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5:
조선(朝鮮)이 요하 동쪽으로 나타난 사연:
지난Jan 12, 2019, 11:39 AM에 이어 Jan 15, 2019, 9:28 AM 또 다시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1”을 올렸다. 진수가 오묘하게 남만주 지명들을 기술했스니, 더이상 혼돈하지 마시라는 경고를 했다.
고전에 “요동, 패수, 낭랑, 대방, 양평 지역”이 기원전128년(元朔元年) 에 사기 평준서(平準書)에 실린 창해지군 (滄海之郡)이 나타났던 곳으로 대륙 백제의 발생지다. 이를 계속 하여 보충 수정했다. 의문이 많은 공손도가 그 곳에 나타난다.
중국 사관들은 부여(夫餘, 扶餘)에서 분가 하여 한해의 동서 연안으로 흐터져 나갔던 삼한의 후예들을 오묘히 기록 하여 풀이마저 혼미 하다. 대륙 백제의 존제를 은패 하려는 술책에서 <遼河 서쪽에 있던 朝鮮이 遼河 동쪽 遼陽 일대>로 옮겨 젔다. 그로 인하여 한해의 동서 두 곳에 수도를 두었던 백제의 왕성 했던 해상 교류가 뚜렸하게 기록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천진항을 떠나 한반도 대동강 하류 북쪽에 있던 구야한국(其北岸狗邪韓國), 즉 온조왕의 수도 한성(漢城)에 이르는 <백제의 동 서 두 수도 간에 활발 했던 해상 교류의 증거품이 강서고분 유적> 이라고 본다. 구야 한국(狗:gǒu. 邪:xié xú yá yé yú shé )은 변진전에 나오는 변진 구야국(弁辰狗耶國)과 교류가 있었다. 그 곳에서는 철이 나서 중국사람들이 시장에서 동전을 쓰듯 한 예 왜와 (낭랑 현토) 두군에도 공급한다[1]. 천진항이 한무제 이전부터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하여 사마천은 조용히 발해만 서남 쪽 해안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 (燕齊之閒靡然發動) 했다. 무역의 원리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뜻의 평준서를 남겼다. 옛적 부터 사용하던 화패 “龜貝金錢刀布之幣興”를 들었다[2]. 古朝鮮의 황금시대에 칼모양의 쇳덩어리(刀錢)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관자에 실렸다[3]. 변진전에는 철을 그 일대 사람들이 사용 했다: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천진 항에서 뱃길로 요동만 북쪽 해안을 따라 한반도 서남쪽 해을 거처 구주에 이르는 활발 했던 해양 항로를 동이전, 특히 왜인전에 자새하게 실었다.
어떤 속샘으로 부여를 뜻이 다른 글자“夫餘와 扶餘”를 사용 했나? 왜 부여 왕 우대 (優台)이름 사이에 원수구 자를 넣어 위구대(尉仇台)라 했나[4]? 왜 맏 백자 백제 (伯濟)가 사라지고 온조왕에 관한 기록은 없나? 왜 부여왕이 공손도를 대릴 사위로 맞아드렸던 (妻以宗女) 일차 사료를 부여왕이 공손도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고 기록 했나? 등등 ,창해군 설립부터 공손연이 살던 지역의 역사를 옳바로 풀이 하려면, <1 + 1 = 2>하는 단순한 증명 방법으로는 의문점을 풀수가 없다.
필자가 주장 한 “절차적 삼단론법”이라는 새로운 고대사 연구 방법을 인용 해야 함정에서 나올수 있다. 필자가 인용한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조선(朝鮮)이 요하 동쪽으로 나타난 사연>을 설명 한다:
현제 중국과 일본에서 올린 Wikipedia의 내용을 보면 1931년 상해 상무인쇄관 (上海 : 商務印書館)에서 출판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인용 했다. 출판사에서 인용한 일차 사료의 출처는 한서 지리지에 나타난 남만주의 군현 이름이다[5].
한서의 저자 반고와 함께 교서랑에 임명되어 궁중 도서의 교정과 정리를 맡았던 가규(賈逵, 30년 ~ 101년)는 조정이 신비주의적 예언과 괴이한 참위를 좋아한 점을 알고 고전을 참우설로 풀이 하여 황실의 신임을 받아다. 한서는 문번 난성(文繁難省)이라, 즉 글이 번잡하여 이해하기 어려워서 황제가 순열(荀悅, 148년 ~ 209년)에게 명하여 한서의 내용을 기전체로 개조 해서 만든 책이 전한기다[1].
[1]. 後漢書 荀韓鍾陳列傳: 帝好典籍,常以班固漢書文繁難省,乃令悅依左氏傳體以為漢紀三十篇,詔尚書給筆札
후한서 가규열전을 보면 그가 옛 경전에 실린 백여 만자 (百餘萬言)를 바꾸어 어마어마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아 슬프다는 기록이 있다.
“ 後漢書. 賈逵傳:逵數為帝言古文尚書與經傳爾雅詁訓相應. 逵所著經傳義詁及論難百餘萬言,學者宗之, 後世稱為通儒.
論曰:鄭、賈之學,行乎數百年中,遂為諸儒宗,亦徒有以焉爾。
賈逵能附會文致,最差貴顯。世主以此論學,悲矣哉”
그러한 사람들이 편술한 한서를 일차 사료로 인용 했다. 출발 부터 사료를 잘못 선택 하고 틀린 사료를 후세 사람들이 다시 인용 했다. 참위설을 앞세웠던 사가들의 영향력이 진수에게도 끼첬다고 본다. 진수가 남긴 이해 하기 오묘한 기록을 후한 말기에 응소(應劭曰)가 주를 붙였다:
사마천의 조선 열전에는 우거왕의 방어지나 수도가 강물로 싸였다는 기록이 없다. 물에 둘러 싸였다는 근거를 어디서 구했나 궁금하다.
응소는 그러한 근거를 <신찬(臣瓚曰)이 왕험성은 낭랑군 패수 동쪽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에 있다. 이러니 당연히 험독이야.> 라고 했다. 같은 내용을 강희자전에서도 인용 했다[6].
신찬(臣瓚)이란 어느 사람을 뜻한 글자다. 그가 누구인가는 학인 해 보았다.
중국에서 올린 “위키백과”에는 수경주에 나오는 서진의 설찬(西晉 薛瓒)을 신찬이라 했다[7]. 그러나 수경주에 설찬이 그러한 예기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대요수( 大遼水) 요동 양평헌 서쪽(過遼東襄平縣西)을 지나 망평현을 지난다. 진시황이 연을 멸하고 설치한 요동군이다. 뒤에는 공손연이 장군 필 (畢軌;
?-249年) 을 보내 언수(將軍畢衍)에서 사마선왕과 대치 했던 요수(遼隊)가 그 곳이다[8]. 양평(襄平)과 의문의 요수(遼隊)현과 망평현(望平縣)은 앞서 설명한 서안평(西安平)과 같이 위만 조선과 경계였던 번한현 (至滿潘汗為界, 番汗)모두 발해만 서쪽에 있었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영역이였다[9]. 그러나 끝에는 후한서 군국지를 인용하여 양평과 요수현(襄平縣, 遼隊縣)을 요하 동쪽으로 풀이 하고, 대요수 (大遼水)가 그 일대를 지난다고 풀이 했다.
패수(浿水) 또한 허진의 설문해자를 인용 하여<낭랑(樂浪)누방현에서 출발 하여 동남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 간다. >고 옳바로 설명 했다. 그러나 浿水의 위치를 바꾸어 설명 했다: 전국시대에 위만의 왕험성(王險城)이 있다가 뒤에는 한서 지리지를 인용 하여 태자하를 패수라 했다[10]. 권 14 어디를 보아도 험한 물을 끼고 있다는 뜻의 험독(險瀆)이란 글자는 없다. 오직 한서 지리지 요동군에 험독(險瀆) 현이 보이고, 후한서에는 요서군에 속했던 의무려산 일대에 험독방(險瀆房)이 나타난다[11].
응소(應劭)가 인용 했다는 신찬(臣瓚曰)이란 문구의 출처가 모호하다[12]. 수경주에 나오는 설찬(薛瓚曰)을 응소가 신찬 이라 했다고 풀이 한다. 그러나 수경주 어디에도 설찬이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옛 문헌을 고찰 해 보면 사기에도 유신찬(有臣瓚)이란 문구가 있다고 하나 현존하는 사기에는 없다. 안지추가 독단에서 “臣瓚者,於瓚也”라 했다[13]. 추적해 올라가 보면, 주역 습감 (習坎)에 왕공(王公)이 그 나라의 수비를 위해 만들었던 (王公設險以守其國) 천애의 요새었다. 돼지들의 함정이라 했던 해지연안의 왕옥산을 뜻했다[14]. 강희자전에는 그 곳 상고종이 부열을 얻었던 부암성이 있던 곳이라 했다[15]. 이곳이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수도 평양 가까이에 있던 왕검성 (王儉城)이다. 삼국유사에는 신찬(臣讚)이 설명을 인용 하여 왕검성이 낭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 하고, 옛적 한국 역사서는 낭랑이 평양이라고 잘못 인식하여 왕검성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고 했다[16].
응소(應劭)를 비롯한 중국 사가들은 의식적으로 동북아 상고사를 위조 했다. 이러한 조작된 낭설을 인식치 못한 한국 선학들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받아 드렸다.
중국사가들이 그렇게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요하 건너 심양-요양 일대에 어디서 왔는 가를 알수 없었던 정신적 지도자 단군(壇君, 禮君)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 했다. 이를 논형에는 당도(當都)라 했고 예문류취(藝文類聚)에서는 동명이 떠났던 곳을 고려국(高麗國)이라 했다[17]. 진수는 골도(骨都, 古都)라고 은미 하게 기술 했다. 중원 세력이 남만주의 진실을 알기 전에 적봉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요하 동쪽에 요하문명을 이루었다. 요하문명의 수도에 온조가 내려가 왕이 되었다.
이 곳을 위래성(慰禮城)이라 했다[18]. 남만주에 있는 해성시(海城市)인듯 하다. 위례(慰禮)란 글자는 예군(禮君, 壇君)중에서도 제일 높은 단군, 즉 최고 제사장을 훈역한 글자다.
끝
[1].三國志 魏書三十 弁辰傳:弁辰亦十二國.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為王。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2].史記 書 平準書: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太史公曰:農工商交易之路通, 而龜貝金錢刀布之幣興焉。所從來久遠,自高辛氏之前尚矣,靡得而記云。故書道唐虞之際,詩述殷周之世,故先王各用於其重,珠玉為上幣,黃金為中幣,刀布為下幣。
[3].三國志 魏書三十 弁辰傳:弁辰亦十二國.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為王。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4].三國志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
[5].中國古今地名大辭典: 險瀆縣: 漢置。後漢因之。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瓚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説是也。當在今遼寧盤山縣境内濱海之地。康熙字典: 《史記·朝鮮傳》都王險。《註》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前漢·地理志》遼東郡險瀆。《註》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名。
[6].康熙字典: 《史記·朝鮮傳》都王險。《註》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前漢·地理志》遼東郡險瀆。《註》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名。
[7].维基百科: 薛瓒,西晋太原人薛瓚即《漢書》的註解家臣瓚,北魏酈道元在《水經注》十六卷「穀水注」中明確指出薛瓚 《漢書注》。孟森著《臣瓚考》認為臣瓚為即薛瓚。
[8].水經注: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東南入塞,過遼東襄平縣西。直遼東之望平縣西屈而西南流,逕襄平縣故城西,秦始皇二十二年,滅燕置遼東郡,治此. 浿水: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即是處也.《郡國志》曰:縣,故屬遼東,後入玄菟。小遼水又西南逕襄平縣為淡淵,晉永嘉三年涸。小遼水又逕遼隊縣入大遼水。司馬宣王之平遼東也,斬公孫淵于斯水之上者也.
[9].三國志 : 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 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10].水經注 卷十四 : 浿水出樂浪鏤方縣.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僕.許慎云: 浿水出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考之今古,於事差謬,蓋《經》誤證也。
[11]. 後漢書 郡國五:故天遼,屬遼西。賓徒故屬遼西。徒河故屬遼西。無慮有醫無慮山。險瀆房
[12].漢書:元封中,星孛于河戍。占曰:「南戍為越門,北戍為胡門。」其後漢兵擊拔朝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武帝紀: 朝鮮王攻殺遼東都尉,乃募天下死罪擊朝鮮
[13].三國志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
[14]. 周易 易經 ䷜坎: 習坎,重險也。水流而不盈,行險而不失其信。維心亨,乃以剛中也。行有尚,往有功也。
天險不可升也,地險山川丘陵也,王公設險以守其國,坎之時用大矣哉!宋景文公筆記 考古: 《易》家有蜀才,《史記》有臣瓚,顏之推曰:「範長生自稱蜀才,則蜀人也。臣瓚者,於瓚也。」
墨子閒詁 非攻下:漢書地理志顏注引臣瓚,亦據世本明越非禹後。姒姓夏禹之後
朱子語類 小戴禮 禮器:近看臣瓚注漢書云,「經禮三百」,乃冠、昏、喪、祭,周官只是官名云云。乃知臣瓚之說,已非康成之說矣. 康熙字典:《前漢·武帝紀》衞靑將六將軍絕幕。《註》幕,沙幕。臣瓚曰:沙土曰幕,直度曰絕。 師古曰:幕者,今之突厥中磧耳
[15]. 康熙字典: 險:音獫。《說文》阻難也。《玉篇》高也,危也。《易·屯卦》動乎險中。《坎卦》習坎,重險也
本作巖。《史記·殷本紀》得說於傅險中。《註》險,亦作巖。《集韻》或作嶮. 周曰獫狁.
[16].三國遺事:都王儉李曰。地名。臣讚曰。王儉城在樂浪郡浿水之東. 夏。尼谿相參使人殺王右渠來降。王儉城未下.三國史記: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17]. 論衡 吉驗: 魚鱉解散,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天命不當死,故有豬馬之救;命當都王夫餘,
故有魚鱉為橋之助也. 藝文類聚 : 論衡曰:高麗國有侍婢
[18].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沸流、溫祚,恐為太子所不容,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百姓從之者,多。遂至漢山, 登負兒嶽,望可居之地,沸流欲居於海濱。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高岳,南望沃澤,西阻大海。其天險地利,難得之勢,作都於斯,不亦宜乎?」沸流不聽.十四年,春正月,(+來)遷(+漢山)都。二月,王巡撫部落,務勸農事。秋七月,築城漢江西北,分漢城民.二十五年,春二月,王宮井水暴溢。漢城人家馬生牛,一首二身。日者曰:「井水暴溢者,大王勃興之兆也,牛一首二身者,大王幷●國之應也。」王聞之喜,遂有幷吞辰、馬之心。沸流不聽,分其民,歸●鄒忽以居之。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為輔翼,國號十濟.其世系與 高句麗,同出扶餘,故以扶餘為氏。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