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록에 따르면 요순 시절에 나타나는 여러명의 공신 중 한 사람인 익(益)이 우를 이은 왕중왕 단군 왕검으로 그를 백익(伯益)이라 불렀이다.
사마천이 읽어 버았다는 우본기(《禹本紀》言)가 역대 우의 선조들 업적을 기록한 한국에서 말하는 “우의 가첩”이란 뜻이니 “단군세기”라 생각된다. 단군이 인솔한 부족이 멀리 “서쪽 곤륜구 (崑崙丘) 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왔다”하여 대완열전에 실었다 . 이러한 경로를 수경주에서는,우본기의 내용을 풀이한 고수 (高誘, 東漢末) 의 말을 인용하여, 우가 “곤륜산에서 시작한 하수를 지하로 1만 3000리를 인도하여 용서군 (隴西郡)에 있는 적석산(積石山)에서 지상으로 나와 낙수 (洛)와 준수(準)와 합친다고 하였스니, 5000리를 더한 꼴이다”라고 풀이 했다.
신흥 유가의 지침에 따라 편찬된 사기에는 백익(伯益)이 정치적 지도권을 이양 받아 우왕의 삼년상을 치루고 지도력이 약하여 제후들이 떠나 왕위를 우왕의 아들 계(啟)에게 선양하고 기산에 은거 했다 . 그러나 묵자(墨子)에 따르면 백익이 국토의 북쪽지역에 자리를 잡고 구주를 완성 시켰다 . 단군조선을 건립한 부족이 그들이 살던 땅에 수해가 심하여 오랫동안 치수사업을 해 오다가, 우왕이 종전의 방법과는 다른 “물길의 좁은 골목을 넓히고 작은 물긴은 돌리는 방안에 착수 하였고, 그 뒤를 이버 받은 두번 쩨 단군이 치수 사업과9주를을 완성 시켰다”하여 익작 짐우(益益 作朕虞)라 했다. 이 문구는 “순, 우왕과 같은 반열의 통치자”가 되였다는 뜻이다 . 순 우 두 지도자는 남쪽인 해지 연안(於服澤之陽 )에 수도를 정했고, 백익(伯益)은 산 너머 해지 북쪽 (於陰方之中), 옛 부터 해(奚, 解)족이 살던 식양(息壤)에 도읍을 정하고 통치를 했다 . 식양(息壤)이란 “息, xī /시,쉬”자는 해“解, 奚:何” 또는 음이 비슷한 다른 여러 한자(漢字)로 적은 부족이 살던 땅이란 뜻다. 그 부족은 서쪽에서 온 코가 큰 사람(鼻息)들이였다 . 백익(伯益)의 익(益) 자는 “물이 넘처 흐른다, 웃사람 중의 웃사람, 그가 사는 곳에는 피신 할수 있는 험한 요새가 있다”는 등등 많은 사연이 엃켜 있다.
그가 살던 마을(隘, 阝,右:益)을 한국에서는 “좁을 애, 막을 액”이라고 읽고 풀이 한다. 이 곳을 해편(篇海)에서는 해/개(蓋)가 사는 마을()이라 했다 . 익(益)으로 인하여 한방에서 쓰던 익모초 (益母草)라는 이름이 생겼다 . 왕옥산 (王屋山)에 있던 왕검성을 사용 할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 묵가 와 잡가에서는 모두 백익(伯益)을 유능한 보좌관으로 인정 했다 .
수경주에서는 비문의 내용을 인용하여 백익(伯益)이 전욱 고양씨의 두쩨 아들이고, 성은 이씨(伊氏) 휘가 익(諱益) 자는 토개(字隤敳)라 했다 . 토개(隤敳)가 고양씨의 후손이란 기록은 “ 춘추좌전, 통전, 설문해자”에도 있다 . 순임금은 고양씨의 후손인 이씨(伊氏)의 딸을 정실로 드렸다 .
태평어람에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인용 했다는 문구를 실었다. 황제가 치우천왕을 얻어 “천도를 밝혔다 하나 현존 하는 사기에는 그 내용을 볼수가 없다. 같은 내용이 통전과 관자 오행에도 실려 있다. 그러면서 모두 퇴개(隤敳, 伯益)가 유능한 보좌관 이라 했다. 이름자를 풀어보면,퇴(隤)자에는 “귀한 사람(貴)이 살던 마을(阝) 이란 뜻”이 있다. 이 글자에 마을 이란 뜻을 바꾸어 땅이란 뜻의 흙토(墤) 변을 적용하여 귀한 사람(들)이 살던 땅이라 했다. 두 글자(隤,墤)가 한한 사전에는 보이지 않는 글자(穨)에서 또 바꾸어 “무너질 퇴, 턱 퇴(頹)란 글자와 같은 뜻”이라 한다. 퇴개(隤敳)라는 이름자에는 산서성 해지 북쪽 하동군에 있던 귀한 사람이 다스리던 마을을 강압적으로 빼았다”는 뜻이 숨어 있다 .
이렇게 백익(伯益) 또는 퇴개(隤敳)에 관한 기록이 선진시대 부터 당송시대 기록에 모두 유능한 보좌관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가 선양 한 계(帝啟)가 집권 6년 만에 살해(?) 했다 . 백익(伯益)은 중화문명의 발생지인 관중분지 해지 연안 북쪽에서 살다 죽었다. 그리 하여 백익(伯益)이 이끌던 부족은 북으로 도망했다. 이러한 사실이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 실린 첫 문구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 (夏后氏)의 묘예(苗裔)” 다 . 북쪽으로 갔던 익의 후손(益)은 “현뢰(胘雷/靁)를 요새”로 하는 넓은 땅에서 살았다 . 현뢰란 “북쪽 끝없이 넓은 땅”이란 뜻이다. 이를 중국사람들은 ‘어느 한 특정 지역을 지칭한 고유명사’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시경 소남 은기뢰(殷其靁)란 뜻은 “무왕의 죽마고우 하우씨의 후손이 되는 하시(何斯)의 서울을 빼았았다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넗리 퍼져 이를 무마하려고 읊은” 시문이다.
사기 오제 본기에는 창의가 내려와서 약수 (若水)가에 살다 촉산씨의 딸(蜀山氏女) 을 부인으로 맞아 전욱 고양씨를 낳았다” 하니, 약수와 촉산 은 산서성 서남쪽을 흐르는 분수 연안에 있어야 한다 . 분수가 황하로 이어지는 가까운 곳에 우뚝히 서있는 산을 독산(獨山)이라 했다. 글자를 바꾸어 촉산(蜀山)이라고 했다 . 그 산 위에 성을 쌓고 살았다 하여 독산 (獨山) 을 왕옥산(王屋山) 이라고 불렀다. 이 산이 왕검성이 있었다. 산해경에서는 천제산 (天帝山)이라 하고, 산의 서남 쪽 강물 언덕에는 고도산(臯塗之山)이 있다고 했다 . 이 산에서 시작한 여울이 도수 (塗之水)의 마지막 지류다 . 도수가 시경 소아에 나오는 면수(沔水)와 합처서 서주의 수도 가까이 지나 갔다. 이 곳에 회계산(會稽山)이라고 알려진 도산 (塗山)이 있었다 .
북쪽에 살던 전욱 고양씨의 후손들이 산서성 서쪽 분수 (汾水)를 따라 해지 연안에 이르러 번성 하여 “첫 왕중왕 단군 왕검”이 나타 났다. 두 쩨 단군 백익(伯益)이 살해 당하여, 그 후손이 다시 북쪽으로 피신 했다. 탁록전을 비롯하여 분수를 따라 올라가는 지역에서 전쟁이 많았다 . 백익의 직계 후손이 뒤에는 발해만 연안에서 기자 (箕子)를 따라 올라 온 상나라 유민을 만났다. 또 다른 하후씨 (夏后氏)의 후손(費侯, 費伯, 費氏, 解毗氏)이 단군조선 발생지에 남아 살던 산융, 험융이라 부르던 흉노다. 그들이 중원 세력에 동화 되기도 하고 또는 계속 반항 하여 서주를 멸망 시키고, 서주의 제후국 진을 셋(三晉)으로 갈라 전국시대로 들어 갔다 . 처음 부터 해(sun, 日, 太陽)을 사음한 여러 글자의 해(解Xie, 阿, 何, 解毗, 解批, 蓋, 盖,契) 성씨가 특히 산서성 평양(平陽)에 많이 살았었다 .
끝
December 5,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