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천도
Kyung Sup Han 씨. 저는 아직도 기다립니다. 기다리다 지처 독백을 합니다.
민족의 소원인 왕검성 (王儉城)을 찾았습니다!
중국사료에는 평양(平壤)을 평양(平陽)이라 기록 했고 같은 이름이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곳에 흐터저 있다. 모두 서주의 제후국이였던 진(晉)의 영역으로 산서성 일대에서 나타난다. 해지연안이 제일 남쪽이였다. 진(晉)이란 한자를 풀어 보면 “밝은 빛이 땅위로 올라오는 형상 (臸,下:日)으로 조선(朝鮮)이란 뜻이 있다 . 삼국유사에 실린 수도 이름들을 추적하여 오늘의 지도에서 그려 본다 .
장당경(藏唐京) 은 “북당의 수도 당경”이다. 당경(唐京)이 당도(唐都)다. 사마천의 아버지가 천관을 배웠다는 곳이다 . 첫 수도라고 풀이 되는 “입도아사달; 壇君王儉 立都《經》云” 이란 문구가 있고, 뒤에는 다시 “都平壤城 始稱 朝鮮” 평양이라 했다. 평양이란 명사는 훈역한 이름이고 아사달이란 이름은 사음자가 분명 하다. 이 두 “아사달”이란 이름을 같은 장소로 보느냐 아니면 서로 멀리 떠러진 곳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평양에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는 뜻은 “수도 평양 가까이에 있는 산성 으로 옮겼다”는 뜻이라 본다. 이곳이 왕검성 (王儉城)이라 본다. 이를 도왕험 ( 都王險Citadel of Wangxian王險城. 都王儉)이라 고도 했다. 중국기록에 나오는 왕옥산(王屋山)이고, 이 산을 불함산 (不咸山), 또는 부암 (傅巖)이라 했다 . 이를 역경에서는 해(解 xi)씨의 함정 이란 뜻으로 습감(習坎, xí kǎn/씨 카안) 이라 했다. 왕공이 나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지형 지물을 잘 이용하여 만든 천애의 요새라 했다. 이곳에서 노예로 일하던 사람이 기자(箕子)의 뭔 선조가 되는, 부여란 이름의 어원이 되는, 부열;Buyuel傅說” 이라고 추리 했다 . 이곳은 우공이 치수한 구주(九州) 영역으로 산서성 서남쪽 해지 연안에 있었다. 시경 대아에 나오는 원( 垣) 또는 수단(樹檀, 壇)이 있던 곳이라 본다 . 특히 학명편 (鶴鳴篇)은 애절한 사연을 노래 했다:
낙피지원 樂彼之園에는; 즐거워야야할 저 공원에
원유수단 (爰有樹檀)인데; 세워 놓은 제단에는
기하유곡 其下維穀이라, 그 밑에 나달 (고시래 한 흔적) 만이 보이누나.
원(園)자는 사람이 특별한 목적으로 담을 둘러 쌓은 장원 (墻垣)즉 장충단과 같은 곳을 뜻한다. 지금은 일시 (逸詩)가 된 한시에는 구고 (九皋)를 아홉개의 연못이 있던 지대(沼澤)라 했다.《韓詩》云:“九皋,九折之澤。
강희자전에는 송본 광운;宋本廣韻:臯:髙也,澤也,詩云鶴鳴九皐言九折澤也
산서성 서남쪽 해지 북쪽이 분수(汾水)가 황하로 이어진다. 때로는 상류에서 비가 많이와 황하(黃河)가 거꾸로 밀려 이를 홍수 (洪水, 鴻水)라 했다. 옛적에는 늪지대였다. 우왕이 치수한 곳이다. 원유수단 (爰有樹檀)은 왜 박달나무 밑에 만 낙옆이 쌓이나. 이는 마땅히 “爰有樹壇”라야 시인의 시상을 느낄수 있다.
爰:於也,行也,爲也,哀也,引也. 籒文以為車轅字.
袁或作爰。出濮陽舜裔胡公之後
원(爰)자에는 “쓸쓸한, 외로이” 하는 뜻이 있다.
세워 놓은 “제단”을 귀책 열전에서는 “옛적이 맥족이 만든 성곽”이라 했다 . 살기 좋은 해지연안에서 밀려 점차로 분수를 따라 동북쪽으로 수도를 네번 옮겼다.
세번째로 옮긴 곳을 “궁흘산 또는 방흘산;弓(一作方)忽山”이라 했다 . 이는 지방어를 가차전주하다 오기한 글자다. 방(方)은 방(邦)으로 나라 (國) 또는 지역(地域)이란 뜻이고, 궁(弓) 은 국(國)의 가차다 . 흘(忽)이 살던 산간 지역이라 본다. 시경에는 흘(忽)자가 방자 할 사 (肆) 높을 숭 숭산(崇山)과 같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흘(忽)자가 옛 고구려 땅 여러 곳에 있다. 글안국지(契丹國志), 금사 (金史) 요사(遼史)를 종합해 보면, 흘(忽)자는 “나홀로”란 뜻의 돌궐어로 지도자”를 뜻했다. 금사에서는 홀토백산(忽土白山, 백두산?)에 있다고 믿는 가상적 산신(山神)을 단성공(瑞聖公)이름을 붙였다. 요양을”올루홀필라 兀鲁忽必剌”이라 했다. 요사(遼史)에서는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平壤城)을 홀한주(忽汗州)라 불렀다 . 방대한 소제라 위 세 사서를 참조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중 어느 한 곳이 옛 우공(禹貢)편에 실려 있었다는 신도(信都)라고 본다. 한고조의 휘하에 있던 한신(韓信)이 주둔 하고, 그의 아들이 태여났다는 퇴당성 (頹當城)이 옛 당성(當城, 唐城)이다. 이를 다른 사서에는 양릉(襄陵,) 퇴원(颓垣) 또는 양원 (襄垣)으로 기록 했다. 이 곳이 단군이 일시 “피했다는 뜻이 숨어 있는” 장당경 (藏唐京)이다. 이지역이 시경에 북쪽에 있는 “우양 (于襄) 대원 (大原) 하는 몇몇 글자”로 나와 있다 . 오늘 지도로는 산서성 서북 쪽 삭주시 (朔州市) 일대로 쌍간하(桑干河, 桑乾河) 상류다. 다른 두 곳은 임분(臨汾)과 태원 (太原) 동쪽이 된다. 한원에 살던 사람들(混夷, 串夷, 玁狁, 昆夷, 昆吾氏)이 또는 그와 같은 부족들이 동북쪽 으로 밀려 났다.
이러한 시달림이 시경에 실려 있고, 노래(樂)와 춤(舞)에도 나타났다.
서주 수도 를 중심으로 옛적에 무왕을 도와 주었던 원주민 (戎狄, 貊, 牧)을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에 다라 그 방향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이(夷)자를 써서 동이 (東夷) 북이(北夷) 서이(西夷)라 했다. 그태평어람에서는 그때까지 전해오던 사료를 종합하여 사리의 음악을 한마디로 표현 했다 . 서주 목왕 때에 편찬된 사료가 그 출처다.
동쪽으로 밀려간 사람들의 음악은 매 (昧)라 즉 “어두울 매. 어둡다. 찢다. 무릅쓰다”하는 감정 표현이고 창을 들고 복수 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북쪽은 금(禁)일 즉 “견딜 금, 금하다, 삼가다”라 했다. 서쪽은 떠날 리(離)자로, 서글품을 달랬고, 남쪽은 맡길 임(任)자로 표기 했다. 완전 순종 했다는 뜻이라. 이러한 표현은 옛 부터 중히 여기던 해지(解池)를 중심으로 그리 멀리 떠러지지 않은 곳에 살던 사람들을 예기 했다. 이렇게 해지에서 밀려 났던 원주민들, 특히 개적 (蓋狄)으로 기록에 나오는 북이 (北夷, 고조선 주민, 동호)가 서주를 계속 공격하여 서주는 멸망했다. 그 여세로 후에도 계속하여 동주 왕실을 괴롭혔다. 한후를 만났던 윤길보의 후손을 원망했다 . 또 하나는 북이와 동이의 음악을 비숫하게 때로는 뒤 바꾸어 기술 했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분수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 갔다가 동 쪽으로 왔다는 증거라 본다.
끝
October 17,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