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The king Wei was the descendants of the lady Shaman Queen of Baekjae, Bimiho. They moved down along the coastal region of eastern China during the Sixteen Kingdom. All the names of the small six or seven town states recorded as Imna Gaya(任那加羅) and Silla (新羅) were in the eastern coastal region of China.
The place where the King Wei lived in the southern dynasty historiographies is in the south eastern shore around the entrance of the Long River, not in the Japan.
남조 (宋, 南齊, 梁)역사서 나타난 倭王이 살던 곳:
남조 (宋, 南齊, 梁)역사서에는 倭五王이 임나가야 신라를 다스렸다는 문구가 있다. 이를 그 뿌리부터 찾아 살펴 보았다. 진서에는 임나가야 신라는 없고 후한시대 설치 되었다는 임성(任城) 임성국이 실렸다 . 그에 실린 왜는 동왜(東倭) 즉 비미호(卑彌呼)의 후손이다. 통전에 부여왕 위구대 (尉仇台)의 후손이 자치백제군(自置百濟郡)을 두어 남조의 송 제에 조공 (宋、齊並遣使朝貢)을 바쳤다 . 중원 동남 해안 월주에 백제 세력이 있었다는 근거가 확실 뚜렸하다.
위진시대에 전란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멀리떠나 갔다. 동북아 멀리 숙신씨가 수 천리 피란을 가서 장승(totem pole)을 새우고 살았다. 중국 동해안을 따라 동남아 부남 임파(扶南,林邑), 즉 태국 캄보디아 방향으로도 피해 갔다 . 양나라 때에는 인도 (天竺國)남쪽 섬나라에 까지 이르렀다 .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부견(秦苻堅,재위 : 357년 ~ 385년)이 요동에 있던 모용환(慕容桓於遼東)을 정벌할 당시에 사신을 보내 백제왕 여구를 진동 장군(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으로 하여 낭랑태수직을 (領樂浪太守) 주었다 . 후에 척발규(拓拔珪)가 토벌한 모용환의 종말이 16국 춘추에 실렸다. 그가 백제왕 여구를 진동 장군(遣使拜百濟王餘句) 의 아들 여휘(餘暉)에게 같은 작위를 주었다. 그러나 낭랑 태수란 작위가 없다. 그가 남쪽으로 내려 갔다고 본다. 세자 여위에 관해서는 시경 귀뜨라미 (螽斯)편을 인용하여 백세앙 여휘(百世仰餘暉)란 문구를 남겼다 .
백제의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재위: 346년~375년)이 여구다. 삼국사기에는 양서(梁書)의 내용을 인용하여 영(映暎)이라 했다. 한중일 역사서에는 당시 백제 왕위 계승을 혼잡하게 기록 했다. 아신왕(阿莘王,
재위 : 392년-405년)의 큰아들이 세자가 된지 6년 만에 떠나서 아들이 왜에 인질로 갔다(六年出質於倭國)는 기록이 있다 .
십육국 춘추에는 모용수 편에 노양왕 왜노(魯陽王倭奴)란 글자가 실렸다. 비미호가 공손연과 같은 혈통이라 했다. 공손연과 고구려 왕자 발기의 후손이 중국 동해안을 따라 내려 가서 세운 나라를 왜국(倭國)이라 했다.
당시 왜는 중원에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천진 당산 일대에 있던 백제의 지도자가 진나라가 멸망한 시기에 강남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은 동진의 말기에 왜왕 찬(晉安帝時,有倭王贊)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 하는 진서에는 지도자와 도울 찬(贊)자와 관계된 글자는 모용찬 (慕容贊)이 있고, 찬을 광한왕(贊為廣漢王)으로 했다. 동이 20국이 조공을 바쳤고 광한왕이 죽었다는 문구가 있다 . 그러나 광한왕이 왜왕찬 (倭王贊)이라고 풀이 할수 있는 근거가 없다.
남제의 심약(沈約:441~513年)이 편술한 유송(劉宋:420년 ~ 479년) 역사서(宋書 夷蠻)에는 당시 유송의 해안선에 있던 여러 부족과 국가를 설명 했다 .
“왜는 바닷속 섬에 산다. 외국 여러 족속은 이수를 몰라 믿기가 어럽다. 흔히 3-천리 먼곳은 2-3만리를 배를 타고(乘舶舉帆)가는 길이라 거리 (里數)를 자세히 알수는 없다”
바람과 조류를 타고 먼 바다를 다녔다는 뜻이 있다. 먼거리를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존할수 있는 장비가 구비 되였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해안선을 따라 필수품을 보충 하면서 먼 거리를 다녔다.
후한시대에 씰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위진시대의 전란 통에 더더욱 번창하여 유송시절에는 중국 동남 해안을 따라 동남아와의 교류가 왕성 했다. 때때로 해안에 들려 필수품을 공급 받았다고 본다. 송서에 나타난 왜(倭)와의 교류 내용이 실렸다.
송서에는 422년에 왜찬만리수공(倭贊萬里修貢), 즉 왜의 찬이 만리밖에서 공물을 바쳤다고 했다 . 찬이 죽고 동생 진이 뒤를 이었다. 그가 조공을 바쳤다. 그후 472년(世祖大明六年)조공을 바쳤다. 그후 478년에 동정모인 55국 (東征毛人五十五國)과 서쪽으로 66국을 정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그동안에 조공을 바친 여러 왜국왕의 이름이 실렸다. 신라 임나가라를 포함한 7나라를 다스리라는 허락을 했다. 한해의 동쪽 일본 구주에서 本州 로 진출했다는 증거다. 중원 세력은 수나라 때에 처음으로 한해 남로를 거처 일본 열도와 유구에 도착 했다. 수서에 백제와 신라가 왜를 키웠다고 (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 했다. 수나라 이후에 일본이 나타났다 .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贊 도울 찬]자가 왜왕이 아니라 백제왕 모대 (牟大, 摩牟, 麻帝, 餘大)를 섬기던 장군 가사(假沙)의 법명 찬수류 (贊首流)라 했다 . 출처는 백제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이 제위 첫 해에 송나라 마지막 왕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빌가(假)또 다른 장군들도 법명으로 기록된 사람이 있다 . 당시에 동남아를 통하여 들어온 불교의 영향을 받아 법명을 많이 사용했다고 본다.
문제는 왜찬 倭王贊” 하는 글자 풀이다. 도울 찬(贊)자가 왜왕의 이름이 아니라 “칭찬, 추천 한다”는 뜻의 동사로 쓰였다. 왕찬(王贊武)이란 문구는 옛적부터 쓰여 왔다. 남제서에도 있다. 북사에는 모두 그렇게 풀이 했다. 그후 양서에 뚜렷하게 비미호(卑彌呼)의 후손에 진안재시 유왜왕찬 (晉安帝時,有倭王贊)이라 했다 . 그러나 진서 왕찬이란 글자는 여럿 있지만 왜왕찬이란 글자는 없다. 오직 비미호가 살던 동왜 (東倭)을 극찬 했다 . 남사에서는 왜찬 또는 왜왕찬 이라 하여 고유명사로 잘못 풀이 했다. 이를 일본이 인용 한다. 그 후에 왜오왕이라 하여 이름을 올렸다. 그 마지막 왕의 이름이라는 무자가 남제서에 왜왕 무호 위 진동대장군 (倭王武號爲鎮東大將軍)이라 했다. 이는 왜왕의 이름이 아니라 무호란 뜻이다. 그 다음 왕조 양서에는 “鎮東大將軍倭王武進號征東大將軍”라 했다. 한계단 높은 무호를 주었다는 뜻이다. 왕찬 또는 무(王贊 武)란 글자는 고유명사 이름자가 아니다. 왜왕의 이름을 만들어 붙였다.
한반도에 있던 백제 수도에서는 그 해에 유송(宋, 420년 ~ 479년)이 망하고, 소도성 (蕭道成, 재위:479년 ~ 482년)이 남제(南帝:479-502) 첫 황제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같은 사람, 좌평 사약은 (佐平沙若思)을 특사로 보내려 했지만 고구려 장수왕 (高句麗巨璉)이 해로를 맊아 중원에 가지 못했다. 장수왕이 백제수도 한성을 점령한 475년 이후에 강남에서 한반도 남쪽에 이르는 항로를 개발 했다. 송나라 마지막 왕이 479년에 한해의 동남쪽, 오늘의 일본 본주에 있던 원주민을 열도백제 (倭)가 정벌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까지는 한반도에서 한해 북로를 통에 산동 반도에 이르는 해로를 사용 했다. 신라는 수도를 장수왕 때에 경주로 옮기고 처음으로 백제의 사신을 따라 중원에 사신을 보냈다.
삼국사기와 유사에 나타난 신라와 가락국의 초기 역사에는 선조가 배를 타고 서쪽에서 왔다. 역사서에 실린 임나가야(任那加羅)는 광개토대왕 이후에 신라가 한반도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한반도 끝에서 일본 구주 지역에 정착 했다. 그 후에 한반도 끝에 있던 가야를 신라가 흡수 했다.
신라가 한반도로 천도한 이후에 새로운 나라란 뜻의 신라로 바꾸었다. 비문에 실린 임나가야 (任那加羅)와 신라(新羅)는 한반도가 아니다.
결론: 남조 (宋, 南齊, 梁)역사서 나타난 왜오왕(倭五王)은 후한 말 백제 여왕 비미호의 후손이라 했다 . 그들이 다스리던 부족국가 임나가야와 신라를 포함한 7 나라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 또는 백제를 제외한 6 나라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라고 했다.
문제는 양서에서 비미호(卑彌呼)의 후손에 도울 찬(贊)자를 왜왕의 이름으로 잘목 풀이 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왕찬(王贊)이란 문구는
옛적부터 쓰여 왔다. 양서 이후 남사에서는 왜찬 또는 왜왕찬 이라 하여 고유명사로 잘못 풀이 했다. 왕무(王武)란 글자는 무호란 뜻이었다. 모두 고유명사 이름자가 아니다. 이를 일본이 아직도 인용 한다. 삼국사기에 최치원이 말했다는 월주(越州), 즉 산동 반도에서 양자강 하류에 이르는 해안 지역에 부여의 후손들이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어 살았다. 이 곳을 통치하던 비류의 후손 한왕(汗王)을 왜왕(倭王) 이라 했다.
끝. March 21, 2020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