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 (樂浪公) 낙랑공주(樂浪公主)
낭랑(樂浪)이란 이름의 출처와 발생 시대가 밝혀 젔다. 한나라가 조선땅에 친입한 기원전 108년에 국경 지대였던 갈석산 (碣石山)일대를 통치하던 한무제의 행정구 이름이 낭랑군(樂浪郡)이다. 이를 삼국지, 통전, 당서에서는 한 낭랑(漢樂浪)이라고 했다 . 같은 시대에 또 다른 낭랑이 있었다는 뜻이다. 찾아 보면 왕이 다스리던 나라 최리의 낙랑왕이 있고, 삼국지에는 한(漢)이란 형용사가 붙지 않은 “낭랑 본통 한국(樂浪本統韓國)하는 문구”가 있다 . 이 두 낙랑은 한(漢)이 통치하던 낙랑이 아니였다는 뜻이 분명하다. 뒤에 다시 깊히 다루기로 한다.
낙랑(樂浪)이란 글자는 명사-형용사(noun as adjective, noun adjunct)로 갈석산 일대를 다스리던 집권자의 경칭으로 쓰여 왔다. 삼국시대 강남에서 군림했던 손권은 공손연에게 연왕()의 칭호를 주었다. 북쪽에서 실권을 잡은 조조의 후손은 공손연에게 낙랑공 (樂浪公)이란 칭호를 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공손연
(公孫淵, ?-238년)이 반기를 들어 공손도 일당이 남만주에서 소탕 되였다.
고구려 장수왕과 그의 뒤를 이는 문자왕(文咨明王: 491년-519년)은 발해만 서남쪽, 하북성과 산동성 일부를 뜻하는 영주와 평주를 통치 했다 하여 영평이두정동 대장군낙랑공 (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의 칭호를 받았다 . 당 나라 이백약 (唐李百藥, 564-647년)이 쓴 북제서(北齊書)에는 신라 진흥왕을 낙랑군공
(樂浪郡公)이라 하고, 북제의 첫 황태자에게는서하왕, 두쩨 인약에게는 낙랑 왕(樂浪王), 백제왕에게는 대방군공(帶方郡公) 의 칭호를 주었다 .
그 지역에서 나타났던 신라 왕에게도 낙랑공 (樂浪公)이란 경칭이 주어졌었다. 낙랑군의 남쪽 지역을 잘라 만든 대방 땅을 다스리던 백제 위덕왕 (威德王, 525년-598년)은 하남성 안양시 (河南省安陽市)에 수도를 잡고 있던 북제(高齊, 北齊;550-577년) 후주고위 (後主高緯)로 부터 대방군공백제왕 (帶方郡公百濟王)이란 칭호를 받았다 . 그 후에 오호십육국을 통일한 수나라 황제 양견(隋文帝杨坚;541-604년)으로 부터 또한 대방군공(帶方郡公)이란 칭호를 받았다 . 수양제 바로 전 까지도 백제는 중원 동쪽 산동성 해안 일대를 통치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여 백제는 수나라가 요동을 침략하려 계획을 새울 때 뱃길을 인도하겠다고 했지만 수나라는 백제의 속심이 의심스러워 받아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樂浪)이란 이름은 귀 부인의 경칭으로 낙랑공주 (樂浪公主)라는 칭호가 나타 났으니, 어원에는 “존경할 만한 또는 아름다운 여자”와 인연이 있다고 본다.
낭랑(樂浪)이“낸낸하고 잔소리 ()만 하던 나약한 지도자”란 뜻이 “여자 지도자”였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 지도자를 추모하는 이름이 그 곳에 있는 갈석산 어느 봉우리에 붙여진 낭낭정(娘娘頂)이란 이름이다. 그녀를 기리는 낭낭묘 (娘娘廟)를 갈석산에 새웠다. 한무제가 친입한 이후 그 지역에는 “낸낸하고 잔소리 ()만 하던 나약한 늙은 여자 무당”을 왕공대인 (壇君)과 같이 우상으로 섬겨 왔다. 그 지역 토속 신앙에서는 낭랑(娘娘)을 서쪽에 살던 “서왕모(西王母)가 동쪽으로 와 자리 잡은 최고의 여자 무당” 이라고 인식 했다. 이리 하여 낙랑(樂浪) 이란 이름은 발해만 서안에서 나타난 삼한의 후예들에게 만 적용되여 왔다. 낙랑국왕 최리(樂浪國王崔理)의 딸이 있고,고려 태조 왕건(高麗太祖王建)이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의 마지막 왕의 부인으로 신라를 흡수 했다. 서쪽으로 진출한 북연 (北燕, 407년-436년) 또한 삼한의 후예라 자부하여 낙랑공주 (樂浪公主)란 칭호를 썼다. 낙랑(樂浪)이란 이름이 북사(北史)에 여러번 나온다. 북사는 당나라 때 이연수(李延壽)가 중국 남북조시대(439년 – 589년)의 북조에 해당하는 “북위, 서위, 동위, 북제, 수나라” 네 왕조의 242년간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렇게 중국 문헌을 살펴 보면 낙랑(樂浪)이란 명칭이 갈석산 일대에서 처음 나타났다는 증거가 뚜렸하다. 이를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낙랑(樂浪)이란 이름을 결부 시켜 보면; 고구려 신라 백제 왜(倭)가 모두 다 갈석산 가까이에 있었다는 추론이 불가피 하다. 고구려의 풍속을 인용했다는 고기(古記)에 “고구려는 매년 3월3일이 되면 낙랑계곡(樂浪之丘)에 모여 사냥을 해서 제천의식을 치루었다 . 고구려는 고죽국이 옛적에는 자기들 땅이라 친입 했다는 위징의 예기와 제천의식에 바치기 위하여 낙랑계곡에서 사냥을 했다는 점은 고구려 사람들이 낭랑구에 특별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고 본다. 신라와 백제 본기에도 4세기 말까지 낙랑(樂浪)이 나타난다. 그때까지 두 나라가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는 증거다.
후연 (後燕; 384년-407년)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잡혀온 왕족 출신인 고운(高雲)
이 훈연을 멸망시키고 북연(北燕)을 새운 첫 황제다. 그는 고구려가 고양씨의 후예라서 고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했다 . 고구려의 혈통은 북쪽에 살던 전욱 고양씨(顓頊高陽氏)의 후손이 분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산서성 해지 동북 연안에서 를 북연 (北燕)의 초대 왕이 입증해 주었다. 산서성 해지(解池)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갈석산 유역에 와서 살았다는 증거가 이렇게 뚜렸하다.
끝
January 2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