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3:서안평 (遼東西安平)일대의 영토 분쟁:
몇달 전에 올린 “창해군에 얽힌 비밀”에서 대륙 백제의 존제를 숨기려고 발생지에 나타났던 滄海郡 부터 조작 했다고 주장 했다. 그 곳에 공손씨가 나타났다.
공손도(公孫度, ? ~ 204년) 를 요동 양평인(遼東襄平人)이라고 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지명이다. 그 때 부여는 고조선의 서쪽 세력 선비와 동쪽 세력 고구려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공손도가 부여왕 위구대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妻以宗女)드렸다[1]. 동탁은 공손도를 요동 태수로 임명 했다. 그 직책을 공손연이 이어 받아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2]. 고구려의 왕위 쟁탈전 발기 (拔奇)사건에 나타나는 요동(遼東)이 천진-당산 일대다[3]. 이 사건과 관련된 인명과 지명을 깊히 살펴 보면, 졸본주(卒本州)의 요하 하구에서 천진항에 이르는 해안선을 <대방 고지 미추홀(彌鄒忽)에 자리 잡았던 비류의 후손이 이어 받은 대륙 백제>가 관장 했다.
요동에 갔던 발기(拔奇遂往遼東)는 손책의 친구(其友士拔奇) 로 나온다[4].
그가 갔던 요동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오열홀(遼東城州,本烏列忽)이다. 잘못 인식하여 오열홀이 졸본주에 있었다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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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 백고(新大王伯固; 재위 165년~179년)의 큰 아들 발기(拔奇)가 졸본부여에 살았다. 그가 요동으로 돌아 가고 아들에게 넘겨 준 단로성 (檀盧城) 고구려가 흡수하고, 그 곳에 살던 삶들 600여가를 부여 남쪽 오천(扶餘南烏川)으로 옮겼다[6]. 삼국사기에 나오는 문구”達賈出奇掩擊,拔檀盧城,殺酋長”에 “拔檀盧城”라 뜻은 <발조선(拔朝鮮)의 단로성 또는 발기의 후손이 살던 단로성>으로 풀이 함이 옳다.
삼국사기에 <부끄러워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자살하였다>는 표현은 천진-당산 일대로 도망<肥水, 肥泉?>가서 죽었다는 사실을 은익 했다고 본다.
요동 태수 공손연이 요하 동쪽 양평성(襄平城)에서 잡혔다[7].
언제부터 공손연이 오늘의 요양 양평성에 자리를 잡았다 하는 문제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처음에 공손연이 요동(遼東)의 실권을 잡자 조위는 228년(太和二年; 太和;227年-233年正月) 그를 양렬장군 요동태수 (明帝即拜淵揚烈將軍,遼東太守)
로 임명 했다[8]. 열양(揚烈)은 방언에 조선 열수지간(朝鮮洌水之間,列水, 烈口) 이라고 부르던 이름을 바꾼 난하 유역을 뜻했다. 공손연이 고구려와 공모하여 조위를 치려다 실패하여 결국 조위 사마선왕에 잡혀 죽었다. 이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한 내용이 혼미 하다.
남쪽 사람들은 같은 지명을 사기에 실린 장소로 인식 했다:
삼국지 본문에는 장군 하달등 장병만인(將軍賀達等將兵萬人)을 인솔하고 태상 장미(太常張彌)가 공손연에게 많은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乘海授淵) 했고, 같은 사건을 오서(吳書曰)에는 오나라 사절단 400여명(官屬從者四百許人)이 공손연 (公孫淵 , 제위; 237-238) 영역인 갈석산 남쪽 양평(襄平)에 도착 했다[9]. 공손연은 손권의 진의를 타진 하려고 사절단을 요동 여러 현에 분리시켜 감시 했다[10]. 동오의 사절단60명을(黃彊等及吏兵六十人)요동에서 북쪽으로 200리 떠러진 현토군 (玄菟郡在遼東北)에 보냈다. 현토군에 배속 되었던 동오 사람60명이 공을 세우려고 그곳에서 반항 하다 실패 했다. 구사 일생으로 600여리를 도망처서 고구려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알리니,고구려왕 궁(句驪王宮)이 이들을 후대하여 안평 항구을 떠나(宮遣主簿笮咨、帶固等出安平) 동오에 돌려 보냈다.
손권과 공손연, 고구려와의 사이에 발생 했던 사건은 진위를 확인 할수 없지만 남만주와 동오와의 교류 항구는 고구려 영역이었던 안평구 (安平口) 였다. 항구 서쪽이 삼국사기에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3년– 146년) 초기부터 요서에 10개의 성(築遼西十城)을 쌓고, 집권53년에는 한 요동 6현을 빼았었 (王遣將入漢遼東,奪掠六縣)다. 노년에는 동생 수성(遂成; 次大王, 71년~165년,
재위 146년~165년)을 보내서 한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낭랑태수 처자를 대려 왔다는 지역이다[11].
삼국지와 후한서에도 서안평 분쟁이 실렸다. 무구검이 성취 못하고 돌아간 후에 사마선왕이 공손연을 정벌 할때 고구려가 조위를 도왔다. 공손연이 사라진 후에는 조위와 영토 분쟁이 생겨 공손연이 웅거 했던 요동 서안평을 공략 했다. 그 후에 영토분쟁이 계속되어 무구검이 고구려를 침략 했다. 무구검이 처들어온 길을 지도위에 그려 보면 현토 옥저 환도산 숙신씨정 남쪽 바위에 부내(不耐)란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장소를 추리 할수 있다. 무구검(幽州刺史毌丘儉)이 공손연을 토벌 하러고 요동 남쪽 (遼東南界) 에 진을 첬다. 그를 협조하던 우부평 오환선우 (右北平烏丸單于)와 요서 오환 도독(遼西烏丸都督)은 요동에 남아 무구검에게 내부 했다. 요동의 관리와 평민이 공손연의 헙박에 못이겨 항복했던 자들은 모두 사면 시켜 주었다. 대륙백제 사람들이다[12] . 무구검을 도왔던 졸본부여의 숙신씨는 고구려에 냉대를 받았다. 조위에 구원을 청해 조위가 친입 하다 실패하여 도망을 갔다. 숙신(肅愼)씨는 스스로 들고 일어나 고구려 왕실에 반항 했다. 왕자 달가 (達賈)가 280년에 단로성(檀盧城)을 정벌 하고 졸본부여지역의 잔여 세력 600여 가구를 부여남쪽 오천(扶餘南烏川)유역으로 보냈다[13]. 천진-당산 일대를 오천이라 했다. 이 때 까지를 중고(中古, Mid-Antiquity, Middle Antiquity)라 했다.
서안평 일대의 영토 분쟁은 동천왕을 거저 15대 미천왕 을불(美川王, 재위 : 300년– 331년)이 낭랑 대방이 있던 발해만 서남쪽을 정벌한 기록에 나타난다. 그 후에는 서쪽에 접해 있던 선비족(鮮卑族)의 모용씨(慕容氏)와 대립 하기 시작했다[14]. 모용씨는 고구려 14대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년~300년) 집권시에 처음 나타난다. 하늘에서 떠러진 부족이 아니다. 고구려 서쪽에 있던 부족이 이름을 바꾸었다. 모용이란 이름은 부여 왕이 쓰던 면류관에 달린 보석이 흔들리는 소리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부여의 한 야심자가 공손도가 했던 수법을 썼다. 부여 왕을 죽이고 공주를 부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고구려와 상접 하여 충돌 했다. 후에 전연(前燕) · 서연(西燕) · 후연(後燕) · 남연(南燕)을 건립하였다. 해비씨가 해씨와 비씨로 성을 바꾸듯 일부 자손들은 모씨(慕氏) 또는 용씨(容氏)로 바꾸었다.
서안평 일대의 영토 분쟁은 공손이란 이름이 처음 나타난 시기 부터 공손연 (公孫淵 , 제위; 237-238)이 주살 당할 때 까지는 발해만 연안에 살고 있던 삼한의 후손들(新羅, 大陸百濟, 伽倻, 倭)이 공손씨 세력에서 묻혀 나타 나지 않았다. 공손연이 사라진 후에는 각자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상황이 실려 있다.
이 시절에 나타나는 선비족, 특히 모용씨와 단씨(段氏)는 도울 부자 부여(扶餘)의 후손으로 대륙백제 세력을 뜻했다[15]. 공손연이 사라지고 부터는 남만주 살던 삼한의 후예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 전국시대로 접어 들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비려(碑麗)라고 실렸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골도 고도(骨都, 古都, 別都) 라고 은밀 하게 기록한 졸본부여 즉 금조선(今朝鮮)의 종주권을 놓고 두 나라 왕이 전사하는 치열한 전쟁을 격었다. 그통에 어부지리 (漁父之利)를 신라가 얻어 강국이 되였다.
끝.
January 17, 2019
[1].三國志 魏書三十 夫餘傳: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
[2]. 三國志 公孫度傳: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時玄菟太守公孫琙,子豹,
早死。度少時名豹,又與琙子同年,琙見而親愛之,遣就師學,為取妻。同郡徐榮為董卓中郎將,薦度為遼東太守.
[3].三國志 高句麗傳:自伯固時,數寇遼東.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
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4]. 三國志 吳書一 孫策傳: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 太守盛憲以為上計,舉孝廉.遼東太守公孫恭兄子淵劫奪恭位,遂以淵領遼東太守.權遣使浮海與高句驪通,欲襲遼東。遣幽州刺史毌丘儉率諸軍及鮮卑、烏丸屯遼東南界,璽書徵公孫淵
[5].三國史記:十一年,冬十月,肅愼來侵,屠害邊民氓。王謂群臣曰:「寡人以●未末之軀,謬襲邦基,德不能綏,威不能震,致此●敵,猾我疆域。思得謀臣猛將,以折遐衝,咨爾群公,各擧奇謀異略才堪將帥者。」群臣皆曰:「王弟達賈,勇而有智略,堪為大將。」王於是,遣達賈往伐之。達賈出奇掩擊,拔檀盧城,殺酋長,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降部落六七所,以為附庸。王大悅,拜封達賈為安國君,知內外兵馬事,兼統梁貊、肅愼諸部落。
[6]. 三國志 高句麗傳: 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
[7]. 三國志 公孫度傳:初,恭病陰消為閹人,劣弱不能治國。太和二年,淵脅奪恭位。明帝即拜淵揚烈將軍、遼東太守。
淵遣使南通孫權,往來賂遺
[8]. 三國志 吳書一: 孫策傳,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 太守盛憲以為上計,舉孝廉.遼東太守公孫恭兄子淵劫奪恭位,遂以淵領遼東太守.權遣使浮海與高句驪通,欲襲遼東。遣幽州刺史毌丘儉率諸軍及鮮卑、烏丸屯遼東南界,璽書徵公孫淵
[9]. 三國志 : 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
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10]. 三國志 吳主傳: 三月,遣舒、綜還,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乘海授淵. 吳書曰:初,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衆,置遼東諸縣,
淵果斬彌等,送其首于魏,沒其兵資。權大怒,欲自征淵..以中使秦旦、張羣、杜德、黃彊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11].三國史記:三年 ,築遼西十城,以備漢兵。五十三年,春正月,扶餘使來,獻虎,長丈二,毛色甚明而無尾。王遣將入漢遼東,奪掠六縣。秋八月,王遣將,襲漢遼東西安平縣,殺帶方令,掠得樂浪大守太守妻子。十六年,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梁書』:「以司馬懿討公孫淵,王遣將,襲西安平,毋丘儉來侵。」『通鑑』:「以得來諫王,為王位宮時事。」
[12]. 三國志 吳書一孫策傳: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 太守盛憲以為上計,舉孝廉.遼東太守公孫恭兄子淵劫奪恭位,遂以淵領遼東太守.權遣使浮海與高句驪通,欲襲遼東。遣幽州刺史毌丘儉率諸軍及鮮卑、烏丸屯遼東南界,璽書徵公孫淵
[13].三國史記: 達賈出奇掩擊,拔檀盧城,殺酋長,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降部落六七所,以為附庸。王大悅,
拜封達賈為安國君,知內外兵馬事,兼統梁貊、肅愼諸部落。東川王: 十六年,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美川王:十二年,
秋八月,遣將襲取遼東西安平.二十年,晉平州刺史刺使崔毖來奔。初,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使共攻慕容●,三國進攻棘城。●閉門自守,獨以牛酒,●宇文氏。與國疑宇文氏與●有謀。宇文大人悉獨官曰:「二國雖歸,吾當獨取之。」
[14].三國史記:東川王: 十六年,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美川王:十二年,秋八月,遣將襲取遼東西安平. 二十年,晉平州刺史刺使崔毖來奔。初,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使共攻慕容●,三國進攻棘城。●閉門自守,獨以牛酒,●宇文氏。與國疑宇文氏與●有謀,各引兵歸。宇文大人悉獨官曰:「二國雖歸,吾當獨取之。」
[15].三國志:濊貃、扶餘單于、焉耆、于闐王皆各遣使奉獻。。遼東下郡,何得擅稱拜假也?」忠曰:「我遼東在滄海之東,擁兵百萬,又有扶餘、濊貊之用;當今之勢,彊者為右,曹操獨何得為是也?」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