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edition One day later.
역사학계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읽고 해외 사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글쓰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제일 어려운 일이 역사서작성이라 봅니다.
집권자가 인정 해야 “공인된 역사서”가 되니 옛부터 이를 담당한 사관은 때로는 처형을 당한일, 근래에는 각종 언론 매체에서 필화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외람 되이 발표하신 글 내용과는 거리가 먼 사안을 귀 단체 여러분 께서 깊히 고려해 주십사하는 심정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거론 하신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원천이 되는 문제를 우선 다우어 주시기 바랍니다. 조상의 이름자부터 바로 쓰자하는 저의 울부짐 입니다.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적어야 합니다.
단군왕검이 새운 나라 단군조선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보냈더니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는 “한자는 피하고 한글로 단군이라 교과서에 실었습니다”라는 회답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의 열쇠를 잡고 계신 역사 학계 여러분 학술 토론을 해 봅시다.
중국사람들이 “더러운 역사 기록 이라는 “위서(魏書)에서 인용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습니다.그들이 부르던 예사(穢史)란 “예맥 (濊貃)사람들의 역사”란 뜻으로 우리의 상고사에 관한 기록이 많았다고 봅니다. 한글 어순으로 기록한 증거가 많이 보입니다.그 한 본보기가 신단수하 (神壇樹下)란 문구로 “천신께 제사 드리는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 앞/또는 밑에서”라 저는 풀이 했습니다. 이 문구를 “박달나무 밑에서”라고 중국 사람들은 풀이하여 한국에서는 그대로 받아드려 오늘까지 계속 써 오고 있습니다. 수(樹)자를 “대한민국 臨時政府 樹立”하는 문구에서와 같이 “set up, 만들다, 새우다”는 뜻의 동사로 썼습니다. 그 문맥을 보나 각종 중국사료를 보아도 그 앞에 글자는 젯터 단 (壇) 자가 옳습니다. 목야전쟁에서 분투한 장군 (公)의 공로에 답하여 서주 무왕이 기념으로 만들어 준 주물이 1976년 경에 협곡관 서쪽에 있는 위남(渭南) 근처 에서 발굴 되였습니다. 이를 중국에서는 이괘 (利簋 )라 부르더니 요지음에는 단괘 (檀簋) 라고도 부릅니다. 이 주물에 새겨진 금문의 내용은 목야 전쟁에 ‘화살 받이와 같은 공로’가 많았던 “단공, 壇公/公”을 위해 만들어 준 하사품이 분명 합니다.
아래와 같은 기록을 Google하여 찾았습니다.
腹內底部有銘文4行32字:“珷征商。隹甲子朝。歲鼎(一說為貞字)。
克昏(一說為聞字)。夙有商。辛未。王才闌師。易又吏利金。用乍旜()公寳尊彜。”銘文的解釋爭議較大,其大意是:周武王征伐殷商,在甲子日這一天,歲星當位時告捷。辛未(後七日),武王在闌地(一說為管)軍中,賞賜銅給一位名叫“利”的官員。利鑄造了這件寳器以紀念其祖父。“旦當爲神: 按:顧炎武 《金石文字記》曰神,古多作,下从旦。” “旦;又與神同.” 旜은/壇자다. 이글자를 당(唐, 旦,檀)이라 기록 했다.신(神, God)이란 뜻이다.
䄠:《集韻》音繕。祭天也。一曰讓也。《前漢•異姓諸侯王表》舜禹受䄠。禪,漢書每作䄠,後世遂多通用,惟連言墠壇.
이를 증명할수 있는 기록이 통전에도 있습니다. 무왕을 도와 싸운 두장군이 강 태공 (羌)이고, 또 한 사람은 “모해/모회” 라 읽는 글자 (髳)로 표기 되였습니다. 흔히들 호 (胡) 부르던 만주에 살던 말갈 (靺鞨)의 지도자 였다고 봅니다.
通典 邊防五 序略: 及武王伐商,羌、髳率師髳音矛會於牧野.
그러나 중국기록에는 이 사람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를 사서에서는 東夷의 한 분파가 서쪽에 살았다는 표시의 서이(西夷)가 참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전장에서는 그가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 하였다고 저는 풀이 했습니다.
그러한 근거가 강희자전에서는 그 글자가 신 (神)이라란 뜻의 한 옛 글자라 했습니다. 〔古文〕, 설문해자에서는 천신을 뜻한다 했습니다. 《說文》天神,引出萬物者也.顧炎武《金石文字記》曰神,古多作,下从旦《禮•郊特牲》所以交於旦明之義。鄭康成云:旦當爲神,篆字之譌。《莊子》有旦宅而無情死,亦讀爲神。蓋昔之傳書者遺其上半,因譌爲旦耳。非旦可作神也.
산서성 해지 연안에 살던 무왕의 가까운 친구“公”에 관한 시문이 시경소아 (詩經 小雅)에 실린 시간 (斯干)이라 봅니다. 시문 첫장을 보면 전장에서 형제와 같이 서로 도우며 싸우던 무왕과 단공 (公)의 관계가 뚜렷 합니다. 시간 (斯干) 이라는 뜻은 “쉬애한xiè hàn; 解汗, 携, 攜,즉公”을 가차 전주한 글자입니다.
그 의 선조가 순 임금으로 부터 선양 을 받았다는 우 임금 즉 왕중왕 (大禹, 攜) 사람입니다. 以舜之德為未至也,於是乎夫負妻妻攜子以入於海,去之終身不反
무왕의 아들은 그를 당숙 우 (唐叔虞)라 불렀고, 소공 석(召公奭)을 봉했다는 제후국 연(燕)의 군사를 이끌고 시간 (斯干)의 궁에 친입 하여 항복을 받아 한후(韓侯)로 임명 했습니다. 이 상황이 일주서(逸周書)에 ‘수도를 옛 하우씨가 살던 곳 (夏之居)으로 옮기려는 계획에 실려 있습니다.숙단(叔旦)이 성왕 앞에서 울며 하소연 합니다.
죽서기년 성왕 (竹書紀年 成王) 7년 부터 13년 까지의 기록은 해지 연안에 살던 사람들을 몰아 냈던 기록이라 봅니 다. 이 성왕의 잘못을 뉘우치는 노래가 시경 소아에 실린 하인사 (詩經 小雅 何人斯)라고 봅니다. 후세에는 성왕의 이 불미스러운 행적을 은폐하려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당숙 우 (唐叔虞)라는 사람을 유가(儒家) 경전이 아닌 경전에는 숙단 (叔旦)이라고 기록 했습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의문의 글자 “”를 단 (旦)자로 풀이 했다는 근거 입니다.문맥을 보면, 주공 단 (旦)이 아니라 무왕과 단(旦)은 의형제간이 였다 하여 아저씨 단(叔旦)이라 불렀고 이 글자가 와전 되여 단(旦)이 당 (唐, 當) 으로 바뀌어 기록 되였다고 봅니다. 삼국지 한전 (三國志 魏書三十 韓傳) 마지막에 나오는 “마한 서쪽 바다에 큰 섬에 사는 사람들의 말이 부여와 한이 같다 (言語不與韓同)했습니다. 이는 상고 시대 단군(檀君)이 쌓았다고 알려진 강화 참성단(江華 塹星壇)과 제주도의 하루방이 증명 합니다. 상해경 (山海經)에 나오는 호부여지국 (胡不與之國)은 부여를 뜻하고 그들이 남만주에서 뱃길로 한반도 연안을 따라 제주도, 일본 열도, 유구” 일대의 해양권을 잡고있었다는 뜻이라 봅니다.
이 지면을 통하여 여러분의 의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잃렀던 역사를 우리모두 힘을 합하여 되 찾아 봅시다.
신간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저자; 모솔 이돈성 드림.
Original:
역사 학계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읽고 해외 사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느 싯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처리 할까”하는 문제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역사를 가르 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라져 없어진 일”을 새롭게 알려 주므로서 과거와 같은 잘못은 하지 않도록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함 입니다.
흔히들 “역사는 되풀이 된다”지만 이는 “주어진 여건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란 전제 하에서 나온 말입니다. 주위상황이 바뀌면 물길이 바뀌듯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았습다.” 한반도의 주위 환경은 급하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렇게 변해가는 상황속에서 집권한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을 해 주어야 “우리 민족이 잘살수 있겠는가”하는 문제의 답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거론 하신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원천이 되는 문제를 우선 다우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첫째가 “조상의 이름자부터 바로 쓰자”하는 저의 울부짐 입니다.
단군왕검이 새운 나라 단군조선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보냈더니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는 “한자는 피하고 한글로 단군이라 교과서에 실었습니다”라는 회답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의 열쇠를 잡고 계신 역사 학계 여러분 학술 토론을 해 봅시다.
중국사람들이 “더러운 기록”이라는 “위서(魏書)에서 인용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습니다. 한글 어순으로 기록한 “천신께 제사 드리는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 앞/또는 밑에서; 神壇樹下” 하는 문구를 “박달나무 밑에서”라고 중국 사람들은 풀이하여 이를 한국에서는 그대로 받아드려 오늘까지 계속 써 오고 있습니다. 수(樹)자를 “대한민국 臨時政府 樹立”하는 문구에서와 같이 동사로 썼습니다.
그 앞에 글자는 젯터 단 (壇) 자가 옳습니다. 이를 확인할 골동품이 중국 서안 동쪽에서 출토 되였습니다. 아래와 같은 기록을 Google하여 찾았습니다.
腹內底部有銘文4行32字:“珷征商。隹甲子朝。歲鼎(一說為貞字)。
克昏(一說為聞字)。夙有商。辛未。王才闌師。易又吏利金。用乍旜()公寳尊彜。”銘文的解釋爭議較大,其大意是:周武王征伐殷商,在甲子日這一天,歲星當位時告捷。辛未(後七日),武王在闌地(一說為管)軍中,賞賜銅給一位名叫“利”的官員。利鑄造了這件寳器以紀念其祖父。“旦當爲神: 按:顧炎武 《金石文字記》曰神,古多作,下从旦。” “旦;又與神同.” 旜은/壇자다. 이글자를 당(唐, 旦,檀)이라 기록 했다.신(神, God)이란 뜻이다.
䄠:《集韻》音繕。祭天也。一曰讓也。《前漢•異姓諸侯王表》舜禹受䄠。禪,漢書每作䄠,後世遂多通用,惟連言墠壇
이괘(利簋)라 부르더니 요지음에는 단괘 (檀簋)라 합니다. 이 주물에 새겨진 금문의 내용은 목야 전쟁에 ‘화살 받이와 같은 공로’가 많았던 “단공, 壇公/公”을 위해 만들어 준 하사품 입니다. 이를 증명할수 있는 기록이 통전에도 있습니다.
通典 邊防五 序略: 及武王伐商,羌、髳率師髳音矛會於牧野
무왕을 도와 싸운 두장군이 강 태공 (羌) 또 한 사람이 모해/모회 라 읽는 글자 (髳)로 표기 되였습니다. 이를 사서에서는 東夷의 한 분파가 서쪽에 살았다는 표시의 서이(西夷)의 대표지도자라 했습니다.
강희자전에서는 神:〔古文〕, 설문해자에서는 천신을 뜻한다 했습니다. 《說文》天神,引出萬物者也.顧炎武《金石文字記》曰神,古多作,下从旦《禮•郊特牲》所以交於旦明之義。鄭康成云:旦當爲神,篆字之譌。《莊子》有旦宅而無情死,亦讀爲神。蓋昔之傳書者遺其上半,因譌爲旦耳。此說甚是,非旦可作神也.
산서성 해지 연안에 살던 무왕의 가까운 친구“公”에 관한 시문이 시경소아 (詩經 小雅)에 실린 시간 (斯干)이라 봅니다. 시문 첫장을 보면 전장에서 형제와 같이 서로 도우며 싸우던 무왕과 단공 (公)의 관계가 뚜렷 합니다. 시간 (斯干) 이라는 뜻은 “쉬애한xiè hàn; 解汗, 携, 攜,즉公”을 가차 전주한 글자입니다.
그 의 선조가 순 임금의 선양 을 받았다는 우 임금 즉 왕중왕 (大禹, 攜) 사람입니다. 以舜之德為未至也,於是乎夫負妻妻攜子以入於海,去之終身不反
무왕의 아들은 그를 당숙 우 (唐叔虞)라 불렀고, 소공 석(召公奭)을 봉했다는 제후국 연(燕)의 군사를 이끌고 시간 (斯干)의 궁에 친입 하여 항복을 받아 한후(韓侯)로 임명 했습니다. 이 상황이 일주서(逸周書)에 ‘수도를 옛 하우씨가 살던 곳 (夏之居)으로 옮기려는 계획에 실려 있습니다.숙단(叔旦)이 성왕 앞에서 울며 하소연 합니다.
죽서기년 성왕 (竹書紀年 成王) 7년 부터 13년 까지의 기록은 해지 연안에 살던 사람들을 몰아 냈던 기록이라 봅니 다. 이 성왕의 잘못을 뉘우치는 노래가 시경 소아에 실린 하인사 (詩經 小雅 何人斯)라고 봅니다. 후세에는 성왕의 이 불미스러운 행적을 은폐하려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당숙 우 (唐叔虞)라는 사람을 유가(儒家) 경전이 아닌 경전에는 숙단 (叔旦)이라고 기록 했습니다. 문맥을 보면, 주공 단 (旦)이 아니라 무왕과 단(旦)은 의형제간이 였다 하여 아저씨 단(叔旦)이라 불렀고 이 글자가 와전 되여 단(旦)이 당 (唐, 當) 으로 바뀌어 기록 되였다고 봅니다.
이 지면을 통하여 여러분의 의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잃렀던 역사를 우리모두 힘을 합하여 되 찾아 봅시다.
신간 “古朝鮮 찾기. In Search of Old Joseon” 저자; 모솔 이돈성 드림.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