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loration of Gojoseon Capital Geum-Midal.
Abstract: Although the meaning is embedded, no one has yet provided a reasonable explanation about the time and place of Gojoseon Capital Geum-Midal. This brief essay confirms that, Geum-Midal was one of many names applied to the place not far away from the Battle of Baideng (白登之戰) where Han emperor Gaozu surrender to the Xiongnu. As the Emperor Yang of Sui (楊廣) Sui was trapped once by Khan of Turkic peoples(突厥) at the Yanmen Pass(鴈門關), Prince of Qin(李世民) participated to the rescue operation.
Exploration of Gojoseon Capital Geum-Midal.
Abstract: Although the meaning is embedded, no one has yet provided a reasonable explanation about the time and place of Gojoseon Capital Geum-Midal. This brief essay confirms that, Geum-Midal was one of many names applied to the place not far away from the Battle of Baideng (白登之戰) where Han emperor Gaozu surrender to the Xiongnu. As the Emperor Yang of Sui (楊廣) Sui was trapped once by Khan of Turkic peoples(突厥) at the Yanmen Pass(鴈門關), Prince of Qin(李世民) participated to the rescue operation.
Yanmen Pass is the strategic point connecting between the valleys of central Shanxi in Dai County to the Fen River(汾河) passing by the Linfen(臨汾市, 平陽), Shanxi Province. It was the most important ancient trail as old as the Silk Road. It became a strategically important point between the Turkic people in the west, Goguryeo in the east and Chinese in the south. Goguryeo and Sui was fought in 598 which was the first part of the Goguryeo-Sui Wars known as the Battle of Linyuguan (臨渝關) by the Yu Creek(渝水). The name had been changed many times. Creek (聖水 堯水 遼水) and Citadel (臨渝關, 柳城, 頹當城) are few examples. Ideographs “滹沱河” and “桑乾水” are a PLCs combined with PSMCs of Korean word meaning “the Creek passing by the town Hu the stranger and the Creek of Two Khan”.
금미달 소고(今彌達小考).
하남성 북쪽 급군 위 안희왕(安釐王) 무덤에서 죽간이 발굴 되었다.[1] 그 내용에 고조선의 수도 이전이 실려 있었다. 원주민 공백 화(共伯和)가 주 여왕을 몰아내고 후에 선왕(周宣王:前828年 -前783年在位)이 들어 섰다는 때 부터 전국시대 까지 고조선의 수도가 탁군(涿郡)에 있었다. 시경 한혁의 보피한성(溥彼韓城)이 상곡에서 흘러나온 성수 연안에 있었다.[2] 한고조가 해씨(蓋氏)들이 사는 옛연(故燕)나라 땅을 쪼개서 탁군을 설치 했다.[3] 군과 현의 이름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성씨가 되었다. 고구려 성씨, 해씨, 해비씨, 도굴범 클 부 부준(不準)의 성씨는 해씨에서 나왔다.
시대와 문맥을 살펴 보면 금미달 (今彌達)은 전국시대 초기 산서성 진양 (晉陽:山西省太原市)에서 한조위(韓、趙、魏) 세 가문이 싸워 (晉陽之戰: 기원전 455-453년) 삼가분진 (三家分晉) 현상이 기원전403年에 나타 났던 이후다. 위진시대 혼란기에 급군(汲郡)에 있던 무덤이 도굴 당했다. 급군은 목야전이 있었던 들판 북쪽 조가(朝歌縣南有牧野)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비준(不準) 이라는 도굴꾼이 281년 (진태강 2년)에 죽간과 보물을 발굴 했다. 그 내용은 모두 위나라 역사 기록이 었다. 위나라의 역사를 안희왕 (魏安釐王; 기원전276-243년) 집권 27년 까지 기록 되었다.
금미달(今彌達)에 지금이라는 글자는 기원전 250년 경이다. 그때 부터 2000년전에 고조선을 세웠다는 뜻이 분명 하다. 평양(平陽)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부르기 기작 했다(都平壤城始稱朝鮮)는 기원전2250년 경이 된다. 단기계산을 기원전 2333년이라 함은 합당성이 있다.
금미달 (今彌達)의 현 위치:
수서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본 고죽국(高麗本孤竹國) 이라고 했다. 한서지리지와 후한서 지리지에는 요서군에 영지, 유성(柳城),고죽성, 임유관이 있다.[4] 배구의 예기는 수양제와의 대화에서 고구려가 선제 공격으로 임유관 (臨渝關戰鬪: 598 년)을 공격한 사연을 예기 했다. 임유관이란 유수 (渝水)에 임한 관문이다.[5] 설문해자에는 “渝:變汙也”라 했다. 변한(變汙,弁韓) 사람들, 즉 정정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을 지나는 여울이란 뜻이다. 또한 사기 (史記)라고 출처를 밝히고 [유수가에 사는 사람들이 가무를 좋아 해서, 한고조가 그 음을 택해서 후대 사람들이 그 글자를 더했다. 수나라 때에 渝州로 바꾸었다] 라고 했다. 현존하는 사기에는 스러한 문구가 없다.
한국 기록에만 여러 글자로 기록 했던 변(弁, 示, 卞)한의 어원이 밝혀졌다. 초씨역림(焦氏易林)에는 임감송사 (臨. 坎. 訟. 師)란 백익(伯益)의 고난을 뜻한 글자 풀이에 (鑿井求玉,非卞氏寶。名困身辱,勞無所得)라 했다[6]. 다른 두 글자(弁, 示)는 설명이 구구하다.
고구려 백암성(白巖城)의 위치가 밝혀 졌다. 당태종이 처음 탈환한 고구려의 요세였다. 이를 정복하고 극고려백암성소(克高麗白巖城詔)를 남겼다. 이 지역을 변진지야(弁辰之野)라고 했다. 그 일대를 통치하던 오환(烏丸)왕 답돈(蹋頓, ? ~ 207년)을 조조가 무산고(巫山高) 라고 부르던 유성(屠柳城)을 정벌 했다.[7]
구당서(舊唐書)에 무현 무산의 내력이 있다.[8] 한나라 때에 구치무자성 (舊治巫子城), 즉 무당이 다스리던 곳을 수 나라때에 무산으로 바꾸었다. 산해경에 한경제(漢景帝) 때라 밝힌 대황 서경에 유대무산(有大巫山)이라 했다. 여씨 춘추 에는 삼위지국 무산지하(三危之國,巫山之下)라 했다. 고조선 발생지 북쪽에 무당이 살던 산이 있었다. 태평어람에는 옛적에 선왕이 무산의 딸을 부인으로 택했다. 고당의 객으로 그를 접대 했다.[9]
수나라 이후 무산고(巫山高)란 이름을 “戰芒山, 戰河陰. 鶴樓峻” 등 여러번 바꾸었다. 요서(遼西)지역 요충지 임유관 그 일대 이름을 여러번 부꾸어 유성 용성 하는 이름을 요녕성 서남부에 옮겨 심었다.[10]
여씨춘추에 처음 나오는 가장 멀리 떠러진 곳에 있던 여울이란 뜻의 요수(遼水)다. [11] 이는 삼황의 첫쩨 요 임금과 관계가 있다 하여 요수(堯水) 라 하던 여울을 음이 비슷한 다른 글자로 바꾸었다.[12] 탁장수가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름과 음이 비슷한 발구산(發鳩山)에서 시작 했다.상당의 큰아들 (上黨長子)이 살던 서쪽이라 했다. 이 중요한 계곡을 경계로 요동 요서 하는 글자가 나타났다. 춘추오패의 첫쩨로 치는 제 환공이 고죽국 정벌에 나섰다.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비이지계 (卑耳之谿)에서 쫓겨온 여울을 요수(遼水)라 했다. 수경주에 나오는 성인 성자 성수(聖水)가 상곡에서 나와 요수(遼水)와 이어 진다.[13] 진시황이 기원전 226년에 연태자 단 (燕太子丹)을 정벌하고 상곡군을 만들었다. 산서성 서쪽 분수와 해하 상류의 분수령 일대의 고유명사와 여울의 방향이 모호하게 기술 되었다. 역수(易水) 호타하 성수 하는 이름이 본보기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그곳을 지나 요수 동쪽 발해만 서쪽에 사마천이 양평(襄平)이라고 부르던 조선 땅 경계에 이르렀다.[14]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기 말기에 고구려가 하북지역을, 백제가 중원을 석권하던 최 전성시기였다.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와 고구려가 598년에 요수 서쪽(遼西) 지역에 있던 임유관에서 전쟁이 발생 했다. 임유관이 오늘의 기러기 안자 안문(雁門)관이다. 두루미 미(彌)를 기러기로 바꾸었다. 미(彌)자는 시경 초씨역림 초사등 경전 문헌에 많이 실렸다.[15] 글미(彌)자 풀이가 다양 하다. 광운에 꿀 밀(廣韻 蜜)을 설명한 문구에 곡식 곡자 곡성(穀城)이 중산경에 실렸다. 정상에 꿀벌이 있다 이름을 미(彌)라 했다. 그러나 현존 하는 산해경에는 곡성(穀城)이란 글자는 있지만 두루미 미(彌)자가 없다. 이를 숫탉(雄鷄) 이란 글자로 실었다.[16]
여러 자전에는 미(彌: 𢑀. 弛弓也. 徧也. 終也. 益也. 長也,久也。又遠也) 자가 단군왕검 백익 (伯益)의 후손이란 뜻이 있는 글자다. 백익의 후손들이 전국시대 초기에 분수계곡을 따라 올라 와서 마읍(馬邑)에 수도를 정하고 살았다. 이 곳이 예적 북당(北唐)이라던 곳의 수도 였다. 한고조 유방의 신하였던 한왕신(韓王信)이 흉노 땅에서 항복 했던 곳이다. 이를 한무제 시절에는 패허가 되어 퇴당성(頹當城)이라 했다.[17]
수경주에 마읍 (馬邑)이란 이름의 유래를(蓋狄語音訛,馬、磨聲相近故爾) 현지인의 어음 “mǎ, mɑ, njiɛ̌”이 비슷하여 잘못 전해저서 나타난 이름이라 고 설명 했다.[18] 한국어를 아는 사람은 즉각 이해 할수 있다. 이(爾ěr)자는 무루미 미(彌mí)자에서 활궁 (弓)변을 삭제 했다. 중국어로도 미(彌mí)와 이(爾ěr)는 달리 읽는다. 미추홀(彌鄒忽), 彌勒佛 卑彌國 비미호(卑彌乎; 일어로 히미꼬) 하는 미자는 유목민의 지도자란 뜻을 지닌 글자다.
금미달 (今彌達)이 홍산문화 중심지인 북쪽에서 분수계곡을 따라 중원으로 내려가는 요충 분수령에 설치 되었던 임유관 일대 가까이 있었다. 그 곳에서 한고조가 신흥세력 모둔선우에게 잡혀 화친약속을 했던 마읍 (馬邑)이다.[19] 같은 곳에서 수양제가 포위 당했었다. 그러한 요충지를 새로 증축하여 신성(新城) 이라 했다. 당시에 신성유새공(新城柳塞空)이라 한 곳이다. [20] 여러문헌을 종합해 보면 곡성(穀城)는 당숙우가 서쪽에서 구해 왔다는 농작물이란 뜻이 있는 곳이다. 현지 음이 잘못 전해진 사음자로 기록 되었다고 본다.
임유관 앞을 지나는 여울을 성수(聖水) 또는 호타하(滹沱河)라고 했다.[21] 오늘의 산서성 삭주시 (朔州市)에서 태원으로 내려오는 계곡이다.
수나라 개황초 총관부(開皇初置總管府)를 마음(馬邑)에 설치 했다. 옛 삭주 (朔州)다. 대군(代郡)에 쌍건하(桑乾水)라 했었다.[22] 이충이 돌궐을 하북 어느 산에서(上柱國李充破突厥於河北山) 또 마읍(馬邑)에서 격파 했다. 돌궐 가한 개민의 장막(啟民可汗帳)에서 고구려사신이 수나라 사절단을 보았다는 일화가 수서 배구전과 구당서(舊唐書:)에 같은 문구로 기록 되어있다.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高麗之地本孤竹國也)입니다. 주나라 때에 기자를 봉한 곳입니다.[23] 삼국사기에는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高麗本孤竹國”라 했다. 삼국사기에는 대륙 북제가 중원의 옥새를 잡고 있던 시절, 고구려는 양강상호왕 양원왕(陽崗上好王 陽原王, ? ~ 재위 : 545년 ~ 559년) 조에 당시 동북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기술 되었다. 양원왕 전후 왕들의 호에 고구려의 전성기를 암시하고 있다. 고구려는 미추홀(彌鄒忽)에 정착 했던 비류의 후손이 세운 대륙백제에 사신을 보냈다. 서쪽의 돌궐병이 고구려 신성(圍新城)을 친입 했다 실패 하여 백암성(白巖城)을 공격 했다. 고구려에서 돌궐군을 대파 했다. 그 기회를 노려 고구려 동남 변경을 신라가 침략 했다.[24] 온조의 후손이 자리 잡았던 반도 백제는 남쪽으로 밀렸다. 옛 땅을 찾으려고 버티던 백제를 한강 남쪽으로 밀어 버렸다. 그 다음 해에 장안성을 쌓았다. 장안성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태종이 정벌한 고구려 백암성(白巖城)은 새로 설치했던 신성(新城)가까이에 있었다. 현존하는 안문관(雁門關)을 이루는 어느 한 성을 고구려가 쌓고 이름을 신성이라 했다.
이러한 영토확장에 반대하던 자들이 환도성을 점령하여 이들을 진압 했다.
이 시기가 고구려와 대륙백제가 중원 세력과 겨루던 최 전성기였다.
오호십육국 말기에 돌궐, 고구려, 그리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세력과 접하던 요충지 마읍 (馬邑)일대가 격전지가 되었다. 수양제가 옥문에서 돌궐군에 포위 당해 “煬帝於 雁門為突厥所圍”, 이세민이 구조대에 응모(太宗應募救援) 했다.[25] 한고조가 흉노에게 포위 당했던 곳이다. 전략적 요충지라 많은 전쟁이 발생 했다. 전국시대 조 무령왕(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이 그곳에 있던 중산국을 정벌하고 고유(高柳)란 이름을 붙여 대군(代郡)의 현이 되었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옥문군(鴈門郡) 마읍(馬邑)이 대군 상곡군 일대에 실렸다. 안문산(鴈門山)이 고유(高柳)북쪽에 있다
수양제 시절에 3월 임자(壬子)일에 탁군(涿郡)을 지나서 10일 후 계해 (癸亥)일에 임유궁 (臨渝宮)에 도착 했다.[26] 두 지역의 거리가 예측 된다. 수경주에 따르면, 탁군(涿郡) 방성현(方城)에 한혁의 한후 부피한성이 있었다. [27] 고조선 수도 이전에“名弓一作方忽山”라한 곳이라 본다. 죽간이 발굴된 곳이 옛적에 조선 땅이 었다. 이를 위나라의 영역이라 했다. 스님이 인용한 위서(魏書) 내용은 고조선 역사가 분명 하다.
오호십육국시대를 지나면서 善陽 廣安이름을 썼다.[28]
순자정론(荀子正論)에는 난세의 어려움을 다루면서<왕옥산 요새에 숨었던 사람이 어떻게 동쪽에 있는 낙원 땅을 알수 있겠느냐 면서,이를 우물안의 개구리 우화 (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로 다루었다.
황하 문명의 발생지에서 요순임금이 양위(堯舜擅讓)를 했다. 그곳에서 치수사업을 주관했던 고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이 지도자를 잃고 떠나 북쪽 으로 올라와 중산국(中山)에서 부유(扶柳)족을 흡수하여 호타하 (滹沱河) 연안에 제단 (擅呼沱)을 쌓았다. 오손의 오(烏)자를 음이 같은 “호:呼, 乎,虖, 戶, 胡”자로도 기록 했다. 호타(滹沱.呼沱)란 뜻은 <호(胡) 저 다른 사람(它)이 사는 땅>을 지나는 여울(沱)이란 뜻으로 예하(濊河)라고도 했다. 산서성에서 나와 천진을 관통하여 발해만으로 빠지는 해하 (海河)의 한 줄기다. 타(它)자는 시경 홍명(鶴鳴)에 나오는 타산지석(它山之石)이란 타자에 물수변을 더한 글자다. 타(它: 宀:匕)자는 “他, 牠”와 같이 <저들 유목민>이란 뜻으로 해지(解池)연안에 살턴 토착 민을 그린 합성 상형글자다. 설문에 바다해(海)자를 천지(天池)라 했다. 광운(廣韻)에는 설문해자에 실린 천지를 설명 했다. 산서성에 있는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해지(解池)가 분명하다 .
호타하(滹沱河)는 치수(治水) 성수(聖水)라고도 불렀다.[29] 쌍간하(桑乾河) 영정하(永定河)와 같이 발해만 천진(天津)을 지나는 해하(海河)의 지류다.
호타하란 [우리와는 다른 서쪽에서 온 호, 蓋狄]가 사는 마을을 지나는 강이란 뜻의 사음자다.[30] 상형 글자로 쌍간 (桑乾)이라고 붙인 뽕나무 쌍자는 한국어 가차자다. 두 지도자란 뜻을 뒤섞어 만든 글자다.
끝
January 19, 2021
[1].晉書 蓋魏國之史書: 初,太康二年,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或言安釐王冢,得竹書數十車。其《紀年》十三篇,記夏以來至周幽王為犬戎所滅,以事接之,三家分,仍述魏事至安釐王之二十年。蓋魏國之史書,大略與《春秋》皆多相應。其中經傳大異,則云夏年多殷;益乾啟位,啟殺之;太甲殺伊尹;文丁殺季歷;自周受命,至穆王百年,非穆王壽百歲也;幽王既亡,有共伯和者攝行天子事,非二相共和也。
[2].水經注 聖水: 聖水出上谷. 故燕地,秦始皇二十三年,置上谷郡. 聖水自涿縣東與桃水合.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世謂之寒號城
[3]. 通典 邊防十 序略: 北狄,白虎通云:「狄者,易也,言辟易無別。」說文云:「狄本犬種,故從犬。」以畜牧為業.唐虞則山戎,夏則獯鬻。周則獫狁,懿王時德衰,侵暴及涇陽. 人被其苦。至曾孫宣王,乃命將討伐,至太原,稱為中興,四夷賓服.
[4]. 漢書 地理志上: 昔在黃帝,作舟車以濟不通,旁行天下,方制萬里,畫野分州. 遼西郡,且慮,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臨渝. 後漢書: 遼西郡: 五城: 令支, 有孤竹城。肥如臨渝
[5]. 說文解字 :。从水俞聲。一曰渝水,在遼西臨俞,東出塞 《史記》:渝水之人善歌舞,漢高祖采其聲。後人因加此字。隋攺爲渝州。
[6].克高麗白巖城詔 作者:李世民 唐: 焚櫬錫爵,驅馳遼浿之間;鑿井耕田,編列弁辰之野。古人有言曰:「全國為上」,蓋斯之謂焉。 又燕碣土風,素多霖霔。軒皇遭召雨之寇,晉後苦湧水之災。自朕出師,上靈幽贊,旭日澄靄,膚雲輟陰。所指未有堅城.
[7].三國志 烏丸傳: 建安十一年,太祖自征蹋頓於柳城,潛軍詭道,未至百餘里,虜乃覺。尚與蹋頓將衆逆戰於凡城,兵馬甚盛. 太祖征三郡烏丸,屠柳城。袁尚等奔遼東.從征烏丸於柳城.晉書 柳城: 改《巫山高》為《屠柳城》,言曹公越北塞,歷白檀,破三郡烏桓於柳城也。改《上陵》為《平南荊》 十六國春秋 柳城:皝以柳城之北龍山之南. 籍田遂改柳城為龍城縣時棘城黑石谷.
[8].舊唐書 巫山: 巫山漢巫縣,屬南郡。隋加「山」字,以巫山硤為名。舊治巫子城
[9].呂氏春秋 求人: 西至三危之國,巫山之下,飲露、吸氣之民,積金之山,共肱、一臂、三面之鄉
太平御覽 雲:昔者先王嘗游高唐,怠而晝寢,夢見婦人,曰:『妾巫山之女也,為高唐之客,聞君游高唐,愿薦枕席。』 有大巫山。山海經 大荒西經:有金之山按:夏后開即啟,避漢景帝諱云
[10]. 隋書 柳城: 盛興屯田於玉門、柳城之外. 分為四番,於遼西柳城營屯. 柳城後魏置營州於和龍城
舊唐書 : 柳城漢縣,屬遼西郡 英國公李勣為遼東道行軍總管,出柳城.
[11]. 呂氏春秋:何謂六川?河水,赤水,遼水,黑水,江水,淮水. 說苑:齊桓公北征孤竹,未至卑耳谿中十里,闟然而止,瞠然而視有頃,奉矢未敢發也。管仲曰:「事必濟,此人知道之神也。走馬前者導也,左袪衣者,前有水也。」從左方渡,行十里果有水,曰遼水。 使蒙公、楊翁子將,築修城。西屬流沙,北擊遼水,東結朝鮮,中國內郡挽車而餉之
[12]. 水經注 濁漳水: 濁漳水出上黨長子縣西發鳩山. 堯水自西山東北流,逕堯廟北,又東逕長子縣故城南,周史辛甲所封邑也。《春秋·襄公十八年》,晉人執衛行人石買于長子,即是縣也。秦置上黨郡,治此。其水東北流入漳水。漳水東會于梁水,梁水出南梁山.
[13]. 水經注 聖水:聖水出上谷. 故燕地,秦始皇二十三年,置上谷郡.《詩·韓奕章》曰:溥彼韓城,燕師所完,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鄭玄曰:周封韓侯,居韓城為侯伯,言為獫夷所逼,稍稍東遷也。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世謂之寒號城,非也。聖水又東南流,右會清淀水,水發西淀,東流注聖水,謂之劉公口也
[14]. 史記: 蒙恬列傳筑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
[15].焦氏易林: 既濟:精誠所在,神為之輔。德教尚忠,彌世長久。三聖尚功,多受福祉
[16]. 山海經 中山經:《中次六經》縞羝山之首,曰平逢之山,南望伊洛,東望穀城之山。有神焉,其狀如人而二首,名曰驕蟲,是為螫蟲,實惟蜂蜜之廬。其祠之:用一雄鷄,禳而勿殺。
廣韻 蜜: 蜂所作食。《山海經》云:穀城之上足蜂蜜之廬亦蟲名彌
[17]. 漢書 魏豹田儋韓王信傳: 信之入匈奴,與太子俱,及至頹當城,生子,因名曰頹當。韓太子亦生子嬰。至孝文時,頹當及嬰率其眾降。漢封頹當為弓高侯,嬰為襄城侯
廣韻 蜜: 蜂所作食。《山海經》云:穀城之上足蜂蜜之廬亦蟲名彌
[18]. 隋書 馬邑: 馬邑郡舊置朔州。開皇初置總管府.大業初縣改曰善陽,置代郡,尋曰馬邑。又有後魏桑乾郡
舊唐書: 朔州隋馬邑縣。武德四年,置朔州,領善陽、常寧二縣。其年,省常寧縣。天寶元年,改為馬邑郡。乾元元年,復改為朔州。馬邑秦漢舊名,久廢。開元五年,分善陽縣於大同軍城置
[19]. 水經注: 桑乾水自源東南流,右會馬邑川水,水出馬邑西川,俗謂之磨川矣。蓋狄語音訛,馬、磨聲相近故爾。其水東逕馬邑縣故城南,干寶《搜神記》曰:昔秦人築城于武州塞內以備胡,城將成而崩者數矣。有馬馳走一地,周旋反覆,父老異之,因依以築城,城乃不崩,遂名之為馬邑。或以為代之馬城也
[20]. 通典 邊防十 序略: 北狄,白虎通云:「狄者,易也,言辟易無別。」說文云:「狄本犬種,故從犬。」以畜牧為業.唐虞則山戎,夏則獯鬻。周則獫狁,懿王時德衰,侵暴及涇陽. 人被其苦。至曾孫宣王,乃命將討伐,至太原,稱為中興,四夷賓服.
[21]. 通典 邊防十 序略: 北狄,白虎通云:「狄者,易也,言辟易無別。」說文云:「狄本犬種,故從犬。」以畜牧為業.唐虞則山戎,夏則獯鬻。周則獫狁,懿王時德衰,侵暴及涇陽. 人被其苦。至曾孫宣王,乃命將討伐,至太原,稱為中興,四夷賓服.
[22].隋書 煬帝下: 扶風人唐弼舉兵反,衆十萬,推李弘為天子,自稱唐王。三月壬子,行幸涿郡。癸亥,次臨渝宮,親御戎服,禡祭黃帝,斬叛軍者以釁鼓。夏四月辛未,彭城賊張大彪聚衆數萬,保懸薄山為盜.
[23].隋書:從帝巡於塞北,幸啟民可汗帳。時高麗遣使先通於突厥,啟民不敢隱,引之見帝。矩因奏曰:「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代以之封箕子
[24]. 三國史記 突厥:遣使入北齊朝貢。秋九月,突厥來圍新城,不克,移攻白巖城。王遣將軍高紇,領兵一萬,拒克之,殺獲一千餘級。新羅來攻,取十城郡 . 八年,築長安城
[25].舊唐書 太宗上: 大業末,煬帝於雁門為突厥所圍,太宗應募救援,隸屯衛將軍云定興營。
[26].隋書 煬帝下: 扶風人唐弼舉兵反,衆十萬,推李弘為天子,自稱唐王。三月壬子,行幸涿郡。癸亥,次臨渝宮,親御戎服,禡祭黃帝,斬叛軍者以釁鼓。夏四月辛未,彭城賊張大彪聚衆數萬,保懸薄山為盜.
[27]. 水經注 易水: 易水出涿郡故安縣閻鄉西山. 聖水《詩·韓奕章》曰:溥彼韓城,燕師所完,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鄭玄曰:周封韓侯,居韓城為侯伯,言為獫夷所逼,稍稍東遷也。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世謂之寒號城,非也。聖水又東南流,右會清淀水,水發西淀,東流注聖水,謂之劉公口也
[28]. 通典: 恆州時恆州,今代郡安邊、馬邑。又上言,白登山今馬邑郡界。漢武帝患匈奴屢為邊患,雁門馬邑豪聶壹因大行王恢言:「匈奴初和親,親信邊,可誘以利致之,伏兵襲擊,必破之道也。」
[29].太平御覽:朔州,馬邑郡。屬《禹貢》冀州之域。虞及周,為并州地。春秋時為北狄地。戰國時屬趙。秦為雁門郡。漢為雁門郡之馬邑也《冀州圖》云:趙武靈王胡服而征,遂有獫狁之地。漢高帝以韓王信壯武,乃以太原郡為韓國,徙信以備胡。信以晉陽去塞遠,請理馬邑。上乃許之。后匈奴圍信,信數求救,上賜書責信。信懼,以馬邑降胡《冀州圖經》曰:元姬山,在馬邑
[30].水經注 聖水:漢高祖六年,分燕置涿郡,涿之為名,當受涿水通稱矣,故郡、縣氏之.
January 23, 2021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