국사람들은 이 일대에 단군설화와 관련된 환인(桓因) 이란 이름을 붇였다. 전진 (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고구려 소수림왕 (371–384) 2년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후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들어와 불도를 전했다. 그러나 아도(阿道)란 이름은 그 전에 신라와 백제에도 나타났다. 아도(阿道; 我道 )란 나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불교를 전한 사람을 아도라 했다. 침류왕 (枕流王, ? ~ 385년) 집권 시기 에도 나타났다. 당시 호승 마라난타 (胡僧摩羅難陀)가 욱리하 (郁里河)로 알려진 대동강 하구 백제수도 한성 (漢城)에 불교를 전했다. [57]
광개토대왕 이전에 남방불교가 발해만 일대에 전래 되었다. 백제 침류왕 (枕流王; 재위 384년-385년)의 어머니가 아이부인 (阿爾夫人) 이고, 신라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부인이 아이혜(阿爾兮)다. 모두 불교 이름이다. 남조역사에 왜오왕이 다스렸다는 “任那加羅”와 같은 글자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렸다. 남방불교를 따라 올라온 이름자다.
2 절: 광개토 대왕의 생애: 대왕은 다물(多勿; 되 물려) 정신을 다해 옛 땅을 되 찾으려고 많은 전쟁을 하다 젊은 나이에 승하(昇遐)했다. 대왕의 결전지는 모두 요동 발해만 일대 였다. 대왕의 사망 원인이 비문에 실렸다.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不迎王. 王于忽本東岡, 黃龍負升天
태자하를 끼고 있는 수도 평양 옆에 별도로 시조사당과 각종 병기를 보관 하던 곳에 황룡국에서 보낸 자객을 만나 치명상을 입고 같이 죽었다. 황룡국은 요하 건너 옛 우거왕이 한무제를 만났던 곳이다. 수도를 골도 (骨都) 또는 고도(古都) 라고도 했다. 유리명왕의 아들 해명 (解明)이 인질로 잡혀 갔다 활을 꺾어 버려 힐책을 받고 자살 했던 곳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필자는 여러 차례 설명 했었다.[58]
흔히 “말 이을 이, 而”로 읽는 글자는 능할 능으로 풀이해야 옳다. 기린의 수염을 묘사한 상형글자라 했다. 수염이 자란 건장하고 능력이 있는 서쪽 에서 온 월지국 사람 호(胡:而, 髵)을 묘사한 글자다.[59]
문제의 “능왜이 신묘년 래(而倭以辛卯年來)란 문구는, 그 전의 전쟁에서 얻어온 왜인 포로 중에, 바다에서 배를 잘 다를 수 있는 기술(才能, skill)이 있는 자들이 드디어 “신묘년(가을)에 대왕의 군영에 와서 (來)” 이들을 사공으로 사용(以)하여 노를 젓는 배를 타고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발해만 동남쪽 요동 반도 끝에 이르러 백제가 가장 중요시 하던 통상로에 있는 높은 나무가 없는 대머리 산, 독산(禿山; 성 사면이 바다로 싸인) 성을 함락 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대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바닷물에 둘러 싸여서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공격 한지 20일 만에야 함락 시켰다.[60]
대왕의 비문에 실린 지명은 모두 사기 조선 열전과 한서 지리지 낭랑군, 요동군 일대에 있던 지명이다. 인용한 비문 내용을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의무여산을 지나 (갈석산?) 산을 뒤로(負山) 하고 염수의 북쪽(鹽田上; Salt farm)에 이르러 그 지역에 있던 3부락 6~7백 진영(當營)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많이 노획해 왔다. 그곳에서 돌아 오면서 양평으로 가는 길 (襄平道)을 따라 올라와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을 하며 (요하 동쪽으로)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가 옛적 같이 속민 (結和)이 되여 조공을 바쳐왔다. 도망가는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 (任那加羅)에 이르러 종발성(從拔城; 敦拔城).하니, 성은 즉각 항복하여 (남만주 발해만 연안에 있던) 신라(新羅)인으로 지키게 했다.[61] 발성은 고구려 왕자 발기 (拔奇가 살던 성(城) 이다. 평양성(平穰城)과 미추성국(彌鄒城國)이 같은 활당을 받아 묘지를 관리 했다. 당시 여러 소읍국가 (xx國)가 있었다. 이름자에는 “나라 (那羅) 산나성(散那城)등” [햇볓을 숭상하다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 있는 글자가] 많이 있다.[62]
후에 발기(拔奇)가 강남으로 가서 손책과 가까워 남경 주위에 정착 했었다. 발기가 살던 곳이라 하여 거발성(居拔城)이라 했다. 그 성이 양나라 때에 후경(侯景, ? -552년)이 점령 했다. 그 당시에 남방불교가 번성 했다.
남북의 언어가 달라 기록이 분분 하다. 고조선의 부족 한예가 해하 상류 호타하 유역(韓穢沙水城國. 炅古城國)에 살았다. [63] 고조선 사람들이 “爹;아버지 다”라 부르던 사음자를 북방인과 강(羌)족의 언어라 했다.
중국 북송(北宋) 시대에 편찬된 백화사전격의 4대서(四大書)로 알려진 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어람(太平御覽), 책부원귀(册府元龜), 문원영화 (文苑英華)가 있다. 문원영화 (文苑英華)는 북송(北宋) 시대에 성립된 시문집이다. 그에는 해외 여러 나라에 관한 사연이 실려 있다. 그 목차에 “蕃書四 驃國 新羅 渤海 奚契丹” 이 있다. 표국(驃國)은 대표적인 불교 국가로 오늘의 태국(Siam)을 뜻한 글자다. 그로 부터 해안을 따라 남방불교 가 전래 되던 사실이 적혀 있다. 진덕왕과 진평왕의 관계도 실렸다. 그러나 골품제 성골(聖骨)에 관한 설명이 없다.[64] 그에 장보고 (新羅人張保臯)와 정년 (鄭年)에 관해 자새히 읊었다. 흑치상치와 사다함(斯多含, 풍월주 재임: 562년 ~ 564년)이란 글자도 있다. 책부원귀 에는 강남서 (江南書云) 내용을 인용하여 황제와 강남 국주 와의 대화에서 용사다식(用斯多食) 폐사다(弊斯多)하는 글귀가 실렸다.[65] 토번 랑 사다 (吐蕃浪斯多)란 문구도 있다. 사다(斯多)란 글자는 고조선의 후예를 많은 말썽 꾸러기 라는 뜻으로 기록 했다.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강남 넓은 지역에 있던 신라 사람이 한반도에 올라와 위용을 떨친 사람이 사다함이다.
송사(宋史)에는 “고음(顧愔)의 新羅國記가” 실렸다. 또한 고려와 신라가 해상권을 장악한 기록이 있다.[66] 삼국사기에는 고음(顧愔)이 없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신라기(新羅記) 와 신라국기 (新羅國記)를 남겼다. 신라에서 제일 가는 귀족이 김가(金哥), 선조 이름을 방이 (旁㐌)라 했다.[67] 당 (唐)나라의 단성식 (段成式)이 남겼다는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신라 김씨의 시조 방이(其遠祖名旁)의 글자를 감추었다.[68] 유양(酉陽)이란, 당나라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방대한 남쪽 지역이다. 그 곳의 예기를 전해 듣고 작성한 책이다.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강남지역에는 객가(客家)가 많았다. 북쪽에서 내려온 삼한 사람들이 살던 자그만 성을 객가라 했다.
동남아 일대에서 해상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당나라 언어로 의사 소통을 했다. 장발국과 부쌍주는 동남아 지역 불교국이다. 떠돌이 오랑캐가 신라 사람들의 지도자란 뜻이다. 신라의 특산물로 공작과 해무(孔雀,解舞)를 바첬다. 왜국인(倭國人) 한지화 (韓志和)를 중국이 비룡위사(飛龍衛士)로 썼다. 그가 나침판을 사용 했다는 해비(解飛) 인듯 하다.
잃어버린 고음(顧愔)의 신라국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실렸다고 본다.
3.절: 신라의 수도 이전: 나라를 잃은 조선 사람들이 여섯 마을에 흐터져 살던 곳에서 나타났다. 후에 김씨의 시조로 모시는 김알지가 금성(金城) 서쪽, 닭이 우는 숲속에서 태어 났다 하여 계림(雞林) 이라 했다. 삼국유사 에 “樂浪即平壞城 宜矣”란 문구가 있다. 평괴성(平壞城)은 풀이를 못하고, 의의 (宜矣) 란 [건의또는 상의 했다]는 어음으로 풀이 했다.[69]
당서와 만주원류고 에서는 백낙천(白居易 樂天, 772년 ~ 846년) 의 시문을 인용하여 만주 길림(吉林)은 신라의 별명 계림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했다. 고구려 수도 평양을 점령 했던 신라군이 만주에 남아 금나라의 시조 가 되여 함보가 신라 사람이란 기록이 나타났다.[70]
광동성 계림(桂林) 또한 지나(支那) 영역에 살던 신라의 별명 계림(鷄林; 雞林) 과 관련이 있다.[71] 십육국시대 하북 요동 지역에서 활거 하던 모용수 (慕容垂; 326~396) 가 모용진(慕容鎮)을 계림왕(桂林王)에 봉했었다.[72]
의의(宜矣)란 뜻: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신라가 성장 했다. 왕이란 칭호를 쓰기 전, 내물 마립간 (奈勿 麻立干, 재위: 356년 ~ 402년) 때 부터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재위 417년 ~ 458년) 을 거쳐 지증왕(智證王, 437?~514년)이 어린 시절인 478년 경에 수도를 옮겼다. 삼국사기에는 그당시 국호를 신라고 바꾸고 의의 (宜矣)란 글자를 썼다. 고구려 해명왕자가 의의(宜矣)라고 했다. 건의 또는 상의란 뜻으로 썼다.[73] 의의란 글자는 전국시대 문헌에 실렸지만 풀이가 혼미 하다.
강희자전에는 제사왈의(祭社曰宜)라, 즉 토신에 제사지내던 곳, 서울을 뜻한 글다다. 한서지리지 내용을 인용하여 [마땅할 의(宜)와거동 의 (儀)는 같은 뜻이다. 옛적 백월 땅 (古百越地)에 속했던 월주(粵州)를 의주 (改宜州) 로 바꾸었다] 고 했다. 그곳은 백익의 후손들이 살던 풍요로운 곳이라 백익 능의백물 (伯益 能儀百物) 이라 했다. 책부원구에는 의의를 건의(健矣)로 남사에는 건모라(健牟羅)바꾸었다. 신라가 남쪽 지나(支那) 땅에 있었던 사실을 은밀하게 기록 했다.[74]
법흥왕의 이름자에 사연이 있다. 한반도에 정착한 신라에 [불교가 왕성 했다 (法興王立) 하여 국가의 기반(諱原宗)을 닦았다]는 뜻이 있다. 신라가 가라연맹을 합병하고 영토를 확장하던 시절에 중원 세력이 처음 한반도 남해안을 다녀가서 남긴 수서 에는 백제와 신라의 지역이 얽히고 설켜 지역도를 그릴수 없다고 했다.[75]
남조 역사서에 부여 (夫餘)씨 왜오왕이 나타 났다. 그들이 동남아 해안을 따라 천축국에 까지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왕 (長壽王, 394년 ~ 491년)이 온조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 을 공격 했다. 강서고분이 발굴된 지역에 있던, 대동강 하구 욱리하(郁里河) 연안이다. 개로왕 (蓋鹵王)은 바다 건너 북위 와, 한반도에 이사 오고 있던, 신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구원병이 도착 하기 전 475년에 성은 함락 되였다.[76] 백제 한성이 점령 당한 이후 백제와 가라국 (加羅國)왕 하지의 사신이 남제에 갔다 479년에 돌아 왔다. 같은 책, 같은 해에, 같은 남제의 지도자가, “新羅·任那·加羅·秦韓” 등 6국 을 부여씨 왜오왕에게 통치 하라고 했다.[77] 가라국 (加羅國)이 같은 사건 479년 기록에 두번 나온다. 하지를 가각국 왕으로 봉했다. 왜왕의 통치 영역이 될수 없다. 구지봉이 있는 김해가 하지 (國王荷知)의 왕국이다. [78]
발해만에서 한해의 동서로 흐터졌다가 남방불교가 한반도에 이르는 시절 에 반도 남단 에서 다시 만나 신라 백제 가야의 수도 이전이 모호 하다.
4.절: 신라의 골품제도: 김씨 왕으로는 미추이사금(味鄒泥師今,재위: 261년 ~ 284년)이 처음이다. 그가 김알지의 6대손이라 한다. 김가의 수도라 하여 금성 (金城)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이를 14대 유례 이사금 (儒禮尼師今; 284년 ~ 298년) 14년에 정체불명의 이서국 죽옆군 하는 이름과 관련 시켰다. 그때 김씨 왕조가 시작 되고 갈문왕 (葛文王)이란 칭호가 나타났다. 또한 남만주 땅에 월성(月城) 이라는 수도가 나타났다. 백제에고 월성이 있었다.[79] 월성이란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지존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동남아 해상로가 열려 강남 신라 땅과 교류가 활발 했다. 하여 신라 왕실에 급격한 변화가 왔다. 처음으로 여왕이 나오고 골품제가 나타났다. 양쪽 부모가 모두 왕의 자손일 경우에 성골(聖骨)이라 했다. 첫 여왕 선덕여왕 (善德女王 德曼, ? ~ 647년)이 성골이다. 진평왕(真平王)과 마야 부인(摩耶夫人)이 선덕왕 덕만의 부모다. 마야부인(摩耶夫人)의 혈통은 불명이나, 석가모니의 어머니가 마야 부인이다. 그녀가 지나 라고 부르던 남쪽에서 뱃길로 올라온 방이 (旁㐌)의 후손 김가다.[80] 방이설화가 전해온다. 사다함 또한 진골이 었다. 가락국의 수로(首露)왕이 김해김씨의 시조라 한다. 김유신 (金庾信)을 중시조 (中始祖)로 하여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마야부인과 사다함(斯多含)은 선조 이름을 방이 (旁㐌)라했던 대륙 신라의 김가다. 그당시에 세웠다는 삼랑사 (三郞寺)는 장소가 불명 하다. 여진족(金朝)이 만든 해편 (海篇)에는 삼랑을 산동 반도에 있던 비석 이름 (𥓓名) 이라 했다. 남쪽 사람들은 석삼 자를 털모 자와 비슷하게 “蠻人呼參爲𣬛” 기록 했다. 고조선이래 전해 오던 삼랑신 (𣬛郞神), 즉 환웅과 같이 내려운 풍백 우사 운사 (風伯雨師雲師) 세 지도자를 모신 사원이 삼랑사다.[81] 당에 유학 했던 최치원 (崔致遠)이 남긴 난랑비서 (鸞郞碑序)에 지도층의 언행 지침이 되는 풍류도 (風流徒)의 내용이 실렸다.
5 절: 백제 왕제천급 오제지신 (王祭天及 五帝之神): 중국문헌을 살펴 보면 신라와 백제 가야는 한해 동서 연안에 있었다. 동이 강국이었던 백제 는 서해 (黃海, 翰海) 의 동서 두 곳에 수도를 두고 해양권을 장악 했었다. 백제의 부용국 이었던 가야의 수도는 우륵이 남긴 상하 가라도 (加羅都) 라는 기록을 보아 한반도 남쪽 두곳에 있었다. 개로왕이 수도 한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 있던 부여씨가 왜 (倭)에 총통(大率檢察) 으로 보냈던 개로왕의 동생이 돌아와 혼란에 빠진 백제 지도층을 수습하는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82] 개로왕의 조카가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 (東城王,? ~ 501년) 이다. 그가 한해의 해상권을 다시 회복 했다.
백제는 전성기에22 곳 담노 (擔魯)에 부여씨의 자손을 봉했다. 담로를 때로는 수도로 사용 했다. 중원을 다시 통합한 수서에는 백제 왕제천급 오제지신 (王祭天及 五帝之神)이라 했다. 삼국사기 또한 책부원귀(冊府元龜) 를 인용하여 같은 문구를 남겼다. 삼국에서 백제왕 만이 전통적인 중원 황제의 역활을 했다는 표현이다. 백제는 (한해) 동서에 수도를 두었다. 이를 두고, 삼국유사에 “백제 전성기 에는 아침 저녁 쉴새 없이 세 봉우리 를 날아 다녀 비상왕래(飛相往來)라”고 표현 했다.[83] 강남 한반도 일본 열도 세 곳에 백제의 성도(盛都) 가 있었다는 뜻이다. 광운에 부여(夫餘)씨의 발원지라 한 곳이 거발성 (居拔城) 이다.[84] 발해 고(高) 씨가 북쪽 업 (鄴) 에서 550년 에 북제 (北齊) 를 세웠다. 백제는 동성왕 무녕왕 성왕 때에 한해의 동서 두 곳에 수도를 두고 남방 에서 들어온 불교를 받아 백제의 전성기를 이루 었다.[85] 그 시절에 일본는 [새가 난다는 뜻의 비조 시대 (飛鳥時代)가 나라 (奈良, 那羅)에 수도]를 두고 나타났다. 불교 서적 에는 한국어의 음과 뜻을 혼동하여 기록한 명사 또는 형용사가 많이 실렸다.
III 장:원시불교의 발생과 전래:
현장의 서역기에는 옛적에 전해오던 명사를 당나라 초기 어음으로 설명 했다.[86] 그후에 나타난 각종 기록에 쓰인 글자를 종합하여 상식적인 판단을 하면 원시불교의 발생지와 전래를 알수있다.
1 절: 글자 속에 사실이 있다:
저자 불명의 노자서승경(老子西昇經)이 돈황(敦煌)에서 나타났다. 서승 이란 글자는 노자가 도덕경을 갖고 서쪽으로 올라 갔다는 뜻이다. 초나라 역사서 도올(檮杌)과 같은 뜻으로 노자는 차마고도를 따라 올라 갔다.
1 항: 불교가 나타난 곳:장건(張騫)이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대나무와 촉포(竹杖, 蜀布)를 보았다. [87] 부도(浮屠)란 떠돌리 백정이란 뜻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 합당하지 못한 글자다. 단군왕검을 잃은 사람들을 묘사한 시문이 시경 조풍 부유(蜉蝣)다. 이와 관계가 있는 글자다.
석가모니칭호의 꼬깔 모(牟)자는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의 상형자”다. 그가 유목민의 후예란 뜻이 있다. 출생지가 람비니원(嵐毘尼園), 부친이 설두야 (屑頭耶), 생모를 마야(摩耶, maya)라고 한다.[88] 산들 바람 이 부는 골짜기에 살던 빛을 숭상하는 유목민의 외손(外孫) 이다.[89] 모계(婆) 언어가 팔리(婆羅門僧,佛陀波利Pali language)어의 어원이다.
부다가 탄생한 지역에 흐르는 여울을 유하(油河)라 했다. 갠지스강 (Ganges River)의 한 지류다. 그 물가에서 애기를 목욕 시켰다. 즉 기독교에서 이르는 세례 성사(洗禮聖事, baptism) 의 기원 이다. 같은 어음이 하백의 딸 유화 (柳花) 로 북부여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 대왕 비문에 나타난다.[90] 출처를 고기운 (古記云), 또는 단군기(壇君記云)라고 했다. 홍산 문화 권에 전해오던 예기가 불교 발생지에 전해졌다는 근거다.
2 항:가라(加羅)의 어원: 여러글자로 표기된 가라는 향나무를 태워고 기도를 드리던 타가라 (Tagara;多伽羅) 의 사음자다.[91] 석가모니가 생불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난 기특(奇特)한 곳, 즉 성스러운 곳을 승가라(僧伽羅) 라 했다.[92] 사자(獅子, 嗣子)상을 세워 놓은 섬나라 옛 사자국 (古之師子國) 을 스님이 다스려 승가라국 이라 했다. 남방불교가 발해만 연안에 이르러 스님에게 맏겨 다스리던 나라가 임나가라(任那加羅)다.[93] 후한 위진시대에 걸쳐 발해만 서남쪽에 임성(任城)이 있었다. 도덕경의 무위(無爲) 사상을 지키는 나라라 무위국 (無憂國)이라고도 했다. 현장이 다녀온 여러 곳에 가라국이 있었다. 이를 무우왕(無憂王)이 다스렸다. 성역을 다루는 불교 스님(僧伽羅) 에게 맏겼다는 뜻의 임나(任那)와 같다.
3 항:인도(印度)의 어원: 황로 사상이 차마고도를 통해 인도 동북쪽 산악 지대 전래 되었다. 서로를 존경하여 현지인 (婆羅門 Brahmanas)들은 운남성 에서 온 사람들이 살던 곳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여 수지(隨地)라 하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시/Sa (斯)라고 했다. 시경과 수경주에 많이 나오는 고조선 후예를 뜻한 글자다. 고구려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수산곡 (隨山谷)이라고 했다. 장승(totem pole)을 새워 놓은 지역 이란 뜻이다.[94] 수지에 처음으로 솔도파 (窣堵波, 率都婆; Stupa)가 설치 되었다.[95] 지도자 讙兜、驩兜가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도솔 (兜率; 彌勒天) 이란 뜻이다.[96]
수지 사람들은 새로 정착한 곳을 천부(天符)인 (印)이 도착 한 (度; reach to. deliver to) 곳이라 좋은 뜻으로 인도라 했다. 선비족 우문씨의 우문 (宇文) 이란 뜻은 위(하늘로) 부터, 글자(天符印) 을 받았다는 뜻이다. 선비족 탁발부는 아사달에 살던 집안 이란 뜻이다.[97] 그 곳에서 발해만 으로 내려와 정착 했던 신라 여섯 마을 [xx宅] 이라 했다. 당나라 현장이 인도를 방문한 때에도 천부경이 아사달에 있었다.
인도 지도자 에게는 수지 사람들이 믿던 종교가 세로웠다 하여 무위지교 미신 (無為之教彌新) 이라 했다. 무위(無為) 개념이 인도의 지도자에게는 새로웠다는 뜻이다. 도가 경전에는 모두 무위지익 (無為之益)이라 한다.[98] 사마상여는 천자가 다스리는 지역을 대표한 가상 인물을 무시공 (無是公) 이라 했다. 무시인 명 천자지의 (無是人也, 明天子之義) 라 했다. 한서에는 현명한 천자가 죽었다 하여 망시공 (亡是公) 이라 했다. [99] 무위지교란 [단군왕검의 후손 왕공대인 (王公大人) 의 가르침이란 뜻]이다.[100]
4 항: 대루탄경(大樓炭經): 숱으로 낙서를 한 큰 사원에 얽힌 사연을 모집한 책이란 뜻이다. 아사달에 전해 오던 태고적 역사와 어음이 대루탄경 에 실려 있다. 여러 변역본이 생겼다. 내용에는 환인 (桓因), 전투, 우주관이 실렸다. 아사달에서 싸운던 장면에 종교관을 더해 은유적 으로 기록 했다. 그에 실린 석제환인(釋提桓因)이란 문구는 제석 (帝釋)이 환인을 만나 지존 (至尊)의 자리를 놓고 단판을 해보자는 뜻이 있다. 이를 일연 스님은 환인 위제석 (桓因謂帝釋)이라, 즉 동격으로 풀이 한다.
급총죽간 문헌에 왕중왕이 된 [백익이 개를 제후 (乾啟)로 임명 하니, 개가 백익을 죽였다] 는 사실을 양서의 저자가 인용 했다.[101] 후경 (侯景: 503-552년)이 거발성을 점령하고,북제가 나탄난 전환기를 석이예란하 (昔夷羿亂夏), 견융액주 (犬戎厄周) 라, 즉 [옛적에 왕검 조선의 주민 들이 우왕의 아들 개가 세운 하나라와 싸웠고, 서주를 괴롭 혔다]는 사실에 비유 했다. 백익 살해 사건은 산해경을 비롯한 선진 문현 여러 곳에 실렸다.[102]
5 항: 불교 문양(佛教Logo)에는 삼태극 문양이 있다: 천부경을 받은 고조선 사람들이 연산역(連山易)을 남겼다. [103] 단군설화에 나오는 세 보좌관 “風伯 雨師 雲師”이 삼랑신 (三郞神; 𣬛郞神)이다. 셋이란 뜻을 삼“三 參”로 기록 했다. 삼을 털모자와 비슷한 글자“參爲𣬛”라 했다. 이에 약초란 뜻에 풀의 뜻을 붙여 산삼(山蔘)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밝은 햇살이 비춘 세 산봉우리가 있던 발해(勃海)에서 산삼이 났다. 숨겨 놓았던 발조선 땅에 장도 (銀粧刀)를 지닌 세 유목민 남자 삼랑(𣬛郞)이 살았다는 뜻이다. 삼극(三極) 으로 표기 되고, 삼태극 문양의 근간이 되었다.[104]
도가에서 지존으로 치는 북극자미궁 (北極紫微宮)에서 자금성 (紫禁城) 이란 이름 나왔다. 여걸도 나타났다. 무녀와 견우가 만나는 날 이란 음력 칠월 칠석 무렵에 피는 나팔꽃 (morning glory)을 견우화 (牽牛花)라 한다. 천부경 (天符經) 에 실린 무시일석 (無始一析)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무우왕 無憂王 이란 칭호가 나타났다. 온천지 사방을 밝히는 만 (卍)자 와 태극 문양을 원시 불교에서 인용해 갔다.[105] 도교 에서 말하는 무위 (無爲) 가 와전되여 무우 또는 아육 (唐言無憂 舊曰阿育; No one above) 이란 낱말이 나타났다. 아육 (阿育) 이란 내가 위 (I am the highest, 唯我獨尊, 至尊, 無爲)란 옛적 어음이다.[106] 삼국유사 여러 곳에 나온다.
6 항: 한국 고유의 칠성사상: 삼국유사에 풍백(風伯)우사(雨師) 운사(雲師) 와 같이 3000명을 거느리고 내려 왔다는 기록에서 나타났다. 산해경에 우공운우 (禹攻雲雨)라는 문구가 있다. 우가 상유를 죽이고, 운사 우사를 공격했다. 픙(風) 우(雨) 운(雲) 자와 짙은 구름을 뜻한 우뢰 뢰(雷; 靁雲)자 가 있다.[107] 세 동반자와 단군을 살해한 세력과의 오랜 싸움을 묘사한 기록 이 치우와 황제가 싸웠다는 탁록전 설명에 있다. 백익을 수호하다 죽어 모두 별이 되었다. 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삼태성 (三台星), 북두칠성과 견우직녀 하는 전설과 그에 연유된 어음이 한국어에 [북두고리 같은 손. 북두 갈구리] 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논형전허(論衡雷虛)편에는 백익 살해 사건이 은미하게 기록 되었다. [108] <하왕조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살인 사건이 일어 났다. 이를 세간에는; 세워 놓은 나무(장승)를 자른 사람이 하늘에 용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가 살인자 > 라고 했다. 감허(感虛)편에는 다제 다능한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이 생겼다. [109] 재의(祭意)편에는 일월성진 세 별이 되어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신이 되었다고 했다. [110] 해를 설명한다는 뜻의 설일(說日)편에는 우사(雨師) 를 [霣 떨어질 운, 우뢰 곤]으로 떠러진 별“星霣如雨”이라고 설명 했다. [111]
우사(雨師)가 견우성 (牽牛)이 되어, 북극성 (해, 日, sun.단군왕검 백익을 뜻한)을 옆에서 보좌 하는 칠성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이를 농기구 가대기 또는 무논을 고루는 써레(plough) 또는 국자(Dipper) 라 한다. 백익이 군사훈련 목적으로 사냥을 권장하여 납형절이 나타나고, 바둑을 창안 하여 실내에서는 작전 계획을 익혔다. [112] 칠성 신앙에는 우물 정(井) 자가 같이 붙어 나온다. 첫새벽에 우물에서 물을 떠다 장독대에 놓았다.[113] 백익 이기씨 (伊耆氏)가 북 (鼓,Drum) 을 고안 했다.[114] 백익이 처음으로 우물을 파서 마을이 생겼다. 가공인물 황제가 우물을 팠다 하고, 그를 실존 인물 하나라의 시조로 하우(禹)씨로 바꾸어 우물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불교경전에는 우(禹)를 소 (牛) 사자(嗣子, 獅子)로 음차 하여 기록 했다.
홍산문화권의 종주국인 부여에서는 출전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이 붙었나 버러졌나(牛觀蹄)에 따라 결정 했다. 소는 우(禹)의 세력을 상징 했다. 시월 상달 개천절을 영고(迎鼓) 라 했다.[115] 이는 북을 만든 사람을 맞아 드리는 행사란 뜻이다. 옛부터 큰 행사에는 북을 치는 풍속이 나타났다. 이아의 하늘 설명과 태평어람에 별 (星中) 을 설명한 내용에는 “河鼓謂之牽牛” 라 했다. [116] 시경 대동에 견우란 글자가 있다. 태평어람에는 모시정의 에서 풀이한 “河鼓 謂之牽牛也” 문구를 되풀이 했다. 이 문구의 풀이가 구구 하다. 남쪽 형초 사람들은 하고를 큰 북 담고(檐鼓)라 견우성(牽牛星)을 뜻했다.[117] 문헌을 종합해 보면 [河伯을 위해 북을 치는 사람이 견우]다.
우(禹)가 방풍씨(殺防風氏)를 죽였다는 예기는 선진문헌 여러 곳에 실렸다.[118] 산해경에는 우가 치수 사업의 실패를 백익의 보좌관의 잘못으로 몰아 상유(相柳)를 죽이고, 분수연안의 공공을 공격 (禹攻共工)하고, 또한 운우 (攻雲雨)를 공격했다. [119] 이 때에 우(禹)가 폭력을 가하여 우격(禹擊) 다짐이란 낱말이 생겼고, 이 사람들이 풍운아 (風雲兒)의 어원이다.
위험(危險)이란 글자는 왕검이 살던 곳 , 즉 왕검성(王儉城)을 올라 가려고 온갗 노력을 다 했던 결과에서 나온 문구다. 이 견우성 별 자리 (Small Dipper, Plough) 또한 주객을 바꾸어 쓸어 낸다는 쓰래박, 평편하게 땅을 고른다는 뜻에서 소 두마리가 끄는 농장기 “쌍 쓰레”란 말이 생겼다. 옛적에 소 등에 짐을 실을때 당기는 끈을 북두끈, 북두 고리, 북두고리 같은 험한 손 이란 표현이 있다. 그 들을 추모하여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으로 전해 오고 있다.[120] 쟁인에게 의사 전달이 잘못 되여 일곱개 (별) 빛이란 뜻이 가지로 전해 져서 칠지도 (七支刀)가 나타났다.
7 항: 수미산(須彌)을 묘고산 (妙高山)이라 했다: 삼묘(三苗)를 삼위(三峗) 에 몰아내고 공공(共工)을 유도(幽都)로 유배 보냈던 높은 항산(恒山, 常山, 桓山, 嵩山)을 뜻한 글자다. 상나라 말기에 기자 보다 먼저 살았던 상용 (商容, 相容) 이 기록에 나타난 첫 노자(老子) 다.[121] 동서남북 네곳을 통치하는 수미 (須彌)를 보호하는 자를 사천왕 (四天王)을 금은동철 륜왕 (輪王) 이라 이름했다.[122] 금륜왕 (金輪王) 이 사방 (四方) 을 다스린다.[123]. 인도 동북 쪽 차를 많이 생산 하는 지역(荼城)에 전륜성왕 (輪王之苑囿)이 기거 했다.[124] 불교국 백제와 신라에서도 륜왕 (輪王)이란 이름들을 썼다.
하(夏) 나라 영역에 살던 사람들이 도덕경을 옮겨 우(禹,昔禹)를 숭상 했다.[125] 돌기둥 또는 나무 위에 올려 사자(獅子, lion) 상을 놓았. 산해경 숙신 (肅慎) 씨 마을에 나타난 웅상(樹名曰雄常, Totem pole)의 변형이다.
8 항: 아사달을 수미산(須彌山) 또는 비구(比丘)라 했다. 최고의 지도자를 곤륜 (昆侖) 이라 했다. 제일 높은 제사장이 되살아 나서 사는 높은 곳을 곤륜산 (崑崙山) 수미산 (須彌山), 또는 소미로산(蘇迷盧山)이라 했다.[126] 그 찾을 수가 없다. 미로 (迷路, mirror, maze)의 어원이 되었다. 요순시절에 삼묘 환두 (驩兜) 를 북쪽 분수연안 공공국에 있는 항산에 [귀양을 보냈던 무리가 되살아 나타났다]는 전설을 설명 했다. 되살아 났다는 뜻이 회소곡 (會蘇曲) 이다. 신라 초기 육부 촌장 (六姓始) 이 살던 시절, 유리이사금 당시 도솔가 (兜率歌)가 나타났다.[127]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 (烏忌日)이라고 한다.[128] 삼족오와 관련된 표현이다. 도교에서는 상원(上元) 이라고 한다. 옛적에 월력(月曆)정월 대보름 다음날 아침이 천축국 새해 첫날이 었다.[129] 현재의 스리랑카는 사자국(師子; 嗣子 獅子國 Lion) 국 또는 승가라국 (僧伽羅國)이라 했다. 나라이름은 세 선인 즉 삼랑 (𣬛郞, 三郞) 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들은오랫동안 음력을 썼다.
아사달(阿斯達, Asadal)의 음과 뜻을 이를 이리저리 바꾸어 적은 글자가 비구 (比丘)다. 아사달에 큰 사원이 있어 그 건물에 수도자가 많이 있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비구니(比丘尼) 라 했다. 아사달이 점령 당한 상황을 제석이 싸우던 곳(常與帝釋戰鬥之神)이라 했다. 인도 설화에는 아수라 (Asura) 라는 악한 귀신 무리로 나타난다. 아수라장 (阿修羅場) 이란 용어가 여기서 생겼다.[130]도사유적지(陶寺遺址) 로 발표된 곳이 아사달 이다.[131] 그곳에서 싸우던 용사를 아라한(阿羅漢), 또는 나한 (羅漢) 이라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최 측근 이었다. 사살 되기도 했다. 하여 죽음시 시라 (尸羅)란 글자가 불교 전래 경로 여러곳에 나타난다. 신라의 어원이다. 같은 음의 시라성(斯羅城)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
9 항: 원시불교의 발생지에 고조선 후예가 정착 했다: 당태종 시절에 현장이 천축국을 방문하고 [어린 왕자가 노자로 부터 배워 믿음이 바뀌었다는 구마라 나다 (拘摩羅邏多 Kumara; 童子王)왕을 만나 대화를 했다.[132] 인도 동북쪽에 지나 복지국 (至那 僕底國)을 한봉질자소 (漢封質子所) 라 했다. 관노 (隸;slave, servant) 였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인도기(印度記)에 이르기를; 한왕자 (漢王子) 가 그곳에 정착 하여 동쪽땅을 몹시 그리워 했다. 고향에서 봉숭와 자두를 갖고 가서 심었다. 복숭아를 지나이(至那爾), 오얏을 지나도불 달라 (那羅闍弗呾邏) 라 한다. 당시 인도에서는 현장 (玄奘)이 살던 곳을 진단 (震旦) 이라 부르던 동쪽 큰 나라 (東土), 즉 진나라 (大秦)를 마하지나국 (摩訶至那國) 이라고 했다. 나(那)에 이른 다는 뜻의 지나(至那)란 글자를 명사 또는 형용사로 사용 하여 동쪽에서 온 사람들, 즉 동이란 뜻으로 썼다.
동이족 숙신씨 마을에는 환웅을 뜻한 형상 (雄常,하루방, totem pole) 을 세웠다. 이를 복상수(服常樹; 옷입은 나무) 또는 사랑간수 (伺琅玕樹) 라고 했다.[133] 융우가 죽인(禹殺) 공공국 상유 (相柳, 相繇)를 허신(許愼)이 상형 (相 象形) 자를 설명 하면서 수체 힐굴 (隨體詰詘) 이라 했다.[134] 서낭신이 길한 예기 를 하려는 모양과 같이 그럴듯 하게 그려 놓은 글자가 “日. 月” 이란 상형자 라고 했다.[135] 진수가 남긴 고구려 전에는 [웅상을 세워 놓고 산간지역에서 맑은 여울 물을 마시며 살았다]는 문구가 있다. 시경에 “무종궤수無縱詭隨” 란 문구가 있다. 환웅상을 숭배 하던 고조선 신앙과 관계가 깊은 문구다.[136]
10 항: 범서(梵書)란 글자의 기원: 허신은 [범(梵)자가 서역 불가에서 쓰는 글자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했다.[137] 당 현종이 남쪽나라를 읊은 시 제목을 제범서 (題梵書)라 했다. 맹자는 시가 죽고 역사서가 세 곳에서 나왔다고 했다. 진지승(晉之乘), 노지 춘추 (魯之春秋), 초지도올 (楚之檮杌) 이라고 했다. [138] 산서성의 실권자였던 범선자(范宣子)가 그를 찾아온 손님에게 <산서성 사람들은 세록(世祿, 가계의 혈통을 기록한 책자) 를 갖고 있다>고 했다. 고조선 사람들의 기록이 중국역사서의 기원이다.
범(范)선자의 선조들이 지켜오던 가치관을 히말라아 산맥 수지에 전하여 글로 남겼다. 범서(Sanskrit)는 산서성과 관계가 깊다는 뜻이 글자에 있다. 해상로를 통해 불교가 전파 되었다. 안전을 기원하는 선도성모(仙桃聖母) 상을 모시고 돛을 달아 바람을 타고 멀리가는 배를 범선 (帆船)이라 했다.
맹자(孟子; ~기원전 289년?)의 이루하 (離婁下) 편명은 산서성에 있던 부루국 (扶婁國) 사람들이 떠러져 내려 갔다는 뜻이다. 또한 도올 (檮杌) 이란, 도 즉 (도덕경)을 갖고 (서)쪽으로 올라 갔다는 옛 한국어 사음자다. 태평광기 에는 “루사덕婁師德. 재상루사 宰相婁師” 문구가 많이 있다. 산서성에서 덕있는 단군(宰相)의 한 지류가 남쪽으로 내려가 북송시대 문헌이 부루국인(扶婁國人) 이 나타났다. 이를 요술쟁이(幻術)에 비유 했다. 시대적으로는 상나라 부열에 접 붙였다. [139]
북쪽으로 올라가 북부여를 세우고 왕자를 해부루 (解扶婁)라 했다. 여러 글자로 적은 비류수 (沸流水), 비류왕 (比流王)이란 글자는 부루(扶婁)의 어음 변화에서 온 글자다. 맹자 이루 (離婁), 즉 부루가 떠난 사연의 상하편에는 고조선의 발생부터 전국시대 까지의 사연 이 실려 있다. 전국시대 제후국 연(燕)의 권력을 잡았던 자지(子之, ? – 기원전 314)에 관한 기록 또한 혼미하다.[140]
연소왕(燕昭王; ?-279 BC) 시대에 도술인 시라 (尸羅)가 불상 (浮圖)을 수래에 싣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141] 그 때에 해하 수계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지역에 불교 문화가 도착 했다.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당시 이름에 불교 경전에 많이 보인다.
2 절: 황로 사상이 원시불교의 기원:
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가서 호(胡), 즉 천축국 지도자 에게 도덕경을 가르쳤다는 기록을 동진의 도안(道安: 312-385) 이 인용 했다. 언어를 서로 이해 할수 있었고, 스님들이 도덕경 두편을 사용 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 했다.[142] 무위(無爲) 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마우리아 제국 (Maurya Empire:기원전 320년-기원전 185년) 왕의 호칭으로 사용 하고, 불교를 인도 전역에 퍼뜨리고 사자상 (lion statue, 桓雄像,嗣子)을 세웠다.
고조선 삼묘의 후예가 묘족 (苗族)이다. 묘족은 고양씨의 후손 으로 산서성에서 천축국에 갔다.[143] 그곳 부라만 도인( 婆羅門道人)이 새로운 교리를 배웠다고 대루탄경에 실려 있다.[144] 소는 하우 씨 후손을 뜻하고, 피해 갔던 백익의 후손을 사슴 개 닭으로 기록 했다.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 하는 (Holy cow) 풍속이 나타났다. 삼묘의 묘자에서 고양이 묘(貓)자를 만들어 불교 사원에 고양이 상을 세웠다. 체계가 잡힌 새로운 종교가 운남성을 따라 돌아와에 도교에 큰 변화를 이르켜 전국시대 부터 위진 시대에 여러 도학자가 나타 났다. 도학자 갈홍 (葛洪)이 한 본보기다.[145] 도가의 초기 경전이 역이다. 초시역림, 연산역(連山易)등 몇몇 역경이 나타났다.[146] 주역계사(繫辭)에 미륜천지지도 (彌綸天地之道)란 문구가 있다. 지도자 [미彌의 륜( 綸 倫)이 자연의 법칙, 우주관]을 설명 했다.
3 절: 원시불교의 중원 전레:
대루탄경에는 도솔(兜率), 미륵 (彌勒),비류 (比流) 유리(琉璃), 수미산 (須彌), 시라(迦羅 尸羅)등등, 한국 상고사에 나오는 이름이 실렸다.
장건(張騫)이 한무제 때에 서역을 다녀 왔다. 무제 이후 정치 사회적 혼란에 휘말려 왕망이 신조를 세웠다. 이러한 시대에 토속신앙을 비롯한 각종 신앙이 번창 했다. 그때 부터 신독(身毒)국을 천축국(天竺國)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황노 부도를 모시는 사당(黃老 浮屠之祠)을 짖고, 부도 (浮圖)란 글자도 사용했다.[147] 산동성 사람으로 강남에 정착 했던 사람이 남긴 모자 (牟子) 에는 광서-광동성에는 불교가 성했다고 했다.[148] 대당 서역기와 송고승전에 [지나(支那) 라고 알려진 광부에 불경을 전했다] 는 기록이 있다.[149] 십육국춘추에도 실렸다.[150] 원시불교가 들어온 차마고도를 통한 교류는 중원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현장의 서역기 또한 마등 (摩騰) 이 곤명도가 막혀 (昆明道閉) 통하지 못하고 먼길을 돌아 낙양에 도착해서 불경을 석실에 보관 했다고 한다.[151] 동진(東晉:317 ~ 420)시절에 해상로 를 따라 남방불교가 중국 동해안에 이르렀다. 월지국에서 달을 숭상 했다.
발해만 연안에 있던 백제 설라 휴인 (百濟及薛羅 休忍)을 남방불교 영향을 받아 설을 신으로, 가라 (加羅)를 스님에게 통치권을 일임한 나라 이름으로 바뀌어 광개토대왕비에 “新羅, 任那加羅”로 나타났다. 여러 곳에 있던 신라의 수도 월성 (月城)은 지존 (至尊)의 거처란 뜻이 있다.
4절: 미륵 보살(彌勒菩薩)의 유래:
신라가 발해만 연안에 나탄 6부촌장에 성씨를 주던 시절에 처음으로 개천절을 기리는 도솔가 (兜率歌)가 나타났다. 유리이사금 (儒理尼師) 5년 왕망의 신조를 대치한 유성공 시절이다. [152] 동진(東晉: 317-420) 시대에 석도안이 고조선 영역 태행산 (太行恒山 創立寺塔)에 사탑을 짖고 수도승이 되었다. 그가 고조선 토속신앙에 원시불교를 접붙인 신흥 종교가 미륵 신앙 (彌勒信仰) 이다.[153] 서진 회황제 (西晉 懷皇帝: 284년 ~ 313년)가 그를 하늘 나라 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도솔 (兜率)의 지도자라 하여 미천 석도안 (彌天釋 道安)이라 했다. 고조선의 언어 풍속이 불경에 반영 되여 미륵 도솔(彌勒, 兜率)이란 이름이 초기 불교에 나타났다. 자전에는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내려 왔다는 도솔천(兜率天) 에서 났다고 한다.[154] 환웅 (桓雄)의 가름침이 미륵 (彌勒)신앙 으로 한국에 나타났다.
동진의 법헌 (法顯;337-418)이 남긴 불국기(佛國記) 에는 석가모니 탄생을 [동주 평왕(周平王;기원전 781-720) 때에 노인들이 미륵보살상 (彌勒菩薩像)을 세웠다. 미륵대사가 석가의 뒤를 이어 받지는 않았다 (非夫彌勒大士 繼軌釋迦)고] 했다.[155] 석가모니 이전에 인도에 들어가 도를 가르쳤다는 노자들이 환웅상을 갖고 가서 불교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남방 불교가 해상로를 통해 들어 왔다. 하여 사자국 (古之師子國) 이라 부르던 섬나라 세일 론“Ceylon. Sri-Lanka” 남천축국 에 미륵이 나타났다.[156] 불교 발생지 현지인이 만든 대루탄경 (大婁炭經) 을 [옛적에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던 육서(六書) 방법] 을 모두 인용하여 한어(漢語)로 번역 했다.[157]
IV 삼한 사람들이 해상로를 개발
양자 방언과 설문해자에는 선(船)자 뿐, 범(帆)자는 없다. 불가를 뜻한 석명(釋名)에 처음 실렸다. 범(帆; 巾,凡. 䬚,𩗋)자는 알 환에 천을 달아 바람에 밀려가는 배란 뜻이다. 큰 배(船)에 포를 달았다는 기록이 삼국지 동이전에 염사치가 큰 배를 타고 한낭랑(漢樂浪)에 갔다.[158]
1 절: 범선(帆船)의 유래: 범(帆)이라 읽는 글자를 환(fan) 이라고 읽었다. 둥근 밝은 물체의 상형자 로 [해 달 새알] 등을 암시했던 글자다. 범선의 범자는 고조선 영역에서 유래 했다. 오환(烏桓 烏丸)의 성산인 항산, 즉 아사달과 관련된 글자다.[159] 그 지역에 숙신씨가 웅상을 세우고 살았다.[160]
서낭신(隨體 隨神)에 매달은 천 조각이 바람에 날리는 형상을 뜻한 글자가 돛 범(帆)자다. 범선으로 동남아 해안을 돌아 남방불교가 강남에 들어 왔다. 훈고학 (訓詁學)이라던 분야가 몇차례 번역이 바뀌고 여러 어음을 뒤섞어 기록한 불경을 풀이하기 에는 뜻이 불충분 했다. 스님이 배를 타고 먼 이역 땅으로 가는 장면이 불교 서화에 있다. 불교에 관한 일연 스님의 설명에는 선도 성모 수희 불사 (仙桃聖母隨喜佛事)란 문구 에서와 같이 수(隨)자가 여러 곳에 실렸다. 복숭아 나무를 심었던 마을에서 석가모니 어머니(慈氏母, 摩耶Māyā; Eum-Maya) 와 이모 (佛姨母)가 나서 선도성모라고 했다. 범선 (帆船) 위에는 안전한 항해를 인도 하는 성모상(慈氏母, 聖母 摩耶 Māyā; Eum-Maya, Goddess) 또는 사자상을 조각한 나침판을 설치 했다. 중세기 항해선박 (medieval voyager) 선두에도 나타났다.
왜왕이 다스렸다는 삼한의 후손들이 나침판을 개발하여 범선을 타고 중국 동남아 해안으로 진출 했다. 그후 부터 한반도 서남 지역에 있던 여러 부족 국가들이 앞에 형용사를 붙여 “xx 가야” 하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신라는 불교에 입적한 법흥왕이후 해상강국, 백제를 제압하고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 했다. 그때에 마야 부인, 풍월주, 화랑, 처룡이 나타났다.[161]
진서에는, 서진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라 백제(新羅, 百濟) 란 이름이, 동진 말기에 복건성 이남 지역에 나타났다. 서진말기 291년에 발성(拔城) 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 발기의 후손이 살던 곳을 발성 (拔城)이라 했다.[162]
2 절: 항해의 필수 요소 나침판:
위진시대부터 천진당산 일대에 살던 삼한의 후예들이 중국 동해안을 따라 멀리 동남아로 진출 했다. 삼국지에는 풍력과 방향계가 쓰였다는 흔적이 보인다.[163] 동진시대 부터는 동남아 해로를 통하여 남방불교가 남조에 들어 왔다. 송서에는 범선으로 二三萬里를 항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164]
문무왕 말기에 당나라 황제가 당승법안 (唐僧法安)을 보내 자석과 좋은 활 포궁(砲弩)만드는 방법을 구해오라 는 요구를 했다. 신라 에서는 배를 만드 는 부서를 만들고 (중원에 없는?) 좋은 활과 나침판을 사용 했다.
통전 지남차 (指南車) 편에 나침판의 유래를 설명했다.[165] 신빙성 있는 자새한 설명은 북위의 사관 최홍 (崔鴻, 478- 525)이 쓴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 실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의 제3대 황제 석호 (石虎:334년 – 349년)가 출처를 알수 없는 불교에 심취한 해비 (解飛: Xiè Fēi; fl. 334–349) 를 임용 했다.[166] 해비 (解飛; 解批, 解毗)는 고구려와 부여의 성씨다. 그는 다재 다능한 쟁인이었다. 그가 자석을 사용하여 남쪽 을 가리키는 목각을 수래 위에 설치 했다. 그 기술을 동진 시대에는 배에 붙여 지남주 (指南舟)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허수아비 사자상을 세우고 울릉도를 정벌 했다는 막힐 울(鬱,위, 우)자 또한 남방불교에서 나온 글자다. 사다함(斯多含)이 앞서 들어 갔다는 전단양 (栴檀梁)이 대당서역기에 전단울금(栴檀鬱金)으로 실려 있다.[167]
한해를 통치 하던 부여씨의 뒤를 이어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 ~ 846년) 가 나타났다. 그가 처형된 이후 부터 신라는 사양길에 들어 간다. 그러한 혼란기에 신라 사람들이 불교의 성역 으로 피란을 갔다고 본다. 고려 초기 에도 해상 교류가 왕성 했다. 서양에서는 이스람교가 번성했다. 불교 전래 해로를 따라 동남아지역으로 진출 했던 중동 문물이 한반도 들어 왔다.[168]
고려의 군부세력 삼별초(三別抄)가 원나라에 대항해 싸우다 최후로는 옛적 부터 잘 알려진 수로를 따라 환사씨가 다스리던 유구에 정착 했다. 곤륜인(昆侖人)을 통해 의사 소통이 가능 했던 곳이다.[169] 곤륜이란 남소의 표신(驃信, 驃國)과 같은 제사장을 뜻했다. 신구 당서를 보면 동남아 임파 부남(林邑 扶南) 광동지역에 나타났다.[170] 삼한의 후손들이 유구를 지나 다녔다. 유구의 수도를 파라(波羅)란 글자가 표신이 읋은 남소와 여러 불교 서적에 실렸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을 지나(支那)라고 하던 남쪽 오지(奧地) 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이 세력을 모으자 당이 두차례 걸쳐 정벌을 시도 했다 실폐 했다. 지상의 낙원 으로 알려진 남조를, 원나라 쿠빌라이가 정벌 했다. 백제 양호(梁浩)가 원 세조4년(1263년)에 사신으로 갔다.[171] 고려 에서도 사신을 보냈다. 남조에 살던 삼한 사람들은 원나라 통치를 피해 분산 되었다. 옛부터 알려진 차마고도를 따라 원시불교 발생지에 이르렀다. 허황옥의 선조가 내려온 길이다. 그 곳에서 불교 성직자 들의 환영을 받아 옛 한국어가 파리어 (婆尼Pali language)에 남아 있게 되었다 고 본다.
다른 한 부류는 매콩강을 따라 동남아 해안으로 내려와, 부여씨의 후손이 동남아 해안을 따라 천축국에 다니던 사람들과 만났다. 매콩강 해안에는 삼한의 혈통을 이어 받은 세 지류가 만나 방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3.절: 지나 (支那)의 어원: 현장(玄奘;602년 – 664년)의 서역기에 지나는 전왕 대진 (大秦)의 국호(至那者前王之國號) 라고 했던 표현을, 당 현종 (唐玄宗; 685년 – 762년)이 정벌하지 못한 남조 표신을 비하해서 읋은 시문 제법서(題梵書)에 가지 지자 지나 (支那)로 바꾼 글자가 China 의 어원이 되었다.[172] 현장은 지나 (至那) 를 형용사로 동쪽(東土)에서 온 사람들(斯, 東夷)이 정착한 인도 동북지역에 사용 했다. 당나라 사람이 편술한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김일제 후손의 한 지류가 강남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왕의 성씨를 김가 (金哥), 먼 선조를 방이(旁㐌), 수도를 의의 (宜矣) 라고 기록 했다. 기록에는 누애치는 예기와 코끼리가 나온다. 남쪽 지나라고 부르던 백월 (百越), 월주 (粵州)에 신라 수도가 있었다. [173] 원사 (元史)에 이르기를 복건성에 신라현 (新羅縣) 이 있었다.[174] 운남성에 있던 지나황제(支那皇帝) 가 다스리던 사람들이 원나라의 친입을 받아 매콩강을 따라 태국(泰國; Siam) 땅에 내려와 살았다. 시라 (尸羅 Sila) 와 음이 비슷 하다. 중국의 특산물로 명주견사 ( Silk)가 서양에 아려저 동남아 지나 (支那) 에 있던 작은 왕국 시라 (尸羅 Sila, 新羅) 가 Cina 의 어원이 되었다.
4 절:화랑의 어원: 패르샤 왕자가 이스람교 발생시기에 피란을 갔다. 그곳이 오늘의 태국이다. 그곳은 풍요롭고 코끼리가 있었다. 그곳에 폴투갈 사람들이 처음으로 도착 했다. 청나라 말기에 위원(魏源)은 이태리 선교사 가 만든 만국지도 내용을 인용하여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만들었다. 태국을 섬라 (暹羅)라고 했다.[175] 지나(支那)의 일부였던 씨암 (Sayam)으로 알려 졌던 태국(泰國)이다. 이곳이 꽃다운 실라 (Sila)공주 화랑 (花娘, 花郞, Farang)의 출원지다. 섬라 (暹羅)와 음이 비슷한 이름 [섭라(涉羅) 탐모라 (耽牟羅) 탐라(耽羅)]어음이 타이완(Formosa)과 제주도에 붙였다.
남조 역사서에는 신라 수도를 “x 모라 牟羅” 라고 적었다. 수서에 복건성 앞에 있는 대만을 “x모라 𨈭牟羅”란 글자로 적었다.[176] 섬의 크기가 남북이 천여리 (南北千餘里) 동서가 수백리,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밝힌 이섬을 제주도라고 잘못 인식 한다. 태국에 화랑의 모습 “Giant Farang Guard Statue”을 세웠다. 그와 비슷한 석상이 제주도 하루방이다.[177]
V 가락국 허황후 화랑 가야금
1 절: 가락국 허황후: 수로왕(首露王)이 허황후를 만난 곳이 오늘의 김해다. 그곳에 가락국 수로왕의 부인이 된 허씨의 시석이 있다.
가락국과 수로왕은 중앙 아시아에 이르렀던 원시 불교가 육로로 전래된 발해만에 나타났다. 가라연맹이 신라와 같이 한반도 남쪽에 정착한 이후에 들어온 남방에서 해상로를 따라 들어온 남방불교에 접붙여
허왕후의 선조는 불교 발생지구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옛 통상로를 통해 지나(支那)라고 알려진 운남성에서 이르렀다. 태평광기 에는 신라에 관한 예기가 많이 실렸다. 출처를 당나라 사람 단성식 (段成式) 의 유양잡조 (酉陽雜俎)라 했다. 당시 지나는 당나라 영역이 아니였다. 풍문에 들은 예기를 모아 기록 했다. 도깨비방망이 설화가실렸다. 키큰 사람이 사는 나라와 키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털보들이 사는 나라 (長鬚國), 코큰사람 (鼻長)이 사는 사이에 방이(旁㐌)를 시조로 하는 김씨(金哥)의 신라(新羅)가 있었다.[178] 코끼리와 누애를 치던 지나에 있었다. 객가 (客家) 라 하던 사람들이 남쪽에 많이 살았다. 허씨는 중국 동해안으로 나와 남방 항로를 따라 원화, 화랑, 풍월주가 나타 나던 시절에 경주에 이르렀다. 가락국 수로왕 비(駕洛國首露王 妃)문에 새겨진 보주(普州)는 보자군 (普慈郡) 과 같이 사천성 양자강 (長江) 수계에 있었다.[179]
가야 연맹체가 중국문헌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신라 임나 가라 (任那·加羅, 伽羅)란 글자만이 보인다. 진흥왕 23년 (537년) 에 사다함 (斯多含) 의 화랑도가 가야국 (加耶國) 을 정벌 했다.[180] 백제의 담로 (簷魯) 였던 구지하성 (久知下城) 이다.[181] 구지(龜旨)봉 동요가 구지하로 기록 되었다. 가락국(加羅國) 하지왕 (荷知王)이 남제(南齊, 479년 ~ 502년) 에 사신을 보냈던 곳이다.[182] 백제 무령왕(武寧王 斯麻,재위: 501-523 년) 이름이 사마다. 백제가 낙동강 하구 구지봉이 있는 김해시를 사용 하다 진흥왕에게 빼았겼다.[183] 그 때 부터 화랑을 모시게 되었다.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文宗,재위: 1046년 ~ 1083년) 때에 김해 지주사가 지었다.[184] 폐허가 되어 밭으로 쓰던 땅에 수로(水路)를 만들고 물을 넣어 신답평 (新畓坪) 이라 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지 않는 수로 (水路)란 글자가 삼국유사에 몇차례 실렸다.성덕왕(聖德王) 때에 강릉태수로 가던 사람의 부인을 수로부인 (水路夫人) 이라 했다. 물길 즉 해산로의 훈역 수로(水路)에서 수로왕(首露王)이라 했다. 한국에 없는 사자상을 실은 배로 유산국을 정벌 했다. 모두 음과 뜻을 이리저리 돌려 만든 글자다. 답(畓)자 가 설문해자에는 없다. 열하일기에 글자 설명이 있다.[185] 가락국이 있던 밭을 제 정리 하면서 만든 글자라 짐욕(朕欲) 정 치 경도 (定置京都)라 했다.[186] 신라 말기 경덕왕 (景德王)이 석도안 (釋道安) 을 기려(奇麗)하여 도안현(道安縣) 이라는 이름을 그곳에 남겼다.
2 절:가야금의 유래: 가야에서 쓰던 현악기를 가야금이라 한다. 가야는 신라 보다 먼저 한반도 남쪽에 도착하여 낙동강 하구에 자리를 잡고 점차로 상류로 올라 갔다.[187] 서쪽에서 오던 배가 동쪽으로 갔다. 우륵이 신라에 가서 가야금을 전하고 읊은 곡 이름에 하 상 가라도 (加羅都)가 있다. 가라가 한반도 남단에 있는 강 아래 위 두 곳에 있었다. 두꺼비 나룻터란 뜻에 섬진강(蟾津江)이라 했다. 나동강과 섬진강 수계에 가라국이 있었다.
현악기는 태고적 부터 있었다. 현악기가 돌고 돌아 해금 (奚琴), 호금 (胡琴), 칠현금이 되여 당금(唐琴)과 가야금(伽倻琴)으로 나타났다. 유목민이 가야금의 원조란 뜻이다. 발해만 연안에 철전을 사용 했고, 금실의 어원이 되는 현악기 슬 (瑟) 이 있었다.[188] 대가야 (大加耶) 사람 우륵 (于勒)이 가야금 (伽倻琴) 을 신라에 보급했다. 하지왕의 가라국 (加羅國)이 김수로왕 (金首露王)의 가락국 (駕洛國)으로 김해시가 분명 하다. 그러나 대가야, 본가야 (本加耶) 라는 곳의 현 위치가 섬진강과 낙동강 어느강 수계에 있었는가는 뚜렸하지 않다.
고조선 사람들이 고난을 치루던 예기가 설화로 많이 남아 있다.[189] 항아 (嫦娥)가 궁수 예 (羿,백익)의 불사약을 훔쳐먹고 달에 가서 두꺼비가 되었다. 해 안에는 삼족오, 달안에는 토끼 한마리와 두끼비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나 지역에 살았던 도가(道家) 곽홍의 포박자(抱朴子)는 남쪽 지역을 설명 하며 원숭이는 5백년을자라 확(玃, 고릴라?)이 되고, 두끼비는 3천년, 기린은 2천년을 산다고 했다. [190] 가야 연맹이 나타난 섬진강과 낙동강 구지봉 이름의 유래는 남방불교 전래와 관계가 깊다.
3 절: 임나(任那)는 의역(意譯)이요 가라(加羅)는 음역(音譯)한 글자다:
가라란 어음의 여러 사음(寫音)자는 모두 오호 십육국시대 남조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 가야산(伽耶山)은 인도 동북부에 있는 영산(靈山)이라고 부르던 천애 (天涯) 의 요새(要塞)다.[191] 산정상에는 솔도파(率堵婆)라는 위쪽이 뾰족한 불교의 탑이 있다. 무위왕(無憂王)이 여러 곳에 석탑을 세웠다. 동진 시대에 2,000리 떠러진 사자국으로 부터 남방불교가 강남에 이르렀다. 해안을 따라 발해만에 이르러 가라(加羅)란 이름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났다. 스님이 신임받아 다스려 임나가라(任那加羅)라 했다.
나라(那羅) 또는 날라(捺羅) 라고도 적은 글자는 옛 한국어를 음역한 글자다.[192] 이를 국가 또는 날 비(飛, fly)로 풀이 했다. 서역기에 금왕 본 나라연천지 조윤(今王本那羅延天之祚胤)이라, 즉 하늘로 부터 내려온 왕의 후손이란 뜻이다. 천손강림(天孫降臨)사상에 근거한 글자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삼족오 (三足烏)가 후에는 장닭으로 상여에 올려 놓았다. 상나라 시조 은계(殷契)의 어머니 간적 (簡狄)이 제비(帝妃; 제비, swallow) 알 (玄鳥卵)을 먹어 임신하여 상나라 시조를 낳았다. [193] 그녀는 서쪽에서 온 유목민(娀氏之女)의 여자로 전욱의 뒤를 이은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의 두쩨 부인이 되었다.
신라가 수도를 한반도로 옮기고 남방 불교를 따라 올라온 김일제의 다른 후손이 올라와 신라에 성골(聖骨)이란 명칭이 나타났다. 진평왕(真平王; 재위 579 ~ 632년)의 이름은 백정(白淨), 부인이 마야 부인(摩耶)이다.[194] 석가모니의 어머니가 마야 부인이다. 백정이란 불가의 부도(浮屠), 즉 떠돌이 소백정 (白丁,屠殺者, butcher)이다. 다른 글자로 부도 (浮圖)라고 적기도 한다. 옛적에 쓰던 한국어가 불교 경전과 현대 한국에 살아 있다.
스님 도림(浮屠道琳)이 백제왕을 찾아 갔던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앞을 지나는 강이 욱리하 (郁里河)라 했다. 이 또한 높은 사람이 사는 마을을 지나는 강이란 뜻이다. 백제 개로왕 (蓋鹵王,?~475년)과 바둑을 두었다는 도림은 남방불교 스님이었다. 평양 교외에 단군능 지하 궁전 벽화는 불교 풍이 많이 섞였다.[195] 관동팔경 의 하나인 삼일포(三日浦)는 신라 국선이 놀다 남긴 이름이라 한다. 속초 가까이 아야(阿耶)진 이란 해수욕장이 있다. 설악산 북쪽에는 미시령 (彌時嶺)이 있다. 높다는 뜻(鬱為稱首)의 사음자 울(鬱)을 붙인 [울릉도, 울진, 울산바위] 하는 이름 들이 신라 영역에 나타났다. 모두 남방 불교가 신라에 전래된 이후에 나타난 이름이다.
동남아 특산물이 한반도에 이르렀다. 현지음이 잘못 번역되어 뜻이 다른 글자로 나타나기도 했다. 옥으로 만들었던 규를 상아라 만들고 사자 허수아비 를 만들어 우산국 을 정벌 했다.
나이 십오륙세 였던 젊은 화랑 사다함 (斯多含)이 전단량(旃檀梁), 즉 다리 건너 정문으로 들어가 562년 에 가야국(加耶國), 즉 구지봉이 있는 김해시에 있던 하지왕 (荷知王)의 수도 가야국을 함락 했다.[196] 평지에 해자 (垓字) 로 방어 했던 성이다. 강 하류 평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정벌 했다. 그 서쪽, 경상남도 창녕군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
4 절: 남방과의 교류가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화랑도가 나타났다. 신라 진평왕 시대 원광 법사 (圓光法師; 542년 ~ 640년 )가 초씨역림(焦氏易林)에 나오는 일신오심(一身五心)을 불교에 접붙여 세속오계 (世俗五戒) 나타났다.
오계의 원천은 백익(益)의 경계하라는 몇 구절을 불가에서 적용 했다.[197] 유가에서는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문자(斯文)로 작성된 금인명(金人銘)을 환제가 한 예기라 한다. 스님이 가르친 다섯 가지 계율이 신라 화랑 (花郞) 오계의 뿌리가 되었다.
불교국가 신라는 삼국을 통일 했다. 수서에 “新羅 百濟 皆以倭為大國”란 문구가 있다. 다개(皆)자는 백제의 부용국을 모두 포함 했다는 뜻이다. 신라 백제 가야 연맹 여러 불교국가들이 모두 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198] 일본 승려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친서를 전했다고 송사에 실려 있다. 그 내용에 일본은 백제로 부터 흠명천왕 13년(欽明天皇;539 – 571년)에 불경을 전해 받았다고 했다.[199] 이를 양나라 승희원년 (梁承聖元年), 즉 552 년이라 했다. 위덕왕(威德王, 525- 598년) 시절 후경이 거발성을 점령하던 무렵이다. 원나라 때에도 복건성에 신라(현)가 있었다. [200] 그 지명을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는 남조 역사서에 실린 신라에 관해 설명 했다. 신라어의 많은 명사가 만주어를 사음한 글자라고 했다.[201]
문무왕이 특사로 사찬(沙飡) 수미산 (須彌山)을 보네, 왕실의 후손 안승을 왕으로 봉하여 장수왕이 빼았은 부여경의 한성 (漢城)에 살도록 했다. [202] 오늘의 한반도에 있는 평양은 고구려 유민이 설립한 안승(安勝, 安舜)의 후고구려 (後高句麗) 수도 였다. 오대산 상원사 (上院寺) 고양이 석상은 천축국에서 성수로 쓰던 사자 (獅子)상이 고양이 석상으로 나타났다. 달을 숭상하던 불교에서 만월 을 뜻한 상원을 사찰 이름으로 사용 했다.
VI 장: 맺음 말
백익을 잃은 고조선의 한 부족이 사천성을 지나 운남 지역에 정착 했다. 그 지역 도사(道士)들이 옛적부터 알려진 길을 따라 올라가, 히말리아 산맥 동쪽에 천부경을 전했던 곳이라 인도(印度)라 했다. 그곳에서 원시 불교가 나타났다. 같은 길을 따라 내려와 지나 (支那) 라고 알려진 방대한 지역에 불교가 전파 되었다. 마술사 시라 (尸羅)가 전국시대 연나라 수도에 불상을 갖고 와서, 불교 문화가 해하(海河) 수계 상류 임유관 (臨渝關) 일대 금미달 (今彌達)에 알려 졌다. 금미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만주 땅에 북부여가 나타났다. 그때에 고조선의 사제권이 부여씨에게 너머갔다.
해하(海河) 수계 상류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발해만 일대로 내려와 왔다. 이를 창해지군 이라 했다. 그곳에 부여의 혈통을 지닌 비류가 정착 했다. 그 곳에 살던 삼한 사람들을 한(可汗, 韓)이 다스렸다. 삼한의 한 부류를 왜(倭) 라고 했다. 왜오왕이 다스리던 부족이 동남아로 내려가 운남성 에서 매콩강 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과 같이 지나 (支那) 땅에 여러 불교 국가를 이루었다. 고조선과 뿌리를 같이 한 사마씨가 강남으로 이주한 이후, 동남아 해안을 따라 남방 불교가 올라 왔다. 동남아에 번창하던 남방불교가 광동성 해안에 전래 되여 해안을 따라 발해만 일대에 전래 되여 설라 휴인 (薛羅,休忍)이라 하던 이름이 신라 (新羅), 임나 가라 (任那加羅) 란 이름으로 바뀌었다.[203]
남만주에 있던 신라 는 광개토 대왕 이후에 한반도 남쪽으로 수도 를 옮겼다. 황해의 남방 해로가 개발된 후에 남방불교가 한반도로 전래 되여 신라를 부흥 시켰다. 동남아에 있던 작은 나라 신라의 공주 화랑 (Farang) 이 화랑(花郞)도의 어원이다.[204] 신라 공주 화랑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이라 했다. 허황옥의 딸이 선덕 여왕 이다. 해상로의 요충지 였던 제주도에 하루방을 남겼다. 동남아 섬나 (Siam)와 음이 비슷한 이름이 대만(𨈭牟羅) 과 제주도에 붙었다. 신라 귀족 출신 원광 스님이 불교의 세속오계를 근간으로 화랑 오계를 보급하여 젊은 낭도의 가치관이 확립 되었다.
진흥왕 23년(537년) 에 나마신득 (奈麻身得)이 신무기 포노(砲弩, cross bow)를 만들었다. 사다함 (斯多含) 의 화랑도가 백제의 부용국이었던 김해 가야국 (加耶國, 駕洛國)을 정벌 했다.[205]
양자강 하류 남경 일대에 있던 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이 549년에 점령 당했다. 대륙북제와 강남에 있던 진(陳) 나라를 수나라가 병합하던 시절에 중원세력이 만든 큰 배가 백제 영역이 었던 대마도에 표류 되었다. 그때에 처음으로 중원 세력이 황해의 남쪽 항로를 따라 한반도 남단 항구를 지나갔다. 그 곳을 백제의 부용국 이었던 금관가라를 도사마국 (都斯麻國) 이라 했다. 가락국왕 하지 (荷知)의 수도였다. 구자(龜玆)국에서 왔다는 뜻에 구지봉이라 이름을 붙인 경남 진해시를 구지하성 (久知下城)이라 했다.
일본 영역에 여관 (許家)이 많은 섬나라 일지국(一支國)이 있었다. 대마도 와 일지국 사이가 현해탄이다. 대륙을 잃는 열도백제 부여씨 왜왕이 603년 에 사신과 함께 스님 10여명 을 수양제에게 보네 불경을 배우도록 했다. 심기가 불편한 왜왕이 보낸 서한에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 천자에게 무양 (沒處天子無恙) 한가 하는 문구] 가 실려 수양제가 크게 화를 냈다.[206] 일본이란 이름은 화랑도 였던 김춘추가 백강 전투에서 왜를 물리치고 고구려 마저 흡수한 뒤에 나타났다. 왜가 혼슈 동쪽에서 두번째 혼(魂)이란 뜻의 니혼(日本; 二夲) 이란 새 나라를 세우고 670년에 신라, 그후 당나라 에 알렸다. 문무왕은 구주에 사는 왜의 침입이 우려 되여 동해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겨 문무왕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암 (大王岩) 이 울산 앞 바다에 있다.
불교가 강남에 전래된 시기에 있던 신라 임나가야 (新羅 任那加羅)라는 이름자가 남방불교를 따라 발해만 연안에 이르러 광개토대왕 비문에 같은 글자로 실렸다. 옛 한국어를 음역한 글자를 잘못 풀이 하여 불교경전 대루탄경에 실린 글자 또한 옳바로 풀이 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바꾸었다.
이렇게 번역이 잘못 된 사실을 일본 열도 사람들이 아전 인수격으로 풀이 하여 임나가야 일본부 (任那加羅日本府)라는 낭설이 나타났다.
끝
January 15th, 2022. Revised August 15th, September 29th 2022
[1]. 宋書: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別本云。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太元(376-396年)是東晉皇帝晉孝武帝司馬曜的年號. 十六國春秋: 鮮卑烏丸高句麗百濟新羅休忍等諸國遣兵三萬助北海公重戍薊諸國 三國志弁辰傳: 倭 有瑟,其形似筑
[2].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倭國,在帶方東南大海島中,漢末以來,立女王。土俗已見前史。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梁書: 魏時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普通二年(521),王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3]. 史記 平準書: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通典 新羅: [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
[4]. 三國 史記:真興王立: 「十二年春正月,改元開國。三月,王巡守次娘城,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
[5]. 宋史:至道二年,徙延州都巡檢使兼署州事,改本路副都部署,與範重召等五路討賊。有岌伽羅膩數族率眾來拒,保興選敢死士數百人銜枚夜擊,殲之。引師至監城,吳移、越移四族來降,惟岌伽羅膩十四族怙其眾不下,乃與尹憲襲擊之,夷其帳千餘,俘斬七千餘級.
[6].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7].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 By Xlibris. 2020. (韓原之戰)
p 8 Session 1: Study of Northeast Asian History. https://ctext.org/zh:北狄. 逸周書 王會解: 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虛。不令支玄模。不屠何青熊。東胡黃羆。山戎戎菽
[8].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竹書紀年 帝舜有虞氏:帝居于鳴條. 商自陑征夏邑。克昆吾。大雷雨,戰于鳴條。焦氏易林:鳴條之郊,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
[9]. 禮記 祭法:,夏之衰也,周棄繼之,故祀以為稷。共工氏之霸九州也,其子曰後土,能平九州,故祀以為社。帝嚳能序星辰以著眾;堯能賞均刑法以義終;舜勤眾事而野死。鯀鄣洪水而殛死,禹能修鯀之功。黃帝正名百物以明民共財,顓頊能修之。《說文》云:大頭也。魚容切,四.爾雅 釋地: 西方有比肩獸焉。與邛邛岠虛比,為邛邛岠虛齧甘草,即有難,邛邛岠虛負而走
[10]. 詩經 韓奕:奕奕梁山、維禹甸之、有倬其道。韓侯受命、王親命之、纘戎祖考.、溥彼韓城、燕師所完. 其追其貊、奄受北國、因以其伯。詩經: 亦孔之邛 . 維王之邛.
[11]. 史記:其後三苗服九黎之德、史記 五帝本紀.三苗在江淮、荊州數為亂 漢書:顓頊帝春秋外傳曰,少昊之衰,九黎亂德,顓頊受之,乃命重黎. 孟子萬章曰:「舜流共工于幽州,放驩兜于崇山,殺三苗于三危,殛鯀于羽山,四罪而天下咸服,誅不仁也。」、尚書 虞書 舜典:分北三苗。
[12]. 강희자전: 德:凡言德者,善美,正大. 墨子 兼愛下,《周詩》曰:『王道蕩蕩,不偏不黨,王道平平,不黨不偏。《易·乾卦》君子進德修業。《詩·大雅》民之秉彝,好是懿德。尚書 洪範:無偏無黨,王道蕩蕩;無黨無偏,王道平平;無反無側,王道正直。會其有極,歸其有極.
[13]. 이돈성 지음: 古朝鮮 찾기. 책미래. 2016. P 141 중원과의 전쟁 기록에서. 蚩尤與赤帝之戰. 黃帝與蚩尤之戰. 蚩尤請來了風伯雨師,「天大晦冥」,雷電交作,衝破了應龍的水陣。
[14]. 爾雅 釋訓: 顒顒邛邛君之德也.詩經:顒顒卬卬、如圭如璋、令聞令望。豈弟君子、四方為綱
[15].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By Xlibris. 2018. p Etymology of Few words, Buyeo (夫餘) and Goguryeo.
[16]. 漢傳佛教與東方文化.任繼愈. 中華佛學學報第12期 (1999.7月出版 ).中華佛學研究所發行.
[17]. 晉書: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幽王既亡,有共伯和者攝行天子事,非二相共和也。其《易經》二篇,與《周易》上下經同。
[18]. 夏商周断代工程. 史記 周本紀: 召公、周公二相行政,號曰「共和」。共和十四年,厲王死于彘。
[19]. 이돈성 지음: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책 미래. Seoul Korea. 1 장 어떻게 찾았나.
[20]. https://zh.m.wikipedia.org/zh-hant/%E9%9A%B8%E8%AE%8A : 隸變,是漢字由小篆演變為隸書的過程,大約發生在秦漢之間,是漢字發展的轉捩點.
[21]. 이돈성 지음: 古朝鮮 찾기. 책미래. 2016. P 85 시경(詩經)에서.
西周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共和與中興.
[22]. 焦氏易林: 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主君旄頭,立尊單于. 三國志 鍾會傳:弼注老子,為之指略,致有理統。著道畧論,注易,往往有高麗言。太原王濟好談,病老、」
[23]. https://zh.m.wikipedia.org/zh-hant/%E9%9A%B8%E8%AE%8A : 隸變,是漢字由小篆演變為隸書的過程,大約發生在秦漢之間,是漢字發展的轉捩點.
[24]. https://zh.m.wikipedia.org/zh-hant/%E9%9A%B8%E8%AE%8A : 隸變,是漢字由小篆演變為隸書的過程,大約發生在秦漢之間,是漢字發展的轉捩點.
[25].說文解字: 變:更也. 眞:僊人變形而登天也. 舜:艸也。楚謂之葍,秦謂之藑。蔓地連華。象形。从舛,舛亦聲。凡䑞之屬皆从䑞。今隸變作舜
[26]. 三國遺事: 駕洛國記.迦葉原 阿蘭弗. 신라의 수도 이전: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揚子·方言》比。代也
[27]. 강희자전: 代。更也,替也。《書·臯陶謨》天工人其代之。又世也。《家語》古之王者,易代攺號,取法五行。又不還曰代。又國名。趙之先有代國。《應劭曰》古。漢代郡屬幽州,魏攺爲州。
[28]. 三國史記: 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閼川楊山村,二曰突山高墟村.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北溟人耕田,得濊王印,獻之. 改始林名鷄林,因以為國號.
[29].. 신라의 수도 이전: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30]. 漢書 志 郊祀志上: 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傳在勃海中,去人不遠. 漢書 志 天文志: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31]. 訄書:則以雞林、靺鞨之賓旅,而為客帝於中國也何損?知是,而逐滿之論,殆可以息矣.。
[32]. 隋書:先是,高麗私通使啟民所,啟民推誠奉國,不敢隱境外之交。是日,將高麗使人見,勑令牛弘宣旨謂之曰:「明年當往涿郡。爾還日,語高麗王知,宜早來朝,勿自疑懼。存育之禮,當同於啟民。如或不朝,必將啟民巡行彼土。」使人甚懼。啟民仍扈從入塞,至定襄,詔令歸藩
[33]. 三國遺事校訂三國遺事敘:一斯編。本無目次。今據編中標題補之。又第一卷靺鞨渤海條闕二葉。第三卷南月山條闕一葉。伯嚴寺石塔舍利條闕二葉。其他或佚標題。或脫篇名。
[34]. 三國遺事: 北扶餘古記云。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於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三國史記: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北扶余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35]. 太平廣記 幻術一 扶婁國人:南垂有扶婁之國。其人善能機巧變化,易形改服,大則興雲霧,小則入纖毫。綴金玉毛羽為衣服。或為巨象獅子龍虵犬馬之狀。或為虎口中生人,或於掌中備百獸之樂,宛轉屈曲於指間。得粗得精,代代不絕。乃欲謂之婆侯伎。則扶婁之音訛耳。出《拾遺錄.。
[36]. 潛夫論 五德志: 羿恃己射也,不脩民事,而淫于原獸;棄武羅、伯因、熊髡、尨圉,而用寒浞。浞、柏明氏讒子弟也. 柏明氏惡而棄之。夷羿收之,信而使之,以為己相。浞行媚于內,
[37]. 三國志高句麗傳: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正始三年,宮寇西安平,為幽州刺吏毌丘儉所破。語在儉傳。東沃沮傳: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遂進師擊之,宮奔北沃沮 三國史記: 魏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大守太守劉茂、朔方帶方大守太守王遵弓遵,伐高句麗,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茂聞之怒,王恐見侵討,還其民口
[38]. 三國史記 儉攻陷丸都城,屠之。乃遣將軍王●,追王。王奔南沮南沃沮,至于竹嶺,軍士分散殆盡,唯東部密友獨在側,謂王曰. 王分軍為三道,急擊之,魏軍擾亂不能陳,遂自樂浪而退
[39]. 通典 新羅: 初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其國小,不能自通使聘。
[40]. 太平廣記 新羅: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畝,乃求蠶穀種于弟,弟蒸而與之。旁㐌不知也。其後子孫戲錐求狼糞,因雷震,錐失所在。出《酉陽雜俎》@.방이(旁㐌)설화
[41]. 三國遺事: 樂浪國前漢時始置樂浪郡。應邵曰。故朝鮮國也新唐書注云。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國史云. 樂浪即平壞城。宜矣。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為始祖。宜矣。三國史記:中國史書也,猶存楚語「穀於菟」、匈奴語「撑犁孤塗」等。今記新羅事,其存方言,亦宜矣。臣等以為新者德業日新,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為國號,宜矣.
[42]. 魏書帝紀第五 高宗紀: 和平四年七月壬午 詔曰:「朕每歲以秋日閑月,命群官講武平壤。所幸之處,必立宮壇,糜費之功,勞損非一。宜仍舊貫,何必改作也。」八月丙寅,遂畋於河西.
[43]. 三國 史記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新羅遣使結和。秋九月,王薨。葬於柴原,號曰東川王
[44]. 三國 史記 新羅本紀第三: 實聖尼師今立. 十二年 雲起狼山,望之如樓閣,香氣郁然,久而不歇。王謂:「是必仙靈降逰,應是福地。」從此後,禁人斬伐𣗳木。新成平壤州大橋
[45]. 金史 志第五: 遼陽府.本渤海遼陽故城,遼完葺之,郡名東平。升為南京,府曰遼陽. 遼陽倚。東梁河、國名兀魯忽必剌,俗名太子河,為遼東盛國。
[46]. 三國 史記: 王如卒本,祀始祖廟. 榮留王,王幸卒本,祀始祖廟. 通典高句麗:隨山屈曲,南臨浿水,在遼東南千餘里。城內唯積倉儲器械,寇賊至,方入同守。王別為宅於其側。
[47]. 三國史記:陽原王 八年,築長安城. 平原王二十八年,移都長安城『唐書』云:「平壤城亦謂長安。」而古記云:「自平壤移長安。」則二城同異遠近,則不可知矣。 舊唐書: 總章元年九月,勣又移營於平壤城南,男建頻遣兵出戰,皆大敗。男建下捉兵總管僧信誠密遣人詣軍中,許開城門為內應。經五日,信誠果開門,勣從兵入,登城鼓噪,燒城門樓,四面火起。男建窘急自刺,不死。十一月,拔平壤城,虜高藏、男建等。新唐書: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說它「明理一而分殊」。並說:「萬物皆是一理」,「一物之理,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48].隋書: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 通典 邊防二 高句麗:自東晉以後,其王所居平壤城。自為慕容皝來伐,後徙國內城,移都此城。亦曰長安城,隨山屈曲,南臨浿水。城內唯積倉儲器械,寇賊至,方入同守。王別為宅於其側。其外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
[49].宋史:高麗,本曰高句驪。禹別九州,屬冀州之地,漢之玄菟郡也。在遼東,蓋扶餘之別種,以平壤城為國邑。隋煬帝再舉兵,唐太宗親駕伐之,皆不克。後唐同光、天成中,其主高氏累奉職貢。長興中,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遣使朝貢,以建為玄菟州都督,充大義軍使,封高麗國王。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移鎮高麗平壤。王居開州蜀莫郡,曰開成府.@@.以新羅為東州樂浪府,號東京。平壤為鎮州,號西京。西京最盛。總之,凡三京. @顧愔《新羅國記》一卷.@ 顧愔 撰,原釋闕。(見天一閣鈔本。) 影印 检索该书影印古籍 本站百万册影印古籍、海量资料;切换到【影印古籍】栏目. .@ 顾愔生卒年不详。知与大诗人顾况为从兄弟关系, 是苏州海盐县横山(今属浙江)人
[50]. 欽定滿洲源流考: 遼史忽汗州故平壤城也號中京顯徳府太祖攻渤海拔忽汗城俘其王大諲撰以為東丹王國 遼史: 忽汗州: 中宗賜所都曰忽汗州,封渤海郡王。十有二世至彞震,僭號改元,擬建宮闕,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為遼東盛國。忽汗州即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51].元史: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壤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移鎮高麗平壤。
[52].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 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為名。漢城州捴管藪世取百濟□□□□□□國,適彼事覺,遣大阿飡真珠誅之。十二□□□□賁書所六□□□僵事同□異可□
[53]. 通典 新羅: 初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其國小,不能自通使聘。
[54]. 太平廣記: 天毒國道人: 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云。發其國五年,乃至燕都。喜衒惑之術。於其指端,出浮圖十層,高三尺,乃諸天神仙。尸羅歕水為雰霧。闇數里間。俄而復吹為疾風,雰霧皆止。又吹指上浮圖,漸入雲裏。又於左耳出青龍,右耳出白虎。更張口。則向見羽蓋螭鵠。相隨從口中而出。尸羅常坐日中 出《王子年拾遺記》
[55]. 大唐西域記:傍有小河東南流。土俗號曰油河。是摩耶夫人產孕已。天化此池光潤澄凈。欲令夫人取以沐浴除去風虛。三國遺事:云我是河柏之女名柳花。與諸弟出遊. 三國史記:始祖東明聖王,姓高氏,扶餘王解夫婁老無子.王母柳花薨於東扶餘。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遂立神廟
[56]. 三國史記: 故國原王. 十三年春二月,王遣其弟,稱臣入朝於燕,貢珍異以千數。燕王●乃還其父尸,猶留其母為質 移居平壤東黃城。遣使如晉朝貢 四十一年,百濟王率帥兵三萬,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
[57]. 三國遺事: 按古典記云。東明王第三子溫祚。以前漢鴻佳三年癸酉。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稱王。十四年丙辰。移都漢山 胡僧摩羅難陀至自晉。迎置宮中禮敬。明年乙酉。創佛寺於新都漢山州. 四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三國史記: 金大問本新羅貴門子弟。聖德王三年,為漢山州都督,作傳記若干卷。其『高僧傳』、『花郞世記』、『樂本』、『漢山記』猶存。枕流王 秋七月,遣使入晉朝貢。九月,胡僧摩羅難陁自𣈆至,王迎之,致宫內,禮敬焉。佛法始扵此
[58]. The Imna Gara(任那加羅) engraved in the Stele was in the Chin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59]. 說文解字 而部:而:頰毛也。象毛之形。《周禮》曰:「作其鱗之而。」凡而之屬皆从而. 今俗別作髵,非是. 《集韻》奴登切,音能. 《釋文》鄭讀而曰能,能猶安也。다음사전: 而 말 이을 이, 편안할 능, 능히 능
[60]. 三國史記 廣開土王,諱談德,故國壤王之子。生而雄偉,有倜●之志。故國壤王三年,立為太子。九八年,王薨,太子卽位。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冬十月,攻陷百濟關彌城。其城四面●絶,海水環繞,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61].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대륙백제 중시조 고환 (高歡)의 혈통- 2: 陳留高氏:
[62]. 水經注 :那:何也,都也,於也,盡也,詩云受福不那那多也,亦朝那縣名在安定又姓西魏揚州刺史那椿.《正韻》奴何切,𠀤音儺。《說文》西夷國安定有朝那縣。又《玉篇》何也。又多也。《詩·小雅》受福不那。又《集韻》安貌。《詩·小雅》有那其居。《玉篇》俗言那事。又去聲。《後漢·韓康傳》公是韓伯休那。《說文》本作𨙻。廣韻: 爹:羌人呼父也. 北方人呼父
[63]. 水經注 汝水: 水出魯陽縣北將孤山北長岡下,東歷永仁三堆南,又東逕沙川,世謂之沙水
[64]. 文苑英華: 新羅王真德永徽五年合從本傳作元年新羅王真德即新羅王金真平女也平卒無子女乃嗣立為王. 廣韻 哿 爹:北方人呼父. 沱:瀢沱沙水往來皃. 爹:羌人呼父也. 說文爹,㸙父也.
[65]. 冊府元龜: 江南書云:皇帝恭問江南國主劉承 用斯多食. 弊斯多一昨再辱使
[66]. 宋史:賈人由海道往外蕃,令以物貨名數並所詣之地,報所在州召保,毋得參帶兵器或可造兵器及違禁之物,官給以券。擅乘船由海入界河及往高麗、新羅、登萊州境者,罪以徒,往北界者加等. 顧愔《 新羅國記》一卷
[67]. 太平廣記 新羅: 新羅國。東南與日本隣。東與長人國接。常使弓弩數千守之,由是不過, 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其兄旁㐌。貞元中,新羅國獻孔雀,解舞。德宗召於玄武門寫貌.貞元末,新羅國有人於江淮。盡以善價收巿數十卷。將去,其畫佛像真仙人物子女,皆神也。唯鞍馬鳥獸,竹石草木,不窮其狀也.@. 韓志和者,本倭國人也,中國為飛龍衛士。善雕木為鸞鶴鳥鵲之形. 唐韓幹,京兆人也. 其後果能狀飛龍之質,盡噴玉之奇.
[68]. 酉陽雜俎: 新羅國有第一貴族金哥。其遠祖名旁,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因分居. 南人相傳,秦漢前有洞主吳氏,土人呼為吳洞。有女名葉限,少惠,善陶一作鉤金,父愛之。末歲父卒,為後母所苦,常令樵險汲深. 舊唐書:前地理書以黔州屬酉陽,今則改入巴郡
[69]. 三國遺事: 樂浪即平壞城。宜矣。或云樂浪中頭山下靺鞨之界. 皆稱某王。不言居西乾等。豈以其言 鄙野不足稱之也. 今記新羅事。具存方言亦宜矣。羅人凡追封者稱葛文王.說苑 脩文宜矣,夫子之言也!」
[70]. 欽定滿洲源流考: 新羅一作斯盧一作新盧雞林附.其妄也若夫三韓命名苐列辰韓馬韓弁韓,而不詳其義意當時三國必有三汗,各統其一,史家不知汗為君長之稱,遂以音同誤譯,而庸鄙者甚至訛韓為族姓,若唐時所稱雞林,應即今吉林之訛,而新羅百濟諸國亦皆其附近之地. 按遼宋以後每以雞林稱髙麗金元時亦以雞林郡公為髙麗封號葢新羅嗣王既世襲都督雞林遂為新羅之通稱迨渤海盛而新羅偏安南境又為髙麗所併故髙麗亦襲是稱號雖地非其舊而名仍沿之耳興光本名與太宗同先天中則天改焉而. 舊唐書:白居易傳居易最工詩當時士人爭傳雞林行賈售其國相率篇易一金其偽者相輒能辨之案雞林即今吉林詳前疆域門
[71]. 大越史記全書:置桂林今廣西明貴縣是也、南海即今廣東、象郡即安南,以任囂為南海尉,趙佗為龍川令龍川,南海属縣,領謫徒兵五十萬人戍五嶺.蒼梧唐曰益州,古甌貉,我越之地、鬱林桂林郡,漢武更名、合浦秦象郡,廉州之屬郡、交趾、九真、日南秦象郡、珠崖、儋耳並在大海中九郡。自是漢始置刺史、太守。.初,帝之先世閩人或曰桂林人有名京者,來居天長即墨鄕
[72].晉書:鬱林郡秦置桂林郡,武帝更名. 晉書慕容垂:垂潛遣其桂林王慕容鎮、驃騎慕容國於黎陽津夜濟,壁于河南。通典:十六國前燕將慕容垂討丁零翟釗於滑臺,次於黎陽津 垂潛遣其桂林王慕容鎮、驍騎慕容國於黎陽津夜濟,壁於河南。桂林、南越之地,
[73]. 三國史記:奈勿王之曾孫,王薨,謚曰智證。新羅謚法始於此. 法興王立。諱原宗,今記新羅事,其存方言,亦宜矣. 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為國號,宜矣. @ 解明在於別都,以好勇聞,其於得罪也,宜矣.
[74]. 康熙字典:《註》祭社曰宜。冢土,社也:《傳》宜者,和順之意《前漢·地理志》伯益能儀百物。儀讀與宜同. 庸置粵州,改宜州. 冊府元龜: 梁高祖普通二年新羅王募秦始遣使隨百濟奉獻其俗呼城曰:健矣。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語言待百濟覆通。觀屈原離騷之作自是狂人死其宜矣
[75]. 隋書: 新羅國,或稱斯羅。大業以來,歲遣朝貢。新羅地多山險,雖與 百濟構隙,百濟亦不能圖之
[76].三國史記:「大王之國,四方皆山丘河海,是天設之險,非人為之形也. 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77].南齊書: 加羅國,三韓種也 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 都督倭·新羅·任那·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 P 150
[78]. 南齊書: 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479),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建元元年(479),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79]. 三國遺事:伊西國人來攻金城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金氏始立父仇道葛文王. 三國史記: 儒禮尼師今十四年 伊西古國来攻金城,我大舉兵防禦,不能攘。忽有異兵來,其數不可勝紀。人皆珥竹葉.
[80]. 三國史記: 真平王立。諱白淨,真興王太子銅輪之子也。母金氏萬呼一云萬內。夫人,葛文王立宗之女。妃金氏摩耶夫人,葛文王福勝之女。王生有竒相,身體長大,志識沉毅明逹。
[81].강희자전:《海篇》𣬛郞,𥓓名。𣬛郞神,本三郞神也。蠻人呼參爲𣬛,轉聲爲三。又𣬛陽鎭,在沂州費縣。又村名。行唐西有𣬛趙村。
[82]. 三國志 倭人傳: 使大倭監之。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 왜인전(倭人傳)의 새로운 고찰-3: 대화국(大和國)의 기원: Etymology of Yamatonokuni (大和國).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83]. 三國遺事:因名龍嵒又郡中有三山。曰日山吳山浮山。國家全盛之時。各有神人居其上。飛相往來。朝夕不絕又泗泚崖又有一石。可坐十餘人。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所居北龜旨是峰巒之稱若十朋伏之狀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眾庶二三百人集會於此。有如人音。隱其形而發其音曰。此有人否。九乾等云。吾徒在。又曰。吾所在為何。對云龜旨也。
[84]. 廣韻 魚:餘: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85]. 冊府元龜: 治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笫且翦愚汕諧嵌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以子弟宗族分據之。又云:其都曰:居枝城國南海行三月有眈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獐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二日至貊國西南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南齊太宗建元元年七月祭五帝之神於明堂有功德之君配明堂制有五室從尚書僕射王儉議也
[86]. 大唐西域記: 則可無大過矣。始可與言譯也。李老曰。美言者則不信。信言者則不美。韓子曰。理正者直其言。言飾者昧其理。是知垂訓範。物義本玄同。庶袪蒙滯。昇-climb up
[87]. 史記大宛列傳: 騫曰:「臣在大夏時,見邛竹杖、蜀布。問曰:『安得此?』大夏國人曰:『吾賈人往市之身毒。身毒在大夏東南可數千里。其人民乘象以戰。其國臨大水焉。』
[88] 三國志倭人傳: 臨兒國,浮屠經云其國王生浮屠。浮屠,太子也。父曰屑頭邪,母云莫邪。大唐西域記:土俗號曰油河。是摩耶夫人產孕已. 其母摩耶自天宮降於此處。世尊隨機示教利喜。
[89]. Pali-English Dictionary: māyā: [f.] fraud; deceit; magic; jugglery.
[90] 三國史記: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問之曰:「我是河伯之女,名柳花。古記云:「東明王十四年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大后太后禮葬之 遂立神廟。三國遺事: 誘我於熊神山下鴨綠邊室中知之而往不返壇君記云。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產朱蒙。壇君記云產子名曰夫婁.
[91]. User dictionary: Tagara,多伽羅之略,香木名. 伽羅陀 :菩薩之位名。譯曰度邊地. 入伽羅陀者,此云度邊地也. 太平御覽 獅子:獅子國,東晉時通焉,天竺旁國也.宋文帝元嘉五年,其王剎利摩訶南遣使貢獻。梁武帝大通元年,后王迦葉伽羅訶犁耶亦使使貢獻
[92] 大唐西域記:僧伽羅國。古之師子國。又曰無憂國。即南印度。其地多奇寶。又名曰寶渚。昔釋迦牟尼佛化身名僧伽羅. 會場西北渡河至阿奢理貳伽藍唐言奇特庭宇顯敝佛像工飾.User dictionary:僧伽藍摩Saṁghārāma之略,譯曰眾園。為僧眾所住之園庭,寺院之通稱也。見僧伽藍摩條
[93] 太平廣記 幻術一 天毒國道人: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發其國五年,乃至燕都。喜衒惑之術。於其指端,出浮圖十層,乃諸天神仙。尸羅歕水為雰霧。又吹指上浮圖,漸入雲裏。更張口。則向見羽蓋螭鵠。相隨從口中而出。尸羅常坐日中,漸漸覺其形小,或化為老叟,或變為嬰兒,倏忽而死,如向之形。神怪無窮。出《王子年拾遺記》
[94]. 三國志 高句麗傳, 都於丸都之下。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祠靈星、社稷。
[95].大唐西域記: 印度之人隨地稱國。殊方異俗遙舉總名。語其所美謂之印度。印度者。唐言月。月有多名。斯其一稱。言諸群生輪回不息。無明長夜莫有司晨. 사기에 身毒國 후한서에 天竺國
[96]. 史記 五帝本紀: 讙兜曰:「共工旁聚布功,可用。」堯曰:「共工善言,其用僻. 莊子在宥:堯於是放讙兜於崇山,投三苗於三峗,流共工於幽都,此不勝天下也夫
[97].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family-names-of-xian-bei-tribes/
[98]. 馬王堆 老子甲: 天下之至柔,□騁於天下之致堅。無有入於無閒,五是以知無為□□益也。不□□教,無為之益. 道家 道德經:天下之至柔,馳騁天下之至堅。無有入無間,吾是以知無為之有益。不言之教,無為之益,天下希及之
[99]. 史記 司馬相如列傳: 相如以「子虛」,虛言也,為楚稱;「烏有先生」者,烏有此事也,為齊難;「無是公」者,無是人也,明天子之義。漢書: 「亡是公」者,亡是人也,欲明天子之義.
[100]. 왕공대인(王公大人)의 뜻: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墨子: 子墨子言曰:「古者王公大人為政於國家者,孔子家語:德如泉流,至于今,王公大人述而弗忘. 漢書:司馬遷稱「春秋推見至隱,易本隱以之顯,大雅言王公大人,而德逮黎庶,小雅譏小己之得失,其流及上。
[101]. 梁書:夫道不恆夷,運無常泰,斯則窮通有數。若乃侯景小豎,叛換本國”昔夷羿亂夏. 雖曰人事,抑乃天時。昔夷羿亂夏,犬戎厄周,漢則莽,晉則敦,玄構禍,方之羯賊,有逾其酷,悲夫!
[102]. Ancient Korean Religion: Polaris and Small Dipper. 단군왕검이 실존 인물이다: 백충장군 현령비 , 朝鮮이란 글자의 이동 (百蟲將軍顯靈碑)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03]. 太平御覽 禹妃:故《連山易》曰:「禹娶涂山之子,名曰攸女,生啟是也。」. 水經注 淮水: 故《連山易》曰:有崇伯鯀,伏于羽山之野者是也. 古三墳 山墳: 天皇伏犧氏連山易爻卦大象
[104]. https://ctext.org/zh 𣬛:《字彙》蘇甘切,音三。《海篇》𣬛郞,𥓓名。𣬛郞神,本三郞神也。蠻人呼參爲𣬛,轉聲爲三。又𣬛陽鎭,在沂州費縣。隋書:琅邪郡舊置北徐州,後周改曰沂州.
[105]. 宋高僧傳 :玄奘也立五種不翻。謂譯字譯音為一例。胡語梵言為一例。重譯直譯為一例 一譯字不譯音。即陀羅尼是。二譯音不譯字。如佛胸前卍字是。三音字俱譯. 其書豎讀。 同震旦歟。 至吐貨羅言音漸異 度蔥嶺南迦畢試國. 十:數之具也。一為東西,丨為南北,則四方中央備矣
[106]. user dictionary: 阿育Aśoka,舊稱阿恕伽。新稱阿輸迦。譯曰無憂。西紀前三百二十一年頃,於印度創立孔雀王朝之旃陀掘多大王(Chandragupta)孫也。統一全印度,大保護佛教
[107]. 山海經: 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 有禹攻共工國山. 焦氏易林: 師: 과 泰:雷行相逐,無有休息。戰於平陸,為夷所覆
[108]. 論衡: 雷虛 :盛夏之時,雷電迅疾,擊折樹木,壞敗室屋,時犯殺人。世俗以為「擊折樹木、壞敗室屋」者,天取龍;其「犯殺人」也,謂之陰過。教
[109]. 論衡: 感虛:《傳書》又言:「伯益作井,龍登玄雲,神棲崑崙。」
[110]. 論衡:祭意: 群神謂風伯、雨師、雷公之屬。風以搖之,雨以潤之,雷以動之,四時生成,寒暑變化。日月星辰,人所瞻仰。水旱、人所忌惡,四方、氣所由來。山林川谷。此鬼神之功也。
[111]. 康熙字典: 霣:《集韻》羽敏切。《說文》雨也。齊人謂雷爲霣。齊人謂靁為霣。公羊傳:夜中星霣如雨。齊人謂雷曰霣。《集韻》王問切,音運。義同.。
[112]. 太平御覽星中: 《詩》曰:晥彼牽牛,不以服箱。注:「晥,星明貌。河鼓,謂之牽牛也,教
[113]. Dictionary:古者伯益初作丼今作井見經典省.《世本》伯益作井。《汲冡周書》黃帝作井。《玉篇》穿地取水,伯益造之,因井爲市也。古文井與𠛬通用。《左傳》有井伯,卽郉伯。
[114]. Dictionary 鼓:伊耆氏造鼓。故謂之鼓。樂書,鼓所以檢樂,爲羣音長。星名。《爾雅·釋天》河鼓謂之牽牛。春秋鼓國,白狄別種。扶餘國,正月,國中連日大會飮樂,名曰迎鼓
[115]. 三國志 夫餘傳: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尚白,白布大袂,履革鞜. 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為凶,合者為吉。
[116]. user dictionary: 阿育Aśoka,舊稱阿恕伽。新稱阿輸迦。譯曰無憂。西紀前三百二十一年頃,於印度創立孔雀王朝之旃陀掘多大王(Chandragupta)孫也。統一全印度,大保護佛教
[117]. 山海經: 共工之臣曰相柳氏. 有山名㱙塗之山。有雲雨之山,有木名曰欒。禹攻雲雨. 禹殺相柳. 共工臣名曰相繇。禹湮洪水,殺相繇,其血腥臭,不可生穀,其地多水,不可居也。
[118]. 竹書紀年:帝禹夏后氏: 帝即位,居冀。頒夏時于邦國. 五年,巡狩,會諸侯于塗山. 八春,會諸侯于會稽,殺防風氏。秋八月,帝陟于會稽。禹立四十五年. 帝啟: 元年癸亥,帝即位于夏邑. 二年年,費侯伯益出就國。王帥師伐有扈,大戰于甘.六年,伯益薨,祠之. 八年,帝使孟涂如巴涖
[119].강희자전: 檐:屋檐. 爾雅·釋天》河鼓謂之牽牛。《郭註》荆楚人呼牽牛星爲檐鼓。檐者荷也。
[120].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 By Xlibris. 2020. p 225.The Seven-Branched Sword(七支刀). P. 226 Zen Buddhism in the NEA
[121]. 古朝鮮과 夏 商의 관계-3: 문화와 역사. 상용(商容) 과 관저(關雎)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鶡冠子 泰鴻:同和者仁也,相容者義也,仁義者,所樂同名也,能同所樂,無形內政,故聖知神方調於無形,以為神明之根者也,地受時以為萬物原者也。神聖詳理
[122]. 大唐西域記: 末田底迦舊曰末田地訛略也阿羅漢之所造也。羅漢以神通力攜引匠人.升睹史多天舊曰兜率他也。又曰兜術他。訛也親觀妙相。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
[123]. 大唐西域記: 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飛英天竺。文傳貝葉。太宗文皇帝。金輪纂禦。寶位居尊。啟玄妙之津。書揄揚之旨。蓋非道映雞林。譽光鷲岳。蘇迷盧山唐言妙高山。
[124]. 大唐西域記: 從烏鐸迦漢荼城北踰山涉川。行六百餘里至烏仗那國。唐言苑。昔輪王之苑囿也。舊云烏場。或曰烏茶皆訛北印度境遂 Pali English dictionary.
[125]. 大唐西域記: 此藥叉神變現異形。或作師子。或作蟒蛇猛獸毒蟲。上作師子蹲踞向階羅. 城西南有比羅娑洛山唐言象堅山神作象形。故曰象堅也。昔如來在世。象堅神奉請世尊及千二百大阿羅漢。山巔有大盤石。如來即之。其後無今人謂之象堅窣堵波也。亦雲中有如來舍利一升餘
[126]. 大唐西域記: 為一佛之化攝也。今一日月所照臨。諸佛世尊皆此垂化。現生現滅導聖導凡。蘇迷盧山唐言妙高山。舊曰須彌。又曰須彌婁皆訛略也四寶合成。據金輪上。日月之所照迴。
[127].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負家一女子起舞歎曰:「會蘇,會蘇!」其音哀雅,後人因其聲而作歌,名《會蘇曲》。於是鄰國百姓聞而來者衆矣。是年,民俗歡康,始制兜率歌。此歌樂之始也。三國遺事: 劉聖公更始元年癸未。甲申即位改定六部號。仍賜六姓始作兜率歌. 復感慈氏。從兜率駕雲而下。與師受戒法。師勸檀緣。鑄成彌勒丈六像。復畫下降受戒威儀之相於金堂南壁
[128].三國遺事: 自爾國俗每正月上亥上子上午等日。忌慎百事。不敢動作。以十五日為烏忌之日中
[129]. 大唐西域記:每歲至如來大神變月滿之日出示眾即印度十二月三十日當此正月十五日也此時也或放光或雨花。僧徒減千人. 習學大乘上座部法。律儀清肅戒行貞明。昔者南海僧伽羅國。其王淳信佛法發自天然。有族弟出家想佛聖迹。遠遊印度寓諸伽藍。於是返迹本國。王躬遠迎。
[130].https://ctext.org/zh阿修羅: Asura,又作阿須羅。舊稱阿修羅,阿須倫,阿蘇羅,阿素羅。譯曰無端,容貌醜陋之義。又曰無酒,其果報無酒之義。新稱阿素洛。譯曰非天。其果報勝似天而非天之義。為常與帝釋戰鬥之神。名義集二曰:「阿修羅,舊翻無端正。大唐西域記: 石室西南隅有巖岫。謂之阿素洛舊曰阿脩羅。又曰阿須倫。又曰阿修羅。皆訛也宮也。往有好事者深閑咒術
[131]. 陶寺遗址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Taosi – Wikipedia:
[132]. 大唐西域記:大唐國來請求佛法。王曰: 大唐國在何方。經途所亙去斯遠近。對曰。當此東北數萬餘里。印度所謂摩訶至那國是也。王曰。嘗聞摩訶至那國有. 秦王天子。少而靈鑒長 而神武。昔先代喪亂率土分崩。兵戈競起群生荼毒.@. 印度記曰。窣堵波中有多舍利。或有齋日時放光明。或有齋日時放光明。從此東行五百餘里至那僕底國北印度境.昔經部拘摩羅邏多唐言童受論師.
[133]. 山海經 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先入代帝,於此取之.
[134]. 山海經 海外北經: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其血腥,不可以樹五穀種。在崑崙之北,柔利之東。相柳者,九首人面,蛇身而青。不敢北射,畏共工之臺。臺在其東,臺四方,隅有一蛇,虎色,首衝南方. 山海經大荒北經: 共工臣名曰相繇,九首蛇身,自環,食于九土。禹湮洪水,殺相繇,其血腥臭,不可生穀,其地多水,不可居也。禹湮之,三仞三沮,乃以為池,群帝是因以為臺。在崑崙之北。
[135]. 說文解字 序:: 二曰象形。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三曰形聲。
詩經大雅 民勞:惠此中國、以綏四方。無縱詭隨、以謹無良。民亦勞止、汔可小休。惠此中國、以為民逑 。 無縱詭隨、以謹惛怓. 惠此京師、以綏四國 。無縱詭隨、以謹罔極。
[136]. 隨 따를 수, 게으를 타1 따르다2. 거느리다3. 몸에 지니다4. 따라서. Follow, listen to, submit; to accompany; subsequently, then. 墮 떨어질 타, 무너뜨릴 휴1. 떨어지다2. 무너지다3. 깨뜨리다
[137]. 說文解字 序:: 二曰象形。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三曰形聲。
詩經大雅 民勞:惠此中國、以綏四方。無縱詭隨、以謹無良。民亦勞止、汔可小休。惠此中國、以為民逑 。 無縱詭隨、以謹惛怓. 惠此京師、以綏四國 。無縱詭隨、以謹罔極。
[138]. 孟子 離婁下:孟子曰:「王者之迹熄而詩亡,詩亡然後春秋作。晉之乘,楚之檮杌,魯之春秋,一也。其事則齊桓、晉文,其文則史。孔子曰:『其義則丘竊取之矣。』」
[139] 太平廣記 幻術: 扶婁國人,南垂有扶婁之國。其人善能機巧變化,易形改服 太平御覽 四夷樂: 西夷之樂曰離,南夷之樂曰任. 王子年《拾遺記》曰:成王之時,南垂之南有扶婁夷國
[140] 史記:燕噲既立,齊人殺蘇秦。蘇秦之在燕,與其相子之為婚,而蘇代與子之交。及蘇秦死,而齊宣王復用蘇代。燕噲三年,與楚、三晉攻秦,不勝而還。子之相燕,貴重,主斷。蘇代為齊使於燕,燕王問曰:「齊王奚如?」對曰:「必不霸。」燕王曰:「何也?」對曰:「不信其臣。」蘇代欲以激燕王以尊子之也。於是燕王大信子之。子之因遺蘇代百金,而聽其所使
[141] 太平廣記 幻術一 天毒國道人:燕昭王七年,沐骨之國來朝,則申毒國之一名也。有道術人名尸羅。發其國五年,乃至燕都。喜衒惑之術。於其指端,出浮圖十層,乃諸天神仙。尸羅歕水為雰霧。又吹指上浮圖,漸入雲裏。更張口。則向見羽蓋螭鵠。相隨從口中而出。尸羅常坐日中,漸漸覺其形小,或化為老叟,或變為嬰兒,倏忽而死,如向之形。神怪無窮。出《王子年拾遺記》
[142]. 宋高僧傳: 卷第三: 故道安云。斯為不易矣。或曰。漢魏之際盛行斯意。致使陳壽國志述臨兒國云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而相出入。蓋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竺教胡為浮屠。此為見譯家用道德二篇中語。便認云與老子經互相出入也。設有華人能梵語與西僧言說。兩相允會。
[143].孟子 萬章上:萬章曰:「舜流共工于幽州,放驩兜于崇山,殺三苗于三危,殛鯀于羽山,四罪而天下咸服,誅不仁也。」. 《屈原·離騷》帝高陽之苗裔兮。《左傳·》晉人與之苗。《註》苗,晉地。
[144]. 大樓炭經:若有婆羅門道人。行求牛。奉牛 意戒具足。若有婆羅門道人。行求狗道。奉狗意戒行具足。若有婆羅門道人。行求鹿道 奉鹿意戒具足 死後生鹿中。若有婆羅門道人 行 求雞道者。
[145]. 說苑 敬慎:孔子之周,觀於太廟右陛之前,有金人焉,三緘其口而銘其背曰:「古之慎言人也.戒之哉!戒之哉!無多言,多口多敗;無多事,多事多患。安樂必戒,無行所悔. 《漢書。藝文志》有《黃帝銘》六篇,今已亡。《金文銘》據學者考證,即為《黃帝銘》. 道家向來被稱為黃老之術, 以《金人銘》對照《老子》,갈홍(葛洪)도교 이론가·의학가·연단술가(煉丹術家).
[146]. 史書 古三墳. 水經注 淮水:「故《連山易》曰:有崇伯鯀,伏于羽山之野者是也.
[147]. 後漢書 : 天竺國一名身毒,在月氏之東南數千里。俗與月氏同,而卑溼暑熱。其國臨大水。乘象而戰。其人弱於月氏,脩浮圖道,不殺伐,遂以成俗. 聞宮中立黃老、浮屠之祠
[148]. 大唐西域記 序: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同風類俗略舉條貫。異政殊制隨地別敘。印度風俗語在後記。曰阿耆尼國舊曰烏耆. 舊唐書:《牟子》二卷牟融撰. 牟子 漢桓帝時蒼梧太守牟融著書號牟子,推美釋氏。
[149]. 宋高僧傳:釋智慧者.北天竺迦畢試國人.常聞支那大國文殊在中。錫指東方誓傳佛教。乃泛海東邁。垂至廣州風飄卻返抵執師子國之東.釋極量。中印度人也。支那印度俗呼廣府為支那。名帝京為摩訶支那也乃於廣州制止道場駐錫. 大唐西域記:大唐國來請求佛法.王曰。嘗聞摩訶至那國有.
[150].: 十六國春秋:法明罽賓人少而好學為弗若多羅所知及長氣幹髙爽神識明悟與眾不群博覽經典潛思八禪遊心七覺時人方之浮頭婆馱孤行山澤不避虎兕晉隆安中至廣州住白沙寺善誦毗婆沙律咸稱為大毗婆沙時年已八十五徒眾八十五人晉故丹陽
[151]. 大唐西域記:徒置懷於印竹。昆明道閉。謬肆力於神池。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夢彰佩日。秘神光於萬里。暨於蔡愔訪道。摩騰入洛。經藏石室。
[152]. 三國遺事: 劉聖公更始元年癸未。即位年表云。甲申即位改定六部號。仍賜六姓始作兜率歌。三國史記: 儒理尼師今五年.兜率民俗歡康,始制兜率歌。此歌樂之始也.
[153]. 三國遺事: 生義寺石彌勒 興輪寺壁畫普 彌勒仙花 未尸郎 真慈師. 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 -etymology-of-mitianshi-daoan/
[154]. 大唐西域記:三佛經行側有窣堵波。是梅呾麗耶唐言慈即姓也。舊曰彌勒訛略也菩薩受成佛記處. User dictionary Maitreya,新稱彌帝隸,梅低梨,迷諦隸,梅怛麗,每怛哩,梅怛麗藥,昧怛[口*履]曳。菩薩之姓也。譯曰慈氏。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為補處之菩薩。光佛入滅,生於兜率天內院。
[155]. 佛國記: 僧問法顯。佛法東過其始可知耶。顯云。訪問彼土人。皆云。古老相傳. 自立彌勒菩薩像。後便有天竺沙門。齎經律過此河者。像立在佛泥洹後三百許年。計於周氏平王時。由茲而言。大教宣流始自此像。非夫彌勒大士繼軌釋迦。
[156].User dictionary: 彌勒: Maitreya,新稱彌帝隸,梅低梨,迷諦隸,梅怛麗,每怛哩,梅怛麗藥,昧怛[口*履]曳。菩薩之姓也。譯曰慈氏。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為補處之菩薩。光佛入滅,生於兜率天內院。
[157].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Fallacy of 六書.
[158]. 三國志 韓傳: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女王國東渡海千餘里 去女王四千餘里。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 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
[159]. 字書 釋名:釋船: 帆,泛也,隨風張幔曰帆,使舟疾汎汎然也.〔古文〕𩗋《廣韻》音凡。《集韻》舟上幔以帆風。《廣韻》船使風。船使風也。《玉篇》與𦨲同。塞外有烏桓山。一作烏𠁽。《魏志·烏丸傳》太祖引烏𠁽之衆,服從征討,而邊民得用安息。又通作垸 樹木
[160]. 山海經:先以六書。服常樹,其上有三頭人,伺琅玕樹. 象形者,畫成其物,隨體詰詘,「日、月」是也。 詘:詰詘也。一曰屈襞。从言出聲. 詰:問也。从言吉聲. 詩經民勞: 無縱詭隨.
[161]. 단군왕검(壇君王儉)은 실존 인물이였다. The legendary Dangun Wanggeom was a real person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162]. 晉書: 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是歲,扶南等二十一國、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天下兵起,大戰。日鬥,下有拔城. 冊府元龜:開拔奇之津使天下馳騁而起矣. 高岱字孔文受性聰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無名氏皆世之英偉也.
[163]. 三國志倭人傳: 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女王國東渡海千餘里. 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164].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南夷、西南夷,大抵在交州之南及西南,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165]. 通典 指南車: 魏明帝青龍中,令博士馬鈞紹而作焉。車上有木仙人,舉手恒指南。車箱迴轉,所指微差。晉亂復亡 東晉義熙十三年,劉裕平長安,始得此車,復修之。一名司南車。駕駟其下,制如樓,三級,四角金龍銜羽葆。刻木為仙人,衣羽衣,立車上,車雖迴運,而手恒指南
[166]. 十六國春秋 : 解飛,不知何許人。機巧若神,妙思竒發。虎至性好佛,眾巧奢麗,不可勝紀。飛嘗為虎作檀車,廣丈餘,四輪作金佛像,坐於車上,九龍吐水灌之。又作一木道人恒,以手摩佛心腹之間。宋書 “指南舟:石虎使解飛,姚興使令狐生又造焉。宋武帝平長安,始得此車。其制如鼓車,設木人於車上,舉手指南。車雖回轉,所指不移。晉代又有指南舟。索虜拓跋燾使工人郭善明造指南車,彌年不就。扶風人馬岳又造https://bf.wiki2.wiki/wiki/Xie_Fei_(inventor)
[167]. 大唐西域記: 金銀銅鐵每加摩瑩。饌食既訖嚼楊枝而為凈。澡漱未終無相執觸。每有溲溺必事澡灌。身塗諸香。所謂栴檀鬱金也。君王將浴。鼓奏絃歌祭祀拜祠沐浴盥洗。遂使瑞表恆星。鬱玄妙於千載。美文德之盛。鬱為稱首。北拘盧洲舊曰。鬱單越。鳩樓。訛也金輪王乃化被四天下.
[168].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圖經.
[169]. 隋書:流求國,居海島之中,當建安郡東,水行五日而至。土多山洞。其王姓歡斯氏,名渴剌兜,不知其由來有國代數也。彼土人呼之為可老羊,妻曰多拔荼。所居曰波羅檀洞.KBS역사저널 그날. 마도3호선의 비밀. KBS 역사추적 –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로 갔다
[170]. 通典: 天子從昆侖道入。昆侖道,即依黃帝時制也,舊唐書: 廣州地際南海,每歲有昆侖乘舶以珍物與中國交市。舊都督路元睿冒求其貨,昆侖懷刃殺之. 自林邑以南,通號為「昆侖. 貞臘國,在林邑西北,本扶南之屬國,「昆侖」之類。新唐書: 廣州昆侖殺其都督路元睿。武后時,累遷廣州都督。南海歲有昆侖舶市外區琛琲,前都督路元睿冒取其貨. 驃國 as Key word.
[171].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四年春正月.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辛亥,封安肅公張柔為蔡國公,以趙璧為樞密副使。癸丑,敕封昔木土山為武定山,其神曰武定公;泉為靈淵,其神曰靈淵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城大都。帝撫慰之曰. 무우왕 無憂王 Ashoka Origin of Tibetan Buddhism « Lee Mosol’s Book Collection 。
[172]. 唐玄宗《題梵書》:鶴立蛇形勢未休,五天文字鬼神愁。支那弟子無言語,穿耳胡僧笑點頭。支那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173]. 太平廣記 蠻夷二 新羅 又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其後子孫戲錐求狼糞,因雷震,錐失所在。出《酉陽雜俎》
: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苻堅伐慕容桓於遼東.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174]. 元史:汀州路。唐開福撫二州山洞置州,治新羅,後改臨汀郡,汀州宋隸福建路。
[175]. 海國圖志 卷五: 東南洋一海岸之國. 萬國地理全圖集》曰:四大地之中,亞齊亞最廣大。大地北極出地二度,至七十八度,英國中線偏東。南及印度海,有東京、暹羅、北耳西海隅。
[176]. 三國史記 : 遼東道安撫副大使遼東行軍副大捴管兼熊津道安撫大使行軍捴管上柱國樂城縣開國男劉仁軌
[177]. Wikipedia:「Giant Farang Guard Statue at Wat Pho in Bangkok, Thailand.
[178]. 太平廣記 新羅: 新羅國有第一貴明鈔本「貴」作「國」。族金哥。其遠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畝,乃求蠶穀種于弟,弟蒸而與之。旁㐌不知也. 他日有中旨,令與一官謫去,特授長江縣尉,稍遷普州司倉而終
[179]. 舊唐書:普州中隋資陽郡之安岳縣。武德二年,分資州之安岳、隆康、安居、普慈四縣置普州
[180].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181]. 北史: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三國志 倭人傳於羅屬大秦,其治在汜復東北,從於羅東北又渡河,斯羅東北又渡河。斯羅國屬安息,與大秦接也
[182].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183]. 隋書: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𨈭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
[184]. 隋書: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牟羅國,其船得還,經於百濟,昌資送之甚厚,並遣使奉表賀平陳.其南海行三月,有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
[185]. 熱河日記「所謂畓洞 以其長時沮洳 故我人所名云 畓本無字 我東吏簿水田二字合書作會意 借音沓
[186]. 三國遺事: 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沓坪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187].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三: 奈勿尼師今 十八年,百濟禿山城主,率人三百來投,王納之,分居六部。 「兩國和好,約為兄弟。今大王納我逃民,甚乖和親之意,非所望於大王也,請還之。」答曰:「民者無常心,故思則來,●則去,固其所也。大王不患民之不安,而責寡人,何其甚乎?」百濟聞之,不復言。
[188]. 三國志 弁辰傳: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飲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 ㅠㅠ帝妃
[189]. 論衡 說日: 儒者曰:「日中有三足烏,月中有兔、蟾蜍。」.
[190]. 說苑 猿壽五百歲變為玃。玃壽千歲。蟾蜍壽三千歲,騏驎壽二千歲。,酉陽雜俎:舊言月中有桂,有蟾蜍,故異書言月桂高五百丈,下有一人常斫之,樹創隨合。人姓吳名剛,西河人,學仙有過,謫令伐樹。釋氏書言須彌山南面有閻扶樹,月過,樹影入月中。或言月中蟾桂地影也,空處水影也,此語差近. 《後漢·天文志》嫦娥竊羿不死藥,奔月,及之,爲蟾蜍。
[191]. 大唐西域記: 東至小川澤。泉池澄鏡林樹青蔥。有僧伽藍. 商諾迦縛娑舊曰商那和修訛也大阿羅漢 所持鐵缽量可八九升。及阿羅漢於中漱口嚼楊枝. 越黑嶺入北印度境至濫波國北印度境.
[192].大唐西域記: 今王本那羅延天之祚胤。婆羅門之種也。字婆塞羯羅伐摩唐言日胄號拘摩羅唐言童子自據. User dictionary Nara-nari,那羅為男性,那里為女姓。言男女兩性之會合,為那羅那里之娛樂。理趣釋上曰:「妙適者,即梵語蘇羅多也。蘇羅哆者,如世間那羅那里娛樂。「那羅,此云力。即是捔力戲,亦是設筋力戲也。」二曰:「那羅,翻上伎戲。」正言捺羅,此云人
[193].史記 殷本紀:殷契,母曰簡狄,有娀氏之女,為帝嚳次妃。三人行浴,見玄鳥墮其卵,簡狄取吞之,因孕生契。
。婆羅門之種也。字婆塞羯羅伐摩唐言日胄號拘摩羅唐言童子自據. User dictionary Nara-nari,那羅為男性,那里為女姓。言男女兩性之會合,為那羅那里之娛樂。理趣釋上曰:「妙適者,即梵語蘇羅多也。蘇羅哆者,如世間那羅那里娛樂。「那羅,此云力。即是捔力戲,亦是設筋力戲也。」二曰:「那羅,翻上伎戲。」正言捺羅,此云人
[194]. 三國史記: 真平王立。諱白淨,真興王太子銅輪之子也。母金氏萬呼一云萬內。夫人,葛文王立宗之女。妃金氏摩耶夫人,葛文王福勝之女。王生有竒相,身體長大,志識沉毅明逹。
[195].단군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96].三國史記: 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斯多含年十五六,請從軍,王以幼少不許,其請勤而志●確,遂命為貴幢裨將,其徒從之者亦衆。及抵其國界,請於元帥,領麾下兵,先入●檀梁●檀梁,城門名。加羅語謂門為梁云。其國人,不意兵猝至,驚動不能禦,大兵乘之.
[197]. 尚書 虞書:益曰:「吁!戒哉!儆戒無虞,罔失法度。罔遊于逸,罔淫于樂。任賢勿貳,去邪勿疑。疑謀勿成,百志惟熙。罔違道以干百姓之譽,罔咈百姓以從己之欲。無怠無荒,四夷來王。
[198].隋書: 倭國.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隋大業三年,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199]. 宋史:日本國僧奝然與其徒五六人浮海而至,獻銅器十餘事,並本國《職員今》、《王年代紀》各一卷。奝然衣綠,自云姓藤原氏,父為真連;真連,其國五品品官也。奝然善隸書,而不通華言,問其風土,但書以對云:「國中有《五經》書及佛經、欽明天皇即位十三年,壬申歲始傳佛法于百濟國,當此土梁承聖552/2/11 – 553/1/29 承聖元年元年 壬申歲始傳佛法于百濟國
[200]. 元史: 本紀第六 世祖三: 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 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 元史 地理四: 昆陽州,下。在滇池南,僰、獹雜夷所居,有城曰巨橋,今為州治。閣羅鳳叛唐,令曲旂蠻居之。段氏興,隸善闡. 今夷中名其地曰羅伽甸 [元史: 汀州路,唐開福、撫二州山洞置州,治新羅,後改臨汀郡,又仍為汀州。宋隸福建路. 帝欲通好日本,以高麗與日本鄰國. 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朝議興兵討暹國、羅斛、馬八兒、俱藍、蘇木都剌諸國. 會蘇木達國亦遣人因俱藍主乞降.]
[201]. 欽定滿洲源流考卷十八: 梁書新羅土地肥美宜植五榖多桑麻作縑布. 北史新羅田甚良沃水陸兼種其五榖果菜鳥獸物產略與內地同.隋書新羅田甚良沃水陸兼種物產輿華同.”新羅”梁書新羅國有六喙█五十二邑勒詳後語言條內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按滿洲語哈濟親近也新羅官名不止于此而此數官皆有旱支二字之稱與哈濟音實相近或皆屬近臣之稱耳
[202]. 三國史記: 陷王所都漢城,殺其王扶餘慶,迎致漢城中.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六:遣沙飡須彌山封安勝為高勾麗王。新羅王致命高勾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仁教被於玄菟。本支不絶 ,年將八百。至於津
[203]. 晉書志第五 地理下: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苻堅伐慕容桓於遼東.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204].三國史記 新羅本紀: 高僧智明入陳求法.-遣使大柰麻上軍入隋進方物。高僧智明隨入朝 使上軍還. 三國遺事:來獻道場。智明日折山中異木一枝歸呈之 太平廣記 神仙十九:忽覺心智明悟,併憶前事。隋書:仁壽中,會交州俚人李佛子作亂,據越王故城: 會交州俚人李佛子作亂,據越王故城 至都隆嶺 而又畫像於清涼臺及顯節陵上.五臺舊曰慮虒,久廢。後魏置,曰驢夷。有五臺山
[205]. 三國史記 新羅本紀:奈觧尼師今立,伐休王之孫也 加羅王子来請救。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将六部兵往救之. 于勒所製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時人請奉為花郞,不得已為之。眞興王命伊●異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206].隋書: 倭國.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隋大業三年,其王多利思比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