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Gija went to Joseon in 1046 BC, came back and met the first king of Western Zhou. No one has yet confirmed the birthplace of Joseon. Chinese claimed the capital of Gojoseon was in the current Pyongyang.
By casting the conceptual net as wide as it can be under the spectrum of Time, Place and Events, I pull out a firm conclusion that Gojoseon had emerged in the place and era of Epic Flood in China. It was the dividing point of oral history to the written one and dawn of Chinese civilization. Gojoseon people were Scythian from the west, enslaved by alien Zhou clan and left original scripture in the NEA with archaic ideographs. Korean language is the trunk of Tungusic language remained. Chinese excavated Taosi (陶寺) in the Xiang-fen County, Shanxi that is a part of the Hong-Shan culture from the North. But they claimed it as a part of Longshan Culture in Shandong Province. We have heard only one-side story from China. There ought to be other voices to assess the event. This essay illustrates the new method to study the history of NEA and the trail of migration under panoramic view till Sill Unified Korea and Japan emerged. Gojoseon descendants spread out wide area in the NEA and through the sea rout as well. They left Totem poles in the new places. 주제어:4-5. 단군왕검. 부여.역사학. 연구방법. 일본. 조선. 퉁구스어. 홍산문화.환단고기 |
1I머릿말
II고조선의 발생지 III남만주에 나타난 조선 IV부여의 어원 |
V.삼한 (三韓)의 후예 (後裔)와 한해:
VI.통일신라와 일본의 탄생 VII. 환단고기 위서론 시비 VIII.맺음 말 |
I머릿말
산서성 황하 유역이 동북아시아 문명(文明. Civilization)의 발생지다 치수를 총괄하던 백익 (伯益)이 하동((河東) 에 수도를 세우고 국호를 왕검조선(王儉朝鮮)라 했다. 조선이란 이름만이 아직도 국호로 쓰이고 있다. 한중 역사 기록에는 주 무왕,기자, 조선, 평양의 관계가 뚜렷하게 실렸다. 그러나 조선의 발생지를 밝히지 못했다. 찾는 방법이 틀려서 였다. 필자가 찾았다. 찾고 찾고 또 찾아 결국 찾았다는 뜻에 절차적 삼단논법 (A series of Syllogism) 이라고 이름 했다. 새로운 방법을 인용하여 조선이 나타난 시기와 장소, 그후 어떻게 흘러왔나를 밝혔다.[2]
역사학 정의, 연구: 모든 사물에는 지나온 경로가 있다. 어느 특정 사물에 관한 기록이 그 사물의 역사다. 따라서 역사는 모든 인문 사회과학의 모체다. 장구한 역사의 흐름속에 뭍혀 있는 사건을 동북아시아에서는 [말소리와 뜻]을 그림글자로 남겨 놓았다. 고조선 발상지에 살던 사람들의 언어를 몰라서 문구를 잘못 풀이 했었다. 태고적 사건을 풀이 할수 있는 확고한 증거가 글자 속에 있다. 홍수로 시달리던 시대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다.
태고적 선사시대에 퉁구스어 (Tungusic languages)를 쓰던 유목민(胡, Scythian, Saka, 塞, Eurasian Steppe herders)이 중앙 아시아에 살았다. 태백산정(太伯山頂, Khan Tengri)을 분기점으로 동서남으로 흐터져 나갔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을 동호(東胡)라 했다. 태백(太伯) 이라는 상형 글자와 유라시아에 나타난 인류 문화 전설 종교에 그러한 증거가 있다. 흰백(白)자 는 횃불 (torch)의 상형자다. 서방지색(西方之色)이라 했다. 맏 백(伯)자는 어두운 길에 횃불을 들고 앞장선 사람을 뜻한 글자다. 태백은 최고 지도자를 뜻했다.
동쪽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홍산문화를 남겼다. 한 부류가 산서성 서쪽 분수(汾fén水)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분수 연안에 정착하여 음이같은“邦 fén, 방”글자로 남겼다.[3] 분수를 따라 더 내려와 물목이 좁아 물이 꺼꾸로 흘러 늪지대를 이루어 기러기가 노닐던 곳이라 홍수(鴻水) 라 했다.[4] 그곳에 해지(解池)란 자그만 염호에서 소금을 구했다. 그들이 유능한 동이수령 백익 (伯益)의 계획에 따라 치수사업을 성취하여, 여러 부족장이 만장 일치로 왕검(王儉) 이란 칭호를 주었다. 처음으로 제사 (祭祀)와 통치권을 합법적으로 위임 받은 지도자가 나타났다.
동호(東胡) 가 육지로는 동북 아시아 전역으로 흐터져 나갔다. 태행-연산산맥 동쪽에서는 해안에서 소금을 구했다. 뱃길로는 북동서 해안에 정착 했다. 클 한자 한(韓, 翰, 汗 Gahan)이 다스려 한해(翰海) 라 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롭과 동북아시아를 잇는 육로는 한무제 때에 열렸다. 중원의 특산물 인 명주가 서양에 알려져서 씰크도드라고 부른다. 그에 앞서 페르샤 사이러스왕 (Cyrus the Great: 약 기원전 600-530) 이 그리스를 침략했다.시 서 경전 산해경에는 기린 봉황 하는 동물이름이 실렸다. 구주(九疇) 라고 하던 황하문명의 발생지에 살던 사람들은 서쪽에서 왔거나 아니면 옛부터 그러한 이름을 들었다. 서쪽과 교류가 있었다.
역사는 기록을 근거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모든 사건을 다 기록 할수는 없다. 사관은 지도자의 정치 이념에 따라 취사선택 하여 기록 했다. 또한 처음부터 먼 거리에 있었던 사건들이 방대한 지역에 있었다. 많은 사실은 기록에 없다를 영어로는 Silent Majorities (SMa)라고 한다.
구주에서 멀리 떠러져 있던 홍산문화에 관한 사실은 실릴수가 없었다. 기록이 없던 지역(SMa) 이 였다. 하여 삼국유사 에는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수 없는 사람 해모수 (解慕漱)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로 부터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해모(解慕)란 글자는 개마 (蓋馬: 蓋; gài gě hé 音合; hé gě)의 사음자다.[5] 훈역 하여 고씨 최씨 흑치씨 밝씨(朴 溥, 駮) 하는 성씨가 나타났다. 해모수의 혈통이 부여, 백제와 고구려, 발해를 거처 고려시조 왕건으로 이어졌다.[6]
글자 사용이 역사의 시작: 기록으로 남기기 전에도 노래를 불렀다. 시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정서를 자극 한다. 과거나 현제의 사실을 읊고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시경 속에는 옛적부터 전해오던 전설과 당시 상황이 묘사 되어 있다.[7] 인문 사회과학 범주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철학 또는 종교와는 달리 역사학에는 사건 발생의 시대와 장소 그 변천이라는 뚜렸한 실체 (fact)가 있다. 사건의 목격자가 기록 했던 일차 사료를 남길 당시부터, 편집이라는 여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여건이 관여 했다. 감정은 이성적 판단을 앞선다. 감정을 자극하는 허위 선전이 진실을 숨긴다. 지정학적 영향을 받았다. 인류 문화사를 되돌아 보면, 사실을 왜곡한 현상은 옛적부터 있었다. 일제가 동아시아에서 저지른 잔혹한 현상을 숨기고,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허위 선전을 계속하고 있다. 허위가 진신을 이길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다. 역사학자는 숨어 있는 실체(SMa)를 찾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육서(六書)의 뜻: 글자를 만드는 방법을 육서(六書)라 했지만,만들었다는 사람 이름이 구구하다.[8] 육서란 북쪽 대륙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어 쓰던 방법 (陸書)이란 뜻이다. 이를 잘못 기록했다. 남북쪽 사람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성조(聲調;Tone and Rhythm)를 참작하여 운서를 만들었다. 육법언 (陸法言) 이란 사람 이름이 아니다. 북쪽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9] 뜻과 음을 뒤섞어 글자를 만들었다. 문헌에 [때때로는 고려언(高麗言)이 보인다. 많은 글자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10] 분수계곡에서 해하 수계 천진항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개적(蓋狄) 이라 했다.[11] 언어가 달랐다. 그들이 옥돌에 글자를 새겼다. 옥돌에 새겨 흐터져 있던 자료 수집이 옥편(玉篇)이다. 그들은 또한 실로 묶어 매듭(結繩)을 만들어 뜻을 전했었다. 해하 (海河) 수계에 살던, 서쪽(胡, 鬍)에서 동쪽으로 온, 사람들(東夷)이 쓰던 언어 사전이라 해편 (海篇)이라 했다.[12] 비었다는 북쪽 땅을 전욱 고양씨(顓頊高陽氏)의 영역이라 했다. 북쪽이란 글자는 비(非, 비雨)로 읽어 비가 온다, 머리를 손질하는 빗]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별에 관한 기록은 북두와 견우성이다.[13] 양자(揚子)는 비씨와 같은 혈통이라 했다. [14]
중산보를 읊은 시문에 찬융조고 (纘戎祖考)란 문구가 있다. 중산부가 태사주 (太史籀)다. 그를 중산보 (仲山甫)라 했다. 서쪽에서 온 융족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가 만든 글자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번체 (繁體)자, 또는 [籀 주문 주, 전자 주]와 음이 같은 주서(朱書)라 한다.[15] 서주의 노예가 되었던 고조선 사람들이 만들었다. 노예 예자 예서 (隸書)란 이름을 붙였고, 그들이 살던 산서성을 진(晉) 또는 예성(隸省) 이라고 했다. 진(晉)자는 조선과 같은 뜻이 있다.
남쪽 오나라 최후의 황제 손호(孫皓,재위 264년 ~ 280년)가 서진에 옥새를 바쳤다. 남쪽 나라 동오에서는 옥에 글자를 새기는 기술이 없어 금으로 임금의 도장(印璽)을 만들었다.[16] 당시 북쪽 부여의 후손들이 절강성 전당(錢唐)지역에서 해적(海賊)으로 군림 했다.[17] 북쪽 사람들이 전서천자문(篆書千字文)을 비롯한 각종 문서를 만들어 문화의 기초를 닦었다.[18]
경전 풀이: 상형글자는 글자 하나 풀이에도 혼란이 많다. 두세자가 겹친 어휘 풀이는 더더욱 다양 하여 훈고학이란 중국 고유의 학술 분야가 나타났다. 훈고학자들은 어순(語順,syntax)을 설명 하지 않았다. 훈고란 글자도 다양 하다. 그들이 남긴 일차 사료를 옳바로 풀이 하려면 언어의 기본 요소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고조선을 세운 사람들, 즉 동호(東胡)가 글자를 만들어 남겨겼다. 고전을 바로 풀이 하려면 마땅히 옛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
역사는 모든 인문 사회 과학의 기초라, 모든 기록을 두루 살펴 보아야 한다. 사람의 육신이 의학의 소제듯, 기록이 역사학의 근본이다. 동북아시아의 고전은 특별하다. 그들이 남긴 기록에는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의 말소리와 글쓴 사람의 뜻이 잠겨 있다. 이러한 기록을 근본으로 역사를 연구 해야 한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역사서는 당대의 석학들이 황제의 통치 이념에 따라 은밀하게 기록 했다. 결정적 단서는 찾을 수 없으나 지나온 자취와 정황(情況)이 남아 있다. 의과대학 교수로서 [찾아가는 방법 인용]이 필자의 본업이였다.[19] 범인을 잡으려면 포위망을 넓혀 점차로 좁혀 가야 한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보니 [그가 친 골프 공은 xx에 떠러 젔다]는 확신에 찾고 찾고, 또 찾는다. 물적 사실(fact)을 찾는 자연과학 연구에서와 같이 역사 연구 또한 이렇게 확실한 기반위에 점차적으로 한발 두발 조심스럽게 찾아 가야 한다.
옛 오경박사라던 넓을 박자, 박사(博士)가 큰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인지가 발달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특정 분야를 깊히 연구하여 학위를 받은 좁을 협자 협사 (狹士)가 나타 났다.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동양 고전에 실린 글자를 풀이 할수 있는 사람은 역사가의 자질이 구비 되었다. 그분들이 역사문제를 다루어 합당한 글을 썼다면 그 글은 후세에 남으리라 본다. 옛부터 유가에서는 경외서 위서 (經外書 僞書)하는 용어를 썼다. 역사문제를 다루는 사관은 치외법권적 직위에 있었다. 그 패습(悖習)이 아직도 한국 사회에 진을 치고 있다. 좀더 시야를 넓혀 [역사, 학자, 학위, 연구, 최고 학부 등등 ,모든 근본적인 어휘]를 깊히 살펴 보아야 한다.
필자는 신대륙에 나타난 미국이 오늘과 같은 강국이 된 이유를 인류 문화사에 필수 요건인 교육, 연구, 개발에서 왔다고 본다. 그러한 이념에서 구라파에 얻은 지식을 교육 시키던 최고학부 에서 연구에 중점을 둔 죤스합킨스 대학(JHU)이 설치 되어 구라파를 앞서게 되었다.
의사가 여러 분야에서 일 하듯, 역사가 또한 맡아 보는 직무가 다양 하다. 옛적 오경박사에 속하는 부류의 사학자가 국사편찬 위원이다. 일차 사료가 그들의 손을 거처 정사로 인정 받기 까지에는 여러 단계의 편집을 거친다. 시대 정서가 깊히 관여 한다. 따라서 역사의 핵심이 되는 사건 (fact)에 관한 서술이 변한다. 그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일반인의 인식 또한 변한다. 한국 사학계는 이러한 전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 사학계 밖에서는 잃었던 고대사를 찾으려는 목소리가 한국사회에 넓게 퍼져 나간다. 종전의 명문 대학 범주에서 벗어나 포항공대를 새웠다. 한학(漢學)을 다루는 사람들은 옛적 성균관 계념을 떠나 역사를 학문으로 연구 하려는 새로운 마음 가짐을 택해야 한다. 태고적 부터 사악한 미신 악마 (Profane)가 성인 (Sacred)을, 또 가짜 과학 (pseudoscience)이 실증과학을 이겨 왔다.[20] 이러한 시비판단은 철학의 인식론 영역이다. 인식론의 종착역은 물적 증거다. 지식 획득은 경험을 바탕으로 얻는다. 미국 교육가 흐랙스너 보고서(Flexner Report, 1910)에서 체계적으로 물적 증거를 들어 그때 까지 유행하던 의학 (Homeopathic Medicine)을 극복하여 현대의학의 종주국이 나타났다. 학문은 발전해 간다. 역사학의 핵심은 물적 증거를 찾아가는 방법 인용 과정이다. 시대에 따라 역사도 변해 간다.
4.가차 전주 춘추 필법이란 용어를 썼다.
고전에는 [뜻과 음이 비슷 하다 하여 글자를 이리저리 (PLCs, PSMCs)돌려 문장을 만들었다. 가차(假借)란 글자는 [해를 숭상하던 사람들의 말소리를 바꾸어 썼다]는 뜻이다.[21] 글자 꼴이 비슷한 두 글자“고와 노;考,老”를 바꾸어 적기도 했다. 이를 전주 (轉注)라고 했다. 춘추필법 이란 때로는 [고의적으로 글자 작란을 했다]는 뜻이다. 글자 작란으로 역사를 바꾸얶다.
주족(西周)이 고조선을 숨겼다: 고조선 발생지에서 남긴 흔적이 시서 역경(詩 書 易) 속에 남아 있다.[22] 함곡관 동쪽에서 언어 (言語, language)가 다른 주족(西周)의 선조가 고조선의 발생지에 들어와 정략 결혼을 하고 유신(維新)이란 미명으로 원주민 동이를 속이고 학살했다.[23] 이를 서백 기 감려(西伯既戡黎)라 했다. 동이 지도자 치우를 구려지군(九黎之君)이라 했다. 언어(言語)란 나와 지도자와의 대화란 뜻이다. 선비언(彥)자 언어를 상말 언자 (諺)로 바꾸었다. 선비족 말이 언어 (言語) 였다는 뜻이다. 서주가 들어와 성장한 고조선 땅에 양산 (梁山)이 있었다. 그 옆을 지나는 낙수 (洛水) 가에서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가 나타났다.[24] 하도 낙서가 나왔다는 이기씨 백익이 살던 곳이다. 그곳에서 백충장군헌영비 (百蟲將軍 顯靈碑) 가 나타났다.[25] 이 두 비문과 금인명 (金人銘)이 환단고기 어느 경전의 출처 인듯 하다. 금과옥조 (金科玉條)의 어원 풀이에 실린 마불선주 (靡不宣臻) 고문필발 (古文畢發)이란 문구는; 사라진 고조선 세력(삼 麻) 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고공담부와 문왕의 업적이 틀림없이 다시 나타난다는 뜻이다.[26]
집권자가 살던 수도를 영점으로 하여 부족과 음악의 이름(四夷, 四樂)을 정했다. 하여 문왕을 서이 순임금을 동이라 하고 지역의 특성에 따라 노래와 춤(歌舞)을 논했다. 사이가 부르던 노래 (四樂)의 특성을 동,북,서이는 (𩎟,西方曰株離,北方曰禁) 모두 괴로움을 뜻한 글자로 적고, 주족의 고향 남쪽은 맏길 임(南方曰任)자로 적었다.[27] 오태백을 주족의 고향, 한수(漢水) 연안에 자리 잡았다. 상형글자 “誤, 訛, 譌”는 모두 웃사람, 즉 서주 집권자의 얘기가 틀렸다는 뜻이다. 언어가 다른 주족이 기산(岐山) 밑에 자리 잡고 세력을 키워 원주민을 통치 했던 지역을 지나는 여울이라 위하 (渭河)라 했다. 백익이 피해 갔던 곳과 음이 같은 지명이다.[28] 시경의 시(詩)자는 성직자의 말씀이란 뜻이다. 진단서의 진(診)자는 옳바른 예기를 하는 유목민이란 뜻이 있다.
남쪽의 음악은 두(兜, Head)라 하고 다른 세 지역의 음악은 괴롭고 시달리다 떠나간다(禁, 昧, 離)의 뜻으로 기록 했다. 원주민을 시켜 글자를 만들면서 제터 단(壇)자 단군을 박달나무 단(檀 ) 자로 바꾸었다. 단거를 타고 깃발을 날리며 적진을 뚫고 전진했던 전우 전/담공 (旜 zhān壇公) 에게 주 무왕이 청동으로 만든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안에 나타난 글자를 이괘명문 (利簋銘文) 이라 한다. 보존이(寳尊彜)란 글자가 있다. [29] 선조 백익을 모시는 제기로 선사 했다. 그지역 원주민의 지도자 필공이 흰옷을 잎은 백의민족을 양때 같이 이끌고 참전한 장면이 시경 무양 (無羊)이다. 그 시문에 실린“麾之以肱, 畢來既升” 이란 시귀가 한서, 논어주소 등 여러 문헌에 [백어 입어 왕주 (白魚入於王舟)하여, 즉 무왕이 탄 배에 백이가 뛰어 올라]란 문구다. 부둣가에서 마지막으로 배에 뛰어 오른 사람이 백이숙제 전설의 백이(伯夷)다. 그가 주 무왕과 어릴때 가까운 소꼽 친구로 지내던 사연을 읊은 시문이 사간 (斯干)으로 시부지십에 실려 있다.
시경 소아 기부(祈父)는 한글 어순이다. 마지막 [온갓 고생을 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모두 어머니의 시신을 안고 있구나(有母之尸雍) 하는 시귀]를 현존하는 시경에는 아침밥 옹(饔)자로 바꾸었다. 공자가 옛부터 전해오던 많은 시문을 정리 했다는 시경에는 제터 단(壇)자가 없다. 초씨역림에 “東門之壇, 壞其太壇”란 문구가 있고, [손이 불편하여 박달나무를 자르지 못해 우차 바퀴가 쓸모가 없다]는 뜻의 글귀가 있다.[30] 이를 초씨역림에는 수표위단(樹表為壇)이라, 목각을 세워 제단을 표시 했다는 뜻이다. 서주 초기에 여러 글자를 만들면서 고조선 역사를 바꾸었다. 이들이 제터 단자를 박달나무 단자로 바꾸었다.
단군왕검 설화에 나타난 환인(桓因)이 옳은 표기다. 어둠에서 밝은 빛을 찾아 감은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선사시대에 한 부류가 서쪽에 잔유하여 또는 더 서쪽으로 옮겨가 서역에 환국(桓國)이라 했다. 밝은 빛을 숭상하는 사람들의 나라란 뜻이다. 그와 같은 혈통을 이은 단군의 후손들이 동쪽으로 와서 중원과 일본 열도에 까지 이르러 환국이 여기저기에 나타났다. 유구(Okinawa)왕은 눈이 깊은 환사씨라 했다. 사마천은 우본기(禹本紀)가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장건은 씰크로드의 남쪽길을 택해서, 단군조선 설화에 나오는 태백산 신단수하 (神壇樹下) 신시(神市)를 찾지 못했다. 이 문구는 신단을 차려 놓은 그 밑(남쪽)에 있던 도시국가를 뜻했다.[31] 신시(神市)시대는 단군왕검 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고 부르기 전이다. 마땅히 선사시대로 풀이 해야 한다. 목천자는 옛적 부터 알려진 천산북로를 통하여 서왕모가 사는 요지(瑤池)에 이르렀다. 목천자의 여행 내용이 일주서 좌전 사기등 여러 곳에 실렸다. 모두 조금씩 다르다. 시경 소아 기부 (祈父) 가 그 상황을 읊은 시문이다. 중국 사서에는 단군조선 설화에 관계 되는 모든 기록은 비하 하여 소설 또는 잡소리로 풀이 한다. 목천자가 시부와 같이 다녀온 사실 또한 비하 했다.
단군을 어느 특정 행사 집행에 따라 “單于,神君. 禮君, 天子, 仙人, 老子, 雍, 須彌” 등등, 여러 글자로 남겼다. 저 늙은이가 살던 마을을 지나는 여울 이수(伊水)가 선수 (鮮水)와 만난다.[32]
염제는 강수(姜水, 降水, 絳)가에, 황제는 희수(姬水)가 흐르던 곳에 살아 희성(姬姓)으로 했고, 주족이 그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33] 분수를 만나는 강수(降水)를 음과 뜻을 이리저리 돌려 “江, 絳, 洪, 鴻, 共”등, 여러 글자로 적었다. 이곳이 주문왕(周文王)과 주무왕(周武王)의 조언자 (師)가 되여 상나라 멸망에 공헌한 여상 강태공(呂尙 姜太公)의 고향이다. 원주민이 주무왕 희발(姬發)의 어머니다. 노예 여자에서 태어 났다는 뜻이다. 원주민을 려민(黎民)이라 했다. 희란 어음은 어두움의 반대 현상,즉 햇빛을 뜻했던 옛적 한국어다.[34] 고구려(句麗, 九黎)호(胡)라 했다. 옛 한국어 가 퉁구스어란 증거다.
이기씨를 신선 선자 선인(仙人) 이라 했다. 삼국사기에는 선인왕검 (王儉)이 평양에 살았다고 실었다. 스님은 태백산을 한반도에 있는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백제는 건국초 부터 큰 제단 (大壇)을 시조 동명 사당 (東明廟) 가까이 만들어 천지산천 여러 신께 제사를 드렸다.[35]
II고조선의 발생.
스님이 위서라고 출처를 밝힌 고조선 건국 설화 기록에서 발생지를 찾았다. 상서에는 삼위 (三危)란 글자가 보이고,시경을 비롯한 경전 문헌에는 클 분(汾, 邠)자가 많이 실렸다. 옛 분수가 태원 남쪽에서 강 (洚.洪. 降. 浲)수와 만난다. 그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흰옷을 입어, 백적(白狄, 北狄) 또는 개적 (蓋狄. 介狄, 東胡, 胡)이라 했다. 백의민족의 시원지가 분수 연안이다. 마읍을 지나는 쌍건하 지역 사람들, 즉 빛을 숭상하던 북쪽 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개적어 (蓋狄語)라 했다.[36] 오환이 쓰던 언어 오어 (烏語)를 조어 (鳥語) 라고 했다.[37] 새를 날짐승으로 바꾸어 조어 (鳥語)를 금어(禽語)로 바꾸어 공자의 사위 공야장 (公冶長)이 오환족 이란 사실을 숨겼다.
삼족오와 오환족의 어원: 까마귀 오(烏)라고 읽는 글자 어음에 사연이 있다. 이를 시경에는 [가물 가물 하다는 말소리]를 훈역역 하여 현조(玄鳥)다 했다. 이를 제비로 풀이 했다. 까마득히 먼 하늘나라에 귀신(鬼神, 靈魂)을 전하는 새라고 믿었다. 이들을 오환이라 했다. 한국 풍속에 옛적에 시신을 옮기는 운구에 올려 놓았던 장닭, 소도새 (소쪽새) 는 모두 까마귀의 변형이다.
고구려가 전성기에 마읍을 점령하여 임유관 전쟁이 발생 했다.[38] 전쟁에 참여 했던 말갈이 고구려 패망으로 발해를 세웠다.[39] 그들을 모해(mo-he,靺鞨)라 했다. 옛부터 알려 졌던 통로를 따라 교류가 계속 이루어져 어떤 특정 사건이 발생한 시대를 확인 할수가 없다. 그들이 쓰던 대표적 표현이 밝다는 뜻의 어간(語幹, accent) 이 중앙아시아에서 서구 여러 지역에 넓리 퍼져 있다.[40] 인류 학자들은 신단수하(남쪽) 신시(神市)란 곳이 알타이 산맥 남쪽 끝에 있는 동굴을 데니소바 캐이브 (Denisova Cave)라고 한다. 다른 방향으로도 흐터져서 [빛을 숭상하는 다른 한 지류가 남쪽으로 내려가 불을 숭상하는 조라이아스트교가 나타났다. 동쪽으로 인도에도 갔다. 서쪽으로 갔던 사람들은 북풍의 신 보래아스 (Boreas)로 전해 온다]고 추론 할수 있다.
1.시대와 장소를 은패: 역사의 시작이라 선사시대와 전설에 근거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일연 스님이 밝힌 위서 내용을 분석 하면 고조선의 발생 시대와 장소는 홍수로 범람하던 지역이다.[41] 고조선의 발생지에서 나타났던 사건들이 동요, 민요, 풍속, 태극문양,토속신앙 성씨, 등 여러 형태로 한국문화 속에 전해오고 있다. 단군왕검 백익이 개를 대리고 사냥하던 납평(臘平)절을 시작 했다.[42] 우물을 개발하여 마을이 생기고, 순장 (巡將)바둑을 고안 했다. 바둑이란 용어와 승부를 가를수 없다는 오패의 패(霸; 빠)자가 치우 (蚩尤) 기를 뜻하는 독(纛;翳也)자에 있다. 산해경에 실린 천독(天毒)의 고을이란 글자다.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뚝”의 어원이다. 하인의 후손이란 뜻 희씨(姬) 황제가 이끌던 남쪽세력과 싸웠던 치우는 단군왕검 백익 이후 사람이다. 상나라 서북쪽에 고조선 천독(天毒)이 다스리던 지역이 있었다. 이를 구방(鬼方)이라 했다. [43] 고조선 지도자, 즉 독의 지도자(애비)를 귀신 도깨비로 비하 했다.
순임금이 치수 사업에 관여 했던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 귀양을 보냈다.[44] 세 죄인; 환두/도 (驩兜)는 숭산(崇山)에, 곤(鯀)은 우산(羽山)에 귀양 보내고, 삼묘 (三苗)는 삼위(三危) 에서 죽였다. 그들이 분수계곡 사람들이였다. 환도란[밝음의 수령]이란 뜻이다. 그가 여러 무리를 이끌고 지상에 (북쪽에서 남쪽으로)내려 온 축일을 읊은 시문이 도솔가 (兜率歌)다. 신라초기에 나온 향가를 한반도로 옮긴 이후에 미륵(彌勒), 즉 큰 활을 지닌 유목민 지도자에 접붙였다.
탁록전은 단군왕검 살해 사건 후에 나타났다: 치우기 둑(纛)기가 뜻한다. 이를 증명할 기록이 여러 곳에 있다. [45] 가공인물 황제가 싸웠다는 탁록전은 여러 곳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싸웠다. 공자는 치우의 청원이 합당한 요구라고 했다. 신서에는 치우란 이름은 없다. 황제와 형제간인 염제 (炎帝)가 싸웠다. 백익의 땅이란 뜻의 익양(益壤)이라 했다. 백익이 자리를 넘겨 주었다는 뜻의 양위 (讓位)를 땅이란 글자로 바꾸었다고 본다. 산해경에는 풍사 우사와 같이 기주에서 싸웠다.[46] 황제가 귀방(鬼方)의 딸을 발녀(天女曰魃)를 대려와 적진을 유혹해서 승리했다. 그녀를 견우의 처 직녀(織女)로 알려진 천손녀(天女孫. 婺女)라 했다.[47] 옛 경기지역이라 했다. 두 형제가 탁록에서 싸웠다. 북쪽 강수연안에서 내려온 부족지도자 염제가 판천(阪泉)에서 황제와 싸웠다고 한다. 논형과 열자 (列子黃帝) 에도 실렸다.[48] 아사달에 올라 갔던 고조선 사람들이 백익을 죽인 세력과 오랫동안 싸웠다. 이를 탁록전이라 했다.
사기에는 전국시대에 진 영공(秦靈公)이 황제와 염제를 위한 사당을 짖고 모셨다.[49] 진시황의 선조는 큰 불이란 뜻의 대비(大費)라 했다. 염제의 후손이 강씨다. 그들이 태(邰)에 살았다. 서주의 외가라 했다.[50] 황제의 성 (姬)을 이어 받았다는 주족이 화친 맹양을 한 증거다.
남방 불교가 들어와 우두머리란 어음을 가차한 [모름지기 only, 수염 수라고 풀이하는 글자] 를 더해 수미(須彌)란 새로운 명사를 만들었다. 삼국지 왜인전에는 위수국(危須國)이 옥문관 서쪽에 불교국가로 기록 되었다. 옥문(玉門)이란 해와 달이 시들어지는 곳이란 표현을 뒤바꾸어 불교 경전에는 음란한 곳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풀이 했다.[51]
오랑캐언 (焉) 자는 삼족오를 숭상하던 유목민을 뜻했다.[52] 고조선 수도 평양에 삼족오를 숭상하는 까마귀 오씨 (烏氏)가 있었다.[53] 글자가 비슷한 새(鳥)로 기록했다. 햇빛을 숭상하는 오랑캐 사언 (斯焉)이 사는 땅을 내려다 보니 삼위 태백 (三危太伯)이 가이 홍익인간 이라 했다.[54] 상서 우공 편에 삼위기택(三危既宅) 이라고 실렸다. 사마천은 홍범구주 (洪範九疇)를 구등(九等) 이라 했다.[55] 치수사업 전에는 물에 잠겼던 열두 봉우리가, 치수사업으로 물이 빠져 서로 붙어 아홉 마을이 되었다는 뜻이다. 물에 잠기지 않아 수명이 긴 밭이 아홉 곳이란 뜻이 구주(九疇)다. 위수 (渭水) 와 분수가 황하에서 만나 늪지대가 많았던 반달꼴 지형이 구주다. 쪽배를 타고 두루 돌아 주(周) 라 했다. 여러 문헌에 구주(九州)를 방 1,000리 라고 했다.[56] 더 클수가 없는 지형이다. 산서성의 범씨(范氏)는 홍범의 범자에서 따왔다. 두백(杜伯)이 범씨의 시조다. 주선왕이 두백을 죽여 그 아들이 선왕을 죽이고 산서성 멀리 도망 갔다. 세자 원쑤 놈이 도망 나가 사라저 버렸다(世子仇出奔) 서주가 원주민 세력에 몰락 했다.
한국어에는“위, 등”이란 말이 쓰이고 있다. 위험(危險)이란 글자는 왕검이 사는 집을 높고 올라가기 어려운 곳에 지었다는 뜻으로 왕검성을 공략하기 어렵던 뜻을 지닌 글자다.[57] 치수 사업을 지시 했던 순임금에게 숙신씨 (息慎氏)가 활을, 북쪽에서 온 현도씨(玄都氏)는 보옥 (寶玉)을 선물했다. 이 두 부족 이름이 하북평원을 지나 만주땅으로 옮겨와 고구려에 흡수 되었다. 순임금은 명조(鳴條)에서 살다 죽었다.[58] 하나라의 마지막 폭군 걸(夏桀)이 명조에서 도망 갔다. 흉노국(匈奴國)은 명조 (鳴條)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큰 개를 대리고 사는 곳에 세웠다.[59] 이를 호부여지국(胡不與之國) 이라 했다.[60] 왕검조선이 하나라 북쪽에 인접 했었다. 이방인 주족이 서주를 세워 고조선에 전해 오던 전설을 종합 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호타(滹沱)하는 [호(胡) 저 다른 사람(它)이 사는 땅]을 지나는 여울(沱)이란 뜻으로 예하 (濊河)라고도 했다. 예와 옥저 (濊,沃,沮)란 곳에서 한 해(a year)를 뜻하는 세(歲)자가 나타났다. 궁정에 있던 나무 위로 보이던 밝은 별, 샛별을 목성(木星, Jupiter, 歲星)이라 했다. 전통문화인 세배(歲拜) 풍속과 매년에 한번씩 국가에 곡식을 바치는 의무제가 나타났다. 일주서 왕회해에 고조선 주민들을 “稷慎,穢人, 解隃冠,發人. 高夷,邛邛” 등 여러 부족으로 설명 했다.[61] 심백강씨는 시대를 밝히지는 못하였지만, 호타하 연안 요서에 있던 조선(遼西朝鮮)을 찾았다.[62]
맹자가 말한 맥도(貉道)가 십일조의 기원이다.[63] 산서성에서 나와 발해 만으로 빠지는 해하 (海河) 수계에 숙신(肅慎)씨가 살던 맥국(貊國, 肅慎鄉)이 있었다. 해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나는 여울이란 뜻이다. 이를 사수 (斯水)라고도 했다. 도끼를 든 사람의 상형자를 천할 시(斯) 또는 사라고 읽었다. 할머니가 집안 주인이 되었다. 할머니가 제주로 고사(告祀)를 치루었다. 고사에는 붉은 팥을 덥은 시루 (斯婁, 斯𨻻)떡이 필수 였다. 해하 수계에 살던 고사가 갈석산 일대 한무제 해군이 상륙한 열수 연안에 나타났다. 이를 열고사(列姑射)라 했다. 고사가 삼신할미로 알려진 서왕모 낭랑이다. 왜 (倭) 조선(朝鮮)과 같이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64] 승량이(狼)같은 사람들이 환웅천왕의 흉상을 깎아 집안에는 금인 (金人)을, 밖에는 장승 (雄常, totem pole)을 세우고 살았다. 불함산이 가까이 있었다. 유목민 3,000명이 풍백 우사 운사 (將風 伯雨師 雲師) 세 지도자를 따라 북쪽에서 산서성 서쪽 분수 계곡으로 내려 왔다.[65] 분수 (汾水) 상류에서 부터 일치단합 하여 치수 사업을 하기 시작 했다. 이들의 지도자를 공공(龔工, 共工)씨라 했다. 이세 지도자를 삼한(三韓, 가한) 또는 삼신 (三辰, 三神)으로 풀이 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토속신앙의 삼신 할미. 서왕모 에서 낙랑이란 이름이 나왔다. 분수연안(臨汾)에 살던 고사가 열수 연안에 정착하여 열고사(列姑射)라 했다.[66] 퉁구스어(Tungusic Language)라 했다.
이수 (伊水)가에서 백충장군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가 발견 되었다.[69] 백의 민족을 이끌던 늙은 지도자를 흰 벌래때 장군이라고 비하 했다. 저 늙은이(伊耆氏)가 사는 고향을 지나던 여울을 이수(伊水)라고 했다.[70] 시경 한혁에 나오는 양산(梁山) 가까이 살았다.[71] 이기(伊耆)는 왕자의 호(古王者號)다. 전욱의 두쩨 아들이다. 이기씨 조고(伊耆氏造鼓)라, 즉 백익이 가죽으로 큰 북(鼓)을 만들었다. 이(李)씨의 기원이다. 노자가 이(李)씨라 한다. 고조선의 후예, 선비족의 한 지류가 발해만으로 나와 부여 공손씨(不與公孫氏)와 부여최씨(最, 崔)가 되었다.
영웅은 별이 되어 만인의 우상이 되었다. 단군설화에 나오는 세 동반자 중에 우사 운사가 치수 사업을 같이 하던 우(禹)에게 살해 되었다.[72] 그들의 피가 달과 별(其血腥)이 되었다. 무녀 (婺女) 도 같이 살해 당해 직녀가 되었다. [73] 맹도(孟涂)의 폭도들이 노인 지도자 백익 마저 살해 했다.[74] 죽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별이 되어 한국고유 풍속의 칠성신상이 나타났다.[75] 우사 (雨師)가 견우가 되어 북두칠성에 결부시켜 설명 했다.[76] 그가 견우성 (牽牛)이 되어, 북극성 (해, 日, sun.단군왕검 백익을 뜻한)을 옆에서 보좌하는 칠성신앙 의 핵심이 되었다. 북두칠성을 서양에서는 소가 끌어 밭갈이 하는 농기구 가대기 또는 무논을 고루는 써레(plough) 또는 국자 (Dipper)라 한다. 써래꾼이 견우다. 백익이 동이 수령이고 세 동반자 풍백 우사 운사가 그를 보좌하던 동이의 지도자다. 소우(牛)등에 짐을 싣고 단단하게 매는 혁띠의 고리를 북두고리라 한다. 한국 고유의 문구 [북두고리 같은 손]이 나타났다.[77]
고조선의 후예 선비족이 고조선 수도 이름을 따서 당이라 했다. 당(唐)나라 말기에 정계 (鄭棨) 가 옛 전설을 책으로 편술했다. 서문에 [절이국조고사(竊以國朝故事)는, 즉 단군(竊帝)이 조선 을 세워 다스렸다는 옛 예기는 수구유일 (搜求遺逸)이라, 찾아 보관해야 하고, 전어필신 (傳於必信) 이라, 전해 오는 예기는 꼭 믿어야 한다. 하여 책 이름을 개천전신기 (開天傳信記)라 한다.]고 의사를 밝혔다.[78] 당나라가 가져 갔던 고구려 역사책 비기(秘記)에 실렸던 내용에서 그가 느낀 소감이라 본다. 태평광기 여러 곳에 동명(東明)이란 이름과 개천전신기 내용을 인용 했다. 단군설화와 단군왕검 백익 살해 사건을 알고 은미하게 기술했다.[79] 단군을 천독(天毒) 또는 절제(竊帝)라 하고 그가 다스리던 고조선 영역을 귀방(鬼方)이라 했다.[80]
i.기자가 갔던 조선은 산서성 태원군에 속한 진양(晉陽)이다.[81] 상나라 말에 세 현인이 있었다.[82] 기자 (箕子)전에 상용(商容)이란 현명한 제상이 먼저 사직하고 산서성으로 갔다. 그곳의 선우가 상용을 우러러 보았다. 사마천이 산서성에 가서 노인들로 부터 기자가 했다는 예기를 들었다. 허유총(許由冢)이 있고 산 남쪽에는 견우허(牽牛墟), 즉 단군왕검과 같이 북쪽에서 내려와 우와 같이 치수사업을 하던 운사 우사 (禹攻雲雨)의 무덤이 있었다.[83] [시경과 상서에도 기록 되지 않았지만, 순임금과 하나라 때의 일은 알수 있다. 허유 변수 무광 (許由,卞隨, 務光) 같은 여러 현인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누락 되었다]고 했다.[84]
태사공이 갔던 곳이다. 부암 (傅巖), 또는 불함산(不咸山)이라 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노예로 일하던 사람을 얻어 부열 (傅說) 이란 이름을 주어 제상으로 등용하요 상나라가 크게 성장 했다. 그가 부여와 부여 씨의 원조다. 그 한 지류가 강남으로 내려가 부여(夫餘)씨가 양자강 하류에 나타났다.[85] 모택동 집권시기부터 도깨비 귀신이 사는 곳이라 했던 고조선 수도 아사달 (阿斯達)을 발굴하여 최근에서야 도사유지 (陶寺遺址)란 새로운 이름으로 발표 했다.
동호왕 아들 준(其子準)을 기준(箕準)으로: 조선왕 비가 기자 (箕子)의 후손이란 증거는 없다. 기자조선이란 기자가 갔던 산서성에 있던 조선이란 뜻이다. 준이 급히 도망가고 만주에 남아있던 가솔은 모성(冒姓)한씨 (韓氏)라고 했다.[86] 유목민이 배를 타고 내려와 강화도와 평양에 정착 했다. 이들이 정착한 지역을 마한이라 했다.위약(魏略)이 사료의 출처다. 어환의 위략(魚豢魏略)이 스님이 인용한 위서와 같이 고려 (高麗)에 있었다.
국경선 패수(浿水)의 어원: 기자는 예전(濊傳)과 한전에 실렸다. 그가 갔던 조선은 상나라의 수도 은허에서 멀지 않은 경계선 기수(淇水)를 지나 옛적에 예읍 (故濊邑)이 있던 곳이다.[87] 사마천은 기(淇)자와 꼴이 비슷한 패(浿)자로 바꾸어 패수란 이름을 만들어 산해관을 지나는 대석하를 조선의 남쪽 국경선으로 만들었다. 상나라때 부터 전국시대에도 부여는 중원에 있었다.
자부선인 (紫府仙人)을 그렇게 비하 했다. 고조선의 지도자를 천자 (天子, 天毒) 또는 우유부단 한 지도자란 뜻에 선우 (鮮虞)라고 했다. 공자가 춘추에 남겼다는 문구; [진문공 실소 천자 (晉文公實召天子)하다, 즉 환공 다음 춘추 오패인 진문공이 천자를 불렀다]고 하셨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하고 자공이 물었다. 공자는 회답을 피해 말을 바꾸어 숨겼다 [89]
공자는 조선이란 글자를 숨겼다. 공자연거(孔子燕居)란 문구가 그곳을 뜻했다. 시경에 나라이름 패의 향가 패풍 (邶風)에 연연(燕燕)이란 편명이 있다. 빛을 숭상하던 고조선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란 뜻이다.[90] 이를 북녁 북자로 읽어 북풍이라 하고, 북경이란 이름이 나타났다. 제비 연 (燕)자는 조용한 곳에서 편안히 즐긴다는 뜻과 음이 같아 “安 宴” 자와 혼용 했다.[91] 조선 부여 숙신이란 글자와 왕검조선 발생지에 있던 연(燕)자가 유주(幽州)와 같이 북쪽으로 올라 왔다.[92]
시경에 없던 연(燕)나라: 중원 세력은 전국시대 말기에야 북경일대에 이르러 연이라 했다. 전자를 남연 후자를 북연 (北燕) 이라고 한다. 북연이 있던 지역의 수도가 연경 (燕京)이다. 빛(比, 非,費, 해비씨)을 숭상하던 사람들의 수도란 뜻이 오늘의 북경(北京)이다. 궁궐을 자금성 (紫禁城) 이라고 한다. 자부선인(紫府仙人), 즉 자색 옷에 깃을 단 관을 쓴 사람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그곳을 백천하 (伯天下)라 했다. 백익 또는 맏아들이 다스리는 곳을 뜻했다.[93] 역림에 실린 북진자궁 (北辰紫宮)에서 유래된 이름이다.[94] 자부란 문구에서 청구땅에서는 자색옷을 선호하는 전통이 나타났다. 황제가 그곳에서 괵후(虢侯) 자부선인을 만나 동양의학의 경전 삼황내문 (三皇內文)을 받었다고 한다.[95] 해하 수계 발해만 연안에 편작(扁鵲)이 살았다.[96]
왕검조선 발생지에서 주족(西周)을 몰아 낸 고조선 세력이 공자 생존시기에도 북쪽에서 중원을 제압했다. 하여 고조선 지도자를 여러 글자로 비하 했다.[97] 국어 진어(晉語)에 조선의 지도자를 선우(鮮虞),평민을 부여 선비 (不與 鮮卑)라고 했다.[98] 공자가 고조선 역사를 취해서 (embezzled) 춘추좌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99] 맹자에 나오는 그의즉 구 절취 지의 (其義則丘竊取之矣) 는 한글 어순이다. 이를 잘못 풀리 했다; 좌구명이 고조선 역사 (竊父史)를 가로챘다는 뜻이다. 안씨가훈에 반고가 도둑 했다고 풀이 했다.
iii.전국시대 조선: 이 시대에 관한 기록에는 앞뒤가 틀린 곳이 많고 경계를 사실보다 더 북으로 기록 했다. 양자방언에 연대조선열수(燕代朝鮮洌水)하는 지역이, 밝은 해가 우뚝이 떠오른다는 사름자 발해(勃海)라고 하던, 해하 수계의 조선 영역이었다. 강 하구가 천자 또는 천손의 항구 (天津)였다. 전국시대 대부연 (大夫禮)이 간해 연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조선이 있었다. 사기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양평(襄平)이 수도였다.
전국시대 초기의 고조선 수도가 금미달 (今彌達)이다. 홍산문화권에서 분수계곡으로 내려가는 교통 중심지에 있었다. 한무제를 배신했던 한신이 진을 첬던 마읍(馬邑) 이다. 패허가 된 비당 (北唐, 比唐)의 옛 수도라 퇴당(頹唐)이라 했다. 꼬깔모를 쓴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 변한 (弁韓) 이라 했다. 지금(今)이란 글자를 풀어 보면, 위 안희왕 (魏安釐王: 기원전 276-243년) 시기 까지 고조선 수도는 산서성에 있었다. 이후 부터 환단고기 북부여기 (北扶餘紀)로 이어 진다. 해모수가 기원전 239년에 나타났다.[100] 남쪽에도 부여가 있었다는 뜻이다.
iv.진이 개발(秦開)한 땅을 사람 이름으로 둔갑: 고조선의 영토에, 서주 창건 시기부터 왕실의 수장 (將軍Shogun, Chamberlin)이 였던 이름 연(燕)자를 따서 해하수계 고조선 땅에 심었다.[101] 연 나라의 현장(賢將)진개(秦開. 秦介)란 가공 인물이다. 소공세가에는 실리지 않았다.[102]
사기 평준서에 실린 창해지군(滄海之郡)이 해하수계 해안에 나타났다.[103]. 창해역사가 진시황을 죽이려다 실패 했고 부여의 시조 동명성왕 설화가 나타난 곳이다.[104] 사마천은 [조용히 발해만 서남쪽 해안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한서 (漢書)에는 조선이 바다에 있다]고 표현 했다. 삼한의 후손들이 해안에서 뱃길로 퍼져 나갔던 곳이 천진(天津) 항구다.[105]
선비족 6 부 이름은 모두 고조선 부여에서 나왔다.[109] 선비란 어음이 와전 되어 시배리아란 이름이 나타났다. 모용씨는 부여 지도자가 쓰던 관에서 나타났고, 탁발씨는 아사달이라는 어음에서 나타났다. 하씨(叚氏)는 해(解)씨 고(高)씨와 같이 해(sun, sun-ray)란 뜻의 사음자“假, 瑕, 叚, 嘏, 蝦, 遐”에서 나온 성씨다. 지도자 (令長之類, 大也)란 뜻이 있다. 우문씨 (宇文氏)는 하늘로 부터 받은 글자, 즉 천부인을 받았다는 뜻이다.
III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
만주(滿洲)란 위만이 정착 했던 땅이란 뜻이다. 위(魏,衛)는 높다는 사음자다. 가득 찼다는 뜻의 만 (滿)자는 바꾸지 않았다. 애국시인 만해 (卍海)한용운의 만(卍, 萬)자는, 맏 백(伯)자가 횃불을 천정 가까이 높이 들어서 나타났던 글자, 일백 백(百)자와 같은“온 모두다”의 개념을 그린 글자다. 하늘 높히 횃불을 올려 밝은 빛을 비추는 별을 뜻한 상형자로, 온 천하란 뜻]이 있다. 고구려 땅에서 나타난 나라 글안(盍旦, 竊丹, 契丹, 奚族)과 발해 (渤海)가 모두 밝은 해(밝은 빛)를 근본으로 만든 국호다. 남쪽 사람들과는 어문이 달라 소통에 차질이 생겼다.
물수변이 없는 우뚝설자 발해(勃海),즉 호타하 연안 산서성 산속에서 약초가 났다. 이를 신선(仙人)들이 사는 세 산이 발해(渤海)에 있다고 풀이 하여 젊은이들을 바다로 보냈다. 이 약초가 산삼(山蔘)이다. 글자속에는 세 선인이 먹던 풀이란 뜻이 있다.
만주가 위만의 고향: 진수는 금사역(今使譯), 즉 만주 현지인의 예기를 듣고 동이전을 편술 했다. 그들로 부터 위만(魏)이 고향으로 돌아와 왕(復來王)이 되었다고 들었다.[110]
홀본(忽汗)이 졸본주(卒本州)평양(平壤): 우거왕(右渠)이 살해당한 왕험성 (王險城)이 오늘의 조양(朝陽)이다.[111] 사마천이 양평 (襄平) 이란 글자를 만들고,만주에 나타난 조선을 왕검이 세운 조선으로 둔갑 시켰다. 신라 건국에 나오는 고허촌(高墟村)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양평이다. 소벌공(蘇伐公)이란 제생한 사람이 살던 들판 소도(蘇塗)가 있던 곳이란 뜻으로 천진 당산 일대를 뜻했다. 그곳 북명인 (北溟人)이 밭에서 예왕인 (濊王印)을 찾았다. 고조선의 후예 고구려 사람들이 섬기던 삼신 사상을 사영성(祠靈星) 제귀신 (祭鬼神)라 했다.시경,상서 (詩書), 역경에는 상나라와 접한 고조선 지역을 귀방 (鬼方), 즉 도깨비가 사는 지역이라 했다.[112]
왕험성(王險城) 이란 글자를 추적해 보면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 양평 (陽平), 조양(朝陽, 營州), 요양 (遼陽) 으로 나온다.[113]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 (平壤)은, 요(大遼,글안)나라의 동경 홀한성 (忽汗城)이다. 이를 함보가 세운 금나라의 수도로 정했다.
올로홀필라(兀魯忽必剌)라고도 부르던, 요양(遼陽)이다.[114] 김부식은 한반도의 평양으로 잘못 인식 했다. 요임금 (帝堯)이 살던 지역을 흐르는 여울 요수(堯水, 搖水)를, 음이 같은 멀다는 뜻 요수(遼水)로 바꾸었다.[115] 진수는 다시 [요수를 요하 (遼河)로 바꾸어 만리장성이 요하를 너머 왔다]했고,중국공산당 정부는 장성이 압록강을 지나 한반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양 (平壤)과 졸본(卒本)은 사음자다. 중국 문헌에는 졸본이 없다. 이를 홀본(忽汗)이라 했다. 니혼으로 읽는 근본 본(夲)자의 원음이다.[116] 중원세력은 고조선을 숨기려고 모든 수단을 다했다.[117]
IV부여의 후손들
필자는 여러차례 부여의 어원을 설명 했다.[118] 왕검을 잃은 고조선 유민을 고조선 발생지에서 떠돌이 (Vagabond, 浮浪者) 생활을했다. 하여 부여(蜉蝣, 浮游, 胡不與之國)라고 불렀다.[119] 진수는 부여를 도을 부(扶)와, 지애비 부 (夫), 아닐 부(不) 세 글자로 썼다. 진서(晉書) 또한 셋으로 기록 했다. 스님은 북부여기와 단군기를 인용하여 만주역사를 설명 했다. 그 곳에 천제의 아들이라 한 해모수(解慕漱)가 단군]이라 했고, 행촌 이암(李嵒, 1297-1364년)은 부여가 기원전 239년에 나타났다고 인식 했다.[120] 사기에 실린 오환과 인접 했던 부여(夫餘)의 영역이다.[121] 대부 연이 특사로 연나라에 갔던 시절, 즉 중원세력이 만주에 들어오기 전이다.[122] 당시 고구려와 부여는 마땅이 장성 남쪽에 있어야 했다. 부여 사람들이 천진(天津) 에서 뱃길로 한해의 [동 서 북] 연안에 이르러 부여씨가 세곳에 나타났다. 동쪽 항로가 왜인전에,서쪽 항로는 오주부전에 실렸다. 진수는 [호가 사는 큰섬이 마한땅 서쪽에 있다 (州胡在馬韓之 西海), 한과 상거래를 한다]고 했다.[123] 그러면서 언어부여 한동 (言語不與 韓同)이라, 즉 부여(不與)는 한과 언어가 같았다. 부(不)자는 빛광(光)의 사음자다. 이를 모두 훈역하여 호부여는 잊어 버리고, 삼한 (三韓)의 언어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 바다에 가서 왕이 되었다는 한반도 서해안 강서고분 지역과 거래를 했다. 강화도에 정착했던 유목민 들이 마니산 첨성단을 쌓았다. 이렇게 대륙에 살던 유목민 호가 일부는 한해 연안을 따라 멀리 진출 했다.
부여 시조 동명 (東明)의 출발지를 의무여산으로 보았다.[124] 의무여(醫巫閭)란 어음(voice)은 [관을 이고 있는 무당 (shaman, medicine man)이란 뜻]이다. 머리 위에 이다, 초가지붕 이영, 여문 (閭門, Torri gate,鳥居)의 어원이다. 북쪽 조선 땅에 도망 갔던 기자가 그러한 관을 쓰고 나타나 뿔달린 숫사슴 (若鹿)이 부여의 대명사(trade mark)가 되었다.[125] 삼국사기에 동명과 주몽을 혼동했다. 동명조(東明廟)는 비류가 정착 했던 미추홀, 즉 천진 당산 일대에 있었다. 그곳에 살던 부여왕이 493년 고구려에 (문자왕 3년) 항복 했다. 대륙백제를 부여, 숙신씨, 맥국(貊國), 또는 마한 이라고 했다. 숙신씨가 만든 화살에 맞아 죽은 새매를 공자가 밝혔다. 실학자 이규경 (李圭景;1788년 ~ ?)은 [삼한시말신고 (始末新考) 에서 삼한을 구려 부여 한예맥 (句麗、扶馀, 馯, 貊)이라]고했다. 진수가 삼한 (三韓)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지도자, 가한(可汗, 角干)이 다스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126] 발해만 서남연안 창해군이라 불리던 곳에 예군남여 (濊君南閭)가 (해하수계 상류로 부터)피란민을 인솔하고 와서 정착 했다.[127] 한예를 한국 (汗國), 숙신(肅愼), 한인 (韓人), 또는 왜라 했다. 삼국지 단석괴 (檀石槐)전에 한국(汗國)을 왜인전에는 왜(倭; Wō)자로 바꾸어 옛적 고조선 사람들 (胡, 解, 奚, 韓, 倭)이 중앙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경로를 기록 했다.
부여 공손씨(不與公孫氏)와 부여최씨(最, 崔)의 후손이 남만주에 나타났다.[128] 두성씨는 각종 선진 경전문헌(經典文獻)에 나오는 왕공 (王公)의 후손이란 뜻이다. 우거왕의 경기지역에 자리잡은 현토 태수 공손역(公孫琙)이 단군의 후손이다. 공손역의 죽은 아들을 공손홍의 아들로 바꾸어 공손도 (公孫度)라 했다. 그를 강(康)이라고도 읽는다. 실은 다른 사람이다. 공손도가 흉노 왕자 였던 투후(秺侯) 김일제 (金日磾)의 후손이다. 옛 창해군 자리에 정착한 부여왕 위구대의 데릴사위가 되어 동이의 최 강국이 되었다.[129] 이곳에 자리 잡았던 비류의 후손을 고구려 왕자 발기의난에 접붙였다. 공손씨가 군림 했던 요동이 신라, 가야, 왜 (汗,倭, 부여씨, 대륙백제)의 발생지다.[130]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놓고 하늘에 빌어 고구려가 요동에 아육왕탑을 세웠다.[131] 신라 미추왕 (味鄒王)은 미추홀에서 올라온 김씨다. 이때에 서역불교가 천진 일대에 들어와 번창 했다. 천진 일대 사람들이 남만주 내륙에 있던 고구려를 압박하여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를 살해 했다. 대왕은 원수를 갚았다. 광개토대왕의 격전지는 남만주 발해만 일대 였다.[132] 한반도에 진출한 기록도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천진에서 내려가 부여(夫餘)씨가 양자강 하류에 나타났다.[133]
왜(倭)자는 시경과 산해경에도 보인다. 한(汗, Hahn, Gahan)과 같이 높다는 어음이다. 천하 제일 궁수 예(羿)를 죽였다는 자를 한착 (寒浞)으로 바꾸어 기록 했다.[134] 백익 살해 사건 당시를 비유한 내용이다. 백익,예(羿), 그리고 진시황의 선조를 여러 글자로 실었다. 고조선 발생지에서 나타났던 사건이다. 이곳에서 황하를 경계로 두 진(秦, 晉)나라가 싸웠다. 이전쟁을 좌전에는 전우한원( 戰于韓原; 기원전 645)이라 했다. 주성왕이 연나라 사람을 대리고(王帥 燕師) 황하 동쪽 해지(解池) 연안에 살던 한의 지도자가 사는 성을 빼았었다. 이를 쌓았다고 풀이 한다.[135]
황하문명의 발생지를 한원(韓原)이라 했다. 시경 한혁의 주인공인 한후의 선조가 살았다. 그의 선조는 서쪽에서온 유목민 융(戎)족이었다.[136] 삼한(三韓)이란 고유명사는 삼국지 한전(韓傳)에 실린 글자의 뜻을 달리 풀이 해서 나타났다.[137] 꼬깔 모(弁)를 쓴 지도자(韓)란 뜻의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었다.[138] 기원전 1046년에,[소가 우는 소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했던 유목민들이 살던 들판에서 전쟁을 하여 무야 또는 목야전쟁(battle of Muye坶野.牧野之戰) 이라]고 했다. 우소리는 소리를 여러 글자 “馬/牟”로 기록 했다. 유목민 지도자를 한 (馯, 汗, 韓)이라 했다. 시경 한혁에 나오는 한후와 중산부(仲山甫) 즉 태사주 번후(樊侯. 太史籀)에게 선조의 위업을 이러 받으란 명을 찬융조고(纘戎祖考)라 했다. 그들의 선조는 양산(梁山) 일대에 살던 우수한 지도자(有倬其道)백익, 즉 단군왕검이었다. 이를 은미하게 기술했다. 황하문명 발생지에 살던 한(韓, 가한, )의 후손이 해안에 이르러 한해 (翰海)라 했다.[139] 요동반도 끝에서 방향을 바꾸어 정동으로 가면 구사한국 북연안 (北岸狗邪韓國), 즉 [간사한 개가 다스리는 나라에 이른다]는 뜻이다. 중원을 괴롭히던 백제 세력이다. 백제 온조왕이 마한왕 (馬韓王)의 수도를 점령하고 정착했던 곳이다.[140] 대동강 하류 강서고분 유적이 나타난 곳이다.
대동강(大同江)의 어원: 중국사람이 한반도를 기술한 문헌에는 대동강(大同江)이란 글자가 없다. 김부식은 클 한(韓, Khan. Gahan) 자를 한나라 한(漢) 자로 바꾸고, 대동강 하구에 있던 백제 수도를 오늘의 서울로 인식했다. 마한의 수도를 지나는 한강 (韓江)을, 서울을 지나는 큰 강 아리수와 같다는 뜻에서, 대동강으로 바꾸었다.[141] 그 곳에서 백제 개로왕 (蓋鹵王, ? ~ 475년)이 죽었다. 대동강의 원 이름이 욱이하(郁里河)다.[142] 일연 스님은 현 요하 (遼河)를 압록강, 살수, 또는 대동강이라 했다. 온조왕의 행로를 염사치 (廉斯鑡) 사건으로 만들었다. 치(鑡)는 사람이란 뜻의 한국어다. 금(金, Gold)이 많이 나던 지역이라 쇠금자를 붙였다. 염사 사람들 소마시(蘇馬諟), 즉 재생한 마한 지도자란 뜻이다. 점제현신사비 (秥蟬縣神祠碑)와 봉니가 많이 발견된 대동강 하류다.[143] 그곳에 광개토대왕 시절 사람이였던 유주자사진묘 (幽州刺史鎭墓)가 있다. 유주자사 통치영역에 염사치 일행이 도착 했던 낙랑군에 패수 함자 (浿水, 含資)현이 실렸다. 강하구 구라한 북안 (대동강)부터 7,000리를 가서 바다를 건너면 대해국 (對海國)에 이른다. 대마도 동남쪽에 넓리 펼펴진 큰 바다, 즉 현해탄을 한해 (瀚海)라 했다. 그당시 해상 활동이 활발하여 자그만 섬에 3,000개나 되는 여인숙(許家)이 있었다. 위진 시대에 한반도와 구주 서쪽 해안을 따라 남자가 다스리는 구노국(狗奴國)에 까지 이르렀다.
천진항에서 유구 까지를 20,000리라 했다. 오랫동안 배를 탔다. 작남작동(乍南乍東)이란 표현을 보면 나침판을 사용했다고 본다.[144] 황해를 가로지르는 해로는 셋으로 나타났다. 제일 남쪽 해로를따라 가라국 (加羅國)왕 하지 (荷知)가 양나라 시조원년 (建元元年) 479년에 사신을 보냈다 [145] 같은 해 같은 행사에 왜에서도 사신을 보냈다. 한해의 남쪽 해로는 백제 개로왕이 중원에 구원을 청했던 사신이 479년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한해의 해양권을 잡았던 백제 지도자를 왜오왕 (倭五王)이라고 잘못 풀이 했다. 한해의 동남 연안에 사는 사람들이 개척 했다.
중원 세력은 수나라 때에 처음으로 남쪽 해상로를 따라 유구에 도착 했다.[146] 그로 부터 올라 와서 구주에 이르렀다. 수서에 나타난 유구의 지도자는 빛(桓, 밝은 세상)을 숭배 하는 부여 계통이었다; 선조가 어디서 나타난지, 얼마나 오랫적에 왔는지, 알수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다. 성은 환사씨 (歡斯氏)다. 그사람은 인심목장비(人深目長鼻)하여, 파류언호(頗類於胡)라 했다. 수양제가 정벌 했다. 돌궐(突厥)과 비슷하다. 언어는 곤륜(崑崙)인이 약간 이해 할수 있었다. 남녀모두 흰옷을 입고 마을 마다 장승(樹立, Totem pole)을 세웠다. 수나라 배가 모라국(𨈭牟羅國)에 표류 해서 백제를 통해 돌려 보냈던 시절이다.[147] 모라국은 남북이 천리 동서가 수백리라 했다. 오늘의 대만섬을 제주도라고 잘못 풀이 한다. 중원에 있던 북제 세력이 양자강 남쪽 해안 복건성, 광동성 일대에 있었다.
해하 수계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 한예(韓穢)가 발해만 해안을 따라 퍼져 나갔다. 신라는362 부터 488년에 이르는 오랜 시간동안에 한반도에 정착 했다. 그시절에 한해 서쪽 해안으로도 흐터져 나가 왜오왕이 다스렸다는 신라 임나 가라(倭,新羅 任那 加羅) 하는 소읍국가들이 중원 동남 해안에 있었다.[148] 같은 도시국가 이름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렸다. 왜왕이 다스렸다는 진한 모한(秦韓·慕韓)은 한해 동쪽 해안에는 없었다. 양자강 하구 전당(錢唐)해안에 정착 했던 부여의 후손을 해적호(海賊胡)라 했다.[149] 고구려 왕자 발기와 같이 남쪽에 정작하여 발기진 (拔奇之津)이란 이름이 나타났다.[150] 그들이 동오 손책을 도왔다. 그 길을 손권이 이용하여 고구려와 공손연의 도움을 받아 중원 세력을 공략 하려 했다.[151]
삼한의 후예가 동남아 지역으로 진출 했다. 별을 보고 점을 치던 패르샤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을 읊은 시문이 이란의 쿠스나매 (Kushnameh)다.[152] 동진(東晉317년 ~ 420년)시절에 이 해상로를 따라 남방불교가 중국에 들어 왔다. 고조선의 고유 신앙을 본따서 미륵(彌勒)신앙이 나타나 한반도 남쪽에 나타났다.[153] 혜초(慧超)가 이 해상로를 따라 인도에 갔다, 씰크로드를 따라 장안에 도착했다.[154] 인도 동남 해안 지역에는 한국어휘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백제인 왕인(王仁):근초고왕 (近肖古王; 재위: 346년-375년) 시대에 박사 고흥 (高興)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지었다.백제인 왕인(王仁)이 일본에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맥국으로 알려진 대륙백제 사람이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수도가 “平壤城,國內城, 漢城” 세곳에 있었고, 각종 귀한 서적으로 자제(子弟)를 교육 시켰다. 구당서에는 전서 천자문 연천자문 (篆書千字文. 演千字文)이란 책이름이 있다 [155] 장수왕 26년인 438년에 인질로 잡혔던 북연태자 풍왕인 (北燕太子 馮王仁)이 왕인 박사다.[156] 나라를 잃은 왕인은 발해만 연안에 있던 역사책 비기(秘記)와 백제 서기(書記) 등 당시 귀중한 서적을 갖고 외국으로 갔다. 이는 남조 양나라 (梁; 502~549) 의 주흥사(周興嗣: 470?∼521)가 천자문을 만들기 전이다. 고구려 사람이 모용씨(慕容氏)씨가 돼였던 고운(高雲)이 정권을 잡고 대선우 대하천왕 (大單于, 大夏天王)이라 했다.[157] 그를 죽이고 연왕이 된 풍씨는 그 지역 호족과 결혼을 했다. 모용씨는 어원이 부여관 보요에서 나왔다.[158] 본처는 낙랑왕씨 (樂浪王氏) 였다.[159] 후처 모용씨(慕容氏) 에서 태어난 아들이 태자 왕인이다. 낭랑 왕씨가 932년에 현토군 태수로 봉해졌던 고려 태조 왕건이다. 백제의 동서 두 수도간에는 활발한 해상 교류가 있었다. 그 해로를 따라가 구주에 부여씨가 나타났다. 열도 부여 또는 열도 백제라고 한다. 이해상로 연안에서 발굴된 유물은 부여시조 동명왕의 후손이 남긴 산물이다. 고운(高雲)이 고구려와 같은 고양(高陽)씨의 후손 이라 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하백, 즉 치수사업을 하던 사람의 후예(河伯女郞)란 뜻이다.[160]
남쪽 해상로: 장수왕의 공격을 받은 백제 개로왕 (蓋鹵王; 455-475년)은 남북조에 구원을 청했다. 서신이 북조에는 478년에 도착 했다. 남조 유송(劉宋420-479년)에 갔던 사신은 다음해인 479년에 한반도에 돌아 왔다.[161] 이로써 원양 해로가 열려 그 항로를 따라 각종 남방 문물과 남조시대의 서적이 한반도 남부와 구주에 전래 되었다. 남조에서 만든 금인 (金印) 위노국왕 (委奴國王)이 후쿠오카에서 발견 되었다. 두려워 하던 지도자에게 준 도장이다.
장수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아들 조다를 잃었다. 손자가 왕위에 오른 문자왕 (文咨王)이다. 반도백제 수도 한성에서 왜에 총통 자격으로 파견 나가 있던 부여씨가 돌아와 동성왕(東城王)이 되었다. 신라와 힘을 합하여 옛땅을 찾으려고 남만주에 친입했다.[162] 동성왕이 마지막 왜오왕 (倭五王)이다.[163] 그가 중원 세력이 싫어 하는 나라 노국(奴國)왕이었다. 일본열도는 이렇게 한반도 해안을 따라 문화의 첫 기반이 잡혔다. 삼한의 후손은 대륙백제 이전 부터 한해의 서남연안 해상로를 따라 양자강 남쪽을 지나 동남아 지역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탐라를 제주도로 바꾼 사연: 탐라(耽羅, 耽牟羅)는 문주왕때 까지 동이의 최강국을 이루었던 백제의 해상 요충지였다. 대륙백제가 멸망하자 독립 하려 했다. 동성왕 (東城王)이 다시 복속 시켰다. 열도백제 세력을 키워 혼슈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관동 (關東)지역의 원주민 아이누(Ainu, 蝦夷, 毛人)를 정벌하여 일본의 건국 기반을 닦았다.[164] 불사약을 구하려고 바다로 갔다 정착한 이주(夷洲)를 대만섬, 또는 단주 (亶洲)라 했다.[165] 수 나라가 중원을 다시 통합한 기록에 백제가 중원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름을 보면 단주 (亶洲)를 담모라 (𨈭牟羅, 耽牟羅)라 했다.[166] 백제의 주군현 (百濟, 州郡縣)이란 기록을 잘못 띄어서 제주도라는 이름이 나타났다.[167] 탐라국 설화에는 [일본국 사신이 공주 셋을 대리고 와 탐라국이 형성 되었다. 선인을 자색 옷을 입은 사람 (紫衣使者) 이라] 했다. 시대와 문맥을 보면 중원 해안에 있던 대륙백제의 한 지류 왜를 일본으로 잘못 인식 했다. 단주는 열도부여 왜와 같이 부여씨를 도우려 백강전에 참전 했다 실패하여 신라에 복속 했다. 충렬왕 3년에 탐라(托羅)를 몽고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하고 23년에 제주도로 바꾸었다. 탐라(耽羅)에는 한반도에 알려진 때부터 역사서가 있었다. 섬나라 사람들이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미추홀 후손이 남긴 기록이다.
동명왕 후손이 일본을 세웠다: 모두 위나라의 역사 기록이 실렸다는 죽간이 발군된 때에 마한왕이 다녀 갔다.[168] 그가 천진 일대에 있던 동명왕의 후손 백제왕이다. 죽간 발굴 내용이 백제에 알려졌다고 본다. 박사 고흥과 왕인 박사가 살았던 백제는 맥국 (貊國)으로 알려진 천진 일대에 수도를 두었다. 비류백제와 대동강 하류에 있던 온조백제의 수도 한성을 거처 일본 열도에 이르는 해상로를 따라 왕인이 일본으로 갔다.[169] 이 항로를 따라 반도백제 구야한국에서 만든 칠지도(七支刀)가 왜왕에게 전해 졌다. 한해를 통치했던 백제가 침략 당했다. 이를 구하려고 열도 부여와 탐라가 출병했다 백강전투에서 실패하고 고구려 마저 멸망 하자 다음 해인 670년에 새나라 니혼(日本)이 나타났다. 현존하는 삼국유사는 명치 (明治)35년, 즉 1903년에 일본에서 출판 되었다.[170]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나오는 나타 나지도 않았던 일본이란 이름을 넣고, 삼국사기와는 달리 진흥왕 이전이라 했다.[171] 당시에 토속신앙 풍속이 신라에 흥했다. 아소산 (阿蘇山)이 있는 구주 (九州)섬, 왜 (倭)를 백제와 신라가 강국으로 만들었다.[172] 안홍(安弘; 578- 640년)은 고구려 옛적 요동, 즉 천진항 일대에 가서 서역불교와 참서 (讖書)를 근거로 동도성립기 (東都成立記)와 삼성기를 한반도와 일본(왜)에 전했다.
한문대장경에는 서역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이전에 들어와 장수왕이 불승 도림을 첩자로 욱리하(郁里河) 즉 대동강 하류 백제 수도 한성(漢城)에 있던 개루왕에 보냈다. 도림은 남만주의 서역불교를 백제에 전했다. 양원왕 7년 (陽原王七年; 551년)에 불교를 신라에 전했다.[173].[174] 초기 신라가 발해만 연안에 있을 때에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 (訥祗王: 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전했다는 설 등이 있다. 한해의 남쪽 항로가 트이기 전 (479년경)에는 만주에 정착 했던 서역 불교가 신라에 전래 되었다.
일본, 여진, 시배리아의 어원: 함보가 신라인이란 기록이 있다. 만주에 남아 있던 진한 사람 (辰餘)이 여진(女眞)족이 되었다. 이를 기리 기억하라는 뜻이 청나라 황제의 성씨 애신각라 (愛新覺羅)다. 일본(日本.Nihon)이란 두번쩨 혼(魂, 해양신, 氣,가미)란 뜻이다. 북쪽으로 올라간 선비란 어음이 와전되여 시베리아란 이름이 생겼다.[175] 그 일부가 배링해협을 건너가 장승(수신, 隧神, 木隧, 伺琅玕樹, 雄常, 服常樹,Totem Pole)을 세우고 살았다. 천진항을 떠나 바다로 진출하던 시절에 이별을 읊은 아리랑이 나타났다.[176] 문무왕은 열도에 남아 있던 백제 세력을 두려워 하여 왜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고 유언 했다. 장보고가 한해의 해양권을 이어 받았다. 그가 처형당한 이후 나머지 세력은 대마도에 정착 했다. 고려와 이조는 대마도에 있던 왜구를 정벌 했다. 통일 신라는 후에 나타난 니혼(日本) 과는 우호적이였고, 옛 백제 세력 구주(倭, 倭寇)와는 앙숙(怏宿)이었다.[177]
VII. 환단고기 (桓檀古記) 위서론 시비
필자는 최신 두 영문본에 환단고기 사료의 출처를 간략히 설명 했다.[178] 이를 좀더 설명 한다.
역사편찬의 목적은 선조들이 격어온 사실을 밝혀 민족의 주체성을 찾아 지켜 나가자는 대에 있다. 국가 성쇠 내우외환의 혼란기에 더더욱 강하게 역사 의식이 대두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침략자가 조선사를 편찬 했다. 이러한 연유로 강력한 외세에 끼어있던 한국에는 재야 (hermit) 사학자라는 특수한 이름이 나타났다. 필자는 동북아시아 역사를 바로 인식 하려면,장성 너머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 (Another voice over the Great) 가 필요 하다고 뿌리 찾기 처음부터 강조 했다.[179] 홍산문화권의 목소리가 환단고기에 글자로 남아 있다는 증거를 간략히 설명한다.
중앙 아시아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퉁구스어를 쓰던 동호(東胡)가 남긴 홍산문화는 알려지지 않아 (SMa) 이에 접한 중원세력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자기들 것으로 염색 했다. 산동반도 해안 일조시에 나타난 홍산문화의 한 분파를 하왕조시절에 동이(日照夏商时期属东夷)가 남긴 용산문화 (龍山文化) 라 하고, 요의 수도(堯都)가 산동에 있었다고 한다.[180]
중원세력의 출발지역, 즉 치수사업을 하던 옛 구주에서 단군 왕검(王儉)이 다스리던 조선 (古朝鮮, 王儉朝鮮)이 나탄났다. 방법이 틀여 못찾은 동북아시아 역사를 모두 정사라 하고, 환단고기는 위서란 논리를 펴고 있다. 선인왕검 (仙人王儉)의 집이 있던 곳이 한반도 평양이라는 사관을 고수 하고 있던 강단 사학계의 거두, 평안도 사람 이기백이 6. 25 이후 하바드대학에 와서 잘못된 역사를 영문으로 서양세계에 알렸다. 같은 내용이 1981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출판한 통람 한국사에도 실렸다. 한국 고대사학회에서 2007년에 출판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에서도 왕검을 신화로 다루고, 산서성에 있던 조선에 기자 (箕子) 가 갔던 곳을 한반도로 잘못 풀이 하여 기자조선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관자(管子)에 실린 발조선 (發朝鮮)을 처음 거론 했지만, 이를 청동기 시절 만주 요녕성 이라고 풀이 했다.
국가에서 인정한 사관은 지정학적 영향을 피할수 없었다. 그러나 태고적 부터 전해오던 전설과 민속신앙은 조용히 집안의 곡관 열쇠를 잡고 있던 할머니에 의해 전통신앙으로 이어져 왔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움직임은 재야 사학자의 공통된 역사관이요 임무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하던 재야사학가들이 환단고기 연구에 집염 했다.
단군을 신선 (神僊, 仙人)이라 하여 전통신앙을 선교(仙敎, 禪教) 라고 했다. 기자(箕子) 이전의 현인 상용 (商容)을 설명한 내용에 노자란 이름이 있다.[182] 시나교 (耆那教; Jainism, 規那)란 늙은이가 살던 규범이 있는 나라, 즉 해뜨는 지역 진단(震旦, China) 의 가름침이란 뜻이다.[183] 단군의 가르침이 서역에서 종교로 나타났다. 서역불교가 후한초기에 들어와 고구려 미천왕 (美川王: 300년 ~ 331년) 시절에 흥했다.[184] 한국 고유의 삼신숭배 사상을 외래 종교에 포함 되여 한국인의 신앙을 유불선 (儒佛仙) 이라고 한다.
태고적 부터 전해오던 영성(靈星)신앙을 비하한 이름이 도참설(圖讖說)이다. 신교(神敎)가 아니라 선교(仙敎, 禪教)가 옳은 이름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일부 학자들이 도참설 이라고 비하한 단군의 가름침을 왜첬다. 현제 한반도에 전하는 토속신앙은 홍산문화권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남만주가 출원지다. 먼 평화스러운 곳이란 뜻의 요녕(遼寧) 을 만주(滿洲)라 했다. 위만(魏滿)의 후손이 살던 곳이다. 높은 하늘에서 비추는 밝은 빛이 가득한 곳이다. 그 음을 살려 붙인 이름이 발해(渤海, 勃解)요 훈역한 글자가 고양 (高陽)이다.
조선을 설명한 해내경에 [의자의 관선관 (衣紫衣,冠旃冠)이라, 옷은 자색이요 관은 깃발을 꼿은 듯한 모자를 썼다]는 형상은 훗날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모습이다. 제주도에는 자색 옷을 입은 사신이 왔다는 전설이 있다. 최근에 이진우는 옥을 깍아 만든 유사한 인형과 글자를 홍산문화층 지하에서 발견 했다.[185] 고구려에는 재상 을파소(乙巴素, ? ~ 203년)가 전했다는 도참설, 즉 선교가 흥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고구려 관직에 흰옷을 상징한 비단 백자 백의선인 (帛衣先人)과 예속선인(翳屬仙人)이 있었다. 삼배(麻.裴)로 만든 도포(道袍)는 빛을 세 선인이 입던 흰옷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올린 삼국사기에는 “●衣.●屬” 로 두자를 숨겼다.
예(翳)자는 활잘 쏘는 사람 백익을 뜻한 글자다. 활로 해를 쏘았다는 항아 (姮娥)의 전설이 얽힌 글자다. 우사의처 직녀라고도 한다.[186] 만주에 전해오던 그곳 사람들의 혈통을 설명한 가첩이 부여와 고구려 역사서다. 이를 비기 (秘記, 費氏經) 유기 (留記)라고 했다.
고구려 개천절 행사에는 장승 수신 (禭神; totem pole)을 기록 했다. 수(禭) 자에는 부싯돌로 불을 피웠다는 뜻이다. 사기 흉노열전과 삼국지 동이 열전에 고조선의 후예들은 일월성진 산천을 숭배했다. 고구려 사령성 (祠靈星)이란 칠성신앙(七星信仰)을 뜻했다.[187] 대륙백제와의 전쟁에서 부친을 잃은 소수림왕은 서역불교와 도교(道敎), 즉 선교(仙敎)를 권장 했다.
단군신앙의 핵심은 계속 유지 되어 왔다. 그러나 지정학적 영향으로 가시물은 점차적으로 바뀌어; 장승박이, 성황당 (城隍堂) 서낭당, 서낭제, 마을 어귀에 세운 이정표 등” 여러 형태로 바뀌었다. 비운에 살해 당한 백익과, 그를 보살피다 죽은 우사 상유(雨師, 相柳)와 무녀 (婺女)를 기린 사연이 칠월 칠석 견우직녀와 한국 고유의 토속 칠성신앙으로 나타났다.[188] 고난이 많았던 신라초기에 도솔가 (兜率歌)를 읊었다. 도솔은 환웅(桓雄)의 세 지도자(三汗)가 인솔한 3,000 명을 대리고 내려 왔다는 뜻이다. 세 지도자가 별과 신선이 되었다. 천하비록 (天下碑録)에 따르면, 하북성 개봉 옹구현에 금오 고포비 (高襃碑)가 있다. 발해 고씨 비문이다. 그 비문에는 미륵상송 (彌勒像頌) 도솔천손 (兜率天孫)이란 글자가 있다. 남방불교가 들어 와서 홍산 문화의 “제세이화 홍익인간 이념”을 미륵신앙으로 바뀌어 한반도 남부에 들어 왔다.
태고적 단군신앙에서 유래한 여러 토속 신앙과 현대 종교가 유라시아에서 나타났다. 모든 종교는 환(桓; 亘 光明 빛)에서 교리를 찾으려 했다. 칠성신앙은 한민족 고유의 신앙이다. 조선 후기 난세에는 옛부터 전해오던 도참설에 근거를 둔 정감록이 유행 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주가 되어 옛부터 전해 오던 토속신앙을 제활 시켜; 대종교, 단군교, 보천교, 증산교등 여러 교파가 나타났다. 안창호 박사도 개종 했다. 환단고기는 시대의 부름이요 대중의 바람이었다. 필자가 역사를 정의한 학문의 모든 분야가 환단고기에 포함되여 있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많은 분들이 한국역사를 다룬 책을 네 놓았다. 최남선 (崔南善, 1890년-1957년)은 불함(不咸) 문화론을 발표 했다. 아니 불자를 사음자로 [밝음 광명,환(桓) 흰백(白) 자와 같은 뜻]으로 풀이 했다. 밝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 우랄 알타이 산맥 서쪽 구라파 전역과 남쪽으로는 중동에 이르기 까지 넓리 퍼져있다. 태백산 (太伯山, Khan Tengri) 이란 기록은 밀어두고 당시의 사회적 정서에 따라 바이칼호 연안으로 인식 했다.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철학 박사는 배달 동이가 동아문화를 이르켰다고 논설 했다. 서쪽에서 온 사람들(東夷, 鬍)의 시원과 분포도를 밝히지 못했다. 미국에서 지질학 박사를 받고 고대 한일관계를 남긴 유타대학 이정면 교수,두권의 역사서를 남긴 공학박사 이진우 등이 본보기라 하겠다.[189]
부모를 따라 중동에 가서 살던 김정민이[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이란 책을 썼다. 또한 유럽에는 고조선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190] 부산의 정진만은, “21세기에 새로 조명하는 고대사”란 표제로 방대한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종합하여 고조선의 유산이라 했다. 최근에 역사 칼럼을 남긴 성헌식은 연유를 밝히지는 않고 압록수를 분수(汾水)로 풀이 하여 산서성 태원을 졸본성으로, 분수에 가까이 있는 임분(臨汾)시를 평양성(平壤城)이라 했다.[191] 그 밖에도 많은 재야 사학가들이 환단고기 내용을 인용했다. 모두들 사실이 있다고 인식 하기 때문이다. 중원기록에 희생우(犧牲牛) 뱃속에 기서(奇書)가 있더라고 했다.[192] 기(奇)자는 큰 북을 만든 이기씨(伊耆氏造鼓), 즉 단군왕검 백익의 다른 사음자다. 이렇게 글자를 바꾸었다. 각종 기서(奇書)를 위서라 하지는 않는다. 그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고 본다.
3.역사적 사실이 단군세기에 실렸다: 고려말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47 단군의 세기를 295년까지] 시말이 분명하게 기록 했다. 자이나교(Jainism)서는 석가모니 탄생때 까지를43대라 했다. 그 후 역사를 범장(范樟; 范世東, 伏崖)이 북부여기 (北夫餘記)에 남겼다. 만주에 전해 오던 전설을 중원사람들이 남긴 글자 기록을 참조 했다. 그분들이 남긴 상고사에 필자가 제시한 새로운 학설을 뒷받침 할 근거가 실렸다; 요순 시대 치수 사업을 성공한 우(禹)가 전사 하여 그 뒤를 이어 받아 단군왕검이 되었다.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다. 2대 부루 (扶婁, 北扶餘)가 다스리던 곳 또한 구주다. 만주에 있던 북부여의 역사를 진시황 이전으로 풀이 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백익이 단군 왕검이다. 그를 우의 아들 개(帝啟) 가 살해 했다. 지도자를 잃은 고조선 사람들이 순임금이 살던 명도에서 지도를 갖고 북쪽으로 올라가 흉노국을 세웠다]는 사실을 제시 했다. 환단고기는 같은 사실을 다른 시각에서 밝혔다. 천부경은 옛 비석에서 발견된 전문 (篆文) 81자를 당나라에 유학 했던 최치원이 전했다. 고조선 발생지에서 발굴 된 [백충장군현령 비문]이 천부경의 시원이라 본다. 동주 궁정에 세워 놓은 동상 뒷면에 실렸던 금인명(金人銘)을 공자가 읽었다. 도덕경, 황제내경(黃帝內經), 익산 소도 (蘇塗) 바위 문자, 일본에서 나타났다는 고대문자들은 마땅히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분들이 다루어야 한다.
우가 무뢰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분수 하류에 있던 진흙으로 덥힌 도산(塗山)에 모여 회의를 했다. 이를 회계(會計)라 한다.[193] 양자강 하구 절강성에 회계산(會稽山)이 있다고 한다.
4.환단고기(桓檀古記) 기본 자료의 출처: 고조선의 역사를 뜻한 우본기 (禹本紀)가 중원에 있었다. 이를 회구지 비씨경 절부사 (懷舊志. 費氏經, 竊父史), 또는 숨겨 놓았던 비밀이란 뜻의 비기 (秘記), 참서(讖書)라고 했다. 백호통론(白虎通德論)에는 제전욱사록도 (帝顓頊師綠圖)라 했다.[194] 진수는 “手據地竊語”라 했다. 홍산문화권에 글자가 있었다는 증거다. 홍산문화권의 가첩이 단군세기 (檀君世紀)다. 이를 비기(秘記) 또는 고사고 (古史考)란 문구로 남겼다. 급총죽간이 내용이 모두 위나라 역사라 했다. 우의(禹) 아들 개(啟)가 백익을 죽였다. 백익을 추모하는 백충장군 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문에 백익(伯益)이 전욱 고양씨의 두쩨 아들이다. 사전에는 <저 늙은이 란 뜻의 이기(伊耆)는 옛 왕자의 호(古王者號)라 했다. 백익 (伯益)이 납향제(臘享祭)를 시작 했다.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는 여러 형태로 다르게 풀이했다. 신해혁명 (辛亥革命; 1911년) 이후에 북경 대학에서 의고파가 나타나 하(夏) 왕조 창립에 의문점이 있다고 지적 했다. 국수주의자 장병린 (章炳麟; 1868-1936)은 구서 (訄書)에 [영주 지역 (營州之域,朝鮮) 에는 순임금 때 부터 저도적 (著圖籍)이라, 즉 족보가 있었다] 고 했다. 그곳에 살았던 말갈족 (韃靼, 羯,胡)을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인식했다.[195] 북부여의 발생지, 즉 우거왕이 사살 당한 위만조선 경기 지역에는 족보가 있었다는 뜻이다. 즉 단군세기 성격의 기록이 있었다는 뜻이다. 고구려에는 국초부터 기록을 해 와서 남은 기록 (留記) 백권이 있었다.이를 근거로 신집을 만들었다. 이 비기 (秘記)를 당나라 가언충 (賈言忠)이 가져갔다. 일년 스님이 인용한 단군기는 만주에서 한반도로 내려와 동국통감 (東國通鑑)에 실렸다.
단군교 경전 “참전경(參佺經, 즉 參仙人은 이맥 (李陌, 1455년-1528년) 이 남긴 소도경 전본훈 (蘇塗經傳本訓)에 고구려 재상 을파소 (乙巴素, ?-203년)가 전했다”고 한다.[196] 이를 스님은 경운(經云)이라 했다. 북부여의 발생지가 홍산문화권의 중심부였다. 뒤를 이어받은 고구려에서 편찬한 유기가 홍산문화권의 첫 기록이다. 그 지역에 구전해 오던 전설, 즉 여러 단군과 왕검 백익에 관한 기록을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이어 받아, 발해 역사서를 남겼다. 이를 단기고사 (檀奇古史)라고 했다.[197] 고구려 전성기에 수(隋, 581년-619년) 나라에 유학 했던 안함(安含, 578년 ~ 640년)이 삼성기를 남겼다. 대야발이 인용했던 참서(讖書)가 삼성기의 사료였다. 안함이 귀국할 당시 수나라는 망하고 선비족의 세운 唐이 되었다. 박사 고흥 (高興)이 백제 서기를 남긴 곳에서 얻은 불교서와 참서를 신라와 왜에 전했다.[198] 안홍 (安弘)을 안함(安含, 578년 ~ 640년), 또는 노자 같은 사람이라 안함노 (安含老, the elder)라 한다. 그가 일본에 신도(神道)의 뿌리를 심었다.
고려 말에 한양천도안을 토의 할때 최영 장군이 참서 (讖書) 내용을 인용 했다. 아사달에서 나타난 북위 (拓跋魏, 北魏, 後魏)의 재상 이었던 최호(崔浩)는 고유 신앙에 위배되는 가치관을 펴는 남방불교를 탄압 하기를 권했다. 같은 자료를 천도 주장에도 인용 했다.[199]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비류백제의 수도 미추홀에 관한 설명의 출처가 고전기 (古典記)라고 했다. 김부식은 [단군기를 고기(古記)운]으로 기록 했다. 이조 초기에 고려사 편찬에 논란이 많아 고려사 절요가 나왔다. 그에는“古典記”는 실리지 않았고 남부여(南扶餘)란 글자가 실렸다. 단군기(壇君記) 내용이 北扶餘古記,남아 있던 기록 (留記)에 실렸다. 이를 근거로 새로 편집한 역사서를 신집 (新集)이라 했다. 고구려 비기(秘記)를 비록(秘錄), 또는 참서(讖書)라 했다.
최근 중국에서 발표한 도사쥬지(陶寺遺址)는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 즉 우리양곡(嵎夷 暘谷)의 뜻과 음을 이리저리 돌려 시/단마오 방국(石峁 shí/ dàn mǎo 邦國) 이라 했다.[200] 도사 유지 (陶寺遺址)란 새로운 이름자를 만들었다. 도교 사원(道敎寺院,Taoist temple) 이 있던 곳, 고조선의 수도 였다. 이곳이 사마천의 아버지가 천문을 배웠다는 당도(唐都), 즉 북쪽에 있던 당(北唐)의 수도다.[201] 기자가 갔던 곳이다. 허유(許由)의 무덤이 있고 남쪽에는 견우(牽牛)의 무덤이 있다는 곳이다.[202] 허유는 단군을 뜻한 다른 사음 (寫音)자다. 이 곳에 상나라의 시조 계 (偰,契; 설 글)가 살았다.[203] 권근이 인용한 조선사략 (朝鮮史略)에는 단군이 상나라 무정 (商式丁;? 1394–1296 BC) 때에 나이 4,000년이 지나 죽었다고 했다. 옛기록 (古記)에 실렸다는 조선의 지도자 단군은 단군왕검 이전 사람으로 북쪽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온 사람이다.[204] 그지역 사람들이 읊은 향가가 당풍 (唐風)이다. 높고 멀다는 뜻글자 요(堯; yáo; 高遠也) 가 다스렸다는 나라는 없다. 단군과 조선은 단군왕검 백익伯益) 이전 부터 있었다.
백익을 살해하고 나타난 하 왕조의 유적지가 이리두(二里頭)로 알려졌다. 조선사략의 내용이 세조가 계획 하여 1485년에 완성된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렸다. 그 안에 단군왕검을 국조로 한 고조선 (古朝鮮)이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의 침략으로 멸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과 부여의 발생지를 중원 세력이 감추어서 지나온 길을 찾지 못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다.
모두 위나라의 역사서(蓋魏書)라던 급총 죽간 과두문자 (科斗字)는 풀이가 난해 했다. 이를 인용하여 여러 사가들이 사서를 편술 했고, 도가의 성격을 지닌 각종 기서(奇書)가 중원에서 나타났다. 단군의 유명이라 풀이 되는 이상한 글자 18가 색인된 종이 회계우물 속에서 발견 되었다.[205] 진수의 삼국지 초주(譙周)전에 고사고서지속 백여편 (古史考 書之屬 百餘篇)이라, 즉 옛 역사를 다룬책 백여편이 있다는 문구가 있다. 이 출처불명의 옛역사 기록을 인용하여 [삼황오제가 인류 문화사에 필요한 여러 기물들을 만들었다]고 했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장안성을 비롯한 삼경이 있었다. 온조왕의 수도였던 대동강 하류 한성 (漢城)을 빼앗아 이를 삼경의 하나로 사용 하고 한반도 남쪽에 정착한 신라와 접전 했다. 남쪽에 있던 수나라와는 유수(渝水) 계곡의 요새 임유관(臨渝關)에서 싸웠다. 유수(渝水)는 성수 요수 (聖水 堯水 遼水)라고도 했다. 호타하에 가까이 있었다. 이곳이 전국시대 고조선의 수도 금미달 (今彌達)이다. 고구려의 서쪽은 임유관에 이르럿고,관직명에 단군신앙을 숭상하던 종교적 지도자를 뜻한 예속 (翳屬),선인(仙人)이 있었다.[206] 또한 많은 경전을 소유 했고 교육열이 높았다. 발해의 풍속과 현악기는 고구려 글안과 같고 역사서 또한 비슷했다.[207] 북송을 다녀온 이자의 (李資義; ? ~ 1095년)는 송나라 (宋朝, 960년 ~1127- 1279년)에서 고구려가 갖고 있는 귀한 서적을 요구 하더란 목록을 전했다. 그 속에 위서(魏書)등 위진 시대에 급총죽간 내용을 근거로 편찬된 각종 서적 이름이 실렸다. 고구려 풍속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고조선 땅에 있던 각종 고전과 역사서 고옥편 (古玉篇)을 백제 사람 왕인(王仁)이 일본(倭, 열도부여)에 전했다. 그가 고구려 장수왕에 인질로 잡혔던 연왕홍의 태자(燕王弘太子王仁為質) 였다.
중원을 통치하던 원나라에서는 고려에 귀한 서류를 많이 보냈다. 중국에서 얻은 한국 역사에 관한 서적이 있었다고 본다.[208] 당나라 말기 학자 정경(鄭綮)은 [전해 오는 예기는 꼭 믿어야 한다 하여 개천전신기 (開天傳信記)라는 책을 남겼다. 만주에 있던 고구려 제상 을파소가 개천절에 관한 사료를 남겼다. 서경에서 묘청이 도참설을 인용 하여 난을 이르켜 김부식이 토벌 했다. 그후 북쪽 세력을 배척 했다. 한반도 남단은 대륙백제 시대 부터 강남과 교류가 왕성하여 남방불교가 들어 왔다. 일본 구주에 있던 열도백제는 반도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교류를 유지 했다. 백제가 통치 하던 지역에 살던 녹도승 (鹿島昇)으로 부터 환단고기 사료를 구했다.[209] 이 섬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서 통치 했다.
급총죽간 내용이 만주와 한국, 열도부여 일본 구주에 전해 져서 토속신앙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여 환단고기의 기본사료가 되었다. 친명 모화사상을 국시로 한 이성개가 나라를 세운 이후 환단고기의 일차 사료가 분실 또는 은패 되었다. 명나라에 보낸 사신이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명나라 구준이 답 (丘濬曰)한 내용에 [고조선은 상나라 이전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210]
주선왕이 한후에게 선조로 부터 물러 받은 방대한 북국의 영역을 통치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중원 세력 북쪽에 끝을 알수 없던 넓은 영역(SMa)의 역사를 찾으려고 노력한 총결실이 환웅과 단군(桓雄 壇君) 을 뜻한 환단 고기다.[211] 경천인애 (敬天人愛) 홍익인간(弘益人間)사상이 핵심이다. 천부경 단군세기 북부여기는 한국상고사 범주다. 중국에서 하상주단대공정 (夏商周斷代工程)이전에는, 주선왕이 잡혀 갔던 공화 원년(기원전 841년)이 중국사에서 확실한 가장 오래된 연대로 다루었다. 그 시기에 [도사 유적이 발굴된 지역 (陶寺遺址)의 지도자, 공공 (共工)국 화(共伯和)가 내려와 선왕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가고 서주 영역을 다스렸다.[212]
선왕이 한후와의 약속이 동북아 역사에 나타난 첫 국제법 조약이다. 이를 넓리 알려야 한다. 고조선 역사는 중원세력이 숨겼다. 전통 삼신 숭배 신앙은 남방불교에서 인용하여 이를 선종 (禪宗), 또는 선불교(禪佛敎)라고 한다. 중국에 있던 도교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선사시대 부터 조선이 있었다. 백익이 왕검(王儉)으로 추대 되어 왕검조선을 선포한 단기원년 이다.
5 약점을 보이지 말자: 역사서 (Historiographies)란 완벽 할수가 없다. 상식 밖의 예기는 좋은 평을 받을 수가 없다. 최근에는 서양 학자들도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 지고 있다. 핼싱키대학 (Helsinki)의 앤드류 로기 (Andrew Logie) 를 비롯한 여러 서양 학자들은 재야사학가들의 글을 가짜역사 (Pseudohistory)란 평을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혹독한 비평을 피하려면 상식 밖의 주장을 피해야 한다. 어디 까지가 전설이고 어디서 부터 역사고, 신앙인가를 구별 해야 한다. 정치가는 종교 문화단체 세력을 이용하고, 종교는 역사적 인물의 언행을 기본으로 경전을 만들었다. 역사에는 사실 (fact)이 있기 때문이다.
VIII.맺음 말
필자는 이 수필을 통하여 다시한번 동북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간략히 설명 했다. 시대 구별이 정해저야 고유명사를 옳바로 풀이할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670년 에 일본이 탄생 하기 까지를 고대사의 하단으로 정했다.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1981년에 편찬한 통람 한국사 에서는 시조(始祖)의 함자도 바로 잡지 못하고 한민족 역사의 시작을 기원전 4세기경 한반도 라고 했다. 아직도 이렇게 잘못된 학설을 고수 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살던 유목민이 고조선을 세웠다.선비,글안, 여진은 모두 사라지고 단군왕검의 후손이 한국에 남아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인도에 갔다는 증거가 있다. 불교는 밝을 환(桓)에서 취해 갔고, 예수는 동방박사가 찾아 왔다는 동쪽으로 여행하여 인도를 다녀가 시나교(耆那教)의 문양, 빛이 가득 하다는, 만(卍)자의 뜻을 인식했다. 히틀러는 신성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국을 꿈꾸며 문양으로 만(卍)자를 썼고 일본은 일장기를 썼다.
먼 안목으로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기술 했던 고전을 협소한 시각에서 풀이하여 시대와 장소 그리고 방향 감각 마저 잃어, 그릇된 판단을 한다. 복잡한 역사 문제를 다룬 수필은 사리에 맞게 설명을 해야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 관한 역사를 주제로 글을 쓰는 사람은 옛부터전해오는 [전설, 신앙, 정치, 역사를 포함한 인류문화사]에 담긴 어문(語文)을 옳바로 풀이하여 사건의 발생시대와 지역, 그후 변천 과정을 합당하게 기술 해야 한다.
개천절(開天節)이 홍산문화의 특징이다: 전욱고양씨의 후손이 홍산문화를 이루었다. 치우천왕, 공공, 백익, 우의 아버지 곤(鯀) 등등 모두 북쪽에서 임유관을 지나 분수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산서성에는 “햇볓 (sunray)이라는 뜻의 해비씨 (解枇氏), 비씨 (費氏), 해(解)씨”가 있었다. 만주에 나타난 고구려와 부여의 성씨다. 유목민들은 달(月)을 보고 햇수를 계산 했다. 도사(陶寺)에서 해시계 유적이 발굴 되었다. 전욱력 (顓頊曆)이 일년을 넷으로 나눈 사분력 (四分曆)의 시초다. 만물이 겨울을 준비하는 새해의 첫(상)달로 정했다. 달을 볼수 있는 상달 초사흘을 개천절 로 정했다. 상서에 실린 우리양곡 (嵎夷暘谷)이 아사달(阿斯達)이다.[213] 백익이 살았던 조선이다. 그 곳에 기자가갔다.[214] 사마천의 아버지도 다녀 갔다. 기산(箕山)이 있던 당의 수도(唐都)다.[215] 남쪽으로도 내려와 상나라를 세우고 흰옷을 입었다.[216] 개천절을 은정월 (殷正月)이라 했다. 몇일 동안 계속 되었던 의식을 진수는 지역에 따라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고조선 사람들 려민(黎民)이라 했다. 여러 부족의 연맹체라 구려(九黎, 句麗)라고 했다. 공자님이 살고 싶다 (子欲居九夷)한 곳의 지도자가 치우였다.[217] 공자는 [탁록전의 원인을 부자간에 나타나는 합당한 청탁을 거절해서] 싸웠다고 했다. 탁록이란 장소가 분수 계곡과 해하 수계에서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구리의 지도자 치우가 싸운 곳을 판조(阪兆)라는 기록도 있다. 모두다 옛 구주에서 산서성 태행산맥이 흐르는 지역이다. 춘추시대 이전 부터 산서성에 살던 고구려와 부여의 선조다. 중원 세력과 오랫동안 싸웠다. 전국시대에 밀려 만주로 올라 왔다.
시대구별: 동호왕 비가 살해 당한 기원전 208년 까지를 상고라 한다. 그로부터 우거왕이 살해 당한 이후 고조선 사람들이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흐터저 나갔다. 고구려가 숙신씨를 흡수한 270 까지를 중고, 남만주에 있던 신라가 470년 경에 경주로 수도를 옮기고 668년에 삼국을 통일했다. 선조들이 살던 땅을 잃은 열도부여씨는 670년에 새로 일본(日本)을 세웠다. 이때 까지를 동북아시아 역사의 고대사 (古代史, Ancient history) 라고 이름 한다.
끝
[1].미국 조지와싱톤 의과대학 교수직 퇴임. 재야사학가. 흰배옷으로 제 시신을 덮어 주기를 바라면서. 미국 McLean, Virginia에서, 모솔, 李燉聖.
[2]. 이돈성 , 뿌리를 찾아서, (서울: 다트앤, 2011) 만주는 우리 땅. p. 229.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서울: 책미래, 2016), 글자 속에서. p 19. Mosol Don S Lee, Redefined. 東北亞上古史 新論. Xlibris. 2018.
[3]. 孟子 滕文公上:《詩》云『周雖舊邦,其命惟新』,文王之謂也, 詩經 文王: 周雖舊邦、其命維新
[4]. 呂氏春秋: 昔上古龍門未開,呂梁未發,河出孟門,大溢逆流,無有丘陵沃衍、平原高阜,盡皆滅之,名曰鴻水.
[5].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삼한-三韓의-후예-後裔들/북부여기에 나온 단군은 누구인가.
[6].高麗圖經: 王氏之先。蓋高麗大族也。當高氏政衰。國人以建賢。遂共立爲君長。乃拜建元菟州都督。封高麗王。
[7]. 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서울: 책미래, 2016).시경 속에서. p 88
[8].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Fallacy of Liùshū (六書). p 12. 愛新覺羅溥儀.
[9]. 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서울: 책미래, 2016).글자 속에서. p 19.
[10].後漢書: 逵所著經傳義詁及論難百餘萬言. 三國志 鍾會傳: 弼注老子,注易,往往有高麗言。太原王濟好談,
[11].水經注: 桑乾水自源東南流,右會馬邑川水,水出馬邑西川,俗謂之磨川矣。蓋狄語音訛,馬、磨聲相近故爾。
[12].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P 211. 동호에-관한-새로운-고찰東胡新考/
[13]. 爾雅:釋天:北陸,虛也. 星紀,斗牽牛也.戰於涿鹿,蚩尤敗走. 戰於阪兆;蚩尤走敗。《左傳》遇黃帝戰於阪泉之兆
[14].《揚雄·自序》揚別爲一族。周宣王子尚父封揚侯,因氏. 楊雄以為靡麗之賦
[15]. 說文解字: 明出地上,㬜. ancienthistoryofkorea.com/古朝鮮의-문화와-역사/ 한예문자(韓穢文字)가 번체자(繁體字)
[16].拾遺記:至晉太康元年,孫皓送六金璽云:「時無玉工,故以金為印璽。」夫孫氏擅割江東,包卷百越
[17]. 三國志 孫堅傳: 與父共載船至錢唐,會海賊胡玉等從匏里上掠取賈人財物. 吳時無能刻玉,故天子以金為璽。
[18].舊唐書:《千字文》一卷蕭子範撰. 《篆書千字文》一卷. 《演千字文》五卷. Lee Mosol: Second Edition. Xlibris 2020. P 218.
[19].이돈성, 뿌리를 찾아서, 다트앤, 2011 p. 50. 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책미래, 2016). P 9.
[20]. Mircea Eliade; The Sacred & The Profane. The Nature of Religion. Harcourt Brace,1959, p 68-p 216
[21]. 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책미래, 2016. P 19.
[22].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Converting oral history to Written one. p 28-36.
[23]. 尚書 商書 西伯戡黎:祖伊恐,奔告于王。曰:「天子!天既訖我殷命。蚩《註》九黎之君,號曰蚩尤.
[24].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대전: 상생출판사, 2013), 66. 論衡 雷虛: 盛夏之時,擊折樹木,壞敗室屋,時犯殺人。
世俗以為「擊折樹木、壞敗室屋」者,《圖》出於河,《書》出於洛,河圖、洛書,天地所為,人讀知之.
[25]. 水經注 伊水: 洛陽,周公所營洛邑也. 故《洛誥》曰:南繫于洛水.碑云: 將軍姓伊氏,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
[26].藝文類聚: 胤殷周之失業,紹唐虞之絕風,懿律嘉量,金科玉條,神卦靈兆,古文畢發,煥炳照曜,靡不宣臻
[27]. 康熙字典 六:《史記·樂書》四夷之樂,東方曰𩎟,南方曰任,西方曰株離,北方曰禁. 栒邑,屬右扶風,古豳地
[28]. 孟子 萬章上:禹薦益於天,七年,禹崩。三年之喪畢,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 孟子 梁惠王下:. 《詩》云:『古公亶甫,來朝走馬,率西水滸,至于岐下。爰及姜女,聿來胥宇。』「昔者大王居邠,狄人侵之,去之岐山之下居焉。
[29]. 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서울: 책미래, 2016 P 187. 필자는중국사람들이 풀이한 금문 旜를 뜻과 음 모두 제터 단壇자로 본다. 모두 밝음 환(桓)을 뜻한 아침 단(旦)자가 있다. 旜:《唐韻》音饘。《說文》旃,或从亶
[30]. 焦氏易林: 東門之壇, 壞其太壇”樹表為壇. 蹇:手拙不便,不能伐檀;車無軸轅,行者苦難
[31].한국어의 특성이 동서남북 방향 표기에 있다. 하강, 남하, 북상, 상승, 참빗 (hair comb)하는 표현이 본보기다.
[32]. 山海經 中山經:曰鮮山。鮮水出焉,而北流注于伊水. 水經注 伊水:東流入伊水,伊水又東北,鮮水入焉,水出鮮山..
[33]. 國語 晉語四: 黃帝以姬水成,炎帝以姜水成. 康熙字典 說文》黃帝居姬水,以姬爲氏,周人嗣其姓,
[34]. 姓氏의 기원: 성姓은 모계, 씨氏는 핵 (核,햇살, sun-ray,희다) 즉 부계를 뜻한 글자다. 원시사회에서는 모계.
[35]. 三國史記: 王設大壇, 親祠祀天地, 異鳥五來翔. 設大壇, 祀天地山川. 王謁東明廟。祭天地於南壇. 東城王 魏遣兵來伐.
[36]. 桑乾水:右會馬邑川水,水出馬邑西川,俗謂之磨川矣。蓋狄語音訛,馬、磨聲相近故爾。其水東逕馬邑縣故城南,
[37]. 論語 公冶長: 舊說冶長解禽語,故繫之縲絏. 蔡中郎集:昔伯翳綜聲于鳥語,葛盧辨音于鳴牛
[38]. www.ancienthistoryofkorea.com/ 금미달 소고(今彌達小考). 隋書: 元率靺鞨之衆萬餘騎寇遼西. 攻陷臨渝鎮.
[39]. 최무장,渤海의 起源과 文化, (예문출판사, 1988), 발해족의 기원. 靺鞨의 공동체 유형과특징,P 9-114.
[40].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Chapter 2: Trail of Footprints, p 58.
[41].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부여시조 동명왕이 백익 (伯益)의 후손. 바둑에 숨은 상고사-보충 설명:
[42]. 史記:其後燕有賢將秦開. 論衡 書解: 商鞅相孝公,為秦開帝業. 鹽鐵論 非鞅:知其為秦開帝業,不知其為秦致亡道也
[43]. 尚書 微子: 父師若曰:「王子!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 竹書紀年 武丁:
三十二年,伐鬼方。次于荊。山海經 海內經: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44]. 尚書: 流共工于幽洲,放驩兜于崇山,竄三苗于三危,殛鯀于羽山,四罪而天下咸服. 山海經: 讙頭國 讙兜,堯臣也
[45]. 大藏經:玉門陣悖謹讎. 逸周書 嘗麥解:蚩尤乃逐帝,爭于涿鹿之河,九隅無遺,赤帝大懾,乃說于黃帝,執蚩尤殺之于中冀。四天王天之上有忉利天。乃知大王之靈聖也。當時群臣啟於王曰。王曰。畫花而無蝶。知其無香。玉門者女根也。女為陰也。山海經 大荒西經:有山名曰豐沮玉門,日月所入。
[47]. 論衡 率性: 黃帝與炎帝爭為天子,教熊羆貔虎以戰于阪泉之野,三戰得志,炎帝敗績.列子黃帝: 姑射山在海河洲中,山上有神人焉,吸風飲露,不食五穀;心如淵泉. 黃帝與炎帝戰於阪泉之野.
[48]. 山海經 大荒北經: 有共工之臺,射者不敢北嚮。有人衣青衣,名曰黃帝女魃。蚩尤作兵伐黃帝,黃帝乃令應龍攻之冀州之野。應龍畜水,蚩尤請風伯、雨師,縱大風雨。黃帝乃下天女曰魃。. 水經注 㶟水: 㶟水出鴈門陰館縣,東北過代郡桑乾縣南. 《晉太康地理記》曰:阪泉亦地名也。泉水東北流與蚩尤泉會,水出蚩尤城,城無東面
[49]. 史記 封禪書: 其後百餘年,秦靈公作吳陽上畤,祭黃帝;作下畤,祭炎帝. 史記 天官書: 牽牛為犧牲。其北河鼓。河鼓大星,上將;左右,左右將。婺女,其北織女。織女,天女孫也。
[50]. 說文解字 邰:炎帝之後,姜姓所封,周棄外家國。从邑台聲。右扶風斄縣是也。《詩》曰:「有邰家室。
[51]. 大藏經:玉門陣悖謹讎. 三國遺事: 佛經云。四天王天之上有忉利天。乃知大王之靈聖也。當時群臣啟於王曰。王曰。畫花而無蝶。知其無香。玉門者女根也。女為陰也。山海經 大荒西經:有山名曰豐沮玉門,日月所入。
[52]. 焉:《說文》焉鳥,黃色。象形。《玉篇》安也,疑也。《廣韻》何也。《史記·》太初元年,歲名焉逢。漢書作閼逢。過焉支山。《西域傳》焉耆國,治員渠城。《淮南子·時則訓》天子焉始乗舟,薦鮪子寢廟。《註》焉,猶於也
[53]. 山海經 海內經: 東海之內,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有鹽長之國。有人焉鳥首,名曰鳥氏
[54]. 三國遺事 朝鮮: 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
[55]. 史記 宋微子世家: 箕子對曰:「在昔鯀陻鴻水,汨陳其五行,帝乃震怒,不從鴻範九等,常倫所斁。
[56]. Lee Mosol, Second Edition, (Xlibris 2020), YRVC and Size of Original Nine Provinces 13.
[57].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Paddle, Jupiter (木星), and Annual Tax. p 149
[58]. 竹書紀年 帝舜有虞氏: 息慎氏來朝貢弓矢. 玄都氏來朝,貢寶玉. 帝居于鳴條. 五十年,帝陟。戰于鳴條。夏師敗績. 史記 夏本紀: 湯遂率兵以伐夏桀。桀走鳴條,遂放而死。
[59]. 尚書 湯誓: 遂與桀戰于鳴條之野,作《湯誓》焦氏易林: 鳴條之郊,北奔犬胡。國號匈奴。王君旄頭,立尊單于
[60]. 山海經:有胡不與之國,烈姓,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 共工臣名曰相繇。即為源澤。禹湮洪水,殺相繇,
[61]. 심백강,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바른역사,2014) p 102
[62]. 逸周書 王會解:, 成周之會,墠上張赤帟陰羽,天子南面立。唐叔、荀叔、周公在左,太公望在右,
[63]. 孟子: 「吾欲二十而取一,何如?」孟子曰:「子之道,貉道也。萬室之國,一人陶,則可乎?」 曰:不可,器不足用也.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Paddle, Jupiter (木星), and Annual Tax. p 40
[64]. 山海經: 曰姑射之山, 曰北姑射之山. 曰南姑射之山. 列姑射在海河洲中. 姑射國在海中,屬列姑射,西南,山環之.
[65]. 三國遺事: 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category/media/ Ancient Korean Religion: Polaris and Small Dipper.
[66].山海經 海內北經:姑射國在海中,屬列姑射,西南,山環之. 列子 黃帝:列姑射山在海河洲中,山上有神人焉,吸風飲露,不食五穀. 通典 州郡九: 臨汾漢平陽縣有姑射山,又有故堯城縣. 洛:水。出左馮翊歸德北夷界中,東南入渭.
[67]. 史記: 傳之於益。已而啟與交黨攻益,奪之。天下謂禹名傳天下於益,已而實令啟自取之. 孟子: 禹薦益於天,禹崩.
[68]. 史記: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 論衡 書解: 商鞅相孝公,為秦開帝業. 鹽鐵論 非鞅:知其為秦開帝業,
[69]. 水經注 伊水: 洛陽,周公所營洛邑也. 故《洛誥》曰:我卜瀍水東,南繫于洛水.又有《百蟲將軍顯靈碑》碑云: 將軍姓伊氏,諱益,字隤敳,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 論衡 正說:禹之時,得《洛書》,《書》從洛水中出
[70].鼓:〔古文〕𩉲 伊耆氏造鼓。《說文》鼓,郭也。春分之音,萬物郭皮甲而出,故謂之鼓。《玉篇》瓦爲椌,革爲面,可以擊也.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 Wanggeom made Drum
[71]. 詩經 韓奕: 奕奕梁山, 維禹甸之、有倬其道。纘戎祖考. 烝民: 王命仲山甫、式是百辟。纘戎祖考、王躬是保。 信南山: 信彼南山、維禹甸之. 文王有聲: 豐水東注、維禹之績
[72].山海經 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其血腥. 列子 黃帝:列姑射山在海河洲中,山上有神人焉,吸風飲露,不食五穀. 通典 州郡九: 臨汾漢平陽縣有姑射山,又有故堯城縣.
[73]. 史記 天官書: 中宮天極星,其一明者,太一常居也. 婺女,其北織女. 呂氏春秋 有始:北方曰玄天,其星婺女、虛、危、營室. 《地理志》粤地,牽牛婺女之分野. 太平廣記 神仙二十五 採藥民: 玉皇前立七人,北斗七星也
[74]. 竹書紀年: 帝即位,居冀. 會諸侯于塗山.會諸侯于會稽,殺防風氏. 帝啟、帝即位于夏邑. 費侯伯益出就國。王帥師伐有扈,大戰于甘. 伯益薨,祠之帝使孟涂如巴涖訟. 帝巡狩,舞《九韶》于大穆之野.大荒之中 有山名㱙塗之山 禹攻雲雨
[75]. 呂氏春秋 有始: 東北曰變天,其星箕、斗、牽牛。北方曰玄天,其星婺女、虛、危、營室。敄:《說文》強也
[76]. 論衡 說日:實者、夏時日在東井,冬時日在牽牛。牽牛去極遠,故日道短;東井近極,故日道長。夏北至東井,冬南至牽牛,故冬夏節極,皆謂之至;春秋未至,故謂之分。山海經: 有禹攻共工國山.共工之臣曰相柳氏。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其血腥. 禹攻雲雨
[77].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category/media/ Ancient Korean Religion: Polaris and Small Dipper.
[78]. 開天傳信記:竊以國朝故事,莫盛於開元天寶之際。服膺簡策,管窺王業,參於聽聞,或有闕焉。承平之盛,不可殞墜。輒因薄領之暇,搜求遺逸,傳於必信,名曰《開天傳信記
[79].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Shang Rong (商容) and Guan ju (關雎). P 51
[80]. 詩經 蕩:內奰于中國、覃及鬼方. 周易曰:高宗伐鬼方,三年而克之,鬼方小蠻夷,高宗殷之盛天子也
[81].史記:夏本紀: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 [孟子萬章上: 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 單于仰視商容貌.
[82].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Shang Rong (商容) and Guan ju (關雎). p 50.
[83]. 山海經 大荒南經: 大荒之中,有山名㱙塗之山,有雲雨之山,有木名曰欒。禹攻雲雨. 海外北經: 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于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谿。禹殺相柳,其血腥,不可以樹五穀種. 禹湮洪水,殺相繇,其血腥臭
[84]. 史記 伯夷列傳: 詩書雖缺,然虞夏之文可知也 而說者曰堯讓天下於許由,許由不受。及夏之時,有卞隨、務光者。
縣南對箕山,山上有許由冢,堯所封也。山海經 大荒北經: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
[85]. 廣韻 餘: 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86]. 三國志: 朝鮮侯亦自稱為王。其大夫禮諫之,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否死,其子準立。朝鮮與燕界於浿水.
[87].水經注:淇水出河內隆慮縣西大號山,《山海經》曰:淇水出沮洳山. 濊水出焉.又東北過濊邑北. 一水北注滹沱.
[88]. Lee Mosol, Second Edition. (Xlibris 2020), Bal-Joseon (發朝鮮) and Five Hegemons(五覇). P 37.
[89]. 孔子家語 曲禮子貢問:子貢問於孔子曰:「晉文公實召天子,而使諸侯朝焉。夫子作《春秋》,云天王狩于河陽。何也?」孔子曰:「以臣召君,不可以訓。」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P 35-36.
[90]. 說文解字 邑部: 邶:故商邑。自河內朝歌以北是也。从邑北聲。
[91].《爾雅·釋地》燕曰幽州。《詩·大雅》溥彼韓城,燕師所完。《朱傳》燕召公之國。◎按鄭箋云:燕,安也。讀去聲
[92]. 孟子 :萬章曰:「舜流共工于幽州,放驩兜于崇山,殺三苗于三危,殛鯀于羽山,四罪而天下咸服,誅不仁也。」
[93]. 山海經 海內經: 有人曰苗民。有神焉,衣紫衣,冠旃冠,名曰延維,人主得而饗食之,伯天下
[94].焦氏易林: 解:北辰紫宮,衣冠立中。含和建德,常受天福. 韓非子: 共工於幽州之都
[95]. ancienthistoryofkorea.com/= Etymology of Khitan Empire; Name of Khitan came from the Hédàn 盍旦 in the Shijing.
[96]. 韓詩外傳: 扁鵲過虢侯,扁鵲曰:「入言鄭醫秦越人能治之。」; 史記 扁鵲倉公列傳扁鵲者,勃海郡鄭人也
[97]. ancienthistoryofkorea.com/= Etymology of Khitan Empire; Name of Khitan came from the Hédàn 盍旦 in the Shijing.
[98]. 國語 晉語八: 設望表,與鮮卑守燎,故不與盟。今將與狎主諸侯之盟
[99]. 孟子:其事則齊桓、晉文,其文則史。孔子曰:『其義則丘竊取之矣。』」 顏氏家訓 文章:班固盜竊父史
[100].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대전: 상생출판사, 2013) 북부여기. P 246. 三國遺事:北扶餘古記云。天帝降於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立都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生子名扶婁。以解為氏焉.
[101]. 史記 太史公自序: 為秦開地益眾,北靡匈奴,據河為塞,因山為固,建榆中。作蒙恬列傳第二十八
[102].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p 65.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s=진개
[103].史記列傳平津侯主父列傳: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104]. 漢書 天文志: 其後漢兵擊拔朝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105]. Lee Mosol, Second Edition. (Xlibris 2020), P 135.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창해군에 얽힌 비밀-2:
[106]. 三國史記: 遣兵侵新羅。拜眞忠為左將,委以內外兵馬事: 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祭天地於南壇。拜眞忠為右輔,眞勿為左將,委以兵馬事. 晉書: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
[107]. 冊府元龜:後魏崔浩為祭酒神瑞 王亮蘇垣因華陰公等言讖書國家當治鄴應 遷都浩與時進周澹言於明元日今國家遷都
[108]. 三國遺事:時國人傳圖讖曰。金人敗國.。侍臣識之云是佛塔。漢國有之。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祭天金人因生信。
[109]. Lee Mosol: Second Edition. (Xlibris 2020) Etymology of Xianbei tribe names, p 176. 《晉書》曰:讖書有蝦蟆當貴.
[110]. 三國志 濊傳:朝鮮侯準僭號稱王。陳勝等起,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111]. 史記: 筑長城,自代并陰山下,至高闕為塞。而置雲中、鴈門、代郡。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
[112]. 三國志 高句麗傳: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祠靈星、社稷。以十月祭天,名曰東盟
[113].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王險城 p 70.
[114]. 遼史: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平壤城,遼東京本此. 忽汗州即故平壤城也. 金史:國名兀魯忽必剌,俗名太子河
[115].水經注:上黨長子縣西發鳩山. 堯水自西山東北流,逕堯廟北. 呂氏春秋:三危之露;名曰搖水;曰山之水;冀州之原
[116].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王險城 p 70. Etymology of Nihon. P 230
[117]. 필자의 새로운 주장이다. 홍산문하를 몰라(SMa), 고조선 발생지에 있던 이름을 몰랐던 지역에 새로 심었다.
[118].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P 184.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p 139.
[119]. Mosol Don S Lee,東北亞上古史 新論. (Xlibris. 2018) p 297.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부여 (扶餘)의 어원
[120]. 三國遺事: 北扶餘古記云。前漢書宣帝神爵三年。天帝降於訖升骨城. 自言天帝子解慕漱。誘我於熊神山下鴨綠邊室中知之而往不返壇君記云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產朱蒙。壇君記云產子名曰夫婁。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121]. 史記 貨殖列傳: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南通齊、趙,東北邊胡.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122]. 三國志 韓傳: 魏略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
[123].三國志: 否死,其子準立。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言語不與韓同,皆髠頭如鮮卑,乘船往來,巿買韓中
[124]. Mosol Don S Lee, Second Edition. (Xlibris. 2020). Buyeo p 75. 隋書:「高麗之地, 本孤竹國也,晉氏亦統遼東。
[125].逸周書 王會解: 稷慎大麈,穢人前兒,前兒若獮猴立行,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迅走.
[126]. 三國志 鮮卑傳: 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至于今,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
[127]. Mosol Don S Lee. Second Edition. (Xlibris. 2020). 東明王 Buyeo. P 73.
[128]. 呂氏春秋:「不與崔氏而與公孫氏者受其不祥」。晏子俛而飲血,仰而呼天曰:「不與公孫氏而與崔氏者受此不祥。」
[129]. Mosol Don S Lee, (Xlibris. 2020). Rise and Fall of Gongson Clan. P 87.
[130]. Mosol Don S Lee, Northeast Asia Redefined. 東北亞上古史 (Xlibris. 2018.) 대륙백제의 탄생과 성장. P 327
[131].후에 들어온 남방불교를 발해만에 접붙였다. 阿育王為第四女所造也。梁書扶南國傳曰:晉咸和中,丹陽尹高悝.
[132].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P 187
[133]. 廣韻 餘: 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135].竹書紀年 成王: 十二年,王帥、燕師城韓。王錫韓侯命.
[136].詩經: 韓奕: 奕奕梁山、維禹甸之、有倬其道。韓侯受命、王親命之、纘戎祖考。以先祖受命、其追其貊、奄受北國. 烝民: 王命仲山甫、式是百辟。纘戎祖考、王躬是保. 竹書紀年 宣王:王命樊侯仲山甫城齊. 說文解字:及宣王太史籀,著大篆十五篇,與古文或異.
[137].三國志: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
[138].이돈성,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P 184.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p 139.
[139]. 三國志 韓傳: 至王莽地皇時,廉斯鑡為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鑡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即以鑡為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 염사치 (廉斯鑡) 사건
[140]. 三國史記:王與馬韓、穢貊侵遼東,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今與麗王行兵者,蓋滅而復興者歟?『唐書』云:「平壤城,漢樂浪郡也,隨山屈●為●,南涯浿水。」 三國遺事:崔致遠云。馬韓。麗也。辰韓。羅也.
[141]. 三國史記: 平壤城似今西京,而浿水則大同江是也。何以知之?『唐書』云:「平壤城,漢樂浪郡也,隨山屈●為●,南涯浿水。」
[142]. 三國史記: 「大王之國,四方皆山丘河海,是天設之險. 取大石於郁里河,作槨以葬父骨,緣河樹堰,自蛇城之東,至崇山之北。
[143]. Mosol Don S Lee, Second Edition. Xlibris. 2020. Goguryeo Stele P 190. 尹 乃鉉 著 “韓國 古代史 新論”서울, 一志社 1988. P 29
[144]. Mosol Don S Lee, Second Edition. Xlibris. 2018. Seafarer and Seafaring in the NEA. p 150. 三國志 : 水行二十日. 船行一年可至。
[145]. 南齊書: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146]. 隋書:其王姓歡斯氏,名渴剌兜,不知其由來有國代數也 自相樹立。男女皆以白紵繩纏髮.有崑崙人頗解其語
[147]. 隋書: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𨈭牟羅國,其船得還,經于百濟,昌資送之甚厚,并遣使奉表賀平陳。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
[148]. 南齊書: 倭國,在帶方東南大海島中,漢末以來,立女王。土俗已見前史。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149]. 三國志 孫堅傳: 與父共載船至錢唐,會海賊胡玉等從匏里上掠取賈人財物,方於岸上分之,行旅皆住,舩不敢進.。
[150]. Mosol Don S Le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Xlibris. 2018 Silla from Manchuria to Korean Peninsula. p 141
三國志 : 東沃沮傳: 南與濊貊接. 濊傳: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151]. 三國志 : 吳主傳: 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乘海授淵. 吳書曰:初,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衆。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
[152]. 史記: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而還。山海經: 舜妻登比氏生宵明.蓋國在鉅燕南 姑射國在海中,屬列
[153].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Hwanung, Gold Statue, to 彌勒佛. p 162
[154].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phonetic-loan-characters-are-gojoseon-language/신라 고승 혜초(慧超)
[155]. 舊唐書: 高麗 子弟 篆書千字文. 演千字文. 《千字文》一卷蕭子範撰.한국 고유의 칠성사상: ancienthistoryofkorea.com/ancient-korean-religion-polaris-and-small-dipper/
[156].資治通鑑 卷一百二十二: 燕王立慕容后之子王仁為太子. 辭以太子王仁有疾,故未之遣.
[157]. 魏書: 慕容寶養子高雲殺熙自立,赫連屈丐自稱大單于、大夏天王. 高雲為海夷馮跋所滅,跋僭號,自稱大燕天王
[158]. Mosol Don S Lee. 東北亞上古史 新論. (Xlibris. 2018): Etymology of few words. p 22
[159]. 魏書:海夷馮跋:令鎮肥如,以後妻慕容氏子王仁為世子. 龍城王馮君爰適野次. 高麗乃奪其侍人,質任王仁.
[160]. 晉書:蓋魏國之史書: 碑云:將軍姓伊氏,諱益,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 三國史記: 北燕王雲,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句麗之支□屬,自云高陽氏之苗裔,故以高為氏焉。慕容寶之為太子,寶子之,賜姓慕容氏.
[161]. Mosol Don S Lee, Second Edition. (Xlibris, 2020.) Seafarer and Seafaring in the NEA. P 154.
[162].三國史記 百濟本紀第四: 諡曰東城王。『冊府元龜』云:南濟建元二年,百濟王牟都,遣使貢獻.
[163]. Mosol Don S Le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Mystery of the Five Kings of Wei. (Xlibris. 2018.) P 203.
[164]. 三國史記 :東城王,諱牟大或作摩牟摩帝。耽羅聞之,遣使乞罪,乃止。耽羅,卽耽牟羅。高麗史: 耽羅縣在全羅道南海中。
[165]. 三國志: 浮海求夷洲及亶洲。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
[166]. 隋書:其南海行三月,有𨈭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北史: 平陳之歲,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其船得還,經於百濟,昌資送之甚厚,并遣使奉表賀平陳
[167]. 隋書: 舊周、齊州郡縣職,三國史記:右百濟州郡縣,其新羅改名及今名,見『新羅志』隋以周齊州郡縣職.
[168]. 通典 : 朝鮮王準為衛滿所破,乃將其餘眾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為韓王. 晉武帝咸寧中 馬韓王來朝
[169]. Mosol Don S Lee, Ancient History of Northeast Asia Redefined. Xlibris. 2018. P 207. P212
[170]. 三國遺事: 我邦所傳有二本。一在尾州德川侯。一藏男爵神田氏. 據三國史記。高麗史。東京雜記。東國通鑑。
[171]. 三國史記: 安弘法師入隋求法,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王薨。謚曰真興,葬于哀公寺北峯。
[172]. 隋書:樂浪郡公、新羅王. 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服色尚素。
[173].三國史記 : 授均貞大阿●,為假王子,欲以質倭國,均貞辭之. 王幸南郊觀麥。秋七月,與日本國交聘結好.
[174].漢文大藏經:朝鮮禪教考. 漢陽 朴永善 輯. 浮屠道琳。自百濟還. 勾麗佛法未絕。故得有道琳也. 後五十四年。至陽原王七年。勾麗之僧。歸于新羅. 郁里란 높은 사람이 사는 마을 즉 백제수도 한성을 뜻한 글자다.
[175]. Lee Mosol: Second Edition. (Xlibris 2020.) Etymology of Siberia p 69. Nihon p 221.Jurchen. P237
[176]. Mosol Don S Lee, 2018. P 168. ancienthistoryofkorea.com/삼한-三韓의-후예-後裔들/한 많은 대동강
[177].三國史記 : 授均貞大阿●,為假王子,欲以質倭國,均貞辭之. 王幸南郊觀麥。秋七月,與日本國交聘結好.
[178].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Confucius concealed Ancient Korean History. P 35
[179].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Xlibris. 2013: Summary and Conclusion. P 410
[180]. https://en.wikipedia.org/wiki/Longshan_culture.
[181]. 爾雅 釋天: 爾雅:•唐虞曰載,夏曰歲,商曰祀,周曰年.,爾雅•釋木疏)에는 “杻一名檍,今宮園種之,名萬歲木”
[182]. 三國志 倭人傳:浮屠所載與中國老子經相出入,蓋以為老子西出關,過西域之天笁、教胡。 通典 于闐: 國西五百里有比摩寺,俗云是老子化胡成佛之所。初老子至此,白日昇天,與群胡辭訣,言我暫遊天上,尋當下生。其後出天竺國,化為胡王太子,自稱曰佛,因立此寺焉 Lee Mosol, Second Edition. Zhou clan invaded the Birthplace of Old Joseon. P 41
[183]. 康熙字典: 震旦,西域稱中國之名。《樓炭經》蔥河以東名震旦。又盍旦。又與神同。《禮·郊特牲》所以交於旦明之義也。《註》旦當爲神,篆字之誤也 .如佛胸前卍字是. 太平廣記 南詔:自我居震旦。謂天子為震旦,翊衛類夔、契.
[184]. National Geographic: As the Taliban rises, uncertainty looms for Afghanistan’s historic treasures. Andrew Lawler
[185]. 康熙字典: 山海經》雨師妾在其北。《楊愼曰》雨師妾如姮娥織女之類,非。下文元股國在雨師妾北,可證:
涓奴部本國主,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 史記 匈奴列傳: 祠。祭其先、天地、鬼神. 拜日之始生,夕拜月
[186]. 이진우, 옴니버스 한국사 2021년) 三國志 魏書三十: 敬鬼神,祠天地日月星辰山川. 高句麗傳: 涓奴部本國主,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 史記 匈奴列傳: 祠。祭其先、天地、鬼神. 拜日之始生,夕拜月
[187].三國志魏書三十: 敬鬼神,祠天地日月星辰山川. 高句麗傳:得稱古雛加,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 史記 匈奴列傳:
[188]. 한국 고유의 칠성사상: ancienthistoryofkorea.com/ancient-Korean-religion-Polaris-and-small-dipper/
[189].이정면: Arirang of Korea. 2009. 고대 한일관계의 진실. 이지출판사2014., (지샘,2010), 주요지도와 사진.
[190].김정민,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글로벌콘탠츠, 2016)
[191].성헌식, 천년만에 밝혀진 안시성과 살수, (지샘,2010), 주요지도와 사진.
[192]. 漢書:居歲餘,其方益衰,神不至。乃為帛書以飯牛,陽不知,言此牛腹中有奇書。殺視得書,書言甚怪
[193].史記夏本紀:太史公曰:禹為姒姓。或言禹會諸侯江南,計功而崩,因葬焉,命曰會稽。會稽者,會計也。
[194].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록도문(綠圖文)과 록도문(鹿圖文)-1
[195]. 訄書:朝鮮者,韃靼之苗裔。」餘以營州之域,自虞氏時著圖籍矣.、靺鞨之賓旅,而為客帝於中國也何損?
[196]. 민영현:참전경(參佺經) 해제(解題)와 그 문화사상적 의의. 발행자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09)
[197].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유기(留記) 즉 비씨경을 뜻한 비기 (秘記) 였다. 참전경(參佺經) 사료의 출처다.
[198].三國史記 毗摩:唐令狐澄《新羅國記》曰:「擇貴人子弟之美者,傅粉妝餙之,名曰花郞,國人皆尊事之也。」安弘法師入隋求法,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秋八月,王薨。謚曰真興,葬于哀公寺北峯。漢書 郊祀志上:居歲餘,其方益衰,神不至。乃為帛書以飯牛,陽不知,言此牛腹中有奇書。殺視得書,書言甚怪。天子識其手,問之,果為書。於是誅文成將軍,隱之。太平御覽 井:及帝即位,太興初,會稽剡縣人果於井中得一鍾,長七寸二分,口徑四寸半,上有古文奇書十八字,云「會稽岳命」,餘字時人莫識之
[199]. 高麗史: 瑩曰: “讖書所載往事皆驗不可不信當速移都. 陰陽地理諸家書編為一冊以進賜名海東秘錄. 王詰之曰: 秘錄云: ‘苟不遷廢君臣。’ 爾何獨執不可耶 “高麗史節要 秘錄:繁亂編為一書名海眾秘錄自東女真之阿畢騎. 冊府元龜:後魏崔浩為祭酒神瑞 王亮蘇垣因華陰公等言讖書國家當治鄴應 遷都浩與時進周澹言於明元日今國家遷都
[200]. Wikipedia: 陶寺,龍山文化之遺址也。 He Nu; Archaeological Indicators for Chinese Early States: A Case Study of Taosi in Shanxi.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Social Evolution & History, Vol. 17 No. 2, September 2018 205–234
[201]. 史記 歷書: 至今上即位,招致方士唐都,分其天部 史記 天官書: 夫自漢之為天數者,星則唐都,氣則王朔,占歲則魏鮮。故甘、石歷五星法,唯獨熒惑有反逆行;逆行所守,及他星逆行,日月薄蝕,皆以為占.史記 太史公學天官於唐都,受易於楊何,習道論於黃子。帝堯之後為陶唐氏. 唐虞之 「才難,不其然乎?唐虞之際,於斯為盛..
[202]. 史記 伯夷列傳: 而說者曰堯讓天下於許由,許由不受,恥之逃隱。太史公曰: 余登箕山,其上蓋有許由冢云. 水經注 潁水:縣南對箕山,山上有許由冢,堯所封也。故太史公曰:余登箕山,其上有許由墓焉。山下有牽牛墟
[203]. 史記 殷本紀:契興於唐、虞、大禹之際,功業著於百姓,百姓以平
[204]. 朝鮮史略 卷一名東國史略 不著撰人名氏乃明時朝鮮人所紀其國治亂興廢之事始於檀君終於高麗恭讓王” 檀君: 東方 初 無君長. 九種夷. 有神人 降于 太白山 檀木下 國人立爲君. 檀君 名 王儉.唐堯 25年 戊辰. 國號 朝鮮. 古紀 云禮君與堯並立至商式丁八年為神 壽四千十八然 權近應制詩曰傳世不知幾厯年.
[205]. 太平御覽 井:《世本》曰:伯夷作井. 璞曰:「會稽當出鍾,以告成功,上有勒銘,應在人家井泥中得之。璞曰:「蓋王者之作,必有靈符,塞天人之心,與神物合契,然後可以言受命矣。」
[206].隋書: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其國中呼為「三京」。與新羅每相侵奪,戰爭不息。官有太大兄,次大兄,次小兄,次對盧,次褥奢,次翳屬,次仙人.
[207]. 舊唐書: 祚榮驍勇善用兵,靺鞨之眾及高麗餘燼,稍稍歸之。風俗瑟高麗及契丹同,頗有文字及書記。
[208].丙午李資義等還自宋奏云: “帝聞我國書籍多好本命館伴書所求書目錄授之乃曰: ‘呂悅字林七卷古玉篇三十卷括地志五百卷 古今錄驗方五十卷 羊佑老子二卷 鍾會老子二卷 孫盛晉陽秋.孫盛魏氏春秋二十卷*於寶干寶晉記.十六國春秋.
[209]. 高麗史: 突山縣本百濟突山縣新羅景德王改為廬山縣來屬高麗複稱古名仍屬。 有安鹿島甘勿島
[210]. zh-classical.wikipedia.org/wiki/朝鮮國: 洪武二年,高麗王顓表明太祖即位,賜以金印、誥命,封高麗國王。二十五年,其門下侍郎李成桂主國事,更名旦,遷都漢城。遣使大明請改國號,太祖詔國號曰朝鮮,取其朝日鮮明之意也。又按丘濬曰︰「高麗自晉代建國,至是,八百餘年,始易三姓。在唐前所謂高麗者,止是一國。
[211]. 詩經 大雅 韓奕: 奕奕梁山、維禹甸之、有倬其道。韓侯受命、王親命之、纘戎祖考. 溥彼韓城、燕師所完。以先祖受命、因時百蠻。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因以其伯.
[212]. 高麗史: 突山縣本百濟突山縣新羅景德王改為廬山縣來屬高麗複稱古名仍屬。 有安鹿島甘勿島
[213].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Second Edition. (Xlibris 2020). Hong-Shan Culture (紅山文化)
[214]. 孟子 萬章上: 禹薦益於天,禹崩,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 吳越春秋: 禹崩,傳位與益。益避禹之子啟於箕山之陽,諸侯去益而朝啟. 史記 夏本紀:以天下授益。三年之喪畢,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
[215]. 史記 太史公自序: 太史公學天官於唐都,受易於楊何,習道論於黃子.. 伯夷列傳: 而說者曰堯讓天下於許由,許由不受,恥之逃隱。及夏之時,有卞隨、務光者。此何以稱焉?太史公曰:余登箕山,其上蓋有許由冢云.
[216]. 史記 殷本紀:湯乃改正朔,易服色,上白,朝會以晝. 孔子曰,殷路車為善,而色尚白.
[217].《書·呂𠛬》蚩尤惟始作亂。《註》九黎之君,號曰蚩尤。昔者共工與顓頊爭為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