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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
북쪽에서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고조선은 대흥안령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상이 달라지게 되였고, 전국시대 말기에는 중원과의 교류에도 뚜렷함 차이가 나타나 서쪽에 살던 부족의 무력이 우세 하게 되였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 잔여 무기를 획득한 서쪽 새력은 모둔선우(冒頓單于)의 지도 아래 대흥안령을 너머 동쪽에 있던 동호왕을 살해 했다 . 옛 동호왕이 다스리던 지역의 풍부한 자연 지원을 이용하여 다시 자라나던 위만조선의 세력은 한무제의 야욕에 또다시 비참한 희생을 당했다. 중원 세력의 친입로 청구 낙랑구로 기록되던 발해만 서안 일대가 5-세기에 걸처 고조선 원주민의 대 이동이 나타난 애피쌘터 (Epicenter) 가 되였다.
대흥안령 서쪽으로 쫒겨간 동호의 후손이 옛적 고향 땅을 찾아 내려와 침략자의 본거지를 송두리체 뒤흔들어 놓았다. 그 사람들을 호(胡)라 하고 그들이 새운 나라들을 16국이라 하여 그 기간을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 -439년)라 한다. 동쪽에서 해안을 따라 흐터저 나간 사람들을 한(汗, 干, 翰, 韓)이라 하여 그들이 주도권을 잡고 다니던 바다를 한해(翰海)라 불렀고, 이들이 살던 지역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삼한(三韓)이라 했다. 진수는 애피쌘터에서 북쪽으로 떠나가 중원 세력과는 접촉이 약했던 지역에 살던 부족을 부여와 읍루전(夫餘傳, 挹婁傳)에 실었다. 이들에 관한 자료는 출처와 설명이 미흡하다. 하여 부여와 고구려 발생 신화, 고구려의 첫 도읍지 있던 비류수상 (沸流水上)에도 의문이 남아있다 . 이문제는 뒤에 “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 을 다룰 때”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그 보다 더 북쪽에도 사람들이 살았겠지만 삼국시대 까지의 중국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록에 없던 사람들의 존제가 먼 훗날에야 나타났다. 이들이 동북쪽으로는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 배링해를 지나 아매리카 서북지역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시배리아의 소수민족이 되였다고 추리 된다.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한반도 동해안에서 고고학적 유물로 나타나고, 뱃길로 우릉도에도 원주민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 삼국지와 후한서를 중심으로 그에 실린 삼한(三韓)과 오호 (五胡)십육국의 발생 변천 과정을 간단히 살펴 조선열전 이후의 동북아시아 역사를 복원 해본다.
오호십육국시대는 고조선의 후예들 시대:
후한 말기에 중원에서 군웅이 활거하던 시대를 진수는 역사서 삼국지에 실었다. 이에 불만을 느낀 남족은 후한의 종구권을 유비가 이어 받았다는 시각에서 그 내용을 소설로 삼국연의를 남겼다. 그에 나타난 사마중달이 기반을 닦아 중원을 통일한 서진(西晉265-316년) 이 자신의 군사력을 확보하려고 북쪽에 살던 옛 고조선 땅의 원주민 조선호(朝鮮胡,東胡, 胡)를 많이 등용했다.
서진에 체용되였던 고조선 원주민들이 서진 2대 황제인 혜제(西晉恵帝, 290년-306년)때부터 봉기한다. 300년에는 사마씨의 후손들 간에 권력 투쟁이 나타났다. 이를 팔왕의 난이라 한다. 팔왕의 난 때는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산서성에 살던 흉노족을 규합하여 304년에는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선우란 칭호를 쓴 지도자가 나타났다. 이후 고조선의 여러 부족이 세력을 모아 306년에 봉기하여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황제는 48세로 원인 모르게 죽었다. 포로가 되였다는 설도 있다. 이를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 한다. 서진의 잔여 왕족이 강남으로 도주하여 진(晉)이란 이름을 써서 그때 부터를 동진(東晉)이라 한다. 당연히 남진(南晉)이란 이름이 합당하지만 삼한의 후예들의 활약상을 약화 시켜 동진 이라 하고, 동북쪽에 영향력이 오래 지속 되였다는 인식을 시키려고 100여년간 존제 한 동진을 포함 하여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439년)라 한다. 이 시대는 하북평원을 고조선 후예들이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어 통치 했다. 그 시대부터 북제(北齊,550년-577년)가 서쪽에서 세력을 모은 선비족 우문씨(宇文氏)가 건국한 북주(北周, 557년-581년)에 흡수되고, 수문제 양견(隋 文皇帝 楊堅)이 581년에 하북 평원을 통일하여 수나라를 건설 할때 까지 약 300년 동안 혼란기는 대흥안령 동과 서에서 풍토에 적응하여 나타난 호(胡)와 한(韓)으로 기록되는 옛 고조선 후예들의 집안 싸움이였다.
서진(西晉)에 가까이 살던 고조선 부족의 한 분파인 선비(鮮卑)족이 주동이 되여 5개의 국가를 창설하고 뒤에 다시 분리되여 16개의 국가가 회수(淮水)에 까지 이르렀다 . 이 150년간의 혼란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 한다. 도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위진 남북조 시대(220~589) 라는 이름은 고조선 여러 부족의 활동상을 약화 시킨 이름이다. 조위(曹魏,220-265년)와 서진(西晉, 265-316년)은 하북 평원에 자리를 잡고 한나라가 통치하던 중국 전역을 놓고 싸우 면서 옛 고조선의 후손 동호(東胡, 朝鮮胡, 胡)를 이용하였던 시기다. 이름에 보인다.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이 새운 위(魏)와 연(燕)
Google에서 “오호십육국시대” 도표 참조.
다음에는 한해(翰海)의 수로를 장악 했던 삼한의 후예들을 다룹니다.
끝
February 9, 2017
해안선은 삼한(三韓)의 후예가 통치:
중원의 내륙 지방은 대흥안령 서쪽에 살던 고조선의 후손들이 통치 했고, 해안선을 따라서는 한해(翰海)의 수로를 장악 했던 삼한의 후예들이 통치 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 때 초기에는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고운 (高云, 慕容云)이 후연(後燕)을 멸망시키고 북연(北燕, 407년-436년)을 건국하고 낙랑공주(樂浪公主)란 칭호를 썼다. 오호 십육국 시대 말기에는 고씨(高氏)가 산동성에서 20여년 동안 북제
(北齊, 550년-577년)를 건국했다. 24사의 하나인 북제서(北齊書)에는; “첫쩨 황제는 고씨(高氏) , 발해수인(渤海蓚人) 이다. 6세조 은(隱)은 현토태수였다. 하여 북변 지역 풍속은 선비와 같았다” 고 실려 있다 . 옛적부터 중원 특히 연제지간(燕齊之間)사람들이 산해관을 지나 만주에 이르는 통로에 살던사람들이 북제를 건국했다는 증거다. 그 이외에도 한국역사에 관한 기록이 많이 실려 있다.
낙랑지역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조선의 후예들이 대흥안령 서쪽에 살던 부족들과 세력 다툼이 일어 났다. 연 (燕)이란 나라 이름을 쓰던 사람들이 동호의 후손이라 하여 간략하게 호 (胡)라 했다. 고조선을 동호라 했고, 한무제가 친입한 지역을 조선호(朝鮮胡) 또는조선호국(朝鮮胡國)이라고 불렀다. 동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를 모아 위지 (魏志) 권30을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후한말에 나타난 “위, 촉, 오 세나라 전쟁”을 명나라 초기에 나관중(羅貫中,
1280년? – 1360년)이 소설로 남겨 이를 삼국연의 (三國演義)라 했다. 그 시대의 유명한 전략가 였던 간웅 조조의 아들이 새운 나라를 조위(曹魏,220-265년)라 하고 조조를 보필했던 사마중달의 후손이 새운 나라가 (西晉, 265-316년)이다. 하남성 허창(許昌)에서 나타난 세력이 서쪽에 있던 천년의 고도 낙양(洛陽)을 수도로 정하고서 100년도 못되는 기간 동안 중원땅을 통치 하며 동서남북 사방에서 밀어 닥치는 세력 속에 시달렸다. 서남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유비와 강남에 있던 동오의 손권 세력을 견제 하려고 동북쪽에 사는 고조선 후예들의 세력을 이용했다. 삼한의 후예들은 그들의 사기술에 너머가 희생을 당했다. 이를 인식하고 들고 일어나 316년에는 사기꾼들을 강남(江南)으로 쫓아 버렸다. 중국 사가들은 강남으로 도망가 새운 나라를 동진(東晉,317-420년)이라 한다. 이 100년 미만 동안에 삼한의 후예들과 발해만 서안 길목(Land Bridge)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이 현상을 당 태종은 “개 샘이 퍼저 홍수가 났다”고 표현 했다 . 이 짧고 고달펐지만 만주 땅에 중원의 입김이 서렸다는 역사를 과장 확대 하여, 동진 100년을 더해 위진시대(220~420년) 라 부르고, 그 시대에 요동 반도는 물론 한반도 북쪽 까지 중원의 세력이 미쳤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남북조시대(439~589년)까지 합처서 오랫동안 요동반도를 통치 했다고 한다. 동진 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자강 이북 전역이 옛 고조선의 후예들이 다스리던 오호십육국시대로 이어젔다. 이들을 동호(胡)의 한 분파인 선비족 (鮮卑族)이 애용한 국호가 국호 연(燕)이란 글자였다. 이 글자는 산서성 해지 동북쪽 연안에서 처음 나타 났던 이름이다. 단군조선, 동호, 조선, 선비, 오환, 단석괴, 연, 낙랑이 오래동안 인접하여 살면서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후국 진(晉)이란 상형 글자는 옛적 부터 그 곳에 있던 조선(朝鮮)의 뜻을 달리 표현하여 만든 글자라고 필자는 앞에서 설명 했다. 어떻게 하여 진(晉)이란 국호를 택했나는 알려 지지 않았지만,사마중달의 혈통은 해지 연안 옛 고조선 지역 사람이다. 옛 고조선 부족의 지도자를 선우(鮮于)라 부른다. 그 지도자가 천손의 후예라 하여 오환(烏丸)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이 두 이름의 어원을 2013년에 제출한 “글안의 어원”에서 자세히 설명 했다 . 그 부족의 “웃사람/지도자”란 뜻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실린 비(裨)자 풀이가 죽서기년에 실린 내용이다. 빛(해, sun-ray)의 사음(寫音, 象聲, PLCs)자 라고 했다 . 같은 지역에서 조선이란 뜻을 또 다른 글자로 적은 이름이 선비(鮮卑) 라는 글자다. 그 근거가 사마천이 인용 했다는 국어진어 (國語 晉語)에 있다 . 비(卑)자는 노예를 뜻하는 뜻으로 옛 조선(朝鮮)의 후예를 비방한 글자다. 이 글자는 다른 여러 비“裨bì pí/bei1 pei/bhiɛ; 㘩, 比, 費,肥,非,丕,毗”자들과 같이 “해, 햇볓(sun, sun-ray)의 사음”자다. 관자에 실린 비이지계(卑耳之谿)는 해를 숭상하던 사람(耳)들, 즉 “해씨”들이 살던 지역을 뜻했다 . 여러 해 부족의 지도자란 뜻 (裨諸侯)의 어느 한 제후가 하우씨의 후손으로 알려진 비후(費侯)라고 했다 . 광개토대왕이 염수 북쪽(鹽水上)에서 싸웠다고 비문에 나오는 비려(碑麗)는 조양에서 산해관으로 가는 곳에 있던 비이지계 (卑耳之溪)에 살던 비이씨 (卑耳氏)의 동음이자로, 선비(鮮卑)족 이였다 . 이러한 비자를 뜻으로 풀이 하여 옛적 조선 영역에 살던 한 부족 이름으로 선비(鮮卑)란 명사가 후한 말기 부터는 만리 장성이 흐르는 태행산맥을 따라 여러 곳에서 나타 났다. 비슷한 시절에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기원전 6년)이 전국시대에 남쪽 사람들이 읊은 시문을 묶어 편집한 초사(楚辭)에서는 산서성을 노예들이 살던 곳(隸省)이라 했다. 조선 땅에 살던 에서 그들을 선비(鮮卑), 즉 아름다운 비첩이란 뜻으로 시문에 올렸다 . 선비(鮮卑)와 진(晉)이란 글자는 조선(朝鮮)이란 글자와 같은 뜻을 지니고, 오환(烏桓, 烏亘)은 오손 (烏孫) 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동쪽으로 와 살면서 “지상에서 영원의 세계를 연락 하는 삼족오 (三足烏)의 알(烏丸)이라 뜻”이다. 천손의 후예란 뜻이다.
오늘의 형제가 다음 세대에는 사오촌으로 이웃에 살게 되고, 이웃간에는 전쟁이 자주 일어 났었다. 그러한 전쟁이 중국에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로 나타 났고, 흥안령 동쪽에서는 삼한에 이어 한국역사에 나타나는 삼국시대로 이어 젔고, 계속하여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여러 부족국가를 미루어 살았다. 이들이 점차로 좀더 큰 정치 집단으로 변해 가는 전쟁이 계속되여 “일본 전국시대”를 거처 동북지역에 살던 원주민을 정벌하는 장군이란 뜻의 동정장군(東征將軍, 征夷大將軍)이 통일국가를 이룩 했다. 그를 간략하게 장군(將軍, Shogun, 쇼군) 이라 부르던 막부 지도자다.
진시황 이후부터, 중원을 통일한 자는 언제나 삼한의 영역을 침략해 왔다.
한무제가 그 첫 쩨다. 기원전 109년에 만주 서남쪽 청구(靑丘)을 지나 조양에 이르는 지역을 친입한 여파로 삼한의 후예들이 오랫동안 전화 (戰禍)에 시달렸다.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